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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45회 –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

 

 

 

1

 

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마흔 다섯 번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성민입니다.

오늘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합니다.

심오한 얘기는 아니고 그냥 저의 넋두리 같은 거니 편하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의 일입니다.

밤새도록 경찰들과 즐기듯이 투쟁을 하고 있었죠.

서울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새벽이 되면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니까 경찰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이 되기 전에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목적이었는데, 경찰들과의 대치를 즐기던 우리는 그런 경찰의 태도에 아랑곳없이 가두시위를 계속 벌이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공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흩어졌지만 다시 소수의 인원이 도로로 나가며 시위를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때 시위에 참여했던 어떤 할아버지 한분이 화를 내면서 질책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인도로 들어와. 그러다가 다쳐. 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설쳐대냐.”

대강 이런 식의 얘기를 큰소리로 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 도로에 나가있던 저는 잠시 화가 치밀었습니다.

“제가 이래뵈도 노동운동만 20년 가까인 해온 놈인데요, 지금 경찰의 진압대형은 시위자 연행이 목적이 아니라 시위 해산이 목적이거든요. 그러니 딴눈만 팔지 않으면 쉽게 연행되지 않으니까 노파심은 집어넣으세요.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역정이세요.”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할아버지와 언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어서 참았습니다.

 

그날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일을 생각해봤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름의 경험에 근거해서 한 말이었고, 저는 제 경험에 근거해서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며 투쟁하고 있었던 겁니다.

누가 옳으냐를 떠나서 서로가 평등한 동지적 입장에서 말과 행동을 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곳이 서울이 아니라 제가 오랫동안 활동했던 울산이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울산에서 이미 중견활동가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던 저에게 시위 도중 그런 식으로 제지를 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울산에서는 이미 활동가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한 이들과 평등한 동지적 입장으로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평등하다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권력과 권위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알량한 권위마저 없이 이곳에서 무지렁이 농사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노동운동하면서 어쨌느니’ 하는 얘기를 할 사람도 할 이유도 없이 초보농사꾼이 돼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좋기는 하지만 가끔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얼마 되지 않은 주변 사람들과 만나서 교류하다보면 제가 도움을 받을 일이 많아서 속없는 놈처럼 굽실거려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은근히 사람을 우습게 대하는 태도에 속이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참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질을 부리거나 나름 화려했던 과거 이력을 들먹이기라도 했다가 얼마 되지 않는 관계들마저 소원해지고 말 뿐이죠.

여기에서 살아가려면 그냥 속으로 삭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운동에 이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울산으로 향했을 때 ‘낮은 곳으로 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을 지금까지 저는 놓지 않았고, 결국 지금 이렇게 무지렁이 농부가 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낮은 곳의 삶은, 권력이니 권위니 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멸시와 무안도 속으로 삭히면서 묵묵히 살아가야하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래야 이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그런 곳이기 때문이죠.

 

 

2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주요한 일과인 평범한 주부가

우연히 스파이모집 광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그곳에 찾아가서는 얼렁뚱땅 스파이조직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 조직은 거대한 국제조직이라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저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주된 과제입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중년의 사내

동네 슈퍼에서 안내방송을 하고 있는 중년 부인

동네의 평범한 두부가게 사장님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맛의 라면집 사장님

공원벤치에서 개미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할머니

이런 이들이 그 조직의 스파이였습니다.

 

너무도 평범해서 누구하나 주목받지 못한 채 그럭저럭 살아가는 그들은

사실 저마다의 특출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중년의 부부는 뭘 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고

두부가게 사장님은 엄청난 균형감각을 갖고 있고

라면집 사장님은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으며

공원벤치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이 조직을 이끌어왔던 리더입니다.

그리고 스파이는 아니지만

허름한 동네미용실 사장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돌그룹의 춤을 연마하고 있고

막힌 하수도를 뚫어주는 기사님은 동네의 사소한 것들을 다 꿰차고 있는 엄청난 마당발입니다.

 

영화는 이들의 소소한 일상만 보여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스파이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를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룬 그저 그런 영화인데

보는 내내 재미있고 다 보고나면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이 남습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실은 저마다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재능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스타나 달인이 돼서 혼자 도드라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특별한 재능을 드러내봤자 비웃음을 사거나 남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킬 뿐이기 때문일까요?

그냥 그렇게 자기만의 재능을 연마하면서 주눅 들지 않고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삶을 원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이 방송에서 ‘내일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했었는데요

이 영화 속의 스파이들도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져버렸지만 마을은 여전히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갑니다.

단지 스파이로서 살아갔던 자부심을 갖고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뿐이죠.

 

저도 이 조직에 가입해서 스파이로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간혹 무시하더라도 스파이라는 자부심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어집니다.

 

 

3

 

새해를 맞이해서 sns에는 희망적인 메시지들과 함께 아름다운 사진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딱히 해맞이여행을 갈 형편도 되지 않는 분들이 많으셨을텐데

sns에 올라온 사진 몇 장으로 새해의 희망찬 기운을 대신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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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ungsik Lee님은 페이스북에 눈 쌓인 백록담과 오름의 모습을 올려주셨습니다.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과 함께 편안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한라산을 이렇게 위압적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리고 설국과 초원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것도 한라산의 매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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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향님은 페이스북에 강원도 동해바다의 모습을 올려주셨습니다.

짙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매서운 겨울추위를 실감할 수 있는 사진입니다.

세상 만만하게 보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얘기하는 것 같네요.

 

겨울의 한복판에서 편안함과 매서움을 동시에 느껴봅니다.

그렇게 새로운 한해가 또 시작되고 있네요.

올 해도 열심히 살아보자고요.

박인희가 부른 ‘겨울바다’ 들으면서 오늘 방송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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