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보풀님의 [천재성이라. 참 난해한 기준.. -ㅅ-]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이런저런 사람이야기가 담긴 논픽션의 잡글을 재밌어라 읽곤 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에

 

한창 전위가 꽃피기 시작한 프랑스의 한 때,

페르디낭 슈발이라는 우편배달부가 있었으니.

 

우연히 심심풀이로 한 것이 먼저인지 원대한 포부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백년이상 해외토픽감이 될 만한 건물을 지었다..

 

이 우체부가 말하길,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농부로 살아온 나는,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도 천재성을 가진 사람, 힘찬 정열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또 죽겠노라."고.

 

이런 이야기를 우편배달부가 할 정도이니 당시 프랑스 예술가들의 위상은 끝내줬었나보다.

 

이 이야기를 혼자 노닥거리며 읽다가 나도 모르게 불쌍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요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묘한 표정을 지었었다.

나도 모르게 '에에이, 그냥 아무도 안 봐도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뭐'라고 한창 생각하고 살던 때라 이 사람의 행동은 더욱 묘했다. 그건 사진으로 보았을 때, 그 건물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고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음, 참 괴상해 보였다.

 

물론 뭇슈 슈발이 그 건물을 보면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라고 만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결과는 도데체.. 무엇인가? 하는 난감함을 느꼈다.

나는 최소한 평생을 함께 할 일이라면 그 완성을 생각하면서 그 완성된 모습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 가는 것일테다라고 생각했다. 위인전을 인상깊게 보고 자란 나는,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이 되었다는 논픽션에서도 픽션스러운 인물들에 대한 정보만을 접했었던 것이다.

나이가 좀 더 들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위인전보다는 신문이나 뉴스가 나에게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속으론 그 픽션스러운 인물들에 대한 당연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우연한 기회로 뭇슈 슈발을 만났다. 뭇슈 슈발이 나에게 준 것은 '논픽션에 대한 혐오감'과 '목적없는 성실한 이행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 등이었다.

 

'논픽션에 대한 혐오감'은 쉽게 말하면 '내 인생 만큼은 뭔가 멋지게 잘 되겠지'라던가

'내 인생은 자질구레할 망정 소중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야' 따위를 생각하는 마인드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묻혀서 안 보였어야 되었을 사실이 눈앞에 보이니 부정하고 싶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체 이 건물은 뭐란 말이냐.. 뭇슈 슈발이 여타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다를 게 뭐가 있나. 다른 점, 사실은 많다. 그는 우편배달부와 농부를 자처했고, 성실했고, 생전에 크게 사랑받지는 않았으나(말년에 존경은 받았다 한다) 죽어서도 묻히지 않았다. 처음 이 미술사의 작은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무척 매력을 느꼈지만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에피소드 자체는 엄청난 매력이 있지만 결과물이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

 

'목적없는 성실한 이행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는 뭇슈 슈발의 작품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것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다행이 참 많은 쓰레기(작가가 알아서 깨거나 버리는 작품)를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은 예술가를 자처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그다지 생존에 성실하지도 않고 보통은 자기의 시선에 포함되어 있는 타인의 시선에 좀 더 예민해지는 편인 것 같다. 그리고 예술가는 대다수가 어떤 선에 가기 전에는 가난한 직업이다. 게다가 예술가라 하는 사람들도 미리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를 대충이라도 머릿속에서 먼저 그려보고 그게 맘에 들어야 움직이는 기술자들인지라(그냥 계획없이 하는 경우도 자신의 태도와 감을 믿기 때문이라고 본다) 목적과 자신의 표현이 동떨어질 경우 일부러 바보(다양하다)가 되기도 하고 목적을 변경하여 말하는 사기를 친다거나 업 자체를 포기하기도 할 정도이다. 그런데 뭇슈 슈발을 보라. 이 사람은 계획없이 세부로부터 만들어나가서 죽을 때까지 진행하였다. 이 경우 시각화가 되어서 그 결과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인데, 문득 드는 생각은 어떤 사람이 매우 성실하게 살았는데 그 내용이 왠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이다. 성실한 것은 어떤 목적을 잃을 수록 그 활동의 다양함의 숫자가 적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마음에 드는 것을 만든다는 것은 큰 틀거리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의 다양함의 숫자는 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손바닥에 붙어 있는 손가락처럼 목적이 손바닥이고 손가락은 다양함이랄까..그런 식의 다양함이 다양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목적이 없는 성실함이란 내가 생각하기엔 손바닥에서 잘라낸 손가락을 세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야기가 점점 정신없어지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서.(너무 눈이 아프다 @_@) 

 

슈발의 건물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시각적인 것 보다는 이야기의 매력이 크다. 확신하건데 실물을 보면 감동은 지나치고 살짝쿵 인생이란 것에 대해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렬할 것이다. 그래도 그 결과가 시각적으로 그닥 아름답지 않음은 충격이다.

그 강렬함은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한 자신의 계급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에 대한 강한 정렬의 산물이지만 사실 이 건물을 보면 나는 그가 이 건물을 통해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ㅠ_ㅠ

 

도데체 보여주고 싶은 '힘찬 정열'과 '천재성'이 무어란 말인가?

 

그건 도데체 누굴 위한 건가 

 

 

뭇슈 슈발의 말에서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말은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도' 정도이다.

 

 

내 손가락은 두 개나 되나 몰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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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2 01:06 2005/02/02 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