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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바깥은 여름/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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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부제 : 해도해도 너무했음

부부제 : 바깥은 여름을 읽고

정주


 소중한 것을 잃는 게 마음이 아플까.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잃는 게 더 마음이 아플까. 아님 누군가가 나의 소중함을 잃는 게 더 마음이 아플까. 음. 


내 할아버지는 지금 요양병원에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그렇듯 몸이 고장 나서. 요양원에 처음 들어가시고 며칠 동안 난리도 아니었단다. 집으로 가겠다며, 자기 부인에게 가겠다며. 직원 분들을 때리고 고함치고 아주 생 난리를 쳤단다. 두려움과 당황 이었겠지. 처음 요양원에 할아버지를 뵈러 간 날, 할아버지는 내게 2만원을 두고 가라 하셨다. 택시비든 비상금이든 아무튼 돈이 있으면 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몸이 고장 난 두려움과, 할머니의 부재라는 당황 속에 내게 건네던 그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좋은 할아버지였다. 5살 때 달력 뒷장에 그림을 곧잘 그리던 손주생각에 15살까지 나는 달력과 펜을 명절 때 마다 선물로 받았다. 손주 얼굴 볼 때마다 천 원짜리 한 장에 동전을 40개씩 주는 한이 있어도 항상 꾸역꾸역 5천원을 채워 용돈을 주셨다. 할머니에게 욕 한바가지 먹어가며 동네 온 고물 장난감을 다 끌어다 모아 집안 한 곳에 전시 해 두던 것도 나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의 표정으로 내게 2만원을 달라 하셨다. 좋은 할아버지가 지을만한 표정으로. 집에. 할머니에게 가겠다며. 이미 어딘가 고장 나버린 할머니에게 가겠다며. 자신이 고장 낸 아들의 자식에게.


할아버지는 목수셨다. 낮에 무언가 만들고 고치면, 밤에 집에 들어와 집구석의 모든 걸 고장 내셨다. 그릇부터 상, 옷장, 의자부터 할머니, 아빠, 고모까지. 집이라는 삶과 가족이라는 삶을 그렇게 고장 내고 다음날 가족들이 깨기 전에 새벽부터 집에서 사라지셨다. 와중에도 자신과 고모는 털 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고 언젠가 아빠가 얘기 해줬다. “밖에 뭐 깨지는 소리에 엄마 비명 소리에, 새벽 내내 고모 붙잡고 울다가 일어나서 방 밖 나와보면 뭐 벽장부터 시작해가지고 온 집안이 풍비박살 나있는 거야. 창문으로 깨진 물건 다 밖으로 던지는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아빠는 평생 할아버지를 미워했다. 증오했고 원망했다. 20년 전 대학생 때 아빠가 울면서 엄마를 찾아간 날은 살면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저항했던 날이었다. 깨진 소주병을 들고. 자신을 고장 낸 삶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소리쳤다. 빼앗기기 싫은 자신의 삶을 처음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지켜냈다. 할아버지는 그 때 이후로 술을 끊으셨고, 더 이상 아무것도 고장 나지 않았다. 이미 고장 나버린 삶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던 아빠였어. 그렇게 울면서 나한테 온 날도, 지금 너처럼 얘기했어. 사람이 작아 보이더라. 참 간사하고, 비굴하고. 허무하고 슬프더라. 지금 자기 스스로도 엄청 괴로울 거야. 평생을 원망하던 삶을 방금 마주했으니까.”


내가 마주한 삶도 참 간사하고, 비굴했다. 이제 더 이상 무력함은 없지만, 무언가 몇 가지가 더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소중했던. 무언가 없을까 세고 있기엔, 나도 어딘가 고장 나있었다. 


 예전엔 아빠가 정말 좋았던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좋아했던 아빠의 모습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에게 소중했던 아빠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소중했던 것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 있는데. 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것. 바깥은 여름에서 누군가는 언어를, 애인을, 반려동물을, 자식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뭔가를 ‘잃었다’라는 감각이 단순히 무언가 형태를 잃거나 내 시야에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흠. 소중한 사람의 소중함을 잃는 것? 그건 단순히 나와 소중한 사람의 둘만의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묻지 못했던 그 사람 너머의 일들과, 그 사람이 묻지 못했던 내 너머의 일들이 있었겠지. 말로 정리 못 하겠는 건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하다. 
어릴 때 죽어 떠난 반려묘, 멀어진 사람들, 아빠. 내겐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돌이킬 수 없었던 것들. 내 삶과 마주잡은 손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 아직 거기에 존재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것들도.
당신의 안부, 우리의 예전 같은 모습, 당신과 나눴던 삶의 고장. 음. 아직은 아빠를 잃었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어딘가 돌이킬 수 없고, 당신의 예전은 이제 내게 없다.


사람은 상처로 성장한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 말은 상처 뒤엔 항상 성장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위안을 주듯. 무언가 사라지고 누군가를 잃어도 네게는 아직 이 만큼이 남아있다. 잃은 만큼 생겨날 것이다. 성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아직 좀 아프다
나도, 누군가도. 어제 무언가 잃었을 것이고, 오늘도 무언가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내일 무언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아프고, 상처를 얻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은 상처를 통해 무언가 얻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잃은 대신 얻는 건 고작 상처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를 알고 느낀 점이다.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 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상처는 그대로 상처로 남아있다. 나를 성장 시켰던 건 대부분 다정한 사람들 덕이었다. 겨울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따뜻함을 주었던 여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여름이 되지 않는다. 하얀 눈이 흩날리는 겨울이 얼마나 크고 장대하던, 구 바깥은 언제나 여름일 것이다. 겨울은 겨울의 자리에, 여름은 여름의 자리에. 그 시차의 존재로 나는 오늘도 많이 아프지만,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 잃어도 괜찮을 수 있다. 잃어도 괜찮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잃고 나니 소중했던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게 작지 않았던 것들이다. 잃을 것을 각오하고 잃은 것도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들. 내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그 결과는 오롯이 내 것이지만, 나는 이미 늦었어도, 누군가는 손에 꼭 쥐고 있길 바라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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