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81026 나는 두렵다, 혁명도 상상도 언제나 두렵다 (혁명하는 여자들/쩡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는 두렵다, 혁명도 상상도 언제나 두렵다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아작 / 20181026 / 쩡열

1.

혁명하는 여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두렵다. 혁명은 언제나 두려웠고, 혁명을 상상하는 것 역시 두려웠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뒤집히는 것. 그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혁명 이후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지금의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대체 무엇이 바뀌게 될지, 바뀐다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될지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견고하고 높은 벽처럼 느껴지기에 이것을 허무는 그 행위가 두렵다. 우린 과연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저것들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애초에 저 벽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은 한치의 두려움과 걱정 없이 팔짱을 낀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애들 써보든지 하하’ 이런 마음가짐을 한 채.

SF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르귄의 말에 따르면 이것들은 예언이 아닌 묘사다. 우리가 읽은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묘사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재이다. 각 단편이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세상은 변했고, 페미니즘의 이야기도 변해왔지만, 또한 같다. 67년에도 순종하는 착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의문을 느낀다. 그리고 91년에도 그 이야기를 반복한다. 물론 남성에 대한 복수와 일탈을 포함하지만, 그녀들의 삶의 조건은 정말 변해왔을까? 나의 삶은 또 달라졌을까?

 

2. 

“내 말하건대 조,” 그가 문틀에 기댔다. “그렇게 다르진 않았어. 지금보단 좀 덜 각박하고, 어쩌면 더 조용했달까, 지금처럼 야비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아주 다르진 않았어. 언제나 남자들이 모든 걸 관리했지.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모든 실제적인 권력은 남자들이 가지고 가끔 약간의 권력을 여자들에게 내주는 거였어, 그게 다야. 지금 우리는 더는 그럴 필요도 없지만.

- 파멜라 사전트, <공포>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 파멜라 사전트, <공포> 

싸워온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간혹 이런 막막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는 묘사하고 은유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다. 나는 실천해야 하는 존재다. 내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라며, 우리들이 조금 덜 불행하길 바라며 실천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 이렇게 살자고. 그것은 늘 나를 두렵게 한다. 상상은 힘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말할 때의 상상력은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고, 당연한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사유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는 늘 두려웠다. 나에겐 상상력이 없어서, 그 상상의 힘을 내가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내가 좋아하는 김중혁처럼, 박민규처럼, 커트 보네거트처럼 농담을 할 대범함 역시 없다. 그렇기에 저 이야기들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읽히기보다는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저 책에 나오는 그 사람이기에 두려운 것일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3.

사람들은 흔히 SF하면 외삽을 하는 소설이라 설명하고 심지어 그렇게 정의하기까지 한다. SF 소설가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경향이나 현상을 취해 극적 효과를 위해 그것들을 정제하고 강화시킨 다음 미래로 확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와 같은 예언이 나온다.그리고 그 방법과 결과는 과학자들이 소량의 식품첨가제를 오랫동안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예측하기 위해 정제되고 농축된 식품 첨가제를 쥐들에게 대량으로 복용시키는 방법과, 또 그로부터 얻은 결과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결과는 거의 필연적으로 암으로 발전하는 듯하다. 외삽의 결과도 그러하다. 엄격한 외삽을 이용한 SF의 결과물은 대부분이 로마 클럽이 내린 결론과 비슷한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 자유의 점진적인 소멸과 모든 지상 생물의 멸종 사이 어딘가에.

이는 SF를 읽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도피적’이라고 묘사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캐물으면 그런 사람들은 ‘그 내용이 너무나 우울하기’ 때문에 SF를 읽지 않는다고 시인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논리적 극한에 이르게 되면 설사 암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울한 상태에 닿게 마련이다.

다행히, 외삽은 SF의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합리주의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의 상상력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변수야 말로 인생에서 양념과도 같은 것이다.

-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서문

나는 늑대여자 속의 소녀였다. 하지만 그렇게 충실히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인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회적 여성에 가까워지란 언제나 힘들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이성적인 태도, 논리적인 말하기, 때로는 자연스레 가면을 쓰는 법, 그리고 여성이 되는 법. 적어도 나는 행성도 식물도 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기동물 수용소로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곤충이 되어버릴까? 역시 두렵다.

 

4.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목표는 관찰과 답사로 제한되었다.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희망했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많은 걸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외에 우리 목표는 그저 가서 보는 것이었다. 단순한 야망이었고, 기본적으로는 겸손한 야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어슐러 k. 르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이처럼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약간 부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손주들이 이 비밀을 알게 된 걸 즐거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문센 씨가 알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될 일! 그는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다. 그나 가족 외부의 누군가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발자국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 어슐러 k. 르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어제의 나는, 종종 나는 곤충이다. 나는 식물이 되는 것보다 행성이 되는 것보다 곤충이 되는 것이 두렵다.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혁명을, 다른 세계를, 당연한 것들의 질서를 벗어날 상상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는 더 많은 상상으로 나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를 후회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우나였고, ‘옐초’호의 선원이었고, 타이코였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두 늙은 여자>의 내용을 곱씹는다. 다행이다. 두렵지만 살아가는 것, 하지만 곤충이 되지 않고, 식물도 행성도 되지 않은 채 단단하고 강인한, 그리고 따뜻한 여성으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수이자 최선의 싸움일 수 있을까? 누구도 여기에 상처받진 않을 것이다. 아마 모욕과 폭력은 나를 향해 올 것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아주 작다. 삶이다. 영화 속의 안토니아처럼. 우리는 삶을 통해서, 함께 살아감을 통해서, 태도를 통해서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돌아갈 것이고, 돌아갈 곳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