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다시! 39회 – 징징거리지 말고 뜨겁게 살아야겠습니다

 

 

 

1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신자의 ‘생의 마지막 날까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어렴풋이 이름만 알고 있던 분이었는데

그의 얘기를 듣다보니 80여년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왔던 삶의 내공이 만만치 않더군요.

요즘 슬럼프 아닌 슬럼프로 인해 조금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분의 얘기를 통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습니다.

 

 

춤을 추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춤은 보이지만 춤추는 자는 사라지는 것이다. 보는 자의 영혼에만 가닿을 뿐 흔적은 남지 않는다. 그 춤이 내 것이라고 내세울 수는 없다. 스스로를 내세운다면 그 전에 춤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춤은 증명하거나 제시하기 위해 추는 것이 아니다. 춤은 등의 아름다운 선을 자랑하고 팔다리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강해질수록 춤은 보이지 않고 춤추는 자의 몸만 보인다. 그럴 때의 춤은 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봐주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의 ‘몸짓’에 불과하다. 그런 몸짓은 보는 이를 괴롭히기만 할 뿐이다.

......

이제 나의 춤은 완전한 ‘자기 없음’이 되어야 했다. 관객을 의식해서도, 나를 의식해서도 안 된다. 오직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만이 몸에 실려 저 영원의 율동으로 남게 해야 한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의 상태다. 무아의 상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다. 춤은 그 자유로 가는 길을 제공해 준다. 춤추는 자와 보는 자 사이에 말없이 흐르는 감동은, 자기를 완전히 놓아버린 사람의 자유의 희열을 교감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읽는 라디오는 ‘내가 여기에 있으니 나를 봐주세요’라는 심정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를 봐달라고 별별 짓을 다해봤지만 저의 몸짓은 세상에서 아무런 반응을 이끌지 못한 채 저를 괴롭히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봐주는 사람은 내 자신뿐임’을 알게 되면서 오롯이 제 자신을 위한 글쓰기가 돼 갔습니다.

그러면서 괴로움은 사라지고 편안함이 찾아왔지만, 허허벌판에 꼿꼿이 서 있는 제 자신이 때때로 나약하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거센 세상 속에서 조용히 잊혀져가는 수많은 민중들 중에 한 명’임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자고 다짐해보지만, 오랜 세월 가슴 속에 강하게 뿌리박힌 꼿꼿한 자존심이 쉽게 고개를 숙이질 않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 홍신자는

나의 몸짓이 아상我相을 만들면서 괴로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를 버리고 넘실거리는 에너지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춤을 춰보라 합니다.

어렵지 않다고, 그냥 자신을 믿고 느껴보라고 하네요.

 

 

2

 

어떤 이들은 나이게 곧잘 묻는다. “사랑이란 것을 최근에 느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랑은 어떤 것인지요?” 나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주 짧게, 기억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감정인 사랑을 왜 기억하지 않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랑을 느끼는 한순간에 집중할 뿐 기억으로 붙잡아두거나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 추억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려 할 테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너무나도 값지기 때문에 오롯이 받아들이는 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혹시나 소유욕으로 인해 순간의 감동을 놓치거나, 집착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나에게도 사랑에 매달리느라 숨을 고르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팠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는 꽤나 길었고, 돌이켜 보면 그때의 사랑은 집착이었다고 표현해야 마땅할 것 같다.

 

 

이성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며 조용히 몸부림쳤던 때도 있었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뿜어내면서 격렬하게 투쟁했던 때도 있었고

그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온 것에 분노하며 매몰차게 등 돌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지난날의 흔적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제 마음 속에 다시 사랑의 기운을 살려내 보려 해보지만

작은 불씨는 거센 세상의 바람 속에 이내 꺼져버리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홍신자는 “사랑을 키워갈려고 하지 말고 바로 지금 사랑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을 당겨 아주 짧은 순간 행복함을 느꼈던 것처럼

숨 쉬고 있는 바로 지금 사랑을 오롯이 느끼고 받아들여보라네요.

 

지금 이 순간 제 주위를 둘러봤더니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랑이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랑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마음을 담은 한마디를 건네 봅니다.

“사랑아, 정말로 사랑해.”

 

 

3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의 충만한 평안감은 60대에 접어들고 나서 찾아왔다. 30대는 에너지가 넘쳐나면서도 가장 치열하게 고통스러웠던 때였다. 30대에서 50대가 되는 동안엔 스스로 충분히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80대가 되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착각이었던 것 같다. 70대 때 내가 다시 결혼과 사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에서는 어떤 일이든 새로 벌어질 수 있으니 늘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지난 방송에서 저는 인생을 다 살아봤던 것처럼

초연한 티를 팍팍 내면서

“20~30대의 열정과 추진력으로 거침없이 나아갈 자신은 없지만” 운운하며

중늙은이 흉내를 냈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 홍신자가 따끔하게 한마디를 더 하시더군요.

“그게 새파랗게 젊은 놈이 할 소리야? 앞으로 30년쯤 더 살아보고 나서 그런 소리해!”

 

자신의 치열했던 경험을 정갈한 문체로 풀어놓은 홍신자의 얘기는

인생의 스승이 왜 필요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따끔하면서도 뜨거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징징거리지 말고 뜨겁게 살아야겠습니다.

 

 

 

(강성희의 ‘님은 먼 곳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