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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6
철부지 과학에서 신에 대항한 복제의 시대로
이광석
어린 시절 그 누군들 인간 이상의 힘, 흔히들 말하는 초능력에 관심이 없었던 이가 있겠는가. 필자도 어김없이, 그 대상이 사람이건 돌연변이건 초인적 힘을 가진 이들을 동경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슈퍼맨을 따라 수건으로 망토를 만들어 날았고,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따라 뚜두뚜두 소리를 내며 손아귀 힘으로 강철 휘는 시늉을 했고, 헐크마냥 웃통을 벗어 옷을 찢는 연기를 실감나게 했고, 스파이더맨을 따라 방바닥을 기며 벽을 타는 양 거미줄을 뿜는 흉내를 냈다. 좀 더 커선 투명인간이 돼 매일 여탕에 들어가 야동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이번 호에선, 이처럼 인간이되 인간 이상의 힘을 가졌던 생물학적 변종 인간들을 보려한다. 혹자는 잘못된 실험의 실수나 오염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사고로 인해, 또 다른 이들은 과학의 무한한 권능에 매혹되어 초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 옛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추억의 투시인간이나 투명인간 등은, 지금처럼 아이들이 따르는 슈퍼맨식 영웅 일대기의 한 대목으로 극(劇)화하기 보단 과학 맹신의 부작용으로 그리고 실패한 과학의 사례들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능의 신과 철부지 과학
과학으로 인간의 본성을 통제할 수 있을까? 약물을 들이켜 인간 속에 존재하는 선악을 떼어놓는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영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1920)>에서 의약품 개발자였던 지킬박사는 선악을 갈라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려다 오히려 하이드란 내면의 악마에 지배당한다. 사악한 하이드가 점점 지킬박사의 의식을 통제하면서 포악해져 박사의 애인까지 죽이고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파국에 이른다. 비슷한 류의 흑백 영화들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과학이 신이 주재하는 영역에 도전해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과학의 최후는 비참했다.
<봉녀蜂女 The Wasp Woman (1959)>에선 젊어지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던 화장품회사 중년 여사장 스타린Starlin이, 회사에 고용된 연구원이 개발한 로얄젤리로 만든 주사약을 투입하면서 점점 젊어지는 효능을 본다. 그 제품을 만들어냈던 연구원이 공교롭게도 교통사고로 죽고, 게다가 스타린은 젊어지겠다는 욕심에 주사 투입량과 횟수를 차츰 늘이게 된다. 약물 과다투여로 나타난 부작용은 그녀를 흉악한 말벌인간으로 변하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다, 결국은 자신도 죽는다. 영화의 교훈은 간단하다. 과학의 힘을 빌어 세월을 거스르려는 인간 욕망은 신의 룰을 깨는 죄악이라 응당 그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영화 <4차원 인간 4D Man (1959)>은 사물을 통과하는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얘기다. 과학자 토니 넬슨Tony Nelson은 연필로 강철을 사물을 뚫는 실험에 성공한다. 실수로 연구실이 불에 타 토니는 형 스캇Scott이 있는 연구소에 둥지를 튼다. 토니는 형 애인이자 비서였던 린다Rinda와 눈이 맞는다. 그동안 스캇은 실험 중 방사선에 노출되어 동생의 기계장비에 손을 대면서 돌연 자신의 손과 몸이 물체를 통과하는 4차원 인간이 돼버린다. 처음엔 자신의 능력에 놀랍고 신기해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 읽고, 금은 보석방 쇼윈도우 창을 투과해 전시된 보석을 털기도 한다. 사악한 하이드씨처럼 점점 스캇의 외모는 흉폭하게 변해가고, 다른 인간의 에너지를 흡수하는지 그가 만진 인간들은 늙어 쪼그라져 죽임을 당한다. 불행히도 스캇은 전애인 린다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이유없이 등장해 결국 눈 위의 발자국 때문에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투명인간 The Invisible Man (1933)>의 투명인간 잭 그리핀Jack Griffin도 스캇처럼 매한가지의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인간 과학이 신의 권능에 도전하면 그 최후가 얼마나 참담할지에 대한 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엑스: 엑스레이 눈을 가진 사람 X: The Man with the X-Ray Eyes (1963)>에서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제임스 세비어James Xavier 박사는 일명 "엑스"라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제임스는 사물을 투시하는 시력을 가질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돈많은 재벌 스폰서들이 가시적인 연구 결과물을 내놓길 압박하면서, 동료 연구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비어박사는 약품 실험을 자신의 눈에다 결행한다. 처음 그는 순간 성공의 기쁨을 만끽한다. 댄스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다 벌거숭이로 보이고, 내과 의사가 내린 오진을 막아 암세포의 위치를 찾아내어 우쭐한다. 허나 약물의 강도를 늘이다보니 사물의 투시력이 점점 깊어지고, 이젠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투과해 밖의 사물이 보여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만 는다. 나중엔 그의 눈엔 사물이 기하학적 빛의 무리로 비춰진다. 영화에선 그 부작용을 '엑스 효과'라 지칭한다. 거기다가 사고로 친구를 잃고 경찰에 쫓기다 탐욕으로 똘똘 뭉친 사기꾼에 걸려들어 무허가 의료시술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도망치고, 우여곡절 끝에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한탕해 나오려다 경찰에 쫓겨 또 도망치고, 차 사고로 한적한 마을의 교회에 당도한다. 한창 예배를 보던 시골 목사의 입에선 마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듯, 빗나간 과학과 제임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신의 독설을 내뿜는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하거든 그 눈을 빼어내버리라'. 마테오 복음 18장 9절에 실린 구절이다.
미친 과학과 B급영화의 만남
흔히들 '미친 과학'mad science이라 부르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것 이상의 것을 넘보거나, 발명이나 실험을 통해서 전혀 실현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가상의 결과를 얻고자하는데 있다. 앞서 보았던 지킬박사, 봉녀, 투명인간, 4차원 인간, 투시인간은 그 미친 과학의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욕심이 과하거나 사물의 질서를 깨는 행위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미친 과학이 B급 영화와 충돌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죽지 못하는 뇌 The Brain that Wouldn't Die (1959)>는 바로 이 방면에서 유명한 B급 영화다. 빌Bill은 생명을 회생하는 방법에 집착해오던 수술 전문의다. 그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애인 잰Jan과 주말에 야외별장을 운전하던 중 과속을 하다 자동차가 가이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된다. 잰은 사고로 죽고 빌만 살아남았는지, 빌은 차 안으로부터 뭔가를 양복 웃옷에 둘둘 말아쥐고 급하게 근처 아는 이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그의 양복더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잘려나간 잰의 머리였다. 애인의 불에 탄 몸뚱이를 버리고, 사고 중 잘려나간 머리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들고 냅다 뛰었던 것이다. 빌은 잰의 머리를 그 집의 실험실에서 회생한다. 있을 수 없는 일에다 황당한 줄거리지만, B급 영화에선 언제나 가능하다. 한 이틀 정도 잰의 잘린 머리를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후, 빌은 그 시간 안에 살아있는 '착한' 몸뚱이를 구하러 스트립바와 길거리를 헤맨다. 그동안 지하 실험실 안에서 잰은 정신을 차리고 빌이 자신을 살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잰은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게 만든 애인 빌에게 애정보다는 극단의 증오심을 점점 끼운다. 게다가 잰은 재생 약품의 효과로 살아있는 생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텔레파시의 초능력까지 가진다. 급기야 그녀는 다른 방에 감금시킨 프랑켄쉬타인같은 괴물과 은밀히 대화까지 주고받는다.
신만이 행할 수 있는 창조의 역할을 넘보던 빌은, 급기야 한 누드모델을 집으로 끌어들여 신체이식을 시도하나 옆방에 감금돼있던 그 괴물에게 목을 물어뜯겨 죽음을 당한다. 잰이 있던 그 실험실엔 불이 옮겨붙고, 그녀는 죽은 빌에게 절규하며 불에 타 스러진다. "내가 경고했지, 그저 날 죽게 내버려두라구. 하하하...." 앞서 마테오 복음만큼 인간 과학에 대한 독설이 섞였다. 사고사든 자연사든 때되면 응당 죽어야할 숙명의 시간을 거부했던 빌의 미친 과학은, 잰과 보이지않은 신으로부터 그렇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다.
과학의 흑백 시대를 넘어
흑백의 정서가 그랬다. 영화속에서 과학은 종교와 신의 율법을 두려워했고, 전쟁과 살육을 위해 사용했던 과학의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에 치를 떨었다. 당시 미친 과학은 종교의 이름으로만 관리될 대상이었다. 요즘처럼 영화 속에서 생물학적 돌연변이들이 인기있는 시절과는 격세지감이다. 헐크, 수많은 엑스-맨들, 스파이더맨, 판타스틱 포 등을 상상해보라. 그들 대부분은 과학의 사생아들이지만, 정서상 윤리적이고 일반 인간들에게 영웅시된다. 파국도 없다. 더욱이 그 비정상성이 장점이자 힘이다. 신체 변이가 인간을 망치기보단 오히려 사회에 기여한다. 이제 과학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 그 큰 이유일 것이다.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일부 사기로 판명났으나, 유전학적 변종과 복제 실험에 최고의 과학자 명예를 안겨주는 시대에 과학은 신아래 머리 조아리기보단 이에 도전하는 위치로 등극했다. 결국 흑백시대에 투명인간 외外 초능력 일동들이 비극이었던 이유는 당시 유전학적 실험이 생경했고, 천진한 과학보다 신의 위치가 부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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