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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좌파1]양자역학의 좌파적 이해를 위해

 

양자역학의 좌파적 이해를 위해

노동자의 힘  77호

소문에 의하면 양자역학이 모든 결정론을 부정하고 있으며, 또 모든 물리 현상은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이러한 양자역학으로 일부 논자들은 맑스주의를 결정론으로 몰아세우기도 하고, 모든 인과론을 부정하며 맑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그 선언 뒤에 남는 것은 ‘자본주의여 영원하라’는 이데올로기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양자역학에서 부정하는 결정론은 맑스주의에서도 끊임없이 부정해온 뉴턴식의 기계론적 결정론이다. 더욱이 맑스주의는 우연과 필연의 문제를 상호 배타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맑스 자신도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그의 후계자 에피쿠로스의 미묘한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신에 의해 창조된 완벽한 존재였고, 그것이 물질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우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불완전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 진리는 오직 그것을 관찰한 때만 알 수 있어 자연의 객관적 실체가 부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을 추종하는 일부 물리학자들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없이는 물질적 실체를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확하게 레닌이 그의 책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서 포괄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관적 관념론의 관점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양자역학은 오랜 기계론적 결정론을 파괴하였지만 여전히 정교한 예측과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 80년대를 극소전자혁명을 21세기에도 지속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나오는 철학적 견해는 맑스주의를 근거 없이 부정하며 노동자-민중에게 유해한 관념론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 늪에서 맑스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싶지만 그 어려운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맑스주의 철학을 복원까지 한단 말인가? 난감할 뿐이다. 그래서 쉽진 않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과 같이 시도해 보고 싶다. 앞으로 관련 글을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jinbo.net/yskim) 혹은 노동자의 힘 기관지 홈페이지(www.pwc.or.kr)에 지속적으로 올릴 것이며(물론 지금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




양자역학의 태동 : 빛에 대한 부정의 부정

 

빛이란 무엇일까? 기존의 물리학이 위기를 맞는 시기마다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뉴턴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18세기 동안 빛이 작은 알갱이(미립자)로 구성되어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678년에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빛에 관한 논문”에서 뉴턴의 ‘미립자’이론에 맞서 빛이 마치 파도처럼 전파되는 파동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논문은 뉴턴의 그늘 아래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나 토마스 영(Young)의 빛의 회절/간섭실험을 거쳐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자기파임을 증명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19세기말 다시 빛에 대한 논란이 붉어져 나왔다. 과학이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토대는 혁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이 나타난다.

 

1890년대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k)는 흑체에서 나오는 빛(black body radiation)의 독특한 물리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모든 물질은 자신이 온도가 높을 때는 빛을 내고 낮을 때는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물체(검은 물체)는 반대로 모든 파장의 빛을 내놓기 때문에 흑체 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사하는 물질은 없다. 이러한 생각으로 물리학자들은 빛을 모두 흡수하게 고안한 검은 상자를 흑체라고 불렀다. 아무튼 프랑크는 흑체의 온도에 따라 내보내는 빛의 스펙트럼을 관찰하였는데, 흑체의 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에 비례해서 빛의 색이 변하지 않았다. 고전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00년에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빛이 특정 크기를 갖는 다발(꾸러미, packet)로 가정 했고 이것을 '양자(quanta)‘라 불렀다. 이 이론은 뚜렷한 물리학적인 근거 없이 '운좋게 선택된 것'이었기에, 그는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05년 당시 24세였던 젊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빛(전자기파)은 입자와 같은 에너지 다발로 구성되어 있다는 플랑크의 이론을 받아들여 금속판에 빛을 쪼였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자 현상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발표하였다. 이후에 이 빛의 다발을 빛의 양자(quanta)화로 광자(photon)라고 불렀다. 이로서 빛이 다시 입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에 대한 뉴턴의 입자 이론은 맥스웰의 파동이론에 의해 부정되었고 다시 이것은 막스 프랑크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새로운 입자 이론으로 부정되었다. 처음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듯 보이지만 다시 구식의 뉴턴 이론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질적인 도약으로 과학에서 진정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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