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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하이젠베르크와 나치

 

하이젠베르크와 나치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에서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개발하였다. 1932년에 그의 행렬 역학 시스템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플라톤(Plato)의 <<대화Timaeus>>에 강한 영향 받은 그는 학생 때부터 유명한 관렴론자였다. 이러한 관념론자의 반동적인 결론은 하이젠베르크 삶의 변화과정에서 잘 보여준다.


 1919년 하이젠베르크는 반동적 자유군단(Freikorps)에 가입하여 독일 노동자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자유군단은 훗날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나치돌격대(SA)가 된다. 이러한 과거의 부끄러운 경력을 그는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당시 그의 아파트가 한번(!) 강도당한 적이 있을 만큼 매우 혼란한 시기였고 또 호기심 많은 젊은 날의 모험심 때문에 자유군단에 복무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친-나치 행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나치의 원자폭탄(A-bomb) 계획의 총 책임자였다. 다행히도 나치의 원자폭탄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 포로가된 그는 원자폭탄 계획의 실패 원인을 그와 그의 동료과학자들이 나치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히틀러의 오른팔인 히믈러(Himmler)집안과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왔다. 그리고 나치가 그를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원자폭탄 계획을 그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나치의 원자폭탄 계획의 실패 원인을 리더로써 하이젠베르크의 자질 부족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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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좌파6]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II


인간은 과학을 통해 무지에서 지식으로 진보시켰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혼돈은 끊임없이 진보를 방해해 왔다. ‘모른다‘와 ’알 수 없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 인식에 한계를 두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칸트는 물-그-자체(Things-in-Themselves)가 아닌 오직 현상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버클리(Berkeley)와 흄(Hume)과 같은 주관적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의식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한에서만 그 존재를 인정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양자역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의 전체적인 관점은 주관적 관념론을 반영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측정할 수 있는(경험할 수 있는) 것만 의미가 있다. 이것을 '측정 = 의미 원칙 meaning principle'이라고 하는데, 이 원칙은 신(God)과 같이 측정되지 않은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므로 종교적 미신을 물리치는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세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미신을 만들었다.


 하이젠베르크의 ‘측정 = 의미원칙‘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는 적절한 실험 장치로 측정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불확실성원리에 따르면 운동량(위치)의 불확실성은 입자의 '위치(운동량)'를 측정할 때 그 측정 장치가 ’운동량(위치)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발생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각각은 최대한 정교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이 두 물리량(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교하게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입자가 정확한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측정할 수 없다면 달이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원자폭탄을 폭발시켜 그 효과를 측정할 수 없다면 그 효과를 말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입자의 위치를 아주 정확하게 측정하면 운동량은 변하게 된다’는 말을 ‘측정 = 의미원칙‘에 따라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위치는 정확하게 측정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지만,’운동량이 변하게 된다‘는 말은 측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미한 말이 된다.


하이젠베르크는 스스로 빠진 이 모순에 대해 해결을 시도한다. 입자의 초기 운동량(pi)을 아주 정교하게 측정하고, 바로 이어 입자의 위치(x)를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한다. 또 바로 다음에 다시 운동량(pf)를 측정했다고 해 보자. 이 값들은 모두 각각 따로 측정했기 때문에 최대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초기 운동량(pi)을 측정한 후 바로 위치(x)를 측정했기 때문에, 초기 운동량(pi)는 위치 측정 직전에 입자가 갖고 있는 운동량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치(x) 측정 후 운동량(pf)도 측정했으므로 변한 운동량 |pf-pi|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확실성 원리를 어기지 않고 ‘변하는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다. 여기까지 그의 설명은 완벽한 듯 보인다.


아무도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아직도 완벽하지 못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 다른 상황을 설정해 보자. 입자의 운동량(pi)을 측정하고 일정시간 후 그 입자의 위치(x)를 측정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한 직후부터 입자의 위치를 측정한 직전까지는 입자의 경로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기간 동안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정확하게 알 수 있으므로 불확실성원리는 유효하지 않다. 이러한 결론은 하이젠베르크도 인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하이젠베르크는 초기 운동량(pi)과 같이 과거에 측정된 값을 이후 측정된 위치(x)의 초기 값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다시 주장한다. 이들 두 시점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입자의 “‘경로‘는 입자를 관찰할 때만 나타난다(실재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측정 = 발생 원칙 creation principle’이라 부른다. 이 원칙에 따르면 밤하늘의 달을 아무도 측정하지 않는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1950년대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양자역학의 주류 흐름에 반발해서 '누군가 달을 보고 있을때만 달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1981년 물리학자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은 "아무도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아무리 유명한 과학자의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결론을 따를 이유는 없다.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무엇보다 기저에 깔려 있는 철학적인 생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과 공간속에 객관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있다는 관념을 제거하기 위해"필요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은 과학적 실험에 의한 객관적 결과가 아닌 그의 관념주의 철학의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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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좌파5] 하이젠 베르크의 불확실(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I

 

[양자역학과 좌파5] 하이젠 베르크의 불확실(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I


물리학자들은 입자가 움직인다는 것을 운동량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내는데, 이것은 움직이는 입자의 질량과 속도를 곱한 값으로 정의한다. 반면에 파동은 다른 형태의 물리적 과정이다. 예를 들어 잔잔한 물 표면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발생하는 왜란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가 된다. 파동의 경우 파장으로 나타내는데, 그림에서와 같이 파장의 가장 큰 값(마루)에서부터 다음 마루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들의 이론적, 실험적 연구결과 이후 물리학자들은 운동량과 파장이 서로 직접적으로 관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입자의 운동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특정 순간에 입자가 어디에 있고 또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속도(운동량)와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 이 두 물리량이 정확하게 측정되면 입자의 운동에 대한 원인과 결과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중슬릿 실험의 이상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 결과를 1927년에 불확실성원리(*)로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불확실성 원리는 인과론을 부정한다고들 하는데,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실성의 '원인'을 상상실험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전자와 같은 미세 입자의 운동을 실험적으로 측정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에 머릿속 생각으로 실험을 하곤 했는데, 그것을 "상상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고 한다.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있는 강력한 현미경이 있다고 해보자. 이 현미경은 전자에 빛(광자)을 쪼여 전자와 충돌해서 나오는 빛으로 전자의 움직임을 알아낸다. 먼저 전자로부터 반사되어 나온 빛을 다시 렌즈로 집속하면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 또 반사되어 나온 빛으로 전자의 속도도 측정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경찰관이 레이저 총으로 자동차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반사되어 나온 빛의 파장을 측정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렌즈로 작은 전자에서 반사되어 나온 빛을 집속해서 위치를 측정하기에는 전자가 너무 작다. 일반적으로 빛을 집속해서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해상도는 빛의 파장 길이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전자의 위치는 빛의 파장 길이만큼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미경의 해상도는 아주 큰 렌즈를 사용하거나 짧은 파장을 갖는 빛을 이용하면 증가한다.


현실적으로 무한히 큰 렌즈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파장이 아주 짧은 빛을 쪼여야 한다. 그런데 빛이 파장이 짧다는 것은 아주 높은 에너지를 가졌다는 뜻이다. 높은 에너지의 빛을(광자를) 전자와 충돌시키면 전자의 속도는 변하게 된다. 그러면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만약 정확하게 속도를 측정하고 싶다면 낮은 에너지의 빛(광자)을 충동시켜야 하는데, 이때에는 파장이 길어져서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종류의 현미경을 개발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이젠베르크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모든 에너지는 양자로 나타나고 또 모든 물질은 미시 세계에서 입자와 파동성을 뛰기 때문에 어떤 측정 장치를 가져와도 같은 문제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 상상실험에서는 측정 장치(현미경)와 측정대상(전자)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타난다. 이 결과는 고전적으로 보더라도 이상한 결론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이중슬릿 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측정 장치로 전자를 측정하지 않으면 전자는 어떤 상호작용도 없으므로 전자는 명확한 속도와 운동량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이중 슬릿실험에서도 전자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입자특성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고 파동 특성인 간섭무늬가 나타난다.


결국 측정하지 않을 때에도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고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아무튼 위치와 운동량은 거시적인 측정 장치에서 관측되는 고전적인 개념이며 이 개념을 미시 세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희한한 점은 위치와 운동량 각각은 명확하게 측정되지만 동시에 측정할 때 불확실성이 나타난다. 또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할 수 없다는 것은 입자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물리학을 지배해온 결정론은 위기를 맞는다.


그러면 두 가지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먼저 전자는 측정 장치와 무관하게 비결정론적으로 랜덤하거나 운동하거나 아니면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는 어떤 변수(숨은 변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측정할 수 없는 숨은 변수에 대한 설명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불확실성의 원리가 인간이 측정(경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한계이며, 그리고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기저에 인과론적인 진실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형이 상학(metaphysics)일 뿐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한계가 불확실성의 원리이며, 그 이상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과 무관한 객관적인 자연이 존재한다는 설명을 반박할 수 는 없다. 이것을 부정하기 위한 유일한 종착지는 측정되지 않는 것(경험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경험주의, 실증주의). 하이젠베르크는 이 입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전자의 운동은 비결정론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자운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부족이라는 의미에서 불확실성이라는 용어 보다는 대신 결코 결정할 수 없는, 즉 비-결정성(indeterminism)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하며, 그것은 자연현상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우연에 의해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불확실성 원리는 과학자들로부터 새로운 발견을 이끌어 내게 한다. 이 원리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불확실성 원리가 자연이 완전한 우연에 지배받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법칙은 아니다. 그런 해석은 변증법을 거부한 물리학자의 해석일 뿐이다. 만약 전자의 운동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입자의 운동이란 위치의 부정을 말한다. 변증법에 따르면 입자가 운동 중에 있을 때는 입자의 움직이는 경로는 존재하지만 어떤 특정위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가 혼란에 빠진 이유는 비변증법적으로 전자의 운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특정 시간에 특정위치에서 입자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하이젠베르크는 결국 전자가 움직이는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비 실재론으로 치닫고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다음에 계속)


(*) 비 결정론적(indeterminism)이라는 뜻과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 보다  불확실성의 원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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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 좌파4]우연에도 종류가 있다.: 양자역학의 두 그룹

 

[양자역학과 좌파4]우연에도 종류가 있다.: 양자역학의 두 그룹

                                  기관지노힘  제81호

A는 A이면서 A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파동으로 알려져 있던 빛이 입자와 같이 운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빛도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 관찰에 의해 증명되는데, 개기일식 때 별빛이 태양 주위의 중력에 의해 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1919년). 빛은 물질의 또 다른 존재형태였던 것이다. 엥겔스도 그의 책 [자연 변증법]에서 "에너지("빛, 운동")를 물질의 존재 형태이며 내재된 속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으로 드브로이는 입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본질적으로 파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입자성이란 일정한 공간에 국한되어 있고 서로 충돌하는 특성을 말하며, 파동성이란 전 공간에 퍼져있고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중첩하여 보강-간섭하는 성질을 말한다. 이 두 개념은 상호 배타적이며 반대되는 개념이다.


당시 물리학자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미시세계의 이러한 물리적 특성을 “일반 상식”(특히 형식논리학)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형식논리학은 ‘A는 항상 A와 동일하다(동일률).’ 와 ‘A는 A가 아닌 것 (not-A)과 같을 수 없다(모순율).’이라는 기본법칙을 가지고 있다. 근대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형식논리학은 미시세계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형식논리학에 따르면 파동성이 A라면 입자성은 not-A가 된다. 그리고 A는 non-A가 절대로 될 수 없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A가 not-A의 특성을 나타내므로 모순율에 위배된다.


변증법의 핵심에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때 대립물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통일을 이루면서도 서로 배제하는 가운데 서로 침투하는 관계에 있는 것, 즉  모순 속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모순 관계로 입자성과 파동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렇듯 형식논리학이 답을 주지 못하는 곳에서 변증법은 좋은 해답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변증법의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라는 개념은 더 상세한 해명과 발전을 필요로 한다. 

 



미시세계의 우연성과 거시세계의 합법칙성 : 양-질의 전환


 양자역학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을 만족할 수 있는 물리적 해석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 바로 보른(Max Born)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동성은 공간에 퍼져 있는 것이지만 입자성은 한 장소에 국한되어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보른은 파동 방정식으로는 입자 자체를 기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보른은 한 장소에서 파동함수의 세기는 (입자를 관찰 할 때)  그곳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나타낸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파동함수가 특정 위치에서 입자의 존재확률을 나타낸다.'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입자가 항상 명확한 경로를 지나간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즉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가 두 슬릿(구멍)을 통과할 확률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스크린 상에 도달한 전자는 두 슬릿중 적어도 하나를 통과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그렇다면 간섭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보른의 해석은 파동함수가 특정위치(예를 들면 스크린)에서 입자를 관찰할 때 그 곳에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미미한 차이 같지만 나중에 엄청나게 다른 해석으로 발전한다. 일단 ‘관찰’이라는 말만 기억하고 넘어가자.


 보른의 통계적 해석은 자연현상을 아이러니하지만 아주 정교하게 해석해준다. 이 해석은 입자 하나하나의 측정 결과를 정교하게 예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어느 곳에 얼마인지만을 예측한다. 그러나 입자가 실제 어디에서 발견되는지는 모른다. 이런 점에서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이 매우 정확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유사한 시도들을 여러 번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평균적 분포를 양자역학만큼 정확하게 예측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중 슬릿 실험에서 엄청나게 많은 전자를 순차적으로 통과 시킬 때 스크린 위의 전자 분포를 그 확률로 정확하게 예측한다. 그러나 실제 개별 전자들이 어디에 부딪힐 지는 예측하지 못한다. 이러한 평균 예측 결과는 여러 과학자들의 정교한 실험결과들과 잘 일치한다. 양자역학으로 원자의 주기율표에서 부터 햇볕이 빛나는 방법이나 전자회로의 작동원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리학에서 확률적 해석은 양자역학만의 특별한 해석이 아니다. 19세기에도 확률-통계학은 일반 물리학에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기체 이론에서 개별 분자는 완전히 무작위적인(우연적인) 운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기체를 구성하는 거대 분자 집합은 통계적으로 정교한 역학 법칙(필연성)에 지배받는다.


이러한 법칙을 큰 수의 법칙(law of great numbers)이라고 하는데, 하나하나의 개별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연에 의해 일어나서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많은 수가 모인 집단에의 사건들은 일정한 규칙(합법칙성)을 따른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전체 인구로 보면 인간의 평균 수명을 예측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자연 현상을 변증법에서는 양-질의 변환 법칙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역학에 의해 미시세계에는 대한 우연성과 확률성이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거시세계에 까지 인과론(합법칙성)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연에도 종류가 있다.: 양자역학의 두 그룹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은 미시세계에 우연성이 지배하기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우연‘에는 종류가 있다. 흔히 주사위를 던질 때 각각의 숫자가 나타날 확률은 1/6이고 결과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은 자연법칙의 본질적인 우연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사위를 던져 나타나는 숫자는 초기 손에서 떨어질 때의 각도, 속도, 위치와 관련이 있고, 그때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리고 땅에 떨어졌을 때 탄성, 표면 거칠기와 모양 등등에 관련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알면 주사위의 숫자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완전히 우연에 의해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결과를 결정하는 많은 요인들을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연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은 더 깊이 있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연 현상의 본질적인 우연성 때문일까? 물리학자들 사이에도 이 대한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 해석을 둘러싸고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그룹은 양자역학의 확률적 특성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는 어떤 원인(숨은 변수)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룹에는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 그리고 드브로이가 있다. 또 한 그룹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요인, 즉 완전한 우연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는다. 이 그룹에는 양자역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그룹으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있다. 

 

참고문헌

1. The Möbius Trip (강추)

2. 맑스주의와 현대과학(번역중)

3. 정리되는데로 링크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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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좌파3]괴기한 이중 슬릿 실험

/* 이 글은 노동자의 힘 기관지에 연재중에 있습니다. */

[양자역학과 좌파3]괴기한 이중 슬릿 실험

파동인줄 알았던 빛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입자의 특성이 발견되었고, 입자인줄 알았던 전자는 드브로이와 데이비슨에 의해 파동의 특성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입자-파동의 이중성은 1989년에 <이중 슬릿(구멍) 실험>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밝혀졌다. 이 실험을 살펴보는 것이 앞으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자세히 살펴보자.


낮은 에너지의 전자총으로 서로 간섭현상을 일으키지 않게 낱개의 전자가 튀어나오게 한 다음 이 전자들을 그림과 같은 작은 구멍에 통과시키자. 그리고 그 뒷면에 전자를 감지할 수 있는 스크린을 두어 전자의 분포를 확인한다. 이 단일 슬릿 실험에서는 예상과 같이 구멍 뒷면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림 1    

                             

                           

                                                        그림 2

 

여기까지는 고전 역학적 해석으로도 아무른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두개의 구멍사이로 전자를 통과시키면 어떻게 될까? 예상대로라면(입자라면) 두개의 구멍위치에서 가장 많은 분포를 얻을 것을 것이고, 각각을 합한 결과와 같을 것이다(그림 2).

                        

                                                   그림 3

그러나 실험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림 3과 같이 스크린에 줄무늬모양의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쉽게 '전자는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고 앵무새처럼 암기해서 '이해한 척' 넘어갈 문제도 아니다. 양자역학적 해석에 따르면 전자 하나를 통과시켜도 이러한 간섭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전자 하나를 두 개의 구멍을 향해 발사했는데, 간섭무늬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자 하나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해서 스스로  간섭무늬를 만들어 낸 것이 된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더 이상 고전 물리를 일부 수정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난해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수학적 방법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수식이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인 것이다. 뉴턴의 운동 방정식(힘=질량X가속도)을 풀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구할 수 있으며, 이 위치와 속도는 실제 공간에서 그대로 위치와 속도이므로, 이해하는데 아무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파동 방정식을 풀어서 나온 해답인 파동 함수가 무엇인지 물리적 의미를 부여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다. 한 가지 대안으로 슈뢰딩거는 전자를 현실 물리 세계에서 자신의 파동 방정식을 따르는 파동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해석은 단일 입자의 경우에만 잘 맞았다.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르면, 다-입자(multi-particle)계에서는 관련된 파동이 다차원 공간에 나타난다. 만약 3개의 입자를 다루면 9차원 공간을 생각해야 한다. 9차원 공간?! 이 말은 슈뢰딩거의 파동이 존재하는 공간은 실제 공간이 아닌 수학적인 추상 공간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슈뢰딩거 파동 방정식에서 전자와 관련된 파동은 실제 공간에서의 파동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을 무시할 수는 없다. 파동 방정식을 기반으로 한 양자역학은 그 어떤 역학보다 미시세계를 잘 기술하고 있음이 실험적으로 무수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파동 방정식의 파동함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아인슈타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은 이 문제에 대해 해결을 시도했다. 그는 수학적인 추상공간의 파동함수 크기를 제곱하면 측정시 나타나는 입자의 물리량(위치 혹은 속도)을 발견할 확률로 해석하자고 제안하였다. 이것이 아직까지 양자역학 주류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파동함수의 해석 방법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 역시 부분적으로 해답을 주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전자의 파동성은 현실공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림 4


다시 이중 슬릿 실험으로 돌아가 보자.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안다면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자가 매 순간 어느 구멍으로 통과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위쪽 구멍에 '전자 측정 장치'를 설치해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희한하게 간섭 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입자 특성이 나타났다(그림 4). 이것은 측정방법에 따라 전자가 파동의 특성(스크린만 두었을 때)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특성(전자 측정 장치를 두었을 때)을 보이기도 한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문제를 많이 해결하였지만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전히 혼돈 속에 있다. 주류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의 난해한 현상들로 인해 오직 측정 가능한(경험적인 것)양에만 집착했다.(실증주의) 또 다른 과학자들은 보른의 확률적 해석을 완전한 우연적 현상으로 오해해서 불가지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소수이기는 하지만 관측방법에 따라 변하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신비주의/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물론 아주 소수로 좌파적 해석도 있다. 그러나 주류 양자역학의 개척자들의 강한 실증주의적인 견해는 양자역학 해석을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예를 들어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은 공식적으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는 원자의 구조와 같은 진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원자를 관찰할 때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만을 다룬다."고 주장했다. 다음에는 이러한 양자역학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에 대해 알아보자.(다음호에 계속)

 

/* 오래 기다렸습니다. 다음호 부터 진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이 이중 슬릿 실험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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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좌파2]양자역학의 시작

 

양자역학의 시작


빛과 함께 당시 물리학자들 연구 대상은 물질의 구성과 관련된 원자의 구조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원자라고 생각했었다. 원자는 영어로 아톰( Atom)이라하고 이 말은 그리스어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1911년 러더퍼드(Rutherford Birchard Hayes)는 알파입자를 금 박막에 충돌 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원자 중심부에 양전하를 띈 원자핵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실험결과에 따르면 놀랍게도 원자는 99.9999999999%가 비어 있었다. 이것은 축구 경기장에 모래 알 크기와 유사하다. 이러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러더퍼드는 마치 태양계 행성과 같이 원자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 모델을 제안한다(그림 참조).

 

그러나 이 모델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러더퍼드 원자 모델에서는 전자가 핵 주위를 원운동 하고 있는데, 원운동을 하려면 전자가 지속적으로 운동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속도는 크기와 방향을 갖는 벡터(vector)양이므로, 크기는 같더라도 방향을 바꾸면 속도는 변한 것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속도가 변했다면 가속도 운동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전자가 가속도 운동을 하면 전자기파가 발생해 운동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운동에너지를 잃어버린 전자는 원자로 끌려들어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 않다. 

원자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어(Neils Bohr)는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전이론과의 단절을 시도하였다. 그는 양자 개념이나 에너지 불연속의 개념을 원자 모형에 적용하기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을 제안했다. 우선 원자에서 전자는 특정한 불연속적인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고 이 궤도에 있는 전자는 전자기파 방출과 같은 에너지 방출은 없다. 그리고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옮겨 갈 때는 궤도사이의 거리에 의존하는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흡수한다. 이 모델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실험결과들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과 충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은 바로 프랑스 귀족출신의 과학자 루이 드브로이(Louis de Broglie)였다. 그는 박사논문(1924)에서 전자도 파동의 성질을 갖는다는 혁명적인 물질파이론을 내놓았다. 그의 지도교수는 당시만 해도 황당했던 이 박사 논문에 대해 학위를 주기 어려웠다. 지도 교수는 귀족 출신인 점이 껄끄러워 직접 거부하지는 못하고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인슈타인에게 논문 평가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 논문을 본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드브로이의 업적의 중요성을 단번에 높게 평가하였다. 바로 다음해에  미국의 실험 물리학자 데이비슨(Clinton Joseph Davisson)은 전자도 광파와 마찬가지로 회절현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해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질파 개념은 보어의 원자모델에서 전자가 원자핵과 충돌하지 않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전자도 파동의 특성을 가지므로 원자핵 주의에서 '정상파'(standing wave)의 조건을 만족하고 있다면,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원자 모형에 대해 안정적인 이론적인 틀이 완성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에 고전역학에는 일반적인 입자와 파동의 운동을 기술하는 뉴턴의 운동방정식과 맥스웰의 파동방정식이 있었지만, 원자세계의 운동들을 기술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정식은 없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는 드브로이의 전자에 대한 물질파와 관련된 파동을 설명하기 위한 공식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양자역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여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다. 이 수식으로 원자 주의에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 준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도 원자에서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여러 가지 패턴을 설명할 수 있는 양자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추상적인 수학적 형식주의를 통해 슈뢰딩거의 방정식에서와 같은 행렬역학을 발표하였다. 이후에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수학적으로 동일함이 증명되었다.

수학적 형식주의는 수학을 완전히 형식화하자는 태도 즉, 수학에 쓰이는 모든 표현을 의미가 없는 기호에 의해 어떤 규칙에 따라 나열한 묶음으로 보자는 태도이다. 형식주의는 공리를 세우고 그 공리계가 완전히 모순이 없다는 것을 기호조작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 무모순성에 대한 증명은 1931년 괴델에 의해 깨지고 만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형식주의를 무척 싫어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참고)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나쁜 짓이지만, 양자역학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양자역학에는 두가지 흐름으로 나누면,

 

(원래 나뿐넘과 착한넘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면 이해하기는 좋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나쁜 짓이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 두자. 암튼, 한번 나누어 보자.)

 

우선 한쪽은 Max Plank-Einstein-de Broglie-Schrodinger로 이어지고 (실재론)

나머지 한쪽은 주류쪽으로 Niels Bohr-Heigenberg-Born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증주의)

이들 두 경향의 대립은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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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과좌파1]양자역학의 좌파적 이해를 위해

 

양자역학의 좌파적 이해를 위해

노동자의 힘  77호

소문에 의하면 양자역학이 모든 결정론을 부정하고 있으며, 또 모든 물리 현상은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고 한다. 이러한 양자역학으로 일부 논자들은 맑스주의를 결정론으로 몰아세우기도 하고, 모든 인과론을 부정하며 맑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그 선언 뒤에 남는 것은 ‘자본주의여 영원하라’는 이데올로기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양자역학에서 부정하는 결정론은 맑스주의에서도 끊임없이 부정해온 뉴턴식의 기계론적 결정론이다. 더욱이 맑스주의는 우연과 필연의 문제를 상호 배타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맑스 자신도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그의 후계자 에피쿠로스의 미묘한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는 신에 의해 창조된 완벽한 존재였고, 그것이 물질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는 우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불완전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 진리는 오직 그것을 관찰한 때만 알 수 있어 자연의 객관적 실체가 부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을 추종하는 일부 물리학자들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없이는 물질적 실체를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확하게 레닌이 그의 책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에서 포괄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관적 관념론의 관점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양자역학은 오랜 기계론적 결정론을 파괴하였지만 여전히 정교한 예측과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 80년대를 극소전자혁명을 21세기에도 지속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나오는 철학적 견해는 맑스주의를 근거 없이 부정하며 노동자-민중에게 유해한 관념론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 늪에서 맑스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맑스주의를 복원하고 싶지만 그 어려운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맑스주의 철학을 복원까지 한단 말인가? 난감할 뿐이다. 그래서 쉽진 않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과 같이 시도해 보고 싶다. 앞으로 관련 글을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jinbo.net/yskim) 혹은 노동자의 힘 기관지 홈페이지(www.pwc.or.kr)에 지속적으로 올릴 것이며(물론 지금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자 한다.




양자역학의 태동 : 빛에 대한 부정의 부정

 

빛이란 무엇일까? 기존의 물리학이 위기를 맞는 시기마다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뉴턴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18세기 동안 빛이 작은 알갱이(미립자)로 구성되어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678년에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빛에 관한 논문”에서 뉴턴의 ‘미립자’이론에 맞서 빛이 마치 파도처럼 전파되는 파동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논문은 뉴턴의 그늘 아래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나 토마스 영(Young)의 빛의 회절/간섭실험을 거쳐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자기파임을 증명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19세기말 다시 빛에 대한 논란이 붉어져 나왔다. 과학이 막다른 길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토대는 혁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이 나타난다.

 

1890년대에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k)는 흑체에서 나오는 빛(black body radiation)의 독특한 물리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모든 물질은 자신이 온도가 높을 때는 빛을 내고 낮을 때는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물체(검은 물체)는 반대로 모든 파장의 빛을 내놓기 때문에 흑체 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사하는 물질은 없다. 이러한 생각으로 물리학자들은 빛을 모두 흡수하게 고안한 검은 상자를 흑체라고 불렀다. 아무튼 프랑크는 흑체의 온도에 따라 내보내는 빛의 스펙트럼을 관찰하였는데, 흑체의 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그에 비례해서 빛의 색이 변하지 않았다. 고전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00년에 막스 플랑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빛이 특정 크기를 갖는 다발(꾸러미, packet)로 가정 했고 이것을 '양자(quanta)‘라 불렀다. 이 이론은 뚜렷한 물리학적인 근거 없이 '운좋게 선택된 것'이었기에, 그는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05년 당시 24세였던 젊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빛(전자기파)은 입자와 같은 에너지 다발로 구성되어 있다는 플랑크의 이론을 받아들여 금속판에 빛을 쪼였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자 현상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발표하였다. 이후에 이 빛의 다발을 빛의 양자(quanta)화로 광자(photon)라고 불렀다. 이로서 빛이 다시 입자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에 대한 뉴턴의 입자 이론은 맥스웰의 파동이론에 의해 부정되었고 다시 이것은 막스 프랑크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새로운 입자 이론으로 부정되었다. 처음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듯 보이지만 다시 구식의 뉴턴 이론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질적인 도약으로 과학에서 진정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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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머리속에 나노 입자

노동자 머리속에 나노 입자 
                                                                                                           김영식

과학기술자 머릿속에 지우개

일반적으로 나노 입자라고 하면 100나노미터 길이(폭) 이하의 아주 미세한 입자를 말한다. 대략 머리카락의 지름이 8만 나노미터 정도이고 피 속의 적혈구는 5천 나노미터 그리고 DNA분자는 2.5나노미터 정도이다. 이러한 나노 입자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항균특성이 있는 은-나노 입자는 세탁기와 휴대폰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피부흡수를 좋게 한다는 이유로 화장품, 샴푸 등에도 다양한 나노 입자들이 적용되고 있다. 심지어 아기 젖병에도 적용되고 있을 정도다.

나노 입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탄소 나노 튜브’와 ‘나노 탄소 공(일명 버키볼(buckyball))’이다. 1985년에 처음 발견된 버키볼은 60개의 탄소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축구공 모양을 하고 있다. 탄소 나노튜브는 지름이 1 나노미터정도 이고 이름대로 튜브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인장력은 강철보다 100배 강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도체, 반도체, 초전도체 등 다양한 특성을 보이기 때문에, 첨단 윤활유, 연료전지, 약물전달체계, 차세대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등에서 연구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탄소로 구성되어 있어 탄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는 우리 몸에 큰 해가 없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잘 알려진 물질이라도 나노 크기로 가공하면 완전히 새로운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영국 리버풀대의 독성학자인 비비언 하워드 교수는 "나노입자는 물질 자체의 독성보다 크기가 작아질수록 표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어지면서 생체조직에 대한 반응성이 증가해 독성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실 물질이 작을수록 더 위험한 공해물질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굵은 먼지는 기도나 코의 점막에서 배출되지만 미세먼지는 폐포 속 깊이 박혀버리기 때문에 훨씬 해롭다. 석영도 덩어리일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석영을 캐는 광산노동자, 수정을 연마하는 노동자는 미세 수정입자에 노출돼 폐 조직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나노입자는 미세먼지보다 100배-1000배 더 작다. 그렇다면 과학자들 사이에 나노입자의 잠재적 위험성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그리고 60년 전 과학자들은 나노크기의 입자들이 신경계를 따라 콧속이나 폐 그리고 뇌로 쉽게 침투하여 돌아다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기억을 자본주의 상품 개발의 압력에 밀려, 강압적으로 망각해 버린 것이다. 이제 그 망각에서 깨어날 때가 된 듯하다. 

 



내(노동자) 머리속에 나노 입자

지난(2005년) 3월에  미국의 독성학 학회에서는 탄소나노입자들이 동물실험을 통해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쏟아 내었다. NASA의 제임스(John T. James) 박사는 쥐의 호흡기관에 탄소 나노 입자를 주사했을 때, 탄소나노튜브는 폐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켰고 몇 몇 동물들은 죽기까지 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면역체계내의 백혈구(대식세포)가 주입된 나노튜브를 잡아버리지만 그 뒤 그 세포는 죽어버리고 뒤이은 염증이 폐 조직에 상처를 낸다.

국립 직업 안정과 건강 학회(National Institute of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y)의 페티아 시메노바(Petia Simeonva)박사는 비슷한 양의 탄소 나노튜브를 주입 받은 쥐에서 나노입자를 다량 포함하는 거대세포인 폐 육아종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또 주입된 나노 입자는 대동맥이나 심장의 미트콘트리아 내 DNA에 손상을 입히는데, 이후 동맥경화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한다.

앞의 실험들은 인위적으로 나노입자를 주입한 실험이지만 인공의 나노 입자는 매우 작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들어올 수 있어 비현실적인 실험이 아니다. 더욱이 쥐에게 나노 입자를 주입하지 않고 흡입시켜도, 쥐의 콧구멍 속, 폐 그리고 뇌에 나노입자들이 축적된다는 사실이 로체스트 대학의 환경 의학과 교수 권터 오버되르스터(Gunter Oberdorster)박사의 실험에서 확인되었다(2004년 1월). 또 같은 해 3월에 그의 딸, 환경독극물학자인 에바 오버되르스터 박사는 미국화학회(ACS)에서 나노기술의 산물인 버키볼이 물고기의 뇌에 심각한 손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수조관속에 버키볼 500ppm을 첨가하고 48시간 후 어린 농어의 뇌 조직을 조사한 결과 정상보다 손상이 17배나 심각했다. 농어의 뇌 조직에 생긴 손상은 정상적인 세포막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인간의 알츠하이머병과 관련이 있는 증세라고 한다.

 

한국 그리고 나노기술

요즘 과기부는 [과학기술 혁신 본부] 신설하여 과학기술을 ‘혁신(?)’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노기술 분야 혁신은 과학기술부가 맡고 있던 연구개발과제의 상당부분을 산업자원부로 넘겨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수‘과학‘을 버리고 응용 ’기술‘로 몰아가겠다는 정부 혁신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정부 '혁신'사업의 실적을 위해서 나노기술 기술은 연구소에서 그대로 벤처로 그리고 공장으로 빠르게 이전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나노 물질의 안정성에 대한 엄밀한 검토는 뒤로 밀려날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올해 나노기술 영향평가제도가 실시된다는 점이다. 기술영향평가란 ’한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안녕과 복지에 막대한 규정력을 미치는 중요한 과학기술 주제의 영향을 주로 사회, 윤리, 환경의 측면에서 연구 초기에 미리 평가하는 제도‘를 말한다. 무엇인가 '합의'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 제도가 ’나노기술 개발 촉진법‘에 의해 나왔다는 점과 그 평가기관이 과기부 산하기관이자 그의 시녀역할을 해온 과학기술평가원(KISTEP)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진행될 결과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설사 기술 영향평가 자체가 공정하게 잘 진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법 자체가 ’나노기술을 촉진‘시키기 위한 법의 시행령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제대로 반영될지 여부도 미지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정책도 정부와 자본가 그리고 시민사회 대표들(전문가들)만의 골방 속 합의로 이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유일한 정책 대안은 노동자-민중의 투쟁 속에서, 그들의 민주주의를 향상시키는 방향과 고민 속에서 나올 것이다. 핵폐기물 부지 선정사례와 위성방송 기술 대응 실패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참고로 캐나다의 과학기술 감시단체인 ETC 그룹은 '기술영향평가제도' 대신 잠재적인 위험성이 분석될 때까지 나노과학 연구를 일시 보류(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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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나노입자의 독성에 대한 10가지 경고

아래 글은 ETC 그룹의 짐 토마스가[The Ecologist]지 2004년 5월호에 “나노 감시(Nanowatch)”라는 글중 일부을 번역한 것이다. 이텔릭체로 적은 것은 이해를 돕기위해 번역자가 첨부하였다.

 나노입자의 독성에 대한 10가지 경고

1. 1997년 선스크린 로션속의 TiO2/ZnO 나노 입자는 피부에 유리기(free radicals)라는 유해요소를 피부에 점차 많이 형성시키고 DNA를 손상시킨다. 이 유리기는 콜라겐 조직을 붕괴시키고, 결과적으로 피부에 깊은 골(즉, 주름살)이 패이게 한다. (옥스포드 대학, 몬트레이 대학) 둔포드,  셀나노 등(Dunford, Salinaro etal)

Dunford, Salinaro et al. "Chemical oxidation and DNA damage catalysed by inorganic sunscreen ingredients," FEBS Letters , volume 418, no. 1-2, 24 November 1997, pp. 87-90.

2. 2002 3월, 라이스 대학의 생물 환경 나노 기술 센터(Center  for Biological and Environmental Nanotechnology)는 가공된 나노입자는 실험동물의 장기에 축적되어 세포 속으로 들어간다고 미국 환경국(EPA)에 보고했다. "나노 물질이 세포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경계해야한다. 만약 나노물질이 박테리아에 들어간다면, 나노물질은 먹이사슬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마크 와이제너(Mark Wiesner)

 Doug Brown, "Nano litterbugs? Experts See Potential Pollution Problems," Small Times March 15, 2002.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smalltimes.com

3. 2003년 3월 NASA/존슨 우주센터의 연구결과에서는 쥐의 폐 속에서 나노튜브는 석영 먼지보다 더 독성이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석영을 캐는 광원, 수정을 연마하는 작업자는 숨을 쉬면서 수정입자를 들이마시게 돼 폐조직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이런 병을 규폐증이라고 한다. 듀퐁의 헤스켈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나노튜브의 독성은 변하지만 여전히 우려스럽게 보고 있다. "여기서 교훈은 예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노튜브는 매우 높은 독성이 있을 수 있다" -Dr 로버트 헌터 (NASA 연구원)

Jenny Hogan, "How safe is nanotech?"  Special Report on Nano Pollution, New Scientist, Vol. 177, No. 2388, 29 March 2003, p. 14.

4. 2003년 3월, ETC 그룹은 독성병리학자 비비언 하워드에 의해 조사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입자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대부분 독성이 더 강해지고 특히 나노 입자의 경우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뇌혈관장벽과 같은 막을 통과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노입자의 제조가 허용되기 전에 이들 입자에 대한 안전성에 대한 평가를 전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잠재적으로 위험한 과정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비비언 하워드(Vyvyan Howard)

ETC Group, "Size Matters! The Case for a Global Moratorium," Occasional Paper Series, Volume 7, no. 1, April 2003.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etcgroup.org

5. 2003년 7월 CBEN 과학자 메이슨 톰슨(Mason Tomson)은 [네이처]지에 한 보고서에서 버키볼이 땅속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팀에 의해 수행된 공개되지 않은 연구에서 나노 입자는 지렁이에 쉽게 흡수되고, 먹이사슬 과정을 통해 인간에 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비키콜빈(Vicki Colvin)박사, 센터장

Geoff Brumfiel, "A Little Knowledge...," Nature, Vol. 424, no. 6946, 17 July 2003, p. 246.

6. 2004년 1월 권터 오버되르스터 박사의 연구에서는 나노 입자가 사람의 코를 통해 쉽게 뇌로 전달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나노기술 혁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를 화학적으로 전혀 다르게 설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들은 더 위험한 특성들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켄 도날드슨( Ken Donaldson)교수, 에딘버르 대학

Alex Kirby, "Tiny Particles Threaten Brain," BBC News Online, 8 January, 2004. Available on the Internet, http://news.bbc.co.uk/1/hi/sci/tech/3379759.stm

7. 2004년 1월, 루벵 대학의 나노안전성 연구원은 [네이처]지에서 나노입자에 대한 새로운 독성 실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나노 물질 생산자들은 위험 평가 국제 가이드라인에 따라 모든 새로운 물질에 대해 관련 독성 검사 결과를 제출하는 것을 의무하 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일부 ‘오래전부터 사용한’ 화학 약품들도 물리적 상태가 처음 평가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면 다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Peter H.M Hoet Abderrahim Nemmar and Benoit Nemery.

Peter Hoet, Abderrahim Nemmar and Benoit Nemery, "Health Impact of Nanomaterials?" Nature Biotechnology, Vol. 22, no.1, January 2004, p. 19.

8. 2004년 1월 - 나노물질의 독성에 대한 첫 번째 과학 학회인 Nanotox 2004,에서 비비안 하워드 박사는 금(Gold) 나노 입자는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Ben Wootliff, ""Bristish Scientist: Nanoparticles Might Move from Mom to Fetus," Small Times, 14 January 2004.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smalltimes.com

9. 2004년 2월 산디에고의 캘리보니아 대학 과학자는 CdSe 나노 입자(퀀텀 닷)는 인간 몸속에서 분해되어 잠재적으로 카드늄 중독의 원인이 된다. “아마 이 결과는 [연구원] 사회가듣기 싫어할 것 같다.”- 마이크 셀러(Mike Sailor) UC San Diego.

Justin Mullins, "Safety concerns over injectable quantum dots, New Scientist, Vol. 181, No. 2436 , 28 February 2004, p. 10.

10. 2004년 3월 에바 오버되르스터 박사는 미국 화학 학회 모임에서 버키볼은 치어(Juvenile fish)의 뇌를 손상시키고 유전자 역할을 변화시킨다고 보고하였다. 또 그것은 작은 물벼룩에 독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뇌손상이 빠르게 시작되면 새로운 기술이 더 이상 확대 되기 전에 위험성과 이익을 더 심도 있게 평가하고 검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에바 오버되르스터 박사

Mark T. Sampson, "Type of buckyball shown to cause brain damage in fish," Eurekalert, March 28, 2004.  Available on the Internet, www.eurekale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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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첨단기술-나노기술과 노동자

/* 이 글은 지난 2002년도에 노동자의 힘 15호에 실린 글이다. 그 동안 나노입자의 유해성을 증명하는 과학적 결과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현재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다. */

 

 

21세기 첨단기술-나노기술과 노동자

노동자의 힘 15호

중동지역의 한 신화에 따르면 인류 역사 초기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지배자 '니므롯'은 여러 종족들을 지배하기 위해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한 높은 탑’ 즉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21세기, 자본은 바벨탑과 유사한 또 다른 극한 기술에 도전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노기술’이다. 차이가 있다면 바벨탑은 무한히 크게 만들겠다는 거대 극한 기술이었고 나노기술은 무한히 작은 것을 만들겠다는 미세 극한 기술에 해당한다. 

나노(nano)란 그리이스어의 '난쟁이'에서 유래한 말로 1나노미터라고 하면 10억분의 1미터를 뜻한다. 머리카락 1개를 10만번 자른 크기로 원자 3-4개가 모인 정도 크기로 환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나노 크기로 잘게 쪼개면 색이나 화학적 전기적 성질들이 모두 변하게 되고 새로운 특성이 나타난다. 이 ‘새로운 특성, 다시 말하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무한히 가능성 있을 것 같은 이 특성’은 21세기의 희망을 장식하고 있다.

나노기술에는 기존의 물질을 잘게 쪼개어 ‘나노 입자’로 만드는 기술이 있는가 하면 ‘탄소 나노 튜브’와 같이 새로운 형태의 물질도 연구되고 있다. 나노 입자의 경우 이미 많은 기업에서 화장품, 페인트, 코팅재, 섬유 그리고 심지어 아기 우유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촉매재 혹은 강화재로 사용하고 있다. 탄소 나노 튜브는 말 그대로 탄소로 구성된 미세한 튜브 형태의 물질로 생명공학, 재료, 전자 분야에서 미래 이용가능성이 높아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나노기술이 21세기를 꽃 피울 희망이라고 하지만, 그 희망이 자본 주도로 이루어지는 희망이라면 노동자에게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이미 나노기술의 ‘새로운 특성’은 나노물질 생산을 담당할 노동자들에게 다르게 다가오고 있다. 최근 미국 환경 보호국 EPA에 보고된 동물실험 자료에 따르면, 나노 입자는 동물의 살아 있는 세포에 직접 침투되고 동물 장기에 축적되며, 세균에 실려 먹이 사슬을 통해 유입되어 축적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특히 탄소 나노 튜브의 경우 탄소는 기본적으로 몸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축적되었을 때 몸의 면역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양이 석면과도 유사하여 석면에서 발생한 문제(발암물질)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노입자가 의학쪽에 이용될 경우 그 위험성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전체 민중으로 확대된다. 만약 혈액 속에 나노입자가 있으면, 단백질이 나노 입자 표면에 붙어 단백질의 모양과 기능은 바뀌게 된다. 이 특성은 의약 분야에서 매우 유용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선전되고 있지만 단백질의 변화는 의도하지 못한 위험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바벨탑은 노아 홍수의 재현을 막고 지배자로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당시 첨단 건축기술 로 지어졌다. 그러나 민중들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과 분열뿐이었다. 20세기를 이끈 첨단 반도체 기술은 20세기를 발전시켰지만, 철저하게 자본의 의도로 진행되었기에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실업과 새로운 직업병만 남았다.(<노동자의 힘> 제10호 참조). 이제 또 다시 21세기 자본은 ‘그들의’ 희망의 기술로 나노기술을 지목하고 기획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나노기술은 노동자의 건강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인간의 환경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축적만을 위한 그들의 희망의 기술로 자리잡고 있다.

(참고 자료: ‘No Small Matter!', http://www.etcgrou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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