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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충청'에 기고한 글.
국회에서 전기톱이 돌아가고 빠루질이 난무해도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여전히 굳건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정부 여당의 비민주적 행태에 대해 예전 같으면 여론의 추상같은 응징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럴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럴까? 곰곰이 고민을 해 보지만 떠오르는 답은 하나 밖에 없다. 바로 ‘나쁜 남자 신드롬!’
‘나쁜 남자’란 무엇인가? ‘나쁜 남자’는 배우 조재현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영화 ‘나쁜 남자’에서 따온 말로 조재현은 그 영화에서 사창가 기둥서방으로 등장했었다. 그는 길에서 한 여자를 사기적 캐스팅으로 사창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여자는 그런 그를 미워했지만 결국 다시 그에게 돌아와 그와 함께 1톤 트럭에 매트리스를 실고 한적한 곳을 떠돌아다니며 매춘을 계속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왜 그 여자는 그 놈을 미워하면서도 다시 돌아온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나쁜 남자’에 대한 좀 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지난 여름,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여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지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3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를 ‘어둠의 3요소’라 이름을 붙였다.
3요소는 ‘자아도취, 무관심, 사기성’이라 한다. 설명을 더 붙이자면 완전 자뻑인 왕자병에 걸린 놈이 있어 이놈은 주변의 상황에 대해 무관심 듯 보이지만 사실은 주도면밀하게 대상을 탐색하고 있었으며 특유의 구라를 동원해 여자를 꼬시기에 이른다. 꼬드김에 넘어간 여자는 그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사기적 매력에 현혹되어 이놈이 그래도 뭔가 한 방이 있다고 믿으며 그 남자에 관한 잠재능력의 허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쁜 놈이긴 하지만 언젠가 그 잠재능력이 폭발하게 되면 좋은 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쌓여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어느 상담심리학자의 설명이다.
이제 ‘MB와 그 아이들’에 대한 지지율과 ‘나쁜 남자’의 관계로 넘어와 보자. MB는 앞서 말한 ‘어둠의 3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이는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과 국정운영과정에서 보여준 행태를 상기해 보면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기에다가 가난하지만 의기 넘치는 대학생, 현대건설 사상, 서울시장 등의 캐리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공신화’의 절대적 존재로 각인되었다. 바로 지점에서 그의 ‘절대 군주적 카리스마’가 리더십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 경제상황의 악화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추가되면서 사람들은 그와 그 똘마니들을 미워하면서도 지지율을 지탱해 주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며칠 전, 언론에 보도된 하버드 대학에서 진행한 실험결과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하버드 대학의 한 교수는 한 남자를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전기의자에 앉혀 놓고 150여 명의 질문자들의 질의에 답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교수는 의자위의 남자가 질문자들의 질문에 정답을 말하지 못할 때마다 전압을 올리도록 명령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 결과 70%의 질문자들은 의자위의 남자가 고압의 전류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서도 교수의 명령에 순응해 최대 1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고 한다. 이 실험의 목적은 절대권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어도 실험실 안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교수의 말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복종을 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한국의 정치현실에 적용하면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지 않은 경제상황을 이유로 그래도 믿을 건 정부와 여당 밖에 없다는 심리적 현상이 정부의 ‘절대 군주적 폭압’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MB정부 하의 행정 관료들 역시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통령이라는 절대 권력에 복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이미 10년 전, IMF 사태를 경험하면서 일정 정도의 학습과정을 거쳤다고 보아진다. 그 때, 아무리 비정규직 철폐, 구조조정 중단을 외치고 길바닥의 노동자들이 방패에 전투화에 머리가 찢겨 나가도 결국 경제상황을 되돌린 건 어떤 요구와 울부짖음에도 굴하지 않는 대통령이 있었다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사회는 ‘촛불’을 뛰어 넘어 점점 더 보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가정들이 구체적으로 실증되지는 않았지만, 한나라당에 대한 높은 지지율이 실제로 이런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면 섬뜩하고 무서운 현실이 된다.
반면, 진보진영은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모든 요소를 갖춘 MB와는 달리 진보진영이 가진 것은 ‘자아도취’ 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인기가 없다. ‘사기꾼’이 되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종의 ‘신비주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적어도 사람들로 하여금 ‘저 놈들 뭔가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지금의 ‘지리멸렬’한 진보진영이 시급하게 갖추어야 할 요소인 것 같다.
- 지난 달 말에 선배의 부탁으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특강했던 내용.
- 작년 이맘 때 쯤 시민단체에 가서 발제했던 내용을 상황에 맞게 수정/보완.
- 완성된 글로 써야 한다는 압박은 밀려 옴에도 여전히......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진보진영의 전망
Ⅰ. 개념정의
1. 주체의 측면
○ 진보, 개혁, 보수
○ 전통적 의미에서 좌파 : 전통 Marxist
○ 후기산업사회(Post-Industrialism)의 등장 : 신좌파의 형성
2. 담론의 측면
○ 진보 : K. Marx의 ‘계급사회’에 대한 인정
○ 개혁 :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적/자유주의적 개혁
○ 보수 : 시장중심주의, 규제완화, 국가.
○ 신좌파 : 맑스주의, 생태/환경, 여성, 인권, 평등, 평화 등 탈물질주의
[표]이념과 요소2)
구 분 |
요 소 |
자유주의 |
개인주의, 자유, 이성, 평등, 관용, 동의, 입헌정치 |
보수주의 |
전통(Tradition), 실용주의(Pragmatism), 인간의 불완전성, 유기체(Organicism), 위계조직(Hierarchy), 권위(Authority), 재산 |
사회주의 |
공동체(Community), 형제애(Fraternity), 사회적 평등(Social equality), 필요(Need), 사회계급(Social class), 공동소유(Common ownership), |
맑스주의 |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변증법적 변화(Dialectical change), 소외(Alienation), 계급투쟁(Class struggle), 잉여가치(Surplus value),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 공산주의(Communism) |
○자유주의
-개인주의 : 집단에 대한 거부
-자유 : 평등, 정의, 권위에 우선. 법 아래 자유,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기제
-평등 :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회적 불평등 인정/‘기회의 평등’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실적주의.
-관용 : Toleration. 다원주의
-동의 : 개인의 동의. 피치자의 동의. Flowership. 대의민주주의
-입헌정치 : 제한정부(limited government). 권력분산
○보수주의
-전통 : 축적된 지혜. 검증된 제도. 안정감
-실용주의 : 인간이성의 한계 존재. 마음자세(attitude of mind). 생활에 대한 접근방법(approch to life).
-인간의 불완전성 : 제한적 의존적 안전추구. 도덕적 타락⇒강력한 국가, 엄격한 법의 강화, 엄정한 벌
-유기체 : 가족, 지역공동체, 민족으로 이루어진 유기체. 공유된 가치. 공통의 문화
-위계조직 :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등급 인정
-권위 : 지식, 경험 혹은 교육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지도, 지원. 사회적 응집력의 근원.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책임확인
-재산(권) : 재산권. 인격의 외면화. 권리이자 의무.
○사회주의
-공동체 : 사회적 관계 중시
-형제애 : 유적 인간. 협동의 필요
-사회적 평등 : 사회적 평등, 결과적 평등. 법적 정치적 권리의 토대
-필요 : 능력에 따라 필요에 따라. 도덕적 유인에 의한 동기화
-공동소유 : 과거 논쟁이 지점
○맑스주의
-역사적 유물론 : 상부구조, 토대의 개념. 역사적 관계
-변증법적 변화 : 헤겔의 변증법 - 정, 반, 합
-소외 : 노동의 탈인격화, 현대적 해석 필요
-계급투쟁 : 사적소유, 생산수단의 소유 양식
-잉여가치 : 착취의 관계. “가치는 상품생산을 위해 사용된 노동에서 발생”
-프롤레타리아 혁명 : 생산수단의 통제를 장악하는 자발적 봉기
-공산주의 : 과도기적 ‘사회주의’ 단계 후에 나타남. 잉여를 위한 생산이 아닌 사용을 위한 생산.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은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체조건이다.”
Ⅱ.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진보위기론
1. 이명박 정권 등장의 배경
○ 87년 민주화 이후 2번의 보수정권(노태우, 김영삼)과 2번의 개혁정권(김대중, 노무현) : 단순한 역사적 사실, 유권자들의 의식적 선택으로 규정하기 어려움.
○ 보수세력의 10년에 걸친 정권창출 실패 : 보수의 결집효과
○ IMF 이후 심각한 양극화(빈익빈 부익부), 비정규직 양산 : 사회의 민주화 진전에 비해 그 혜택이 경제영역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
○ 이명박 정권의 성격 : ‘문민개발독재’
2. ‘진보위기론’의 원인과 현상
○ 위기3)론의 원인
- 세계질서변환에서 오는 구조의 문제 : 세계화, 신자유주의.
- 혹은 권력주체의 문제
○ 노무현 정권의 실패 ≠ 진보의 실패
-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한계 : 좌파 신자유주의, 구조적 현실.
○ 민주노동당의 실험
- 절반의 실패 : 진영내 정치대표체로서의 취약한 위상
- 18대 대선 후 분당 : 17대 10석에서 5석으로 축소
○ 신자유주의 대안체제에 대한 고민의 부족
- 저항력으로서 존재, 대안세력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음.
3. 진보진영의 상황
○ 단일한 대중투쟁 전선체 구축 노력
- 민중연대, 진보연대 : 상층중심 연대의 한계
-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단일체 구성 시도
○ 노동조합운동의 정체
- 비정규직 문제
-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확보
-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정체 :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유지 논란
○ 정치다원성 형성
- 진보신당의 등장
- 창조한국당 등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정체성 확보 노력
- 시민운동세력의 독자성 확대
- 탈물질주의세력의 등장
Ⅲ. 진보진영의 재구성
1. 현실인식
○ ‘87년체제’가 남긴 것
- 형식적 민주주의 : 대통령선출직선제, 지방자치제
- 내용적 민주주의 : 시민사회운동의 세력화, 정치적 다양화
- 여전한 성장담론의 헤게모니 장악 : 경제성장 = 민주주의의 확대
- 지역구도의 지속
- Red Complex의 완화 혹은 유보
○ ‘Post-87년체제’에 대한 고민
- 헌법 개정, 행정체계 개편 논의
- 심화되는 부익부빈익빈에 대한 대책 : 경제민주화
- 민주화는 완성되었는가에 대한 전반적 평가 필요
2. 진보진영 전망
○ ‘87년체제’ = ‘질곡의 20년’
- 정치 차원 : 후보단일화 논쟁, 비판적 지지
- 경제 차원 : ‘무능한 386’, 빈익빈 부익부의 확대
- 87년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의제설정과 행동
○ 진보의제 설정
- 한국의 후기산업사회적 특징들에 대한 검토
- 개발과 성장논리에 대한 대응 : 대운하, 시장개방(한미FTA, 의료보험민영화 등)
- 지방과 수도권의 비대칭 발전
○최근의 논의
- 민생
- 녹색정치 : 시민사회, 진보신당
- 유럽의 상황 : 녹색당의 정체/후퇴. 기존 사민당의 적극적인 정책개입
⇒ 현장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보수 Vs. 진보 ⇒ 진보 Vs. 진보
- 양분법에서 벗어나 다원화를 인정해야 한다.
- 정치적 자기정체성 확인 : 한나라 vs. 자유선진당
- 통칭 되는 진보 역시 자기 정체성 확인을 통한 다원화가 필요하다.
남한 헌정사상 최초의 합법 사민주의 정당을 결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이른바 법살에 문제가 있었음을 정부기관에서
공식 확인했다고 한다.
50년만의 일이라는 말도 전한다.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들에서
하나의 상처에 겨우 딱정이가 앉았다고 할 수 있겠다.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않아
이것이다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우나 예전에
그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둔 바 있어 올려 본다.
Ⅰ. 유연기와 3.1운동
조봉암은 1899년 9월 25일 강화도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고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강화도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는 그저 장난치기 좋아하고 세상일에 큰 관심이 없는 평범하게 자라왔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의 결과 서대문형문소에서 옥고를 치를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놈이 우리 조선 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유년기의 조봉암은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머리는 명석했었다. 그는 4년제 소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만을 마치고 직업을 찾았고 18세 되던 해에 강화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일을 했다. 당시 그는 주산이 빨라 남들보다 10배는 빨리 일을 했다고 한다.
3.1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1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출옥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YMCA 중학부에서 공부를 할 요량이었으나 일 욕심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공부에 마음을 둘 수 없었다. 이때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나 평안남도에서 체포가 되었는데 YMCA를 중심으로 거사가 준비 중이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평양에서 옥고를 치른 조봉암은 민족감정이 더욱 강해졌다고 해고한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들에 가지만 그곳에서도 정규 수업보다 도서관에서 책읽기에 몰두하고 이 시기에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논의되고 있었고 그도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되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몇몇 친분이 있는 자들과 함께 ‘흑도회’를 만들었으나 이내 볼셰비키즘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일본에서 3년을 보내고 1922년 8월 서울로 돌아와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Ⅱ. 해방, 공산당과의 결별
서울로 돌아온 조봉암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연합대회 준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2개월도 못돼 소련의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리는 코민테른 연합대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 대회에는 조선에서의 공산당 운동을 주도하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함께 참석했고 그는 국내파의 대표로 참석을 했다. 그러나 두 개의 해외파간의 갈등으로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에서 탈퇴를 하게 되고 조봉암 등은 “우리는 연합대회가 되지 못하고 어느 일파의 대회로만 진행되는 까닭에 더 이상 참석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대회장을 나왔고 그 경과를 코민테른에 전보로 알렸다. 이후 부하린의 중재로 1922년 12월 각 조직을 해산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르뷰로(Korburo)가 코민테른 극동지부안에 발족했으나 그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이른바 카우트브(KUTV-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수업이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달하지 못했고 건강도 좋지 않아 1923년 귀국해서 국제공산청년동맹 국내 대표로 일을 하면서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준비하고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한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이념적 조직체인 화요회를 결성했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을 발족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1928년까지 4차례의 창당대회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축소되었고 1930년 중국공산당에 편입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1926년 일제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청년동맹이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해서 지하활동을 했지만 1931년 6월에 프랑스공원에서 잡혀 신의주에서 7년형을 살고 1941년에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몰린 일제의 예비검속에 의해 1945년 1월 다시 체포되어 8월 15일 해방을 맞아서야 출옥하게 되었다. 그는 출옥직후 인천으로 향해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이를 건국준비회 인천지부로 전환했으며 이와 함께 노동운동, 공산단 재건운동에 몰입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되면서 민전의장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박헌영 등의 공산당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1946년 7월에 민전의장 사퇴와 함께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천에서 내가 민전의장일 뿐 아니라 공산당 등 모든 좌익운동의 지도자로 지내는 중에도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등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처사도 있었지만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신탁통치 반대회의를 열어놓고 소련 정부의 지시라 해서 신탁통치 찬성 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연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였습니다. ...... 내 나라도 잊어버리고 내 민족도 생각지 않고 지시대로만 하는 것은 옳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공산당과의 결별후 조봉암은 여운형,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게 되지만 1946년 12월 미군정청이 출범시킨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좌, 극우 배척운동을 펼치면서 사회민주주의로의 사상전환도 이루어지게 된다. 이 시기 중간정당을 창당이라는 정치적 행보를 지속하게 되고 이른바 ‘비미비소의 민족자주 노선’을 택해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정부를 세워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총선거에 인천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승만의 제의로 농림부 장관을 맞았고 이때 양곡매입법, 농지개혁법, 농업협동조합법을 제출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된 그는 국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두 차례에 걸친 정치파동이 발생했고 1954년 2차 정치파동 이후 국회 내 호헌동지회와 함께 통일 야당을 만들기로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서상일 등과 함께 1955년 12월 22일 진보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때 그는 대통령선거 후보로 두 번째 입후보했다.
Ⅲ. 조봉암과 진보당
1956년 3월 31일에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대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서상일은 부통령 후보로 선출이 되었으나 서상일은 불만을 품고 부통령 수락연락연설을 거절하면서 조봉암 계열과 서상일 계열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편 조봉암은 이승만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 후보간 양자 회담이 있었지만 결렬되게 된다. 그러나 이시기 조봉암은 이미 자유당의 부정선거 등을 대비해 후보를 사퇴할 것을 결심하고 그 시기에 대한 고민만을 남겨 놓았으나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호남으로 가던 열차에서 뇌출혈로 급사하게 되어 조봉암이 유일한 야당후보가 된 것이다. 5월 15일 선거가 치러졌고 여러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총 투표수의 23.9%인 216만 3천여 표를 얻었다.
이러한 선거결과의 여세를 몰아 진보당 창당을 서둘렀고 ‘민주 혁신 운동’이라는 깃발 아래 혁신 세력의 단결을 추구했다. 그러나 혁신계 인사들 사이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가 다시 드러났으며 거기에 더해 정부 여당의 공작으로 내분이 벌어졌다. 따라서 조봉암 계열은 1956년 11월 10일에 서울에서 전국 대의원대회를 열고 그를 위원장으로 하고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 등을 부위원장으로 해서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 대회는 당 선언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모두 평화 통일을 강조했다. 선언문은 “경제 문화 방위 등 제 부문에 걸친 건설을 촉진 수행하여 우리의 민주적인 주체적 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이라함으로써 민주적 국토 통일을 평화적으로 실현” 할 것임을 표명했고, 강령은 “유엔 및 미국을 비롯한 민주 우방과의 긴밀한 협조 아래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밝혔다.
그러나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검거가 되었고 2월에는 진보당이 등록 취소가 된다. 7월 2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이 선고 되었으나 10월 4일 항소심과 1959년 2월 27일 상고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되어 61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Ⅳ. 리더쉽평가
조봉암은 여운형, 박헌영, 김구 등과 함께 정권쟁탈전에서 실패한 공통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정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선거에 입후보까지 해 상당한 지지를 획득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극단을 추구하기보다 통합적 조직력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운형, 김구 등도 중간적 성향을 가지긴 했으나 조봉암은 구체적인 정치지도체로서의 정당활동에 중심을 두었고 계속해서 조직을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3.1운동 이후 일본에서의 흑도회 결성을 비롯해 서울로 돌아온 후 청년우원회, 노농총연맹, 조선공산당 등의 조직에 항상 간여했고 해방이후에도 민전을 결성하는 등 자신의 현실적 조직력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개인성에 있어서도 주변으로부터 후한 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목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죽산은 불굴의 애국애족정신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신념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은 불퇴전의 기개로써 즉각 행동에 옳기고, 그칠 줄 모르는 실천에 의해 그 실현에 힘썼다........ 특히 진보적 정치운동에 참여한 정치가로서의 위대성이 있었다. 이것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죽산의 정치가로서의 자질은 두드러진 것이었으며, 그를 다른 정치가와 크게 구별할 특징을 이룬 귀중한 자질이었다.”
그리고 부통형 후보로 나섰던 박기출은 이렇게도 평가를 한다.
“...... 그 성격 가운데 씻을 수 없는 혁명가적인 기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대우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혁명가다운 대범성을 청산 못하고 있었다. 이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치적인 바탕에서 우왕좌왕하는 자들까지도 신념과 생명을 걸고 같이 싸우던 참된 맹우와 같이 취급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 말하자면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고 따라서 대인관계에 세밀한 관찰과 주의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정태영, 오유석, 권대복(1999) 『죽산 조봉암 전집』제1, 3, 4, 6권, 세명서관
정태영(2006), 『조봉암과 진보당』, 후마니타스
권태복(1985), 『진보당』, 지양사
이영석(1983), 『죽산 조봉암』, 원음출판사
서중석(1999), 『조봉암과 1950년대〈상〉』, 역사비평사
박태균(1995), 『조봉암 연구』, 창작과비평사
노회찬 후보에 대한 공격들 중 과거 꼬마민주당 경력을 문제삼는 글을 보았다.
정확히는 '통합민주당'이었는데 공격자들은 이를 줄여 '민주당'이라고 표현한다.
마치 2002년 '새천년민주당'을 떠올리려 하듯이....
그런데,
NL쪽 사람들 치고 87년 대선부터 지난 02'대선, 04'총선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심지어 97년 대선때는 국민승리21에서 함께 선거운동 하던 사람들 중에
김선생 당선이 확정되자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부르스를 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은 후에 민주당으로 열린우리당으로 갔고
일부는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2002년 대선 이후 혹은 2004년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사람들도 있다.
이 놈의 비지론은 생명력도 질겨서
2002년 대선때까지도 당원의 자격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비지론을 까발리고 다니던 사람도 있었다.
조직적 결정에 의해 대표자격으로 참여했던 사람과
끊임없이 비지론을 설파하며 진보정치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던 부류들의
후안무치한 행위.
심판을 받아야 할 쪽이 어느 쪽일지.
지들 꼬라지는 알고, 족보라도 알고 설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민주노동당 경선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당게에 난리가 났다.
이번 선거는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난데 없이 '진보정치' 정보공개 내용이 등장하면서
선거판이 참 거시기해져 버렸다.
마침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차인데,
내친김에 확 결정을 해 버릴까하는 마음이 불쑥들었지만
25일까지만 참고, 돌아가는 모양새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거꼴이 아주 우습게 될 것 같다.
당원들은 모이지 않고,
당게는 아사리판이고,
이렇게 선거가 계속진행되다가는 혼탁, 과열양상에 100% 조직선거로 끝날 것 같다.
그렇게 될 경우 우승트로피의 주인은 이미 결정된 것이라 봐야하나?
오늘 시당주체로 각 선본의 지역책임자들을 불러 토론회를 했다.
가라 앉아 있는 지역 선거분위기를 띄워 보자는 취지로
시당 부위원장이 제안을 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완전 흥행 실패.......
참석자는 선본 관계자들, 시당 간부들 다~ 합쳐서 10명 내외였다.
각 선본에서도 조직을 전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자기 후보 지지자모임에는 100명 모였다고 자랑하더니만
오늘 같은 날에는 왜 한 명도 조직하지 않은 걸까
이미 판정리 끝났다는 생각에서일까
시당에서 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일까
선거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
이제는 필요없어진 듯 하다.
지금까지 선거를 치를 때마다 많은 공약을 준비하고 발표도 했지만 공약자료집을 발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소 부족한 면이 있기도 하고 좀 더 잘 할 수도 있었는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대전시 전반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 봤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공약을 잘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잘 다가가지 않고 전달자를 통해 효과적인 선전이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지난 총선의 '탄핵정국'이나 이번 지방선거의 '박근혜 칼침 맞은 사건'과 같은 부차적 요소가 등장할 경우 더욱 그러하다. 아무튼 처음으로 130여개에 달하는 세부공약과 이에 대한 137페이지에 달하는 공약자료집을 냈다는 것 자체에 의미는 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공약에 대한 평가에서도 김종철 후보의 공약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 위안으로 삼는다. 아래는 5.31 지방선거에서 처음 대전시장 후보 공약자료집 정책기조 설명으로 썻던 글이다.
○ 정책슬로건 : “평등”하면 “행복”해 집니다.
○ 정책 구성의 원칙
1. 급진성 - 자본주의와 보수주의 굴레를 넘어 노동자 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정책
2. 완결성 - 개별 공약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연계성을 확보하는 정책
3. 구체성 - 추상적 구호를 넘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시대를 앞서가고 노동자 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는 급진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개별 공약간 연계성이 확보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진보를 전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공약의 구체성을 가질 때 인민들은 당을 신뢰하고 당과 함께 행동할 수 있습니다.
‘부유세’ 신설을 통한 ‘무상교육, 무상교육’을 주장했을 때 모두들 믿지 않고 선거용 구호일 것이라 했지만 구체적 경로를 밝히고 실제로 국회 입법을 통해 하나씩 실현해 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인민들은 민주노동당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민들은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국가차원에서 가능한 것이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가능합니까?”라고 말이죠. 이제 모두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를 실현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구체적인 실현경로를 밝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고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우리의 주장이 옮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모두가 민주노동당을 믿을 수 있는 정당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과 함께 보수기득권이 점령하고 있는 지방정치를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Karl Marx는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를 발표하고 사회변혁을 위한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지방을 바꾸어낼 생활주변으로부터의 변혁을 이끌어 낼 ‘선언’을 발표해야 합니다. 오늘의 공약자료집은 아주 빈약한 수준이지만 그 출발점을 만든 것이라 확신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당원동지들이 지혜를 모아 더 좋은 공약을 만들고 더 급진적이고 더 구체적이고 더 완결된 변혁의 전망을 밝혀갑시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흉내내고 싶어하는 신참 운동가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권하고 싶다. ...... 그리고 크고 빛나는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그마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 모두를 편하게 한다."
- 김동호, {A.F.코스틴 외. [러시아 당 건설의 역사]. 강경철 옮김(일빛, 1990). p.271}
80년대 후반부터 90년초반까지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바라보며, 그리고 사노맹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하며 김동호라는 노동운동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당내외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바라 보며 이 글을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된다.
- 2004년에 term paper로 제출했던 영국노동당의 성격변화에 관한 글 중에서 정당의 분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부분입니다. 정치학에서 논의되는 정당제도에 관한 모든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 특히 요즘 처럼, 당내에서 '계급정당'이냐 '대중정당'이냐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 참고가 되시라고 올려 봅니다.
- 현재 보이는 내용은 서론에 해당하고, 글 말미에 붙어 있는 '계속보기'에 결론 부분을 올려 놓았습니다.
영국 정당제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사르토리의 정당체계를 정리해 본다. 사르토리는 정당의 분류기준으로 일곱가지 즉, ①정당의 수 ②각 정당이 상대적 규모 ③정당간 이데올리기의 거리 ④정당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에의 감정이입도 ⑤운동의 방향 - 구심적, 원심적 경합 방법 ⑥정당이나 하위 그룹의 자율도 ⑦정권 교대축의 수와 위치 등을 들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1)단독정권형 정당제 2)연립정권형 정당제로 나누고 이는 다시 3)선거와 의회 수준에서 정당간 경합 기준 4)권력수준 기준에 의해 나눌 수 있다(이극찬, 1996).
단독정권형 정당제 |
연립정권형 정당제 |
①일당제 - 전체주의 일당제 : 이데올로기 지향, 하위그룹의 자율성 파괴 - 권위주의 일당제 : 배타적, 선택적 하위그룹 억압 - 실용주의 일당제 : 이데올로기 응집성 낮음, 다원적, 하위그룹 자율성 개발 ②헤게모니 정당제 : 지배정당하의 1차적 정당, 위성정당화 - 이데올로기 지향적 헤게모니 정당 : 이데올로기 수준 높음, 정보수집 능력 향상 - 프레그머티즘적 헤게모니 정당 : 이데올로기 수준 낮음 ③일당우위정당제 - 복수정당 사이 하나의 정당이 압도적 힘을 갖음 ④양당제 : 2개 정당 경합, 그 중 한 정당이 단독 정부 구성, 제3당 존재 하나 미약 |
① 한정적 다당제 : 온건 다당제, 정당수 3~5, 연립정권형성, 강한 반체제정당 없이 모든 정당이 정권지향적 ※특징 : -정당간의 이데올로기의 거리가 크지 않다. -연합형성축이 양극화 -정당사이 경합의 방향이 구심적 ② 극단적 다당제 : 분극형 다당제 정당수 6~8 ※특징 : -정당간 이데올로기 거리가 크고, 강력한 반체제 정당 존재 -정당의 파편화가 심해 두 개 이상의 배타적 야당이 여권에 도전(정권교대축이 삼극 이상) -이데올로기 분극화가 심하며, 배타적 이데올로기의 지향성이 강한 정당 사이에서 다극적 경합 전개 -중간 위치 정당 다수 존재, 운동의 방향이 원심적 -정권교체 빈발, 수권 기회 편중, 중도세력 우세 -과도공약 정치주의 전락위험 존재 ③ 원자화정당제 : 군소정당 난립 양상, 전후 나타나는 특징 |
선거와 의회 수준에서 정당간 경합 기준 |
권력수준 기준 |
①비경합적 정당제 : 일당제, 헤게모니 정당제 ②경합적 정당제 : 일당우위 정당제 양당제 한정적 다당제 극단적 다당제 원자화 정당제 |
①단독정권형 : 일당제, 헤게모니정당제, 일당위위 정당제, 양당제 ②연립정권형 : 한정적 혹은 극단적 다당제, 원자 화 정당제 |
[표 1]사르토리의 정당체계 정리
사르토리의 분류에 의하면 영국의 정당제는 ‘단독정권형 양당제’로 분류된다. 양당제가 고착화 할 수 있는 주요 원인으로 단순다수대표제에 의한 선거제도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해 사르토리(사르토리, 1976)와 뒤베르제(뒤베르제, 1966)는 영국과 같은 정당체제가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경우 제3당이 급격히 출현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뒤베르제는 한 국가가 정당의 수와 관련되는 어떤 정당제를 채택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요인, 역사적․문화적 요인, 기술적 요인(선거제도) 등 세 가지로 들고 있다. 또한, 정당의 구조와 관련해 간부정당과 대중정당으로 구분을 한다. 그에 따르면, 영국의 보수당은 간부정당으로 노동당은 대중정당으로 분류를 한다. 그런데, 노동당의 경우 노동조합, 공제조합, 협동조합 및 기타 유사단체 등의 다른 조직을 매개로 시민들이 간접가입하는 ‘간접가입’ 정당의 성격도 가진다고 보고 있다(뒤베르제 1966: p.134).
뒤베르제의 논지가 50년대 초 대중 정당의 장점에 대한 찬미로 해석될 수 있다면, 15년 후의 키르크하이머의 중도통합정당론(Otto Krchheimer, 1966)은 뒤베르제의 주제에 대한 반론이다(최한수, 1993). 즉, 그는 유럽 정당들의 전후 경향에 대한 전통적인 형태분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정당의 형태가 새로운 형태를 점차 한 점(중도)으로 모아지는 것을 보았고, 이를 중도통합인민정당(catch-all people's party), 줄여서 중도통합정당이라고 불렀다1). 한점으로의 집합은 대중정당과 간부정당의 두 방향으로부터인데(간부 정당으로부터는 영국의 보수당, 프랑스의 드골 당, 독일의 기독교민주당이 생겨나게 되었고, 대중 정당으로부터는 영국의 노동당이나 독일의 사회민주당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열망이다. 그는 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중도통합대중정당의 통합 잠재력은 가시적인 최종결과가 선거에서 최대한의유권자를 끌어 모으는 요인들의 결합에 달려 있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중도통합정당은 보편적으로 요구되고, 고도로 표준화된 대량소비상품의 시장에서 주요상표와 같은 유사한 역할을 정치영역에서 충족시키는 친숙한 대상으로서 수백만의 유권자 마음에 파고들어야 했다. 정당 지도자는...... 노선의 특수성이 무엇이었든 간에 일단 지도자로 선출되면 그의 행위를 표준요구 사항에 즉시 맞추어야 한다.(Otto Kirchheimer, op. cit. p.192.)
즉, 중도 통합정당은 어떻게 선거에서 이기느냐에 관한 문제해결의 묘안을 생각한 그것이 ‘새 catch all,' 즉 사회집단의 최대다수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크하이머의 중도통합정당은 선거 후에는 매우 이질적이어서 전체 사회의 스펙트럼을 대표하더라도 원래의 보존된 계급과의 유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즉, 그에게 있어 대중정당은 계급과 종교적인 ‘통합’정당들(정의상으로 대중정당)이 미국 정당에 점점 유사해져 가는 선거기관으로 전환하고 있는, 조직발전에 있어 이미 지나 갔거나 또는 지나고 있는 하나의 단계이다. 결국 키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대중정당이 중도통합정당으로 변형된 것은 느슨해지고 약화되었으나, 보존된 옛 계급과의 유대이며 아울러 다른 사회집단에 대하여 문호를 연 것이다(Angelo Panebianco, 1982). 그러나 그는 중도통합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상황에 대한 현상과 장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의 분석을 끝맺고 있다.
오늘날 서구 산업사회에서 정당의 역할은 공식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보다 더 한정되어 있다. 정당은 그의 통치적 역할을 통하여 기능적인 권력 집단들간의 조정자와 중재자로 기능한다. 또 정당은 선거에서의 역할을 통하여 대중들이 공식적인 정치제도들에 대하여 요구하는 제한된 양의 대중 참여와 통합을 산출한다.
중도통합정당이 국민 전체에게 제공하는 이런 제한된 참여, 즉 공식적으로 인가된 통로를 통한 정치 과정에 합리적이고 냉정한 참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제한저 참여가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중도통합정당이라는 도구는 그것의 명목상의 주인인 개별유권자보다 더 합리적일 수는 없다. 통합에 관한 정당의 기강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혹은 미국에서 이러한 규율에 결코 종속되지 않는 것과 같이-유권자들은 그들의 기분전환과 무관심에 의하여, 중도통합정당이라는 민감한 도구를 너무 무뎌서 사회의 기능적 권력 소유자들과 연결시킬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비록 불가피하다고 해도-우리가 이미 서구 문명의 과거의 단계에서 다른 특성들의 소멸을 아쉬워하였던 것과 같이 계급적 대중정당과 종파적 정당의 소멸에 아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Otto Kirchheimer, op. cit. p.200.)
노동당으로서는 사회구조적 변화와 위기에 따른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기제의 도입과 시장에 대한 일정 정도의 신뢰가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양립하기 어려운 두 아젠다,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평등 중 선택은 정당에 있다. 이러한 선택은 노동당의 전환이 사회구조적 변화에 적응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국 노동당이 택한 경제적 효율성, 즉 시장에의 사민주의적 전통의 폐기와 다르지 않다.
‘선거적 변화→정책전환’이라는 인과론에서는 영국 노동당의 내부동학 분석은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선거패배에서 사민주의적 전통과의 단절까지 영국 노동당은 3단계의 당내변화를 거쳤다. 1979년 선거 패배로부터 1997년 집권까지 당내 분영, 쇄신, 현대화라는 당내 동학이 정책전환을 가져왔다. 노동당의 전환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위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당 외적 위기가 노동당의 정책전환을 야기한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다. 1979년 선거 이후 진행된 당내 동학의 변화가 직접적 쇄신의 원인이었다. 선거책임론을 둘러싼 당내 분열은 당내 갈등구조를 변화시켰고 그것은 노동당 우경화의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1980년대 초 제도화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예외적인 좌경화는 일시적이었으며 이는 오히려 온건좌파들에게 활로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정책검토 이후 노동당의 정책전환은 연속적이며 점증적인 과정을 거쳐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79년 선거이후 당내 투쟁, 쇄신과 현대화과정은 1990년대 이후 영국 노동당의 좌표 설정에 유의미한 지표가 된다.(박경미, 2004)
그리고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한 원인이 노동조합 중심의 당이었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야 한다. 계급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노동당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체계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실질임금을 삭감하고, 실업자를 대규모로 발생시켰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창당 당시부터 계급의 철폐는 노동당의 큰 관심사가 되지 못했지만, 선거강령을 마련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노동자와 자본가사이의 계급투쟁은 국가권력을 어느 당이 잡는가라는 권력투쟁으로 변질되었고, 더욱이 이 권력투쟁은 득표공작이라는 차원으로 구체화 되면서, 계급의 철폐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다.(김수행, 2004)
이러한 견해에 대해 최형익(2001)은 향후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본적 계기를 한편으로는 정치세력화의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일반적 대중수준에서의 달라진 계급주체형성의 내용을 점검하는 일이라고 본다1). 그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정치세력화의 하드웨어, 즉 노조와 정당간의 관계는 물론 노동자 계급이 지향해야 할 정치활동의 내용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모델들과는 다른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노동자주의’를 뛰어넘는 이른바 ‘연대의 정치’를 위한 새로운 모색을 필요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Fisk, 1996-최형익, 2001에서 재인용)
결과적으로 영국노동당의 변화요인은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외부적으로는 전통적 맑스주의자들로부터 계량주의라 불리는 사민주의조차 변화되기를 요구받는 신자유주의의 급속한 팽창과 EU가입이라는 동인이 작용했다. 영국은 유럽국가이면서도 대륙과의 관계에서 상당부분 독자적인 경제체제와 문화, 정치환경을 유지해 왔지만, 1980년대 이후 급속히 팽창하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고, EU가입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 했다. 반면, 내적요인으로는 당내 좌-우 대립과 노동조합과의 관계 재설정의 문제이다. 창당초기부터 원내정당과 원외정당간의 권력관계와 당내 선거제도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들과 온건주의자들간의 대립이 지속되었고 1970년대부터 18년간 정권을 잡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은 필연적으로 선거책임론을 불러 일으켰고, 당내 권력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온건주의자들의 공격과 당내 권력구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온건주의자들의 우위는, 노동조합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당내선거제도와 정책결정과정에서 노동조합과 효과적으로 거리두기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노동당의 정당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당 이미지를 완전히 쇄신해 실리정당(pragmatic party) 혹은 포괄정당(catch-all party)으로 변신하게 되었다(윤용희, 2002:p.252).
House of Commons: 7 june 2001 (59.4 %) |
% |
659 | |
Labour Party |
Lab |
40.7 |
413 |
Conservative Party |
Cons |
31.7 |
166 |
Liberal Democrats |
LibDem |
18.3 |
52 |
Scottish National Party |
SNP |
1.8 |
5 |
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
UKIP |
1.5 |
- |
Ulster Unionist Party |
UUP |
0.8 |
6 |
Plaid Cymru/Party of Wales |
PC |
0.7 |
4 |
Democratic Unionist Party |
DUP |
0.7 |
5 |
Sinn Fein |
SF |
0.7 |
4 |
Social Democratic and Labour Party |
SDLP |
0.6 |
3 |
United Kingdom Unionist Party |
UKUP |
0.1 |
- |
Source: BBC |
|
|
|
[표 3] 2001년 영국 선거결과 : 출처-http://www.electtionworld.org/unitedkingdom.htm
그리고, 2001년 선거에서 보아지듯이 자유민주당의 1997년 48석에 이은 연속한 성공은 이후 영국정당제도의 변화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비례대표제가 1997년 지방선거에서 처음도입이 되어 1999년 아일랜드와 웨일즈 그리고 EU의회선거를 위해 실시되었다. 이러한 비례대표제에 대한 경험과 전통적 보수당 우세지역으로 여겨지던 잉글랜드 남서부 지역에서 자유민주당이 약진을 한 것은 보수당에 회의를 느낀 지지자들이 노동당보다는 보수당과 색깔이 크게 차이가 없는 자민당을 지지한 결과(김영준, 2002:p.197)로 전통적 양당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도 지켜볼 대목이다. 뒤베르제의 주장처럼 사회경제적 요인, 역사․문화적 요인, 선거제도의 요인 등에 의해 이미 개별정당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면 영국의 정당제도의 변화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아진다.
- 참고자료 -
김영준, 2002, “영국총선결과 분석과 토니 블레어 노동당의 대외정책 변화”, 『유럽연구』15호, 서울, 한국유럽학회, pp.196~199
김수행, 2004,『알기쉬운 정치경제학』,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pp.257~276.
박경미, 2004, “영국노동당, 탈각된 사민주의: 1987-1992년 ‘정책검토’(Policy Review)와 정책전환”, 『한국과 국제정치』, 제20권 2호 2004년(여름) 통권 45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pp.121~147.
윤용희, 2002, “영국 노동당의 이념과 정책”, 『한국동북아논총』23권, p248, p.252.
이극찬, 1996,『정치학』, 서울, 법문사, pp.388~390.
최한수, 1993,『현대정당론』, 서울, 을유문화사, pp.174~176.
최형익, 2001, “유럽노동자 정치운동의 역사와 현실”, 『한국정치연구』10호, 서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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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연합뉴스) 정윤덕 기자 = 충청권 첫 여성 예비군 소대가 22일 충남 당진에서 창설됐다.
전업주부 등 당진지역 여성 45명으로 구성된 당진군 여성 예비군소대가 이날 당진실내체육관에서 창설식을 갖고 본격적인 지역 방위활동에 들어간 것.
여성 예비군 대원들은 앞으로 연간 6시간의 향방작계훈련(안보교육, 사격훈련 등)을 받으며 향토방위지원 임무와 유사시 응급환자 처치, 기동홍보반, 편의대 운용과 함께 재난발생시 구조지원, 환경보호활동 등 각종 사회보호활동을 맡게 된다.
이들은 향토예비군 설치법 시행령에 의거 2년 동안 의무복무를 하며 희망시에는 복무를 연장할 수 있다.
초대 소대장 문선이(47.여)씨는 "대원 대부분이 30-40대 전업주부로 그동안 경찰 포순이 봉사단으로 활동하는 등 지역봉사에 앞장선 이들"이라며 "앞으로 후방지역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 해안초소 장병위문 등 향토방위태세 강화에도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민종기 당진군수도 창설식 축사를 통해 "오늘 창설된 여성 예비군소대가 앞으로 우리 예비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강한 한국', `위대한 당진시' 건설에 전체 당진여성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좋은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현재 여자 예비군 부대는 직장예비군 소대가 창원시청 등 3개 지역에 지역예비 군 소대가 춘천시 남면 등 2개 지역에, 해병대 소속 여자예비군 부대가 백령도와 대 청도에 각각 설치돼 있다.
cob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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