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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3호] 트리폴리에서 보내온 글 - 이것은 철저한 민중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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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에서 보내온 글]

 

이것은 철저한 민중혁명이다!

 

 

번역 : 양재훈

 

[편집자] 이 글은 리비아 혁명의 한 참가자가 미국의 인터넷 신문 ‘사회주의노동자’(SocialistWorker.org)에 보내온 9월 20일자 반론 기고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인터넷 신문을 발행하는 <국제사회주의자조직; ISO>은 8월 23일자 ‘리비아에서 실제로 승리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사실상 리비아에서 승자는 리비아 민중이 아니라 나토(NATO)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 기고 글은 리비아 혁명은 “철저한 민중혁명”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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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것은 철저한 민중혁명이었다. 트리폴리는 트리폴리 바깥의 반군에 의해 해방된 것이 아니다. 안으로부터, 8월 20일 트리폴리 시 전역의 많은 지구들에서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다. 21일 낮에는 다수의 지구들에서 카다피 보안군이 완전히 박살났고, 다른 지구들에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 반군들이 처음으로 트리폴리에 들어와서 보안군 잔당들과 교전을 벌였다.
  매 결정적인 국면마다 혁명을 추동한 힘은 대중들이었다. 벵가지와 서부 도시 진탄의 최초 봉기에서든 트리폴리 및 그 주변 지역의 봉기에서든 주민 대중들이 기본 동력을 이루었다.

 

  오늘(9월 20일) 트리폴리의 거리들은 일반 민중들이 장악하여 다스리고 있다. 트리폴리 지구들마다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각 지구 인민위원회는 산하의 무장한 소 지구위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무장 소 지구위원회들은 그들 지구로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고, 현재 경찰이 없는 상황에서(경찰은 이제 막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실상의 치안행정 당국 역할을 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리비아인 친구 하나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세상이 다 뒤집어졌어.” 지구 인민위원회들은 보안부대 건물들부터 카다피 궁에 이르기까지 구 지배계급 권력의 심장부들 내부를 공개했다. 누구든 지금 카다피의 별궁들을 거닐면서 구경할 수 있고, 보안부대 문서들을 열람할 수 있다. 지구 인민위원회들은 카다피의 저택들과 교도소들을 접수하여 일종의 박물관 같은 것으로 바꿔놓았다. 평범한 리비아 인민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돈으로 지은, 카다피의 딸 아이샤의 저택에 딸린 거대한 수영장은 이제 공공 수영장으로 바뀌었다. 몇몇 지구들에서는 주민들이 호텔과 레스토랑을 접수하여 카다피를 지지하는 그 소유주들을 내쫓고 주민들 스스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봄 혁명 이후 이집트에 충만했었던 그 인민의 자기 권력 분위기, 불가능한 것을 상상했던 그 동일한 분위기가 여기서도 존재한다. 

 

 

2. 현재 혁명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세력들이 여럿 있다. 1) 지난 2월의 봉기 첫날 이래 트리폴리에서 운동을 이끌어온 트리폴리의 혁명적 지도자들. 이들은 나토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2) 트리폴리 출신 혁명가들로서 외부에, 벵가지나 튀니시아나 기타 외지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사람들로 지금 트리폴리로 돌아오고 있다. 3) 저명한 성직자들이 이끄는 이슬람주의 세력들. 4) 벵가지에 근거지를 두고 나토의 지원을 받는 국가과도위원회(NTC), 그리고 특히 그 안의 내각 역할을 하고 있는 NTC 집행위원회. 5) 트리폴리 출신 군 세력. 이들은 두 파벌로 갈라졌는데, 하나는 이전에 이슬람주의자였던 압델 하킴 벨하지의 지휘 아래 있고, 다른 하나는  이전에 카다피 측근들이었던 인사들의 통제 아래 있다. 과거 미국 CIA가 카다피와 공모하여 체포해서 고문하고 투옥했었던 벨하지는 동부 리비아에서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고, 카타르 정부가 뒤를 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리비아 전역에서 온 약 40개의 반군 카타이바(병단).

 

  이들 카타이바는 대부분이 소도시나 부족에 기반하여 조직되었고 재정도 보통 자체 독립적으로 꾸리고 있다. 많은 경우 카타이바들은 리비아 밖의 부유한 사업가들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카타이바들은 위에 언급한 집단들 그 누구의 권위 아래에도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 왔다. 예를 들어 미스트라 병단은 트리폴리의 일부 지구를 접수하여 인민위원회들과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 세력 가운데 최종 승자가 누구일지는 전혀 불확실하다. 미국이 미는 NTC는 매우 취약하며 민중의 지지도 제한되어 있다. NTC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미 벵가지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9월 중순 현재 NTC는 여전히 나라의 지배권을 놓고 다양한 반군 그룹들 및 정파들과 경쟁하고 있다.
동시에 NTC는 서방과 끈끈한 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현지의 UN군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해야만 했는데, 이는 많은 부분 거세게 올라오는 민중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3. 반란 세력이 사분오열되어 있는 것은 카다피 지배의 특징에서 비롯한 결과물이다. 석유 자금(오일머니)에 의존하여 장기 집권한 카다피는 다른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류의 정치 제도들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리비아에는 집권당 같은 것이 없다. 관료집단도 그 규모가 매우 작으며, 군대도 취약하고 분열되어 있다. 카다피의 리비아에서 권력은 대개 비공식적이며, 카다피가 석유 자금을 하사하여 키우는 충성파 ‘장학생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행사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인맥을 형성했는데 그 정중앙에 카다피가 있었다. 지배계급의 기반은 극히 협소했다. 일부 부족, 카다피 일가, 그리고 일군의 보안기관들이 카다피가 하사하는 ‘석유 장학금’의 주 수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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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에 리비아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전환했을 때도 경제 개방으로 수혜를 본 것은 지배계급 가운데서도 아주 소수의 일부 층뿐이었다. 이집트, 튀지니, 시리아의 혁명과는 달리 지배계급의 한 부분이 이탈하여 반란 진영으로 넘어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리비아 부르주아지의 이 부분, 특히 이전의 군 장성들과 각료들, 주요 기업가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의사, 변호사 같은 중간계급은 자신들의 세력이 거의 없는 가운데 전적으로 궐기한 민중들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이 대중 동력 또한 카다피 지배의 특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리비아 경제는 극히 미분화된 상태로서 대외무역이 거의 다변화되어 있지 않다. 카다피 집권 40년 동안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석유가 나라의 일차적인 경제활동이다. 몇몇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개발 프로젝트를 차치하면 국가 재정지출의 대부분이 카다피 ‘장학생’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아니면 대외 사업들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노동자계급도 규모가 극히 작다. 이웃 이집트와 튀니지에 비해 훨씬 작다. (다름 아닌 석유 부문 자체가 압도적으로 외국인 이주 노동에 의존하고 있고, 소비재는 대부분 수입하고 있다.)

 

  동시에 카다피 치하에서 인민들의 삶은 점점 더 곤궁해졌다. 집세와 식료품 가격이 치솟았는데도 임금은 거의 1980년대 수준에서 동결되었다. 약간의 국가 보조금도 신자유주의 전환으로 삭감되었다. 1990년대에 계속되는 유엔 금수 조치로 인해 석유부문의 시설 노후화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 시기에 국가 탄압도 계속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 요인이 결국 혁명을 낳았다. 그러나 이집트, 튀니지와는 달리 강력한 노동자계급의 결여(수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정당들과 시민사회의 부재, 그리고 여기에 더해 시위 초장부터 카다피의 강경 학살 진압으로 리비아의 투쟁은 무장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무장 투쟁은 구 지배계급에서 떨어져 나온 분파의 지휘 아래 들어갔지만, 이것은 무작위의 우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란에 나선 청년들은 자신의 부족이나 출신 소도시들에 기반을 둔 혁명 그룹에 들어갔고, 어느 사업가가 자신들에게 무기와 차량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갈렸다. 반란자들의 정치적 수준은 매우 낮다. 반군의 승리에 재앙처럼 따라붙은 사악한 인종주의도 이 때문이다.

 

 

4. 혁명의 민중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리비아에서 정치구조의 취약성으로 볼 때 혁명으로부터 좌익 세력이 솟아나올 전망은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카다피 치하에서 그러한 전망은 더 희박했었다. 그리고 지금 혁명은 리비아 사회에 그러한 상황 발전이 일어날 공간과 여지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조건이 빨리 오지 않을 수 있다. 거기에는 경제의 재편과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리비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회를 맞고 있다. 이 이유만으로도 이 혁명은 지지받아야 한다. 더욱이 이 혁명의 승리가 아랍 세계 전역에 걸쳐 -- 특히 시리아와 예멘에서 --  봉기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정상에 오를 세력이 카다피와 비슷한 방식으로 지배를 계속하리라는 것은 가능하다. 누가 리비아 혁명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것인지를 말하기에는 지금 너무 이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최종 결말을 결정하려고 하는 세력이 누군지 알고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계속해서 혁명을 자신들의 이익에 종속시키려고 한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반란 진영 가운데 국민적 기반을 결여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을 밀어 왔다. 그리고 이것은 아랍 혁명들의 행로에 대한 통제권을 틀어쥐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저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들의 필요에 복무하는 제한된, 관리된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 활동가들에게 놓인 주된 임무는 이러한 현실과 대면하고, 리비아 혁명이 성장할 공간을 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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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3호]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계급무의식의 대립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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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식과 파시즘의 계급무의식의 대립구조

 

 

 

오세철

 

 

  나는 ≪혁명≫ 창간준비 2호에 실린 ‘계급의식, 계급무의식 그리고 혁명’라는 이론적 도입 글에서 계급의식에 대한 긍정적 확신을 통한 혁명의 필연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거나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에 종속되어 그 형식을 뛰어넘는 혁명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비관론적 접근 모두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정치경제와 의식의 통합을 말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맑스 이후의 조야한 경제결정론과 그에 대한 왜곡된 반작용으로서의 자발성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잘못된 해석임을 지적했다.
  또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맑스, 트로츠키, 라이히 등 계급 조건화된 계급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욕망과 그 억압, 그 구체적 형태에 대한 인식이 자본주의 철폐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사회 건설 계획의 일부임을 확인해야 함을” 제안하였다.
  두 번째 글에서는 라이히를 통해 맑스주의 심리학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파시즘 분석을 통해 노동자대중의 계급무의식의 억압구조와 혁명의 반혁명화의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한다.

 


1. 계급의식에 대한 라이히의 문제의식
 
  맑스주의의 혁명적 실천을 위한 성정치 운동을 전개한 라이히는 1930년 11월, 맑스주의 노동자학교에서 ‘맑스주의와 심리학’, ‘성학’을 가르쳤는데 그 당시 성개혁 단체는 80여개가 있었고 회원은 3만5천명 정도였다. 이는 그가 독일공산당 집행위원회에 공산주의 기초 위에서 성정치적 대중조직의 창설을 제안한 성과였다. 그는 분산된 성정치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필수적인 요소인 성억압과 성빈곤에 주목했다.
  그는 히틀러의 프로그램이 보통 인간의 성격구조의 반영이라고 보았고, 성행복과 자유를 향한 대중의 갈망과 두려움의 대립 속에서, 대중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는 투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던 히틀러에게 의존하게 된 파시즘의 심리구조를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그리고 1932년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쓴다. 그는 1933년 11월, 독일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1934년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를 발표한다. 그 글에서 그는 ≪파시즘의 대중심리≫ 후에 제기되어 온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 말하고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의 심각한 패배가 다른 나라에 불리한 영향을 미쳤으며, 파시즘이 오늘날 도처에서 혁명운동에 대해 빠르게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투쟁 목표로 삼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혁명가들의 노력이나 고통, 의도를 아예 모르거나 조금밖에 모르는데, 이는 예속된 그들 자신들의 존재를 점점 더 무의식적으로 이끌어가며, 그러한 방식으로 자본의 지배를 위한 지지대가 된다고 보았다.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의 글은 비정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들이 혁명의 미래 지도자들에게 하는 호소라고 하면서, “‘역사적 과정’에 대한 파악을 적지 않게 고집하면서 더 잘 이해하라는, 그들의 현실 문제들과 욕망들을 더 적절하게 밝히라는, 역사에서 ‘주체적 요소’에 대해 좀 덜 이론적으로 파악하라는, 대중의 삶에서 주체적 요소가 나타내는 것들을 더 잘 이해하라는 호소”임을 강조한다.1)
  그는 가까운 미래에 독일에서의 예측할 수 없는 봉기의 가능성을 내다보면서도 노동자 운동이 이론과 조직 면에서 한 번 더 결집하려면 몇 년이 더 필요하다는 것과 새롭고 훌륭하며 신뢰할 만한 지도부 아래 노동자 운동의 결집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박한 정세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 맑스주의자(공산주의자)가 주체적인 요소들의 실천을 관념론자들에게 맡겨두었고, 기계론적이고 경제적인 유물론자들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노동하는 인간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고 권력을 투표소에서가 아니라 무기를 가지고 장악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며, 그 이상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공표하고 이를 강령 속에 고정하는 것은 이전에 모두 시도했었기 때문에 별로 가치 없을 것이다. 중요한 질문은 왜 인민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 왜 우리의 조직은 동맥경화증에 걸렸는가, 왜 대중 스스로를 우리의 관료제에 의해 질식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왜 대중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이익과는 반대될 히틀러가 권력을 획득하도록 했는가 이다.”2)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계급 상황으로부터 ‘의식’을 불러내고 그 의식은 사실이지만 자본의 지배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자본의 지배를 뒤흔들기 위해서는 견고하게 조직된 당이 필요하다고 보면서, 그 당시 독일 노동자의 상황을 설명한다.

 

“독일에는 대략 3천만 명의 반(反) 자본주의적인 노동자들(사회혁명을 일으키기에 숫자로서는 충분한)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완강한 반자본주의적인 심성의 도움으로 파시즘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반자본주의적인 심성은 계급의식인가? 아니면 단지 계급의식의 시작일 뿐인가? 계급의식이 만들어지는 전제조건일 뿐인가?”3)

 

  사회주의는 사회적 생산력이 모든 나라의 가장 광범위한 대중에게 사회의 평균적 문화에 상응하는 삶을 확보해주도록 충분히 발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정치적 반동이 설파하는 체념의 원리에 대항하여 지상에서의 풍요로운 행복의 원리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정점에 파시즘과 교회를 두고 있는 정치적 반동은 대중이 현세에서의 행복을 거부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정치적 반동은 정조(순결), 복종, 자기부정, 민족과 인민의 조국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 문제는 반동들이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이런 요구에 순응함으로써 그 반동들을 지지하고 반동들이 살찌도록 하여 그들의 힘을 키우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4)

 

  그는 부르주아 질서에 모순되는 것은 무엇이든, 전복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무엇이든 계급의식의 요소로 보면서 부르주아 질서와의 유대를 창출하거나 유지하고 부르주아 질서를 지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계급의식의 방해물이라고 말한다. 보기를 들어 1919년 11월 독일 혁명기간 동안 대중이 베를린에 있는 동물원에서 시위를 하면서 시위자의 대부분이 잔디를 밟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 혁명 담지자들의 부르주아지화의 모습이라고 비판하고 있다.5)
 
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히 계급의식의 구체적 요소를 청소년, 여성, 성인 남성 노동자, 어린이의 특성에 따라 구분하는 시도는 눈여겨 볼만하다. 청소년의 경우 권위주의적 억압, 국가 권위의 집행인들의 부모에 대한 반항을 정치적인 좌익의 흐름으로 보는 반면, 스포츠에 대한 열광, 군복을 입은 남성과 행진곡을 좋아하는 것은 반혁명적인 요소로 본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는 경제적 독립, 남성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성적 독립을 중요한 계급의식의 요소라고 주장한다. 성인 남성 노동자의 경우에는 집합적 산업노동이 계급 감정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지,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과 노동조합원이라는 사실이 계급의식을 높인다고 보지 않는다. 노동의 ‘명예’, 노동자와 고용주의 ‘평등’, 공장과 민족의 통일 등에 대한 나치의 선전은, 평균적인 노동자가 사회민주당의 ‘산업평화론’을 흡수한다면 그들을 눈멀게 하여 파시스트로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관념의 물질적 힘이 물질적 빈곤의 힘보다 더욱 강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어린이의 경우에 배고픔, 영양부족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 못하며, 자산가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오히려 질투, 비굴함과 절제를 가져온다고 보고 혁명적 감정의 발전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이 프롤레타리아 전선의 중요한 과제임을 말하고 있다.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개량주의와 관료주의를 무조건 비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자들이 개량주의와 관료주의를 받아들였는가를 따져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 지도부의 과제는 ‘공산주의 강령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나 ‘대중을 계급의식 있는 투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적 과정을 연구하는 것과 더불어 이미 거기에 있는 혁명적 본능을 발전시키는 데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혁명적 본능을 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 그리고 농민층 속에서 발전시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 과학은 ‘과학’ 위에 ‘계급투쟁’의 구호를 붙임으로써 발전시킬 수 없으며, 오직 과학 자체의 개별 분야들의 질문들, 문제들, 발견들로부터만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부르주아 과학이 어디서 실패했고, 왜 실패했는가, 부르주아 세계관이 어디서, 어떻게 지식의 장애물인가를 사실적으로 증명해야 한다.6)

 

  보기를 들어 프로이트를 ‘반동’이라고 폭로함으로써 프로이트의 학문적 실수에 대한 ‘맑스주의적’ 공격을 개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보다는 프로이트가 어디에서 천재적인 자연과학자이고, 어디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부르주아 철학자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하면 진지하고 유용한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혁명에 대한 대중의 불안이 계급의식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한다. 광범위한 비정치적 대중은 공산주의자들을 ‘폭력적인 사람들’이라고 보는데 이러한 견해는 공산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평화와 고요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공산주의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려고 한다. 민족사회주의(나치)운동의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는 ‘독일혁명’이라는 환상 위에 비폭력적인 권력 장악을 약속하여 무의식적으로 대중의 혁명적 소망과 평화주의적 소망, 둘 모두에 호소하였다는 사실이다. 혁명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넓으면 넓을수록 폭력을 덜 필요하게 되고 대중은 그들의 혁명에 대한 불안을 더욱 더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공산당 지도부가 경찰과 군대가 물리적 억압기구임은 사실이나 경찰과 군인이 프롤레타리아, 농민, 그리고 피고용인의 아들임을 잊지 말 것을 환기시키면서 프러시아 경찰의 다수가 사회민주당원임을 지적하고 있다.7)
  라이히가 주창하는 성정치 운동은 주관적 욕구로부터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대중의 욕구를 ‘과연’ 만족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 하는 모든 정치적 쟁점을 밝힘으로써, 모든 수준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혼돈스러운 인민들 사이에서조차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강령적 요구도 대중심리학의 측면에서 ‘우리는 대자본가들을 몰수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우리의 올바른 관리 아래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강령적 요구에 대해 비정치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왜곡된 평균적인 산업노동자는 마치 자신이 남의 소유를 장악한 것처럼 범죄의식과 어떤 금기를 지닌 채 반응할 것이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자신의 노동에 근거한 자신의 정당한 소유권을 의식하게 되어 ‘사유재산의 불가침성’이라는 부르주아 관념이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방어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이다.
  결론적으로 라이히는 계급의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혁명지도자는 잉여가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물건이 기업가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계급의식이다. 그러면 노동자는 단지 연대의 의미에서나 노조의 직장대표가 자신에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서 파업할 것이며, 어떤 노동조합 지도자도 다시는 노동자를 기만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혁명적 선전은 본질적으로 소극적 비판으로만 이루어져 왔다. 혁명적 선전은 또한 건설적이고 적극적일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 8)

 


2. 파시즘에 대한 라이히의 문제의식
 
  1932년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출간된 후 10년만인 1942년 8월, 그는 중보개정 3판의 머리글에서 관념철학 흐름, 즉 인간의 구조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수용을 거부하고 사회적 조건과 변동이 인간의 원천인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켜 그것을 성격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그 성격 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파시즘은 그것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든 간에 인민 대중들에 의해 탄생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대중들 개인의 성격 구조에 존재하는 모든 특성과 모순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순수하게 반동적 운동이 아니고 반역적 정서와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라고 지적한다.9)  그 성경제학 이론의 위험을 1934-37년 사이에 유럽의 파시스트 집단에게 경고한 것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공산당원들이었다. 따라서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행동이 아니라 ‘대중의 비합리적 구조의 표현’이다. 그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의사로서 나는 어떤 정당정치가도 알지 못했을 각국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정당 정치가들은 ‘노동계급’만을 알 뿐이며 그들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려 할 뿐이었다. 나는 있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사회적 상황 -- 인간 자신이 만들고 자신의 성격의 한 부분으로서 내부에 가지고 있는 상황 -- 의 지배 아래 있으며 또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하나 수포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였다.” 10)

 

  그는 소련에서조차도 국가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엄격한 의미에서의 맑스 개념으로 보면 경직된 국가자본주의만이 존재할 뿐이라며 러시아를 혁명 이후의 ‘붉은 파시즘’에 기반한 비합리적 권력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코끼리(성 억압의 6천년)를 여우굴(300년의 자본주의) 속에 강제로 밀어 넣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난 300년간의 사회적 대책은 더 이상 파시즘이라는 대중적 페스트에 대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31년 독일 사회구성에서 산업 노동자 비중이 60%였지만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분포에서는 경제적 프롤레타리아가 30%, 하층 중간계급이 70%를 차지했는데 그 분포는 1921년 선거의 수치와 비슷했음을 입증한다. 그 선거에서 공산당, 사회민주당이 1,200-1,300만 표, 민족사회당(NSDAP)와 독일국가당은 1,900-2,000만 표를 획득하였다.11) 근본적 문제는 경제적 상황과 대중들의 심적 구조(이데올로기)의 불일치, 심리구조와 심리구조가 표출된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길이다. 배고픈 사람이 도둑질하고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왜 도둑질하지 않으며,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이 왜 파업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파시즘은 두 측면에서 노동자 집단에 침투했는데, 룸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직접적인 물질적 매수를 통해,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물질적 매수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수단으로 한 ‘노동자 독재’를 통해서였다. 따라서 노동자가 혁명 의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혁명당 지도부가 올바른가에 달려있다. 파시즘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사회민주당의 정책이었다는 공산주의자의 주장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비참함과 보수주의적 사고 사이의 모순에 따른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실망은 다른 혁명조직이 없을 경우 틀림없이 파시즘으로 이끌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 당시의 통속적 맑스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역동성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비판하는 라이히는 그들이 ‘맑스적’이 될 수 없는 ‘심리학’이라는 이유로 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있으며, 역사에 있어서 ‘심적 생활’인 주체적 요인의 취급을 정치적 반동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에게, 그리고 ‘정신’과 ‘영혼’만이 유일하게 역사적 진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2)

 

  이어서 그는 독일 파시즘의 이론적 축으로서의 인종이론을 비판하고 나치의 깃발인 스와스티카의 상징, “우리는 스와스티카의 군대이다 / 독일 노동자를 위해 / 그리고 우리가 밟고 지나갈 자유에로의 길을 위해 / 붉은 깃발을 높이 올리자”에 대한 분석을 한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가족 분석에서는 반혁명운동이 하층 중간계급의 경제적 생존 양식과 이데올로기적 신비주의가 결합된 정치적 반동의 근거지로 시작된다고 본다. 신비주의(종교)에 대해 투쟁하는 성 경제학에 대해서는 첫째, 신의 개념, 원죄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심판의 이데올로기(사회에 의해 생산되고 가족 속에서 재생산되는)가 어떻게 개인들 속에 깊이 고착되는가? 둘째, 언제 이러한 종교의 개념들이 인간 속에 깊이 고착되는가? 셋째,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에너지가 사용되는가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련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라이히의 분석은 파시즘에 대한 문제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1919년 소련 공산당 제8차 대회에서 확립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선언한 것은 넌센스라고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레닌의 사회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듯이, 파시즘도 부르주아 계급지배와 관련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파시즘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적’이며 ‘혁명적’이라고 자처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이 충족시켜주지 못한 기능을 떠맡았으며, 산업부호들을 지배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떠맡았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이러한 라이히의 성경제학과 실천운동은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도 받았다.13) 

 

 “그렇다면 오로지 배고픔과 성욕만이 역사적 원동력이란 말인가? … 이러한 넌센스는 경제적 기반에 대한 투쟁들로부터 인민을 왜곡시킬 뿐이다.”

 

 “성적 억압에 두 계급이 포함된다는 라이히의 생각은 계급의 적대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의 책 ≪청년의 성 투쟁≫에서 세대 사이의 적대감을 강조한 것은 더욱 고약하다. 이는 계급투쟁이 착취와 참상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 모아져야 한다는 것을 저버리고 가족 상황에 눈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편협한 맑스주의에 대한 독해와 실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라이히는 성적 참상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정치적, 경제적 기반의 변동을 통해서만 성해방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3. 종합
 
  맑스와 엥겔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형적 심리사회구조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라이히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 중 하나는 히틀러의 파시즘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탈린의 ‘붉은 파시즘’(이 주제는 연재3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이었다. 파시즘의 출현이야말로 라이히의 성 경제이론의 현대적 검증을 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은 권위주의적 기계 문명 속에서 억압된 인간의 정서적인 태도이며 기계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생활 개념이다. 그것은 반역적 감정과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며 보편적 인간 성격의 비합리적 반응의 총체이다. 그것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의 표현이다. 인간의 원시적인 물질적 욕구의 억압은 반역을 유발하는 반면, 성의 억압은 도덕적 방어로 닻을 내리게 하여 무의식적으로 모순, 억압에 대항하는 혁명을 제지하는 반동적 힘을 갖게 한다. 이는 보수주의와 자유에의 공포로 나타난다. 따라서 성의 억압은 정치적 반동으로 이끌고 대중을 피동적이고 반정치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의 성격구조에 제2차적인 힘, 곧 권위주의적 질서를 지지하게 하는 가상적 이해관계를 만들어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히틀러는 바로 이러한 대중의 혁명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성공했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그는 대중이 가지고 있는 혁명적, 반자본주의적, 공산주의적 열망에 환상적인 만족을 주었으나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대중 심리구조의 모순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경제적 위기가 노동계급의 욕망과 행위를 유발시킬 수 있다면 대중이 혁명을 원하고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평균적 인간의 모순은 세계가 변혁되기를 바라나 그 변혁이 착취와 억압처럼 갑자기 위에서 부여되기를 원하는 데 있다.
  히틀러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분명하지 않은 자유를 분명히 나타내는 민족적 자유의 환상으로 대체시키고 대중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위로부터 나오고 자신의 체제를 변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종(race)개념은 대중의 일반적인 성적 자아상을 만족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이 말은 원래 순수하고 강하며 독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독에 걸린 것 같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에 독이 들어갔음을 뜻하는 매독으로부터 ‘순수한 피’를 보호하자는 약속은 중요한 것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성적 공포와 더불어 자본가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유대인에게 돌리게 했다. 유대인은 자본가에 대한 사회주의적 증오뿐만 아니라 성적 불안의 표적이기도 했다.14)
  여기서 인종이론과 결부되어 강조되었던 것은 가족 이념이었다. 가부장국가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에서 재생산되므로 절대국가와 전체주의는 가족이념을 강조한다. 그 결과 ‘볼셰비키의 문화 혼돈’으로부터 가족과 국가를 보존한다고 함으로써 대중의 혁명적 사고를 파괴하고 파시즘의 폭정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두 가지 효과를 달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파시즘의 구조는 형이상학적 사고, 추상적 윤리사상에의 강박관념, 총통의 신성예정설이 대중의 심리구조와 영합함으로써 모든 민족사회주의당(나치당)의 당원이 스스로 ‘작은 히틀러’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파시즘의 승리는 대중의 자유능력 상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대중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능력상실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의 성의 억압에 있다는 것이 바로 라이히가 꿰뚫어 본 것이었다.
  파시즘도 대중의 사회주의적 열망에 부응하기 위하여 계급 타파를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주의가 그 당시 독일 사회에서 실패한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맑스주의는 심리학이 아니기 때문이 인간의 불안과 고통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모순의 구조를 갖는 비성숙한 대중의 성격구조의 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곧,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대중이 심리 구조적으로 성숙한 후,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는 책임에 대한 의식이 있을 때까지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성격구조는 자본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자본가도 있고 반동적 노동자도 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맑스의 명제는 두 가지 질문을 남기고 있다. 첫째,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며 인간의 두뇌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과, 둘째, 그렇게 형성된 의식(성격구조)이 어떻게 다시 경제과정에 반응하는가 이다.
  라이히는 소련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엄격한 의미의 맑스의 개념으로 보면 소련은 경직된 국가자본주의일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사용경제가 아닌 교환경제, 임노동, 잉여생산으로부터 나온다. 그 잉여가 진정한 사회가 아닌 국가에 귀속되거나 개인에 귀속된다면 그것은 모두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소련은 대중이 ‘비합리적’으로 유린되고 권위에 대한 갈망이 존속하는 한 파시즘 구조로 남아있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회주의는 국제적 규모에서만 그 의의가 있다.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같은 이른바 ‘국가사회주의’는 넌센스이며 대중기만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경제의 흥성도 있었으나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성숙한 성격구조나 이념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프랑스의 도리오와 라발, 러시아의 스탈린, 핀란드의 아네르하임, 헝가리의 호시 같은 민족주의적 독재자를 양산한 것이다. 붉은 파시즘으로서의 스탈린주의는 조직화된 정서적 전염병(emotional plague)이며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파괴한다. 진정한 맑스주의는 ‘사회’라는 말이 ‘국가’로 대체되고 국제적 인류가 민족적 애국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본능이 승화되지 않으면 문명 발전이 없다고 했다. 그에 있어서 문명은 인간을 자연에 대립시켜 보호하고 그 상호관계에 적응하게 하는 기관으로 보고 그를 통하여 인간성을 예술적이고 이념적인 보다 높은 심리적 활동으로 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라이히는 프로이트나 신프로이트학파를 넘어서서 사회와 인간의 깊은 구조를 발견하는 데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의식의 개념을 따랐으나 거기에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 곧 지배계급의 이념이 사회기관에 의해 전수됨으로써 지배이념이 되는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심리적 억압을 다루고 있다.15)
  그가 보는 역사, 사회, 인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6)
  첫째, 객관적 사회과정과 그 과정의 주체적 경험은 분리되어야 하며 각각의 과정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르고 다른 에너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 둘째, 지도자는 항상 대중의지, 곧 평균적 인간 구조의 반영이다. 진보적인 동시에 반동적인 구조를 가진 평균적 인간의 모순과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사고와 행동은 자기 모순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가족 속에서 준비되고 국가구조 속에서 그 효과가 지속된다. 그리고 가족의 문제, 곧 성적 조건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보다 모든 면에서 더 오래됐고 중요하다. 이는 가족의 변화가 세계의 인간 기술 정복의 변화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셋째, 경제와 이념은 단순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경제는 이념을 결정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발달 과정에서 서로 모순될 때도 있다. 넷째, 기술적으로 말해 역사의 원동력은 생물학적 에너지, 오르곤 에너지이다. 이는 성적 감정과 행복을 위한 욕망으로 표현되는데 정치, 사회, 경제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다섯째, 공동사회의 생물학적 에너지의 표현이 그 제약을 넘어서면 러시아에서 본 것처럼 퇴행이 불가피하다. 파시즘에서는 대중의 에너지가 정신적, 물질적 참상을 가져올 만큼 퇴행했는데 그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섯째, 독일 사회에서 진보적 과정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와 정치적 반동세력이 대중의 에너지를 그들의 이해에 맞게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파시즘을 구성하였다.
  물론 라이히가 파시즘의 비합리성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중정치운동 대신 성정치의 실천을 함으로써 깊은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안이함을 보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론의 공헌은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구조에 대한 깊은 인식, 그것의 억압으로 나타난 대중심리구조의 반역적이고 반동적인 구조, 다시 이와 엇물리는 사회, 경제, 정치구조와 이념의 역동적 체계를 총체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공산주의를 향한 사회변동이 성숙한 인간구조의 전제 없이는 반동적 파시즘과 반혁명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세계혁명의 총체적 전략을 위한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1) 빌헬름 라이히, 윤수종 옮김, ≪성정치≫ 중원문화, 2011,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257쪽
2) 윗글, 253쪽
3) 윗글, 257쪽
4) 윗글, 266쪽
5) 윗 글, 271쪽
6) 윗 글, 332쪽
7) 윗 글, 350쪽
8) 윗 글, 350쪽
9) 빌헬름 라이히, (오세철 옮김),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 1986, 16-18쪽
10) 윗 책, 27쪽
11) 윗 책, 45-47쪽
12) 윗 책, 45-49쪽
13) 아래 보기를 드는 비판 내용에 대한 자세한 부분은 라이히의 책 People in Trouble (New York: Farrar, Strauss & Giroux, 1976) 180-184쪽을 볼 것
14) W. Reich, People in Trouble, 167쪽
15) P. Brown, “Civilazation and its dispossessed : Wilhelm Reich’s Correlation of Sexual and Political Repression,” P. Brown (엮음), Radical Psychology, (New York : Harper, 1973) 244-256쪽
16) W. Reich, People in Trouble, 170-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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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_창간준비 3호] 토론회 발제문 - 현 위기와 쇠퇴하는 자본주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 위기와 쇠퇴하는 자본주의

 

(2011년 9월17일 정세토론회 발제문)

 

 

 

- 양효식

 

 

  ‘금융위기’라고 불리는 현 위기의 본질적 성격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이다. 왜 체제 위기인가? 산업순환 위기(주기적 과잉생산 공황)를 넘어 역사적으로 1973년 이래 계속되어 온 구조적인 과잉축적 모순이 더 이상 봉합되지 못하여 마침내 폭발한 위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 구조적 위기

 

  최근 30여 년 동안만 보더라도 7년 내지 10년에 한 번 씩 터져 나오는 순환적 공황들이 3-4 차례 있었지만, 자본가계급이 대대적인 경기부양과 거품경제를 일으켜 한 두 해만에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현재의 공황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대의 공황”,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라고 저들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천문학적인 구제금융과 경기부양책(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으로도 틀어막지 못한 채 지금까지 4년째 계속되고 있고, 나아가 심화되고 있다. (2009년 하반기에서2010년 중반 동안 일시적으로 회복의 기미들이 미약하게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세계경제 위기는 끝났다’라고 잠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말해서 현 위기는 순환적 위기에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가 중첩된 것이다. ‘역사적’이라 함은 7-10년의 산업적 주기(‘경기변동’ 주기)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통해 역사적으로(자본축적의 경제적 추세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투쟁, 제국주의 국제관계 등의 정치 · 사회적 추세들을 포함한 구체 역사적 조건들을 매개하여) 누적되어 온 구조적 성격의 위기라는 뜻이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주기적 공황은 무수히 많았지만 ‘세계 대공황’이라 할 만한 구조적 · 역사적 위기는 이번 위기까지 포함해서 모두 3차례이다. ①1929-38년 ②1973-82년 ③ 2007년-현재.
  첫 번째 대위기는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을 거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을 통해 과잉축적 자본을 확실히 파괴, 청산함으로써 1945-73년의 장기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장기호황 기간을 거치며 이윤율이 저하되고 그에 따라 생산에 투자되지 못한 잉여자본이 비생산적 투기로 몰리면서 거대한 투기 거품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한 인플레와 여기에 기름을 부은 1973년 오일쇼크(유가 폭등)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가 정부들이긴축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투기 거품을 꺼뜨리면서 공황을 폭발시켰다. 이것이 두 번째 대위기이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의 이 두 번째 대위기 동안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가치 폭락, 기업도산, 실업급증 등 과잉자본 파괴 과정이 진행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만큼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이윤율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대위기는 첫 번째 대위기에 비해 과잉자본 파괴 면에서 훨씬 덜 폭력적인 공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1930년대와 같은 계급투쟁 격화와 파시즘 · 세계대전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과잉축적 자본을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에 와서는 동구권과 중국이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통합되면서 미국 주도의 본격적인 세계화(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 들어갔다. 이 1980년대 초부터 2007년까지 약 30년간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의 성격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강화와 금융투기 거품을 통해 이윤율 하락 및 과잉축적 위기(1973년-82년의 공황으로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 과잉축적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위기를 누적적으로 가중시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되고 가중된 구조적 과잉축적 위기가 이번 2007년-08년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자동붕괴론? 파국론?

 

  현재 우리는 이 세 번째 대위기의 초입부를 통과하고 있다. 말이 ‘초입부 통과’이지 이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은 정리해고, 임금 연금 삭감, 단협 개악, 비정규직 양산, 청년실업 만연 등 자본의 위기를 온통 전가 당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전가에 맞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체적으로 방어적 성격의 투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아무리 깊은 위기라 하더라도 저절로 죽어 없어지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 같은 없다. 자본주의는 내재적인 붕괴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저절로 죽어 없어진다는 의미의 ‘자동붕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난조로 말하는 소위 자동붕괴론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이 앉아서 위기 전가를 당하길 거부하고 저항에 나서서 이 저항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끌어올려 자본가계급의 정치권력을 빼앗을 때만이 자본주의를 폐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희생시킨 폐허 위에서 언제든 다시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무한정 계속되는 상시적 영구적 위기, 계급투쟁으로 매개되지 않는, 자동붕괴를 눈앞에 둔 무매개적 위기 같은 것은 없다. 파국론이나 자동붕괴론은 혁명적 맑스주와 양립할 수 없다.

 

  현 위기는 첫 번째 대위기 못지않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첫 번째 세계대공황 시기에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타락 등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계급투쟁에 패배하여 파시즘과 전쟁 같은 야만을 불러들이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다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동적인 활력을 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이미 쇠퇴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의 사멸하는 자본주의로서,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에 있는 자본주의였다. 다만 문제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 낼 것인가 였다.

사노위나 다함께(그리고 SWP) 같은 많은 좌파들이 제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장기호황을 누렸다는 것을 근거로 레닌을 비롯한 초기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사멸하는 자본주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론은 자동붕괴론 또는 파국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트로츠키가 1938년에 제출한 이행강령(즉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의 임무’)도 이런 자본주의 파국론에 기초한 문서라고 비판한다.

 

  ‘사멸하는 자본주의’, ‘쇠퇴하는 자본주의’론이 자본가계급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는 사회주의혁명 없이, 즉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 없이 자본주의가 저절로 붕괴한다는 자동붕괴론이었는가? 사멸하는 자본주의론, 쇠퇴기 자본주의론은 사회주의혁명의 물질적 전제로서 생산력 발전이 충분히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숙을 넘어서 썩어 문드러져 갈 정도로(즉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와서)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가능성과 그 절박성을 지시하는 것이지 자동붕괴의 임박함을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당시 자본주의는 수천만 명을 살육한 제2차 대전 같은 파국적인 야만을 거쳐서만 오직 전후호황 같은 일시적인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걸 가지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이니 혁신능력이니 자기조절 능력이니 하면서, ‘제국주의 단계의 사멸하는 자본주의’를 파국론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얼마나 속물적인가. 사후적으로 자본주의의 소생과 장기호황만 볼 뿐, 그러한 결과를 가능케 한 당시 계급투쟁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 제국주의 세계대전 등과 같은 야만의 과정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 이러한 속물적 태도는 ‘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역적’이라는 식의 실용주의적 결과론에 불과하다.

 

  레닌이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론을 제출하면서 동시에 제2인터의 파산을 선언하고 사회배외주의적 기회주의 및 카우츠키 중도주의(그리고 제국주의 초과이윤에 매수된 노동귀족)와의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제3인터(코민테른)를 창설하려 한 사실을 우리가 직시한다면 자동붕괴론 따위의 비난은 가당치 않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가 이행강령을 제출하고 제4인터를 창설하여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해결하려 한 것도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 자동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단말마적 고통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사회주의혁명이 없다면 그 고통이 모두 인류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가가 바로 수천만 명을 살육한 2차대전 아니었던가. 지도력의 위기를 해결하고 사회주의혁명을 가능케 했다면 그러한 2차대전 같은 야만은 없었을 것이다.  

 

 

현 위기  ⇒  세계화 시기  ⇒  제국주의 시대

 

  그러면 다시 현 위기로 돌아와서, 이 현 위기가 쇠퇴하는 자본주의, 사멸하는 자본주의와 어떤 연관 속에 있는지를 살펴보자. 올해 상반기 사노위 강령 논쟁 당시 사노위 다수파는 현 위기에 대해 그저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과잉축적 위기”라는 형식적 규정만 되뇌일 뿐 자본주의 역사 및 자본주의 발전 단계(자유경쟁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바의 독점자본주의 단계) 속에 이 위기를 자리매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윤율 하락/과잉축적 위기는 사실 위 3개의 대위기만이 아니라 모든 순환적 공황(소위기)의 공통적인 본질이다. 예를 들어 2001년의 IT 공황(닷컴 공황; 인터넷 공황)이나 1994년의 채권시장 대폭락 공황도 그 밑바탕에는 모두 과잉축적 위기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현 위기가 이러한 단순한 순환적 공황과 달리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인 것은 그냥 과잉축적 위기가 아니라 ‘역사적· 구조적’ 과잉축적 위기1)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순환적 공황들 속에서 충분히 청산되지 못한 과잉축적 자본이 매 순환을 거쳐 누적, 가중되면서 세계대공황의 양상으로 폭발하는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현 위기에 대해 그냥 ‘과잉축적 위기다’라는 식의 앙상한 형식적 규정의 반복으로는 아무 구체 특수적 내용을 담지 못하는 추상적 원리 진술을 넘지 못한다. 원리 확인을 넘어 현 위기가 1973년-82년의 위기 및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와 어떠한 구체 역사적 연관 속에 있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고유한 축적위기의 맥락 속에 현 위기를 위치지어야 한다.

 

  우리는 <<혁명>> 창간준비 1호에 실린 <현 국가부채 위기와 자본주의 체제 위기>에서 1973년-82년의 위기 이후 현 위기 직전까지 이삼십년 동안의 세계화 시기에 어떻게 세계경제가 과잉축적과 이윤율 하락, 위기의 가중화 ․ 누적화 경향, 생산력의 정체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는지를 실물적으로 제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 바 있다.

 

“이와 같이 2008년-09년의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는 앞선 자본주의 시기, 특히 세계화 시기에 축적된 모순의 결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1948년-72년)처럼 1992년 이후의 새로운 세계화 시기도 거대한 생산능력의 파괴로 시작했다. 이윤을 가져올 수 없는 기업(특히 러시아와 중국의)이 폐쇄되고 심지어는 아예 폐기되었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1939년-45년의 훨씬 더 큰 파괴와는 달리 세계화 시기의 시작 때의 파괴 과정은 과잉축적된 자본을 충분히 제거하는 효과를 가지지 못했고,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생산력 정체 경향을 들어내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1992년-2007년의 세계화 시기는 결코 세계적 규모로의 생산력 발전이 지배적인 추세가 되는 자본주의 팽창기가 되지 못했다. 독일과 일본에서의 장기불황과 정체,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격렬한 가치파괴 공황,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미약한 회복 -- 미국 경제의 핵심적인 잉여가치 생산부문들을 쇠퇴하는 상태로 남겨 놓은, 또는 매우 부진하고 완만한 성장세로 머무르게 한 그 미약한 회복 -- 을 고려할 때, 결론적으로 1992년-2007년의 세계화 국면은 1973년-92년 국면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생산력 정체 경향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화 시기는 결코 상향 발전의 ‘장기파동’ 국면이 아니다. 전후 호황이 종식된 1973년 이래 자본주의 체제를 괴롭혀 온 고질병인 구조적 과잉축적이 근본적으로 극복이 되지 못한 시기이다. 구 ‘제3세계’에 속한 신흥국들 및 중국에서 생산의 광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시기는 가장 발달한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경제를 구조적인 과잉축적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었다. 가장 발달한 경제들에서의 지배적인 추세는 여전히 정체 경향이었다.
 
  세계화 시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번영’과 ‘역동성’을 보여준 시기이기는커녕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정립해 낸 제국주의 시대의 주 특징들(기생성, 독점, 부후화와 쇠퇴, 세계의 분할 및 재분할)이 확장되고 전면화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하게 레닌이 다음과 같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 -- 자본주의의 쇠퇴 및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시대 -- 에 속한 한 시기임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정의로 시작해야 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특수역사 단계이다. 제국주의의 고유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주의이다. 기생적인 또는 부후 쇠퇴하는 자본주의이다. 사멸하는 자본주의이다. 독점에 의한 자유경쟁의 대체가 근본 특징,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레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
 
  이행 시대로서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인 성격은, 자본주의가 생산력 및 생산의 사회화를 크게 높여냈기 때문에 이것이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의 충돌 -- 너무 첨예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붕괴를 일정에 올릴(물론 영구적으로는 아니지만) 정도의 충돌 -- 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한 번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에 직면한다. 현재의 극적인 경제위기는 레닌 제국주의론의 타당성을 완전하게 확인해 준다. 

  끊임없이 진전되고 있는 생산의 사회화와 국제화는 자본주의가 역사적 퇴물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쇠퇴하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의 풍부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레닌의 다음과 같은 규정은 지금 특히 옳다.
 
‘왜 제국주의가 사멸하는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의 자본주의인지는 분명하다. 자본주의로부터 성장해 나온 독점은 이미 죽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주의로의 그 이행의 시작이다. 제국주의에 의한 노동의 거대한 사회화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는 무르익어서 썩어문드러져 가는 자본주의 시대, 즉 막 붕괴하려 하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길을 만들 정도로 충분히 성숙한 자본주의 시대이다.’ [레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

 
  세계화 시기의 특수한 특징들이 우리 시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의 본질적 특징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제국주의 시대 내의 한 시기로서 세계화 국면은 쇠퇴하고 사멸해 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한으로까지 축적한 시기이다. 현 위기가 순환적 위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인 것은, 제국주의 단계의 최근 국면으로서의 세계화 시기에 이 누적되고 극대화된 모순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현 위기를 낳은 모순을 축적해 온 1992년-2007년의 세계화 시기에 대해 사노위 다수파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자본주의 쇠퇴기에 속한 시기인가 아니면 상승과 역동성의 시기인가? 사노위 다수파는 현 위기를 세계화 시기라는 바로 직전의 자본주의 주요 역사 시기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제시하길 회피하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 독점자본주의 단계 속에 현 위기를 위치지어 규정 내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사노위 다수파는 세계화 시기가 제국주의 시대의 주 특징들(금융 기생성, 독점, 부후화와 쇠퇴)이 확장되고 전면화 한 시기임을 부정한다. 개량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자기조절 능력에 바탕한 ‘세계화의 역동성’론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못 취하고 동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량주의자들에게 세계화 시기는 생산력이 거대하게 발전한 ‘역동적인 기술 진보’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현 위기는 난데없이 터져 나온 위기이고, 당혹스런 위기이다. 

 

 

  자본주의의 쇠퇴와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

 

  제국주의 시대/ 독점자본주의 단계를 부정하고, 따라서 사멸하는 자본주의(쇠퇴하는 자본주의)론을 거부하는 사노위 다수파로서는 이 자본주의 최고, 최후 단계에 속한 한 시기로서의 세계화 시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 위기를 ‘사멸하는 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라는 역사적 시대와 연관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권력장악을 위한 이행요구’를 혁명적 정세에서나 가능한 강령이라고 기각하고, ‘노동자 정방대 · 민병대’, ‘노동자평의회’, ‘봉기’ 등의 강령 조항들을 “블랑키주의적 좌익맹동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사노위 다수파는 말로는 ‘자본주의 철폐’를 내걸고 있지만, 정작 그 철폐를 실천적 일정에 올려놓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100년 동안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냐?”고 힐난하며 조롱한다. 자본주의가 그 동안 위기 속에서도 거듭 자기혁신 능력을 발휘해 위기를 헤쳐나가며 발전해 왔는데 무슨 ‘쇠퇴’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말한다. 사회주의혁명으로 이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지 못한다면 100년을 넘어 앞으로도 계속 이 쇠퇴 ·부후화의 고통, 사멸의 고통,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 공황과 전쟁과 환경파괴의 재앙으로 온통 인류에게 전가될 것이다. 그래서 100년 전 일차대전 전야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제기했고, 트로츠키도 2차대전 전야에 이행강령을 제출하면서 인류의 위기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고 말했다. 이들 당시의 혁명가들과 노동자계급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 앞에도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문제, ‘인류의 위기/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 문제가 던져져 있다. ‘자본주의 철폐’를 강령으로 내걸고 있는 사회주의 조직이라면 “100년 동안 쇠퇴?” 같은, 자본주의의 자기혁신 능력에 대한 맹신에 기반한 조롱이 아니라 이 문제들을 온몸으로 싸안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한 때 자본들 간의 경쟁을 통해 생산력 발전을 추동했던 생산양식에서 20세기 초부터는 독점의 지배가 더 한층의 발전을 제약하는 경향을 띠게 된 생산양식으로, 즉 소멸기에 들어선 생산양식으로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진전되고 있는 생산의 사회화와 국제화는 자본주의가 역사적 퇴물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생적이고 부패 노후화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의 풍부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100년 동안 쇠퇴하고 있는 것은 이 썩어문드러져 가는 자본주의를 사회주의혁명으로 끝장내는 데 거듭 패배해서이다. 무엇보다도 1930년대 세계대공황 때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 숨통을 끊지 못해서이다.

 

  현 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해결하고 개량주의로부터 대중 지도력을 전취하는 혁명정당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의 쇠퇴는 100년이 아니라 그 이상 계속될 것이다. 생산력 발전이 성숙을 넘어 이제 썩어문드러져 가는 단계에 있는 쇠퇴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인류의 위기는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 말로는 사회주의혁명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역동적 적응능력을 신봉하여 혁명의 현실성을 보려 하지 않는 대기주의 · 추수주의와의 투쟁은 오늘날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혁명정당 건설투쟁에서 결코 부차적인 과제일 수 없다. 과거 레닌을 비롯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해 카우츠키 중도주의와의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거쳐야만 했던 것처럼.    

 

 

  레닌 <<제국주의론>>과 현 위기

 

  자본론 1권이 발간되고 난 다음 50년 뒤에 레닌은 여러 차례 순환적 위기의 반복을 보고 나서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들 반복의 누적적 효과로 인해 자본주의에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그가 내린 첫 번째 결론이다. 자본주의는 한 때는 자본들 간의 경쟁이 추동력이 되어 생산성과 사회 총생산량의 전반적인 증가를 담보하는 생산양식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독점의 지배가 더 한층의 발전을 제약하는 경향을 낳는 생산양식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질적 전환). 이것은 모든 발전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경쟁’ 시대와 비교할 때 자본주의가 이제 그 역사적 쇠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이 <<제국주의론>>을 제1차 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은 혁명적 기간 동안에 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쇠퇴 시대’가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혁명에 의해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끝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끝장 낼 수 있을 것으로 그가 기대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때 이후 거의 100년 뒤인 지금, 자본주의의 그 후 역사를 볼 때 그의 분석과 그의 결론은 틀린 것으로, 허구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는가? 1920년대의 혁명 운동의 패배가 제국주의의 살아남음을 허용했고, 제2차 대전에서의 거대한 파괴 규모가 체제에 새로운 생명 연장을 허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의 사태 전개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지시한다.
  한 생산양식의 ‘쇠퇴’는 파멸적인 경향만이 아니라 그 생산양식 내에 다음 생산양식의 기초를 형성할 힘들의 발전 및 성숙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의 생명 연장은 불평등과 빈곤과 환경파괴뿐만 아니라 거대한 모순을 재생산했다. 훨씬 더 고도로 통합된 글로벌 경제/ 훨씬 더 고도로 사회화된 생산체제 對 훨씬 더 협소하게 집중된 사적 소유 사이의 훨씬 더 큰 모순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의 전야

 

  지난 1백 년 동안 우리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 및 증대하는 독점화에 의해 추동된 장기적인 정체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미국 헤게모니가 실추되고 전 세계적인 경제적 ·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고 있다.

 

  명백히 이러한 결과들은 레닌이 제시한 제국주의 모델과 완전히 부합한다. 독점 부르주아지는 생산 단위·부문들을 지배하는데, 가장 선진적인 기술로, 최고도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 가장 강력한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지배한다. 이러한 과잉축적은 자본수출과 기생성, 그리고 주식, 부동산, ‘금융파생상품’ 등의 투기를 추동한다. 가치 파괴 공황이 제국주의 간의 갈등을 고조시키고, 세계의 분할 및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경쟁적인 투쟁을 격화시킨다. 민족국가들이 서로 가치파괴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 희생을 경쟁 상대방 및 종속국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서로 밀치고 당기면서 충돌하고 있다.

 

  세계화의 모순과 현 위기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옳음을 더 한층 입증하는 사례이다.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승리와 동구권의 최종 붕괴를 활용하여 세계를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편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윤율을 유지하고 제국주의의 고유한 정체 경향에 대처하고자 모든 “상쇄 조치들”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2007-09년 공황이 현재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역동성을 단지 일시적으로밖에 회복할 수 없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세계질서는 레닌의 모델에 닮아 있다. 당시 100년 전보다도, 그리고 50년 전보다도. 그리하여 우리 앞에 놓인 전망은 확실히 자본주의 체제의 증대된 불안정 및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연속이다. 그러나 또한 레닌의 결론,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의 전야이다”라는 결론도 놓쳐선 안 된다. 

 

 


 

1) 순환적 위기들을 관통하는 초순환적(meta-cyclical) 위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4개의 순환적 위기를 관통하는 초순환적 위기일 경우 대략 35년 주기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트로츠키가 제시한 ‘자본주의 발전 곡선’의 변곡점들도 이런 종류의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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