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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속에 감추어진 역사

과학 속에 감추어진 역사
 
“역사는 파괴와 창조, 투쟁과 노동이 서로 맞물려 가면서 변화 발전하고 우리 근현대에서 그러한 역사의 주체는 낡고 썩은 것을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소수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사회의 대다수 노동자 민중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대의제도와 대리주의를 넘어 노동자 민중이 정치의 주체로 ‘반자본주의 정치변혁’의 거대한 역사의 강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 주장은 파업 속에서, 반자본주의 투쟁 속에서 더 큰 물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 영역에 들어오는 즉시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과학의 역사는 ‘코페르니쿠스가 갈릴레오를 낳고 갈릴레오가 케플러를 낳고 케플러는 당연히 뉴턴낳’는 다는 식으로 이어질 뿐이다. 과학의 역사 어디에도 생동감있는 노동자 민중의 역사는 찾아 볼 수 없다. 대리주의와 대의주의가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가 외부 즉, 신이나 외계인의 역사가 아니라면, 앞에서 언급한 (투쟁과 노동이 서로 맞물려 변화 발전하는 그런)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학 역사의 주체도 당근! 노동자 민중일 것이다. 그러나 왜 과학에는 엘리트들만 보일까? 혹시,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병에 걸려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그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숨겨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숨겨진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법 하다.
 
천연두 백신을 개발한 노예와 농민
 
16세기에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중남미 원주민들을 90%나 사망시킨 무시무시한 천연두 문제의 해법을 서방에 알려준 이는 바로 미국으로 끌려온 오네시모(Onesimus)라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1721년 미국 보스톤에 천연두가 번졌을 때,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코튼 마터(Cotton Mather)에게 자신의 고향 아프리카 수단에서 사용하는 천연두 예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 방법은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피부를 긁어서 생채기를 내어 바르는 방법인데, 11세기 이후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법이 있었다. 이를 인두법(人痘法) 이라고 한다.
 
코튼 마터는 대범하게 이 방법을 주민들에게 바로 적용하였으나 그 과정에 6명의 환자가 사망하고 말았다. 격렬한 종교적 반발이 있었고, 성난 군중들은 그를 목매달려고 했다. 그가 피신한지 1년 후 그는 다시 영웅이 되었다. 당시 천연두에 걸린 사람 대부분 사망했지만, 그의 시술을 받은 환자는 2% 만 사망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오네시모의 이야기는 사라져 버렸다.
 
천연두에 얽힌 얘기 하나만 더 해보자. 흔히 천연두 예방 백신을 개발한 사람은 영국의 의사인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1796년에 개발한 백신은 소의 천연두라고 알려진 우두(cowpox)를 접종하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불주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이미 22년전, 당시 농부였던 벤자민 제스티 (Benjamin Jesty)에 의해 이미 알려진 방법이었다. 벤자민은 같이 살고 있는 소 젖 짜는 여자들이 우두를 앓고 나서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대범하게 소의 유방에서 고름을 채취하여 부인과 아들의 팔에 바늘로 상처를 내고 주입하였다. 부인은 심하게 고생하긴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단지 이 사실을 접하고, 소년을 대상으로 ‘과학적인’ 인체 실험을 거쳐 정식화 했을 뿐이었다.
 
말라리아도 유사한 역사가 있다. 중국에서는 2000년 이상 개똥쑥이라는 약초를 사용해 말라리아를 성공적으로 치료해 왔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페루 인디언들은 기나수(樹) 껍질을 사용하여 치료하였다. 기나수를 통한 치료법이 유럽에 소개된 것은 17세기나 되어서 였다.
 
뉴턴보다 뛰어난 시계공
 
요즘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배의 위치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GPS로 쉽게 알 수 있지만 17세기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의 위치는 지구상의 위도와 경도로 알 수 있는데, 위도는 특정시간에 태양과 수평선의 각도로 정확하게 알 수 있었지만 경도는 정확하게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는 영국 의회가 0.5도의 오차를 허용하는 경도 측정방법 개발자에게 2만 파운드라는 거대한 상금을 걸 만큼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해결책으로 제안된 방법은 두가지 였다.
 
첫 번째 방법은 뉴턴과 영국 왕실에서 진행한 방법인데, 목성의 위성 관측이 경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갈릴레오의 발견을 이어 받아 계산하는 방법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정확한 시계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경도 15도의 차이는 지구가 1시간 자전했을 때의 차이이므로,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면 경도를 계산할 수 있다. 존 해리슨이라는 아주 평범한 시골 시계공은 이 방법을 택하여 뉴턴에 도전했다. 결론은 평범한 시계공의 승리로 끝이 났다. 뉴턴이 이 방식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기술로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는 것은 평지에서는 가능했지만 흔들리는 배위에서 매우 어려웠다.
 
미생물의 세계를 연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
 
17세기 초기만 해도 현미경의 배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현미경은 과학 탐구의 도구가 아닌 장난감으로 취급받았다. 과학자들이 현미경의 배율을 높이기 위해 무척 많은 노력을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런데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한 의류 소매상인 안토니 반 레벤후크는 독학으로 현미경의 배율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그는 살아 있는 원생동물과 박테리아를 직접 본 첫 번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경력은 16세 때 직물상의 견습생, 22세 때 직물점 상인이 전부였다. 대학교육도 받지도 않았고, 자연과학, 철학은 물론이고 영어나 프랑스어, 라틴어도 몰랐지만, 그는 20세기 과학혁명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 중 한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과학에도 풍부한 노동자-민중의 역사가 핵심이다.
 
레닌의 혁명은 소비에트를 통한 노동자-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과 그것의 양적 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 이다. 과학이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지식이라면, 과학이 자연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노동자-민중)로부터 나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갈릴레오가 대포의 각도가 45도일 때 가장 멀리 날아간다는 사실을 처음 수학적으로 증명해서 유명해 졌다고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포수들이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풍부한 포수들의 경험이 갈릴레오의 이론을 탄생시킨 동인이 된 것이었다. 뉴턴의 만류인력 법칙도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로버트 후크라는 과학자가 만류인력을 먼저 주장한 바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역시 그리스 시절부터 있었던 주장이며, 지구 중심설의 대부격인 푸톨레마이오스의 수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랑크가 양자역학의 문을 열었던 계기도 이전에 수많은 과학자들의 실험적인 결과와 이론적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아이슈타인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과학에 자리 잡고 있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중략)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중략)..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식의 역사관은 성경에서 끝나야 한다.
 
참고서적 : Clifford D. Conner, "A People's History of Scienc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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