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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갈비 과학기술, 좌파도 싫어하는 과학기술

닭갈비 과학기술, 좌파도 싫어하는 과학기술

 

실업문제에 비정규직 문제 등 각종 투쟁들이 산적해 있는 이런 시국에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한다면? 왠지 굶어죽는 사람에게 SF소설을 읽으라고 권하는 격이지 않을까? 또 친구 중 누군가가 빅뱅(Big Bang)이나 선사시대 공룡을 연구하고 싶다고 한다면, 혹은 중력의 근본원인을 파헤치고 싶다고 한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불쌍한 놈~”, 아니면 “집에 돈이 많구나!”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에 대한 이런 생각은 자본가들에도 마찬가지 인듯하다.

 

자본가의 닭갈비(계륵) 과학기술

 

세계적으로 유명한(했던) 미국의 벨연구소를 보면 요즘 자본가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다. 1925년에 설립된 벨연구소는 ME(극소전자) 혁명을 일으킨 트랜지스터와 레이저를 최초로 발명한 곳이며, 11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한 곳이다. 처음에는 국영 AT&T사 소속이었다가, 1996년에 AT&T사가 3개의 민영회사로 분리되면서 루슨트사 소속이 되었다. 지속적인 경기 침체로 2006년에는 프랑스 통신회사 알카텔과 합병을 하게 되었다. 매 변화 시기 마다 순수과학에 대한 투자와 인원을 줄였으며, 지금은 순수과학 분야에는 단 4명만이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네이처 2008). 국내에서는 삼성종합기술원이나 LG 전자 기술원이 비슷한 역할을 담당 했지만, 요즘은 사업부의 하청 업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과학기술은 종교권력에 대항하고, 생산력 발전의 동력이 되었으며, 새로운 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착취의 수단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권력의 지위가 확립되고 새로운 경쟁 상대(노동자)의 발흥을 충분히 막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자본은 현상유지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때부터 과학기술의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과 주식 시장의 확산으로 자본이 단기성과에 집착하게 되면서 그 주가는 더욱 떨어졌다.

 

7-80년대 ME 혁명은 냉전시기 개발된 군사기술이 수십 년 동안 숙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956년에 개발된 트랜지스터가 실제 시장에서 꽃피운 시기는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개발 후 본격적으로 실용화되기까지 20여년의 숙성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본은 더 이상 과학기술이 숙성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과학기술은 한마디로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먹을 것이 없는 닭갈비(계륵)의 신세가 된 것이다.

 

좌파도 싫어하는 과학기술

 

‘좌파가 언제 과학을 싫어한다고 했어?‘ 라고 반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간첩 리철진]이라는 영화를 보면, 북에서 내려온 간첩 리철진이 강도에게 공작금이고 뭐고 다 털린 후 고정간첩 오선생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선생이 다짜고짜 북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현실적인’ 요구를 하자, 리철진은 단 한마디로 상황을 반전시킨다. “당에서 보내서 왔소”

당은 이성(과학)의 화신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절대 진리를 담지 하는 신은 절대 진리를 밝혀내는 과학(혹은 이성)으로 대체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도’한다는 당은 무엇이 ‘과학’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당시 과학의 특권화된 권위만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모든 정보과 권력을 독점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내놓은 ‘과학적’ 진리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자본주의가 지나면 사회주의가 된다는 식이었다. 전 세계 노동자-농민들의 구체적인 투쟁은 당의 ‘과학적’ 판단 속에 무시되거나 심지어는 탄압받기도 했다.

 

이 것이 좌파가 과학을 싫어하는 배경이다. 일부에서는 그 역편향으로 과학기술의 모든 권위를 해체해 버리고, 과학기술의 독특한 방법론까지 인정하지도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들은 이성의 시대는 가고 감성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은 자본가가 바라는 변화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많은 자본과 오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이성적’ 과학기술에 투자하기 보다는 작은 자본으로 단기간 내 성과를 볼 수 있는 ‘감성적’ 디자인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듬고 가야할 과학기술!

 

사실 과학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적이든 연역적이든 어떤 현상을 일반화(추상화)해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일반화는 각각의 상황에서 인정되는 정보의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보를 종합해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해 내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경험과 과학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구체적인 현실 속의 노동자-민중의 지식과 실천(혹은 투쟁)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구체적이며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연안시절(1937-1949) 모택동의 말은 아직도 시의 적절하다.

 

“당시의 열일곱, 열여덟 살 먹은 청년들은 [자본론]과 [반듀링론](양자역학과 상대성 원리 등을)등을 열심히 배웠지요. 청년들은 훌륭한 선생(훌륭한 과학자)에게서 배운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마르크스-레닌주의(현재의 과학기술을)를 종교적 교의로 여기는 사람들은 맹목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너의 교의는 똥보다도 쓸모없다”는 점잖지 못한 말을 써야 합니다. 개똥은 들판에 거름으로 쓰일 수 있고 사람의 똥은 개가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교의라는 것은 들판을 비옥하게 할 수도 없고, 개를 먹일 수도 없지요. 그게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괄호속의 말은 필자가 삽입함)

 

흔히 과학기술은 생산력이면서 생산관계라고 한다. 이 말은 과학기술이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과학기술은 싫다고 회피할 수도 없으며 회피해서도 안 된다. "과학(기술)은 단지 과학적 성취와 응용기술을 나열한 명부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의 인간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기술)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학습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다양한 이슈들, 지식의 군사화, 건강, 환경 경제 발전, 여성해방, 인종주의와 계급 서열화의 합리화 그리고 교육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 투쟁들이 과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어렵다고 상아탑 속에 갇히게 해서도 안 된다. 이를 위해서 “혁명정당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 모두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져야 하고 이런 저런 과학적 근거를 형성하는 사회운동에서 어떤 식으로 투쟁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맑스주의 과학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기술)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부활시키고, 과학(기술)을 투쟁활동과 연구를 위한 실천과제 속에 배치시켜야 한다.“ (리차드 레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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