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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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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더욱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더욱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역시나 하는 실망감으로 바뀌는 경우를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보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한국판 뉴딜’ 은 경기부양의 효과를 도모한다고 했지만, 결국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적립된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 연금 등 공적 연기금을 건설투기에 쏟아부어, 결국 일부 극소수 자산가들의 배만 살찌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시작도 하기 전에 비판받고 있다.

지난 10일 발표된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 정책’이라고 명명된 국정과제의 수행계획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일하는 빈곤층’의 존재는 자못 심각하다. 이들은 대부분이 실업과 반(半)실업, 취업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들이다. 따라서 정부 실업통계에서도 이들은 제외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이거나, 임시적인 일자리에 종사한다. 또한 이들 중 대부분은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 등 4대 사회보험 적용 대상이긴 하지만 이러한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연금은 23%, 산재보험은 42%, 고용보험은 18% 정도가 그 혜택을 받고 있다고 보고된다. 그리고 임금도 지극히 낮거나 불규칙하게 지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생활수준은 매우 낮다.

이러한 ‘일하는 빈곤층’이 132만 명쯤 된다고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빈곤 가구 비중은 4년간 20.6∼21.5%에 이른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16.5%는 ‘항상적인 빈곤’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빈곤가구 중에서 취업자가 있는 가구의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는 것이다. 즉 일을 하더라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하는 빈곤층’의 존재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노동시장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언제든지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임금 수준을 높이지 않아도 된다. 최근에 들어와서 이들의 존재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생활수준을 영위하지 못하는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도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하지만 ‘일하는 빈곤층’의 존재가 자본과 권력에는 또 다른 짐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들의 생활실태와 삶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이로 표출되는 자살자의 증가 등 사회적 문제는 정권과 자본을 위협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삶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정부 산하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제출한 ‘일을 통한 빈곤 탈출 지원 정책’ 또한 그러한 요구 속에서 제출된 것이다. 보고서에서도 이는 그대로 표현된다. “최근 실업률은 안정되었으나 빈곤율은 상승”되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따라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증가”에 두고 있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에 따라 구축된 사회안전망도 “근로빈곤층 문제에 대해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위원회에서는 일하는 빈곤층에 대한 교육·의료·주거지원 확대, 근로소득보전세제(EITC)제도 도입 추진, 사회적 일자리 확충, 자활지원정책 대상 확대 및 내실화, 저소득층 창업 지원 제도 혁신 등을 주된 전략으로 제출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더욱 열심히 일하라’라는 것이다. ‘일자리가 곧 복지이다’라는 것의 재천명이다. 즉 ‘일을 열심히 하면 빈곤에서 탈출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왜 ‘일하는 빈곤층’이 실업과 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왜 이들은 항상 저임금 상태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항상 빈곤의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 ‘노동시장 양극화’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에 대한 처방은 없다.

비록 5가지 방향으로 제출된 전략이 단돈 만 원이 아쉬운 이들에게, 당장 일할 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과 같은 효과를 낳을 지는 모르지만, 가뭄 해갈에는 턱도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일하는 빈곤층’이 사라지거나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위 5가지 전략은 유럽이 복지국가 모델에서 점차로 ‘일과 연계된 복지’로 전화하는 전략을 취한 것과 이미 70년대부터 이를 구체화한 미국의 사례를 따라 이를 모방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미국 사회에서 빈곤을 탈출한 계층이 늘어나 빈곤율이 줄어 들었다는 보고는 없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국가에서 건강보장을 해 주는 메디케이드, 메디케어와 직장에서 민간보험 가입을 통해 혜택을 받고 있는데, 이 모두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이 4천만 명이나 된다. 이는 최근에 더욱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일을 안 하거나, 못 하거나 혹은 덜 열심히 해서 ‘빈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통한’ 빈곤 탈출 전략은 ‘사후 약방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면 일시적인 대증요법으로 지속적인 악순환을 야기해 병의 골만 더 깊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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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다시 되짚어가는 중이다.

혹시나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흘려 듣는 것은 아닌지,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시하지 않고, 경청하면서 잘못된 내 오류들을 고쳐나가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는 중이다.

 

오늘은 그 덕분에 내가 치밀하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다음번엔 더욱 더 치밀하게 표현하고,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더욱 더 정치적이고 제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나를 포장하려는 노력으로 생각되는 것은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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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상품이 아니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한장. 교육은 상품이 아니지. 그건 상식아니냐구.. -200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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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함과 고집의 만남

내 성격 난 우유부단한 성격이다. 맺고 끊는 것을 잘 하지 못하고, 그래서 때로는 생각하는 것조차도 한가지 생각에 몰두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생각을 하다가도 다른 생각이 떠올라 뒤죽박죽 섞여버리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다. 사람을 맺고 끊는 것도 역시 모질지가 못해서 이래저래 인간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질질 끌려오는 경우도 있다. 아니 많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다시는 저 사람과 만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가도 돌아서면 금새 잊어버리고 헤죽거리는가 하면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부딪히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에게도 한숨 한번 쉬고 금새 변명을 만들어준다. 이런 성격탓에 일을 할 때도 정확하게 한번에 하지 못하고 한번 두번 되풀이하면서 마무리를 지어나간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때로는 단칼에, 깔끔한 마무리가 필요하기에 내 성격으로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대책은 남들보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하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수도 없이 나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면서 내 처음의 의도대로 틀을 수정하고 맞추어 나간다. 그게 내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이건 다시 말하지만 내 우유부단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절묘하게 고집과 맞아떨어지는 건, 내 처음 의도대로 맞추고 방향을 다듬어가고 진행해서 목표를 이루어가는 것. 이 과정에서 남들의 눈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뜻대로 고집대로 일을 진행해가는 것으로 비춰진다. 절대 남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완벽을 향해 고치고 또 고치고, 결벽증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 내 황소고집은 우유부단한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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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난 지각 한번을 모르는 범생이었다. 대학을 와서 누군가로부터 강제되지 않는 생활에 (사실...실상 학점에는 강제되는 생활이었지만) 비오는 날이면 학교를 가지 않았다. 기분탓인 것도 있긴 했는데, 고등학교 방학때면 비오는 날엔 따뜻한 방바닥에 배깔고 옆엔 먹을 것을 두고 만화책을 보던 느긋한 습성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결정적 계기가 비오는 날엔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게 만들었는데, 그 계기라 함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젖은 구두로 내 발을 밟고는 미안하다는 말 없이 버스에서 내리는데, 순간 난 정말 살인을 할 뻔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자는 내 발을 밟았다는 사실을 잘 못 느꼈던가, 아님 바쁘게 가야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순간에는 아무 일 없이 내리는 얄미운 뒤통수를 보면서 뛰어내려 머리채를 휘잡고 머리통을 바닥에 수 없이 내리쳐도 모자를 기분이었다. 그렇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도 잠깐 물길에 미끄러져 발을 밟았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낀 내가 무섭다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 요즘 세상엔 순간적 분노로라도 충분히 살의를 느낄 수도 있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다시는 그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비오는 날에는 나가는 것을 꺼려하던 까닭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이상하게 운이 좋지 않는가 싶더니 가파른 경사길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 했다. 길을 내려오는데, 어느 예술학부에선가 깜짝 이벤트 식으로 학교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해 놓은 것 아닌가. 내가 넘어질 뻔 한 길에는 밧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밧줄을 발견한 순간 길을 올라오던 흰차가 마주오는 차를 피하려고 내 쪽으로 차를 돌진해 온 것이었다. 순간 나는 차를 피하려고 발을 옆으로 딛다가 밧줄에 미끄러져 휘청거렸는데 미끄러질뻔 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를 향해 돌진해 오던 차를 향해 달려가 뒷 유리창을 박살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실제로 몇 걸음 다시 올라가다가 경사길이라 그만 뒀는데... 거의 5년만에 과거에 느꼈던 비오는 날의 급격한 폭력 충동이 날 너무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비오는 날은 이상하다. 대략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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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 어머니 술 마시고 담배피는 ( ) 연애하고 싶어하는 ( ) 살의를 느끼는 ( ) 자위행위를 즐기는 ( ) 위의 ( )안에 만약 성인남성을 넣어보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싱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 )안에 어머니를 넣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술 마시고 담배피는 어머니(“세상에, 아이를 생각하셔야죠!”), 연애하고 싶어하는 어머니(“남편이 없나봐. 자식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살의를 느끼는 어머니(“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우셔야할 분이... 끔찍해라.”) 자위행위를 즐기는 어머니(“어머나,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께요”)’라는 문장을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자애로운 성모마리아를 연상시키는 ‘모성본능’이라는 신화는 일터와 생활공간의 분리를 동반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다. 그것은 ‘오염된 세상을 구원하는 안식처’로서의 가족과 생산성과 효율성에 기반한 삭막한 일터라는 극단적인 상징체계와 함께 이루어진다. 생산, 정신, 이성과 합리성, 효율성, 일터는 남성성과 결합하게 되고, 소비, 육체, 감성, 애정, 가족은 여성성에 적합한 것으로 정의된다.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가 강조되고 가족과 일터에 상응하는 대조적인 특징들이 ‘발명’된다. 이전까지 남성과 함께 집 안팎에서 함게 일했던 여성은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청천벽력같은 “내가 하루 종일 일터에 가서 돈 벌러 나갈테니 집에 있으라”는 통고를 듣게된다. 중간계급 이상의 여성들은 집에 남아서 아이들을 돌보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아이는 더없이 소중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각별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아동기의 탄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걸음마만 할줄 알면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막걸리 주전자를 갖다 주며 농사일을 거드는 노동자이자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었던 아이들이 거듭나게 된 것이다. 아동기의 탄생은 ‘만약, 이때 특별한 보살핌이 주어지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것은 남편이 일터로 출근한 집에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중간계급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 하는 논리이다. 동시에 어린 자녀들과 떨어져서 일하는 어머니들을 불안하게 하면서 그녀들을 비난하는 이데올로기로 발전하게 된다. 어머니는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일차적인 책임자라는 모성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지만 가장 은폐되어 있다. ‘모성본능’이라는 신화는 여성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체육복과 운동화를 세탁하는 것, 방청소 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보게하지 않는다. 배 고프면 밥 먹고 싶은 식욕이 생겨나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하게되는 본능적 행위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라 자동판매기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근거는 자판기에서 설탕프림커피라는 명령버튼을 눌렀는데 블랙커피라는 결과가 나왔을 때의 황당함에 비유될 수 있다.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어?”라고 비난을 받는 어머니는 그런 비난을 하는 당사자가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욕구들의 일부에 잠시 관심을 가졌던 여성들이다. 자식의 이름으로 된 버튼을 누르면 신속하게 보답할 것으로 기대되는 어머니들의 보살핌 행위가 노동이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차별받는다. 대형마트 식품매장에서 하루종일 서서 “지나가시는 고객여러분, 맛 있는 젓갈 한번 드셔보고 가세요”라고 소리치는 여성들의 노동은 저숙련노동으로 평가되어 저임금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가족에서 “아가야, 이거 한번 먹어봐라”라는 모성본능에 입각한 행위를 장소만 옮겨서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별다른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는 아이의 안전을 책임지며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일차적인 주체는 어머니로 상정하고서 모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녀들의 등굣길에 횡단보도에서 서서 자동차 사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녹색어머니회가 있다. 그러나 녹색아버지회는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되는 어머니급식 당번 제도는 어머니들의 취업 유무와 상관없이 2주에 한 번씩 반강제적으로 어머니들을 불러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밥과 국을 푸게 한다. 어머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후의 식민지이다. 가족, 학교와 교회, 노동조합, 노동시장, 국가는 모성본능, 자녀양육의 1차적 책임자(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들의 노동을 무급으로 착취하고 있다. 도대체 ‘미혼모’는 있는데 ‘미혼부’는 어디에 있는가? ‘부성본능’은 없는데 왜 ‘모성본능’만 이 거리를 활보하는가? 이윤추구와 생산성을 속성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성본능’이라는 신화에 입각하여 여성노동자를 다양하게 차별하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를 식민지화하고 자신이 식민지 종주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성찰적으로 반성할 때 변혁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우리가 ‘신성’해야 할 어머니가 ‘속물근성’을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거나 “어머니!”라고 외치며 영원한 향수의 대상으로만 그녀를 고정시키고 있다면, 착취의 메카니즘에 눈을 감고 있는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의 욕구와 권리의 주체가 될 때, 자판기가 아닌 인간으로 대우받을 때, 우리들은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진보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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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과는 다른 일들'중에서

눈물이란 철저히 이기적인 현상이며, 불편한 죄의식을 떼버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택한 통과의례의 한 방식이란 것을 그때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 때 대부분 자기가 왜 우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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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다.

너무 웃어서

 

그래서 더 이상 웃지 못할 정도로

얼굴 근육이 땡겨서

그래서 웃지 못하는

그런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닌데도

그런데도 지금 나는 얼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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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섹슈얼리티,그리고 장애여성 정체성 찾기[트랙백시험]

* 이 글은 알엠님의 [여성,섹슈얼리티,그리고 장애여성 정체성 찾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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