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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멋진 신천지 달나라 여행이란 더 이상 없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7

 

멋진 신천지 달나라 여행이란 더 이상 없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이젠 아무도 밤하늘을 비추는 달을 보면서 토끼들이 방아찧는 모습을 떠올리진 않는다. 구소련이 최초 스푸투니크Спутник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때가 지금으로부터 딱 50여년전 일이고, 미국에서 이에 황급히 그 다음 해에 항공우주국NASA을 설치해 다시금 공을 들여 인류 최초 유인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낸 것이 1969년의 일이다. 그러고보니 인간이 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지 불과 3, 40년만이 흘렀다. 그 전에만 해도 지구 이외의 삶의 공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던 인류에게, 달 착륙은 충격 그 자체였다. '스카이콩콩'을 뛰듯 슬로우 모션으로 달 표면을 무중력 상태로 널뛰듯 다니는 닐 암스트롱의 모습에 우리 모두가 경이롭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달은 새롭게 인간 문명을 뿌리내릴 수 있는 새로운 신천지로 멋지게 등장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달나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식민지의 효용성이 사라지고 냉전이 수그러지면서 그만큼 달나라의 매력도 잦아들었다. 이번 호는 근대 초기 SF영화 속에서 인간들이 지구 밖의 공간으로써 달나라에 지닌 동경과 상상,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고, 오늘의 새로운 디지털 공간 속에서 어떻게 이를 재음미할 수 있는지를 살펴볼까 한다.      

 

달나라 금나라

달나라 얘기를 꺼내려면, 먼저 두 편의 오래된 고전을 넘고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조르주 멜리에스George Méliès가 만든 <달나라여행 Le Voyage dans la Lune (1902)>,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일 감독 프리츠 랑Fritz Lang이 제작한 <달의 여인Frau im Mond (1929)>이다.

        멜리에스의 <달나라여행>은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달나라여행> 11분짜리 단편 무성영화로 제작되었으나, 이 작은 필름에는 1900년대초 인간이 달에 대해 가진 여러 상상력들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달 표면에 인간의 우주선이 내리꽂히는 장면은 지금 보더라도 특수효과 측면에서 손색이 없다. 멜리에스의 달나라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놀고, 마치 무릉도원이나 낯선 이국의 정글과 같은 곳들이 나오고, 그 속에 야만의 달나라 원주민들이 달에 착륙한 과학자들을 뒤쫓기도 한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달에 사는 상상과 현실의 생물들로 잘 재현되고 있다. 멜리에스의 상상력 속의 달나라 풍경은, 지구와 비슷하나 인간 문명의 접촉이 없는 야만 상태의 이국적 상태였다.

        프리츠 랑의 <달의 여인>에 오면 달나라는 좀 더 과학의 눈에 비춰진 모습으로 성장한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 서구열강들의 식민지화 바람이 거세게 불던 차에, 달나라에 대한 상상 또한 그에 맞춰 변화한다. 이 영화에서 종종 언급되는 '달나라 노다지론Moon Gold Theory'은 당시 식민지 정복 바람과 맞물려있다. 마치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마냥 달나라는 서유럽 제국들의 새로운 노다지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선 대다수의 자본가들이 달나라 노다지론에 코웃음쳤지만, 일부 재빠른 거대 자본가들의 연합은 이것이 새로운 이윤원을 보장해 줄 것으로 간파했다. 마침 달나라 로켓을 개발하고 있던 볼프 헬리우스Wolf Helius가 이들의 눈에 띄어, 산업 자본가들은 그를 위협해 달나라 탐사를 시도한다. 6명의 다양한 구성원들로 채워진 로켓우주선 '자유Friede'호는 달에 도착해 정말로 노다지를 발견한다. 금맥을 발견하고 탐욕에 몇 명은 죽고 서로의 총질에 산소통을 잃은 승무원들은, 주인공 헬리우스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 프리더를 남긴 채 지구로 귀환한다.         

        시대의 한계인듯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기술적으로 서툴다. 우주복 복장도 없이 다들 제각각의 옷을 걸치고 등장한다. 무중력 상태를 표현하기 힘들어서인지, 승무원들이 옮겨다니도록 만든 우주선 내부 천장과 바닥의 손잡이와 발목끈이 우습다. 달에선 공기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한 승무원이 성냥불을 여러번 그어대는 장면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성냥불이 살아나자 달표면에선 승무원들이 우주복없이 걸어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의 여인>은 설득력있게 지구에서 달까지의 로켓발사의 논리를 꽤 그럴듯하게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물론 감독인 랑이 이렇게 잘 짜여진 영화를 만든 데에는 당시 물리학자였던 헤르만 오베르트Hermann Oberth의 공이 크다. 오베르트는 현대 로켓공학과 우주비행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랑의 기술 자문을 맡음으로써 영화의 현실감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이다.1)   

        

냉전 시대의 달나라

랑의 영화 이래로 달을 소재로 했던 SF영화는 거의 20여년간 침묵을 지켰었다. 1950년이 되어서야 그 달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미 대중문화의 장을 통해 발산한다. 앞서 얘기한대로 구소련의 위성 발사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과학 진흥에 대한 일종의 강박 상태로 모리면서, 달을 비롯한 우주비행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이 커진다. 이런 가운데 헐리웃 스튜디오들은 그 대표작으로 조지 팔 제작의 <달을 향하여>를 내놓는다.

        <달을 향하여>는 엄청난 자본 투자를 통해서 만든 초유의 대작이다. 게다가 달나라 탐사를 보다 현실에 기반해서 그리고 기존의 항공우주 과학에 기초해 다룸으로써, 후에 미국내 관료들에게 미 항공우주 프로그램을 추진하게끔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실지로 영화의 달 탐사 장면은 꽤 현실력있게 재현된다. 무중력 상태로 우주선 안에서 이동하기 위해 자석붙힌 장화를 착용하고 다니는 모습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주선 밖에서 생명줄을 놓쳐 떠다니는 동료를 구출하는 장면과 달에서 무중력 상태로 점프하면서 이동하는 모습 등은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손색없이 처리됐다. 로켓 발사 장면에선 핵에너지를 이용한 제트엔진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그래서인지, 영화 전반부에선 2차대전 이래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핵 방사능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과 로켓 발사로 인한 오염 문제가 맞물리기도 한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로켓 과학자 찰스, 쎄이어 장군과 사업가 짐 셋이다. 미 연방 정부의 로켓개발 예산 삭감으로 곤경에 처한 쎄이어 장군은 후견인 짐을 설득해 자본가들로부터 추가 자금을 따오는데 성공한다. 쎄이어 장군은 달의 군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구소련을 따돌려 미국이 먼저 그 곳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자본가들을 설득한다. 이 세 명의 주인공은 군(軍)/(産)/(學) 복합체의 대표자들을 연상케 하는데, 이들 셋은 우주 프로그램을 통해 큰 이득을 보는 선도적 세력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재미는, 이들 3명이 또한 로켓 승무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는 로켓 연료 계산 잘못으로 달에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들간의 돈독한 유대감을 기반으로 모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 영화에서 빠져있는 주체는 연방 정부다. 오히려 정부는 달에 우주선을 쏘아올리는데 마뜩해하고 우주 프로그램 예산마저 동결하는 부정적 대상으로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달을 향하여>에서 정부를 소외시킨 효과는 오히려 우주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상당히 긍정적인 반향을 주었다. 정부가 달 탐사를 과학기술의 우선 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는데 한몫한 것이다.

      

신천지 달이 아닌 화성으로 간 까닭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 <우주선 X-M Rocketship X-M> <달을 향하여>의 대규모 투자에다 해피엔딩의 스토리에 비교해보면 저예산 영화에다 영화 전개 또한 상당히 비극적이다. 이 영화는 <달을 향하여>와의 시나리오 저작권 문제로 애초 달 착륙을 의도했다 화성으로 가는 것으로 서사 구조를 고쳐써야했던 시련도 겪었다. 영화에서 승무원들이 의도치않게 이끌려간 곳은 달이 아니라 화성이다. 승무원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들이 누리던 고도의 문명이 핵재앙으로 모두 소멸되고 야만의 종족으로 연명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화성에서 승무원들은 그 원시인들에게 2명이 살해당하고 1명의 승무원이 부상당하며 쫓겨나오고, 다시 지구로 귀환 중에 나머지 3명 또한 착륙 미숙으로 모두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전혀 해피 엔딩이 아니다. <우주선 X-M>에선 비유적으로 군사 경쟁에 의한 핵 재앙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그들이 달에 떨어지지않고 화성에 간 것은 저작권 분쟁이 그 현실적 이유였으나, 지구인들에게 핵재앙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암시로 작동한다.

         달의 모습은 그렇게 한참 낯설게 변화했다. 초기의 신과 야만이 공존하는 신천지에서 기업의 야욕이 끼어들고, 냉전의 현실이 개입하고, 핵재앙의 미래까지 점쳐지는 어둠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 당시 달에 대한 인간 상상력의 부정적 변천사를 오늘에 와서 비교해보면, 디지털 신천지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 닮은꼴은, 신천지 달나라와 같은 자유의 디지털 공간에서 돈벌이와 국가 안보를 빌미로 해 권력의 감시가 늘어나고 장사치가 점거하는 공간이 되가는 현실에서 발견된다. 과거 인류가 달나라 탐사에서 핵 재앙을 감지하듯, 권력의 감시와 상업화가 판치는 사이버공간에서 우리의 미래를 하루빨리 감지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2007. 7.)

1) 듣자하니 이후 오베르트는 미국에 건너가 SF영화의 대중화 붐을 조성한 작품인 <달을 향하여 Destination Moon (1950)>에도 관여했다 한다.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면, 랑의 <달의 여인>은 히틀러가 감복하여 자주 보았던 영화였다 한다, 여기에 선보였던 로켓 우주선은 이후 2차대전 중 유럽 도시들을 초토화시키며 악명을 떨쳤던 유도로켓 브이원V-1과 브이투V-2 기술의 원조격이었다 한다. 오베르트는 히틀러밑에서 바로 그 V-2 로켓을 개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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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철부지 과학에서 신에 대항한 복제의 시대로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6

 

철부지 과학에서 신에 대항한 복제의 시대로

 

이광석 

 

어린 시절 그 누군들 인간 이상의 힘, 흔히들 말하는 초능력에 관심이 없었던 이가 있겠는가. 필자도 어김없이, 그 대상이 사람이건 돌연변이건 초인적 힘을 가진 이들을 동경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슈퍼맨을 따라 수건으로 망토를 만들어 날았고,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따라 뚜두뚜두 소리를 내며 손아귀 힘으로 강철 휘는 시늉을 했고, 헐크마냥 웃통을 벗어 옷을 찢는 연기를 실감나게 했고, 스파이더맨을 따라 방바닥을 기며 벽을 타는 양 거미줄을 뿜는 흉내를 냈다. 좀 더 커선 투명인간이 돼 매일 여탕에 들어가 야동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이번 호에선, 이처럼 인간이되 인간 이상의 힘을 가졌던 생물학적 변종 인간들을 보려한다. 혹자는 잘못된 실험의 실수나 오염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사고로 인해, 또 다른 이들은 과학의 무한한 권능에 매혹되어 초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 옛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추억의 투시인간이나 투명인간 등은, 지금처럼 아이들이 따르는 슈퍼맨식 영웅 일대기의 한 대목으로 극()화하기 보단 과학 맹신의 부작용으로 그리고 실패한 과학의 사례들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능의 신과 철부지 과학

과학으로 인간의 본성을 통제할 수 있을까? 약물을 들이켜 인간 속에 존재하는 선악을 떼어놓는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영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1920)>에서 의약품 개발자였던 지킬박사는 선악을 갈라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려다 오히려 하이드란 내면의 악마에 지배당한다. 사악한 하이드가 점점 지킬박사의 의식을 통제하면서 포악해져 박사의 애인까지 죽이고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파국에 이른다. 비슷한 류의 흑백 영화들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과학이 신이 주재하는 영역에 도전해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과학의 최후는 비참했다

    <봉녀 The Wasp Woman (1959)>에선 젊어지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던 화장품회사 중년 여사장 스타린Starlin, 회사에 고용된 연구원이 개발한 로얄젤리로 만든 주사약을 투입하면서 점점 젊어지는 효능을 본다. 그 제품을 만들어냈던 연구원이 공교롭게도 교통사고로 죽고, 게다가 스타린은 젊어지겠다는 욕심에 주사 투입량과 횟수를 차츰 늘이게 된다약물 과다투여로 나타난 부작용은 그녀를 흉악한 말벌인간으로 변하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다, 결국은 자신도 죽는다. 영화의 교훈은 간단하다. 과학의 힘을 빌어 세월을 거스르려는 인간 욕망은 신의 룰을 깨는 죄악이라 응당 그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영화 <4차원 인간 4D Man (1959)>은 사물을 통과하는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얘기다. 과학자 토니 넬슨Tony Nelson은 연필로 강철을 사물을 뚫는 실험에 성공한다. 실수로 연구실이 불에 타 토니는 형 스캇Scott이 있는 연구소에 둥지를 튼다. 토니는 형 애인이자 비서였던 린다Rinda와 눈이 맞는다. 그동안 스캇은 실험 중 방사선에 노출되어 동생의 기계장비에 손을 대면서 돌연 자신의 손과 몸이 물체를 통과하는 4차원 인간이 돼버린다. 음엔 자신의 능력에 놀랍고 신기해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 읽고, 금은 보석방 쇼윈도우 창을 투과해 전시된 보석을 털기도 한다. 사악한 하이드씨처럼 점점 스캇의 외모는 흉폭하게 변해가고, 다른 인간의 에너지를 흡수하는지 그가 진 인간들은 늙어 쪼그라져 죽임을 당한다. 불행히도 스캇은 전애인 린다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이유없이 등장해 결국 눈 위의 발자국 때문에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 <투명인간 The Invisible Man (1933)>의 투명인간 잭 그리핀Jack Griffin도 스캇처럼 매한가지의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인간 과학이 신의 권능에 도전하면 그 최후가 얼마나 참담할지에 대한 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엑스: 엑스레이 눈을 가진 사람 X: The Man with the X-Ray Eyes (1963)>에서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제임스 세비어James Xavier 박사는 일명 "엑스"라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제임스는 사물을 투시하는 시력을 가질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돈많은 재벌 스폰서들이 가시적인 연구 결과물을 내놓길 압박하면서, 연구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비어박사는 약품 실험을 자신의 눈에다 결행한다처음 그는 순간 성공의 기쁨을 만끽한다. 댄스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다 벌거숭이로 보이고, 내과 의사가 내린 오진을 막아 암세포의 위치를 찾아내어 우쭐한다. 허나 약물의 강도를 늘이다보니 사물의 투시력이 점점 깊어지고, 이젠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투과해 밖의 사물이 보여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만 는다. 나중엔 그의 눈엔 사물이 기하학적 빛의 무리로 비춰진다. 영화에선 그 부작용을 '엑스 효과'라 지칭한다. 거기다가 사고로 친구를 잃고 경찰에 쫓기다 탐욕으로 똘똘 뭉친 사기꾼에 걸려들어 무허가 의료시술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도망치고, 우여곡절 끝에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한탕해 나오려다 경찰에 쫓겨 또 도망치고, 차 사고로 한적한 마을의 교회에 당도한다. 한창 예배를 보던 시골 목사의 입에선 마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듯, 빗나간 과학과 제임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신의 독설을 내뿜는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하거든 그 눈을 빼어내버리라'. 마테오 복음 18 9절에 실린 구절이다.

 

미친 과학과 B급영화의 만남

흔히들 '미친 과학'mad science이라 부르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것 이상의 것을 넘보거나, 발명이나 실험을 통해서 전혀 실현 불가능한 듯 보이는 가상의 결과를 얻고자하는데 있다. 앞서 보았던 지킬박사, 봉녀, 투명인간, 4차원 인간, 투시인간은 그 미친 과학의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욕심이 과하거나 사물의 질서를 깨는 행위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미친 과학이 B급 영화와 충돌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 영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죽지 못하는 The Brain that Wouldn't Die (1959)> 바로 이 방면에서 유명한 B급 영화다. Bill 생명을 회생하는 방법에 집착해오던 수술 전문의다. 그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애인 잰Jan과 주말에 야외별장을 운전하던 중 과속을 하다 자동차가 가이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된. 잰은 사고로 죽고 빌만 살아남았는지, 빌은 차 안으로부터 뭔가를 양복 웃옷에 둘둘 말아쥐고 급하게 근처 아는 이의 집으로 뛰어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일까? 그의 양복더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잘려나간 잰의 머리였다. 애인의 불에 탄 몸뚱이를 버리고, 사고 중 잘려나간 머리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들고 냅다 뛰었던 것이다. 빌은 잰의 머리를 그 집의 실험실에서 회생한다. 있을 수 없는 일에다 황당한 줄거리지만, B급 영화에선 언제나 가능하다. 한 이틀 정도 잰의 잘린 머리를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후, 빌은 그 시간 안에 살아있는 '착한' 몸뚱이를 구하러 스트립바와 길거리를 헤맨다. 그동안 지하 실험실 안에서 잰은 정신을 차리고 빌이 자신을 살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잰은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게 만든 애인 빌에게 애정보다는 극단의 증오심을 점점 끼운다. 게다가 잰은 재생 약품의 효과로 살아있는 생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텔레파시의 초능력까지 가진다. 급기야 그녀는 다른 방에 감금시킨 프랑켄쉬타인같은 괴물과 은밀히 대화까지 주고받는다.

    신만이 행할 수 있는 창조의 역할을 넘보던 빌은, 급기야 한 누드모델을 집으로 끌어들여 신체이식을 시도하나 옆방에 감금돼있던 그 괴물에게 목을 물어뜯겨 죽음을 당한다. 잰이 있던 그 실험실엔 불이 옮겨붙고, 그녀는 죽은 빌에게 절규하며 불에 타 스러진다. "내가 경고했지, 그저 날 죽게 내버려두라구. 하하하...." 앞서 마테오 복음만큼 인간 과학에 대한 독설이 섞였다. 사고사든 자연사든 때되면 응당 죽어야할 숙명의 시간을 거부했던 빌의 미친 과학은, 잰과 보이지않은 신으로부터 그렇게 처절한 응징을 당한다.               

 

과학의 흑백 시대를 넘어

흑백의 정서가 그랬다. 영화속에서 과학은 종교와 신의 율법을 두려워했고, 전쟁과 살육을 위해 사용했던 과학의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에 치를 떨었다. 당시 미친 과학은 종교의 이름으로만 관리될 대상이었다. 요즘처럼 영화 속에서 생물학적 돌연변이들이 인기있는 시절과는 격세지감이다. 헐크, 수많은 엑스-맨들, 스파이더맨, 판타스틱 포 등을 상상해보라. 그들 대부분은 과학의 사생아들이지만, 정서상 윤리적이고 일반 인간들에게 영웅시된다. 파국도 없다. 더욱이 그 비정상성이 장점이자 힘이다. 신체 변이가 인간을 망치기보단 오히려 사회에 기여한다. 이제 과학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 그 큰 이유일 것이다.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일부 사기로 판명났으나, 유전학적 변종과 복제 실험에 최고의 과학자 명예를 안겨주는 시대에 과학은 신아래 머리 조아리기보단 이에 도전하는 위치로 등극했다. 결국 흑백시대에 투명인간 외 초능력 일동들이 비극이었던 이유는 당시 유전학적 실험이 생경했고, 천진한 과학보다 신의 위치가 부동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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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영화속 외계인, 오늘 디지털 폐인과 조우하다!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5

 

50년대 영화속 외계인, 오늘 디지털 폐인과 조우하다!

 

이광석 

 

지난 호에선 50년대 영화 속에서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외계인의 모습이, 그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여러모로 다양했음을 보았다. 당시 인간에게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같이 생긴 것에서부터 흉측한 괴물에다 아예 무정형의 것들까지 이러저러한 상상의 생명체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다채로웠다. 낯선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 대한 다양한 추측과 상상을 불러왔던 것이다. 세월의 겹을 지나 오늘에 이르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외계인의 모습도 변한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외계인은 어떤 모습일까? 필자는 당시 외계인과 흡사하게 오늘을 사는 외계종으로 디지털 폐인廢人 꼽으련다. 몇 년 전부터 사회의 새로운 현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들은, 누에고치cocoon족들처럼 한 곳에 칩거하길 즐기고, 야행성에,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인터넷 선에 매달려 온라인 게임과 야동에 중독증을 보이는 종족을 지칭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의 공간보단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밀폐된 곳에서 하루 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신종 칩거형 인간형인데, 50년대 영화속 외계인들의 행태만큼이나 독특하고 비슷한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다.                 

 

동굴과 게임방

50년대 외계인화들은 대부분 정체모를 유성의 추락으로 시작한다. 평온을 깨는 (주로 차 안에서 벌어지는 연인의 로맨스를 방해하는) 이 낯선 비행접시들은 거의 모두가 인간의 마을로부터 떨어져있는 야산, 둔덕 등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거나, 기존에 있는 동굴 등에 자리를 튼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들 Invaders from Mars (1953)>에선 녹색 화성 외계인들이 마을 외곽에 사람들을 땅속으로 끌어들이는 '개미지옥'마냥 지하 동굴을 만들어 자신들의 활동 근거지로 삼는다. <그것이 세계를 정복했다 It Conquered the World (1956)>에서 금성 출신의 아이스크림 콘 괴물은 본거지로 삼던 동굴을 군인들에게 들키면서 최후를 맞는다. <그것은 외계에서 왔다 It Came from Outer Space (1953)>의 흉측한 외눈박이 괴물은 벌집형 타원의 비행접시를 몰고 와, 이를 수리하기 위해 깊은 땅 속에 터를 마련한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 The Brain from Planet Arous (1957)>에서 외계인 범죄자 '고르'Gor '신비의 산'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핵물리학자 스티브Steve를 이곳으로 유인해 그의 몸속에 은신한 채,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다. <외계의 9호 계획 Plan 9 from Outer Space (1959)>에서 외계인들이 착륙해 음모를 꾸미는 주 영화무대는 헐리웃 묘지였고, <우주로부터 온 킬러들 Killers from Space (1954)>의 애스트론 델타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의 최초 은신처는 또한 동굴이었다. 이렇듯 외계인들의 최초 은신처는 동굴, 지하철역, 땅굴, 묘지 등이다

외계인이 은둔과 칩거를 하며 음모를 꾸미는 장소의 특징을 디지털 폐인들도 대체로 답습한다. 사회적 고립에다 대인관계의 기피, 저녁부터 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야행성 활동, 앉은 자리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활방식 등이 닮았다. 이 모든 것은 공부방, 게임방, 서재 등에서 이뤄진다. 디지털 폐인들은 붙박힌 곳의 반경 안에서 꼼짝도 않고 사물과의 실제 접촉없이 온라인에 상주하길 바라며, 타인으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한다. 자신이 거하는 공간이나 컴퓨터를 잃으면, 비행접시 잃은 외계인마냥 삶의 희망을 잃은 듯 혹은 수족이 잘린 듯한 기분으로 살아간다.    

 

에로티시즘과 야동

외계인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거나 최면을 걸면, 그 조종을 받아 난폭해진다. 외계인의 난폭성이 인간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폭성 외에도 몇몇 외계인은 과도하게 에로틱한 모습을 보여준다. 몇몇 영화들은 특징적으로 인간과 외계인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예를 들어 상당히 분별력있던 사람이 어느날 과도하게 그리고 비이성적으로 에로틱해지는 모습을 보이면 틀림없이 외계인에 의해 몸이 탈취당한 상태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외계의 괴물과 결혼했다 I Married a Monster from Outer Space (1958)>에서 안드로메다 행성의 외계인이 허니문 중에 있는 빌Bill의 몸 안에 들어가 부인인 마지Marge를 평소와는 다른 거친 모습으로 대한다. 강한 키스신 등 평소와 다른 빌의 이상한 행동이 이어진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에서 과학자 스티브의 몸 속에 들어간 외계 생물 고르는, 스티브의 부인 샐리Sally에게 성적으로 강한 애정 표현을 하려 한다. 이는 인간끼리의 정상적인 부부 생활까지도 훼방하며 끼어드는 외계인의 남성적 폭력성을 그리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조금 맥락은 다르지만, 영화 <기어다니는 눈알 The Crawling Eye (1958)>에서 유럽의 트롤렌버그 산에 기거하는 문어 모양의 외계 괴물은 인간 조정의 텔레파시를 뿜어내며, 여주인공 앤Anne의 초능력과 부딪히거나 그녀를 신들린 듯 쓰러지게 만든다. 괴물 공포영화들에서 흔히 보이듯 여성이 괴물의 희생양인 점을 고려하면, 에로틱한 모습을 보여줬던 대개의 외계인들은 반대로 '수컷'들이다.

동굴에 칩거하면서 여자 인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외계인들의 모습은 여태 디지털 폐인에서도 잘 보인다. '야동'이란 신조어가 국민들이 즐겨보는 오락프로그램에서 평범한 언어가 되고, 대중에게 회자될 정도로 '야동'은 디지털 폐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들이 대놓고 얘기하며 즐기는 문화가 됐다. 오죽하면 중국에 이어 전세계 '야동소비 2위국'의 대열에 끼었을꼬. 이의 유행에는 일차적으로 디지털 폐인들의 공헌도가 무지하게 크다. 마치 외계인들이 인간들을 줄줄이 최면걸어 자신의 지배아래 두듯, 온라인을 통해 여성 몸을 훔쳐보는 소수 디지털 폐인들의 시선이 뭇 남성들의 지배적 시선으로 전염된다. 슬슬 대중은 외계 폐인들의 최면에 하나둘 넘어가는 것이다.           

   

천적들, 개와 영파라치

마지막으로 필자가 발견한 재밌는 사실은, 외계 생물은 대체로 개를 싫어한다. 아마도 인간의 충복으로서의 개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엄밀히 말하면 개가 외계인을 싫어한다. 개는 제 주인의 몸이 외계 생물에 의해 강탈당했는지를 쉽게 판별하는 눈을 가졌다. 이는 외계인을 무척 당혹하게 한다. 당연 외모만 주인을 보고 개가 짖기 때문이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에서 스티브의 개 조지George, 변한 제 집주인을 보자마자 물어뜯고 짖고 난리를 피운다. 스티브 몸속에 들어간 외계 범죄자 고르를 잡기 위해 뒤쫓아 온 외계경찰 볼Vol, 조지의 몸 안에 들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외계의 괴물과 결혼했다>에서 빌의 거죽을 빌린 외계인은 개가 그를 보고 짖자, 부인인 마지 몰래  지하실에서 그 개를 목졸라 죽인다. 외계인에게 개는 인간보다 무서운 천적이다.         

법을 위반하는 자를 찾아내어 포상금을 타내는 전문 신고자를 우리는 '파라치'라 부른다. 또 불법으로 디지털 영상이나 음반을 공유하는 웹사이트 등을 신고하여 포상금을 받으면 이를 '파라치'라 구체화하여 부른다. 디지털 폐인들은 디지털 동영상에 익숙하며, 이의 가장 바쁜 잠재적 소비자들이자 공유자들이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신경이 곤두선 영화업계 등의 저작권자들은 이들 영파라치를 고용하거나 포고문을 내걸고, 법을 어기는 폐인들을 잡아들이길 명하고 있다. 저작권자와 영파라치들의 힘이 거세지면서 잡음도 심해지고 있다. 저작권자들이 요구하는 악성 폐인들 신상명세 공개를 꺼린 미국의 정보서비스업체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저작권자의 사냥개'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도 생겼다. 이를 보면 경위야 어떻든 잘 따져보면, 폐인들과 '영파라치'의 관계는 외계인들과 인간이 기르는 개의 관계만큼이나 상극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 하나의 진실은, 영파라치의 사냥 능력이 외계인을 식별하는 개만큼이나 탁월하다는데 있다.

 

오늘을 사는 외계인들

동굴 서식, 에로틱한 면모, 그리고 개를 두려워하는 것 모두는 사실 외계인의 정신병리적 특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SF 영화의 주요 기제들이다. 영화에서 외계 이방인에 대한 인간의 공포감을 조절하는 장치들인 셈이다. 한편 오늘에 이르면, 밀폐된 방, 야동, 천적인 파라치 등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남성군, 특히 디지털 폐인들의 골병든 자화상으로 봐야할 것이다. 유비쿼터스 사회가 온다고 하나, 끝없이 늘어가는 청년들의 만성 실업 상태는 이들을 어두운 골방 속의 폐인들로 쉽게 바꾸었다. 하루 일과를 스크린 앞에서 시작해 그 앞에서 취식하는 골방의 폐인들은 야동과 게임에 미치고 동영상을 힘껏 내려받고 올리는데 그 젊은 혈기를 쓴다. 폐인이 폐인인 까닭은 자신의 바깥과 소통하지 않는데 있다. 온라인으로 누구엔가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허구인 이유는 살아있는 소통을 배제하는데 있다.

'빨갱이' 적성국의 이방인들에게 향했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의 괴물들을, 오늘 지금을 사는 우리가 다시 그렇게 또 열심히 또 다른 이방인의 얼굴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젠 단순히 공포의 상상물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꿈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해야 할 청춘들을 디지털 폐인들로, 우리 밖의 기괴스런 외계인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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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방인에 대한 공포와 다양한 외계생물 종種의 탄생

빛바랜 SF영화로 현실 읽기 4

 

이방인에 대한 공포와 다양한 외계생물 종種의 탄생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지난 호에서 필자는 50년대 수많은 미국 영화들이 좌우 이념 대립의 적대적 표본으로 상상의 외계인들을 만들어냈다고 보았다. 내친 김에 이번 호에서는 당시 영화 속에 묘사되었던 각기 다른 외계인들의 유형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50년대 영화 속 외계인들의 모습을 잘 들여다보면, 그 당시 시민들이 어떻게 체제 밖 '이방인'을 상상하고 이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는지에 대한 감이 올 것이다. 영화 속 외계인들의 유형은, 인간 스스로를 투영한 이미지에서부터 인정사정없는 무정형 외계 생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외계인 유형 1: 인간같은 외계인

50년대 영화속 외계인들의 모습은 다종다양하다. 우선 거의 완벽하게 인간에 가까운 외모를 보여주는 외계인들이다. 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하듯 지구 구원의 명분을 내세우며, 인간처럼 만국공용어인양 영어로 대사를 친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우드Edward D. Wood 감독의 B급 영화, <외계의 제9호 계획 Plan 9 from Outer Space (1959)>의 갤럭시 행성의 외계인들은 인간과 똑같은 얼굴에 중세 때 비슷한 복장을 하고 지구 정복의 대의명분을 지속적으로 부르짖는다. 이들은 무덤으로부터 죽은 시체들을 일으켜 세워 인간을 공격하는 지구 정복의 '9호 계획'을 완수하러 온다. 미 헐리웃 동네 안 공동묘지에 터를 잡은 우주선 안에서, 외계인들은 이 무덤의 좀비들을 무선 장치로 조정한다. 영화에선 시종일관 그저 특징적인 세 명의 좀비들이 이 외계인들의 명을 받아 무덤가를 서성인다. 첫 번째, 육감어린 여자 좀비인 뱀피라Vampira. 그녀는 길게 자란 손톱을 내어밀고 사람을 찾아 무섭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다음, 실제 레슬러 출신 배우가 역할을 맡은 구울Ghoul. 이 덩치좋은 좀비는 원래 아랍 설화에 서 갓 죽은 시체를 파내어 뜯어먹는 식시귀食屍鬼를 일컫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드라큘라. 공포 영화의 대명사 벨라 루고시 Bela Lugosi의 죽기 전 모습을 영화에 덧대고, 영화내내 얼굴가린 대역이 흡혈귀 좀비로 등장한. 

<지구가 멈춰선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1951)>에 외계 행성의 평화사절단으로 온 '클라투' Klaatu는 잘생긴 인간 외모를 가진 천재형 외계인으로 등장한다. 그의 충복 로봇 고르트Gort '로보캅'과 비슷한 외양에 모든 인간의 철제 무기를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는 레이저빔을 눈에서 내뿜는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들 Invaders from Mars (1953)>에선 등 뒤에 지퍼가 보일 정도로 어설프게 분장을 한 키 큰 녹색 화성 외계인들이 땅속 동굴에 인간을 납치해 와 이들을 들고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그들의 대장인 듯 보이는 자는 유리병 속에서 얼굴을 분칠을 하고 머리만 보인다. 여전히 사람 모양새다. <또 다른 세계에서 온 물체 The Thing from Another World (1951)>에서는 녹색 '야채괴물'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의 짙은 푸른색으로 칠갑을 한 덩치 좋은 인간이 군인들의 공격을 피해 동분서주한다. <우주로부터 온 킬러들 Killers from Space (1954)>에선 눈에 탁구공을 끼었는지 금붕어 눈깔 모양을 하고 땀복 비슷한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쓴, 애스트론 델타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영어를 모국어인양 지껄이며 지구정복의 야욕을 들어낸다. 이들 모두는 침략자들이긴 하나 공포스럽지도 않을뿐더러, 가끔은 매우 인간적이다.

 

외계인 유형 2: 괴물 외계인


당시 SF장르와 호러간의 돈독한 유대를 고려하면, 무서운 괴물 모양의 외계 생물도 필수불가결하다. 게다가 체제 밖 적색 공포의 묘사에 괴물같이 확실한 캐릭터도 없었다. 이 외계 괴물들은 주로 홀로 으스스하게 등장해 텔레파시나 무선 전파 장치로 인간 의식을 조정하거나 혹은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킨다. B급 영화의 또 다른 기수였던, 로저 콜만Roger Corman 감독의 <그것이 세계를 정복했다 It Conquered the World (1956)>에선 아이스크림 콘을 뒤집어놓은 듯한 이빨달린 금성 출신의 괴물이 바다가재 팔을 하고선 자신의 몸 밑에서 박쥐 모양의 마인드콘트롤 장치를 토해내며 움직인다. 요 박쥐가 인간에게 날아가 인간의 목 뒤꼭지를 물어 무선 조정장치를 이식한 후 그 자리에서 즉사하면, 바로 이에 반응하여 아이스크림 콘 괴물의 명령을 받아 꼭두각시로 변신한다. <그것은 외계에서 왔다 It Came from Outer Space (1953)>에선 흉측한 외눈박이 괴물 외계인이 인간 신체를 복제해 탈취한다. 신체 탈취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항상 그 괴물의 시선과 관객의 것을 일치시킨다. 이는 마치 살인자의 렌즈로 관객의 시선을 밀어넣듯 공포스럽다. <그것! 우주 밖 테러 It! the Terror from beyond Space (1958)>에선 화성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선에 외계 괴물이 잠입한다. 이 괴물은 '아가미인간'the Gill Man과 비슷한 외양이나, 총을 쏴도 소용없고 전기쇼크도 끄떡없는 점에서 대단히 난감한 종이다. 우주선 안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이 지루한 영화에서, 결국 화성 괴물은 지구인과 대치하며 사투를 벌이다 죽는다. (이 극본은 나중에 영화 <에이리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다.)
조금은 다른 경우로
, <나는 외계의 괴물과 결혼했다 I married a Monster from Outer Space (1958)>의 안드로메다 행성의 외계인들은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외계인의 외양을 갖는다. 이들은 여성들의 몰살로 그 종족 번식을 위해 지구에 침입해 들어온 경우다. 이들은 인간과 똑같은 몸을 만들어 숙주삼아 그 신체 안에 기거하면서, 인간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인간 신체의 탈취 과정에서 보여주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와 신체 탈취 후에 번개칠 때 보여주는, 아수라백작같이 반쪽은 외계인의 형상이, 다른 반쪽은 인간의 얼굴이 나란히 포개지는 모습은 상당히 극적 긴장감을 준다. <지구 대對 비행접시 the Earth vs the Flying Saucers (1956)>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상당히 인간에게 우호적이었으나 군인들의 선제 공격으로 난폭해진 경우다. 이들은 인간들을 잡아 그 뇌로부터 모든 기억을 사출해 저장하는 일명, '무한분류기억은행' Infinitely Indexed Memory Bank을 선보인다. 앞도 보이지않을 것 같은 갑옷모양의 헬멧을 머리에 뒤집어 쓴 이 외계인들의 실물은 흔히 알려진 쭈글쭈글한 달걀형 외양의 것이다. 

 

외계인 유형 3: 무정형 혹은 상상에 맡기기


인간과 비슷하거나 괴물의 외양이라기보다는 무정형의 외계 생물체들도 존재한다. <블롭 The Blob (1958)>에선 외계에서 떨어진 벌건 물풍선 모양의 굴러다니는 외계 생물체가 인간을 삼키며 부피를 키운다.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 The Brain from Planet Arous (1957)>에선 정말 날아다니는 뇌가 외계 생물로 등장해 인간의 신체를 숙주삼아 몸 안으로 들어간다. 영국판 텔레비전 시리즈물 <트롤렌버그 테러 The Trollenberg Terror>에서 착상을 얻어 만든 영화 <기어다니는 눈알 The Crawling Eye (1958)>에는 문어처럼 기다란 촉수를 지니고 커다란 외눈박이 눈알을 지닌 외계 생물이 유럽의 트롤렌버그 산에 서식하며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에 최면을 걸어 서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아예 외계인의 모습을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영화들도 당시 있었다. <지구를 조준하라 Target Earth (1954)>는 저예산 영화의 고전 중 손꼽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외계인은 아예 출현하지도 않을뿐더러,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기위해 보낸 로봇이 출현한다. 제작비가 너무 적어서인지, 단 하나의 깡통 로봇만이 뒤뚱거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다닌다. 이 로봇을 무력화하는 초음파를 찾아낸 과학자들이 지구를 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결말난다. H. G. 웰즈Wells의 소설을 영화화한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 (1953)>에서도 화성인들의 실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스필버그의 최근 <우주전쟁 (2005)>에선 외계인 모습이 등장하나, 이 올드 버전에는 그 실체가 없다. 마지막에 지구의 박테리아에 의해 죽으며 외계인의 손인 듯 보이는 것이 툭하며 떨어지는 모습이 단서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호적 표시를 위해 백기를 들고 서있는 마을 주민들을 레이저빔으로 흔적도 없이 날려보낼 정도로 이들은 적대적이다.      

 



외계인의 다양한 외양: 이방인에 대한 공포의 반영


50년대 인간들이 느꼈던 외계인의 유형들은 이처럼 다양했고 달랐다. 80년대 <이티 E.T. (1982)>에서처럼 한없이 평화만을 사랑하는 외계 생물종은 드물었다. 50년대 인간의 상상 속에서 에이리언들은 대포나 핵기술로는 도저히 절멸시킬 수 없던 공포의 종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무정형에 가까울수록 최면, 살인, 포섭, 흡수 등 더 거친 면모들을 보여준다. 적성국의 낯선 이방인들의 모습은 그렇게 주로 적대감에 기초해서, 모를수록 증가하는 공포 심리를 실어서, 그리고 자유주의 시민들이 이들에 대해 느끼는 인식 수준에 준해서, 서로 다른 계열의 상상의 생물들로 재현되었다.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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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계 생물의 공포와 이념의 세기, 또 다시 정보자유의 공포로

빛바랜 SF영화로 미래 읽기 3

 

외계 생물의 공포와 이념의 세기, 또 다시 정보자유의 공포로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독일의 한 유명한 설문기관이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독일 7천여 명을 상대로 여러 차례 외계인에 대한 국민 의식을 알아본 적이 있다. 거의 십여 년 세월이 변하면 마음도 변했을 법 하건만, 그 설문자들 중 40%는 외계인의 존재를 매우 믿거나 아니면 그리 부정할 만큼 확신도 없는 부류로 집계됐다. 놀랍지 않은가! 허다하게 인공위성을 핑핑 쏘아올리고 주기적으로 하늘로 뿜어져 올라가는 우주선에 무덤덤해 하는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면, 외계인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거나 아예 없다고도 말 못하는 사람들이 이리 많다는 사실은 조금 의아스럽기조차 하다.

   지금도 외계인에 대한 믿음이 이럴진대, 과거 흑백 시대엔 그 강도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938년 미국 라디오 초기 역사에 해프닝으로 기록될 외계인 소동을 기억한다면, 그 당시 외계인 공포는 지금과는 격이 다르다. 그 때 당시 CBS 방송 앵커였던 오손 웰스Orson WellesSF 소설의 원조격인 H. G. 웰즈Wells의 소설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을 각색해 읽고 있었고, 뉴저지에 외계 생명체가 습격해 온다는 그의 멘트에 온 국민이 난리법석을 피운 사건을 지칭한다. 지금으로선 역사적 개그에 해당한다.

   그런 개그가 현실이 된 곳이 무엇보다 냉전 시대 미국이었고,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시대의 문화적 반영물이 5, 60년대 숱하게 만들어졌던 외계인 영화들이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당시 외계인을 바라보는 사회의식의 근저가 무엇인지를 당대에 소개됐던 대표작들을 통해 살펴볼까 한다.

 

의식 세뇌와 빨갱이 공포

어릴 적 초등학교 빽빽한 교실에서 거의 연례행사인양, 자대고 도화지에 줄을 그으며 "때려잡자, 공산당!"과 같은 표어를 만들고, 표독스런 돼지 얼굴에 뿔달린 악마 형상의 '빨갱이'를 그리던 기억이 있다. 시간나면 마을 뒷동산에 올라 삐라를 주워 선생님께 드려 크게 칭찬받았던 기억도 난다. 아침잠이 그리웠던 고등학교 때는, 학교 교장이 솔선해 나서 아침마다 30분씩 이념 교육 비디오에 반공 훈시를 하고, 대학에서 데모하는 형들이 혹시나 기웃거리며 불온 '전단'이라도 뿌릴까 교장이 수위아저씨랑 함께 학교 담벼락을 둘러보며 항상 경계하던 기억도 있다. 부모와 가족도 버리면서 오직 해방전선에 몸바치는 북파 간첩들이 이곳 고정간첩과 합세해 순진한 남한 사람들을 '세뇌' 공작하는 따위의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심각하게 보면서 북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기도 했다. 이는 마치 내 마누라, 자식, 가족들, 동네 경찰관 아저씨와 마을 사람들, 심지어 군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둘 외계인들에 의해 영혼을 탈취당해, 꼭 감정없이 움직이는 시체인 좀비가 되어 내게 덤비는 되는 SF영화속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과 비슷하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들 Invaders from Mars (1953)>이란 영화의 주인공 남자아이 데이비드가, 아마도 외계인들의 인간 세뇌로 인해 가장 처절할 공포를 느꼈을 법하다.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데이비드 집 근처 흙구덩이 속으로 화성인들의 비행접시가 떨어져 박힌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바로 산속 공비들의 출현이다. 데이비드의 아빠, 엄마가 우연찮게 그 화성인들이 거처하는 땅 속 구덩이에 빠졌다 나온다. 그 모레 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이들은 또 다른 동네 사람들을 유인해 그 곳에 빠뜨린다. 그러곤 바로 아무 감정도 없는 외계인들의 노예들이 돼서 하나씩 나온다. '빨갱이' 의식화 과정과 흡사하다. 외계인 좀비들의 공통점은 목뒤에 칼자국 모양의 상처가 있고, 이는 화성인들이 목 뒤에 인간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를 피부 안에 이식했다는 증표다. 세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즉각 이들의 특성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감염되기 전에 즉시 신고하라, 이것이 영화속 데이비드가 생존하기 위한 철칙이었다. 이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의 단면처럼 스산하다. 결국 데이비드는 이미 외계인으로 변해버린 가족들을 포함해 늘어나는 이 좀비들의 한 가운데에 외톨이로 남는다.  

   군부 정권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 의식처럼, 그리고 녹색 화성인들의 공포 앞에 선 데이비드처럼, 50년대 자유주의 국가들의 적색 공포와 적대는 대단했다. 50년대 하면 미 정치권에선 그 유명한 '메카시즘'이란 마녀사냥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이다. 메카시 상원의원이 언론의 힘을 교묘히 이용해 반공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를 가지고 여러 정적들을 탄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실제 공산주의를 ", 결핵, 그리고 심장병이 합해진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는 질병"으로 묘사했다. 사태가 그렇다면, 화성인들의 모래구멍으로 빠졌다 나오는 영화 속 인간들은 그 질병에 감염되어 이미 자본주의 체제로 복귀불가능하게 된 외계인들이다이는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에서도 극적으로 묘사됐다. 외계인들은 콩깍지 모양의 배아체를 통해 인간이 잠든 사이 인간 몸을 숙주로 삼아 서서히 하나둘 포획해 나간다. 이는 마치 무서운 전염병의 파급처럼 밀어닥친다. 애인마저 적이 되어 외계인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외계인이 점령한 마을을 빠져나온 주인공의 마지막 절규는 "그들이 너를 뒤쫓고 있다! 다음은 네 차례다!"란 경고의 메시지다. 이는 냉전 시대 내내 우리를 적색 공포로부터 보호해주었던 경고 문구와 같다.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의 주요 데뷔작이기도 했던 <블롭 The Blob (1958)>에 오면 그 외계인의 모습은 마치 젤리같이 무정형의 적색 폭군으로 등장한다. 첫째 이 외계 생물의 특징은, 틈만 있으면 어디든 스며들고 빠져나간다. 게다가 말랑말랑한 액체의 이 외계 생물은 기가 막히게도 그 색깔이 빨갛다. 다음으론 인간 몸을 제 것으로 흡수하면서 커진다. 즉 개성을 말살한다이 시뻘건 풍선같이 생긴 외계 생명체가 외계에서 날아올 때만 해도 아주 작아 힘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외딴 곳에 사는 노인의 팔에 들러붙어 있다가 급기야 그를 흔적도 없이 녹여 삼킨다. 그러곤 이곳저곳 스멀스멀 다니며 그 벌건 덩어리는 인간을 하나둘 삼키면서 점점 덩치가 커진다. 마치 공산주의 의식화 과정과 확산 과정처럼, 끊임없이 불어나고 삼킨다.

   예외도 있다. 당시 영화들이 모두가 다 외계인의 인간 신체 침입을 이념 대립의 산물로 연결짓진 않았다. 저예산 영화 중 하나인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 The Brain from Planet Arous (1957)>에선, 뇌처럼 생겨 떠다니는 외계인이 출현한다. 이 번쩍거리는 눈을 가진 떠다니는 뇌는 한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 그 의식을 지배하지만, 하루에 한번은 인간 숙주를 벗어나야 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게다가 블롭처럼 불어나거나, 확산과 전염의 위험도 없다. 이 영화에는 혹성 애로스로부터 도망쳐 온 '고르Gor'라는 범죄자와 이를 쫓는 착한 우주 경찰 'Vol'만이 외계인으로 출현한다. 고르가 지구정복의 꿈을 갖고 핵물리학자 스티브의 몸 속에 들어가 핵 방사능으로 전 도시를 쓸어버리고 지구인을 노예화할 야심을 보이지만, 이 야심만만의 외계인 고르는 그의 한가운데 약점, 뇌의 중앙 주름에 해당하는 '롤란도의 열구Fissure of Rolando'를 인간에게 가격당해 죽고 사건이 종결된다.       

 

외계인의 신체 이식 문화와 디지털 무한복제 문화 

<혹성 애로스에서 온 뇌>의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50년대 외계인 영화들의 공통분모는 냉전과 메카시즘의 문화가 깊게 자리함을 보았다. 무엇보다 재미난 것은 지구 인간을 대체하는 외계인들의 번식 속도다. 이는 상징적으로 적색 의식화 과정과 급격한 확산에 대한 두려움을 지칭했다. 영화에선 이를 막기 위해 언제나 경찰과 군인들이 자유 수호의 최후 보루로 등장한다. 폭력성의 상징인 군인들이 냉전 시대 인간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부각되는 점도 지금에 오면 참 아이러니다.

    구체적으로, <또 다른 세계에서 온 물체 The Thing from Another World (1951)>는 외계인 번식의 가공할 능력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야채 괴물' 외계인은 마치 지구 식물들처럼 무한 재생산 복제가 가능하다. 이 식물 외계인은 꽤 특징적인데, 마치 거름처럼 인간 피로 성장하고, 괴물의 혈액을 나눠 부양하면 마치 가지치기하듯 속성으로 자기복제된 수많은 외계인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녔다. 물론 영화에선 오직 하나의 외계인이 알라스카 미 군사 기지 근처에 떨어져 군인들과 소란을 피우다 전기쇼크로 사망하지만 말이다. 또 하나, <그것은 외계에서 왔다 It Came from Outer Space (1953)>에서 등장하는 흉측한 외눈박이 괴물 외계인은 인간의 신체를 대체하기보다 인간 복제를 택하는 경우다. 대개 인간의 몸을 빌어 외계인이 그 안에 들어앉는 토착과 이식의 과정을 거치지만, 이 영화에선 벌집형 타원의 비행접시가 고장나 지구에 불시착한 이 외눈박이 괴물은 그저 인간과 똑같은 복사 모형을 만든다. 즉 마을 밖에서 활동하는 것은 일종의 만들어진 인간 인형들이고, 진짜 원본은 따로 외계인들이 잡아가둔다. 결말은 주인공의 중재로 외눈박이 괴물이 우주선을 고쳐 떠나지만, 여러모로 지금 현실과 관련해 재미있는 시사거리를 준다.           

   두 영화에서 야채 괴물은 복제의 마왕이요, 외눈박이 괴물은 원본을 놔두고 복사본을 판치게 만드는 골칫덩이다. 요새 세상의 눈으로 보면, 디지털 시대의 저작권자와 정보자유의 대당과 흡사한 그림이 그려진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복제해 돌리고 여럿이서 나누는 누리꾼들은 자본주의의 저작권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성' 마왕이요 골칫덩이에 다름 아니다. 요런 악성 누리꾼을 때려잡는 일은 저작권자의 몫이요, 이를 대행하는 일은 사법기관의 몫이다. 한번 새나간 디지털 정보는 무한 복제돼, 마치 외계인의 번식 능력만큼이나 감히 어느 누구도 이를 다 제거하기가 힘들어진다. 누리꾼들은 정보 공유의 철학에 감염되기 쉽고, 그 영향은 네트워크를 타고 무섭게 흐른다. 

   이젠 적색 공포보다 무서운 것이 '정보자유'. 자본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겁날 것은 사유 재산의 도장이 찍힌 정보와 지식에 반대해 정보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이다. 이들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외계인이자 저작권자들에게 제일 겁나는 족속들이다. 결국 50년대 외계인이 '빨갱이'이였다면, 지금의 새로운 외계인들은 '반저작권자'들이다. 세월이 변하면 외계인의 속성도 변하는 법이다. 흑백 시대엔 빨갱이에 과민 반응해서 역사적 냉전의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 반저작권 운동을 "때려잡자"는 구호는 또 하나의 반복된 코미디일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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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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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러와 과학의 언저리에서 태어난 불운한 괴생명체들

빛바랜 SF영화로 디지털미래 읽기 2

 

호러와 과학의 언저리에서 태어난 불운한 괴생명체들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본 격적으로 SF영화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호러 공포영화와 SF 공상과학 영화의 경계에 서 있는 장르와 그에 출현하는 괴물들을 어찌 다루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영어에는 괴물의 두 가지 구분법이 있다. 호러영화에 출현하는 인간을 닮은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 (the monster)인 반면 SF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괴수나 외계인같은 인간 외의 괴물은 보통 '그들' (them) 혹은 '괴생명체' (the creature)로 불린다. 영화를 보다보면 한 가지 장르에 담기 어렵고, 그래서 이게 괴물인지 생명체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호러 장르 같기도 하고 SF 장르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초창기 미 영화사에서 SF와 호러의 언저리에 서있는 특이한 괴생명체, 과연 무엇이 존재했을까?     


호러속 괴물

영화학 교수 수전 소벅Susan Sobchack은 호러와 SF 영화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호러의 괴물이 신과 자연의 질서를 깨는 혼란의 근원이라면, SF 영화의 괴물은 인간이 만든 기성 사회 질서의 혼란을 상징한다. 그럴 듯한 얘기다. 예를 들어 <프랑켄쉬타인 Frankenstein (1931)>에서 프 랑켄쉬타인 박사가 만들어낸 흉측한 괴물은 조물주가 주재하는 생명 탄생의 유일한 권한에 도전한다. 이 인간 계율을 깨는 시도는 한 작은 이름없는 유럽 마을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켄쉬타인 박사와 곱사등이 조수 프리츠는 죽은 시체들의 일부를 이곳저곳에서 훔쳐 그 시 체 조각을 꿰매고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될 기괴한 괴물에 전기를 흘려 생명을 불어넣는다. 예로부터 서구 유럽 의학에선 흐르는 전기를 생명의 에너지로 보았던 선례를 고려하면, 인간 닮은 괴물의 탄생은 그리 허황된 상황 설정만은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산한 장면들과 그 침침한 배경, 미친 과학자의 광기와 계속된 살인 현장 등 으스스한 배경 요인들은 <프랑켄쉬타인>을 SF 보단 호러의 고전으로 보게끔 한다.

   다른 특징을 보자. 프랑켄쉬타인 사건의 발단이 이름 모를 지구촌 변두리라 하였다. 괴물 탄생의 비극은 대단히 지엽적이고, 그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 바로 종료된다. 괴물은 게다가 인간을 빼닮았고, 인간이 될 수 없는 그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허나 SF 영화속 괴물이 미치는 효과는 전 인류의 파국처럼 크나큰 재난의 경우가 많다. SF영화의 '그것' 혹은 '그들' 또한 호러의 괴물과는 좀 다르다. SF 영화의 괴물은 대체로 사람이 아니다. 파충류나 곤충, 혹은 인간 아닌 외계 생명체가 대부분이다. 괴물이 사람을 닮아 보이면 아무래도 영화에서 관객이 느끼는 현실 감각이 증가하나, 사람 아닌 괴물에는 관객이 감각이 무뎌진다. 핵 재앙처럼 도시를 재난으로 몰아넣고 비행접시를 몰고 레이저 빔으로 인간과 건물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려도 관객은 이를 스펙터클로 볼 뿐 게서 그리 공포를 느끼질 않는다. 이것이 호러와 SF의 차이이다.


SF 영화속 '그들' 

개미, 파리, 거미, 벌, 사마귀, 바퀴벌레 등 곤충들은 언제나 거대 괴물들이나 외계인을 그리는데 있어서 그 상상력의 근원이다. <그들이닷! Them! (1954) >은 거대 곤충 괴물을 거의 최초로 다룬 SF작이다. 영화는 2차 대전이래 핵 실험지로 쓰였던 뉴멕시코 사막에서 시작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수년간 핵에 노출되어 돌연변이로 점점 몸이 거대해진 사막 개미들이 더 큰 먹이감을 찾아 급기야 주위의 인간을 습격하게 된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폐허와 인간들의 실종만 남는다. 사건의 수습은 사막 속의 개미집을 불태워버리는 일로 종결되는 듯 했다. 지하의 개미 동굴에서 아기집과 유충을 화염방사기로 태워죽였으나 (이 장면은 이후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에이리언 2 Alien 2: Aliens (1986)>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다), 상황은 이미 날개를 가진 여왕 개미와 수개미들이 이미 미 전역으로 날아가고 난 뒤다. 로스엔젤레스를 끝으로, 생존 파악이 된 거대 개미들이 군인들에 의해 전멸된다.

   < 그들이닷!>에서 나오는, 괴이한 윙윙 소리를 내며 더듬이와 집게 이빨을 휘두르며 다니는 흉측하고 기괴한 돌연변이 개미가 관객에게 그리 큰 공포감을 주진 못한다. 그저 관객에게 잘 꾸며진 흥미진진한 스펙타클을 보는 재미를 줄 뿐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인간이 야기한 질서의 혼돈이 어떻게 오고 확산되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는데 있다. 인간의 핵 실험으로 한 지역에서 서식하던 곤충이 돌연변이가 되고 이들이 날개짓해 다른 지역으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그저 관객은 에이즈의 무서운 파급력만큼이나 인간 자신에 의해 초래된 괴물로부터 종말론적 메시지를 읽는다. 지난 호에서 본, 고 질라와 레도사우루스 등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고대 거대 괴수들이 인간의 핵 실험으로 깨어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얘기는 특히 5, 60년대 SF 영화들을 계속 지배해온 주제들이다. 그 점에서 <그들이닷!>의 거대 돌연변이 개미의 경우도 그 정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하나. 아써 크랩트리Arthur Crabtree 감독의 <얼굴 없는 악마 Fiend without a Face (1958)> 의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뇌덩어리도 같은 태생의 것이다. 이 괴물은 공군기지의 원자로 레이더 실험에 의해 만들어진 기괴한 생물체들이다. 곤충만큼이나 뇌를 이용한 괴물의 형상은 SF 영화의 기본 컨셉 중 하나다. 인간의 몸속을 지배하는 외계 행성의 날아다니는 뇌 괴물이나 뇌수가 밖으로 언덕처럼 툭 튀어 나있는 외계인의 두상은, 당시 SF 영화의 주 단골메뉴였다. <얼굴없는 악마>의 뇌덩어리들은 더군다나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얼굴없는 악마다. 그들은 인간 목 뒷덜미에 들러붙어 뇌수를 빨아먹고 휴지처럼 인간을 구겨 버린다. 잔인한 호러의 성격을 충분히 보여주나, 대체로 인간이 세운 과학의 폐해와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SF 영화의 고전적 스토리가 그 중심이다. 공군기지 원자로 실험지 주변 마을 사람들이 지녔던 불만과 공포, 예컨대 목장의 가축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크지 않거나 알이나 우유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이유가 핵 원자로 때문이라는 상황 설정은 대단히 친환경적이다. 어쨌거나 그 뇌덩어리들의 최후는 원자로 가동을 멈추면서 일단락된다. 영화에선 결국 과학의 오류로 만들어진 핵 원자로를 악마로 탓한다.  `

   

호러와 과학의 잡종, 아가미인간의 비극

앞 서 몇몇 영화들을 가지고 호러와 SF 장르를 달리 나눠보았으나, 이를 항시 구분할 이유가 없다. 혹자는 5, 60년대 미국 영화를 호러와 SF의 혼종의 역사로 보기도 하고, 다른 이는 호러의 아류로 SF 영화를 보는 이도 있다. 그만큼 당시 호러와 과학의 경계가 희미했다. 무엇보다 그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작품으로 필자는 '아가미 인간the Gill Man' 3부작 (<검은 산호초의 아가미인간 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 (1954)>, <아가미인간의 복수 Revenge of the Creature (1955)>, 그리고 <인간 속의 아가미인간 The Creature walks among us (1956)>)을 꼽고 싶다. 3부작에선 아가미 인간이 물밑에서 벌이는 대인간 테러(호러의 요건), 그리고 과학자 집단이 벌이는 비윤리적 면모(SF의 요건)를 함께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수억 만년전 사라진 인간과 물고기의 혼종인 아가미인간이 아마존에 다시 나타나 인간들을 습격한다. 그러나, 다 이유가 있는 습격이다. 1탄에선 아가미인간이 자신의 생존 영역을 지키기 위해, 2탄에선 수족관 관상용으로 플로리다로 잡혀온 데 대한 복수극으로, 마지막 3탄에선 아가미와 비늘을 잃고 불완전한 육지 괴물이 된 그를 실험하는데 대한 분노로써 이뤄진다. 그래서, 아가미인간의 폭력은 꽤 정당해 보이고, <프랑켄쉬타인>에서 보였던 관객의 괴물에 대한 '측은지심'이 예서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스릴은 아가미인간이 여주인공들에 대해 보이는 에로틱한 반응이다. 여주인공들의 수중 다이빙에 맞춰  그 아래서 함께 따라 물속을 헤엄치거나 (이 장면이 후에 <죠스 Jaws (1975)>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다), 혹은 욕실 안에 들어간 여성을 베란다문을 통해 들여다보고 서있는 아가미인간의 모습에서, SF보다 호러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반면 물고기 수면제, 다이나마이트, 작살을 이용해 공격하거나 아마존에 서식하는 아가미인간의 생존 영역을 침범해 선창 밑에 가두고 (1탄), 아마존에서 플로리다까지 끌고와 인간들의 볼거리로 수족관에 넣어두고 (2탄), 실험용으로 그를 감금하는 (3탄), 탐사대원들과 과학자들에게서 SF의 기본 특징들인 반윤리/ 반환경의 인간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천연의 아마존 자연에 서식하던 아가미인간 (환경)과 이를 해하려는 인공적 질서간의 적대에서 승리는 후자에게 돌아간다. 그 불운의 괴물은, 1편에선 인간의 총과 작살에 맞아 아마존 물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2편에서 부활한 그는 비슷하게 군인들의 총에 맞아 깊은 심연 속으로 재차 사라진다. 마지막 3편에서는 아가미와 비늘을 잃어 심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서 죽음에 이른다. 이렇듯 아가미인간 3부작은 아이들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 이야기같다는 기분이다. 인간의 과학과 현실에 위협받고 배반당한 아가미인간의 불행한 모습에서 그에 대한 반감보단 관객은 동정을 느낀다. 이 비극적 괴물에게서 겁없는 인간들에게 다칠대로 다쳐 소생불가능한 자연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래서일까, 삼세번이나 벌어지는 물고기인간의 죽임이 더 잔인해 보인다. (따뜻한 디지털세상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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