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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읽고 쓰고 이야기하는 춤추는 이교도들 201809~

20181026 바르다 김선생 (혁명하는 여자들/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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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 김선생

부제 : 당근이 너무 많아서 별로 맛은 없음.

부부제 : 혁명하는 여자들을 읽고

정주

 

바를 정(正)에 두루 주(周). 바른 것을 두루두루 널리 알려야 한다는 건지, 항상 바른 것들을 내 주위에 두루 두어야 한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처음 내 이름에 대한 이 풀이를 들었을 때, 둘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자기 이름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름 풀이를 들었을 때도 크게 내 삶에 의미부여를 하진 않았다. 누가 그러겠냐만은. 만약 내 이름이 빼어날 ‘정’에 술 ‘주’자였으며, 이름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술에 빼어난 사람이 되려 했다면, 아마 내 얼굴은 언젠가 한 번쯤 터졌을 것이고, 간은 남아나질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를 평생 원망했겠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도 이름대로 바르게 살아 왔습니다. 말해놓고 재수없지만 어쨌든 열여섯까지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바른사람. 모나지 않고, 잘 순응하고, 잘 하고 뭐 그 정도의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내게 바른사람 이라는 건. 유치원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넌 학교에 가면 정말 잘 할거라고. 선생님 말 잘 듣고 정말 잘 다닐거라고. 그래서 학교 안 다녔으면 좋겠다고. 이제 와서야 이해되는 말이었다. 착한아이 콤플렉스.

 

사실 모두가 아는 비밀이지만, 그 뻔한 비밀 한 가지를 얘기해 보자면 바른 아이도 삐딱한 상상을 해본다. 예를 들면 다니던 중학교에 가서 가장 꼰대였던 선생을 발로 차버리는 상상. 대들고, 죽이고, 도망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상들. 가끔 나는 상상이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 성당에 있다. 그 사람은 울며 얘기한다. “하느님, 계시다면 시발 그새끼 좀 죽여주세요….” 라고. 하지만 신은 이미 그 일을 행하셨다. 바로 상상으로. 그 사람은 상상속에서 그새끼를 한 오조오억번은 죽였을 것이다. 죽이지 못하면 때렸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치워버렸거나. 아무튼.

상상은 금기와 친하다.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금기이던 간에 아무튼 내가 못하는 걸 상상께서는 들어주시니까. (이쯤되면 신과 악마는 절친이라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얘기를 왜 했냐면은. 음 그러니까. 내가 했던 잔인한 상상들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나를 옭아매고 있던 금기들과 연관이 있었고, 내가 생각했을 때 나는 바른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누군가 내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상을 할 수가 있어?”라고 말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르다 라는 건 뭘까. 사실 바르다 라는 건 특정한 기준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바르다고 생각해도, 지나가던 어떤 어른이 “저 새끼는 왜 이렇게 삐딱해”라고 하면 난 삐딱한 사람이 되는 거였다. 이게 뭔 개소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지금 좀 피곤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어떤 편파적인 기준에 맞춰야 하니깐. 그렇기 때문에 상상해본다. 부시고, 도망치고, 소리치며, 느리고, 날아가는 상상을. 바른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하는 상상들. 이렇게 상상해보다가는, 언젠가 현실이 되고, 그럼 난 바른사람이 아니게 되겠지. 너무 괜찮은데? 하는 상상들. 이쯤되면 대충 나온다. 세상이 원하는 어떤 상이 있고, 그 상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하는 상상들이 있다.

 상상은 그저 들어주는 것. 내 말을 들어주는 것. 나 이렇게 살기 싫어요. 내 삶이 이렇게 바뀌면 어떨까요. 여기서 더 끔찍한 삶이었다면 이랬을까요? 그저 들어준다. 때로는 상상에게 내가 했던 얘기들을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다. 어떤 상상은 너무 발칙해서 “아니 감히 어떻게 저런 생각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겠다. 그 상상이, 누군가를 옭아매는 금기와 관련이 있다면, 계속 상상했으면 좋겠다. 계속 상상하자! 문을 열고 이름도 모를 남자들을 죽이는 상상. 식물이 되는 상상. 젖가슴을 남편에게 주는 상상. 상상은 상상을 낳고, 그 상상은 또 상상을 낳을 것이다. 상상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상상정도는 있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바른 것부터 벗어나 보자. 내 작은 세상부터 바꿔보자. 난 오늘 내가 일하는 마트 점장의 머리에 꿀밤을 놔주었다. 물론 상상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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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나는 두렵다, 혁명도 상상도 언제나 두렵다 (혁명하는 여자들/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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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렵다, 혁명도 상상도 언제나 두렵다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아작 / 20181026 / 쩡열

1.

혁명하는 여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두렵다. 혁명은 언제나 두려웠고, 혁명을 상상하는 것 역시 두려웠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뒤집히는 것. 그것이 혁명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혁명 이후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지금의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대체 무엇이 바뀌게 될지, 바뀐다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될지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견고하고 높은 벽처럼 느껴지기에 이것을 허무는 그 행위가 두렵다. 우린 과연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저것들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애초에 저 벽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은 한치의 두려움과 걱정 없이 팔짱을 낀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애들 써보든지 하하’ 이런 마음가짐을 한 채.

SF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르귄의 말에 따르면 이것들은 예언이 아닌 묘사다. 우리가 읽은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의 묘사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재이다. 각 단편이 쓰인 시기를 살펴보면 세상은 변했고, 페미니즘의 이야기도 변해왔지만, 또한 같다. 67년에도 순종하는 착한 여성으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의문을 느낀다. 그리고 91년에도 그 이야기를 반복한다. 물론 남성에 대한 복수와 일탈을 포함하지만, 그녀들의 삶의 조건은 정말 변해왔을까? 나의 삶은 또 달라졌을까?

 

2. 

“내 말하건대 조,” 그가 문틀에 기댔다. “그렇게 다르진 않았어. 지금보단 좀 덜 각박하고, 어쩌면 더 조용했달까, 지금처럼 야비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아주 다르진 않았어. 언제나 남자들이 모든 걸 관리했지. 가끔은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모든 실제적인 권력은 남자들이 가지고 가끔 약간의 권력을 여자들에게 내주는 거였어, 그게 다야. 지금 우리는 더는 그럴 필요도 없지만.

- 파멜라 사전트, <공포> 

 

나는 한 남자의 선물인 내 작은 자유를 애지중지하며 내 집에, 내 감옥 안에 앉아 있다. 나같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자유는 언제나 그런 것이었고, 나는 과연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 다시금 의아해졌다.

- 파멜라 사전트, <공포> 

싸워온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간혹 이런 막막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는 묘사하고 은유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것은 나의 역할이 아니다. 나는 실천해야 하는 존재다. 내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라며, 우리들이 조금 덜 불행하길 바라며 실천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리 이렇게 살자고. 그것은 늘 나를 두렵게 한다. 상상은 힘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말할 때의 상상력은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고, 당연한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사유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는 늘 두려웠다. 나에겐 상상력이 없어서, 그 상상의 힘을 내가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내가 좋아하는 김중혁처럼, 박민규처럼, 커트 보네거트처럼 농담을 할 대범함 역시 없다. 그렇기에 저 이야기들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읽히기보다는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저 책에 나오는 그 사람이기에 두려운 것일까.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3.

사람들은 흔히 SF하면 외삽을 하는 소설이라 설명하고 심지어 그렇게 정의하기까지 한다. SF 소설가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경향이나 현상을 취해 극적 효과를 위해 그것들을 정제하고 강화시킨 다음 미래로 확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와 같은 예언이 나온다.그리고 그 방법과 결과는 과학자들이 소량의 식품첨가제를 오랫동안 먹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예측하기 위해 정제되고 농축된 식품 첨가제를 쥐들에게 대량으로 복용시키는 방법과, 또 그로부터 얻은 결과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결과는 거의 필연적으로 암으로 발전하는 듯하다. 외삽의 결과도 그러하다. 엄격한 외삽을 이용한 SF의 결과물은 대부분이 로마 클럽이 내린 결론과 비슷한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 자유의 점진적인 소멸과 모든 지상 생물의 멸종 사이 어딘가에.

이는 SF를 읽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것을 ‘도피적’이라고 묘사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캐물으면 그런 사람들은 ‘그 내용이 너무나 우울하기’ 때문에 SF를 읽지 않는다고 시인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논리적 극한에 이르게 되면 설사 암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우울한 상태에 닿게 마련이다.

다행히, 외삽은 SF의 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합리주의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의 상상력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변수야 말로 인생에서 양념과도 같은 것이다.

- 어슐러 k 르귄, ⟪어둠의 왼손⟫ 서문

나는 늑대여자 속의 소녀였다. 하지만 그렇게 충실히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인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회적 여성에 가까워지란 언제나 힘들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이성적인 태도, 논리적인 말하기, 때로는 자연스레 가면을 쓰는 법, 그리고 여성이 되는 법. 적어도 나는 행성도 식물도 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기동물 수용소로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곤충이 되어버릴까? 역시 두렵다.

 

4.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목표는 관찰과 답사로 제한되었다. 우리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희망했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많은 걸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외에 우리 목표는 그저 가서 보는 것이었다. 단순한 야망이었고, 기본적으로는 겸손한 야망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어슐러 k. 르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이처럼 정신 나간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약간 부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손주들이 이 비밀을 알게 된 걸 즐거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문센 씨가 알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될 일! 그는 끔찍스럽게 당황하고 실망할 것이다. 그나 가족 외부의 누군가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발자국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 어슐러 k. 르귄, <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어제의 나는, 종종 나는 곤충이다. 나는 식물이 되는 것보다 행성이 되는 것보다 곤충이 되는 것이 두렵다.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혁명을, 다른 세계를, 당연한 것들의 질서를 벗어날 상상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는 더 많은 상상으로 나를 돌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제를 후회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우나였고, ‘옐초’호의 선원이었고, 타이코였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두 늙은 여자>의 내용을 곱씹는다. 다행이다. 두렵지만 살아가는 것, 하지만 곤충이 되지 않고, 식물도 행성도 되지 않은 채 단단하고 강인한, 그리고 따뜻한 여성으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수이자 최선의 싸움일 수 있을까? 누구도 여기에 상처받진 않을 것이다. 아마 모욕과 폭력은 나를 향해 올 것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아주 작다. 삶이다. 영화 속의 안토니아처럼. 우리는 삶을 통해서, 함께 살아감을 통해서, 태도를 통해서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돌아갈 것이고, 돌아갈 곳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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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뜨거운 피는 쓸 게 없다 (뜨거운 피, 어둠의 왼손/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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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는 쓸 게 없다.

부제 : 그래서 어둠의 왼손 씀

부부제 : 사실 책 내용도 별로 없음

정주

언제는 엄마가 갑자기 내게 피아노를 배워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왜냐고 물으니까 마치 부모님께 깜짝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어린아이의 얼굴로 내게 아이패드를 보여줬다. 어린아이의 뻔한 서프라이즈를 본 어른처럼 놀라는 시늉과 적절한 리액션을 했다. “정주야. 이거 피아노 가르쳐주는 앱인데 아까부터 해보니까 너무 재밌더라!! 진짜 생초보도 곧 노래를 칠 수 있을 것 같아! 나 때는 도.래.도.래 이거부터 시작했는데! 얼마나 지루했는데 요새는 이런게 잘 나온다. 키보드만 있으면 독학으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그 자리에서 몇 번 쳐보았다. ‘오 이거 괜찮네’ 정도였지 사실 신기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요새는 이런 걸 자주 접할 수 있으니까. 
엄마는 ‘나 때는’ 이란 말을 자주 쓴다. 우리 엄마가 꼰대라는 소린 아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현재를 인정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자신과 현재와의 간격이 놀라운 사람일 것이다. 자주 무서운 세상이라고도 말했고, 놀라운 세상이라고도 말했다. 가장 크게 페미니즘이 그랬다. 언제 한 번 또 오해영을 보며 엄마랑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에릭이 서현진의 양 손목을 잡아놓고 강제로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으며, 난 그걸 데이트폭력이라, 엄마는 사랑이라 말했다. 
엄마가 폭력이라 인정을 하게 된 건 몇 달 후의 일이다. 엄마가 어떤 성교육 강의에 갔는데 또 오해영에 대해 나와 했던 대화로 질문을 했고 이런 대답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질문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키스해도 돼? 손 잡아도 돼? 같은.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가 그 장면을 로맨스라고 얘기해왔고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그 말도 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아무튼 엄마가 그 얘길 하며 내게 인정했다. 사실 엄마가 더 충격 받았던 건 아마 ‘예전에는’과 ‘요즘은’의 간격일 것이다. 

작년과 올해는 많은 게 다를 것이다. 사회도, 패션도, 나도, 엄마도. 그리고 어쩌다 변한 것도 아닐 것이다. 맞다. 어쩌다 이렇게 된 세상은 아닐 것이다. 또 오해영, 엄마가 보던 어떤 웹툰에 달린 댓글들, 미투운동 등의 현재를 보며 엄마는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알던 세상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그 과정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충돌하고, 받아들이고. 어둠의 왼손에 겐리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좀 더 충돌하며 살아야겠다.

어둠의 왼손은 어렵고 어둡고 심오한 책이었다. 생각은 많이 하게 되지만 정작 어디부터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모르겠는 책. 음. 바깥은 여름은 매우매우 직관적인 책이었구나. 한다라 교인들을 만나보고 싶고, 그 중에서도 파세를 꼭 보고싶다.

 

“알려지지 않은 것, 예견되지 않은 것, 증명되지 않은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것 위에 서 있습니다. 무지는 사고의 기반입니다. 입증되지 않은 것은 행동의 기반입니다.
만약 신이 없다고 증명된다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한다라도 없고, 요메시도 없고, 화로신들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신이 있다고 증명되면 신이 있어도 종교는 없게 됩니다.
말해주십시오, 겐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무엇이 확실하며 무엇이 예견 가능하고 무엇을 피할 수 없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제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히는 불확실성, 다음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입니다.”

 

오늘도 마트에서 어떤 직원분이 꿈이 무어냐, 관련된 공부는 하고 있느냐 물었다. 대답하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냥 산다! 의미 없는 삶도 삶이며, 꿈이 없는 나도 나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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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4 메모 (어둠의 왼손, 뜨거운 피/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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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4/뜨거운 피, 김언수, 문학동네/쩡열

진도가 안 나간다. 허영과 거짓이 아닌, 정교한 인공물이 아닌, 날 것의 이야기 속에서 뜨거운 피를 지닌 것은 남성의 삶이고, 그 남성 화자의 세상 속 배치되어 있는 여성은 그저 대상일 수밖에 없나. 밑바닥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삶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좆과 창녀로만 가득한 말들. 창녀가 아닌 채로는 등장하지조차 않는 여성. 여성의 밑바닥 삶은 어디에 있나. 밑바닥을 묘사하기 위해 그려지는 처절하고 불쌍한 여자들의 모습, 닳고 닳은 여자들의 모습. 여자는 이렇게 사용되는 걸까. 그녀들의 서사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남자 작가가 할 일이 아닌 걸까.

 

181004/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귄, 최용준, 시공사/쩡열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상대적 지위에 대한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질문들은 점차 흥미로워졌다. ‘노동 분담’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오직 일부 노동자만 급료를 받는가? 왜 종교, 정부, 군대, 대학과 같은. 커다란 기관들은 남성에 의해 세워지고 지배되는가? 우리 성에 따른 결과라고 여겨지는 행동들 가운데 사실은 우리 사회가 우리 성에 기대하는 결과로 인한 것은 얼마나 되는가? 등등. 흥미로운 질문들이었다. 나는 흥미가 일었다. 나는 그 질문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내 정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생각의 형태, 즉 이야기를 통해 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성이 없거나 또는 양성을 가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고 실험을 쓴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래서 나는 그런 사실들을 알아보기 위해 겐리 아이와 함께 게센에 갔다.” - 40주년 기념판에 부쳐

 

 

1. 성별

양성의 세계에 산다는 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생각을 해봤다. 사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두가지의 성으로 구분하는 세계에 산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성별의 생물학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사람은 그저 사람일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어떤 사회에 어떤 역할로 구성원으로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규정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는 게센에서는 적어도 성별만큼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임신을 할 수도 있는 세상. 섹스를 통해 일어나는 임신이라는 상황이 내 몸에 일어날 지 상대의 몸에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누구나 임신을 할 수 있다.

이 사회가 양성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까?
내가 가진 성별 특성, 내가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는 여성적 태도는 뭘까?

차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적 논의들?

 

2.  국가

국가, 전쟁, 근대에 대한 르귄의 고민. 60년대 후반.
간접, 내성, 명예, 우아, 전통 - 카르히데 - 자본, 개인주의 사회?
직접, 솔직, 편리, 효율, 일종의 천박 - 오르고레인 - 공산, 전체주의, 독재, 통제적 사회
연맹. 연합. 중앙집권 - 에큐멘 - UN, EU - 네트워크, 

“덜 원시적인 사회일수록 더 못된 특징이 있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3. 전쟁

 

4. 예언, 삶의 의미, 직감

 

5. 질문의 힘

 

6. 성

케메르 억제제를 투여했을 때, 거세된 존재. 수동성으로 인식
성적 에너지와 성적 매력, 성적 존재로서 인정받을 때의 만족과 안정

친구란 무엇일까. 케메르일때만 함께 하는 존재, 애인과 친구의 거리, 

 

7. 바깥

민주주의, 존재하는 인물, 바깥의 인물, 바깥은 에큐멘일까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은 다름과 마주하는 것, 바깥과 마주하는 것

“저 혼자서는 여러분을, 여러분의 세계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뀔 수 있찌요. 혼자이기에, 저는 제 주장 을 펼침과 동시에 여러분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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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바깥은 여름/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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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부제 : 해도해도 너무했음

부부제 : 바깥은 여름을 읽고

정주


 소중한 것을 잃는 게 마음이 아플까. 소중한 것의 소중함을 잃는 게 더 마음이 아플까. 아님 누군가가 나의 소중함을 잃는 게 더 마음이 아플까. 음. 


내 할아버지는 지금 요양병원에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그렇듯 몸이 고장 나서. 요양원에 처음 들어가시고 며칠 동안 난리도 아니었단다. 집으로 가겠다며, 자기 부인에게 가겠다며. 직원 분들을 때리고 고함치고 아주 생 난리를 쳤단다. 두려움과 당황 이었겠지. 처음 요양원에 할아버지를 뵈러 간 날, 할아버지는 내게 2만원을 두고 가라 하셨다. 택시비든 비상금이든 아무튼 돈이 있으면 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몸이 고장 난 두려움과, 할머니의 부재라는 당황 속에 내게 건네던 그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좋은 할아버지였다. 5살 때 달력 뒷장에 그림을 곧잘 그리던 손주생각에 15살까지 나는 달력과 펜을 명절 때 마다 선물로 받았다. 손주 얼굴 볼 때마다 천 원짜리 한 장에 동전을 40개씩 주는 한이 있어도 항상 꾸역꾸역 5천원을 채워 용돈을 주셨다. 할머니에게 욕 한바가지 먹어가며 동네 온 고물 장난감을 다 끌어다 모아 집안 한 곳에 전시 해 두던 것도 나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의 표정으로 내게 2만원을 달라 하셨다. 좋은 할아버지가 지을만한 표정으로. 집에. 할머니에게 가겠다며. 이미 어딘가 고장 나버린 할머니에게 가겠다며. 자신이 고장 낸 아들의 자식에게.


할아버지는 목수셨다. 낮에 무언가 만들고 고치면, 밤에 집에 들어와 집구석의 모든 걸 고장 내셨다. 그릇부터 상, 옷장, 의자부터 할머니, 아빠, 고모까지. 집이라는 삶과 가족이라는 삶을 그렇게 고장 내고 다음날 가족들이 깨기 전에 새벽부터 집에서 사라지셨다. 와중에도 자신과 고모는 털 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고 언젠가 아빠가 얘기 해줬다. “밖에 뭐 깨지는 소리에 엄마 비명 소리에, 새벽 내내 고모 붙잡고 울다가 일어나서 방 밖 나와보면 뭐 벽장부터 시작해가지고 온 집안이 풍비박살 나있는 거야. 창문으로 깨진 물건 다 밖으로 던지는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아빠는 평생 할아버지를 미워했다. 증오했고 원망했다. 20년 전 대학생 때 아빠가 울면서 엄마를 찾아간 날은 살면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저항했던 날이었다. 깨진 소주병을 들고. 자신을 고장 낸 삶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소리쳤다. 빼앗기기 싫은 자신의 삶을 처음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지켜냈다. 할아버지는 그 때 이후로 술을 끊으셨고, 더 이상 아무것도 고장 나지 않았다. 이미 고장 나버린 삶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던 아빠였어. 그렇게 울면서 나한테 온 날도, 지금 너처럼 얘기했어. 사람이 작아 보이더라. 참 간사하고, 비굴하고. 허무하고 슬프더라. 지금 자기 스스로도 엄청 괴로울 거야. 평생을 원망하던 삶을 방금 마주했으니까.”


내가 마주한 삶도 참 간사하고, 비굴했다. 이제 더 이상 무력함은 없지만, 무언가 몇 가지가 더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소중했던. 무언가 없을까 세고 있기엔, 나도 어딘가 고장 나있었다. 


 예전엔 아빠가 정말 좋았던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좋아했던 아빠의 모습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나에게 소중했던 아빠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소중했던 것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 있는데. 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것. 바깥은 여름에서 누군가는 언어를, 애인을, 반려동물을, 자식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뭔가를 ‘잃었다’라는 감각이 단순히 무언가 형태를 잃거나 내 시야에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흠. 소중한 사람의 소중함을 잃는 것? 그건 단순히 나와 소중한 사람의 둘만의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묻지 못했던 그 사람 너머의 일들과, 그 사람이 묻지 못했던 내 너머의 일들이 있었겠지. 말로 정리 못 하겠는 건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하다. 
어릴 때 죽어 떠난 반려묘, 멀어진 사람들, 아빠. 내겐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다. 돌이킬 수 없었던 것들. 내 삶과 마주잡은 손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 아직 거기에 존재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은 것들도.
당신의 안부, 우리의 예전 같은 모습, 당신과 나눴던 삶의 고장. 음. 아직은 아빠를 잃었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어딘가 돌이킬 수 없고, 당신의 예전은 이제 내게 없다.


사람은 상처로 성장한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 말은 상처 뒤엔 항상 성장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위안을 주듯. 무언가 사라지고 누군가를 잃어도 네게는 아직 이 만큼이 남아있다. 잃은 만큼 생겨날 것이다. 성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아직 좀 아프다
나도, 누군가도. 어제 무언가 잃었을 것이고, 오늘도 무언가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내일 무언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아프고, 상처를 얻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은 상처를 통해 무언가 얻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잃은 대신 얻는 건 고작 상처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를 알고 느낀 점이다.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 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상처는 그대로 상처로 남아있다. 나를 성장 시켰던 건 대부분 다정한 사람들 덕이었다. 겨울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따뜻함을 주었던 여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여름이 되지 않는다. 하얀 눈이 흩날리는 겨울이 얼마나 크고 장대하던, 구 바깥은 언제나 여름일 것이다. 겨울은 겨울의 자리에, 여름은 여름의 자리에. 그 시차의 존재로 나는 오늘도 많이 아프지만,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 잃어도 괜찮을 수 있다. 잃어도 괜찮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잃고 나니 소중했던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게 작지 않았던 것들이다. 잃을 것을 각오하고 잃은 것도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들. 내가 원했던 원치 않았던 그 결과는 오롯이 내 것이지만, 나는 이미 늦었어도, 누군가는 손에 꼭 쥐고 있길 바라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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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지나치지 못하는 시간 (바깥은 여름/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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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지 못하는 시간

<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 20180929 / 쩡열

 
 

처음 펼치자마자 시작된 입동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아,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일, 없던 것처럼 사라질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실 그게 무슨 일이라고 해도 그 전과 후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다. 우리는 변하는 시간 속에 사니까.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 돌이킬 수는 없고, 그 일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일이라는 걸 믿었다. 아무리 힘들고 끔찍한 일이라도 이제 그 일을 돌아본다는 건 적어도 지나오긴 했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니까, 끝난 일이라는 것이니까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의 경험이 모두 단단한 기억이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모든 기억을 다 붙들고 살 수는 없는 거니까. 하지만 모든 일이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일도 있다. 내 몸에 마음에 단단히 자리잡는 그런 일. 이전의 내가 가진 중요한 것을 가져가고, 다른 것을 남겨놓는 그런 일. 그건 변화일 수도, 파괴일 수도 있다.

 

뒤늦게야 세월호의 고민이 건너왔다.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되뇌어왔다. 잊어서는 안 되는 재난이었기에 그랬고, 이젠 좀 잊으라고 하는 말들이 많아서 그랬었다. 그런 거였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아침 뉴스를 본 고모의 전화를 받고 시작됐던 내 하루, 내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안전을 말하는 뉴스를 확인하고 웃고 떠들었던 그 하루. 돌이켜보면 부끄럽다. 안산에 사는 가족과 친구를 걱정한 뒤 나는 안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기억하지만 지나올 수 있었다. 그랬는데 올 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시간을 지나왔지만, 그 일이 내 안에선 새겨져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 이건 이미 내 안에 단단히 흉이 져버린 생채기 같은 일인 것만 같았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내 안의 뭔가를 잃었고, 뭔가가 생겨났다. 내 안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그럼 내가 잃어버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하게는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안전에 대한 공포’를 얻었다. 늘 그렇다고 스스로를 이해했는데 4년이 지난 지금, 그것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변화는 나에게만 있지 않았다.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어떤 변화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고, ’용서’하지 못했고, ‘용서’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돌아볼 수 없는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동정범을 떠올렸다. 끝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끝난 일인데 나에게는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의 시간을 정리해온 건 아닐까. 그 정리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돌아볼 수 없는 일이 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성폭력의 경험을 수면 위로 꺼낸 여성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 시간을 묻어뒀는데 떠오르고 나니 지나온 적이 없다고. 
그 일을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건 이해하지 못 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거라고 했다.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일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기억하지만 또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받아들일 근거가 나에게, 이 상황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면, 누구도 나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갈지 알려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시간에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무력하게 받아들인 채 덮어두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잊혀지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지나가야만 산다. 그 누구도 스노우볼안에서 영원한 겨울을 살도록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혹은 살아가고 있으니까. 멈춰선 채로 흐르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이 그저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버린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나도 두려웠다. 내 시간이 멈춰선 채로 내 몸이 멈춰선 채로 시간이 흘러갔고, 사람들이 변해갔다. 손을 쥐었다 펼쳤을 때 텅 빈 손을 바라보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런 슬픈 시간을 누군가에게 보내도록 하는 건 가혹하지 않을까. 
우리가 겪으며 살아가는 일들을 잘 받아들이고 지나쳐보낼 수 있는 건, 결국 많은 이야기일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설명하고 생각하고 이해했을 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또한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그저 멍하게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는 대신, 더 많은 말들이 나의 발을 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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