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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매일노동뉴스 기사입니다. 저도 출연했습니다. 민주노동당 관련 인터뷰라 응하지 않으려 했는데(당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열우당과의 공조 이야기라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쏟아내 버렸지요. 현재 1000명이 넘는 인사들이 국보법 폐지를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데 이를 열우당과 대통령이 외면해 버리고 있고, 파병연장 동의안 문제, 쌀문제 등도 민중진영의 의견과는 전혀 반대로 처리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미있는 기사라 생각해서 퍼왔습니다. '실천연대' 등이 주장하는 미국 및 한나라당 반대 전선, 즉 개혁 수구 전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제 깨달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이들은 신자유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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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진보·민주' 두마리 토끼 어떻게 잡아야 하나
열린우리당과 공조 놓고 시각 엇갈려…독자성 강화냐, 사안별 공조냐
연휴 동안에도 정기국회와 국정감사를 맞이하는 정치권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국가보안법, 과거사와 친일진상규명 등을 두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민주노동당도 이들 현안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등 여야와 ‘사안별 공조’를 추진하는 등 원내정당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총선 직후 ‘거대한 소수’를 내걸고 의정활동에 뛰어들었던 민주노동당은 이라크 파병반대 투쟁과 국가보안법 완전폐지, 국회·정치개혁, 서민경제 위기 극복, 행정수도 이전 반대, 비정규 차별철폐 등 현안들과 함께 굴곡을 헤쳐 왔다. 그리고 이제 첫 국정감사를 맞이하며 ‘진보정당’으로서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최근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민주당은 6개 개혁법안 공조를 취하고 있다.
ⓒ 매일노동뉴스
다른 정당들과 ‘공조’ 놓고 찬반 팽팽
최근 민주노동당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과거사·친일규명, 공정거래법 개정 등 6대 입법과제에 대해 열린우리당·민주당과 공조를 약속했다. 정기적으로 의원단 수석부대표 회의도 열고 있다. 현재 의원단은 ‘10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사안별 공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으며 “영원한 공조는 없다”는 원칙을 표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당 안팎의 시각은 어떨까.
당 안팎의 인사들은 공조에 대해 찬반 양론이 뚜렷하다.
김윤철 당 상임정책위원은 공조에 비판적이다. 김 위원은 “민주노동당이 원내 캐스팅보트를 쥐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 법안 공조는 전선을 흐리게 할 소지가 있다”며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의 행보는 국민들의 체감과 거리가 먼 정략적 행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박하순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도 “공조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며 “시민단체들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위치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있는데 민주노동당마저 그러면 어떡하냐”고 말한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어차피 10석으로서 독자법안을 입법화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이 없다”며 “폭로나 감시자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포지티브 전략을 쓸 수 없다면 대중투쟁을 활성화시키는데 주력해서 보수정치권 전체를 압박해 들어가는 전술을 쓰는 것이 현재로서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공조는 당연하다는 주장도 많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일반 민주주의 사안을 두고 하는 공조는 당연하며 안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공조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묻혀버린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당 스스로 힘을 키워서 뚫고 나가야 할 문제이지 이런 이유로 일반 민주주의 관련법안에 대해서까지 공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제도 어려운데 국가보안법 철폐가 웬 말이냐’는 발상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박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도 “차별화 전략을 가지고 사안별로 공조하는 게 맞다고 본다”며 “민주노동당의 원칙과 기본 노선에 맞는 사안이라면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상관없이 공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차별화를 하되 내용이 있는 차별화를 해야 하며 잘 싸우기 위해서는 잘 싸울 수 있는 영역, 즉 평등과 불평등이나 빈곤의 문제,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의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개혁입법 공조는 ‘전선 논쟁’까지 불러오고 있다.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사규명, 행정수도 이전을 두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는 ‘전선’이 형성돼 있다. 이 전선은 대체로 정부여당이 의제를 던지고 한나라당이 반발하는 사이에서 형성돼 왔다.
민주노동당은 이 전선 사이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을 오가며 ‘공조’를 취하거나 양쪽 모두를 비판하면서, 고유한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당 안팎에서는 국가보안법 등을 사이에 둔 보수양당의 전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당의 미래는 불안해진다는 목소리도 있고 반대 의견도 나온다.
박하순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열린우리당이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를 들고 나오면서 쟁점화 시키는 이면에는 비정규관련법 같은 사회경제적 개악법률들을 덮어버리기 위한 연막효과도 있다”며 “정권의 반노동자적인 성격을 제대로 보면 국보법 문제나 비정규 문제는 따로 떼어내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김윤철 당 상임정책위원도 이러한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며 “이러한 사안들이 쟁점이 되는 이유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쟁점으로 삼으면 차별화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보수양당들이 이러한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지지층들을 묶어 두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라며 “이러할 때 민주노동당이 이 문제들에만 집중하다보면 장기적으로 당의 성장 가능성이 봉쇄되고 설 자리도 좁아진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진중권씨는 “민생을 외면하기 위해 그런 문제를 들고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퇴행적인 발상이자 ‘좌익 음모론’이며 사회의 소통구조를 바로 잡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보수정치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말했다.
의회내 투쟁인가, 대중투쟁 강화인가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하반기에 어떠한 위치에서 원내와 활동을 벌여나가야 할까.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선택과 집중의 조화를 강조한다. 그는 “국가보안법 문제 등은 민주노동당도 잘 싸울 수 있는 영역이지만 다른 당도 잘 싸울 수 있는 영역”이라며 “빈곤과 비정규 문제 등 민주노동당만이 잘 싸울 수 있는 ‘틈새 영역’을 찾아내고, 거기에 많은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현재 당은 상호 소통과 역할분담을 정확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측면이 있어 선택과 집중 등 힘의 안배가 적절히 되지 못하고 있다”며 “틈새 영역에 집중하면서 차별성 있는 공조도 함께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하순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캐스팅보트를 쥐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정당의 한계나 문제점을 폭로할 수는 있겠지만 의회 안에서 우리가 흡족할 정도로 표결을 관철시키기는 어렵다”며 “원내활동을 하더라도 네트워크를 통한 대중투쟁 강화에 많은 역량을 투입해서 의회를 압박해 들어가는 전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중권씨는 “어차피 힘의 한계로 인해 비정규직 문제 같은 사안은 의회 안에서 관철하기 힘들지만 그럴수록 강하게 문제를 제기해 보수여야가 결국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폭로할 필요가 있다”며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싸워도 언론에서 안 다뤄주니까 사회적 의제가 되기 힘든 형국이므로, 민주노동당이 나서서 의회 안에서부터 강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고, 동시에 민주노동당도 국민들에게 존재감을 환기시켜 나가는 전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윤철 당 상임정책위원도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 규명도 민주노동당이 나서서 당사자들을 논쟁에 끌여들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해당사자들을 조직해 나가는 속에서 보수양당의 논쟁이 허구적임을 폭로하고 민주노동당의 고유한 색깔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조상기 기자 westar@labortoday.co.kr
2004-10-01 오전 9:34:24 입력 ⓒ매일노동뉴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가 모종의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군요.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데리다 관련 글은 거의 읽은 게 없습니다. 알튀세와 관련한 조사('맑스주의 역사'), 다 읽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없는 어떤 인터뷰(이론지)가 고작이군요. 그리고 그 뒤엔 그의 글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읽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지만 최근 한겨레신문 기사에선가 인터뷰에선가 결혼제도와 관련해서 그가 얘기했다는 '시민결합'이 무척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90년대 중후반이던가요? 맑스를 이야기하면서 모종의 '인터내셔널'을 주장한 것으로도 알려졌지요.
아래 '자크 데리다, 난해한 이론가(이는 진태원씨에 의하면 특별한 분야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들었습니다)'라는 뉴욕타임즈 기사는 좀 선정적이고 비우호적으로 쓰여진 것 같습니다. 폴 드만, 하이데거 등 데리다와 이론적으로 관련된 인사들의 과거 나치 전력들, 두둑한 강연료를 받으며 많은 청중을 몰고 다니기, '해체주의'의 불가해성, 결혼 등등.
그 중 하나. 데리다는 아들이 셋인데 그 중 하나가 나중에 죠스팽과 결혼한 실비안 아가신스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네요.
데리다 특집이 봇물을 이룰 것 같은데 쉽게 씌여진 글이라면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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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Derrida, Abstruse Theorist, Dies at 74
By JONATHAN KANDELL
Published: October 10, 2004Jacques Derrida, the Algerian-born, French intellectual who became one of the most celebrated and notoriously difficult philosophers of the late 20th century, died Friday at a Paris hospital, the French president's office announced. He was 74.
The cause of death was pancreatic cancer, according to French television, The Associated Press reported.
Mr. Derrida was known as the father of deconstruction, the method of inquiry that asserted that all writing was full of confusion and contradiction, and that the author's intent could not overcome the inherent contradictions of language itself, robbing texts - whether literature, history or philosophy - of truthfulness, absolute meaning and permanence. The concept was eventually applied to the whole gamut of arts and social sciences, including linguistics, anthropology, political science, even architecture.
While he had a huge following - larger in the United States than in Europe - he was the target of as much anger as admiration. For many Americans, in particular, he was the personification of a French school of thinking they felt was undermining many of the traditional standards of classical education, and one they often associated with divisive political causes.
Literary critics broke texts into isolated passages and phrases to find hidden meanings. Advocates of feminism, gay rights, and third-world causes embraced the method as an instrument to reveal the prejudices and inconsistencies of Plato, Aristotle, Shakespeare, Freud and other "dead white male" icons of Western culture. Architects and designers could claim to take a "deconstructionist" approach to buildings by abandoning traditional symmetry and creating zigzaggy, sometimes disquieting spaces. The filmmaker Woody Allen titled one of his movies "Deconstructing Harry," to suggest that his protagonist could best be understood by breaking down and analyzing his neurotic contradictions.
A Code Word for Discourse
Toward the end of the 20th century, deconstruction became a code word of intellectual discourse, much as existentialism and structuralism - two other fashionable, slippery philosophies that also emerged from France after World War II - had been before it. Mr. Derrida and his followers were unwilling - some say unable - to define deconstruction with any precision, so it has remained misunderstood, or interpreted in endlessly contradictory ways.
Typical of Mr. Derrida's murky explanations of his philosophy was a 1993 paper he presented at the Benjamin N. Cardozo School of Law, in New York, which began: "Needless to say, one more time, deconstruction, if there is such a thing, takes place as the experience of the impossible."
Mr. Derrida was a prolific writer, but his 40-plus books on various aspects of deconstruction were no more easily accessible. Even some of their titles - "Of Grammatology," "The Postcard: From Socrates to Freud and Beyond," and "Ulysses Gramophone: Hear Say Yes in Joyce" - could be off-putting to the uninitiated.
"Many otherwise unmalicious people have in fact been guilty of wishing for deconstruction's demise - if only to relieve themselves of the burden of trying to understand it," Mitchell Stephens, a journalism professor at New York University, wrote in a 1994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Magazine.
Mr. Derrida's credibility was also damaged by a 1987 scandal involving Paul de Man, a Yale University professor who was the most acclaimed exponent of deconstruction in the United States. Four years after Mr. de Man's death, it was revealed that he had contributed numerous pro-Nazi, anti-Semitic articles to a newspaper in Belgium, where he was born, while it was under German occupation during World War II. In defending his dead colleague, Mr. Derrida, a Jew, was understood by some people to be condoning Mr. de Man's anti-Semitism.
A Devoted Following
Nonetheless, during the 1970's and 1980's, Mr. Derrida's writings and lectures gained him a huge following in major American universities - in the end, he proved far more influential in the United States than in France. For young, ambitious professors, his teachings became a springboard to tenure in faculties dominated by senior colleagues and older, shopworn philosophies. For many students, deconstruction was a right of passage into the world of rebellious intellect.
Jacques Derrida was born on July 15, 1930, in El-Biar, Algeria. His father was a salesman. At age 12, he was expelled from his French school when the rector, adhering to the Vichy government's racial laws, ordered a drastic cut in Jewish enrollment. Even as a teenager, Mr. Derrida (the name is pronounced day-ree-DAH) was a voracious reader whose eclectic interests embraced the philosophers Jean-Jacques Rousseau and Friedrich Nietzsche, Albert Camus, and the poet Paul Valéry.
But he could be an indifferent student. He failed his baccalaureate in his first attempt. He twice failed his entrance exam to the École Normal Supérieure, the traditional cradle of French intellectuals, where he was finally admitted in 1952. There he failed the oral portion of his final exams on his first attempt. After graduation in 1956, he studied briefly at Harvard University. For most of the next 30 years, he taught philosophy and logic at both the University of Paris and the École Normal Supérieure. Yet he did not defend his doctoral dissertation until 1980, when he was 50 years old.
By the early 1960's, Mr. Derrida had made a name for himself as a rising young intellectual in Paris by publishing articles on language and philosophy in leading academic journals. He was especially influenced by the German philosophers, Edmund Husserl and Martin Heidegger. Both were strong critics of traditional metaphysics, a branch of philosophy which explored the basis and perception of reality.
As a lecturer, Mr. Derrida cultivated charisma and mystery. For many years, he declined to be photographed for publication. He cut a dashing, handsome figure at the lectern, with his thick thatch of prematurely white hair, tanned complexion, and well-tailored suits. He peppered his lectures with puns, rhymes and enigmatic pronouncements, like, "Thinking is what we already know that we have not yet begun," or, "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Many readers found his prose turgid and baffling, even as aficionados found it illuminating. A single sentence could run for three pages, and a footnote even longer. Sometimes his books were written in "deconstructed" style. For example, "Glas" (1974) offers commentaries on the German philosopher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and the French novelist Jean Genet in parallel columns of the book's pages; in between, there is an occasional third column of commentary about the two men's ideas.
"The trouble with reading Mr. Derrida is that there is too much perspiration for too little inspiration," editorialized The Economist in 1992, when Cambridge University awarded the philosopher an honorary degree after a bruising argument among his supporters and critics on the faculty. Elsewhere in Europe, Mr. Derrida's deconstruction philosophy gained earlier and easier acceptance.
Shaking Up a Discipline
Mr. Derrida appeared on the American intellectual landscape at a 1966 conference on the French intellectual movement known as structuralism at Johns Hopkins University, in Baltimore. Its high priest was French anthropologist Claude Lévi-Strauss, who studied societies through their linguistic structure.
Mr. Derrida shocked his American audience by announcing that structuralism was already passé in France, and that Mr. Lévi-Strauss's ideas were too rigid. Instead, Mr. Derrida offered deconstruction as the new, triumphant philosophy.
His presentation fired up young professors who were in search of a new intellectual movement to call their own. In a Los Angeles Times Magazine article in 1991, Mr. Stephens, the journalism professor, wrote: "He gave literature professors a special gift: a chance to confront - not as mere second-rate philosophers, not as mere interpreters of novelists, but as full-fledged explorers in their own right - the most profound paradoxes of Western thought."
"If they really read, if they stared intently enough at the metaphors," he went on, "literature professors, from the comfort of their own easy chairs, could reveal the hollowness of the basic assumptions that lie behind all our writings."
Other critics found it disturbing that obscure academics could presume to denigrate a Sophocles, Voltaire or Tolstoy by seeking out cultural biases and inexact language in their masterpieces. "Literature, the deconstructionists frequently proved, had been written by entirely the wrong people for entirely the wrong reasons," wrote Malcolm Bradbury, a British novelist and professor, in a 1991 article for 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Mr. Derrida's influence was especially strong in the Yale University literature department, where one of his close friends, a Belgian-born professor, Paul de Man, emerged as a leading champion of deconstruction in literary analysis. Mr. de Man had claimed to be a refugee from war-torn Europe, and even left the impression among colleagues that he had joined the Belgian resistance.
But in 1987, four years after Mr. de Man's death, research revealed that he had written over 170 articles in the early 1940's for Le Soir, a Nazi newspaper in Belgium. Some of these articles were openly anti-Semitic, including one that echoed Nazi calls for "a final solution" and seemed to defend the notion of concentration camps.
"A solution to the Jewish problem that aimed at the creation of a Jewish colony isolated from Europe would entail no deplorable consequences for the literary life of the West," wrote Mr. de Man.
The revelations became a major scandal at Yale and other campuses where the late Mr. de Man had been lionized as an intellectual hero. Some former colleagues asserted that the scandal was being used to discredit deconstruction by people who were always hostile to the movement. But Mr. Derrida gave fodder to critics by defending Mr. de Man, and even using literary deconstruction techniques in an attempt to demonstrate that the Belgian scholar's newspaper articles were not really anti-Semitic.
"Borrowing Derrida's logic one could deconstruct Mein Kampf to reveal that [Adolf Hitler] was in conflict with anti-Semitism," scoffed Peter Lennon, in a 1992 article for The Guardian. According to another critic, Mark Lilla, in a 1998 article in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Mr. Derrida's contortionist defense of his old friend left "the impression that deconstruction means you never have to say you're sorry."
Almost as devastating for deconstruction and Mr. Derrida was the revelation, also in 1987, that Heidegger, one of his intellectual muses, was a dues-paying member of the Nazi Party from 1933 to 1945. Once again, Mr. Derrida was accused by critics of being irresolute, this time for failing to condemn Heidegger's fascist ideas.
By the late 1980's, Mr. Derrida's intellectual star was on the wane on both sides of the Atlantic. But he continued to commute between France and the United States, where he was paid hefty fees to lecture a few weeks every year at several East Coast universities and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Irvine.
Lifting a Mysterious Aura
In his early years of intellectual fame, Mr. Derrida was criticized by European leftists for a lack of political commitment - indeed, for espousing a philosophy that attacked the very concept of absolute political certainties. But in the 1980's, he became active in a number of political causes, opposing apartheid, defending Czech dissidents and supporting the rights of North African immigrants in France.
Mr. Derrida also became far more accessible to the media. He sat still for photos and gave interviews that stripped away his formerly mysterious aura to reveal the mundane details of his personal life.
A former Yale student, Amy Ziering Kofman, focused on him in a 2002 documentary, "Derrida," that some reviewers found charming. "With his unruly white hair and hawklike face, Derrida is a compelling presence even when he is merely pondering a question," wrote Kenneth Turan in The Los Angeles Times. "Even his off-the-cuff comments are intriguing, because everything gets serious consideration. And when he is wary, he's never difficult for its own sake but because his philosophical positions make him that way."
Rather than hang around the Left Bank cafés traditionally inhabited by French intellectuals, Mr. Derrida preferred the quiet of Ris-Orangis, a suburb south of Paris, where he lived in a small house with his wife, Marguerite Aucouturier, a psychoanalyst. The couple had two sons, Pierre and Jean. He also had a son, Daniel, with Sylviane Agacinski, a philosophy teacher who later married the French political leader Lionel Jospin.
As a young man, Mr. Derrida confessed, he hoped to become a professional soccer player. And he admitted to being an inveterate viewer of television, watching everything from news to soap operas. "I am critical of what I'm watching," said Mr. Derrida with mock pride. "I deconstruct all the time."
Late in his career, Mr. Derrida was asked, as he had been so often, what deconstruction was. "Why don't you ask a physicist or a mathematician about difficulty?" he replied, frostily, to Dinitia Smith, a Times reporter, in a 1998. "Deconstruction requires work. If deconstruction is so obscure, why are the audiences in my lectures in the thousands? They feel they understand enough to understand more."
Asked later in the same interview to at least define deconstruction, Mr. Derrida said: "It is impossible to respond. I can only do something which will leave me unsatisfied."
어찌나 시원한지요. 호인수신부님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근래 보기드문 통쾌한 사건입니다. -----------------------------------------------------------------------
“김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김수환 추기경 비판 “그리스도교인이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말해야지 정치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형제를 적으로 삼아 박멸하라고 했습니까. 온 땅에 평화를 증거하라고 했지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라고 했습니까.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라고 했지, 인권을 능멸하고 유린하라고 했습니까. 성직자라면 북한이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았다느니 하는 견강부회식 정치적인 요인들을 앞세울 게 아니라 성경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적화통일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교계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호인수 신부(우리신학연구소 소장·57)는 한숨부터 나온다. 성직자 옷만 걸쳤지 정치인이나 다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자들 속에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존폐 논란 속에서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며 내심 보안법 존치에 힘을 실어주는 가톨릭 지도부는 물론이고 기독교감리회 예장통합 한기총 등 개신교 단체들도 포함돼 있는 듯하다. “인권유린을 허용하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는 신학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법은 싸워서라도 없애야 한다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성직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살아선 안됩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이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셨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쥐고 세상을 호령하는 자들과 함께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들은 지금 가진 자들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성경과 신학의 관점에서 말해야지 정치적 입자에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고 했습니까” 호 신부는 국가보안법 필요성을 앞장서 주장하는 김 추기경이 안쓰럽다. “김 추기경이 바뀌었다고들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김 추기경은 옛날부터 매우 귀족적이었요. 정치적이기도 하고요. 독재정권과 싸울 때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이돈명 유현석 변호사 등 원로 평신도들이 잘 이끌었기에 본래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추기경의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는 적지않다. 직선제 개헌투쟁때 적전분열을 야기하고 전두환 정권에 유착했던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를 두고 김 추기경은 “참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사람이 돼야 나라가 편해진다”고 상찬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지극한 애정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한없는 비판정신을 보였다.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때 이회창씨를 열심히 지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인들처럼 언론에 거론되지 않으면 심심한가 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발언도 그런 차원 같아요. 김 추기경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김 추기경은 1988년 서경원 의원이 밀입북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을 범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단 며칠간이라도 감옥 생활을 했다면 요즘처럼 엉뚱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신부도 있다. 호 신부는 성직자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평신도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성직자를 똑바로 세우는 것은 평신도의 몫인데, 평신도들이 ‘어리석은 백성’으로 남아 성직자의 말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이다. 호 신부가 10년째 우리신학연구소에 공을 들이는 것도 평신도 운동 차원이다. 평신도가 신학을 제대로 알아야 성직자가 엉뚱한 소리나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 신부는 믿는다. 이 연구소는 평신도들이 운영하고 연구하고, 다른 평신도들의 신학 공부를 도와준다. 성직자의 성경 및 교리해석에 대해 반론을 펴기도 한다. 호 신부는 76년 서품했다. 인천교구에서 고잔동, 부평1동, 북주안, 주안5동 성당에서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격동의 80년대를 노동자와 재야 청년운동가들 속에서 생활했다. 인천교구 가톨릭노동청년회를 맡는가 하면, 김정택 목사, 제정구, 이명준씨 등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을 결성해 이끌었다. 지금은 인천 상동성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다. 곽병찬 기자 chankb@hani.co.kr |
미디어 참세상에 기고를 강요당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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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애 대한 투쟁을 강화하자
들어가며
70년대 중반 미국주도 세계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진다. 65년 경부터 하락하던 이윤율은 결국 경제위기를 야기하고 말았다. 5-60년대 미국주도 세계자본주의의 황금기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각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된다. 케인스주의 시대에 억압된 소유-금융이 권력을 되찾으면서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노자타협은 해체되었고 노동의 신축화가 진행되었다. 사회복지는 축소되었고 공공부분에도 금융의 원리가 강제되었다. 외채위기를 당한 남미제국들은 구조조정을 진행하였다.
노동자와 주변-반주변의 희생을 기초로 하여 8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하던 이윤율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물질적 팽창에 뒤이은 금융적 팽창이 시작되었다.
금융세계화는 두 단계를 거친다. 70년대 런던의 유로달러시장과 초민족적 은행(Transnational Bank; TNB)이 주도한 금융화가 고금리-달러강세로 외채위기로 한계를 드러냈다. 외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베이커플랜(외채상환조건의 재조정)과 브래디 플랜(외채의 증권화)이 등장하였다.
그 결과 금융자본의 형태가 대부자본(은행신용)에서 가공자본(증권)으로 변하고, 신흥공업국은 이른바 초민족적 금융자본에게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주는 '신흥시장'으로 변모한다. 이어 90년대 뉴욕의 증권시장과 금융화한 초민족적 자본(Transnational Capital; TNC)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가 시작되었다.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지주회사를 핵심 조직으로 하는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금융그룹'이다. 이들에게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는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은데, 증권투자가 인수합병의 주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금융세계화의 이득은 미국에게 집중되었다. 미국 자본은 90년대에 이윤율을 회복하고, 미국경제는 새로운 축적과 상당한 성장을 이룩하였다('좋은 시절'). 반면 일국적 세계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었고, 세계의 많은 지역이 발전과 성장에서 배제되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도전하거나 장애를 조성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없을 수 없다.
1990년대 말 그 윤곽이 그려졌으며, 2002년 9월 17일 미국 부시 정부가 공표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은 '부시 독트린'(전쟁억지론에서 예방전쟁론 또는 선제공격론으로의 전환)을 천명하였으며, 이에 따르면 "테러리스트적 폭력과 혼란"에 의해 야기되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취해지는 예방적, 선제적 행동은 "인간적 존엄성의 협상할 수 없는 공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 가치는 "자유 민주주의 자유기업" 또는 "평화 민주주의 자유시장 자유무역"이라고 하고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통치성'을 유지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하겠다.
금융세계화와 미국경제
금융세계화로 미국이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지 알아보자. 최근 발표된 미국의 국제투자(직접투자, 주식, 국공채, 은행대출 등 일체) 잔액 대조표에 의하면 2003년 미국인에 의한 해외투자 잔액은 약 7조 2,003억 달러, 같은 해 미국 국내총생산 약 11조 40억 달러 대비 65.5%가 된다.
1976년도에는 이 수치가 약 4,570억 달러, 같은 해 미국 국내총생산 대비 25%였다. 2003년 외국인의 미국 내 투자는 약 9조 6,333억 달러, 같은 해 미국 국내총생산의 약 87.5%가 된다. 1976년도에는 이 수치가 약 2,921억 달러, 같은 해 미국 국내총생산 대비 16%였다.
그래서 미국의 순 국제투자 잔액[= 미국인의 해외투자 잔액 - 미국 내 외국인투자 잔액]은 1980년 약 3,608억 달러(국내총생산의 약 13%)로 최고치에 이르렀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86년에 마이너스로 돌아갔다.
즉 미국 내 외국인투자 잔액이 미국인에 의한 해외투자 잔액보다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이후 더욱 강화되어 순 국제투자 잔액은 2003년 현재 약 -2조 4,307억 달러(국내총생산의 약 -22%)에 이르고 있다. 미국인에 의한 해외투자와 외국인의 미국 내 투자 모두 급격히 증가해 왔지만 외국인의 미국 내 투자 증가속도가 더 빠르다. 그리고 외국인의 미국 내 투자는 90년대 후반 즉 '아시아 위기' 이후 급격히 증가해 왔다.
미국인의 해외투자에서는 직접투자(1인이 10% 이상의 주식을 취득하는 경우) 비중이 높고, 외국인에 의한 미국 내 투자에는 주식 및 채권 투자 비중이 높은 반면 직접투자는 비중이 낮다. 한편 외국인의 미국 내 직접투자에서의 수익률은 99-2002년 시기에 경상가격 기준으로는 5.3%, 4.5%, 1.2%, 3.3%인데 반해, 미국인의 해외 직접투자에서의 수익률은 99-2002년 사이에 10.1%, 10.3%, 8.0%, 8.5%를 기록해 미국인의 해외 직접투자는 외국인의 미국 내 직접투자에 비해 두세 배 이상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이런 수익률 격차로 인하여 미국은 순 국제투자 잔액이 국내총생산의 -22%가 되고서도 자본소득 수지상의 역조는 거의 없다.
그래서 2000년의 경우 미국인의 해외 직접투자로부터의 이윤은 국내이윤의 53%에 달했고, 미국의 해외로부터의 총 금융소득(미국의 기업 가계 펀드의 직접투자, 포트폴리오 투자로부터 얻는 총 소득)의 국내 이윤에 대한 비율은 2000년에 100%에 달했다.
이 후자의 과거 수치들을 살펴보면 1948년 10%에서 70년대 말까지 조금씩 오르다가 78년에 45%가 되었고, 그 이후 이 수치는 급격히 치솟아 80년대 신자유주의 시기 이후 약 80%대를 유지하였다. 이 수치가 이렇게 높아진 데는 신자유주의적 반격의 효시인 79년의 (실질)금리 인상과 이후 거대해진 배당 때문이었다. 즉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는 미국의 해외로부터의 금융소득을 엄청나게 증대시켰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국주의의 주된 특징이라 하겠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금융세계화로 인해 소비와 투자를 위한 자금을 값싸게 조달하고 있거니와, 정보기술에 기초한 독점력, 아이엠에프 세계은행 등 국제 금융기구의 매개, 각국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압력 등을 통해 해외 직접투자에서는 높은 수익을 내고 있다.
한국경제와 금융세계화
한국경제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재벌체제의 과잉축적으로 인한 이윤율 저하와 금융세계화 압력으로 아이엠에프 위기를 겪은 한국경제는 혹독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실시하였고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을 심화하였다.
그 결과 98년 이후 2002년까지 약 1,153억 달러의 누적 상품수지 흑자를 냈고 이에 힘입어 약 906억 달러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이는 아이엠에프 초기 대폭적인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 및 내수 소비와 투자의 감소에 따른 수입의 감소, 실업과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노동의 불안정화에서 비롯한 노동비용의 하락으로 인한 수출증대 등이 원인이 되었다.
이런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라면 아이엠에프의 위기의 한 원인이었던 외채를 많이 갚고 한국경제가 이제 외국자본의 지배에서 상당히 벗어났을 법도 하다. 왜냐하면 경상수지(상품수지 서비스수지 소득수지) 흑자는 외채를 갚거나 외환보유고를 확충하거나 아니면 내국인의 해외투자를 늘리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자본의 지배는 줄어들지 않았고 최근에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경상수지 흑자분과 외국인투자로 유입된 달러로 인해 외채가 약간 감소하고 그 나머지 대부분이 외환보유고로 쌓이면서 외채걱정은 없어졌지만, 국내에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위해 들어온 외국자본은 엄청난 투자수익과 투기이득을 올리면서 국내 외국인투자 잔액을 엄청난 속도로 불려나간 반면, 해외로 나간 내국인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는 원본도 유지하지 못하는 저조한 실적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증권거래소 상장주식에서 98년부터 2003년 사이 외국자본이 얻은 평가이익만 해도 80조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고, 직접투자에서 외국자본이 얻은 이익 또한 이에 못지않다. 그래서 대외채권(외환보유고도 이것의 구성요소이다)과 대외채무에다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전부 감안한 2003년 순 국제투자 잔액 규모는 -1,000억불에 육박할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2003년 순 국제투자 잔액 마이너스 규모는 엄청난 규모의 외채( 및 순국제투자의 마이너스)로 인해 외환위기가 발생한 아이엠에프 위기 당시의 순 국제투자 잔액 추정액 -858억 달러보다 더 커지게 된다.
즉 2003년의 순 국제투자 잔액은 아이엠에프 위기 당시보다 마이너스 규모가 약 142억불이 커진 것이 된다. 한국경제는 여전히 초민족적 자본의 볼모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외국자본의 지배의 축소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그 지배형태가 외채형태에서 주식형태로 변하고 있으며('debt-equity swap' 또는 '외채 주식 전환') 그 지배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결국 한국은 아이엠에프 구조조정협약이 의도한대로 '신흥 시장'(emerging market)이 되었다. 한국의 공기업 금융기관 재벌기업들이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투자/투기대상이 되면서 이들 기업들의 주식은 초민족적 자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위기 당시 막대한 외채를 짊어지고 있던 한국경제는 98년 이후 외채를 줄일 수 있었고 엄청난 규모의 외환보유고로 쌓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수출이 수입보다 많아 막대한 상품수지 흑자가 났고, 외국인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통해서도 국내에 달러가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외채권이 대외채무보다 많아져 한국은 순 채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외자유치를 한다고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통합해 들어가면서 늘어난 외국인직접투자와 주식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 자신의 몸집을 계속 불려나갔다. 그 결과 대외채무 및 대외채권과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전부 합해서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따져보면 아이엠에프 위기를 겪을 당시에 비하여 전혀 줄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외국자본의 형태가 외채에서 주식으로 변한 것이다. 단적으로 2004년 4월 현재 증권거래소 상장기업 주식의 43%(시가기준) 이상을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엄청난 수익과 이에 따른 가치 상승은 주주자본주의 또는 금융의 원리의 철저한 관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노동권과 공공서비스는 악화되고 엄격한 재정규율이 강제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의 심화로 인한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력 증대는 이 외에도 경영권 간섭, 금융투기의 만연으로 인한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불안정화 등의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한국경제는 위기 이후 국가 부채가 급속히 늘고 있다.
투자와 성장 또한 애초의 기대를 벗어나고 있다. 투자부진과 저성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 과정 중에 금융투기 거품이 지속적으로 생겨났다가 붕괴되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편입된 계층들의 초민족적 소비행태와 생활양식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사회의 양극화와 자본 및 두뇌유출이라는 경제적 문제도 낳고 있다.
나가며
1980년대 초반의 남미의 경제위기, 1994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2000/2001년 세계적인 증시 붕괴, 2002년의 아르헨티나와 터키의 금융위기 등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서 초래되었다.
경제위기를 당한 나라에서는 위기를 극복한다고 격렬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진행되었고,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을 심화하였다. 그 결과는 대량해고와 불안정노동의 확산, 두뇌유출, 국부유출 및 정부부채의 증대, 부익부 빈익빈의 확산 등이었다. 2002년 아르헨티나 사태가 잘 말해주고 있다.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무한전쟁'도 지속되고 있는데 아프간과 이라크 침략 뒤에도 북한,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 쿠바, 콜럼비아 등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고 있다. 이 새로운 전쟁은 식민지 쟁탈을 위한 고전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중심부가 금융세계화에서 주변부를 선별적으로 포섭하거나 배제(또는 심지어 절멸)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원인은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신자유주의적 '공동지배'에 있다.
전쟁과 빈곤으로 수억의 민중들이 살해당하고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곧 도래할 '최종적 위기'의 시기, 즉 미국경제의 '좋은 시절'이 끝난 이후에 도래할 시기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의 운동일 수밖에 없는 전쟁과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대한 반대운동에 박차를 가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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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아 넌 3학년이 이정도밖에 안되냐? 짜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