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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설레어 기다리던 그 추석

 

우리 어릴 적 동네 추석은 그네를 매기 위한 새끼 꼬기로 시작된다. 한 달 전 혹은 2-3주 전부터 기다려 오던 추석이 2-3일 뒤로 바짝 다가오면 초등학교 높은 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볏짚을 걷는다. 양력으로 쳐 추석이 늦어 일부 가을걷이를 한 경우는 새 볏짚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작년 볏짚을 걷는다. 우리 집같이 농사가 적은 경우는 볏짚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볏짚을 걷으면 동네 아이들은 어느 집 마당 한 귀퉁이를 차지해 밤 새 새끼를 꼰다. 하루 저녁이면 충분했는지 아니면 2-3일 걸렸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3-40년 전 불이 밝을 리가 없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새끼를 꼬면 보름달이 채 되지 못한 달이 둥실 떠올라 우리를 비쳐주었던 것 같다.

새끼를 다 꼬면 동네 안산에 수평으로 쫙 뻗은 가지가 있는 튼튼한 소나무를 찾아 그네를 맨다. 그 소나무 앞은 그네를 탈 때 거칠 것이 없어야 한다. 우리 동네 안산 초입에는 그네를 매기에 적당한 소나무가 있어서 대개 그 나무에 그네를 맸다. 간혹 조무래기들만의 ‘2부 리그’를 위한 그네를 매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차례를 끝내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네를 탄다. 아주머니들, 청년들, 그리고 아이들(우리 동네는 집성촌이어서 대부분이 가깝거나 먼 친척들이었다.)이 그네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네를 탄다. 대개 남자어른들은 그네를 타러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점잔을 빼느라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동네 남자어른들 중에는 점잔을 빼면서 양반 상놈, 남존여비 등을 따지는 봉건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동네 아저씨 중에 지금은 돌아가신 관신 아저씨라는 분이 있다. 이 아저씨가 마을 회관에서 다른 동네아저씨들과 모여 쉬고 계셨는데 어디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나자, 긴 담뱃대를 물고 일어서서는 “어느 지저분한 집구석에서 불이 났다 하느냐”라고 했다는데, 정작 불이 난 집은 관신 아저씨 집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머니를 비롯해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자주 들었는데 이런 점잔빼는 남자어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소였던 셈이다. 이런 분들이 아낙들과 조무래기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이들과 함께 그네를 탈 리 만무다.

그네가 길고 무거웠고, 그네가 놓인 곳이 산이라 아무래도 비탈이 져 있어 그네를 탈 때는 그네 양 옆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발을 채 올리기 전에 그네가 앞으로 나가버리려 해 불안하게 그네에 올라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그네를 탈 때면 무섬증이 이는데 이럴 때면 더구나 그네 밑이 휑하니 뚫려 시원한 느낌이 들다 못해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그래도 용기를 내 서 너 번 구르면 그네는 그야말로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동네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무래도 가장 신기했던 것은 아주머니들이 그네를 타는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조용하게 일만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까르르대거나 박장대소를 하면서 시끌시끌하게 노시는 모습도 신기한 모습이려니와, 그네를 타면서 치마를 펄럭이는 모습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평소 시어머니의 시선과 가부장의 권위에 짓눌려 있다가 이날만은 해방의 날이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웃어 제치고 큰 동작으로 그네를 구르는 모습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가끔 저게 우리 어머니와 큰 어머니, 그리고 사촌 누나의 모습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청년들 아이들도 한데 어울려 그네를 타다 좀 지치면 아이들은 집으로 들어와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한 맛난 음식들, 송편과 호박떡, 세대와 가오리, 각종 부침이나 전 등을 주섬주섬 먹고는 다시 동네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 각종 놀이를 하거나, 구슬치기도 하고, 껌도 사서 씹고, 풍선도 뽑아서 불었다. 풍선은 대개 뽑기로 사는데, 종이판 위에는 큰 풍선, 작은 풍선, 중간 것이 번호를 달고 걸려 있고, 종이판 사분의 일 정도 자리를 차지하는 밑에는 안쪽으로 번호가 적혀있는 동그란 번호표가 있어 선택해 떼어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재수가 좋으면 커다란 풍선이 걸리고, 운이 없으면 작은 풍선이 걸린다. 꽝은 없었고 아무리 못해도 작은 풍선을 차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커다란 풍선이 걸리면 왜 그리도 기분이 좋았는지! 그야말로 ‘기분이 째졌다’. 사실 나는 이 풍선 뽑기도 매 추석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혹 가야 한번씩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이야 무슨 행사 있으면 공짜로 나눠주는 게 풍선인데...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내가 어렸을 때 어쩌다 가질 수 있었던 풍선을 가지고 놀면서 느꼈던 ‘째지는 기분’을 알 수 있을까 모르겠다.

추석날 저녁에는 매년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콩쿠르 대회’, 즉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다. 마을 노래자랑 대회치곤 이름이 너무 거창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참여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긴장이나 설레임으로 보면 오늘날 열리는 여느 세계적인 음악 경연대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근 동네 노래 잘하는 처녀 총각들이 다 모여들었다. 대회준비와 심사위원은 대개 동네 청년들이 맡았는데, 개중에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 돈벌러 갔다가 추석을 맞이하여 귀향한 청년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어 성공을 했든 안했든 일정한 기부를 해야 했다. 콩쿠르 대회는 입장료를 받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노래가 허공으로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흰 천막을 치고 진행했다. 그리고 바닥엔 멍석을 깔았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노래들이 있다. “이리이 가알까 저어리 가알까 차라리 돌아가알까 세 갈래기일 삼거리에 비가아아 내리이인다”(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 “해다앙화 피고 지이는 섬마으으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가악 서언새에에엥님 열아홉살 섬새액시가 순정을 바쳐 사아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우울엘라앙 가지를 마오 가지이르을 마오”(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아면 쓰으으라린 이별마안은 없었을 거어엇을”(남진의 ‘가슴 아프게’),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배호의 ‘안개낀 장충단 공원’) 등등. 내가 기억하는 콩쿠르대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단연 김상진의 ‘이정표 없는 거리’였다. “차라리 돌아갈까” 할 때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꺾는 창법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아마 그 해 연말에 가수왕 정도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콩쿠르대회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에피소드가 있다. 아마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직전 내 나이 일곱 살 나던 해,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약  삼년 전 해가 아닌가 싶다. 우리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이 모이는 곳마다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에게 노래를 시키셨다. “아, 이 놈이 이번 콩쿠르대회에 나간단 말이오” 하시면서. 나는 내가 추석 콩쿠르대회 무대에 선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버지 말씀이 “니 형이 서울에서 내려와 대회 준비를 하고 있으니 넌 참가비 안내도 돼. 노래만 잘 하면 돼”라고 하시니 믿을 수밖에. 아무튼 나는 동네어른들을 돌아다니면서 실컷 연습을 하고, 추석저녁에 콩쿠르대회에서 무대에 서기 위해 동네 조무래기들과 같이 멍석위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내가 노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같이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잠결에 ‘박하순’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도 “하순아, 니 부른다. 나가”라며 등을 떠밀지 않는가. 후다닥 무대위로 뛰어올라 갔다. 그런데 조금 높이 설치된 마이크를 간신히 잡으려는 순간, 저 뒤쪽에서 어떤 ‘처녀’가 천천히 무대를 향해 오고 있지 않은가. 퍼뜩 ‘아, 내가 아닌갑다’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댔다. 올라오던 처녀가 당연히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아! 야속한 아버지. 그 뒤 기억은 정확히 없다. 아버지에게 왜 거짓말을 하셨냐고 내가 따지고 들었는지, 그리고 아버지께서 어떤 변명을 하셨는지도. 이 장면이 내게 남은 가장 강렬한 아버지 모습이다. 가난한 종손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셔서 머슴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일만 하시다 조카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자신은 늦게야 결혼을 하시고도, 한량거리고 돌아다니신 큰아버지들을 대신해 집안 대소사를 챙기셨던 아버지, 집안 전체가 지원을 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조카가 고향에 오면 대처소식에 목말라 밤새 조카의 서울이야기를 들으셨다는 아버지, 좀 오래 사셔서 내가 어떤 청년과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좀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추석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추석이 어서 오길 손꼽아 기다린 것, 바로 그 자체다. 읍내 장에 간 어머니가 혹 사탕이라도 사오실까 하고 동네 입구에서 쪼그리고 기다리던 모양새로 몇날 며칠을 기다렸던 것 같다. 배고픈 시절이어서 평소에는 먹어보지 못한 맛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신기한 풍선과 껌들을 불거나 씹을 수 있어서였을까. 이것들도 작은 이유에 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추석을 전후해 동네에 스며드는 축제분위기가 어린 마음들을 그렇게 들뜨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당시만 해도 농촌이 붕괴되기 전이어서 마을에 사람들도 많았고, 연령대도 어린아이에서부터 청장년 노인들까지 고르게 분포해 있었다. 어린애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고, 학교에 다닐 아이들이 없어지면서 폐교가 느는 오늘의 농촌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풍성한 시절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추석 같은 큰 축제 때 각종 연희와 놀이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이 마을회관에는 고루 다 갖추어 있었다. 무엇보다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심적 시간적 여유들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우리 동네는 한 집 당 농사면적 등으로 보건대 상당히 가난한 동네에 속한 것을 알 수 있었고, 우리 집은 특히 가난했다. 농사가 주업인 동네에서 논 2마지기 밭 3마지기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도 난 가난해서 불행하다는 느낌이나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곡식이 없어서 점심때는 언제나 고구마로 때웠고(고향에서 고구마점심이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서울 와서 고구마를 먹을 때면 언제나 구역질이 났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고구마를 값비싼 돈을 주고 사먹을까 의아해 했다.), 저녁에는 흰 쌀죽을 쒀먹은 적이 많았는지 그게 싫어 부엌 문턱에 앉아 “엄마, 또 죽쒀?”라고 했다고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동정반 놀림반을 당했을 정도로 가난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내가 철이 덜 들어서 행이니 불행이니 그런 것 자체를 몰랐을 수도 있다. 어머니 아버지는 우리 다섯 형제와 누나 배를 곯릴까 두려워 노심초사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 아버지를 포함하여 추석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축제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서로 나누고 집단적인 놀이와 연희를 즐겼다. 동네 모든 사람들 얼굴에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래서 그리도 설레어 추석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요즈음 추석엔 뭐가 남아있는가? 시장에서 사온 송편, 극장, 콘도, 캐러비언 베이, 해외여행. 도시인들의 추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골 추석도 신명이 나던 옛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내가 어렸을 때와 현재의 한국사회를 비교해 보면 평균적인 경제적 풍요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물론 있는 사람은 있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오늘날도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우리 집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여전히 경제발전과 성장을 해야 한다고, 3만달러에 도달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주류언론은 매일 경쟁력이 어떻고 생산성이 어떻고 주가가 어떻고 떠들어 댄다. 오다가다 경제학을 조금 접한 사람으로서 이런 지표들을 전혀 무시는 할 수 없지만, 그러는 사이 사람 사이에 오가던 정이나 집단적인 문화나 신명 등은 전부 없어져버려 눈을 씻고 찾자 해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공동체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물질적인 부가 고르게 분배가 되는 것도 전혀 아니고 말이다.

공선옥 씨가 쓴 창비 주간비평(프레시안 참조)에 필받아 이 글을 쓰게 되었다(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두 번씩이나). 성장 성장 외치면서 우리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얼마나 파괴해 왔는가, 한미FTA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의 취지의 글이었다. 이번 추석엔 사람들의 공동체가 진정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한 번씩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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