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5년만 말하고, 분단 65년에 대해서는 입 다물까요?

 

정년퇴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다.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님이 이야기이다. 강의가 계속되면서 이와 관련된 강정구 교수님의 한마디 말에 느닷없이 폭소가 터졌나왔다.

 

“이~ 또 이쪽 얘기 나오면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우리 마누라도, 나더러 제발 좀 참으라고 합디다.”
“...............?”
“정년도 얼마 안 남았고, 맏아들 장가 갈 때까지만, 남편이 뭐 또 귀에 거슬리는 소리하다가. 덥석 잡혀들어 갈 까봐 그런 거지요.”
“교수님, 몸 사리시라고요?”
“그거 뭐, 하하하” 

 

강정구 교수의 짤막한, 푸념? 아닌 푸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덕분에 강의실 분위기는 잠시 부드럽게 술렁였다. 솔직히 우리 역사, 그것도 ‘남북현대사’를 듣는 자리인지라 순전히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조크 한마디로 분위기는 한결 누그러졌다. 그 가운데서 강좌는 이어졌다.

 

올해는 해방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분단 65년이기도 합니다. 해방은 말하고, 분단은 왜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해방이란 무엇인가요? 일본 제국주의에서 우리가, 대한민국이 모든 주권을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일제 식민 시대에는 법과 제도, 사회규범이 온통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해방 후의 법과 제도, 사회규범은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나요? 바로 조선을, 조선인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말이죠. 당연히 모든 게 바뀌었어야 하잖습니까. 그러나 해방이 됐을 때 우린 그렇지가 못했어요.

 

이런 사실들 때문에 우리나라는 온전한 해방을 맞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분단문제나 친일 청산문제의 그늘이 너무도 깊은데, 그래서 해방다운 해방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가 아닌가요. 그래요. 그게 우리에요. 우리가 분단 65년의 현실을 외면만 하고 돌아보지 않는 다면 역사의 발전은 없다. 그래서 분단 65년을 이야기 해보자 이겁니다. 그것은 친일파의 득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해방공간에서 우리는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했거든요.

 

해방 후 곧바로 외세에 의해서 나라가 반 토막이 났습니다. 이 얘기는 조금 있다가 또 할 거지만, 나라가 반 토막이 난 채 남과 북은 이 문제에서부터 접근하는 자세가 달랐어요. 친일파 척결에서부터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남한에서의 친일파들은, 우리사회 곳곳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쥐고 온갖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학문 등 아닌 곳이 없어요. 어느 한분야인들 그들의 득세가 넘쳐나지 않는 곳이 있나요. 아니, 친일파들은 오히려 더 큰 권력과 더 막강한 힘을 떨치고 있다고 봐야죠. 일본인이 물러난 자리를 누가 채웠습니까. 바로 친일세력들이에요. 해방공간에서 지도자로 변신해서는 이 나라를 죄지 우지해고 있는 자들입니다.

 

변화의 소용돌이 없이는 역사가 발전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변혁을 맞고, 낡은 것을 청산하려면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우린 그것을 못했던 것이에요.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진통 없이 낳던가요? 국가도 뭔가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아픔도 겪고, 그에 걸 맞는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데, 혼란이다. 과도기다. 그러니 미군이 총칼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논리만 용납되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북한은 어땠냐 하면, 사실상 친일 잔재 청산이 자발적인 수준에서 즉시 시작됐습니다. 거의 다 그렇게 해결 됐고요. 토지개혁법은 1946년 2월에 시행되어, 그게 8월이 되자 정식으로 다 이루어집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재산, 친일파들의 재산이 다 처결된 거지요. 모조리 환수돼서 사실상 친일청산이 마무리 됐어요.

 

이에 비해서 남한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해방이 된지 60여년 만에 그게 2005년입니다. 60년이 지나서야 해방을 해방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된 건데, 역사바로세우기 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꾸려지고, ‘친일 민족반역자진상규명’이 뒤늦게나마 이뤄져요. 아무튼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이걸 못했어요. 그 양반 워낙 레드 콤플렉스가 있어서..... 거기다 55년 만에 겨우, 정말 어렵게 정권교체가 이뤄진 데다가 의석수라든가 아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정부 때 터를 닦고 노무현 대통령 때 와서 겨우 그나마 친일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이죠. 아쉽고 미흡했죠. 그러나 60년 동안 꼼짝도 못 하다가 발걸음을 뗀 것은,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현상에서건 사회현상에서건 우리에게 분단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그늘이에요. 친일청산과 남북한 문제를 놓고 볼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진정한 해방을 못 이루고 있었습니다. 양시양비론처럼 나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결은 중간선에서 하자! 이건, 이건~ 판단기준이 없기 땜에 그런 거예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뜨뜨 미지근하게 하는 것, 양시양비론의 실체가 이렇습니다.

 

의석수가 한나라당이 많으니까, 친일민족반역자 문제에서도 양시양비론으로 얼버무려졌어요. 친일민족반역자 진상규명에서도 박정희가 빠진 것을 봐요. 이게 이유가 뭐냐면, 일본군에 복무한 사람은 중령 이상만 명단에 넣자고, 이렇게 바뀐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일본군 장교, 그것도 중령 이상인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박정희는 중위니까, 반민족 친일분자 명단에서 빼자, 이렇게 된 거에요. 교묘하죠. 양시양비론을 들이댄 것이잖아요.

 

역사는 발전한다. 그렇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고 말한, 돌아가신 노(老) 대통령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역사도, 우리 민족도 분명히 발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철옹성 같이 단단하기만 하던 남북 55년의 반목을 보자. 6.15선언으로 일거에 화해의 물꼬를 트지 않았던가. 그렇다. 우리의 남북역사도 발전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다음 제 3편에서는

 

‘통일 대박론과 전후 분단의 실제적인 책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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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2 01:31 2010/02/02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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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께!

 

 

안녕하세요?

태초이래로 빛이 있는 낮 동안에는온 세상 만물이 자기 색깔을 지니고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범주에 속해서 살고 있는 세상 식구들 중 하나이고요.

 

박노해 시인님은 평화운동가로서 중동의 각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이번 전시를 통하여, 흑과 백의 빛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안개가 한겹 낀....

그 장막을 걷어내고 싶은' 답답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 작가는 훅백으로만 보여주려할까? 현장은 제각기 고유의 색을 함유하고 있을 텐데....

'나는 다른 색도 보고 싶다. 

 

저 사진이 찍힌 현장은 그 때 어떤 색을 하고 있었을까하는

당연한 궁금증 앞에서 그런 것을 느낀 거지요....

 

삼라만상이 색인데, 칼라를 보여주려 애 쓰는 것은,

사물이 가진 고유의 색을 보여주려하는 본연의 노력일텐데 하는 생각요. 

 

기존의 여느 사진작가가 자기가 찍은 사진작품을 목적하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모든 색을 제껴버린 채 흑과 백 회색으로만 대상을 제한한 사진을 보여준 것이라면

이번에는 이렇구나.. 저러네..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었을 거에요.

 

하지만 박노해님이 보여주는 사진은, 폭격 맞은 까나마을, 쿠르디스탄,

레바논 남부의 헤즈블라 지역, 등 전쟁과 공포가 극명하게 존재하는 지역입니다.

 

비록 이런 곳이 아니라할지라도, 빛가운데 보여지는 삼라만상 그 어디가 제각기

자기 색깔 없는 곳이 대체 어디 있을까요?

 

총탄세례를 무수히 맞아 곰보가 되어버린 벽도 그 벽만의 역사와 삶을 담고 있는

고유의 색깔을 가지고 있겠지요.칼에 찢긴 헤즈볼라 깃발이라 할지라도 깃발만의 색깔이 있는 거구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흑과 백 나아가서는 회색으로만 재단되어 보여진다는 것에저는 

왠지 눈에 잔뜩 낀 안개처럼 무엇이 자꾸 가리고 있는 마음이 드는 것이었어요. 

 

이 것들을 색으로 표현했다해서 가볍거나, 고차원적인 미학이 부족하다고 생각진 않아요.

순간과 현장성과 그 찰나의 고유성이 있기에 작가도 현장을 찾는 이유 중의 하나일 거구요.

저는 나눔문화에서 벌이고 있는 평화운동에서도 문외한이라 잘 모릅니다.하여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그

 

곳의 연구원이나 회원들에 비해서 이해가 부족했고요.잘 모르는 중동지방에 대한 상식을 넓혀야 되겠다 싶어서 사진 보다는 박노해님의 생각과 현장에 대한 설명이 문자로서 표출된 글자가 많은 책을 일부러 골라서 구입했고요.

 

웬지 힘들고 편치 않았던 사진을 볼 때 보다는 개인적으로 책이 더 편했고,

원하는 정보를 더 얻어서 다행이었답니다.

 

많은 분야에서, 인류는 1970년 대 쯤에서 거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말씀에는저도 동의합니다.

그같은 맥락에서 카메라에 대해서 한마디 의견을 더 말하려 합니다.

 

사진기가 어떤 상을 찍어낼 수 있는 만큼만 발전했을 때는 그 시대에서 일단은 어쩔 수

없었겠지요.다시 말해서 삼라만상에는 상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색으로도 이루어졌는데....,

 

카메라 기술의 미 발달로 인해 상만 볼 수 있는 촬영기술 밖에 없었을 때는

어쩔도리가 없었겠지요. 그게 그 당시의 한계점인 거지요.

 

그러나 칼라 사진기의 발달로 사물을 칼라로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의 본 모습을 볼게 상을 찍을 수 있고, 나아가서는 사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칼라까지도 푠현할 수 있는 칼라 사진기술의 발명은 표현과 재현의

발로로서의 좋은 발명이요. 자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원한 발명이라고 봅니다.

 

삶의 고뇌가 묻어있는 칼라로서 원초적인 색깔의 위대성을 제 대신

그 현장에서 보았던한 시인을 통해서 보고 싶었던 겁니다.

 

긴 설명 필요없이, 옷 입은 거, 갓구운 노릿한 빵의 색깔, 머리모습,

포탄 속에서 부서져야만 했던 허물어진 담장의 얼룩 등등 삶의 고뇌가

묻어있는 흔적을 즉 색깔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더 잘 전달되려면 칼라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이는,

사진이 사진으로서의 제 몫을 좀 더 잘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 생각했고요. 

 

그 순간, 그 찰나, 그 현장의 칼라는 무엇이었을까? 궁금증이 드는 것이었어요.

작가는 10여년간 평화운동가로서 분쟁지역을 누비면서 현장의 색깔을 수없이 봤을 텐데

우리에게는 왜 흑과 백, 회색으로만 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전달하려면 더더욱 칼라일 수 밖에 없고모든 상황과 그 현장만이 가지는

칼라가 무시된 흑과 백과 회색을 통해서 만 봐야한다는 것에 대한 도무지 불편하고

갑갑한 감정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사진기를 누를 수 밖에 없었던 그 순간,

그현장이 뿜어내고 있는 바로 그 색깔을인,다양한 빛을 가진 사진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혹시 다시 한번 사진전에 들리게 되면 박노해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 광야여 영원하라

샬롬,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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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6 10:41 2010/01/2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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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가슴으로 접근하되

                              차가운 머리와 냉철한 이성으로 현상을 바라보자!

 

열사(烈士)는 자신의 뜻을 죽음으로서 펼친 사람을 이르는 칭호이다. 이준, 유관순, 전태일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덧붙여 말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저항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으로 주로 맨몸으로 싸우다가 죽은 분을 말한다, 혹은 직접적인 행동 대신 강력한 항의의 뜻을 가지고 자결의 굳은 의지를 실행한 분을 칭한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지면서 이들을 ‘열사’라 부르고 장례식은 ‘국민장’이라 하기에 이참에 ‘열사’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위와 같은 열사와 국민장이라는 칭호는, 특정한 진보매체를 접했을 때 이들을 ‘열사’라 칭하고 장례식은 ‘국민장’이라고 칭하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폐일언하고, 용산참사 사건도 이제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장례식을 위하여 유가족과 시민사회 그리고 자발적으로 장례위원이 된 시민들까지 수천 명이 모였다. 이 많은 사람들이 1월 9일 서울역 광장에서 드디어 장례식을 치룬 것이다.

 

사실, 죽은 이들은 삶의 터전에서 보상금 2500만원에 내쫓김을 당한 세입자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항거와 싸움이 길어질 것을 대비하여 망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겨우 하루 밤을 새웠을까 말까한 이른 아침에 느닷없는 경찰 진압이 있었다. 이 진압현장에서 사람들은 화염에 싸였고, 죽고 다친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경찰관 1명과 세입자 5명이었다.

 

조속히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할 건 하고, 밝힐 걸 밝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대해서는 두말 하면 잔소리다. 사건 발생 후, 너무 긴 345일이 흘렀고 1년여 투쟁기간이 이어졌다. 이런 후에 이룬 타협이었고 치러진 장례였다 그리고 ‘용산 재개발’ 희생자 5명을 ‘열사'라 부르고 이들의 장례식을 ’국민장‘이라고 하는 진보매체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이쯤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에 혼돈과 혼란이 온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거부감조차 든다는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온 나라가 알고, 전 세계가 알다시피- 독재정권에 항거하다가, 죽을 고비를 5번이나 넘기고, 감옥에 11번이나 갇혔으며, 그 갇힌 기간은 총 6년이라는 세월이었던 분, 전직 대통령이었고,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장장 55년 동안이나 갈라서서 반목하던 남북을 화해와 상생의 길로 이끌었던 분의 장례식도 ‘국민장’이냐 마냐로 힘들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였다.

 

헌데, ‘용산 재개발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열사’라는 말과 그들의 장례식에는 ‘국민장’이라는 말을 헌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도무지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진보진영이라  하더라도, 투쟁의 동인이 될만한 일과 사람들이라 해서, 이리도 쉽게 ‘열사’라 하고 그들의 장례식을 ‘국민장’이라 칭할 수 있는 전매특허를 가진 건 아니다. 이 아니 ‘열사에 대한 개념 인플레’를 스스로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무슨 진보진영에 득이 되는 일일 것인가.

 

이렇게 쉽사리 '열사 인플레' 사회가 된다면, 어지간한 일에는 시먹어서 역사와 민족 앞에 미쳐야할 몫의 폭이 좁아지지 않겠는가. 운동역량과 동력이 떨어질까 심히 염려된다. 그리하여 진보매체, 당신들이 말하는 ‘열사’와 ‘국민장’이라 부르는 거 덥석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참에 한마디 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한들 당신들 그리 서운해 하지 말았으면 한다.

 

요컨대, 용어 정립을 하자. 용산 참사현장에서 돌아가신  5인은  '용산재개발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분들이 국민 대다수로부터 보편성을 획득한 ‘열사’인지는, 좀더 생각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꼭 열사라고 불러야만 맛인가. 희생자라고 하면 어떤가. 가치보존을 좀 잘 하자는 얘기다.

 

뜨거운 가슴으로 접근하되, 차가운 머리와 냉철한 이성으로 현상을 바라보자!

그래야 힘들고 어려운 싸움에 나서는 사람들의 가치가  더 빛나고, 도매금으로 매도당하지 않으며,

 

더 많은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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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6 10:23 2010/01/2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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