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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바다 무죄 판결의 의미와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P2P 서비스

 /*또 시작해 보죠*/

 

소리바다 무죄 판결의 의미와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P2P 서비스(*) 

노동자의 힘 71호

 

지난 12일 소리바다에 대해 법원은 형사상 저작권 침해 방조는 무죄 선고했다. “소리바다를 통해 음악을 공유한 이용자들의 복제권 침해는 인정되지만 소리바다 운영자인 피고인들이 이들의 저작권 침해 행위를 방지할 적극적인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같은 날 국내외 음반사 11곳이 제기한 민사재판에서는 “채무자들의 ‘소리바다’ 프로그램 운영과 소리바다를 통한 MP3 파일 다운로드 방조 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또 25일에는 2천만원 정도의 손해 배상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상반된 두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물론, 형사 판결의 경우 기존의 정보운동단체를 비롯한 네티즌들의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가 반영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법원의 판단에는 그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주요하게 P2P 서비스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일반의 이익이 반영되어 있다. 소리바다와 같은 P2P서비스에는 크게 거대 음반사가 있고 P2P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IT 업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MP3 플레이어 종주국이고, 세계적인 MP3-폰과 디지털 TV 생산 업체(특히 삼성!, LG)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TV가 상용화 되는 현 시점에서 소리바다와 같은 P2P 서비스는 자본에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한 가지 예로, 디지털 TV 콘텐츠를 공유하게 하는 대신, 콘텐츠 내용 곳곳에 광고를 삽입하는 방법이 있다. 드라마 주인공의 안경을 클릭하면 바로 인터넷쇼핑몰로 연결되는 식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P2P 서비스는 TV광고와 같은 것으로, 엄청나게 저렴한 자본과 노력으로 엄청나게 많은 고객들과 접촉할 수 있는 ‘광고 기계’인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P2P 서비스를 ‘현재 상태’로는 허용은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상태의 P2P 서비스로는 이용자/생산자들의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이 태생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료화 길을 착실히 걷고 있는 소리바다에 대해, 그것도 이미 서비스를 중지한 '소리바다-1'에 대해, 마치 죽은 자를 또 처형하는 ’부관참시‘와 같이, 다시 중지 명령을 내렸고, 이것도 모자라 손해 배상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형사 판결의 경우는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듯한데, 미국에서 큰 성공을 기록하고 있는 Apple사의 경우가 아닐까 판단된다. Apple사가 운영하는 음악 서비스인 아이툰스(iTunes Music Store)는 MP3 한 곡당 '99센트(저작권료는 평균 65센트)로 저렴하게 판매한다. 또한 Apple사는 MP3를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공유할 수 있는 당근 정책으로 이용자들을 유인하고 있다. Apple사가 판매하는 MP3 플레이어인 아이포드(iPod)에 마음대로 저장할 수 있고, CD로는 10장, 메켄토시 컴퓨터와는 3대까지 공유를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Apple사의 성공에는 P2P서비스 이용자들을 ‘해적질’하는 마녀로 몰아 이용자 통제가 가능한 유료 서비스로 ‘이용자 몰이’를 한 정부의 역할이 주요했다. 이것이 이번 형사 판결에서 '음악을 공유한 이용자들의 복제권 침해'를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Apple사는 음악 서비스를 통해 단기적으로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지만 이것은 정부의 정책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하드웨어인 MP3 플레이어(iPod)판매에서 더 많은 이윤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윤 일부를 음반 자본가들에게 ‘이전’해 줄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방식이라기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자본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자본으로부터 서비스 명목으로 그 일부를 이전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렇듯 이번 판결은 음악, 영화와 같은 콘텐츠 자본이 기존의 하드웨어 자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자본일반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고, P2P서비스 업체들로 하여금 현재와 같은 P2P시스템이 아닌 이용자/생산자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 혹은 ‘광고기계’로의 개발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P2P 서비스 이용자/생산자들을 강제적으로 혹은 기만적인 당근(***)을 이용해서 통제 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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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P를 노동자 관점에서는 기관지 11호와 31호에서 설명하려고 했고, 이 글과 함께  ‘대량 복제의 기술은 예술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신비적인 분위기를 소멸시키면서 대중의 비판적 수용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도 경청할 만하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이라고 그것이 불필요한 노동이거나 낭비적인 노동은 아니다.

(***) 당근은 정보통신 운동단체와 네티즌들의 투쟁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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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농민의 민주적 통제만이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해답이다.

/* 이 글은 기관지 [노동자의 힘] 55호에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 오늘(2004. 11. 5.) 9시 뉴스에 GMO에 대한 보도가 있어 관련글 3개를 연속적으로 올렸습니다 */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통제만이 유전자 조작 작물에 대한 해답이다.

- 베네수엘라 유전자 조작 작물 재배 금지의 의미

김해민

지난 4월 21일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유전자 조작 작물(이하 GMO)에 대해 재배 금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직 구체적인 정책은 나오지 않았지만 우선 차베스 대통령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와의 진행 중인 협상을 즉각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얼마 전 수도 카라카스에 열린 볼리비아 혁명 기념집회에서도 차베스 대통령은 GMO는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의 필요와 이익에 배치된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고 6억 평 규모의 토지에 유전자 조작 콩을 경작하려는 몬산토 계획을 백지화 시켰다.

GMO 기술

 농업에서 생명과학 기술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8,000년 동안 인간은 빵·맥주· 포도주 등을 만들기 위해 교잡(hybridization)으로 식물과 동물의 유전자를 조작해왔다. 단지 이 기술은 수년의 기간을 필요로 하고, 재배 혹은 사육할 면적을 필요로 할 뿐이다. 현대 유전자 조작 기술은 소수의 과학기술자에 의해 연구실에서 이루어지며 새로운 유전자를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방식이다. 시간과 공간이 필요 없고, 원하는 세포를 작은 유리 배양기에서 20분 만에 수배로 배양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기술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조악하고 부정확한 기술" 또는 "무작정 한번 해보는 식의 기술"로 평가되기도 한다. 1975년에 시작된 이 기술은 낭포성 섬유증 (cystic fibrosis)이나 근이영양증 (Muscular Dystrophy) 등 유전자 질병의 치료를 위한 과학기술자들의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미국 다국적 기업(몬산토, 노바티스, 듀퐁 등)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와 다국적 기업은 유전자 조작 기술로 제3세계의 기아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저렴한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부시와 그 측근들도 유전자 조작 기술이 세계 기아문제 해결을 위한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유전자 조작 작물을 반대"하는 것은 "아프리카 기아문제를 해결할 최선책"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인터네셔날 헤럴드 트리뷴지, 2003년 5월 29일자)

미국은 왜 GMO를 심는가?

기술적으로 GMO는 제초제를 대량 살포 가능하기 때문에 잡초로 뒤덥힌 휴경농지를 손쉽게 농지로 전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기존 작물은 제초제를 뿌릴 수 있는 기간이 제한되지만 GMO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기계화가 더욱 용이하여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GMO는 일반적으로 종자 값은 비싸지만 제초제 값과 노동력이 절감된다고 평가 받고 있다.

 미국에서 GMO재배가 확산된 원인은 GMO가 생산성이 높은 첨단기술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의 농업정책과 경영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고 WTO이행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농산물 가격 인하시 보상을 해주는 '부족불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생산품목·면적 등을 농민자율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이 과정에 다국적 기업이 로비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결과 곡물 재배 면적이 증가하였으며 농산물 가격 경쟁은 더욱 치열해 졌다. 미국 농민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은 GMO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으로 중소 농민의 몰락하고 있으며,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은 가속화 되고 있다.

이렇듯 GMO 도입의 배후에는 미국 정부와 WTO 그리고 GMO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이 있다. 이들이 제 3세계 기아와 빈곤 때문에 GMO를 개발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 종자산업 세계 2위이자 농화학산업 세계 3위 그리고 GMO 특허 70%를 보유하고 있는 몬산토(Monsanto)의 다음 예는 GMO의 위상을 잘 설명해 준다.

몬산토는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 조작된 '라운드업 레디'라는 콩을 특허화 해서, 이를 제초제와 한 세트로 팔고 있다. 몬산토는 유전자 조작콩을 판매할 때 특허로 특정 계약을 강제하는데,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콩으로 다음해 씨앗을 마련해서도, 팔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또 미국에서 몬산토는 이 계약에 따라 3년 동안 농민들이 재배하는 작물을 감시할 권리를 갖게 된다. 이로서 몬산토는 해마다 종자와 농약 둘 다를 판매하여 엄청난 이윤을 챙기고 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은 재배한 식물에서 종자를 얻어 파종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 계약은 종자를 구할 자금이 없는 가난한 제 3세계 농민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다. 또 제 3세계 국가는 식량산업이 다국적 기업과 미 제국주의의 통제아래 놓이게 하므로 식량주권을 위협받아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하게 된다.

농업시장은 세계 경제의 65%를 차지하며 유전자 조작 식품의 시장규모는 2005년에는 200억 달러, 2020년에는 7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과 다국적기업은 이 시장을 노리고 있다. 미국은 농업 경쟁력 우위를 바탕으로 WTO협상에서 농산물 무역 자유화와 지적재산권 보호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내 다국적기업의 로비도 대단한데 일부에서는 군수-산업 복합체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제는 바이오-제약-농기업 복합체로 바뀌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남미의 교훈

GMO도입과 관련해서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보다 명확하게 그 의미를 전해준다. 올해(2004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약 420억 평(경작지의 약 54%)에서  3천 4백5십만 톤의 유전자 조작 콩(전체 곡류의 50%)을 생산한다. 그리고  1인당 3톤으로 식량 생산량은 세계 최대이며 7천만 톤의 곡식과 5천 6백 마리의 소와 이와 비슷한 수의 양과 돼지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3천8백만의 인구 중에서 2천만의 사람들이 최저생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6백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에 의해 극단적 기아에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55명의 아이들, 35명의 성인과 15명의 노인들이 기아관련 원인으로 죽어가고 있다. GMO도입으로 식량 생산량은 증가했으나 아르헨티나에서는 기아와 가난문제는 해결될 실마리는 커녕 오히려 더욱 비참해 지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도 몬산토와 미국으로부터 GMO에 대한 금지를 철회하라고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작년(2003년) 브라질은 한시적으로 GMO를 허용하였다. 그러자 몬산토는 라운드 업 면역성 콩의 유전자에 대한 로열티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농민의 민주적 통제만이 해답이다.

GMO기술 개발을 영원히 중단하자라고 주장하면 매우 간단한 것 같다. 지금과 같이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 주도된다면 이 주장은 타당하겠지만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에서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GMO기술에는 상당한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안정성면에서도 비단 GMO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식량산업에 의해 첨가된 각종 화학 생산물에도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 오히려 GMO 개발의 전면 중단은 과학기술을 부정하고 과거로의 회기를 주장하는 일부 생태주의자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내용 성격 방향을 판단해야 하는 주체는 노동자-민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농민들은 '가방 끈이 짧기 때문에' GMO와 같은 과학기술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문제를 전문가 그룹의 판단에 맡겨 버린다. 일반적으로 과학 기술은 생산에 적용되어 생산력을 발전시키지만, 그 '현상'은 과학 기술을 조정 통제하고 다시 과학기술 내용과 발전방향을 규제하는 '본질'로서의 사회경제적 관계로 규정된다. 즉 과학기술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관계이며, 이 것들을 상호 연관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과학기술을 내용 중심으로 파악한다면, 노동자-농민은 그 과학 기술이 어떻게 결정되고 통제/배분되는지, 그리고 각 주체의 특성과 권력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과학기술 내용까지 더 잘 규명할 수 있다. 한국에서 부안을 보라. 핵 폐기장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대학에서 핵관련 전공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핵 폐기장 건설이 어떤 절차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그 일을 맡고 있는 정부 관료들과 과학자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했는지를 통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간단하게 따져 보자. 현재 GMO를 배포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이 이미 GMO 농산물을 사용해서 전 세계 농산물 가격 하락을 주도하고 있으며, 또 제 3세계 소농들에게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종자를 구입하기 위해 IMF 대출을 강제한 자라면, 또 자신들의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 자원을 통제하기 원하는 제국주의 국가라면 이들의 GMO를 믿을 수 있는가? 구체적으로 몬산토는 1920년대에 논란이 많은 인공 감미료인 사카린을 도입하여 제조 판매 하였고, 1960년대에는 발암성 물질인 PCB를 전자 장비에 도입하였고, 베트남 전에서는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고엽제를 생산하였다. 1980년대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다이옥신과 기타 유해 화학물질에 자사 노동자들이 노출된 사실을 숨기기는 등 악명 높은 기업이다. 그들이 생산한 GMO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 즉 그 생산물을 직접 먹어야 하는 일반 노동자-농민들을 믿어야 한다. 만약 GMO의 개발을 모두 이윤 동기에 사로잡힌 정부와 자본이 통제한다면 믿을 수 없겠지만 그 식품을 직접 먹어야 하는 노동자-농민이 민주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한다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은 오직 거대 다국적 기업을 사회화해서 노동자 농민들의 통제와 경영하에 운영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GMO 재배 금지의 의미

1970년대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농업을 농약, 화학비료, 농기계 등의 석유화학산업에 의존하게끔 재편하였고, 점점 더 다국적기업들의 통제 속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3세계 국가들에게 농지 황폐화와 흉작 그리고 기아만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은 생명공학과 GMO를 매개로 종자·농화학·제약·식품·곡물유통·동물약품 분야를 하나의 기업으로, 또는 제휴의 형식으로 수직 통합하여 독점을 더욱 강화하고 재편하는 과정에 있다.

 이번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의 GMO금지 조치는 안전하지 않은 식량 생산을 금지했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우리(좌파)에게는 가난한 농민들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와 지식)를 다국적 기업에 특허로 빼앗기는 것을 차단하고, 제 3세계 식량주권을 통재하려는 자본의 음모에 반대하며 특히 미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 대항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게 와 닿는다. 특히 이번 조치는 작년 GMO관련 다국적 기업에 굴복한 브라질 룰라 정부와 비교해 볼 때,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의 면모를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GMO를 비롯한 농업정책과 과학기술이 어떤 절차를 통해, 누구에 의해 통제되는지가 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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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노동자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기관지노힘  제41호  

최근 영국에서 3가지 종류의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대한 주목할만한 실험결과가 발표되었다. 3가지 작물 중에서 사탕무우(sugar beet)와 제초제 저항성 품종인 기름씨 평지(Oil seed rape, 씨앗에서 기름을 짜내는 식물)는 환경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주 1)

유전자 조작 식품의 첫 번째 세대는 1995년 미국 몬산토(Monsanto)(주 2)라는 회사가 개발한 콩(Round-up Ready Soybean)과 스위스의 노바티스(Norvartis)라는 회사가 개발한 'Bt 옥수수'와 같이 제초제나 병충해에 내성이 있는 농작물이다. 이들 유전자 조작 농작물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환경은 물론이고 사람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주 3)

유전자 조작 농작물을 고려할 때 내재된 위험성은 물론이고, 그 농작물이 자본에 의해 계획되고 개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콩은 자사의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저항성을 갖고 있다. 만약 이 콩이 세상에 퍼진다면, 몬산토사는 종자와 농약 둘 다 판매함으로써 엄청난 이윤을 챙길 수 있게 된다. 또한 유전자 조작 기술 중 "터미네이터 기술"(주 4)은 자본의 숨은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터미네이터 기술이란 올해 심은 씨앗이 다음 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기술을 말하는데, 이 기술은 자신이 재배한 식물의 씨앗을 거둬들여서 다시 뿌릴 수 있게 농부의 권리를 박탈하여 그 만큼(전 세계적으로 50%)의 종자시장을 더 차지하고자 하는 기술이다.

거대 자본은 이러한 유전자 조작 기술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엘리트 과학자 집단들과 결탁하여 반대 사례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한국과 유럽연합 등의 국가에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통관절차가 복잡하다며 이를 간소화해줄 것을 요구해왔고 지난 8월에는 EU의 유전자 조작 식품 금수조치와 관련해 WTO에 제소한 바 있다.

2세대에 접어들면 1세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여 시장확대를 꾀한다. 이를 위해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광고 전략을 바꾸었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유전자 조작 기술로 굶주리는 제 3세계 민중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기적의 치료약과 유전자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

식량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개발된 대표적인 유전자 조작 농작물은 비타민 A를 보강한 '황금쌀(Golden rice)'(주 5)이다. 황금쌀의 경우 신젠타라는 다국적 기업이 특허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기업은 노바티스와 아스트라제카의 농업부문을 합병해 탄생한 농약 분야 세계 1위, 종묘 분야 세계 3위의 기업이다.

그러나 황금쌀과 같이 독점된 유전자 조작 기술은 식량 문제 해결이 목적도 아니며 해결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황금쌀에 포함된 비타민 A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지방과 또 다른 비타민 그리고 미네랄 등이 필요하다. 또한 비타민 A를 얻기 위해서 꼭 특허로 독점되고 위험성이 있는 황금쌀일 필요는 없다. 이미 기존의 식품인 현미에는 비타민 A와 다량의 미네랄이 포함되어 있다. 자본은 이러한 손쉬운 대안에는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에 외면한다. 아울러 바이오 부분의 연구 자금 중에서 단지 1%만이 가난한 농민을 위한 농작물 개발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식량문제 해결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략은 극심한 식량난에 봉착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조작 식품을 원조하는 방법이다. 마치 마약 상인이 마약 소비자를 확대하기 위해 중독될 때까지 마약을 공짜로 뿌리는 판매전략과 동일하다. 미국은 그런 방법으로 말라위, 스와질랜드, 레소토, 짐바브웨와 모잠비크 등의 나라들로 하여금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모두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식품 생산, 환경, 무역 및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할 중요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240만 잠비아 민중들은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바로 잠비아에 옥수수 공급과 원조를 중단했다. 이러한 예는 그들의 목적이 식량문제 해결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보여준다. 신젠타의 황금쌀도 연간 수입이 1만불 이하의 농민들에 대해서는 종자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계약을 했지만, 이 계약이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명확하지 않다.

전 세계 인구 중 적어도 60억의 인구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 그러나 현재 전체 식량 생산량은 이미 소비량보다 1.5배 많으며, 일부에서는 도리어 비만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구상의 식량문제가 유전자 조작 식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분배구조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제 3세계 민중들이 필요한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음식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굶주림을 막기 위해서는 가난에 찌든 국가의 부채를 탕감하고,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배분하고, 관계 용수와 식품 창고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도움과 무이자 대출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한 유전자 조작 식품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 사회인 것이다.

유전자 조작 기술과 의약품

유전자 조작기술로 기적의 치료법을 개발하고 유전자 치료가 가능하다며 선전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개발된 약품은 인터페론(주 6)과 인슐린 2가지뿐이다. 다른 치료방법이 없는 난치병의 경우, 유전자 조작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인터페론은 1950년대에 알려져 C형 간염(hepatitis C)이나 혈액암(blood cancer), 다발성경화증(multiple sclerosis)(주 7)등 다른 치료방법으로 불가능한 병들의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인슐린이라는 호르몬도 과거에는 돼지와 소에서 추출했지만 지금은 유전자 조작 기술로 다량 제조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제 역시 독점된 기술이라면, 노동자-민중의 접근권이 상당히 제한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에이즈(AIDS) 치료제와 백혈병 치료제(글리벡)를 둘러싼 투쟁에서 잘 알 수 있다. 일부에서는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갖는 바나나'와 같은 유전자 조작 식품으로 저 개발 국가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기술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백신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건강 보조식품이나 약품을 생산하는 기술로 전락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3세계 민중들의 건강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보다 많은 진료소를 설치하고 의사-간호사들을 양성하며, 필수 의약품에 대한 특허를 폐지하여 접근권을 확대하는 일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현재 연구 프로그램 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하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반대하는 이유

이렇듯 전 세계 식량 문제와 보건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대안들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자본이 유전자 조작 식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특허를 통해 쉽게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에 미국 대법원이 생명체에 특허권을 부여함으로써, 살아있는 생물로부터 유전자를 분리하는 방법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 자체도 개인 소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바이오 산업에는 이미 10여 개의 거대 독점 기업이 이 산업을 지배하고 있고, 유전적으로 변형된 작물의 70%가 몬산토 특허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전자 조작 기술은 정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로서, 노동자-민중에게 특정분야에 한해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이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 연구의 대부분은 공공자금으로 수행되고는 있지만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 바이오 산업을 지배하고 있고, 이들은 소수 거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의 좌파 과학자 스티븐 로즈는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는 것은 위험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유전자 조작 음식보다도) 훨씬 우려되는 독성 물질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 조작 토마토를 먹지 않을 것이다. 내가 몬산토의 이익에 기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라며 계급적 관점에서 반대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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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 결과는 the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이라는 논문지에 2003년 10월 16일자로 발표되었다. 3개 중 나머지 하나는 유전자 조작 콩이다.

(주 2) 몬산토는 고엽제를 생산했던 기업으로 악명 높다.

(주 3) 유전자 조작 기술의 기술적 문제에 대해서는 매완-호 교수의 논문 "생명공학 거품"에 잘 설명되어 있다. http://phps.snu.ac.kr/people/walker71/biotech_bubble.htm에 서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주 4) 미국의 농무부와 목화 종자회사인 델타 앤드 파인 랜드사가 이 기술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특허(US 5,723,765)받았으며, 현재 카나다(CA 2196410), 호주(AU 9532050), 유럽특허청(EP 775212) 등에서 심사계류 중이다. 현재 실시권을 허여 할 수 있는 권리는 델타 앤드 파인 랜드사에 귀속되어 있으며 농무부는 본 특허권이 상업화 되는 경우 순매출액의 약 5%를 로얄티로 지급받게 된다. 국제특허출원(PCT)을 하면서 한국을 지정하였으나 국내절차를 밟기 위한 번역문을 소정 기간 내에 제출하지 않아 1997. 5. 25자로 취하 처분됨으로써 한국에 대한 특허출원은 포기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주 5) '황금쌀'이란, 쌀에 두개의 수선화 유전자와 박테리아 유전자를 삽입한 것으로 쌀의 프로-비타민 A를 강화한 것이다. 이 프로-비타민 A는 몸 속에서 비타민 A로 바뀐다. 실제로 WHO(세계보건기구)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에 1억 명 이상의 비타민 A 결핍증 어린이가 있고, 이 중 25만-50만 명이 매년 눈이 멀고 있으며 이 가운데 50%가 1년 이내에 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 6) 세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인터페론(interferon)이란 단백질이 생성되어 다른 세포들을 감염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지난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7) 정상적인 면역계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물질을 공격함으로써 우리 몸을 보호한다. 그러나 면역체계가 외부물질과 자가세포를 구별하지 못해 신경세포 섬유의 수초 (마이엘린)를 공격하게 되면 수초가 서서히 파괴되는 질환이 발생하여 무감각, 근육 위축, 강직, 시력 감소, 운동 실조 등에 걸리게 되는데 그것이 다발성 경화증이다.

참고 사이트

http://www.agri-korea.or.kr/gmo/gmoq&a.htm

http://phps.snu.ac.kr/people/walker71/myth_of_agribiotech.htm

http://www.guardian.co.uk/gmdebate/Story/0,2763,1053917,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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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게놈 프로젝트 -그 위험한 자본가의 과학

인간 게놈 프로젝트 -그 위험한 자본가의 과학

사회진보 연대 2001.11.04 통권 20 호

지난 10년동안의 호황을 누렸던 신경제가 2000년부터 불황의 신호를 울리기 시작했다. '피의 금요일'로 기록된 2000년 4월 14일의 주가 폭락으로 무려 1조 달러가 주식시장에서 증발되었고, 그 주간 미국 나스닥이 기록한 폭락세는 1929년의 전설적인 '검은 금요일' 주간보다 컸다. 신경제를 받쳐오는 정보통신기술에서 더 이상의 수익모델을 기대할 수가 없고, 이 사실은 신경제의 미래를 더욱 참혹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경제에 도취한 클린턴 정부는 신경제의 거품을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다. 클린턴 정부는 그 해 6월  미국, 영국 등 6 개국 국제 컨소시엄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 연구 팀 책임자 콜린스 박사와 그 경쟁자이자 앙숙인 벤처 회사 셀레라 대표를 화해시키고 완성되지도 않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 초안을 서둘러 발표하였다. 정보통신기술의 거품이 빠지는 시점에서 생명공학으로 신경제 거품을 다시 부풀게 하려는 의도였다.1) 이러한 노력들은 유전자 기술의 산물인 탄저균 공포가 미국을 엄습하자 생명공학분야 벤처들의 주가가 일제히 상승하며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란

게놈(Genome)은 유전자(gene)와 유전자를 담는 염색체(chromosome) 두 단어를 합성한 용어로, 한 생명체에 담긴 유전 정보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인간은 60여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고, 각 세포핵에는 23쌍의 염색체가 들어 있는데, 이 염색체에는 유전자 비밀이 ‘담겨 있다고 하는’ DNA가 있다. DNA는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의 4개의 염기가 이중 나선 구조로 돼 있다. 사람의 경우 세포마다 대략 32억 쌍의 염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바로 이 32억 쌍의 염기가 어떤 순서로 배열돼 있는가를 밝혀 내는 작업을 말한다.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는, 신경제 부활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정부와 자본에 의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이 프로젝트가 각종 난치병인 암, 치매, 에이즈, 파킨스병, 당뇨병, 심지어 마약 및 알콜 중독 등의 원인규명과 유전적인 정신질환의 치료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환상이 그러하고, 유전자들은 인간 몸의 구성, 병의 발생, 행동양식과 지적 능력, 성(性)적 선호도, 범죄 성향까지도 결정한다는 지극히 위험한 유전자 결정론 혹은 ‘우생학‘과 같은 환상들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인간 게놈 프로젝터 연구결과에 따르면인간 유전자는 대략 3만여 개 정도이며, 유전자들은 초파리와 50%, 개와 85%, 침팬지와는 99%나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결과는 미세한 유전자 차이가 매우 다양한 차이로 나타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초파리, 개, 침팬지, 사람 순으로 복잡한 생물로 갈수록 새로운 유전자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유전자들 사이, 그리고 환경과의 다양한 상호작용이 중요함을 밝혀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 개방대학 생물학과 교수 매환호(Mae-Wan Ho) 박사는 개별 DNA염기서열 분석만으로는 인간에 관한 어떤 것도 알아 낼 수 없으며, 모든 염기 서열을 분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게놈에는 10,000개 이상의 유전자가 있는데, 이들 각각은 수 백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변이들을 갖고 있는데, 가능한 유전자 조합의 수는 각각의 유전자에 대해 10개씩의 변이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1010,000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숫자를 우주의 모든 입자수(1030)와 비교해 보면 어떠한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유전자는 단순히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을 알려줄 뿐이며, 기껏해야 그 유기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단백질 종류를 알려주는 정도이다.

노동자-민중의 신체일부가 자본가 소유가 되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많은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투자와 연구 자금이 지속적으로 제공된다면 그 기술의 위험성을 논외로 하면, 극히 일부의 의학 상품들이 개발되기도 한다. 30여년의 유전학 연구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인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이 그 예이다. 그렇지만 자본 주도의 의약품 개발과 특허를 통한 독점권 확보는 노동자-민중에게 엄청난 치료비 부담을  자본가에게는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뿐이다. 미국 제넨텍의 항암제의 경우 그람(g)당 5000달러, 암젠사의 빈혈치료제 에리스로포이에틴(EPO)의 경우 67만 달러, 항암 보조치료제인 콜로니자극인자(CSF)는 53만 달러나 한다. 미생물 유전자 변형산물인 인슐린의 대량생산을 통해 싼 가격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거는 자본가들의 기대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유전자 발견에 대한 특허는 유전자 또는 DNA 서열 자체에 특허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 유전자를 이용하는 모든 행위에 특허가 인정되게 된다. 예를 들어 특허 받은 유전자를 재조합하여 단백질을 만들거나 이 유전자와 다른 단백질 유전자를 조합하여 융합단백질을 만들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특허권의 권리범위이다. 즉, 유전자 특허의 권리범위는 거의 무한한 것이다. 인간 유전자에 대한 특허 전쟁은 생명 윤리와 과학적 양심에 대한 고려도 없이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미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1995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175건의 인간 유전자가 특허를 인정받았으며, 1999년까지 미국 정부 388건, 인사이트 356건, 캘리포니아대학 265건, 제넨테크 197건을 특허 등록한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은 집계하고 있다. 특허 출원도 1980년대 매년 15만건에서 현재에는 27만 5천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기술과 특허는 기술 독점을 넘어 노동자-민중의 생명 일부가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상품으로 전환된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통제 시스템까지 예고하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의 경우 귀족은 노예 신체를 모두 소유했지만, 21세기 자본가는 노동자-민중의 신체중에서 ‘돈’이 되는 유용한 것들만 분리하여 소유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1980년대 환경을 상품으로 만든 후 1990년대 정보/지식을 상품으로 전환하였다. 이제 2000년대에는 노동자-민중의 생명 일부를 소유하고 상품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던 존 모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체의 일부가 특허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때 희귀한 암에 걸려 캘리포니아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를 치료하던 의사는 비장에서 백혈구 생성을 촉진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의사는 산도스라는 제약회사와 함께 이 비장 세포를 대량으로 배양하는 기술을 개발하고는 1984년 이 ‘발명’에 대해 특허를 받은 것이다. 무어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뒤늦게 소송을 제기 했지만 1990년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무어가 자신의 신체조직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자신의 몸 일부가 자본가의 소유가 된 것이다. 또 다른 특허는 모든 아기의 탯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 우리를 더욱 경악스럽게 한다. 1993년 미국 바이오사이트사는 갓 태어난 아기의 탯줄에서 나오는 모든 혈액 세포2)에 대한 소유권을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얻어냈고, 96년에는 유럽 11개국에서 특허를 획득했다.

정부와 자본가는 독점된 유전자 기술을 통해  노동자-민중들의 유전자를 검사하여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고 한다. 아이슬란드와 통가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전체 인구의 DNA 데이터베이스가 사기업에 팔렸으며, 스위스에서는 정부가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따른 윤리문제에 대해 다른 기업들과 협상을 하고 있고, 영국 정부는 스스로 데이터 베이스 설립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 베이스 정보는 노동자들을 고용거부하는 구실로 이용할 수 있고, 건강 보험도 거부할 수 있는 등 훌륭한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미 영국 보험회사들은 개개인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요구하는 실정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위험한 장난

인간 게놈 연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핵 기술과 같이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유전자 연구의 붐을 조성한 복제양 돌리를 만드는 기술은 핵을 제거한 난자에 성체의 세포로부터 끄집어낸 핵을 집어넣은 후 그 난자가 배아를 발생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의 성공률은 1퍼센트도 채 안된다3). 난자 혹은 정자 세포, 초기 태아의 분화되지 않는 세포들의 유전자 조작을 배종 유전자 조작(germ line manipulatio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유기체의 세포 전부에 영향을 미치며 다음 세대로 대물림하게 되므로, 개인들과 자존에 위험이 크고 어떠한 위험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전자 치료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게놈 속에 유전자를 삽입하는 기술은 여전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1999년 9월 18세 소년 제시 겔싱어(Jesse Gelsinger)사건은 유전자 치료의 위험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는 유전질환인 신체의 암모니아가 증가되는 질병 OTC 결핍증4) 을 앓고 있었다.  OTC 결핍증은 식이요법으로도 생명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지만 겔싱어는 유전자치료 임상실험을 자청하여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아데노 바이러스를 이용한 유전자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유전자가 포함된 아데노 바이러스(유전자 운반체)를 가지고서 치료를 받던 중 4일만에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망이유는 운반체로 사용된 아데노 바이러스에 의한 면역 독성 가능성으로 추정하고 있다5)        

인간 게놈 프로젝트 - 명백한 자본의 과학

인간게놈 프로젝트에 지난 십여년 동안 미국은 3조 달러의 공적자금을, 영국은 수억 파운드를 사용하였지만 노동자-민중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의료 기술의 성과는 아주 미미하다. 정부와 자본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수익모델을 이끌어 내지 못하자,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기적의 암치료, 질병의 박멸, 유전자 치료, 개인화된 약품 및 유전자 구성에 기반한 생활방식의 처방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조장하고, 이전 보다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공적자금의 투자는 다른 보건 의료 서비스의 연구 개발을 무시하는 왜곡된 구조를 재생산한다. 열악한 주거 조건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서 비롯되는 빈민성 질환에 대한 투자는 전무한 상태이다. 세계보건연구포럼(GFHR) 대표인 아데토쿤보 루카스에 따르면 지난 10월 연례회의에서 “현존하는 인류질병의 90%를 위해서 연간 700억달러 연구비중 10%만이 투자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설사 게놈 프로젝트의 극히 일부 기술이 성공하여도 그것은 노동자-민중의 생명체 일부를 특허하는 ‘해적질’을 통해 자본가 소유로 귀속될 것이고, 이것들은 상품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민중에게는 높은 가격의 치료약으로 되돌아 올 뿐이다. 아울러 이러한 과학기술은 핵실험이나 소립자 연구와 달리 거대 연구기관 몇 곳이 아니라 세계곳곳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여러 연구기관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통제나 폐기 또는 방향전환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같은 연구는 정보 공유를 통한 투명한 연구진행과 일상적인 노동자-민중의 감시와 통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실감하고 있다. 전 미국을 휩쓸고 있는 유전자 기술의 성과(!)인 탄저균6)의 예는 이것을 너무도 명백하게 말해 주지 않는가? PSSP


1) 앨빈 토플러는 다음 '제 4의 물결'은 인터넷을 이용한 디지털과 생명공학에 의한 혁명이 될 것이라고 또 다시 거품을 불어넣고 있다.

2) 탯줄 혈액에는 백혈구나 적혈구로 분화되기 이전 단계인 조혈모세포가 듬뿍 함유돼있어 백혈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치료에 이용될 전망이 높다.

3) 만약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핵을 제거한 1개의 난자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100명 이상 난자 기증 여성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울러 돌리가 정말 성체 세포의 핵으로부터 복제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많은 의문이 있다.

4) ornithine transcarbamylase

5) 투여된 아데노 바이러스가 목표장기인 간 뿐 아니라 다른 장기까지 침투되었다. 이로 인해 수시간만에 염증반응을 보여 환자체온이 섭씨 40.3도까지 올라갔다. 다음날에는 환자가 혼수상태가 되었고, 이에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였으나 폐는 흉수로 가득 찼고 더 이상 혈액을 산화시킬 수 없게 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6) 유전공학기술은 탄저균, 천연두균, 콜레라균 등 각종 세균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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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리눅스 정치(The Politics of Linux)

 이 글에서는 리눅스로 대변되는 오픈 소스 운동이 갖는 의미를 비교적 쉽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이 글은 자본주의내로 흡수 통합되어 규모면에서 확대되는 오픈 소스 운동과 그것에 저항하는 흐름을 잘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들 흐름을 단순하게 에릭 래이몬드의 오픈 소스 운동과 리차드 스톨만의 자유소프트웨어운동으로 나눌 수 있으나 현재까지 명확하게 분리 대립되고 있지는 않다. 한가지 예로 리눅스의 창시자 리눅스 토발즈는 오픈 소스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데비안 리눅스를 만든 부르스 페렌(Bruce Perens) 같은 사람은 오픈 소스 운동을 만들었다가 다시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으로 돌아 가기도 했다. 물론 리차드 스톨만은 지속적으로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 좌파들은 이러한 두 흐름의 미묘하지만 “큰”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번역하였다. 참고로 부르스 페렌은 그의 짧은 편지 "It's Time to Talk About Free Software Again"에서 왜 그가 다시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이 글은 2001년 10월에 “전 세계 컨텐츠 생산자여 단결하라! 세계화의 문화정치”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맥마스트(McMaster) 대학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되었던 에세이이며, 2003년 5월에  모음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번역문은 노동자의힘 45호-48호까지 연재하였다.(역자 주)

The Politics of Linux

리눅스 정치

태드 프리드만(Ted Friedman), 조지아 주립대학교

유토피아적 공간

글로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숙제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생산과 유통에 대한 대안 모델을 개발하는 것- 점진적 개혁을 넘어선 현 글로벌 시스템에 매우 매력적인 대안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는 단순한 비판이상의 것을 요구하는데, 우리의 사회적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신자유주의 지배사상(doxa)의 족쇄를 벗어나게 하는 유토피아적 생각을 가진 새로운 정신과 창조성을 필요로 한다.

좌파에 대한 일부 비판론자들은 이런 종류의 유토피아적 생각은 죽었다는 것에 동감하는 듯하다. 러셀 야코비(Russell Jacoby)는 유토피아의 종말: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The End of Utopia: Politics and Culture in an Age of Apathy,2000)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미국 만들기 : 20세기 미국에서 좌파의 생각(Achieving Our Country: Leftist Thought in Twentieth-Century America)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애도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주의에 흐르고 있는 유토피아적 생각의 끈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그의 에세이 “물화(reification)1)와 유토피아”에서 주장했듯이, 자본주의 문화는 항상 유토피아적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소비자들이 주목하는 대중문화는 이러한 유토피아의 짧은 경험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적 요소는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유토피아주의는 빠르게 진압되고 저항은 동화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에 비판적 참여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탈신비화 해야 함은 물론이고, 때로는 유토피아적 충격을 확대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현 글로벌 시스템에서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한다면, 대중문화와 하위문화의 실천 속에서 깊이 흐르고 있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 곳에 우리가 꿈꾸는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있다.

 만약 모든 대중문화 저변에 흐르는 유토피아주의가 있다면, 그 흐름은 확실히 다른 담론들보다 더 가깝게 표면위로 상승한다. 유토피아적 생각들을 풍부하게 하는 담론들은 컴퓨터 문화 영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꽤 명확해 보인다. 다름이 아닌 컴퓨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미래가 어떠하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미래를 원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도 주장했듯이 컴퓨터 문화는 유토피아적 영역(utopian sphere)과 같이 동작한다 - 유토피아적 영역이란 다른 종류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공적영역(public sphere) 내부에 안전한 공간을 말한다.

공적 영역에서 수용할 수 있는 정치적 논쟁의 범위는 [기껏해야] 연방준비은행이 0.25% 금리를 인하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 정도인데, 컴퓨터에 대한 탐색의 공간은 더 급진적인 전망을 가지고 실험할 여지가 있는 극소수의 공간이다. 그것은 당면한 실용주의적 정당성에 대한 요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시간의 씨앗(The Seeds of Time,1994)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종말보다는 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운 것처럼 보인다고 암시했듯이, 컴퓨터에 대한 담론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드문 공간중에 하나이다.



리눅스란 무엇인가?


리눅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나 애플사의 매킨토시 OS(Operating System)와 같은 컴퓨터 운영시스템이다. 이들 시스템과 차이점이 있다면 “오픈 소스(Open Source)”라는 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저작권”을 설정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GPL(General Public License)이라는 [저작권]하에 배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저작권은]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수정, 배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며, 유일한 제약 조건으로는 이 저작권이 적용된 소프트웨어를 재배포할 때 역시 이 규약에 명시된 것과 동일하게 배포, 수정, 그리고 소스코드를 얻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Rosenberg) 저작권(copyright)대신에 GPL은 종종 ”카피레프트(copyleft)"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종종 “프리웨어(freeware)2)”라고 불린다. 리눅스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큰 커뮤니티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집단적으로 개발하였다. 레드 햇(Red Hat)이나 칼데라(Caldera) 등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리눅스를 패키지 버전으로 관련 문서와 생산 지원과 함께 팔고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리눅스, 넓은 의미에서 오픈 소스에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내에서] 그 범주 밖의 사회 경제적 관계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물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은 특별하고 독특한 커뮤니티에 의해 진행된 전문적인 작업이기는 하지만, 리눅스의 수많은 이용자와 개발자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적 관계로 구성된 미래의 한 단면, 즉 광범위한 유토피아적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실천방법인 오픈 소스 개발은 반드시 경제관계 전반에서 전형(template)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제품이 디버그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또 모든 노동자들이 숙련된 리눅스 프로그래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외되지 않고, 상품화되지도 않는 노동이라는 오픈 소스의 비전은 21세기에 우리가 원하는 노동의 모델로 작용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임슨이 언급한 바와 같이 유토피아의 이면에는 물화(reification)가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화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닥치는 대로 흡수해 버린다. 급진적 사상은 사유화되고 상품화되어 그들이 비판하고자하는 시스템을 통해서 판매된다. PC가 기술의 민주화를 가져올 도구가 될 것이라는 개발 초기의 비전은 애플사,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의해 성공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되었다. 확실히 PC는 세계를 변하게 했다-헤게모니는 항상 협상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기술의 힘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PC가 대중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권력 구조의 변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거대 음반회사에 “팔리는 것”을 경계하는 인디 락 밴드의 딜레마를 생각해보라. 공적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당신의 상품을 시장에 팔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하면 당신은 당신이 반대하는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티지아나 테라노바(Tiziana Terranova)는 “자유노동 : 디지털 경제를 위한 문화생산(2000)”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테라노바는 오픈 소스 프로그래머, 아마추어 웹 디자이너, 채팅룸 관리자(moderator) 등 사이버공간에서 활동하고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의 자유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에 저항적 대안이라기보다는 디지털 경제에서 자본주의에 통합된 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들 지식 노동자들은 많은 “컨텐츠”를 제공하는데, 그러나 [그들의 무료 노동은] AOL,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기업들을 위해 웹(Web)을 돈벌이가 되는 곳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기업들은 [그들의] 노동으로 돈을 벌어들이는데 아무른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앤드류 로스(Andrew Ross)는 “정신노동의 문제(The Mental Labor Problem)”(2000)에서 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착취적 조건(주당 80시간 노동, 임시계약직, 의료혜택을 받지 못함)에 대해 순종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조건들을 미화하기까지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카페인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에 대한 예찬) 이것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포스트 모던한 노동력의 한 부분으로 “문화적 디스카운트(cultural discount)”가 널리 퍼진 예로 볼 수 있다. “문화적 디스카운트”는 창조적 기술전문가들이 다른 직업 보다 낮은 임금을 기꺼이 받으면서 좀더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노동을 실현할 기회를 보상 받는 현상을 말한다. 로스는 이 시스템이-보헤미안3)의 시장에 대한 낭만적 거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스템- 자본주의 지식 경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적 요소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한 문화는] 대학교가 대학원 시스템에 의해 착취되면서도, 정신적 삶의 기반을 유지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수업조교와 관련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리눅스 개발자들이 이러한 창조에 대한 디스카운트(creative discount)의 본질적인 희생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적 자본을 기부하고 있고, 그것으로 레드햇과 IBM과 같은 기업은 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픈 소스에는 매우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상품화 과정과 전유과정을 구조적으로 중지(short-circuits)시킬 수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리눅스 개발자들은 그들의 노동을 [무료로] 기부한다. 하지만 GPL에 포함된 문구는 다시 원상태로 돌릴 수 있는 특별한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문구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제한 조항을 추가할 수 없게 하여 개발자의 작품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문화적 디스카운트는 청중들의 접근권 허용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통제권을 [단지] 양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 그들의 주요 음악 녹음을 그들의 앨범으로 제작할 수 있는 소유권을 양도해야 하는 모든 음악가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와 다르게] 리눅스 개발자들은 창조적 통제의 지속적 보장에 대한 답례로 그들의 보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기업들은 이 시스템이 그들의 현 지적재산권 영역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오픈 소스 커뮤니티에 대한 색깔시비를 벌이고 있다. CEO 스티브 발머는 리눅스를 “공산주의“로 언급하고 있고(Geene 2000), 한 기자에게 ”리눅스는 지적재산권 체제 내에 기생하여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에 달라붙는 암적 존재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Lea 2001). 윈도우 책임자인 짐 알친(Jim Allchin)은 ”나는 미국사람이다. 미국식으로 믿는다. 만약 정부가 오픈 소스를 장려한다면 그것은 그 위협을 이해하는 정책입안자들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Bloomberg News 2001).

오픈 소스 정치

리눅스가 자본주의적 관계에 유토피아적 대안을 제공해 준다면, 이 모델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 또 오픈 소스 개발의 정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리눅스의 의미, 즉 이 고무적인 프로젝트로부터 교훈을 이끌어 내고 설명하려는 이야기들, 자체가 바로 투쟁의 과정이다. 필자가 리눅스에 대한 여러 가능성들을 찾아내기 위해 네트를 찾아 내려갔을 때, 놀라울 정도로 서로 경쟁적이며 부적합한 설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오픈 소스를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학술연구 형태, 선물 경제 이랜스(e-lance) 경제4) 그리고 자유시장의 승리라고 서술되고 있다.- 몇몇 공통된 생각들은 그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적절하지만, 물론 이 모든 설명들이 모두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리눅스, 이 놀랍고도 고무적인 성공 이야기의 중요성을 정의하는데 현재에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부터 리눅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가지 개념, 즉 에릭 래이몬드와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비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래이몬드와 스톨만은 리눅스의 개발에 핵심적 업적을 남긴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스톨만은 리눅스의 전신인 GNU 운영 시스템을 개발하였고 레이몬드는 페치메일을 비롯한 많은 핵심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리눅스에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리눅스의 지지자이자 이론가이기도 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그들의 에세이, 스톨만의 “GNU 선언문”, 레이몬드의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두 사람을 안토니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위 “유기적 지식인”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커뮤니티 외부에서 그 커뮤니티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그들이 서술한 그 커뮤니티 내에서 나왔고, 자신의 커뮤니티와 바깥세상을 위해서 그들 자신의 커뮤니티를 명확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필자는 그 커뮤니티 바깥쪽에 있는 학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리눅스에 대해 정리하는 작업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리눅스 커뮤니티 내부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대표하고자 노력하게 한다)

래이몬드와 스톨만이 리눅스 프로그래머로 같은 커뮤니티 내에서 목소리를 내지만 서로 그들의 프로젝트를 보는 입장과 정치적 견해는 서로 반대되며 대립하고 있다. 래이몬드는 오픈 소스를 자유시장의 승리로 찬양한다. 그리고 오픈 소스를 소프트웨어 개발에 효율적인 도구로서 흥미를 가진다. 반면 스톨만은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전망을 지적재산권 시스템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서 찾는다. 래이몬드와 스톨만의 견해에 대해 각각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딱지를 종종 붙이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래이몬드와 스톨만 둘 다 해커 문화의 고유한 자유주의적 가치로부터 같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끝을 맺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래이몬드를 기업-자유주의자(corporate libertarian)로 스톨만을 좌파-자유주의자(left-libertarian)로 부를 수 있다. 게다가 필자는 확고한 스톨만 캠프의 지지자이다.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래이몬드 접근의 한계와 스톨만 접근법의 장점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래이몬드의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에릭 래이몬드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도구 개발 분야에서 거의 20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해온 소프트웨어 개발자이다. 그는 역시 해커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이며, 새 해커 사전(New Hacker's Dictionary)을 편찬했으며“해커 문화(Hackerdom)의 짧은 역사“라는 널리 읽히는 책을 지필 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래이몬드는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오픈 소스의 이론가가 되었다. 래이몬드 자신이 세운 역할은 마이크로소프트사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리눅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시도로 오픈 소스에 회의적인 사업가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그의 에세이 "성당과 시장“은 넷스케이프사로 하여금 네비게이트를 오픈소스로 하기 위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내부 문서인 ‘할로윈문서’에 대한 그의 폭로와 분석은 이 비히무스 괴물5)이 리눅스를 실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뉴스로 해커들을 고무시켰다. 그의 에세이 “성당과 시장”은 현재 오픈 소스 출판사인 O'Reilly & Associates에 의해 출판된(1999), “성당과 시장”이라는 제목의 그의 에세이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레이몬드의 정치는 해커 자유지상주의 (급진적 자유주의 libertarianism)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리차드 바버룩(Richard Barbrook)과 앤디 캐머론(Andy Cameron)(1998)에 의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로 설명하고 있고 파울라 바숙(Paula Barsook) (2000)은 "사이버 이기주의(cyberselfishness)"로 붙이고 있다. 해커 자유지상주의는 무엇보다도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가치를 두고 있고 전통적으로 자유를 극대화시키는 주체로 족쇄 풀린 자본주의-시장을 찬양한다. 물론 자유지상주의는 모든 권력의 집중화에 회의적이지만 기업 권력보다도 국가권력에 대해 더 많이 우려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해커 자유지상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따르면서도,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독점이 자유시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해커의 자유 지상주의는 소수의 자산가들에 의한 방대한 부의 축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네트 경제에 적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성당과 시장”을 읽었을 때 특히 놀라운 것은 래이몬드가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을 자유시장의 골격에 적합하게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래이몬드의 논문에서 구성된 은유는 성당 건축의 수직적 명령구조와 경쟁적이며 분권화된 시장(bazaar) 세계와 대비시키고 있다. 물론 시장(bazaar)에서의 상인은 상품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오픈-소스 개발자들은 그들의 시간을 [무료로] 기부하는 자발적 봉사자들이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래이몬드는 “선물 경제”를 오픈 소스 개발을 설명하는데 도입하였다.

선물경제로서 오픈 소스 개발의 개념은 흥미 있는 개념이다. 선물경제의 개념은 대부분 리차드 바버룩의 에세이 “하이테크 선물 경제”(1998)에 잘 언급되어 있다. 선진국가 내에서 대부분의 정치가와 기업 총수들은 자본주의의 미래가 정보의 상품화에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러나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의 최선두에서는 화폐-상품 관계가 아나코-꼬뮤니즘의 실존 형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관계로 보조적 역할로 밀려나고 있다. 대부분의 네트 이용자들에게 네트는 그들이 서로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배우고 토론하는 곳이다. 물리적 거리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그들은 정치나 화폐의 직접 중재 없이 서로 협력하고 있다. 그들은 저작권에 도 무관심하여, 정보에 대해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없이 서로 주고받는다. 사회적 결합을 위해 국가나 시장이 없이도 시간과 생각의 선물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호 책임을 통해 네트워크 커뮤니티는 형성된다.

[이상과 같이] 선물 경제는 상품화 관계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래이몬드는 바로 이점을 무시하고 있다. 래이몬드는 선물경제를 "탈-희소성(post-scarcity)"이라 불리는 환경에 의해 확장된 자유시장으로 보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탈 희소성” 환경에서 해커들은 더 이상 화폐를 위해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대신에 명성- 혹은 그들이 자아 상승(ego boost)라 부르는 “에고부(egoboo)6)"을 위해 그들은 경쟁한다. 이 용어는 과학소설 팬들의 세계(science fiction fandom)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진화 심리학7)의 가정을 빌어 그는 ”사람들이 [해커]의 동기를 “이타적”이라고 하지만 이타주의 그 자체가 이타주의자들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한 형태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동어 반복일 뿐이다; 만약 사람이 모든 자신의 선택을 불가피하게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미리 정한다고 가정하면, 이기심이 없는 행동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이기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미숙한 철학자들(old freshman philosophy)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도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살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이기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 보았다. 이런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환경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심리 중에서 이타주의가 부각될 수 있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래이몬드에게 그 대답은 “탈 희소성” 경제이다. 여기서 화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는데, 이러한 래이몬드의 견해는 기업 자유 지상주의 특유의 몰역사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래이몬드는 “탈 희소성”에서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을 주장한다. : “디스크 공간, 네트워크 대역폭, 컴퓨터 성능”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무엇을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는지를 고려해봐야 하는데, [그가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 기반 시설이다. 오픈 소스 연구는 국가지원 연구 대학에 의해 장기간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고, 인터넷은 미 국방성의 연구계획기관(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지원 하에 발전되었다.

더 놀라게 하는 것은 래이몬드의 글 성당과 시장의 서문에서 가볍고 대담하게 “희소 경제를 넘어서는 21세기의 정보 과잉 시대“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래이몬드는 미국의 방대한 부분만을 고려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세계, 즉 컴퓨터 능력이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삶의 필수 조건이 되는 [제 3]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희소성에 근접하는 어떤 움직임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래이몬드는 탈-희소성 경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리차드 스톨만은 탈-희소성을 투쟁해야하는 목표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경제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으로 스톨만의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 보자. 스톨만은 스티븐 레비(Steven Levy)의 Hackers(1984)에서 언급한 불멸의 MIT 인공지능 연구소 소속의 유명한 프로그래머의 일원이었다. 스톨만은 항상 소프트웨어를 공동체의 자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사유화를 추구하는 MIT를 1980년대 초에 떠났다. 곧이어 스톨만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창설하고 유닉스(UNIX) 운영체제에 대한 오픈 소스 버전 개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을 GNU라 명명했다. GNU는 "GNU's Not Unix(GNU는 Unix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커들이 자주 사용하는 ”자기 호출(재귀) 약어(recursive acronym)“로 일종에 유머이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정의하며 끊임없이 반복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GNU가 다시 GNU's Not Unix로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GNU는 여러 리눅스의 연속적인 개발에 가장 큰 기초가 되었다. 스톨만은 대안적인 저작권으로 ”카피레프트(copyleft)"-어떤 사람이 개발한 자유소프트웨어를 사유하거나 착복할 수 없게 하는 방식-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톨만은 래이몬드와 같은 자유지상주의 틀에서 시작했지만, 스톨만은 그것을 더 밀고 나갔다는 점이 래이몬드와 다르다.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그의 투자는 정보 소유에 대한 훨씬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게 했다. 스톨만이 Byte 잡지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정보와 지식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지식을 소유하려하는 것, 지식과 정보의 사용허가를 통제하려는 것 혹은 그것을 공유하려는 것을 막는 행위, 이 모든 것은 일종에 파괴행위(sabotage)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피폐하게 하는 행위이다.“고 언급한 바 있다. 스톨만은 소프트웨어 한 단위를 빵 한 조각에 대비한다. 만약 누군가 내 빵 한 조각을 가지고 간다면 나는 그 빵을 다시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제한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빵과 같은 것이다. 빵을 나누어주어도 당신은 여전히 빵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독점하는 행위를 스톨만은 ”소프트웨어 매점(software hoarding)“이라고 불렀다

스톨만의 이 추론에 고무적인 것은 해커 윤리 중 최고의 덕목인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존중과 세상을 변혁하려는 이상주의적 욕망을 포괄하는 그의 방법이다. 그는 이 추론을 논리적인 결론으로 밀고 나가 평등주의적이며 공동체주의적 비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제] 그 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신성시하는 사유재산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이버이기주의를 벗어나 대안적 사이버토피안(cybertopian)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과 이용자들의 사명감에 책임 있는 견해로 생각된다.

물론 자유소프트웨어의 에릭 래이몬드 버전8)은 래드햇의 밥영과 같이 새로운 리눅스 기업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더 낮은 이윤을 제공하고 그것에 익숙해질지라도, 그것은 보편적 자본주의에 훨씬 더 적합하다. 그러나 카피레프트 시스템의 천재 스톨만 덕분에 그의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본 친화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더라도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지적재산권 영역에 도전하고 있고 주목할 만한 유토피아적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 그 대안적 힘은 냅스터와 같은 유사한 도전에 대한 관심의 폭발로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GNU 선언문에서 스톨만은 자신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에드워드 벨라미9)( Edward Bellamy), 벅민스터 풀러10)(Buckminster Fuller)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11)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술 유토피아주의의 전망과 유사하다. 유토피아적 환영은 실제 삶으로부터 눈멀게 하는 이데올로기이며, 환타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들을 미래의 목표로 향하게 하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도구를 제안하고 있다.

벨라미의 뒤돌아보면Looking Backward은 아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기에 진보적인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풀러는 1960년대 신좌파에 영감을 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스톨만의 미래에 대한 견해로부터 필자는 용기를 다시 얻는다. “결국 프로그램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탈-희소성 사회로 향하는 한 걸음이다. 그 사회는 누구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되게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법률제정, 가족 상담, 로봇 수리 그리고 소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예상과 같은 필수 업무를 위해 일주일에 10시간 정도 필요 노동을 한 후에 사람들은 프로그래밍과 같은 재미있는 활동에 집중할 것이다.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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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물화(reification) 서구 비판사회이론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간주되는 루카치(Georg Lukacs)가 처음 사용 한 용어로서, 인간가치 마저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물신주의가 전 사회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까지 침투, 확산되는 과정을 물화과정이라고 설명한다.

2) (역주) 정확하게는 Free software(자유소프트웨어)이며, 이를 줄여서 freeware라고도 한다(출처: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그러나 일부 논자는 GPL이 적용된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와 구별해서 ‘공짜’ 프로그램이라는 의미로 freeware를 따로 불리하기도 한다.

3) (역주) 보헤미아는 체코의 북서부를 지칭하는 말로, 떠돌이 집시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1984년 소설가인 윌리암 멕피스 세커리는 세속을 멀리하는 집시의 생활방식이 예술가와 유사하다하여 그의 작품에 예술가를 보헤미안이라고 처음 사용했고, 이를 계기로 보헤미안은 사회 관습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방랑 생활을 하는 예술가를 지칭한다.

4) (역주) 기업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인터넷으로 연결된 고급 전문 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를 지칭하는 용어

5) (역주) 마이크로소프트사

6) (역주) 다른 팬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판이 높아지는 것

7) (역주) 사람의 마음을 적응의 산물로 간주하는 학문이 진화심리학이다. 래이몬드는 성당과 시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리누스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생물학과 경제학에서의 적응계에 비유하는 것이 더 강력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리눅스 세계는 많은 점에서 생태계나 자유시장과 같이 행동한다. 일단의 이기적인 에이전트들이 효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수정하는 자율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며 이것은 중앙통제가 이룰 수 있는 어떤 결과보다 더 정교하고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해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8) (역주) 이것을 스톨만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과 대비되게 오픈소스 운동이라 부른다.

9) (역주) 에드워드 벨라미(1850~1898) 유토피아 소설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토피아 전통은 항상 이상적 세계를 인간 사회와 동떨어진 세계, 우주나 땅속을 배경으로 했으나 그의 소설속 시간여행에서는 2000년 미국을 유토피아로 설정하였다. 1888년에 펴낸 「뒤돌아보면 Looking Backward」로 유명하다.

10) (역주) 벅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1895-1983, 사진, 추천사이트)는 건축가이자 엔지니어로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목적의 혁명적인 기술 디자인으로 특히 유명하다

11) (역주) 아이작 아시모프(1920 ~ 1992) 미국 생화학자이자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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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인터넷 - 칠레의 추억

이글은 노동자의 힘 제 39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 두어달 개인적인 사정으로

새로운 글을 적지 못할 듯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적은 글을 시간날때 마다

update할 예정입니다.  

 

사회주의 인터넷 - 칠레의 추억 

1970년 칠레에서는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었다. 선거를 통해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일부 부르주아 정당 연합인 민중연합(Unidad Popular)의 아옌데 후보가 36.3%를 획득하여, 결선 투표에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당시 아옌데 정부에 남겨진 것이라곤 파탄에 빠진 공장과 탄광 그리고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 봉쇄 정책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옌데 정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로 평화적 전환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련식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답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칠레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 추진과 함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현 경제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중앙 집중적인 관료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분권적이며 민주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칠레 정부는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흥미로운 실험을 시작하였는데,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 Cybernetics synergy)"이 바로 그것이다(1971).

프로젝트 사이버신

프로젝트 사이버신은 스테포드 비어(Stafford Beer)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이론에 따라 칠레의 국가 경제에 대한 경영구조를 통합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사이버네틱스란 정보가 어떻게 수신, 송신, 저장, 재생되며 다시 순환된 새로운 정보가 과거의 정보와 결합하여 자동 수정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로 통신기술과 정보처리기술을 바탕으로 구현되고 있다. 스테포드 비어의 사이버신 시스템은 인간의 신경 구조 동작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경구조르 뇌에 의해 통제되는 수직구조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렇지않다. 오히려 인간의 신체는 탈 중심적이며 잘 분권화 되어 있는 네트워크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스템은 하부 시스템에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정보 후진국 칠레에서는 완성할 수 없으며, 설사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국가 경제에 대한 방대한 정보 처리는 시스템 과부하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들은 이 실험에서 장벽이 되지 못했다. 이전 기독교 민주당 정부가 창고에 처박아 놓은 텔렉스(telex)1)와 극초단파 라디오는 훌륭한 통신 수단이었다. 이 장치들을 전국의 공장들에 배치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그것을 다시 2대의 중앙컴퓨터가 있는 칠레 수도 산디에고에 연결하여, 전국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었다. 스테포드 비어와 그의 동료들은 이 네트워크 시스템과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1972년 10월에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초기형태의 전국적인 사이버신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사이버신 시스템의 주요 내용은 각 공장-산업 단위에서 노동자들의 협동 경영을 통해 올라온 전국적 규모의 정보를 통계 처리하여 쉽게 가공된 정보로 가공하여 노동자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여 이용할 수 있게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사항과 요구사항을 정부에 전달하는 통로로도 사용되었다. 사이버신 시스템은 모든 기업들에 대해 노동자-민중들이 언제든지 산디에고에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서 접속할 수 있게 허용하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노동자, 민중과 정부와의 관계를 예전 보다 더욱 평등하고 굳건한 관계로 전환시켜 주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이 시스템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1972년 칠레전역에 국영 운송기업 설립을 반대하는 기업주들이 공장폐쇄를 단행했을 때 이 시스템은 각 지역의 식량과 연료 상황을 알려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아옌데 정부는 빠른 대응을 할 수 있었고 자본가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옌데 정권의 배신과 몰락

그러나 문제는 아옌데 정부에 있었다. 부르주아들의 지속적인 파업과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에 굴복한 아옌데 정권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군부와 타협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해버린 것이었다. 아울러 국유화, 농지개혁을 중지하고 중소 부르주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투자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은 사이버신 시스템 설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는데, 초기 참여 과학자들과 다른 지향을 갖는 과학자들이 이 시스템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종종 초기 설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1973년, 아옌데 정권의 이러한 정책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아울러 미국의 경제 봉쇄와 자본가의 계속된 파업으로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다. 스테포드 비어는 산디에고를 떠날 것을 권고 받기도 했지만, 그는 숨어 다니면서까지 지속적으로 사이버신 시스템 설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73년 9월 10일, 라모네다 대통령궁에 새롭게 갱신한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1973년 9월11일, 미 CIA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대통령궁에 포탄을 퍼붓는 것을 시작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스테포드 비어는 다행히 몸을 피했지만, 곧 아옌데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칠레의 폭압적 군사정권에 의한 비극은 시작되었다. 칠레의 군사 정권은 이 실험적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 설계자들을 불러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평등한 특성을 가진 사이버신 시스템은 강압적 군사정권과는 태생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이 실험은 75%만 국가 경제 시스템을 사이버신에 집적한 미완의 상태에서 파괴되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져갔다.

그 후 30년

아옌데 정권의 이 실험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빅브라더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근거 없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버신 시스템은 초기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 이념과 칠레국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주 집중 원리와 자주관리를 바탕으로 노동자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시스템에서 진정한 약점은 그 프로젝트가 오직 위로부터 추진되었다는 점과 임금노동과 이윤을 기초로 하는 경제에 밑바탕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칠레 사회주의 정권시기에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가 있었다는 점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125개의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관리를 실험하고 있었다. 일부 보고에 따르면 노동자가 자주관리 하는 공장이 개인 소유의 공장보다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결근 비율도 훨씬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파업이 치열했던 1972년에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자본가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산물을 노동자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노동자 조직인 '꼬르돈 인더스트리얼(cordones industriales)'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직접선거로 대표를 선출했고 소환권을 보장했다. 이 조직은 일종에 초보적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 평의회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만약 옌데 정부가 이들 노동자들과 같이 했다면,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과 위로부터의 사이버신 시스템 계획이 결합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칠레에서 '사회주의 인터넷'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인터넷 역사는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1) 전화의 자동 교환과 인쇄 전신의 기술을 이용한 기록 통신 방식. 다이얼 등으로 상대 가입자를 호출하며 인쇄 전신기에 의해 통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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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 그리고 ...... - 60나노급 플래시 메모리 개발의 의미

 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 그리고 ......

- 60나노급 플래시 메모리 개발의 의미


추석 전 9월 20일, 신문사 방송국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들이 일제히 '삼성 전자가 60 나노 기술을 적용한 8기가 비트 낸드(NAND)형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를 개발했'음을 보도하였다. 또 이 기술은 '무어의 법칙'을 능가하는 성과라고 한다. 휴대폰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무노조의 신화를 위해 노동탄압을 일삼는 삼성에서 해마다 첨단기술의 성과를 자랑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삼성의 이러한 면을 두고 노동탄압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도 한고, 또 일부에서는 무노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과가 가능하다고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번 삼성의 성과에 대한 '속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듯하다.

 

우선, 상식부터

60 나노기술에서 '나노'란 '니나노'가 아니라, ‘나노미터‘를 줄인 말로 길이의 단위이다. 1 미터가 100 센티미터이듯, 나노미터로 환산하면 10억 나노미터가 된다. 즉 1 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로, 대략 머리카락 지름의 8만분의 1 정도 되는 길이다. 물론 눈으로 볼 수 없고 고급의 특수 현미경으로만 관찰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길이이다. 그러므로 60 나노기술이란 단순히 60 나노미터 폭을 갖는 미세한 전기 도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또 플래시 메모리란 디지털 사진기나 캠코더 등에 흔히 사용되는 정보 저장장치로 반도체로 만들어진 휴대형 하드 디스크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종류로는 낸드(NAND)형과 노어(NOR) 형이 있는데, 낸드형은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지만 속도가 느리고 노어형은 정보저장량은 적지만 속도가 빠르다. 이번에 개발된 8 기가(Giga)비트 플래시 메모리 칩으로는 16 기가 바이트 메모리 카드를 만들 수 있는데, 이 용량은 대략 MP3 파일 기준으로 340시간 분량(4000여곡)을 저장할 수 있는 양이다.


 

무어의 법칙과 황의 법칙

지난 30 여 년간 반도체 칩의 개발 속도는 무어의 법칙과 아주 잘 맞았다. 무어의 법칙이란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발표한 것으로, 반도체의 집적도가 1년 6개월마다 2배씩 증가하지만, 가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의 핵심은 반도체 부품의 크기를 줄이는 기술인데, 반도체 부품의 크기를 작게 하면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고 반도체 칩의 크기도 작아져 단가를 낮출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삼성 발표한 기술은 이 무어의 법칙을 능가하여 (1 년 6 개월이 아닌) 1년에 2배씩 집적도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2001년 업계 최초로 반도체 제조공정에 100나노기술을 적용한 1기가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이어 2002년 90 나노급의 2 기가 메모리를 발표해 무어의 법칙을 능가한 바 있다. 이에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은 2002 년 세계 3대 반도체학회 중 하나인 ISSCC(International Solidstate Circuit Conference)에서 ‘메모리 신성장론’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집적도는 1 년에 2 배씩 증가하며 이를 주도하는 것은 모바일 기기와 디지털 가전 등 이른바 ‘Non-PC’ 분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황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황의 법칙이 발표된 후 '희한하게도' 이 법칙에 따라 2003년 70 나노급의 4기가에 이어 2004년에 60 나노급의 8기가 플래시메모리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자본의 경쟁

올해 플래시메모리의 세계시장 규모는 107 억 달러 정도이고, 내년에는 175 억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시장에는 미국의 인텔,  일본의 도시바, 한국의 삼성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미 삼성보다 앞서 도시바와 인텔은 각각 지난 6월과 9월초에 65나노급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뒤이어 삼성이 9월말에 60나노, 정확하게는 63나노급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처럼 이 분야에서 경쟁은 불과 몇 달 차이로 매우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별 자본가가 기술개발을 통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면 이 상품의 개별 가치는 사회적인 가치보다 낮아지게 되어 더 많은 이익을 높일 수 있다. 이를 '특별잉여가치'라고 한다. 이는 자본의 투자를 통해 얻는 이익이 아니라 기술개발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지만 잉여 노동시간을 연장시킨 결과로 얻어진다. 그러나 기술개발이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너도 나도 생산성이 높아지면 특별잉여가치는 자동적으로 소멸하는데, 이것이 자본가가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통해 초과이윤을 얻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특별잉여가치가 자동적으로 소멸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1년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짧은 기간은 자본의 기술개발 경쟁을 매우 치열하게 한다.

예를 들어 1 기가급 메모리 카드가 현재 10 만원 대인 반면 내년 말쯤에 본격 생산될 것으로 16 기가급 메모리카드는 같은 크기(Size)를 가지면서도 가격이 수백만 원을 웃돌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가격이 하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제품을 먼저 내놓아 초기시장을 선점하고 생산량 향상에 따른 원가 경쟁력의 확보를 위해 ´나노 기술´ 적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미 플래시메모리로 경쟁하고 있는 3사의 경우 반도체 기술이나 반도체 장치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다. 그러므로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느 회사가 더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절대적 혹은 상대적) 노동강도를 강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무어의 법칙과 황의 법칙이 잘 맞는 이유

일반적으로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과는 노동의 시간을 통해 평가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 시간 관리 이외에 다양한 노동자 관리기법이 적용하고 있다. 우선 인금관계를 개별화하여 팀간 혹은 개인간 사이의 경쟁을 제도화하고 있다. 이 방식에는 개인별로 업무성과의 목표를 정해 주는 것, 개인별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상시적으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개인별로 차등 임금인상하거나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상여금을 수여하는 것, 그리고 개인별로 경력을 관리하는 것 등이 있다. 또 책임감을 강하게 심어주는 전략도 사용하는데, 대표적으로 반미, 반일 등 민족 감정에 호소하기도 하고, 연구기획, 개발 단계 등 다양한 경영 참여를 통해 마치 사업주가 된 것처럼 무한책임을 부여해 자율적인 자기-착취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성에 입각한 복종' 기법 같은 것인데, 책임지는 직위에 있는 간부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작업 속에서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초과 투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또 매우 시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일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제반 [인간적인] 기준 내지 규준들과 집단적인 연대를 약화시키거나 절멸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 과학기술 노동의 특성상 시간을 많이 준다고, 또 노동자의 헌신을 이끌어 낸다고 해도 자본이 원하는 시기에 재품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본가는 ‘이성에 입각한 복종’과 함께 더 강력한 '강압적 복종 방식'을 병행한다. 강압적 복종 방식이란 무조건 개발 시간을 정해놓고 그 기간 내에 개발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이다. 언뜻 보기에는 고전적인 방식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고전적으로 납기를 맞추어야 하는 노동의 경우 노동시간에 따라 생산량 증가가 예측 가능하므로 과학적인(인간적인?) 관리(착취)가 가능하다. 그러나 기술 개발 노동은 그 개발 기간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특성은 개발 기간 외에는 아무런 관리 기준 없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무조건 이 기간 내에 개발하라’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무어의 법칙과 황의 법칙이다. 이 법칙이 지난 30년 동안 귀신 같이 맞았던 비밀은 자본가들이 그 법칙이 맞게 과학기술 노동자들을 강도 높게 착취했기 때문이지, 자본가들의 뛰어난 미래 예측 능력 때문이 아니다.

반도체 칩이 극도로 더욱더 미세해짐에 따라 그만큼 설계도 어렵고 생산 공정단가도 올라가고 있다. 이제 이 기술은 극한까지 와서 45 나노이하의 공정에서는 황의 법칙(혹은 무어의 법칙)을 맞추기가 매우 힘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공정 단가가 상승하면 할수록 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개발기간을 더욱 단축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황이 격해질수록 과학기술자들의 노동 강도는 2배, 3배 더 증가될 것이다.


 

인텔과 삼성의 공통점

인텔의 공동창업자 무어 회장은 무어의 법칙을 발표하였고, 삼성의 사장은 황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인텔과 삼성의 공통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어와 공동으로 인텔을 창업한 로버트 노이스는 “무노조는 우리 회사를 살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노조가 있는 회사의 규칙을 우리 회사에 적용한다면 회사는 곧 망할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무노조는 경영의 제일 원칙이다. 운영하는데 유연성이 필수적이다. 국가를 위한 큰 희망은 우리 경제를 마비시키는 노동자와 경영자의 깊고 깊은 분열을 피하는 길이다”라고 강변하고 다녔다고 한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무노조 신념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삼성의 황사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윌리엄 샤클리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윌리엄 샤클리는 인텔의 노이스와 함께 실리콘 벨리에서 노동자 탄압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다(**).



(*) '신자유주의의 본질', 피에르 부르디외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1998년 3월호

    http://copyle.jinbo.net/archives/bourdieu.htm

(**) 'Organizing Silicon Valley's High Tech Workers', David Bacon

    http://dbacon.igc.org/Unions/04hitec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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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ID 기술 : 노동자 통제에서 상품 통제로

RFID 기술 : 노동자 통제에서 상품 통제로

노동자의힘 제 60/61

김해민

한 노동자가 캠코더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그가 캠코더를 집어 들자 백화점내 CCTV는 그의 모든 행동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스팸 메일이 증가한다. 그런데, 그 스팸 메일의 내용은 백화점에서 관심을 보였던 물건들이었다.

한 노조원이 해고당했다. 자본가의 감시 시스템은 해고 순간부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하청업체의 모든 생산 과정에 전자 꼬리표가 붙기 시작하더니,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스마트 태그, 전자 꼬리표 등으로 불리는 RFID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기술은 이러한 상황을 현실화한다. 이미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선·후불식 교통카드에는 RFID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과천도서관이나 은평 구립도서관 등에서도 바코드 대신 RFID 기술을 도입하였다. 교통카드에 적용된 것은 개인의 신분까지 확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신용카드나 휴대폰에 내장된 교통카드는 신분확인까지 가능하다.

RFID 기술

RFID 기술의 'RF'를 풀어서 쓰면 라디오-주파수(Radio Frequency)가 된다. 라디오 주파수라면 KBS의 89.1MHz나 MBC의 91.9MHz 등 방송 주파수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무선(wireless) 주파수를 통칭한다. 무선 통신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라디오 방송부터이기 때문에 무선 주파수를 라디오 주파수(RF)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RF라는 말이 들어가면 그냥 무선 통신을 생각하면 된다. 무선통신 장치에는 송신장치와 수신장치가 있는데, RFID기술에서 각각 RFID태그(또는 transponder, 태그는 꼬리표라는 뜻)와 RFID 판독기(Reader 혹은 interrogator)라 부른다.

RFID의 'ID'는 'IDentification'의 약자로 '신원을 확인함'이라는 뜻이며, ID-card라면 신분증을 뜻한다. RFID 장치 내부에는 무선 통신을 위한 안테나와 필요한 정보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메모리(저장장치)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메모리에 식별 정보가 저장된다. 만약 신분증에 적용된다면 주민증 번호나 기타 개인정보들이 입력된다.

그러므로 RFID 장치는 RFID 태그에서 내보내는 식별 정보를 무선으로 받아서 그 태그가 붙어 있는 상품(사람)이 무엇인지(누구인지)를 식별하는 장치이다. 저장된 식별정보의 내용이 많을 필요는 없다. 무선으로 전달된 식별 정보를 통해 중앙 컴퓨터와 연결하여 다양한 개인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 RFID 장치가 인식(감시)할 수 있는 거리는 종류에 따라 다른데, 상호 유도 방식(Inductively coupled)의 경우 1m 이내의 근거리에,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방식의 경우 3에서 10m 정도의 중장거리까지 인식할 수 있다. RFID 태그는 매우 소형으로 제작 가능하므로 지갑이나 입고 있는 옷 신발에 붙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이식(implant)할 수도 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멕시코 정부가 2003년부터 보안과 신원확인을 목적으로 법무장관을 비롯한 법무부 직원 160여 명의 몸에 RFID기술을 이용한 생체 칩을 이식시켰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또 일본의 오사카 교육당국자들은 초등학생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가방, 이름표, 옷 등에 RFID를 부착하기로 했으며 덴마크에서도 어린이 보호를 위해 RFID를 도입하기로 했다.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RFID와 유사한 RF장치를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98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출근부 대신 노동자들에게 지급되어 몸에 부착하게 되어 있는 'RF카드'는 마치 상품의 바코드처럼 자동 인식기(판독기)를 지나갈 때 마다 노동자들의 출입시간을 감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RFID 장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전에 부정적 여론을 형성시키기 때문에 자본가에도 불리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노골적인 RFID 감시 장치를 상품으로 내놓고 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지난 7월에 발표한 'RFID 확산전망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RFID 시장규모는 1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ABI(*)자료를 인용해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장기불황으로 인한 통신시장의 침체와 함께, 현재 RFID 장치의 단가가 싸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의 RFID 상품이 개발될 때까지 현재의 불황을 극복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군사·안보용 즉, 감시·추적 장치의 상품을 개발해 고가로 파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RFID 감시 장치를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이다.

진짜 무엇에 쓰고자 하는 물건인고?

사실, 자본가들은 RFID기술을 노골적인 감시 장치에 적용하기보다는 과거 20여 년 동안 사용된 바코드 기술을 대체하고 싶어한다. 바코드의 경우 저장할 수 있는 정보 용량이 너무 작고, 정보를 수정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바코드 기술을 개선한 것이 RFID 태그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을 감시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품에 부착되어 관리하기 위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RFID 태그는 무선 통신을 이용하므로 장착한 제품을 대형 할인점 창고 문을 통과시키기만 하면 어떤 물건이 얼마나 들어왔는지가 재고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입력된다. 또 출고할 때도 자동으로 계산돼 재고정보에 즉시 반영될 수 있다. 자본가들은 이 시스템을 적용하여 물류상의 전 작업 공정을 자동화하고 그 결과 운영비와 생산비의 감소를 기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기술을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nterprise Resource Planning: ERP)의 확장된 개념인 공급망관리(Supply Chain Management : SCM) 시스템과 고객관계관리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 CRM)시스템에 접목하고 싶어 한다. 세계적인 시장 리서치사(社)인 가트너(Gartner)의 기술이사인 제프우드(Jeff Woods)가 뉴스팩터(NewsFactor)에 "RFID는 향후 20년 내 경영학 과목을 바꿀 것"이라고 한 의미도 여기에 있다.

세계적인 물류기업 월마트는 지난해 여름 2005년 1월부터 RFID 시스템 체계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상위 100개 공급업체들은 2005년 1월까지, 나머지 공급업체는 2006년 1월까지 RFID 태그 부착을 해야 한다. 월마트에 이어 세계 6위의 유통업체인 독일의 메트로도 RFID 시험을 오는 11월에 시작할 예정이다. 이들 유통업체들은 제품에 RFID 방식 가격표를 붙여 물건이 배달된 순간부터 제품을 추적·감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노동자 통제에서 상품 통제로

ERP는 상품의 재고 확인, 처리 과정을 훨씬 간편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기업 차원에서 도입하는 일종에 자동화 시스템이다. 이러한 ERP가 기업 내의 전사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SCM은 기업과 기업간에 자원, 정보, 자금 등을 통합 관리하여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기업들을 최적으로 관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CRM은 고객관리 프로세스를 자동화한 고객관리시스템이다.

얼핏 보기에는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들 시스템에 적용된 RFID 장치가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ERP 시스템에 RFID 장치를 도입할 경우 노동자들의 개별 휴식 시간, 작업시간, 생산량, 생산속도, 불량률, 작업장 내 현재 위치 등이 완벽하게 감시·추적된다. SCM의 경우는 협력업체 혹은 하청업체간의 완벽한 정보 공유를 핵심으로 하는데, 이들 업체간의 자발적 협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RFID기술로 인식된 하청업체의 정보가 대기업으로 자동 전달된다면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필요가 없다. 이 상황에서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2중 3중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된다. 또 CRM기술은 상품기획에 필요한 소비자의 정보를 관리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 정보는 상품에 내장된 RFID 장치에서 나오는 무선 주파수를 통해 소비자를 추적·감시하여 얻어낸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상품 관계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품에 대한 통제는 본질적으로 노동자뿐 아니라 상품과 관계한 모든 사람들을 '은밀하게' 통제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골적인 노동자 통제 장치와는 달리 RFID 태그는 경영 혁신을 내세우며 도입되기 때문에 통제 장치의 속성이 은폐된다. 더욱이 RFID기술은 무선 통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상품 통제 장치는 논란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는 물론이고 소비자까지 철저하게 감시할 수 있는 장치이다.

최근 이 장치를 둘러싸고 소비자 프라이버시와 관련한 논란이 있고 또 타협안도 제출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 주 의원들은 소비자들이 쇼핑을 마치고 매장을 떠날 경우 RFID 태그를 떼거나 파괴하는 것을 의무화했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 경제 산업성이 발표한 '가이드라인(안)' 에 따르면 RFID 태그가 장착된 물품을 소비자에게 판매, 교부하는 경우 태그 장착 사실을 사전에 소비자가 알 수 있도록 물품에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가이드라인은 RFID 기술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 기술을 작업장을 중심으로 해서 전사회적 도입을 허용하기 위한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RFID 기술은 정책적 보완만으로 부족하며, 설계과정에서부터 다시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RF카드 도입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투쟁이 RFID 태그에서도 절실히 필요하다.

* 1990년에 설립된 ABI Research는 본부가 뉴욕에 있으며 세계의 자동차, 반도체, 초고속통신, 에너지 부문 등에 대해 연차 연구 프로그램, 분기별 정보 서비스 및 시장분석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시장연구에 관한 이들의 분석 자료는 www.abiresearch.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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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더러운 청정에너지-수소에너지

그들만의 더러운 청정에너지-수소에너지

기관지노힘  제59호

 

전기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생산 과정을 바꾸어 놓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한 레닌도 전기 도입을 국가 핵심과제로 보았고 전기관련 기술을 전쟁과 혁명으로 파괴된 러시아를 소생시킬 핵심기술로 믿었다. 1920년대 의회에서 그는 "코뮤니즘이란 소비에트 권력과 국가 전체에 전기 시스템 도입(전기화)을 합친 것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기는 그의 이런 희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전기 생산이 주요 원료인 석유의 매장량은 중동에 65%가 밀집되어 있다. 이 중 사우디는 25%, 이라크는 11%에 이른다. 이러한 희소성은 아랍의 왕족들과 소수 석유자본의 독점을 용이하게 했고, 때로는 그들 사이에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전기 생산을 위해 방출되는 배출 가스는 심각한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한 연구 보고에 따르면 지구 평균기온은 이미 지난 세기에 비해 0.6℃ 상승하였고 2100년까지 1.0℃∼3.5℃ 더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으며, 이것은 지난 1만년동안 나타났던 것보다 더 큰 기후변화라고 한다.

에너지원으로서의 물(H2O)

만약 물을 이용해서 전기를 생산하고, 이 전기로 자동차를 굴릴 수 있다면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것이 다시 물이라면 물은 최고의 에너지원일 것이다. 또 물은 어디에나 널려있어 대동강 김선달이 아니면 독점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수소 연료 전지(Hydrogen Fuel Cell)라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 수소 연료 전지는 말 그대로 수소를 연료로 하여 전기를 발생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수소는 물에서 추출되고 이 수소는 연료전지를 통해 다시 산소와 결합하여 물을 배출하고 전기를 발생시킨다. 물을 원료로 수소를 만들고 다시 물을 방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 기술이 완성된다면, 물을 이용해서 누구나 자유롭고 저렴하게 전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므로 가장 먼저 석유자본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 이라크 전쟁과 같은 비극은 없을 것이다. 『노동의 종말』 저자 제러미 리프킨도 그의 저서 『수소혁명』에서 "수년 안에 컴퓨터, IT혁명이 수소 에너지 혁명과 융합되면서 사상 초유의 진정한 민주에너지로 자리 잡을 것이고 수소는 그야말로 에너지 연금약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쩌면 레닌이 전기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21세기에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해 본다.

그런데 부시 정부가 수소연료(전지)를 개발한단다

부시 정부는 2003년 의회 연설에서 12억 달러를 연구 자금에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미국은 (수소 연료전지를 적용한) 청정 수소 자동차(일명 '자유-차','Freedom-Car') 개발에 선도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2020년까지 전체 수송에너지의 20%를 수소에너지로 충당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석유 기업 출신이며 석유자본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부시는 최근 수소 연료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부시는 물론이고 체니 부통령, 내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모두 석유기업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 부시도 현재 석유 기업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석유가 아닌 다른 에너지원 연구를 지원한다고 한다. 또 미국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 중 36%를 배출하고 있는 가장 큰 오염원인 국가이다. 더욱이 부시 정권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시 정권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걱정하면서 청정 수소 자동차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기간의 일시적인 쇼로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하다.

부시의 수소 연료(전지) 기술에는 다른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소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다른 원료로부터 추출해야 한다. 수소를 얻기 위한 원료로는 화석 연료인 탄화수소나 물이 있을 수 있고, 곡식으로부터 얻은 에탄올도 가능성이 있다. 천연가스에서 나오는 탄화수소로 수소를 얻는 기술은 현재 사용 중인 기술인데,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기 때문에 청정에너지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물을 통해 열적/화학적/전기적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소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태양력이나 풍력을 이용할 수도 있고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 중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한 기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구별해서 '원자력 수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자력 수소'는 물을 연료로 한다고 하지만 원자력 발전이 갖고 있는 모든 모순들 즉 핵 폐기장 문제, 방사선 문제 등을 가지고 있으며, 독점적이다. 원자력 발전을 분산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자력 수소는 물을 연료로 하지만 독점이 용이하다.

이러한 다양한 기술 중에서 부시정부가 어떤 기술을 선택할까? 부시정부는 '악의 축'의 면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국가 수소 에너지 로드맵」에서 수소 연료를 천연가스 등에서 90%를 나머지 10%는 원자력에너지를 통해 양산할 계획을 밝히고 있다. 태양열이나 풍력 등을 이용한 지속가능한 개발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현재의 기술을 이용해서 손쉽게 수소를 얻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개발한 수소 연료는 전혀 청정하지도 석유자본에 독립적이지도 않다. 애초 부시정권은 이러한 가치에는 관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예산은 화석연료나 원자력을 통한 수소 연료 개발에 집중되고 있고 청정에너지 분야에는 오히려 삭감되고 있다.

석유자본들은 이미 다가올 수소시대에도 이윤을 챙기기 위해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1999년부터 국가나 과학기술자 주체의 수소 연료전지 관련 조직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주도권을 잡았고, 수소 연료전지의 주류 연구 방향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와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수소 연료 관련 핵심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을 인수 합병하는가 하면 주요 특허들을 수집하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 기업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에서 2번째로 크고 10기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는 엔터지(Entergy)사는 수소와 전기를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자유-반응로(Freedom Reactor)"라는 원자로를 미국에 건설하려고 추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79년의 스리마일 아일랜드(TMI) 원전 사고 후 원전건설의 신규신청이 없었지만 부시정부가 들어서면서 2010년까지의 원전의 신규건설을 촉진하기 위한 '원자력 2010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힘을 얻고 있다.

20세기 환경오염의 주범인 석유 자본/원자력 자본은 그들의 독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태양이나 바람과 물을 에너지원으로 개발했을 때, 그것을 석유라는 상품처럼 독점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고, 핵에너지처럼 중앙 집중식으로 통제하는 것도 힘들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태양을 독점해서 '태양 이용료'를, 바람을 독점해서 '바람 이용료'를 받아 낼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러나 그들이 희소성이 없는 풍부한 대안 에너지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처럼 경찰력을 동원해야 하고 엄청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자본 스스로 개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시 정부는 자본주의 철학에 맞게 지구온난화 방지보다는 다국적 석유자본과 핵에너지 자본의 이윤을 보장을 우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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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비쿼터스!

아~ 유비쿼터스! 기관지노힘 제57호 김해민 노동자의 힘 회원 2004년 4월 미국의 부시 정부는 2007년까지 어디에서나 초고속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을 구축한다고 발표하면서, "미 전역에 초고속인터넷을 보급하고 소비자가 다양한 선택권을 갖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참여정부'도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IT전략으로 언제 어디서나 디지털 혜택을 누리는 '유비쿼터스 사회' 구현하고 2007년까지 세계 첫 진입을 추진한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에 따르면 "U코리아(유비쿼터스 코리아)는 우리경제가 제 2의 도약으로 나가는 전기일 뿐 아니라 국민생활 전체를 바꿔놓을 일대 문화혁명"이기 때문에 "IT산업을 통해 전 국민이 일자리를 갖는 것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전 국민이 IT산업체의 주주가 되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비쿼터스 사회'가 뭐 길래 이쯤 되면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유비쿼터스 사회가 도대체 뭐 길래 '국민 생활 전체를 바꿔놓을 문화대혁명'이라는 것일까? 그리고 왜 노동자-민중은 그렇게 좋은 사회를 가르쳐 줘도 투쟁만 할까? 이러한 궁금증을 뒤로하고 유비쿼터스 사회에 한번 푹 빠져 보자.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용어는 '유비쿼터스 환경' 혹은 '유비쿼터스 사회'와 유사한 말이다)이라는 말은 1988년에 미국 제록스 팰로앨토연구소의 마크 와이저(Mark Weiser) 소장이 처음 사용한 말인데, 앞으로 제 3의 정보혁명의 물결을 이끌 것이라고 한다. 유비쿼터스란 라틴어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어떤 기기로든 언제 어디서나 사용자가 컴퓨터와 연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의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휴대전화, TV, 게임기는 물론이고 자동차에서도 심지어 걸어 다니면서도 자연스럽게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통신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마크 와이저에 따르면 유비쿼터스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다수의 작고 값싼 특수 기능의 컴퓨터들이 무선의 네트워크를 통해 완전히 연결된다. 둘째, 이러한 컴퓨터들은 사용자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셋째, 가상공간이 아닌 실제 공간 어디서나 컴퓨터 이용이 가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화된 인터페이스로서 사용자 상황(장소, ID, 장치, 시간, 온도, 명암, 날씨 등)에 따라 서비스가 변해야 한다. 유비쿼터스 환경에 대한 사회·문화적 전망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유비쿼터스 사회가 오면 현재 정보화 정도의 불균형에 따라 나타나는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유비쿼터스 사회에 적용되는 기술은 마치 공기와 물처럼 일반 환경 속에 컴퓨터를 내장시켜 언제든지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화 교육을 받지 못한 취약 계층의 사람들의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유비쿼터스 사회의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일 것이라고 한다. 미래에는 버려지는 쓰레기정보까지 컴퓨터에 내장되어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원을 효과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유비쿼터스 사회로 가면 저절로 사회주의 이상이 실현될 것같이 보인다. 노동자민중은 투쟁을 접고 유비쿼터스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할 듯하다. 라디오, 무선통신 인터넷 그리고 유비쿼터스까지 100년 전 라디오 방송이 전파를 타고 세상에 나왔을 때, 자본가(와 기술주의자, 주식투자가들)는 개개인이 무선으로 통신할 수 있는 세계를 선전하며, 이 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했다. 무선통신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며, 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기계문명의 역동성을 찬양한 미래파 시인 마리네티(F. T. Marinetti)는 라디오 전파가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특성이 있으며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차 세계 대전 뒤에 상업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면서, 각 라디오 방송국들 사이에 치열한 전파 싸움이 일어났다. 강력한 전송탑을 새워 상대 방송국 전파를 방해하는 등 그 피해가 심각해지자 국가는 라디오 주파수에 대한 국가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국가 규제 시스템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나치의 전체주의에 휩싸이면서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라디오 전파를 완전히 국가 선전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2차 세계 대전 뒤, 자유시장과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이 강화되었고 주파수에 대한 국가 규제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또 한번 변화를 겪게 된다. 오일 쇼크 이후 위기에 처한 자본은 탈규제의 신자유정책을 도입하게 되는데 "공공의 이익"을 위한 국가규제의 비효율성이 공격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민간 방송국이 생겨나고 전화시설은 사유화되었다. 이때부터 국가와 자본에 의한 공동 지배가 시작된다. 1990년대 초 본격적으로 도입된 인터넷은 국가와 자본에 포섭된 전파와는 '조금' 다르게 성장했다. 인터넷이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비 상업적인 공유문화와 정치적 행동주의의 메카로서도 성장하고 있다. 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인터넷은 급속도로 상업화의 길을 가고 있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경제의 몰락은 인터넷에 대한 자본가들의 기대를 상당부분 사라지게 했다. 그래서 자본가은 다시 국가와 자본에 의해 통제된 차세대 무선 인터넷에 기대를 품고 붐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인터넷을 무선 인터넷으로 전환한다는 의미는 인터넷 속에 내제된 참여와 평등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재산권에 의해 통제되는 개념으로 그리고 분권화된 공간이라기보다는 중앙 통제적인 공간으로 재정립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유비쿼터스 사회' 전망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타고 나온 것이다. 유비쿼터스 사회?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유니버설 서비스라는 정책이 있다. 서비스 공급 비용이 높아 경제성이 없는 외딴 지역이라도 이용자는 그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공급자는 그 서비스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 여러 나라에서 추진하고 있고, 유비쿼터스 사회의 붐을 조성하고 있는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에 유니버설 서비스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컴퓨터가 도처에 널려있고 유무선 통신망을 통해 연결되어,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나 서비스를 즉시 제공하는 환경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컴퓨터가 흘러넘쳐 컴퓨터 가치가 거의 사라지는 사회가 왔다면, 디지털 격차로 얼룩진 이 냉혹한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투쟁 없이 바뀔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디지털 컨텐츠는 가치가 '0'인 상태로 흘러넘치지만 자본과 국가는 폭력과 경찰력을 동원해서 막고 있지 않은가? 또 유비쿼터스 기술은 특정 장소의 사람을 추적하여 확인하는 장치를 필수로 하는데, 현재 연구 중인 기술 중에 액티브-뱃지가 핵심기술이다. 이 기술은 노동통제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좀더 현실적인 애기해보자.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면 항공사로부터 '마일리지'라는 선물(?)을 받는다. 이것이 쌓이면 무료 여행도 갈 수 있고, 항공사로부터 받는 서비스도 달라진다. 한마디로 항공사가 고객에게 베푸는 할인 혜택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한번 다르게 생각해 보자. 항공사는 이 사소한 마일리지 정보를 모아 사람들을 차별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했던가? 유비쿼터스 사회에서는 사소한 개인의 사회적 관계를 담은 정보가 자본가로 집중될 것이다. 이러한 유비쿼터스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는 이제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2004-07-20 15: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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