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2009/07/20 22:35 잡기장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실 그 말 자체가 참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복잡한 감정을 이기고 마지막 메일을 보냈다.

 

가슴이 아프다.

 

왜 가슴이 아프냐면, 나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간의 일들과 그 진심을 꺼내놓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사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던 것이 맞다. 하지만 누군가의 "진심"을 거절하는 것은 어쩌면 거절당하는 사람만큼이나 상처받는 일인 것 같다.

 

 

비꼬는 말을 쓰고 싶은 욕망도 조금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 짧게 쓰려고 했던 것은 나를 내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괴롭게 만들고 싶다는 알량한 복수의 욕망도 섞여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쨌든 저쨌든 그냥 더 이상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겠지 라는 희망같은 거는 정말 다시 품을 수 없게 된 상황이고, 뭔가 설명하는 게 예의일까 생각해서 그래도 뭔가를 꺼내놓으려고 하면 그냥 턱턱 막혔다. 그냥 그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과거의 나를 상정한 채 쓰여져 있는 그의 메일은 사실 가관이다. 하지만 정말 변한 것은 나지 그가 아니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근데 지금은 견디기 힘들만큼 곁에 머물지 않았으면 하는 종류의 사람이 그와 같은 소통을 하는 사람이다. 각종 포장과 오만한 충고들이 아무렇지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메일 속에 있는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진심이라는 것이 참 그렇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 진심 자체는 나쁜게 아니니까, 그것에 대해서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곧 죽어도, "유감이다"라는 의미로도 sorry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그렇게 조금 느낀다 하더라도 그런 감정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난 여전히 화가 나 있다. 하지만 그 화를 처리하려고 다시 달겨들기에는 그냥 좀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지금으로써는 더 크다.

 

 

원래 메일을 받고 그냥 한숨 쉬고 씹는 게 최선이다 싶었다가, 메일을 써야한다고 생각하고 어제 딱 3문장이 들어간 메일을 썼다. 영문 메일을 쓸때 소위 격식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하나도 써먹고 싶지 않았다. 그냥 딱 3문장. 그게 나의 마음이었다.

 

 

근데 그 메일을 보낸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다른 각종 트라우마들도 떠오르면서 몸이 좀 아프다. 메일 보내지 말자 라고 생각했던 시간동안에는 사실 거의 까먹다 시피 하고 있었는 데, 막상 보내고 나니 몸이 아프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하다.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걸까.

 

 

생각해보면 참 슬프다. 예전에 그렇게 받고 싶었던 사과도 받았고, 내가 원했던 시나리오대로 다시 나랑 잘 지내고 싶다고 그 쪽이 먼저 말해왔다. 하지만 그냥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님에도, 나는 다시 그와 소통하는 관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을 거절했다. 차라리 상처줘야지!라는 결심으로 거절했다면 그러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와 나는 될법한 관계가 아닌거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과거의 나와 그라면 거절할만한 관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거절한다. 그래서 그냥 그런 시간의 흐름과 변화와 진심과 거절과 막 그런 것들이 다 슬프다.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아는 데도 거절해야한다는 게 참 가슴 아프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그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정말 정말로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사실 선택이고 뭐고도 없다. 그냥 그런 거다.

 

 

 

이제 좀 이 관계에 대한 애도가 끝나리라고 생각했는 데, 메일을 보내고 나면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는 데, 다시 또 감정이 넘쳐나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뜬금없이 어릴 때 아빠한테 맞아서 입술에서 피가나는 엄마가 울면서 못산다고 절규하던 영상이 눈 앞에 떠올랐다. 이건 또 뭐람.

 

 

아마 한 며칠 또 아플것 같다. 그래도 이 모든 감정을 충분히 느껴주고, 안녕을 고할만 할때 안녕을 막  고해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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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0 22:35 2009/07/2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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