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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파괴의 과학에 스러진 인류, 삶의 과학으로 곳추 세우기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9

 

파괴의 과학에 스러진 인류, 삶의 과학으로 곳추 세우기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지난 호에 우리는 초기 흑백 영화들이 과학기술로 인도된 멋진 신세계의 과장된 미래 모습을 그리는데 열중했음을 보았다. 이 밑바닥에는 과학기술이 이뤄낸 생산력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자리잡고 있음도 확인했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이자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에 큰 영감을 주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초 SF영화 <앨리타: 화성의 여왕 Aelita: Queen of Mars (1924)>에서도 한 때 인류 구원의 세계로 제시됐던 사회주의 체제 혁명에 대한 열광과 당시 인간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동경이 잘 녹아있다.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라 하면, 레닌의 '신경제계획'(NEP)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박차를 가하고, 사회 진보와 생산력 아래 예술의 가치를 뒀던 소비에트 '구성주의' (constructivism)가 한참 유행하던 때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한없이 밝았고, 혁명의 이상향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고,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위대함은 이를 위한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영화 <앨리타>에 등장하는 화성인들의 건축과 그들의 의상 등에는 당시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을 칭송하고 이를 상징화하여 표현한 무대 효과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물론 <앨리타>에선 이상향의 비전 제시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노동자를 등쳐먹는 당 간부, 어리숙한 소비에트 형사들, 화성 노동자들의 반란을 자신의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엘리타 여왕의 배반 등을 통해 과거 전제군주 시대의 나쁜 습속들이 새 시대에도 근절되지 못함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허나 이들에게 인간평등의 신세계의 미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기술 진보를 통한 신세계 건설의 믿음은 그 어느 시대보다 확고했다.

 

인류 재앙과 절멸의 불길한 상상들

피비린내 나는 정적 숙청과 관료주의로 소비에트의 비전이 차차 빛바래고 미소간 군비 경쟁의 팽팽한 냉전이 찾아들면서 인류 절멸에 대한 불안감은 점점 깊어진다. 핵실험이 늘어나면서 이에 개탄하고 인류 절멸을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차차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지면을 통해 오래 전에 살펴보았던 SF 영화 속 거대 괴수들과 돌연변이들의 출현은 방사능 오염의 공포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사례들이었다. 무엇보다 구소련과 미국의 군비경쟁과 핵실험에 의한 지구 절멸의 순간은 발 게스트(Val Guest)의 영국 영화 <지구가 불타는 날 The Day that the Earth Caught Fire (1961)>에서 그 의미가 생생히 전달된다.   

        가상의 어느 60년대초, 미국의 남극 핵실험과 구소련의 시베리아 핵실험은 지국 축을 뒤흔들어 그 궤도를 태양 쪽으로 내밀리게 만든다. 이로부터 지구가 재로 될 날이 4개월 남짓 남게 된다. 이후 전세계는 이상 기후의 매서운 징후를 맛본다. 때 이른 개기 일식이 이일어나고 홍수로 범람하고 사방에 가뭄으로 땅이 메마르고 폭염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쓰러지고 해일과 폭풍우는 대도시들을 쓸어가 버린다. 런던의 템즈강은 메마르고 더위를 못이긴 사람들은 반벌거숭이로 물을 찾아 헤맨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선 반핵 시위와 핵 옹호자들의 충돌이 발생한다. 몇 개월 후에 지구가 불타버릴 것이라는 파국의 메시지는 인류를 거의 무질서의 혼돈 상태로 내몬다. 살인이 자행되고 거리는 광란으로 수습이 불가능하다. 태양에 불타 녹아버리기 30초전, 주인공 일행은 술집 바에서 스카치로 건배하며 인류의 종말을 쓸쓸히 받아들인다. 영화에선 세계가 구원받을지 아니면 끝내 사라져버릴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피한다.    

        강대국간 핵경쟁에 의한 인류 절멸의 위기와 그 비극이 하나의 예라면, 의도치않은 천재지변에 의한 인류 절멸의 순간도 존재한다. 다른 행성에서 날아온 혹성들과의 충돌로 지구가 사라진다는 내용의 조지 팔(George Pal)의 영화 <세계 충돌의 날 When Worlds Collide (1952)>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영화에서 인류 종말의 예언자들은 천문학자들로 분한다. 이들은, 스콜피오 행성의 자이라(Zyra)와 벨러스(Bellus)라는 혹성이 궤도를 벗어나 지구로 돌진 중이며, 먼저 오는 자이라는 지구를 빗겨가지만 큰 천재지변을 불러올 것이고 뒤이은 벨러스의 충돌은 지구를 종말로 이끌 것이라 관측한다.    

        이들 천문학자들은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선 '노아의 방주'와 같은 우주선을 구축해야 하며, 내부에는 가축, 동식물, 젊은 남녀 40여명을 선발하여 자이라 행성으로 이주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각국 대표들은 이들의 예언에 콧방귀를 뀌나,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일부 돈푼깨나 있는 사업가들은 우주선을 만드는데 밑천을 대는 대가로 이 신식 '노아의 방주'에 탑승 티켓을 보장받으려 한다. 첫 번째 재앙인 자이라가 빗겨가면서 뉴욕은 해일로 물바다가 되고 세계는 화산폭발과 지진으로 인해 폐허로 돌변한다. 반면 우주선 발사 준비가 완료되고 탑승자 40여명의 선발 명단이 발표되자 이에 배제된 후보자들의 무리는 총을 들어 우주선을 장악하려 한다. 최후의 재앙인 벨러스 행성이 지구에 충돌 직전까지 오고, 우주선에 탑승한 이들은 선택되지 못한 폭도들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지구를 벗어난다. <지구가 불타는 날>과 달리 이 영화는 곳곳에 인류애적 감상이 묻어난다. 어디에도 인간 무리들의 아노미 상태나 혼란은 없다. 질서정연하고, 때론 자신을 희생해 우주선에 합류하길 포기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탑승에서 배제된 무리나 돈으로 우주선 티켓을 사려던 일부 인간들도 존재하나, 모두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하고 도덕적이다. 절멸 이후의 모습도 꽤 희망적이다. 지구의 종말로부터 생존한 이들은 자이라에 무사히 도착해, 지구보다도 훨씬 나은 이상향의 무릉도원을 맞이한다. 영화는 "신세계의 첫 번째 날"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빗댄 해피엔딩의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먼저 찾아가본 우리의 미래

조지 팔(George Pal)이 제작하고, 웰스(H. G. Wells)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s (1960)>은 이같은 지구 절멸의 순간을 미리 보고, 그로부터 살아남은 인간 문명까지 미리 상상해볼 수 있는 재미를 준다. 주인공 조지는 새로운 세기를 앞둔 1899 12월 마지막 날, 자신이 개발한 타임머신을 타고 4차원 시간이동 여행을 떠난다. 그가 1917년에 타임머신 기계를 멈추자 유럽은 독일과 전쟁 중이고, 그 전쟁은 1940년까지도 계속된다. 다시 그가 1966년의 어느 날로 접어들자 인간들이 개발한 핵 위성으로 지구는 쑥대밭이 되고 다급히 이를 피해 더 먼 미래로 키를 잡는다. 인류의 암흑기가 계속되다 서기 802,701년에 접어들어서야 조지는 순수 자연의 지상 낙원을 발견한다. 하지만, 조지의 기쁨도 잠시 뿐, 그 곳엔 후대 인간들끼리의 암울한 먹이사슬이 존재함을 금방 깨닫는다.

        살아남은 인간 종족의 일부는 개미굴을 파 지하로 들어가 생활하면서 '몰락'(the Morlocks)이라는 종족이 되고, 일부는 지상에 남아 '일로이'(the Eloi)란 종족으로 번식해 살아간다. 몰락은 지하에 살면서 번쩍이는 눈을 가진 괴물로 변한 채, 일로이 종족을 가축처럼 풀어놓고 먹이와 옷을 주며 번식시켜 이들이 성숙해지면 잡아먹는 식인종이 된다. 일로이 종족은 찜질방에서나 입는 옷을 입고 금발의 무표정한 청춘 남녀들이 떼로 무리지어 다닌다. 일로이 종족은 몰락의 배를 불리는 인간 가축들에 진배없다. 몰락은 이전 인류의 전쟁 시기에 사용하던 공습 사이렌을 이용해 일로이 무리를 개미굴로 유인해 그 때 그 때 잡아먹는다. 조지는, 몰락이 불에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개미굴에 들어가 이들을 불태워 죽이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이 족의 여인을 구출하고, 그 종족에게 문명을 일으키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 먼 미래에 홀연히 남는다. 예서도 비극적 미래를 넘어서 인류 희망의 비전을 잃지 않으려는 시각이 묻어난다.               

        

인간 희망의 끈, 과학기술

핵기술에 의한 인류 절멸의 순간에서도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움켜지려는 인간의 모습은 당시 영화들의 공통된 정서였던 듯싶다. <세계 충돌의 날>에서 '노아의 방주'격인 지구 탈출 우주선의 아이디어가 지금에 와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해도,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과학적 해결책이자 상상물로 봐야한다. <지구가 불타는 날>에서 인간들은 지구 축을 원상복귀하려고 절멸의 순간에 또 다른 핵 투하를 계획한다. 그도 터무니없는 시도이긴 하나, 역시나 당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애리타>에서도 소비에트 혁명의 파고를 화성까지 밀고가는데, 주인공 로스(Los)의 우주선과 화성인들의 상상 속의 첨단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타임머신>에선, 조지의 최첨단 타임머신과 그가 가져갔던 성냥불 없이는 몰락 종족과 일로이 종족의 먹고 먹히는 비극적 삶을 끊기 힘들었을 것이다.        

        핵기술에 참담히 무너지고 또 다시 과학에 의탁해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찌보면 허망하고 무기력해 보인다. 그래도 인류 절멸의 순간에 그 희망의 끈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데 또 다시 과학기술의 공이 있다 생각하니 과학과 인간의 관계는 한 몸임을 느낀다. 베고 할퀼수록 인간들에게 상처로 돌아오나 보듬을수록 희망을 볼 수 있는 그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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