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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10/02
    군대란 무엇인가?(1)
    도마뱀의 꼬리
  2. 2004/10/02
    150cm 라이프, 수요와 필요
    도마뱀의 꼬리

군대란 무엇인가?

* 이 글은 이러나님의 [정말 싫은 말] 을 보고 삘 받아서 주위 사람들도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 쓰게 된 트랙백(이게 뭔말이야?)입니다.

  87년 투쟁의 성과일까?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회에 그 약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구타와 기합으로 유지되던 공장 규율은 세련된 규칙과 평가제로 개편되었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유지되던 초중고 역시 '사랑의 매'-그 표현방식이 극도로 새디스틱하다는 것이 문제지만-가 내신 반영으로 대체되고 있다. (초중고 순으로) 무조건 쥐어패고 보던 사회는 대화의 외피를 거치게 되었고 노사정 위원회나 교장선생님과의 대화의 시간 ... 등의 극도로 무의미하고 기만적인 자리도 심심찮게 만들어지(려)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시체는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다. 87년의 타협은 파시스트들의 정권을 연장시켜주었고 국가 기관에서 언론에서 경찰 정보과에서 그들의 하수인들을 아직까지 남아있게 하였다. 아직도 상명하복의 병영의 규율은 학교와 공장에서 관철되고 있고 국가보안법이나 족벌 기업 등은 싱싱하게 그 모습을 뽐내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뒷걸음질 위에서 파시스트들의 세상은 임종의 순간을 계속 미루고 있다.

 

  그렇기에 파시즘이 끝장났다고 학교에서 배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것을 늘 암기해온 사람들, 특히 사회초입자들에게는 세상 엄밀히 말하자면 파시즘의 잔재는 도대체가 불합리한 것일 수밖에 없다. (파시즘 덕에 더 근본적인 불합리는 쉽게 그 모습을 숨긴다.)

 

  군대는 파시즘과의 대화이다. 파시즘이 불합리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군대는 2년 넘는 시간 동안 악랄하고 끈질기게 설득한다. 군대는 부당한 권위에 굴종하는 법, 불합리한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는 법, 강자에게 약하게 굴고 약자에게 잔인해 지는 법 등 파시즘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게 해 준다. 군대는 우리에게 파시스트와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적어도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부당한 권위에 쉽게 굴복하고 뒷걸음질치는 자유주의자들을 용서하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파시스트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군대를 갔다와야 정신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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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cm 라이프, 수요와 필요

  얼짱, 몸짱, 별별 짱들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필자가 소싯적에는 키짱이라는 말이 없어서인지 별로 우유라던가 유제품을 그다지 열심히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키는 2년전 기준으로 남한 평균신장(성별기준)에 도달하였고 그리 키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노인네들이 죽고 애덜이 자라는 통에 슬슬 평균신장이 필자의 키와 거리를 벌이고 있다만)

 

  키가 사회생활에서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일정 이하(혹은 이상)의 키는 외모로서의 영향력을 넘어 그 이상의 생활을 제약하는 핸디캡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래 150cm 라이프(번역되었다.)의 주인공인 150cm의 키로 살고 있는 일본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이 책의 저자이기도한 타카기 나오코 씨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작아도 까마귀보다는 크고 아무리 커도 전봇대보다는 작다

 

  그녀가 유쾌하게 털어놓는 일상의 제약은 웃어넘기기에는 뒷맛이 쓰다. 표준신장(많은 경우 남성의)에 맞추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그녀에게 지하철은 생존해내야만 하는 공간이고 높은 선반의 물건에 손이 닿지 않는 그녀에게 아르바이트는 도전이요 혼자 살기는 모험이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20살까지는 중학생 요금을 냈다는 둥, 어릴 때 입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둥의 작은 키로 살아가는 장점이란 키가 작다는 것이 정상적 성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현실과 가장 작은 사이즈의 성인 기성복의 사이즈가 잘 맞지 않는다는 비참한 현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제약은 키 작은 사람에게 집중되지는 않는다. 해외 토픽 등을 보면서 평생 택시를 못타봤다는 2m30cm의 아저씨의 이야기이나 뚱뚱한 사람에게 2개 좌석 분의 요금을 물리겠다는 미국 항공사에 맞서 싸우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키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 나름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뚱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 권리와 획일적인 높이에 분포한 지하철 손잡이는, 획일적인 크기로 재단된 비행기 좌석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생산이 다양한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요, 즉 지불능력을 가지지 못한 집단을 소외시키면서까지 최대 이윤을 거둘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돈자루 씨는 필요가 있음에도 수요가 없는 자들에게 역으로 소리친다. 몸을 세계에 맞추라고. 장애인 탑승자가 적기 때문에 KTX에 단 3%의-국가기관에서 이야기하는 장애인 조우율-장애인 좌석을 배정하기 거부하는 철도청은 장애인들에게 이동할 수 없는 세상에 몸을 맞추라고 소리친다. 키 작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한 손잡이가 아닌 칼슘 우유와 호르몬 주사를 이야기하고 뚱뚱한 사람에게 그들에게 맞는 좌석이 아닌 탑승 거부와 다이어트를 이야기한다. 오늘도 수많은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어린이들이 가족과 국가 기관(학교)의 폭력 속에서 오른손으로 연필을 옮기고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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