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나이든 노동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나이든 노동자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조합, 천막농성 12일 째.


서울대학교 캠퍼스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대학본부는 대학의 최고 권력 기관이라는 권위만큼이나 거대한 모습을 뽐내며 관악 교정을 비웃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이 대학본부 앞에서는 심상치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일방적 연령제한 철회, 노조탄압 분쇄'라는 구호들을 여기저기에 붙인 작은 천막 하나가 매서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거대한 대학본부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벌써 12일째 농성이 계속되고 있는 이 천막에는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조합"이라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점심 휴식 시간과 퇴근 시간 이후에는 조를 짜서 조합원들이 천막으로 모여들지만, 그 나머지 시간들까지 천막을 지켜내고 있는 것은 65∼70세의 고령의 노동자 분들이다. 이 추운 겨울에, 나이 드신 분들이 천막을 지켜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은 과연 무엇일까?

서울대학교의 미화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시설관리 노동자들은 대학본부에 직접고용된 정규직원에서 96년 용역입찰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실제 사용자인 서울대학 본부의 관리로 수십 년간 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새로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 용역입찰 즈음하여 대학본부는 일방적으로 '계약 개시일 기준 65세 정년 제한'기준을 발표했다. 96년 이후 대학본부는 임금 경비를 아끼기 위해 시설관리노동자의 고령화를 조장해 왔다. 그렇게 싼 임금에도 별 수 없이 뼈 빠지게 일해온 나이든 노동자 분들을 이제는 "늙었으니 나가라"며 엄동설한에 길거리로 내몰려 하는 것이다.

시설관리 노동자 평균연령이 50세 이상. 올해 기준으로 연령제한에 해당되는 분들은 31명으로 무려 전체의 10%에 달하는 숫자이다.

게다가 2000년 11월, 노동조합과 협의과정에서 대학본부 시설국장은 "현재 근무 중인 자는 연령제한에서 제외로 한다", "(연령제한은) 2∼3년 유예를 두어 혼란이 없도록 하겠다"고 노동자들에게 공언까지 한 터였으니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설관리 노동자들은 96년 비정규직 전환 이후 살인적 노동조건을 견디다 못해 2000년 1월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조합'을 건설하였고 43일간의 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다른 대학의 시설관리 노동자들, 그리고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매년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하는 시설 노동자의 구조적인 한계를 악용하여 대학본부와 용역회사는 예전에 했던 약속이나, 예전 단체협약상에 명시된 합의 사항조차도 무시해 버리는 등의 작태를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

작년 분할 용역으로 들어온 6개 회사 중 3개사(청원, 태광MS, 태진)는 퇴직금 지급 기한을 이미 넘겼고, 1개사(삼정경보)는 미달된 액수만을 지급하였다. 이것은 노조와의 단체협약 위반이며, 법정 최소한 기준마저 무시하는 악질적인 처사이다.

그리고 올해, 캠퍼스 내 11개 지역에 입찰한 7개 용역회사 모두 여러 차례에 걸친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은 아예 근로계약조차 체결하지 않았거나(노동자들은 이미 일을 하고 있는데도) 임금도 명시되지 않은 근로계약서를 들이밀고 있다.

이렇게 용역회사들이 위법을 일삼고 있는 데에는 대학본부가 강행하고 있는 연령제한 규정에 노조위원장님(윤홍림 씨, 67세)이 해당된다는 것을 빌미로 노조와의 교섭을 무시해 버리려는 속셈이 있다. 사실 시설관리 노동자의 일은 연령 구분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연령 제한 규정을 강행함으로써 예산절감 효과 등의 실리 또한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학본부가 스스로 한 합의도 깨뜨려 가면서 대책 없는 연령제한을 강행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노조에서도 '합리적인' 정년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계적인 정년 단축'과 '정년 대상자들에게 3∼4개월의 여유를 주는' 방법을 통해 고령 노동자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안을 제안했지만 대학본부는 여전히 연령제한 강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1월 8일 본부 앞에 천막을 친 이후 대학본부는 천막과 노조사무실에 대한 철거 위협, 조합원들에 대한 뜬소문들로 정당한 요구를 막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천막농성 12일 째를 맞이하는 오늘까지 시설노조를 중심으로 서울대 총학생회, 전교조 여성대의원, 재능교육 교사노조, 대성학원 강사노조 그리고 민주노총 남부지구 협의회 소속 수많은 노조 등의 연대를 통해 굳건하게 이루어져 왔다.

천막을 지키던 한 나이든 노동자 분의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가야지.."라는 말속에서 서울대학교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디에 와 있는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2002년 시설노조의 싸움이 또다시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사례로 남게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