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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15
    어사 박문수, 인간의 얼굴
    도마뱀의 꼬리
  2. 2004/10/15
    삼국지(三國誌), 후한말의 계급투쟁 (3)
    도마뱀의 꼬리

어사 박문수, 인간의 얼굴

  어릴 적 봤던 판본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넷을 뒤져도 그 판본에 관한 자료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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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영조가 조선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어느 고을에 못되고 사악한 비리 지역 공무원이 있었다 이거다. 이 고을 저 고을 떠돌아 다니던 우리의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사실을 포착하고 탐문 조사 등을 통해 비리 공무원을 체포하기 위해 관아로 들어선다. 들어서는 타이밍은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보통 불쌍한 양민이 곤장을 맞기 직전 정도가 적당하다.

 

  "그만 둬라."

 

  "누가 관아에서 떠드는겨? 너냐?"

 

  "그래."

 

  "뭘 믿고 떠드는 거냐? 멍석말이 당해서 누워서 나가고 싶은겨?"

 

  "그러지 마라. 형이 세금 떼 먹는 다고 패고, 말 안듣는 다고 패고, 생긴 게 맘에 안들어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봉고파직에 투옥된 애덜이 포도청 연병장에 사열종대 앉은 번호로 두바퀴다. 형이 오늘 기분이 좋거든? 좋은 기회잖냐. 그만두고 내려와서 오부지게 맞으면서 반성 좀 해보자..."

 

  ...

  보통 암행어사하면 이 시기를 많이 떠올리며 유명한 사람도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박문수 같은 경우도 그렇고 정약용이나 박규수 등도 암행어사로 활약한 경력이 있는 양반들도 그렇고. 그렇다면 이 시기 중앙 정부에서 암행어사를 지방에 열심히 파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비리 공무원들이 중앙 정부로 가야할 세금을 착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또한 생산력의 한계에 의해 고통받는 농민들의 봉기가 폭발하면서 지배 계급은 어느정도 양보-영정법, 균역법, 대동법 등의 세제 개혁을 비롯한-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맥락에서 초법적인 착취를 일삼는 비리 공무원들을 일벌백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조 아저씨는 이 비리 공무원들을 공공의 적...이 아니라 탐관오리로 규정하고 박멸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중앙권력이 약화되고 대지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중앙의 지역 통제력은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렸고 암행어사의 이야기는 사그라들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탐관오리들은 인민을 피를 빠는 진드기 같은 놈들이었다. 그렇다면 요 진드기를 사냥하는 박문수와 영조의 무리들은 이들과 질적으로 다른 인간들이었는가? 천만에! 농민의 입장에서는 이들 모두 자신들을 신분제의 굴레 속에 얽어 매고 있던 양반들이었고 자신들이 피땀흘려 추수한 곡식을 단지 토지의 소유자라는 이유로 뜯어가는 봉건 지주들이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2% 정도 있었을 뿐이다. 사실 이들이 세제 개혁과 탐관오리 박멸을 외치며 인간의 얼굴을 한 봉건제를 외치게 된 것도 이들의 선의가 아닌 피착취 농민들의 투쟁의 결과였음은 비교적 명백한 것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탐관 오리가 서 있던 자리에 비리 공무원과 악덕 재벌 들이 줄을 서 있고 반대편에는 청백리 같은 공무원들과 노블리스 오블리제니 뭐니 하며 환원하는 기업인들의-카네기나 빌 게이츠 같은-흉상을 늘어놓으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니 뭐니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럽다. 하지만 이 청백리들의 법과 원칙이 어느 계급의 법과 원칙이며, 자본가들이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내놓는 이 엄청난 기부금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카네기가 시민들에게 공짜 수돗물을 나누어 줬다고 해서 그 부의 원천이 홈스테드 철강 파업을 총으로 무장한 구사대와 주군(州軍)을 동원한 포위전으로 진압하고 노조를 해산시킨 피의 대가에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인간의 가죽을 얼굴에 붙이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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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誌), 후한말의 계급투쟁 (3)

쓰다가 사고로 두 번이나 날려먹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컴퓨터랑 동반자살해 버릴까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이 두 번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날려먹는가'라는 중요한 경험을 얻지 않았냐고 생각하면 억울하지않 ... 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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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투쟁의 계보

 

  황건 농민 전쟁의 분석을 위해 진수의 삼국지나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 당시의 역사서를 살펴보면 상당한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 비중이 엄청나게 작을 뿐더러 그 작은 분량의 상당 부분은 그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중앙 정부와 군벌들의 활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물론 계급 투쟁의 패배 또한 소중한 경험이고 철저히 분석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황건 농민군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역시 자신의 역사를 갖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때건 지금이건.

  뭐 자치통감 류의 이야기를 그대로 엮어봤자 신선에게 경전을 사사받은 사이비 교주의 종교 반란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불가피한 사정으로 황건 농민 전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다른 투쟁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그 연장 선상 위에서 그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황건 농민 전쟁의 연장선에 서 있는 투쟁들을 분석하고 다음 편에서 이 분석과 실제 농민 전쟁의 양상을 바탕으로 그것의 성격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자치통감. 피지배 계급을 위한 몇 줄은 그 먹물의 수만배의 피로 쓰여졌다. 

 

1) 봉건 잉여 공출에 맞선 투쟁

 

  생산력 한계에 의한 농민의 몰락과 유망은 농민 봉기를 촉발하게 한다. 109년 연주와 해주에서 활약한 장백로가 이끄는 농민군, 132년 양주에서의 장화, 142년 서주와 양주를 10년 간 휩쓴 장영 등 안제부터 영제까지의 80년간 100여 차례의 농민 봉기가 발생한다. 이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역시 사서에서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당시 유행하던 가사에서 이들의 성격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소민의 폭동은 풀과 같아 밟아도 다시 살아나고 머리는 닭과 같아 잡아도 다시 운다. 관리를 경외할 필요도 없고 백성을 가벼이 여길 필요도 없다." 이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봉건적 지배와 그 핵심 고리인 신분제와 봉건 관료의 지배에 분개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타격을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경제 요구 역시 봉건적 잉여 공출에 대한 타격에 있었다. 많은 농민 반란이 세금과 부역 등의 경감,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로 삼았다. 중국의 농민 투쟁에서 그 경제적 요구가 사서에 남은 것은 명 말기의 이자성군의 요구가 대표적인데 이들의 경제 슬로건에는 균전(均田), 부당차(不當差), 평매평매(平買平賣) 등이 있었다. 균전과 부당차는 농민들의 요구로 부당차는 요역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균전은 논란이 있는데 말 그대로 대지주 소유를 철폐하고 직접 경작자에게 토지를 분배하자는 혁명적 요구인지 아니면 당시 지주 소유 토지와 소농 토지 간의 불평등한 토지세를 균등하게 부담하자는 개량적 요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평매평매는 도시 상인들의 요구로 무거운 거래세 등의 봉건 지배자의 억상 정책의 철폐를 요구하는 것이다.

 

  농민들은 봉건 지배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그 지배를 대체할 대안적인 정치 체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들의 봉기는 많은 경우 지배 계급 일부 분파-중앙이건 지방이건-의 지도에 종속되었으며 혹은 그들 지도부 자신이 황제, 진인 등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봉건국가의 수장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봉건제' 이상을 제시할 수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주역 중 하나이자 <제 3신분은 무엇인가>를 쓴 시에예스는 '정치적으로 제 3 신분은 무엇인가'의 질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모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분제의 철폐, 공화제, 민족국가는 그의 선언을 실현시켰다. 후한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분개하였으나 '모든 것'이 될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다.

 

2) 농민공동체로의 복고 운동

 

  봉건제 초기에는 많은 경우 작은 농민 공동체를 단위로 생산 단위가 조직되었다. 후한의 경우 '향'이나 '취'가 바로 그것이고 카톨링 왕조 시대의 프랑스의 경우 '망스(manse)'가 그것이다. 이러한 생산 단위가 존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생산 수준의 저열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 우경의 시작 등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최소 생산 단위를 축소시키고 농민 공동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후한말의 농민 공동체 붕괴는 부농의 성장과 빈농의 몰락이라는 농민 사이의 계급 분화를 촉진하였다.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계급 분화에 의해 유망한 농민과 빈농들은 이러한 변화에 절망하였고 과거의 농촌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것을 염원하였다. 이러한 농민 일부 분파의 염원은 적미(赤眉) 농민 봉기 등을 통해 나타났다.

 

  이는 국가 봉건 지배층의 일부 분파에서도 지지되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국가 봉건제는 농민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조직되어 있었고 국가봉건제의 약화와 함께 지방 영주들이 이러한 농촌공동체를 소생산자들로 분화시킴으로서 봉건제를 재조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 봉건제의 약화를 가져왔고 관료와 관료의 전망을 가지고 있던 인텔리들을 자극하였다.

  낙양의 태학 등을 중심으로한 이 엘리트(당인이라고 불렸다)들은 농촌공동체의 재건, 국가봉건제의 강화, 호족의 견제, 이러한 개혁을 행할 의지가 없는 외척-환관 분파의 척결을 내걸고 청원에서 쿠데타 모의에 이르는 투쟁을 감행하였으나 환관-외척 분파의 반격에 의해 이 지배 계급의 급진적 분파는 2차에 걸쳐 파괴, 소멸되었다. 이를 당고의 화(黨錮之禍)라고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 역시 이 당고의 화에 의해 몰락한 명문의 후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 묘사되는 장비는 꽤 인텔리이다.)

  물론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국가 봉건 세력의 이해가 충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가 봉건 세력의 궁극적인 이해는 지역에 대한 통제권 강화를 통해 향촌의 통제권을 농민공동체가 아닌 관료 기구로 흡수하는 것이었고 이후의 국가 봉건제는 이러한 양상으로 조직된다. 다만 이들은 시급한 과제로 호족에 의한 국가봉건 체제의 침식을 막을 필요가 있었고 자신들의 부족한 역량을 농민들에 대한 양보-그것을 통한 지지의 획득-을 통해 보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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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두 경향과 실제 투쟁 전개 양상을 기초로 하여 황건 농민 투쟁의 성격을 분석하겠다. 아, 그리고 다음편에는 연의나 정사에 등장하는 애덜도 좀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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