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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30
    [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해민
  2. 2007/10/27
    자연변증법관련 토론 (4)
    해민
  3. 2007/10/18
    우생학의 끝은 어딜까?
    해민
  4. 2007/10/17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고? (3)
    해민
  5. 2007/10/12
    우주론 관련 최근 뉴스
    해민
  6. 2007/10/12
    상대성이론 최근 뉴스
    해민
  7. 2007/10/07
    학술자료 공유(대학)
    해민

[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이 글은  1986년 미국의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지에 실린 리차드 레빈스의 글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이며 생태학자인 레빈스는 한국에서도 이미 많이 알려진 맑스주의 과학자입니다(참세상에서 “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이라는 글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 글은  좌파가 왜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과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비교적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어 소개합니다. 이 글을 총 3부분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고, 이번에 이어 다음에는 ‘부르주아의 성장과 현대과학의 탄생’,‘과학과 철학의 통일'을 그 담에‘현실 과학 비판‘과 ’좌파와 과학‘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급하게 번역하느라 오역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문을 참조해 주세요)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리차드 레빈스 (Richard Levins)


내가 글을 배우기 전에 할아버지(아브라함 색만, Abraham Sackman)는 배드 비샵 브라운 신부(역주- 윌리엄 몽고메리 브라운, 미국 성공회 주교이자 공산주의자. 배드 비샵이라는 별명은 이교도 재판과정에서 붙여졌다.)의 “소년 소녀를 위한 과학과 역사”라는 책을 읽어 주셨다. 이 책에서는 과학과 역사는 서로 연계관계가 있음을 주장하였고, 그런 주장이 나에게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발견이었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에 최소한 우주론, 진화론 그리고 역사를 의식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파문당한 맑스주의자 배드 비샵은 그의 책에서 과학과 역사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보았다. 그에게 인간의 역사는 자연 역사와 연속선상에 있었다.


과학과 역사는 몇 가지 이유로 맑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첫째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지배계급의 지식 독점과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며 특히 신교도들이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 건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은하수 주변 바깥, 2류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위에서 최근에 살고 있는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바위에서 과거를 읽을 수 있고 우리의 노동으로 현재를 변혁하며, 별들의 미세한 빛의 조성을 프리즘으로 알아내고 또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미래 발전을 도모한다.


세계를 알고, 지식화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책임감은 우리의 적들에게는 오만함으로, 더 심하게 지독한 뻔뻔함으로 인식되었다. 적들은 맑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 미학의 핵심으로 신비주의, 불가지론, 랜덤함, 비이성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고전 아서 커스틀러의 《요가 수행자와 인민위원 The Yogi and the Commissar and Other Essays》를 참조)

 

맑스주의자들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세계에 대한 최신 지식을 얻는 다는 의미 이외에 특별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기술과 사회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산 수단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발전은 변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과학은 단지 과학적 성취와 응용기술을 나열한 명부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학습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다양한 이슈들, 지식의 군사화, 건강, 환경 경제 발전, 여성 해방, 인종주의와 계급 서열화의 합리화 그리고 교육 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서 과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혁명 정당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 모두 과학에 관한 프로그램을 채용해야 하고 이런 저런 과학적 근거를 형성하는 사회 운동과 어떤 식으로 공동 투쟁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맑스주의 과학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부활시키고, 과학을 투쟁 활동과 연구를 위한 실천과제 속에 배치시켜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는 작업은 과학의 주요 모순을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현대 과학은 지식 성장의 역사에서 한 단계이며, 동시에 서구 부르주아지 계급에 속박된 창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학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를 위해 필요한지를 묻고,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으로 적절한 방법을 적용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상에 순응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을 찾아낸다. 현대 과학은 생산력의 한 부분이면서 생산관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과학은 상품으로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실재(reality)를 해석하고 반영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재를 혼미하게 하기도 한다. 또 과학은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처럼 부르주아의 욕망과 필요를 초월해서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그 근본 태생의 성흔은 결코 털어버리지 못한다.


과학은 지적 자유를 향한 저항의 함성이 되기도 하지만 억압과 지배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조작된 미신에 대항하는 계몽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제 3세계 문화의 지식을 인종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로 파괴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 존재 조건이기도 하고 정치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 이데올로기 장벽을 넘어 국제 협력의 장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길잡이기도 하지만 독단적인 교조의 그리고 자기자랑의 미사여구가 되기도 한다. 내적인 면에서, 작은 규모에서, 한 연구소 규모에서는 과학은 지적 교양을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과학 활동 수준에서는 비이성적인 면이 증가하고 있다. 과학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지금 알려진 것으로 가정하고 연구하기도 하는데 종종 그러한 가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맑스주의자는 이들 모순들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 학파들은 액면 그대로 이상화된 과학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서구 유럽 맑스주의자 특히 유로코뮤니스트들 중에는 맑스주의 영역을 진보적인 정치경제 프로그램에만 국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자연 과학의 오용과 독점을 비판하는 것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개념을 “스탈린주의”로 보고 거부하고 있다.


맑스주의 당에서 이런 독단적 흐름은 과학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 없게 하고 과학을 객관적 실재와 동등한 것 그리고 (순수한) 진리로만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처럼 ‘과학적’이라는 말을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로 사용한다. 이미 엥겔스 시대에 “독일 사회주의는 최근에... 한층 더 터무니없는 잠꼬대를 지껄이며,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뻐기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엥겔스, 반듀링론) 그 이후 수십건의 체계적인 문건에서 단지 한 두 번 일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해왔었고, 저자들은 그것을 인정해왔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유로꼬뮤니스트와 독단적인 좌파 모두 과학을 진보적이며 객관적이고 해방을 담지한 힘이라는 이상화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화려한 묘사에 맞지 않은 과학은 그것 자체로 순수하지만 단지 외부에서 탐욕과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 접근하는 유물론자는 이런 이상적인 정의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 명확히 과학은 자본주의와 함께 진화하는 것으로써 정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역할을 부르주아 혁명에서 해방의 힘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견고하게 하는 힘으로 평가하고 짧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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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변증법관련 토론

맑스주의 토론 사이트에서 '정말 오랜만에' 유물 변증법에 관해 짧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논란이 있지요. 물론 좌파과학자들은 유물 변증법이 자연에도 적용된다고

하지요. 저 역시 그렇구요.  시간나면 좀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분야입니다.

자료도 함 모아 보지요.

 

[Marxism] focus fusion/dialectial materialism (1)  관련 댓글도 참조 하세요.

[Marxism] focus fusion/dialectial materialism (2)

 

 

관련 문헌

Pro Dialectics of nature

 

1. Engels and natural science  Issue 65 of INTERNATIONAL SOCIALISM JOURNAL Published Winter 1994

2. The Philosophy of Marxism

3. Dialectical Nature: Reflections in Honor of the Twentieth Anniversary of Levins and Lewontin’s the Dialectical Biologist, Monthly review Vol. 57  

4. A science of our own: Marxism and nature - Marxist science   Monthly Review,  July-August, 1986  by Richard Levins  (강추)

5. 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 by 홍실이, 참세상

6. 기타  Richard Levins의 글

7. Engels’ Marxism by John Ree International Socialism 2:65, Winter 1994

8. `In Defense Of Frederick Engels' BY GEORGE NOVACK
9. 혁명의 제무장, 험난한 시기, 이론의 임무 by   Richard Levins  (추가 071024)

10. The revolutionary dialectic and the liberation of humanityBy Ann Robertson  Friday, 26 October 2007  (추가 071027)  

 

Anti- Dialectics of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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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의 끝은 어딜까?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제임스 왓슨 박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둡다는 게 내 지론이다. 흑인들은 원래부터 백인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지능이 똑같다는 통념은 환상이다
." (Pressian)

 

요즘은 유전학을 토대로 우생학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유전자 조작 및 검사는 우생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지요. 소련에서 유전학을 깡 무시한 리센코 사건 이후로, 유전학을 비판하는 모든 이론들이 다 무시되고 있지요.  종교쪽에서는 비판이 활발하지요.  

 

"나치는 우생학(優生學)을 이용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유태인과 집시를 학살하기도 하였다. 나치보다 먼저 우생학을 적용한 나라는 바로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1926년에 우생학을 기초로 단종 법안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안은 정신박약아, 불구자, 유전적 질병을 가진 자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강제 불임 수술을 시행하였고,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나 범죄자에게도 적용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경우 이 법이 시행되는 기간 동안(1926-1935) 유전병, 신체부자유인,
정신박약아들 9931명을 강제로 단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의 우생학은 이보다 훨씬 은밀하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임신초기에 양수 검사나 초음파 검사를 통해 남자아이만을 선별한다든지, 유전적 결함이
있는 태아를 낙태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난자매매의 경우, 상류층 대학 여성들의 난자를 선호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우생학은 예전과 같이 국가에 의해 강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자율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시장과
가부장적 문화에 의해 강제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자유방임적 우생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유방임적 우생학은 지금의 신자유주의 문화와 너무나 닮아 있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이 높은 비용의 유전자 기술의 혜택에서 소외될 경우 ‘하층민의 질병화’를 불러 올 수 있다. 그리고 임신 초기 태아 검사로 유전적 질병이 있는 태아의 낙태를 당연시하는 사회라면, 낙태 거부로 혹은 실수로 유전자 질병을 가진 자녀가 태어났을 때 그 양육 책임을 모두 개인 부모에게 지워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제공되었던 사회적인 복지 정책도 축소해 버릴 것이다"


실제 미국의 임신-출생 기술에 대한 흑백간의 경제적 접근권의 차이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흑인 여성의 경우 백인여성보다 불임률이 1.5배 높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각종 성병에 대한 치료부재와, 영양 결핍, 출생과 낙태의 어려움 그리고 작업환경의 위험성 등에 기인한다. 그러나 인공수정의 경우 백인의 1/3 수준 정도만 진행되고 있다. 불임 시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흑인이지만 인공수정을 가장 많이 하는 부부는 고학력이며 풍요로운 백인들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지속된다면 흑인은 줄어들고 백인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진보평론)

 

 

 

1. 새로운 유전학과 우생학 박희주

2. 우생학 이념인가 과학인가 박희주

3. 우생학연구자여 반성하는가? 박노자 한겨레 21

4. 식민지 조선에서 우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신영전

5. 우생학 연구 단편 김호연

6. 미국의 우생학 그리고 대번포트 정세권  

7. 우생학과 장애인

 

우생학을  강하게 거부하는 쪽은  종교쪽이죠. 박희주박사 역시 창조과학의 지적설계론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우생학 비판글을 읽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또 좌파역시 우생학을 강하게 비판하죠. 대표적으로 굴드가 있지요. 좌파는 종교적으로 우생학을 비판하는 쪽과 과학적으로 우생학을 지지하는 쪽(?)의 경계에서 양자 모두를 노동자 시각으로 비판하고 극복해야 겠지요.  

 이에 대한  좋은 자료 보시면 소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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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고?

오늘 모처럼 술을 마셨으니.. 한마디 해야쥐~~

우연히 회사 사람과 이런 저런애기하다가 문득 "그래도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다"는 말을 들었다. 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고 느낄까?

대충 함 따져 보자 정말 그런지.. 

 

DRAM을 개발한다고 해보자.  DRAM은 과거 IBM도 했고 TI도 했다.. 그리고 삼성도 하고 하이닉스도 하고 STMicroelectronics, 하타치, NEC, 도시바.. 요기다 대만업체까지 더하면 수도 없이 개발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각자 숨어서 개발한다.   여기에 엄청난 연구비가 투자되는데, 먼저 개발한 넘들이 안 갈켜주기 때문이다. 감추는 비용은 상당하다. 각 기업마다 CIA와 같은 보안 그룹이 있고.. 마치 비행기 탑승장과 같은 x-ray투신기도 있다. 각 컴퓨터 마다 보안프로그램이 깔리고, CCTV나 RFID, 엑티브벳지 등 노동자 감시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이런 쓰잘떼기 없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드는 비용은 말하기 조차 싫다.  

 

그래서 때로는 먼저 개발된 기술을 몰래 빼끼기도 하고(빼끼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빼긴 기술을 감추기 위해 여러가지 트릭을 쓰기도 한다(역시 많은 비용이 든다). 특허를 피하기 위한 기술은 또 어떤가?  쉽게 애기하면 쓰잘때기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과 노동자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 수백개의 기업들에서 이렇게 중복 투자와 함께 노동자들의 자유시간이 투자된다. 단지 쓰잘때기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이 게 효율적인가?

 

부가적으로 한마디 더 하면, 국내에는 국가과제를 좀먹는 날 파리들이 많이 있는데.. 물론 대학교에 많다. 이들은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들 한다. (그 이유는 우수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지.. 지 잘나서가 아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정부 관료의 눈을 속여서 중복투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 과제의 제목을 머찌게 뽑는 일들을 한다.  제목을 머찌게 뽑으면 전문가가 아니면 중복투자인 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중복투자는 그렇다치고.. 이들 날파리들이 수행하는 연구 과제가 거의 모두 성공을하고 있단다.. 물론 그 성공이 거의다 거짓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 준다. 그것마져 없다면 대학교 교육은 완전 파산직전에 가기 때문에...

문제는 성공했다면서 .. 실제로 실패한 경험담을 숨기는 것에 있다. 수백억의 국가 연구비로 연구한 연구 결과(실패한 사례도 .. 그 연구에 진정성이 있다면 아주 훌륭한 결과이다) 중 가장 소중한 진정성 있는 연구 결과를 숨긴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연구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연구 윤리"어쩌고 하면서 날파리들을 욕하지 말자는 뜻임) 암튼, 수백억원의 국가 연구비가 투자 되지만 진정성있는 결과 하나 남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또한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다 아는 애긴데..) 지금 이 사회가 효율이라는 걸 따질때 빼 먹는 것이 있다. 두 기업이 경쟁해서 중복투자 해가며 기술 개발을 했고 한 기업이 승리해서 독점했다고 해보자. 이때 다른 한 기업의 노동자들은 쪽빡을 차고 서울역 한 귀퉁이에서 잠을 자야된다. 이 비용.. 이들 노동자들이 공교육, 사교육 해가며 들어간 비용도 있을 것이고 그동안 살기 위해 먹고 마신 비용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용이 모두 서울역 한 귀퉁이에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비용은 자본주의 효율성에 고려 대상에서 빠진다. 물론 패배한 기업에 들어간 연구비며 다양한 비용들도 다 고려대상이 아니다.

 

누가 반문을 할지 모른다. 그래도 자본주의에는 "경쟁"이라는 것이 있어 기술이 발전하지 않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사회주의나 기타 대안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도입하지 말라고 한적이 있나? 맑스가 그런말을 한적있었나? 레닌이? 뜨로가? 내가 지식이 짧아서 인지 몰라도 없는 것 같다.  다른 사회(대안사회, 사회주의)에서도 경쟁하면 되지 않냐? 재미있는 경쟁도 많이 있다. 그러한 경쟁은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잘알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 성공한 기업.. 그리고 그 기업을 소유한 극 소수 자본가들만 보기 때문이며.. 자기도 그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때문이다. 일종에 감정이입......

 

명확하다.. 자본주의에서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 효율성이란 일종에 "구성된 효율성(만들어진, 각색된 효율성)인 것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미국 노동자들이 개발한 기술을 한국 노동자들이 그 기술을 이어 받아 다양한 곳에 적용해서 다시 공개하면 얼마나 좋은가?. 기존에 개발된 기술을 왜 또 개발해야 하나? X신 육갑트는 것도 아니구.. (술이 올라오니까 점점 본성이...)  이 짓이 비 현실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그누 리눅스가 그러했고.. "과거"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러했다.

 

경쟁?

맘에 안맞는 넘들하고 같이 기술개발할 필요가 있을까? 따로 팀을 꾸려 맘에 안맞는 넘들 보다 먼저 개발해서 그 넘들 코를 납작하게 할 수도 있다.

 

날파리?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고, 그 주인이 자신의 돈을 사용한다고 해보자.. 중복투자할 필요도 없고.. 중복투자를 받기 위해 날파리 짓을 할 필요도 없다. 또 실패를 숨길 필요조차 없다.

 

무임 승차와 보상(동기부여) 문제? 또 공유지의 비극??  (술깨고 추가함)

 

음.. 또 자본주의에서는  "무임승차" 문제와 "보상(동기부여)"문제가  없기 때문에 혹은 대안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임승차는 오히려  자본가들이다.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땅, 부동산 부자들이고 또 금융자본가들이다.  그들의 보상은 정당하며 효율적인가?  

 

보상문제(동기부여)와 무임승차 문제 그리고 공유지의 비극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이유는

첫째로

개인의 본성을 이기적이라고 '선험적'(몰역사적,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다라는 주장)으로 규정해 버리고.. 그 잘못된 규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혹은 과학(?) 적으로 주입시켜.. 무임승차와 보상 그리고 공유지들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기적유전자.. 등등)  

 

둘째로

 "분배"라는 문제만을 보기 때문이다. 분배의 문제만 보면 어떻게 생산했는지는(또 생산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생산된 것을 어떻게 나눌 건지만 생각한다. 그러면  한정된 파이만 보이게 되고 이 파이를 찾이하기 위한 경쟁만을 생각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문제로 보인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도 문제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도 문제가 된다... 공유지도 문제고, 무임승차도 문제고 보상을 못받아서 담에 생산안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로 보인다.  결국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자본가들(혹은 국가관료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만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체로써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를 같이 참여하고 결정을 했다고 하면.. 그 속에서 혁신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 보상 문제도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여기에 관료주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동기부여가 보상으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생산한다.  "필요" 자체가 동기 아닌가?  물론 개인 개인이 필요한 것을 각자가 생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주체들이 민주적으로 논의하는 그 과정은 개인과 집단을  (변증법 적으로<-- 사실 이 말이 쉽게 와 닿지는 않는다.. ) 묶어줄 수 있다고 본다.

 

또 공유지의 비극은 사라진다.  완전히 격리된 개인들에게 공유지를 맡긴다면 공유지의 비극이 있을 것이지만, 공동관리하고 계획하는 그런 공유지라면 공유지의 비극은 없어진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제.. 노동자가 주체로 설 수 없게 하는 단 하나의 문제 "노동자와 자본가와의 문제"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주인이라면.. 생산하든 하지않든 "굷어 죽지 않을 권리가 있는" 그러한 사회여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뭐 이만하자.. 글 적다 보니 화가나네.. (술먹은 다음날 다시 추가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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