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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거리를 반역의 거리로: 뱅씨(Banksy)

살벌한 군사 문화의 시절을 겪은 우리는 도시 거리를 오직 두 잣대로 재는데 익숙하다. 정화된 거리와 말쑥한 거리. 정치 군인들의 정화된 거리가 단정, 질서확립, 처벌, 훈육, 통금, 단속, 금지, 일렬종대 등을 떠올리게 하는 데 반해, 문민의 말쑥한 거리는 정돈, 청결, 맞춤, 효율, 박제, 안정 등을 연상케 한다. 이도 저도 인간이 살만한 거리의 풍경이 아니다. 우리에겐 정화와 정돈이 아닌 반역과 저항의 거리 풍경이 흔하지 않다. 고작해야 80년대 대학내 캠퍼스 벽과 바닥 곳곳에 그려졌던 민중 그림들이 전부다. 그도 군사 문화의 억압을 피해 제한된 공간 내에 자리를 폈던 정도다. 태초 인간들이 동굴 벽에 낙서를 즐겨 새겼던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한참 표현의 욕망을 억누르고 제도권의 거리 풍경에 몸을 맡겨온 셈이다. 벽낙서, 흔히 그라피티(graffiti)의 역사는 인류 태초까지 거슬러 오른다. 그 중 스텐실 그라피티는 정치 예술과 인연을 맺으며, 그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2차 대전 중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선전용 벽보로 길거리에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스텐실 그라피티를 애용했다. 이와 달리 70년대 남미에선 멕시코인들이 스텐실 그라피티를 저항 매체로 활용했고, 80년대 초에는 펑크 문화와 결합되면서 북미, 특히 뉴욕에선 일약 그라피티가 하위문화의 상징처럼 자리잡는다. 그라피티 예술은 권력의 죽은 거리를 반역이 숨쉬는 거리로 바꾼다. 방식은 마치 레슬링 선수가 상대의 달려드는 가속을 이용해 자신의 몸 위로 그 덩치를 던져 넘기듯, 번뜻하게 차려진 자본의 상징물에 끝마무리로 저항을 각인한다. 정치 권력과 자본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건물 하나 하나가 저항의 캔버스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라피티는 정치 소외의 배설로가 아니다. 오히려 크고 작은 권력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자기 표현이다. 일반 그라피티가 한 장소에 붙박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모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손쉽게 찍어낼 수 있는 스텐실의 복제 가능성과 그 강렬한 이미지가 이에 배가 효과를 발휘한다. 영국 출신의 로빈 뱅씨(Robin Banksy)는 바로 스텐실 그라피티를 통해 권력을 조롱하고 뒤튼다. 정치적 성격의 그라피티를 제작해 잘 알려진 쉐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가 가공할 권력의 힘을 심각하게 경고한다면, 뱅씨는 일상 권력의 편견과 독단을 냉소적으로 비꼰다. 그는 어린 나이에 그라피티를 시작했다. 74년생인 뱅씨가 대중의 주목을 끌었던 계기는 런던 동물원에 그린 벽화가 시발이다. 그의 그라피티는 철창 속의 동물들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구경꾼들에 혹사당하는 동물들의 애환과 창살 안의 지루함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 뱅씨의 작업은 80년대 말 이후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화염병 대신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 청년, 기관총을 든 모나리자, 프로펠러 아래 빨간 리본을 달고 질주하는 아파치 헬리콥터, 한쪽에 총을 세워놓고 조심조심 쉬야를 하는 영국 황실 친위대원, 게이 경찰들간의 뜨거운 키스, 벌거벗은 아프리카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미키 마우스와 맥도널드 가이 등등, 그의 그라피티에는 현실 속에 도사린 정치 권력, 엄숙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기와 저항이 묻어난다. 2001년 뱅씨는 멕시코 농민운동군인 싸빠띠스타와의 연대의 일환으로 치아빠스를 방문해, 그 곳에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남기고 왔다. 이처럼 정치적 자의식에 일찌감치 눈을 뜬 것이, 그의 그라피티에 날이 선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전세계 주요 미술관들이 그의 그라피티를 실내로 끌어들여 대대적인 전시회를 열 정도니, 단지 그라피티가 길거리 낙오자들이나 부랑자들의 반사회적 일탈이나 반항이 아닌 것만은 입증된 셈이다. 뱅씨는 그라피티가 예술가가 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 얘기한다. 정규 예술 교육이나 돈이 없어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 그라피티다. 이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그라피티의 대중화를 독려한다. 권력의 이미지로 가득한 거리 곳곳을 대중의 캔퍼스로 바꾸는 일은, 직업으로서의 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요 누구든 페인트나 스프레이를 들고 거리로 나선다면 가능하다는 얘기다. 최근 인터넷 문화의 경전으로 알려진 <와이어드> 잡지에 뱅씨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를 어떻게 봐야할 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스텐실 그라피티의 예술적 탁월함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영감을 안겨줬던가, 아니면 그의 저항 예술이 결국 자본의 상품 구도 내에서 수용 가능한 일탈 정도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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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걸들’의 고릴라 가상극장: 현실 극장의 역할론을 거부하는 예술계의 여성 전사들

50년대초 사회 심리학자인 어빙 고프만은 ‘극작(dramaturgical)법’이란 방법을 통해 현대인들이 어떻게 자아를 드러내고 상대와 사회적 관계망에 들어가는지를 잘 살핀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행위가 이루어지는 ‘극장’의 비유를 든다. 무대 위의 행위자는 우리의 가시적 행위를, 시나리오는 우리의 감춰진 내면의 동기와 욕구를, 감독은 우리의 의식을 대신한다. 여기에서 자아의 재현은 극(劇) 작업과 동일시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역할을 결정하고 그 역할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타자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자신의 정보를 드러낸다. 물론 자아와 타자들간에 형성된 관계와 상황은 사회적으로 통합된다. 한번 자아와 타자간의 정의가 이루어지면 거기서 발생하는 모순이나 의심 등이 배제되고, 사회의 도덕적 기초가 서로를 규정하고 억누른다. 연배가 높은 자와 낮은 자, 남성과 여성, 배운 자와 무식한 자 등의 각 역할자들은 서로 적절한 무대 행위를 기초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기능값을 수행한다. 이의 거시 통합적 모델은 바로 사회 조직의 모습이다. 고프만의 무대에서 각자는 역할 가면에 충실하지만, 행위자간의 관계를 가로지르는 불평등의 구조를 발견하기 어렵다. 행위 관계망를 벗어던지거나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의 역할을 취하는 반역이나 저항의 행위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현실의 극장이 보여주는 억압적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관계의 생성은 고프만의 이론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한 여성 예술가 집단의 성장에서 관찰된다. ` 게릴라걸들’(Guerilla Girls)은 바로 현실 극장의 역할론을 거부하는 예술계의 여성 전사들이다. 1985년 뉴욕시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169명의 전시회에 고작 13명의 여성의 작품이 걸리면서, 성적 불평등과 인종적 차별이 만연한 예술계의 현실극장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여성 예술가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백인 남성 중심의 예술계에 대한 여성 게릴라들의 반란이었다. 이들이 ‘걸’이란 명칭을 선택한 것은 동성애자(게이)가 ‘퀴어’를 선택한 이유와 동일하다. 현실 극장에서 남성의 ‘마초’ 근성을 드러내는 ‘걸’을 여성 자신의 것으로 재전유하려는 ‘언어 놀이’(the linguistic game)의 일환이다. 게릴라걸들이 현실극장의 관계를 교란하는 중요한 방법은 익명성이다. 이들은 철저히 자신의 신원을 가린 채 죽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빌려쓰고, 공식석상에서 ‘고릴라’의 가면을 뒤집어 쓴다. ‘게릴라’를 ‘고릴라’로 잘못 발음하면서 생겼다는 이들의 고릴라 가면은 마초 중심의 현실극장을 붕괴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수행한다. 고릴라 뒤에 숨겨진 인물에 대한 정체성을 구분하기 힘듦으로써 그녀들에게 사회가 규정하는 역할론은 사라진다. 본모습을 뒤로 하고 오직 분노와 강렬함을 전하는 고릴라 가면만이 무표정하게 드러남으로써 고릴라가 전하는 익명의 메시지에 주목하게 만든다. 고릴라 가면에 의한 현실 배역의 거부, 바로 이것이 게릴라걸들이 남성 우위의 현실 극장을 뒤흔드는 근거다. 사실 고릴라 가면의 보다 유연한 형식은 인터넷과 더불어 진화했다. 전자 네트워크 안에서는 익명의 자아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망을 벗어나 자유롭게 생성된 새로운 자아, 소위 ‘아바타’(avatar)를 대리로 내세울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 그래서 게릴라걸들은 고릴라 가면을 통한 정치적 실천뿐만 아니라 고릴라 아바타를 통한 가상의 익명전에도 참여한다. 온라인 퀴즈, 포스터, 비디오, 관련 문서뿐만 아니라 주제에 따라 게릴라걸들 명의로 익명의 전자편지를 마초 사업주에게 보내는 코너와 토론을 원활하게 이룰 수 있게 한 전자게시판도 전술적으로 활용된다. 현실극장의 불평등 구조를 뒤흔드는 방법으로 가상극장의 익명성을 적절히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극장의 역할론이 강력할 때 가상극장에 치중한 전술은 허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게릴라걸들이 놓치지 않는 것은 거리와 네트 모두에서 성적, 인종적 불균등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 있다. 한편 가상극장의 활용은 공감대를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현실극장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들의 폭넓은 참여를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앞으로 이들이 벌일 현실극장에 대한 가상극장에서의 교란과 불복종의 시도가 예사롭지 않다. 일상의 권력이 배정한 배역을 거부하고 고릴라 가면을 쓰는 순간 현실극장의 질서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마치 게릴라걸들의 사이트에 걸린 남성성의 상징인 맛 간 바나나처럼 단단해 보였던 마초 사회가 여름철 더위에 녹아나듯 서서히 문드러져 갈 것이다. 게릴라걸들이 현실에서 착용하는 고릴라 가면만큼이나 이들의 가상가면이 현실극장 무대 위의 비상식을 깨는 실천적 힘이 될 수 있는 근거이다. * 게릴라걸스의 책들 Confessions of the Guerrilla Girls, Perennial, 1995. The Guerrilla Girls' Bedside Companion to the History of Western Art, NY: Penguin, 1998. Bitches, Bimbos, and Ballbreakers: The Guerrilla Girls' Illustrated Guide to Female Stereotypes, NY: Penguin, 2003. * 관련 사이트 http://www.guerrillagir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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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대한 역감시: 역기술국 (Bureau of Inverse Technology)

자고로 감시는 권력을 유지하는 영구 수단이었다. 푸코는, 서구에선 17, 18세기를 지칭하는 고전주의 시대에 ‘배제의 논리’(나환자)가 감시의 원칙이었다면, 19세기엔 ‘포괄의 논리’(흑사병자)가 통치의 수단으로 자리잡는다라고 말했다. 권력이 체제로부터 어긋난 ‘비정상인’을 다루는 데 있어, 마치 나환자를 다루듯 ‘정상인’의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쫓아내고 박멸하는 방법에서, 점차 정상인의 사회내에 흑사병자들을 포괄함으로 인해 공간을 분할하고 인구 통계를 내고 감시하는 체계적인 통제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권력 기술인 감시는 19세기부터의 얘기다. 당시 푸코의 문제의식은 21세기 ‘초’감시라는 당장의 현실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이미 공장 등과 같은 주어진 역할에 의해 분화된 장소 안에서 권력 기술에 의해 관리되던 모던한 시대조차 점차 옛말이 돼 간다. 불행히도 얼마 전 검찰이 중도 수사 포기를 선언한 삼성 SDI의 노동자 휴대폰 감시를 보라. 이제 감시는 비디오 카메라와 같은 시각적 영상 채집에 머무르지 않고, 신체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모바일 권력에까지 이른다. 공장 담벼락을 넘어 노동자의 재생산 영역에까지 권력의 기술이 확장되고 있다. 이런 권력의 지식은 확보된 정보의 관리와 연계망(네트워크)에 의해 더욱 극대화된다. 교육부의 통합행정 정보망 ‘네이스(NEIS)’ 건은 감시의 또 다른 차원이다. 관리되는 개별 신체의 전망은 새로운 디지털 권력에 의해 완성된다. 권력의 감시 기술을 역전하여 그 기술로 권력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본모습을 드러내면 어떨까. 이것이 ‘역감시’의 통쾌함이다. ‘역기술국’(Bureau of Inverse Technology)은 이에 공헌하는 한 예술가 그룹이다. 테크노예술가인 나탈리 제레미젠코가 주축이 돼 만들어진 역기술국은, 현대 권력이 작동하는 근원지에 역감시의 눈길을 보낸다. 역기술국의 대표작이자 국내에도 소개된 <비트 비행기>(1999)는 ‘정보사회’의 상징처럼 돼버린 실리콘밸리의 고공 영상 촬영물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단순하다. 그저 소형 모형 비행기에 카메라를 탑재하고 원격으로 활공하며 촬영한 필름을 지상 수신기로 담아낸 비디오 영상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상물은 관객에게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마치 냉전 시대의 소산인 미국의 스파이 비행선이 레이더망을 피해 소비에트 공화국의 군사 시설을 고공 촬영하듯, 필름은 현대 자본, 기술, 지식의 신화를 배태한 성역을 스산하게 찍어간다. 전자의 가공할 살상 무기들에서 느껴지는 소름은 후자의 실리콘밸리를 통해 그대로 전이된다. 현대 권력의 성역인 실리콘밸리의 눈부신 외연에 대면하는 대신, 이들은 모형 비행기를 이용한 고공 촬영이라는 역감시 기법을 통해 관객들에게 마치 적의 전략적 군사 요충지를 답사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 이보다 먼저 만들어진 비디오 영상물 <자살 박스>(1996) 를 들 수 있다. 이는 미국의 금문교 다리 위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자동 포착해 반응하는 센서를 카메라와 함께 가동시켜 촬영한 비디오다. 자살 박스는 다리 위를 뛰어내리려 시도할 때마다 숫자가 더해지도록 설계되어졌다. 자살 박스로 계산된 데이터를 역기술국은 다우존스 지수와 비교해 ‘절망 지수’(Despondency Index)라 부른다. 역기술국은 권력이 장난치는 추상적 데이터의 숫자 놀음에 대한 반응으로 자살박스를 고안해 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아니 단 몇 초에 널을 뛰는 주가가 자본의 펄펄 뛰는 동맥이라 감격해하기 전에, 역기술국은 그 자본의 동맥들에 숨이 막혀 절망해 다리 아래 몸을 던지는 인간들의 숫자를 카운트한다. 역기술국은 정보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왜곡되고, 뒤틀린 권력의 속곳을 담아낸다. 이들이 다루는 카메라는 단순한 몰래카메라가 아니다. 몰래카메라가 몰래하는 권력의 범죄행위를 찍는다면, 이들의 역감시는 자명한 듯 보이는, 아니 현대 자본의 자랑거리인 듯 보이는 대상물들(실리콘밸리, 금문교 등)의 살의에 가득찬 야만의 얼굴을 포착한다. 게다가 권력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파파라치들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역기술국은 추상화된 데이터들 안에 숨겨진 정치적 본질을 폭로한다. 역기술국의 역감시는 이렇듯 권력의 느슨해진 빈틈과 일그러지고 추한 면들을 뒤지고 포착해 까발리는 행위 이상이다. 이들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현대 권력의 뒤틀린 제 모습을 보기 위해선 마치 정상인 듯 보이거나 대중을 장악한 일상의 그 곳에 오히려 다른 시선을 들이댈 때 더 분명해진다는 단순한 원칙이다. 권력이 개별화된 신체에 가하는 현대 초감시의 눈길을 막는 해법으로 이보다 강한 멍군이 어디 있겠는가. <참고 페이지> 역기술국 http://bureauit.org/ 나탈리 제레미젠코 http://entity.eng.yale.edu/nat/ <참고문헌> Inke Arns, Social technologies: Deconstruction, subversion and the utopia of democratic communication (pp. 221-237), in R. Frieling and D. Daniels (Ed.) Media Art Net 1: Survey of Media Art, Wien: Springer. 2004, URL http://www.medienkunstnetz.de Stephen Wilson, Information Arts: Intersections of Art, Science, and Technology, Cambridge, MA: the MIT Press, 2002, pp. 822-824. Timothy Druckery, Bureau of Inverse Technology (pp. 600-605), in T. Levin, U Frohne and P. Weibel (Ed.) CTRL Space: Rhetorics of Surveillance from Bentham to Big Brother, Cambridge, MA: the MIT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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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기술 비틀기: 카본 방위 연맹 ( Carbon Defense League)

자본주의 상품 시장엔 두 불순물이 도사린다. 교환 가치의 조작이나 독점을 통해 폭리를 취하거나, 아니면 그 룰을 아예 깨 체제 전복을 꾀하고자 할 때. 전자를 행하는 자를 파렴치한 자본가라 하면, 후자는 반체제 혁명가급에 해당한다. 둘의 차이는 전자가 현대인을 더욱 더 절대 진리의 상품 시장에 종속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신화로 가득찬 상품 가치의 허상을 폭로해 까발린다. 이 두 집단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면, 둘 다 시장의 환상을 깨는데 크게 기여한다. 현대 상품은 점차 기술과의 결합력이 증가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것이 지닌 가치와 가격에 비현실성이 더한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증시, 새로운 모델로 사장되는 구제품, 복제품으로 인한 파산, 아이디어 하나로 떼돈을 버는 젊은 사업가 등등 시장 내 교란의 파장과 효과는 한번에 몰아치고, 갈수록 허상의 가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 와중에 시장의 전복을 실현하기 위해 ‘현행 질서 파괴’를 불사하는 자들도 등장한다. 한 예술가 집단이 눈에 띤다. 이들은 허망한 ‘원본’의 가치를 사수하려는 자본주의 상품 시장의 거짓 구린내를 시민의 능동적 이용과 재활용을 독려하는 복제 ‘카본’의 정치 철학으로 헹궈내려 한다. 이름하여 ‘카본 방위 연맹’(Carbon Defense League)인데, 연맹답게 예술가, 정치운동가, 기술자, 이론가들로 구성되어 97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2003년 씨엔엔 등 각종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하루 평균 5만명의 조회수를 기록했던, “리코드닷컴” (recode.com) 프로젝트는 바로 이 “카방연”과 비슷한 동기를 지닌 예술가 그룹 “콘그롬코”(conglomco)의 합작물이다. 시카고 현대 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인 이 프로젝트는, 기성의 체제 기술을 활용,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통해 대중 앞에 자본주의 상품 물신의 거짓을 폭로하는 ‘전술 미디어’의 활용을 강조한다. 보통 창작물의 소유자나 대리권자들이 저작권 등 법적 장치를 통해 혼신을 다해 막으려는 것이 역설계다. 상품 교환의 독점적 가치를 성사시키려는 자에겐, 누군가 자신의 창작물의 코드에 변경을 가하거나 새로운 코드를 첨가하거나 기본 잠금 장치를 풀어헤치는 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으려 한다. 카방연은 바로 상품 교환의 보편어이자 가격 체계의 근간인 바코드의 역설계를 통해 상품 유통 체제를 교란하는 큰 일을 저질렀다. 언뜻보면 월마트의 홈페이지를 흉내 낸 듯한 리코드닷컴은 바코드의 역설계를 위한 카방연의 기획 웹사이트이다. 카방연은 바코드가 현대 소비자의 상품 구매조건을 규정하는 화폐 다음의 권자에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 프로젝트가 바코드의 역설계다. 기존의 바코드 시스템에 이들의 소프트웨어를 삽입하면 헐값의 가격으로 상품가가 폭락한다. 이를 통해 상품 계산대 앞에서 바코드에 매겨진 거짓 교환가치에 우롱당했던 소비자들의 노예근성은 조각나고, 당연히 바코드의 질서정연한 시장 규칙은 해적 바코드로 엉망이 된다. 하지만 바코드의 역설계를 통한 가격의 ‘재코드화’(리코드)가 월마트와 같은 대형 초국적 유통업자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법원의 프로젝트 강제 중단 결정으로 카방연의 리코드 기획은 도중하차한다. 이미 98년과 99년에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과 함께 카방연은 역설계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선 적이 있다. 거의 미국 청소년들의 문화의 중심이 돼버린 일본 닌텐도 게임보이의 롬 칩을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에프롬 칩’으로 대체하여, 새로운 대안적 유형의 게임보이를 보급했다. 당시 이들이 개발했던 해적용 게임 제목은 ‘슈퍼 키드 파이터’였다. 신나는 펑크 음악과 진행되는 이 청소년 게임의 서사 구조는, 한 청소년이 학교로부터 탈출해, 경찰에게서 물건을 훔치고, 교회가는 사람들에게 새총을 쏘고, 매춘 여성을 구해주고, 게임의 막바지에선 크랙(마약의 일종)을 꼬실리는 내용으로 흥미진진하게 꾸려진다. 2001년에는 아예 청소년들에게 이 게임의 개발킷을 씨디로 제작 보급해, 기존 닌텐도 게임보이를 소비자가 직접 프로그래밍하고 하드웨어를 통째로 변경하는 방법 등을 소개했다. 카방연과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의 이 개발킷은 수많은 국가들에서 번역되어 보급되기도 한다. 2002년 호주 멜버른의 시연 <프리플레이>는 또 다른 역설계 장치를 소개한다. 카방연은 미국이 중동 국지전에서 주로 공수해 프로파겐다용 선전 매체로 뿌리는 태엽식 단일 주파수 라디오를 개조해, 지역, 국제 뉴스를 청취할 수 있는 단파 라디오로 변신시켰다. 주목적은 제국을 조롱하고, 지역 해적 방송이나 커뮤니티 방송을 독려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카방연의 독특한 ‘역설계’ 실험은 미래 대안적 문화 정치 모델 개발과 관련해 주는 함의가 적지 않다. 카방연은 역설계로 태어난 새로운 대상을 ‘기생 미디어’라 칭한다. 이는 체제 내 생산물의 비판적 재전유를 뜻한다. 대중은 역설계를 통해 단순한 소비 주체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상품이 지닌 원본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효과를 거둔다. 이는 자본 시장의 구매자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본의 기술을 비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페다고지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이 점에서 단지 학술적 목적을 위한 역설계나 상업적 이익을 노린 해적 행위(이른바 용산상가 버전들)보단, 상품 물신을 깨고 이를 뒤집는 정치 교육의 수단으로써 역설계를 고대해 본다. ▲ 참고 웹사이트 카본방위연맹 홈페이지 www.carbondefense.org/ 리코드닷컴 www.re-code.com/video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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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조롱하는 악동들: 개미농장의 10여년

미 텍사스 아마릴로의 루트 66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에 희한한 광경이 눈에 띤다. 이 곳엔 얼핏 보아 한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스무 대 정도의 골동품 캐딜락들이 나란히 한 줄로 땅 속에 거꾸로 처박혀 있다. <캐딜락 목장 (1974)>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인데, 개장 이후 매년 3만여명이 꾸준히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미국 자동차 문화의 성지가 되어버린 이 캐딜락 목장을 기려, 볼보나 클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들이 이 곳을 배경으로 광고를 찍고, 노동자 가수로 알려진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이 전시 작품을 기념해 곡을 붙였다고 한다. 가히 미국 대중문화의 명소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캐딜락 목장>은 196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건축학과 디자인을 전공했던 더그 마이클스, 칩 롤드, 그리고 커티스 쉬라이어, 이들 셋이 주축이 되어 세운 ‘개미농장’ (Ant Farm)의 작품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보헤미안 히피 문화와 베트남 반전운동, 대항문화, 성적 자유운동, 그리고 텔레비전 등 매체문화 등이 한데 뒤섞여 만개하던 곳이었고, 지금도 게이 등 성적 소수자 운동이나 저항문화의 근원지를 꼽으라면 샌프란시스코가 게 중 으뜸이다. 개미농장은 6, 70년대 이 모든 비주류 저항 문화의 세례를 고스란히 받았다. 60년대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다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처럼, 개미농장은 체제 바깥에서 사유하고 활동하던 예술가 그룹이었다. 60년대 자본주의 번영과 부를 상징하던 주류 건축양식에 도전하여, 개미농장은 <50대 50 베개 (1996)>, <세기의 집 (1971)>, <자유의 땅 (1973)>, <돌고래 대사관 (1977)> 등 미래지향의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이들은 한편에선 공동 작업, 관람객의 참여를 유발하는 작품 설계, 주류 건축양식의 냉소를 통해 상호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 미래 지향의 기괴한 건축 양식물들을 추구하여,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기 드보르류의 상황주의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 집단으로 불린다. 실지 개미농장의 가치는 건축보다는 당시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 등과 함께 반매체 비디오 운동에 불을 붙인 장본인들로 널리 알려졌다. 세라의 73년 6분짜리 문자 비디오, <텔레비전은 사람을 배달한다>는 광고주에게 상품으로 팔리는 소비자를 묘사해, 당시 텔레비전에 의한 자본주의 상품 소비문화에 경종을 울린 작품이다. 이미 세라의 작품이 나오기 전, 텔레비전과 상품 문화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개미농장의 시연, <불타는 미디어 (Media Burn, 1972)>에서 극대화한다. 피라밋 모양으로 쌓아올려진 텔레비전 더미 한가운데로 특수 제작된 캐딜락이 충돌하며 뚫고 지나가는 장면은 당시 지역언론들에 생방송될 정도로 큰 문화적 파문을 일으켰다. 개미농장에게 <캐딜락 농장>과 <불타는 미디어>에 소품으로 이용된 캐딜락은 포디즘으로 집약되는 자본주의 번영을, 산산이 조각나는 텔레비전은 70년대 미국 대중 문화를 가름하는 상징물들로 연출된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미자본주의와 이미지 조작과 최면의 거대한 브라운관이 서로 충돌해 파괴되는 장면은 상징 이상의 전복적 의미를 담고 있다. 멍키렌치로 가격해 조각난 브라운관의 설치 작품, <더러운 접시들 (1970)>은 아마도 개미농장이 이같은 <불타는 미디어>를 낳기 위해 거쳤던 기초 작업으로 보인다. <불멸의 장면 (Eternal Frame, 1975)>은 <불타는 미디어>와 함께 개미농장의 대표적 비디오 예술 작품으로 회자된다. <불멸의 장면>은 케네디 암살 장면을 직접 연출해 비디오에 담아 반복해 보여줬던 작품이다. 개미농장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매체를 통해 구성해 반복해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현실이 매체를 통해 극화되는지, 그리고 실제 현실을 어떻게 대체하는지를 확인한다. 게다가 케네디가 텔레비전을 통해 선거를 승리한 첫번째 미 대통령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그의 암살에 대한 연출은 역전된 상황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2003년 6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미농장의 주요 일원이던 더그 마이클스가 사고로 숨을 거뒀다. 이를 기념해, 개미농장의 지난 10여년간의 작업일지가 지난 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78년 자신들의 스튜디오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하고 모든 공식적 활동을 접은 지 얼추 25년만의 일이다. 가면 갈수록 소비, 독점, 물신, 신화 등 주류 대중매체의 질곡들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이들 개미농장의 반매체 저항 예술작품들은 아직도 미디어 운동가들에게 중대한 의미를 던진다. 비록 일회성 퍼포먼스로 미디어에 대한 즉자적 분노를 표출하는데 그쳤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까지 이어지기 어려웠으나, 개미농장은 물신화된 대상들을 조롱하고 그 가치를 역전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으로 대단히 탁월했다. 자본주의의 신주단지들을 그저 소품으로 박살내며 즐거워하던 6, 70년대 이 사악한 아이들의 맥이, 이미 오늘 우리 전자 문화의 악동들에게 신내리고, 무한 복제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다. 알튀세르의 말대로 ‘사악한 주체’(bad subjects)없이 현실의 전복은 없다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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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생명의 그로테스크한 결합, 피치니니의 생명공학 예술

지난 해 필자의 연재 글을 읽었던 독자들은 생명공학의 (초)현실주의자로 소개되었던 프랭크 무어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에이즈에 걸려,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곧이어 그 근저에 자본주의적 탐욕을 발견하면서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로 소개되었다. 이번에는 무어와 비슷하지만 생명 기술에 대한 시각이 보다 긍정적인 페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의 예술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무어와 달리 그녀는 호주에서 예술 학교를 마치고, 여러 작품전을 거치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순탄한 인생 경로를 달려 온 유망주다. 이미 국내에서도 그녀의 작품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극적인 예술 인생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작품들에선 미래 기술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이 있다. 항상 곱지않은 시선으로 기술을 보는 듯 하지만, 그도 전부라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예술은 재미가 있다. 말하자면,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의 진실이 되가는 인간 보편의 기술에 대한 긍정의 시선도 교차한다. 필자는 피치니니의 여러 작품 계열 중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한 그녀의 기술관을 보려한다. 무엇보다 2003년 비엔날레에서 여러 대중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설치 작품, 「우리는 한가족」을 주목한다. 게임보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얼굴은 반백이 지난 얼굴들이다. 고작 내 아들 나이만한 아이들이 한참 ‘삭은’ 얼굴로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은 짐짓 겉만 보면 누구나 소름 돋기 마련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유전 조작의 돌연변이들이 인간의 애완 동물이 되고 한 식구가 된다. 여자아이는 생명과학의 진보로 인해 얻은 새 생명체와 놀고 장난친다. 그 새로운 과학과 생명의 혼합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생명체들은 그들 스스로 생식해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하고 젖을 물린다. 조금 오래된 비슷한 다른 작품을 보자. 「단백질 구조」(1994)는 「우리는 한가족」보다 그녀의 자본욕에 대한 경계감이 많이 섞인 작품이다. 맨살의 미녀 모델의 어깨에 인간의 큰 귀를 가진 징그러운 돌연변이 모델이 함께 사이좋게 등장한다. 미녀 모델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상품의 교환 논리와 생명공학의 돌연변이가 서로들 재교배한다. 피치니니는 스스로 이 작품을 통해 생명의 상품화를 보려고 했지만, 실지 그녀의 예술관은 무어식의 실랄한 자본 비판이 아니다. 생명공학이 마련한 돌연변이가 우리의 일상이 되는 현실을 무조건적으로 힐난하지 않는데, 그녀의 모호함이 숨어있다. 「단 백질 구조」, 「SO2」(2001), 「과학이야기」(2002), 「우리는 한가족」 등은 생명기술에 대한 그녀의 종합적 시각을 보여주는데, 대체로 기술과 생명의 새로운 조합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듯 하다. 마치 현실 과학자들과 시민운동가들 사이에 생명공학의 사회적 윤리에 대한 대립각이 형성되고 논의가 미궁에 빠지듯, 그의 예술적 입장도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한다. 징그럽고 낯선 느낌의 돌연변이들에서 관객들은 반감과 수긍의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미리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인 듯 하지만, 왠지 부담스러운 모양새에 독자들은 계속해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어떠면 피치니니는 관객의 갈등을 고의로 유발하는지도 모른다. 자본, 생명, 기술, 인간 요인들이 뒤섞이며 만들어낼 수 있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음울한 미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피치니니에게 「단백질 구조」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알몸의 여성이나 인류 생명의 구원자인 유전자 돌연변이나 질적 가치에 있어선 평등하다. 하나는 상품 물신에 의해 재조합됐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찬란한’ 기술에 의해 거듭났기 때문이다. 상품 물신이 자본주의의 지배적 정서가 되었듯, 돌연변이 애완식구들이 인간의 벗이 되는 생명공학의 물신이 오지말란 법은 없다는 얘기다. 물론 그 아래 깔린 정서는 한층 음울하다. 필 자는, 요즘에 주말 이른 아침에 홀로 거실에서 비디오 게임을 몇 시간이고 집중해 하는 일곱살배기 내 아들을 보고 흠칫 놀라곤 한다. 자꾸만 피치니니의 게임하는 늙은 얼굴의 아이들이 떠올라서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 체념한다. 내 아이의 새로운 놀이를 수긍하곤 하지만, 왠지 한쪽 마음이 무겁다. 피치니니는 우리의 그러한 불편한 심기를 더욱더 뒤흔든다. 페트리샤 피치니니의 웹페이지 http://www.patriciapiccinin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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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그리는 삽화가들 셋, 하퍼, 드루커, 그리고 사트라피

이번 호 지면에는 현재 활동도 그렇지만, 앞으로 주목받을만한 아나키(anarchy) 계열의 두 인물과, 이 둘과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일상 속에서 정치를 그려내는 한 여성을 한 묶음으로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아나키’라 하면 흔히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뜻하는 말로 오해하는데, 여기선 의미의 긍정성을 따져 권위와 집중을 헤치는 힘으로 이해한다. 물론 아나키즘을 현실적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목표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인간 관계가 가능한 소규모 공동체(코뮨)의 구상에 있다. 아나키의 목표의 근사치에 서 있던 인물은 영국의 아나키스트 삽화가, 크리포드 하퍼(Clifford Harper)다.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13살 때 북부 런던의 학교로부터 쫓겨난 뒤로, 60년대 빈민운동에 앞장서 도시 빈집점거(squatting)와 코뮨 운동으로 실천 활동을 넓히고, 70년대 제도교육 없이 삽화가의 계열에 오른 독특한 인물이다. 『계급전쟁 코믹스』(1978), 『급진기술』(1974) 등으로 자신의 아나키즘에 대한 초기 의식을 그림으로 옮기다가, 『아나키』(1987)에선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에세이와 삽화를 통해 그의 시각을 정리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가 지닌 펜의 질감에선 목판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함과 날카로움, 부드러움이 동시에 감지된다. 코뮨의 이상을 그릴 경우 부드러움이, 억압과 비참에 대한 저항에선 강렬함이 온전히 살아 있다. 50대 중년을 넘긴 그는 아나키스트 책박람회를 조직하고, 소규모 독립출판업 운동을 주도하고, 영국의 진보일간지 ‘가디언’에 정기적으로 그림을 싣는 등 아직도 예술과 실천 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 와 살아온 배경이 다르긴 하나, 도시 빈민, 빈집점거 등 현실 실천운동에 개입하며 삽화 창작을 해온 뉴욕의 젊은 작가가 하나 있다. 에릭 드루커(Eric Drooker)가 그인데, 「홍수!」, 「피의 노래」가 그의 대표작이고 현재 ‘더 프로그래시브’ 등에 삽화를 연재한다. 드루커의 주무대는 권력, 비인간성과 소외로 점철된 맨하턴 도시 한복판이다. 넝마꾼, 동냥꾼, 거지, 노숙자, 굶주린 아이,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흑인, 방독면 쓴 전경들과 곤봉 든 경찰,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경찰견,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끝없이 내리는 비, X-레이에 비춰진 뼈들로 표현되는 소외된 인간군상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자본주의의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는 어두운 현실로 표현된다.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날아오르는 비둘기,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인간 태초의 전경과 원주민, 여성과 자연, 앙상한 인간들의 뼈 속에 감춰진 심장, 그리고 권력에 저항하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로 겹쳐진다. 흥미롭게도 드루커는 전미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을 매년 정기적으로 갖는다. 필자도 한번 구경했던 그의 공연에서, 드루커는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입으로는 연사처럼 한 쪽에서 이야기를 풀고,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한껏 분위기를 띄운다. 한마디로 온천지 동네를 돌며 구전을 전하는 입담꾼의 역할을 자처한다. 구경꾼들은 그의 슬라이드 시연에서 소외와 억압에서 인간이 희망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확인한다. 드 루커와 하퍼의 정치적이고 아나키적 만화와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이란 태생의 사트라피(Marjane Satrapi)라는 여성을 주목하고 싶다. 그녀는 프랑스에 살면서 그 곳에서 4권의 『페르세폴리스』란 책을 연재하고, 이를 영어판 2권으로 묶어 일약 스타가 된 여성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삽화가로 활동하던 그녀가 정치 만화가인 쉬피겔만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성장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영어판 1권은 어린 유년시절 겪은 이란 혁명과 이란과 이라크 전쟁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유럽의 유학 생활과 고국에서의 결혼과 이혼 생활을 그린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유년 시절의 눈과 마음으로 권력을 바라보고, 역사와 혁명을 보고, 이란의 남성주의를 대한다는 점이다. 전혀 실천가라고 할 수 없는 사트라피의 유년 성장기에서, 독자는 수없이 많은 뉘앙스와 모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란의 검열사회 속에서 웃지 못할 행태들, 남성의 위선들, 거리에 즐비한 혁명전위대들의 검열들(화장, 머리에 쓴 검은 천과 옷모양새), 파티의 검열, 밤늦은 군인들의 습격과 고문, 총살, 가두시위, 그리고, 종교 사회 속의 미국 소비문화 등이 일상 속에서 흥미롭게 진술된다. 사트라피의 책은 이론을 얘기하고 실천의 대의를 주장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살면서 겪었던 한 소녀의 느낌 그대로다. 앞의 드루커와 하퍼의 강한 남성적 그림에 비교하면, 그녀의 만화에는 겉보기에 단조로운 일기식의 여성적 문체 외에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은 그저 일상의 서술로만 읽히지 않는데 그 매력이 있다. 독자들은 그녀의 글에서 아랍의 얼룩진 정치 문화, 인간의 허울과 욕망, 뿌리깊은 남성성 등을 뼈저리게 배우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들 독자들에게 삽화가라 하면 작가 다음의 서열로 인식되는 느낌이 많다. 이들 셋처럼 자기의 독자적 글을 내 성공하기 전에는 전혀 인지도가 없기 마련이다. 이들은 삽화의 지위를 글 이상의 반열에 올렸고, 게다 만화를 통한 정치 학습에 크나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비록 이들 셋은 언어 코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틀리지만, 당대 사회의 억압과 모순과 부조리에 강하게 반응하고 그 속에서 흔들릴 수 없는 인간의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잡지를 보다 발견하는 그들의 그림들은 대안이 불투명한 우리네 현실을 비추는 조명처럼 환하다. 관련 페이지 Clifford Harper : http://www.agraphia.uk.com/home.html Eric Drooker : http://www.drooker.com/ Marjane Satrapi : http://www.randomhouse.com/pantheon/graphicnovels/satrap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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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매트릭스(VNS Matrix), 사이버페미니스트 예술 동맹

이는 <21세기 사이버페미니스트 선언문>의 일부 내용이다. 1991년 호주에서 네 명의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주의에 도전장을 내며 ‘비너스 매트릭스’를 결성한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비너스’는 사랑의 여신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매트릭스는 ‘어머니’와 여성성의 태생적 공간을 의미한다. ‘비너스 매트릭스’는 사이버공간의 남성성의 초월적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되찾고, 이의 정치적 가능성을 제고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조세 핀 스타, 줄리앤 피어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가명: 요코 인형), 그리고 버지니아 배럿, 모두 넷으로 구성된 비너스 매트릭스는 여성주의 이론가인 사디 플란트와 함께 90년대초 ‘사이버페미니즘’이란 용어를 널리 알린 예술가 그룹으로 꼽힌다. 정보화 시대의 여성과 기술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이들은, 사이버공간 내에서 범람하는 마초 담론의 통제 아래 억눌리고 타자화된 여성들의 인권 회복에 관심을 둔다. 이전까지 기술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심이 주로 형식적인 인구통계학적 분포로 본 여성의 정보통신 기술직 진출 정도로 사회 참여를 논하는 수준이라면, 이들은 기술 그 자체 디자인이 갖고 있는 마초적이고 권위적 질서들을 뒤바꾸려는 정치 예술운동에 한발 다가서고 있다. 선언문에 노골적으로 묘사된 음핵과 음부 등 여성 성기의 표현은 현대 기술문화에 대한 여성의 공개적 도전을 강조하기 위한 도발의 의미로 읽히고, 이를 통해 남성 권력의 핵심인 기술 결정체, 매트릭스를 여성화하려는 정치 선언으로 봐야 한다. 현대 정보기술이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남성성에 기댄 합리화와 계몽 기획에 전면 포섭되었다는 전제 아래, 그 억압적 본성을 사이버페미니즘에 의해 역전시킬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들의 가장 잘 알려진 씨디롬 게임인 “올 뉴 젠”(All New Gen)은 초국적 군산 복합 제국인 ‘빅 대디’ 컴퓨터 본체를 물리치는 여성 전사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내용 중 음부와 가슴에서 광선을 뿜으며 마초들이 일궈낸 기술 체계를 박살내는 서사 구조 속에서 이들의 적극적인 정치 지향성이 드러난다. 더구나 게임에서 우스꽝스런 3차원의 착탈식 남성 ‘자지’가 핸드폰으로 변환 가능하고, 이 폰이 마초 매트릭스의 본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가지지만, 결국 여전사들의 음부에서 발사되는 광선에 무력화되고 음핵에 의해 이는 재전유되는 최후를 맞는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게임 수행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하고, 그러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남성성의 억압적 통제가 구성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기괴한 모습을 띠는지, 그리고 여성주의를 통해 이 억압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파악하도록 돕는다. 게임의 패러디 효과와 현실 학습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1996년 비너스 매트릭스는 활동을 접는다. 하지만, 97년과 99년 ‘사이버페미니스트 인터내셔널’ 국제 행사의 결성을 돕고, 이후 ‘올드 보이즈 네트워크’란 이름으로 사이버페미니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비너스 매트릭스의 예술 경향은 미디어 행동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글, 그림, 게임, 옥외광고 등 각종 미디어들의 활용과 행위 예술 등을 통해 컴퓨터 문화에 각인된 성적 편견을 비웃고 조롱하고 뒤집는 작업을 다각도로 펼쳤다. 점점 더 강고해지는 남성주의의 신화와 인류 기술의 미래까지 좌우하는 마초 문화의 지배와 독단성을 감안하면, 그만큼 비너스 매트릭스와 비슷한 성향의 페미니즘 정치 예술 동맹체들이 복제되어 쉼없이 전염/파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 사이트> - VNS Matrix. http://lx.sysx.org/vnsmatrix.html - Old Boys Network. http://www.obn.org/ - VNS Matrix Manifestos. http://www.obn.org/reading_room/content.html <참고문헌> - Galloway, Alexander R. (2004). Tactical Media. Protocol: How control exists after decentralization, Cambridge, MA: MIT Press. - Kay Schaffer (1996). The Contested Zone: Cybernetics, Feminism and Representation. http://www.lamp.ac.uk/oz/schaffer.html - Sofoulis, Zo?. (2004). Cyberquake: Haraway’s Manifesto. Prefiguring Cyberculture: An intellectual history, Cambridge, MA: MIT Press. - Steffensen, Jyanni. (1994). Gamegirls: Women Working With New Imaging Technologies. MESH: film/video/media/art #3, http://www.experimenta.org/mesh/mesh03/3steffe.html - Electronic Gender: Art at the Interstice, SWITCH(Issue 9), http://switch.sjsu.edu/web/v4n1/toc.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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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자유의 아트 행동주의, 네거티브랜드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음악 저작권 진영에도 균열이 오고 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기반해 유명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조건없이 무료로 배포한다. 강한 저작권의 법적 논리없이도 예술 창작자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보다 많은 창작의 자유를 위해 시장에 군림하는 저작권에 도전하는 기술적 (일대일 파일교환 시스템), 문화적 (개인간 정보공유 문화), 제도적 (정보공유라이선스 개발) 모델도 등장한다. 저작권자들이 이제까지 두려워하던 정보 자유의 문화가 현실화되는 데는 1980년부터 줄기차게 음반 저작권자들을 괴롭혔던 예술가 그룹, 네거티브랜드(NEGATIVLAND)의 공이 크다. 문화 아나키스트 그룹인 네거티브랜드는 음반 제작, 공연, 라디오 방송, 비디오와 책 제작 등을 통해 자본주의 저작권 체제에 대항한 음반 창작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왔다. 무엇보다 저작권자들이 네거티브랜드에 치를 떠는 근거는 이들의 음원 “샘플링” 기법에 기인한다. 기성의 저작권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음원의 불법 꼴라쥬나 무단 전유에 해당하는 이들의 음반 창작 활동은 그 근저에 안티-저작권의 강한 반감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원 샘플링은 2차대전 당시 아방가르드 전위예술의 선봉이었던 다다이즘의 존 하트필드나, 혹은 국내에서 작업하는 박불똥의 몽따쥬 기법과 비슷한 이치다. 마치 신문, 잡지, 사진 등 기성 이미지들의 꼴라쥬가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전달하는 창조적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듯, 네거티브랜드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 음악가들의 음원, 그 외 다양한 청각 이미지를 조합하고 변형해 새로운 음반 창작을 시도한다. 네거티브랜드가 정보 자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불러오게 된 계기는 1991년 발매된 싱글 패러디 앨범 “U2: 아직 내가 찾는 걸 구하지 못했어”의 파장이었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었던 록그룹 U2와 이 밴드와 공생하는 저작권 진영과의 한판 싸움에 의해 네거티브랜드는 저작권 위반 혐의로 거의 4년간 법정 소송 싸움을 벌인다. 저작권 소송 진행과 함께 이들은 창작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대중을 각성시키는데 큰 교육 효과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네거티브랜드는 U2와의 소송의 일지를 담고 있는 “정당한 이용: 문자 U와 숫자 2의 이야기”란 제목의 27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과 72분여짜리 씨디 프로젝트를 완성하기도 했다. 네거티브랜드는 정보 자유의 철학을 따른다. 전통적 의미에서 “오리지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설사 다른 창작자들의 음원을 샘플링해 쓴다해도 이는 단순 짜깁기가 아니라 변형에 의한 새로운 창작물로 거듭남을 강조한다. 랩이나 힙합에서 종종 이용되는 샘플링도 저작권 위반이 아닌 새로운 음악 창작의 기법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른 창작자의 음원을 이용하는 것을 범죄화하기 보다는 폭넓게 다른 이들의 창작욕을 자극할 수 있는 정보의 공개와 공유 문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마크 호슬러와 돈 조이스를 비롯해 네거티브랜드의 구성원들은 U2에 이어 다시 디스펩시(Dispepsi)란 앨범에서 다국적 자본 시리즈 광고물의 음원을 샘플링해 패러디를 시도했다. 펩시 회사의 광고 음원을 샘플링해 다국적 기업 광고의 숨겨진 의도를 조소하고 드러내는 새로운 창작 작업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네거티브랜드는 음악의 본질, 이에 개입하려는 통제와 소유권의 문제, 다국적 광고의 프로파겐더 등을 대중 스스로 재고하는데 일조했다. 단순 음악 제작의 창작 행위뿐만 아니라, 현재 네거티브랜드는 파일 공유,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 재산권 문제, 디지털 시대 예술의 진화와 소유권 문제 등 광범위하게 자본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초기 샘플링을 통한 음반의 제작이 음악 저작권자와 갈등을 유발하면서, 이들은 서서히 정보 가치를 독점화하려는 거대 자본의 힘과 이런 불합리한 자본의 통제가 예술가들의 창작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지각한 듯 하다. 최근 들어 저작권에 직접 관련된 글들의 저술과, 정보 공공 영역에 대한 대안적 관심이 늘고 있음은 이를 반증한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예술가들의 창작은 저작권의 벽에 부딪혀 좌초하거나, 네거티브랜드처럼 불합리한 저작권 체제에 눈을 뜨고 아예 직업적 투사가 되는 두 가지 매서운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들은 애초에 반저작권 행동주의자로 나서기 보다, 창작에 매진하는 전문 예술가로 남길 원했다. 하지만, 음원 샘플링을 통한 이들의 음반 제작 방식은 저작권 극대론자들에 의해 자의반타의반 저작권의 적으로 몰린 경우다. 자연히 이들에게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의 자유를 꿈꾸는 예술가의 지위가 그리울 법하다. 현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음원 샘플링의 방식을 대중화시켰고, ‘오리지널’ 저자의 소멸을 극대화하고 있다. 더 이상 소수에 의한 독점적 정보 소유의 근거가 희박해지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다양한 음반 제작을 통해 창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대중에게 독점적 저작권의 허상을 깨는데 근 25년의 세월의 공을 들인 네거티브랜드의 행보가 앞으론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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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의 (초)현실주의자, 프랭크 무어

돈가방을 챙겨 달아나는 흰 가운의 생명공학자, 그를 따르는 거대한 흰쥐들, 잘려나간 손, 이름 모를 수많은 약품 더미와 무덤들, 그 위를 나뒹구는 실험용 장비들, 누런 돈더미 아래 깔린 희생자들의 피, 생체 실험에 희생당한 환자들과 해골... 이 무시무시한 생명공학의 미래상의 제목은 이름하여 <위저드>(1994)다. 1500년경 히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나 <극락정원>에 비견할 만하다. 현대 의학의 묵시론을 이렇듯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낸 작가의 이름은 프랭크 무어다. 그는 근 20여년간 현대인간의 생물학적 부산물인 에이즈의 고통 속에서 살다 얼마 전에 작고했다. 에이즈에 걸려 48살의 나이에 스러질 때까지, 그는 몸소 현대 생명과학과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에이즈 환자들의 권익을 위한 시민단체 ‘엑트업’ 산하 ‘비주얼 액트’의 초창기 맴버이기도 했다. 예술분야에서 생명공학은 그리 간단치도, 구미가 별로 당기지도 않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한때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기술적 세례와 더불어 디지털 혹은 넷 아트의 붐이 일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현실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무어와 비슷한 초현실주의 계열의 최근 주목할 성과라 하면, 알렉시스 로크만의 <농장>(2000)이나 에바 서튼의 <하이브리즈>(2000), 토마스 그런펠드의 <오誤결합>(1994)과 같은 작품들을 꼽을 수 있겠으나, 생명공학과 예술은 여전히 뭔가 낯선 관계임이 현실이다. 무어는 현대 질병의 고통 한가운데 서 있음에도, 스스로의 비관적 모습에 갇히기보다 그 고통을 초현실주의 미술 기법을 통해 현대의학과 공학의 살벌함을 얘기하듯 화폭에 풀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아마도 이는 그의 유년시절 공상과학SF 소설을 즐기고 생명공학에 관심을 갖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그의 첫 데뷔작이자 생명공학의 문제를 담은 <유전자변형식품(GMO)>을 내놓자마자 그만 에이즈에 걸린다. 우연치곤 너무나 기구한 삶의 여정이다. 그 는 이윽고 유전자 구조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제레미 리프킨 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그만의 비판적 사회공학 접근을 키운다. 이 시기에 확고하게 자본과 생명공학/환경파괴의 불가분의 공생 관계를 파악했던 것 같다. 재미있게도 그 당시 그가 생산한 미술 작품들은 뭐뭐 ‘-연구’란 제목과 함께 그가 고민하는 자본과 생명공학, 환경, 인간의 관계들이 무슨 도식처럼 표현돼 있다. 특히, 그가 지닌 의료약품의 다국적자본에 대한 분노는 후반기 그림 곳곳에서 발견된다. <위저드>나 <오즈>(2000)를 보면 항상 누런 황금색 돈더미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피의 대가 위에 올라선다. 특히 <오즈>에선 자본의 돈더미 위로 유전자 변형의 거대한 식물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쉽게 관찰 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2여년 간의 그림들은 90년대 초엽의 활동 작품에 비해 사회 인식의 통찰력을 보다 잘 반영한다. 당시 어느 작품 활동 시기보다 많은 작품들을 그려냈는데, 초현실주의 기법을 통해 다가올 생명공학의 일그러진 단면들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담고 있다. 이는 소위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표현하는 미래상의 표현 방식과 비슷한 사회적 맥락의 진지함을 보여준다. 소위 ‘매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그의 장르는 예술 기법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어도, 보여주는 의미의 맥락은 관람자로 하여금 너무나도 현실주의적인 진지함을 공감하게 만드는데 그 성과가 있다. 2002년 4월 그가 작고하기 전 대담에서 남긴 말이 의미심장하다. “나쁜 환경에서 인간이 건강할 수 없듯, 탐욕과 착취의 나쁜 인간들이 판치는 곳에서 좋은 환경은 없다.” 이렇듯 그의 가치는 자본-생명과학의 불순한 동맹을 붓의 힘으로 강렬하게 전달할 줄 아는 힘에 있다. 작가는 이미 저 세상에 있지만, 작품들이 가질 의미의 생명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질길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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