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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주의와 한국에서의 좌파운동 -박영균

1. 21세기 사회주의의 세계사적 배경

20세기의 사회주의는 더 이상 21세기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없다. 20세기의 사회주의는 맑스-레닌주의라는 ‘정통’과 1917년 혁명 이후 건설된 ‘현실 사회주의’라는 물리력의 틀 안에서 관장되고 지배되었던 사회주의이다. 그러나 ‘정통’과 ‘현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바로 그 이행의 창출에 실패했다. 소비에트와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은 바로 이와 같은 이행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맑스주의의 좌절이자 자기 한계의 노정이다.
그러면 더 이상 사회주의는 맑스 또는 레닌의 이름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맑스에 의해 사회주의로부터 추방되었던 프루동과 바쿠닌이, 로자 룩셈부르그와 레닌에 의해 추방되었던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제 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와 구조개혁론이 엄연한 현실로 등장하는 오늘날 사회주의는 더 이상 20세기와 같은 사상적 정체성과 단일 인격성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물론 20세기 사회주의도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일괴암적 정체성과 고정된 인격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맑스적 사회주의의 단일 정체성으로 가장 잘 무장되었던 당조차 그 내부가 단일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무정부적 사회주의, 의회적 사회주의,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경향적 차이들이 있었고 그 차이들 간의 끊임없는 분열과 정쟁, 투쟁이 벌어지는 역사가 있었다. ‘강철 블록’은 스탈린적 신화였을 뿐이다. ‘이성의 화신’으로서의 당이라는 스탈린적 신화는 맑스주의의 신화, 군대적 규율성과 지령적 체계를 현실화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리고 ‘혁명’이라는 공통적인 정치사상적 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런 틀을 더 이상 공유하고 있지 않다. 맑스주의의 위기는 정통 맑스주의의 해체를 넘어서 ‘맑스’의 해체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맑스-레닌적 사회주의는 분명 정치적, 사상적 ‘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위기’는 무엇인가? 위기는 사상적일까, 정치적일까, 경제적일까? 아니면 실천적 물리력을 창출하는 조직적인 것일까? 위기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위기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는 도전에 대한 실패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위기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좌파의 사상적 정체성은 와해되었으며 정치적 무능력은 대중적 물리력의 창출은 고사하고 자파 조직의 축소라는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승리하는 것은 자본이었다. 적어도 20세기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했던 1990년대 초중반 이후 세계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공세를 취하면서 승리의 전리품을 챙긴 것은 ‘자본’이었다. 자본은 극소전자혁명에 기초한 정보화와 자동화로 노동을 조직하면서 전 세계를 자본의 시장터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를 본격화하였다. 노동은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죽은 노동에 의해 배제되었고 전 세계는 살아남기 위한 전쟁으로 급속히 빨려들었다. 살아남은 노동은 고강도의 노동과 노동통제 속에서, 밀려난 노동은 불안정한 노동 상태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사람들은 생존의 벼랑에서 ‘이기적 생존’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화려한 자본의 네온사인 아래에서 생활의 안정을 취하는 보수적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기적 선택은 ‘이기주의의 덫’일 뿐이다. 여기에는 출구가 없다. 대중들이 이기적 생존 경쟁을 선택하는 한, 그것은 자신의 삶을 더욱 옥죄는 덫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본의 무한 증식 욕구는 생산력의 발전을 자본 축적의 무기로 전화시킨다.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대다수 대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기적 욕구는 상호 경쟁 속에서 승리한 자나 패배한 자나 동일하게 생존의 나락으로 그들을 밀어 넣을 것이다. 따라서 이기적 생존 경쟁은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열은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리나 지배계급 모두에게 ‘위기’이다. 권력은 공동체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삶의 피폐화는 권력을 해체한다. 이제 길은 두 가지이다.
자본은 ‘자본 축적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은 이기주의를 더욱 극단화할 것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는 삶의 피폐화를 인종, 민족, 국가라는 경계 설정 속에서 타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집단적 이기성의 대변자로서의 강력한 권력체제인 대중 파시즘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보다 더 재앙적인 인류의 파국을 향해 움직인다. 공동체적 위기의 근원은 ‘자본’ 자신이다. 따라서 다른 하나의 길은 ‘자본’을 넘어서는 것이다. 좌파는 그 길을 모색한다. 그러나 좌파가 모색하는 그 길이 자초되는 지점에서 자본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로 전화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낳고 있는 ‘파국’의 본질적인 방향이다.
자본의 승리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의 위기를 본격적으로 배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은 자본의 위기를 자본과의 단절이 아니라 자본의 힘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해결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자본의 최대 이윤 추구라는 무한 증식 욕구는 전 인류를 생존의 나락으로 내모는 것임과 동시에 ‘사회’라는 공동체를 더욱 파괴할 것이다. 그들에게 파국은 없다. 자본의 파괴가 곧 파국이다. 따라서 노/자간의 기본모순은 노/자만의 계급투쟁에 한정되지 않고 노/자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체적인 투쟁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국의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투쟁은 공간적으로 일국적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사안적으로 노/자만이 아니라 사회 보편적 의제들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사회주의는 변화된 새로운 세계사의 지형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회주의는 첫째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해체→정통 맑스주의의 해체라는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지형 속에서, 둘째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자본의 공세→전 지구적 위기와 인류적 위기의 배태라는 지형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전자는 적어도 맑스적 사회주의자에게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는다는 측면에서 직접적 위기이며 후자는 자본과 반자본간의 투쟁에 의해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간접적 위기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형 속에서 두 가지 측면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좌파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의 20세기 사회주의가 공유했던 사상적 정체성의 해체라는 ‘위기’가 오히려 두 번째 지형에서의 전 지구적 위기와 인류적 위기에 대한 좌파의 정치적 무능력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이행의 아포리아와 묻혀버린 정치학적 문제 설정 이 글의 2. 3장의 내용은 한노정연 21세기 사회주의에 관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 “이행의 아포리아, 경제학적 문제인가 정치학적 문제인가”를 다시 수정 보완하여 필요한 부분을 발췌 서술하였다.


21세기 사회주의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 맑스주의의 위기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현재화되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이행의 아포리아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다루는 논의들은 여전히 경제학적 문제 설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계획에 대립하여 시장=민주라는 식의 문제 설정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통적인 사회민주주의론이든, 민주사회주의론이든 간에 이들의 문제 설정에는 계획이 필연적으로 독재 또는 전체주의를 생산할 것이라는 가정이 놓여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 설정은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문제 설정일 뿐이다. 자본에게 있어서 계획은 무한 증식 욕구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이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면서 사유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계획과 시장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전히 시장경쟁적인 체제는 없다. 거기에도 환율과 통화, 자본의 배분에 관한 계획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장과 계획이라는 문제 설정은 맑스주의의 위기를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처 놓은 함정으로 몰아가는 것일 뿐이다. 물론 맑스주의의 위기는 스탈린주의적 이행이 봉착한 아포리아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행의 아포리아는 맑스가 말했듯이 그 이행이 자본주의 태내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물질적 한계 때문에 발생한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코뮌으로의 이행을 필연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필요조건’만을 제시할 뿐이다. 충분조건은 오직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조건’은 이행의 최종 심급, 자본의 한계, 극점을 보여주며 그 한계와 극점을 생산하는 모순의 지점을 보여준다. 맑스는 자본의 동학을 분석하면서 자본의 운동이 인류의 노동을 물질화하는 사회적 노동의 기계화, 또는 인간의 분업과 협업적 생산력을 극대화한다고 보았다. 매뉴팩처와 기계제 대공업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이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힘’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을 자본이 자신의 힘으로 전유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이 자본의 물신화를 만들어낸다. 엥겔스가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 간의 모순이라고 명명한 이것은 자본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와 같은 한계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측면에서 인류의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 능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과잉축적에 의한 공황과 자본의 자기 파괴. 따라서 맑스는 인류의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전유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보았다. 물질적 조건에 의한 필연성의 강제 조건.
둘째, 맑스는 생산의 사회화된 생산력을 ‘자본’의 사적 전유, 또는 생산수단에 기초한 자본의 가치 증식으로의 전환이 정치와 경제의 부조응을 확대하고 계급투쟁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화된 생산력은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으로의 엄청난 부의 집중과 자본 지배의 축적 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독점은 자본 간의 수탈체제를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법적 측면에서 완성한다. 그러나 독점은 자유경쟁시장체제의 원리 그 자체를 공격하고 파괴한다. 따라서 사회화된 생산력에 대한 사적인 전유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시장’의 원리 안에 머물지 않으며 사회 전체의 물질적 부의 생산과 유통, 분배를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정치’적 개입 없이 작동될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의 이와 같은 ‘정치적 개입’, ‘정치적 관리’는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 소유의 축적체계로 변환함으로써 정치와 경제 간의 부조응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와 경제 간의 부조응은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괴리와 부조응, 이데올로기적 균열을 유발하며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정치’의 장으로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자의 기본모순은 노/자라는 단일한 적대의 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노/자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체적인 모순과 투쟁의 격화를 유발한다. 경제는 토대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를 지배하며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압도한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 간의 부조응은 경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이행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인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셋째, 사회화된 생산력을 사적으로 전유하면서 드러나는 자본의 한계와 자본축적의 항상적 위기는 축적 체제의 한계나 위기에 의해서 파국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관철되며 계급투쟁의 향방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문제는 ‘생산의 사회화된 힘’, ‘사회화된 노동’, ‘사회화된 생산력’을 사적으로 전유할 수밖에 없는 생산관계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사회화된 생산력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소유는 말 그대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생산자들 자신에 의해 소유되는 체계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개인적, 경제적, 법적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 전체의 생산과 유통, 분배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자 사회적 전체에 의해 지배하는 ‘정치적 소유’의 문제이다.
이것의 핵심은 생산의 사회화가 특정 개인들의 몫을 산출적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개인들의 독립적인 노동 그 자체만으로 개별화하여 회계 처리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미 특정 개인의 노동 능력, 생산 능력은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 사회적인 힘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맑스는 사회화된 생산력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생산자들의 집단적인 의식적 통제에 기초한 소유체계’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의 ‘의식적 통제’는 근대적인 주체가 전제하고 있는 이성에 기초한 과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자들 자신에 의한 집단적 통제’로서 ‘집단 이성’이다. ‘집단 이성’은 상호 주관적이며 상호 소통적으로 형성되는 이성이다. 따라서 ‘의식적 통제’는 사물화된 과학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문가 집단’의 계산적 통제가 아니며 생산자들 자신의 생산지와 생활 근거지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는 자율적 의지와 상호 소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통제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은 사회주의의 문제를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았다. 프레오브라젠스키의 농공간의 부등가 교환과 상품-시장 대 계획이라는 사회주의 원시축적론과 중공업 우선 정책,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주의적 확대재생산에 이르기까지 생산력주의는 정통 맑시주의의 사회주의 이행론을 지배했다. 레닌조차 테일러리즘에 환호했으며 때때로 사회주의를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학적 관점에서 평가하곤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보다 더 낳은 생산력과 물질적 풍요로 밀고 나갈 때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는 ‘생산자들의 자율적 권력’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산력의 발전은 합리적 이성에 의한 조직과 물질화, 그리고 지휘와 통제를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는 이 길을 따라 갔다. 그는 당을 ‘이성의 화신’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계획을 실행하는 주체이자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에 대항하는 완벽한 이성적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생산자들의 자율적 소통과 의지에 의해 조직된 권력’은 이들의 입장에서 무정부성을 대변할 뿐이다. 누군가가 그 계획을 대행해야만 했다. 이성의 화신으로 조직된 당은 그 계획 주체의 적임자였다. 스탈린은 그것을 ‘이성의 화신’으로 규정하였으며 회계와 통제의 주체였던 소비에트는 급속하게 당의 하부 단위로 재편되었다.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스탈린주의의 생산력주의와 당독재는 이와 같은 사회주의 이행에 대한 경제학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당독재에서부터 북조선의 수령론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는 계획-당-지령의 구조를 띄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 대해 우월한 경제력으로, 계획을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에 대립하는 보다 발달된 경제 시스템으로 보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생산자들의 소외된 노동과 사회화된 노동의 억압적 힘, 즉 자본권력을 다른 권력, 예를 들어 노멘클라투라의 권력으로 바꾸어 놓을 뿐이다. 여기서 노동자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생산력의 한 요소, 핵심적 요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노동자는 생산력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단지 생산력의 한 요소로 체계화될 때 노동자의 노동은 자기실현이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노동자의 힘으로 언표되지만 결국은 그 자신을 스스로 옥죄는 또 다른 억압적 권력이 되었다.
스탈린 시기에 생산력 발전은 ‘공산주의적 도덕’에 의해 강제되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이와 같은 인간의 노동력을 사회주의적 생산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은 현실적인 자기 충족, 가치 실현 없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브레즈네프 시절 생산력은 인간의 노동력을 조직화하는 행정적 기술이 되었다. 조직된 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인간 노동력을 사회주의적 생산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당시 등용된 자들이 합리적 테크노크라트들이었다. 이미 소연방에서 사회주의는 자본과 다를 바 없는 인간 노동력의 합리적 조직자이자 가치 증식의 담지자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와 더불어 보수/개혁파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시장-경쟁-이기성→생산력 발전이라는 개혁파의 관점은 이미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었을 뿐이다. 옐친의 등장과 자본주의로의 전화!
그러나 이 모든 전화의 토양은 ‘이행’을 바라보는 ‘정통’ 맑시주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보수/개혁파의 논쟁까지를 포함하여 ‘이행’에 대한 관점은 여전히 경제학의 지형 내부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정치학적 지형’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공산당까지를 포함하여 소위 생산력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접근했던 모든 현실사회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패러다임이었다. 그것은 생산의 사회화를 정치화하는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으며 오직 더 나은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생산자들은 그들 스스로 인류사적 노동이 물질적으로 집약시켜 놓은 생산력을 전유하는 길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으며 오히려 그 힘에 의해 지배받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달리 인민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결국은 자본주의와 동일한 ‘생산 패러다임’ 안에 함몰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생산자들의 자기 통치와 사회화된 생산의 정치적 전유이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의 위기를 현재화하였던 이행의 아포리아로부터 빠져나오는 출구 또한 시장이냐 계획이냐의 경제학적 문제 설정이 아니라 정치학적 문제 설정으로의 전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억압되고 타부가 되어버린 기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또한 이 문제 설정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이행의 실패는 모델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에서 등장했던 이성의 화신으로의 계획 주체=당=국가 권력이라는 전체주의적 이탈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이탈은 경제학적 문제 설정이 아니라 ‘사회적 소유=생산자의 자기 통치 원리로서의 국가’라는 정치학적 문제 설정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3. 정치학적 문제 설정과 21세기 맑스주의의 방향
이행기에 대한 정치학적 관점은 이행기를 도달해야 할 목표나 이상적 모델로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이행 논의들은 ‘코뮤니즘’을 현재가 아니라 미래로 본다. 이런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경제학적 관점’ 위에 서 있다. 이런 논의들 중에서 대표적인 혼란은 다음의 세 가지 관점이다. 첫째는 이행기 그 자체의 성격 규정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이행기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 기간이라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체계로 정의되어 왔다. 대과도기론이든 소과도기로이든 간에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행기’가 코뮤니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코뮤니즘은 최종적인 목표 지점이다. 코뮤니즘,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화된 모델! 여기에 PD(서사연)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여형)라는 또 다른 과도기까지 다시 논의는 확장되었다. 물론 이렇게 논의들이 혼란스러워졌던 데에 레닌의 2단계혁명론이나 중-소 논쟁 등의 전거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코뮤니즘’을 현재가 아니라 미래로 본다는 점이며 ‘이상적 모델’로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개념이 아니며 순수하게 추상화된 사고가 아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도달해야 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현재의 모순이 함축하고 있는 강제된 필연성, 즉 이행의 물질적 조건에 기초하여 미래를 ‘현재’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없으며 그 목표를 순수하게 이념형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단지, 그것은 상상될 뿐이다. 상상은 현실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운이 될 수 있지만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없으며 오히려 자본의 한계 속에서 이후 사회의 기본적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행기에 대한 혼란은 ‘정치혁명 후 사회혁명’ 또는 ‘정치권력을 접수한 이후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한 사회화’라는 단계론적 변혁론이라는 잘못된 사고에 기초해 있었다. 여기서 변혁의 주체는 당이다.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노동자계급의 최고도로 의식화된 집단, 또는 이성적으로 조직된 집단, 스탈린의 이성의 화신을 연상케 하는 당에 의한 국가-사회 전체의 집단적 조직화라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의 확장과 시민사회의 흡수라는 전체주의를 낳았다. 계획화는 이런 전체주의 위에 건설되었다. 사회주의관에 의한 변혁론의 단순화.
그러나 이행기의 핵심적 문제는 목표가 있는 ‘이행의 진화’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결정적 단절 지점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원시적 자본 축적이라는 ‘결정적 단절’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처럼 사회주의 또한 결정적 단절의 지점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 단절은 사회 전체의 코뮌적 조직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이 그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서 중핵을 차지함으로써 향후 운동을 좌우하듯이 사회주의에서도 코뮌이 국가 권력과 사회 권력의 중핵을 차지함으로써 이후 운동을 주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어져야 할 것은 ‘코뮌주의’로의 이행에서 핵심적인 물질적 중핵이 무엇인가이다. 맑스는 이것을 고도로 사회화된 노동, 사회화된 생산력의 중핵을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생산자들이 장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고도로 사회화된 부문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이행의 핵심 동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회적 소유’라는 것이 지닌 아포리아이다. 핵심적인 생산의 중추, 기간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 메커니즘을 틀어쥘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산의 사회화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소유를 국가에 의해 확보되는 법적 형태를 통한 형식적인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킨 것일 뿐, 실질적인 사회적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자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통제되고 관리되고 생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대하게 사회화된 생산력’에 근거한 소유는 개인들의 부분적 소유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소유, 즉 집단적으로 조직된 개인들에 의해 소유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딜레마가 나온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적 소유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조직된 집단, 특정 계급, 생산자계급에 의해 소유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유의 핵심적인 문제는 곧 그것을 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국가 권력 그 자체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국가 권력이 생산자들의 자기 통치 원리로서의 생산자들 자신의 권력이라면 국가적 소유는 사회적 소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 소유가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권력이 되었을 때 그것은 특정 집단의 소유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 현실사회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했던 것이다. 과거 현실사회주의에서의 국유화는 관료적 소유로의 전환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생산자들의 권력으로서, 생산자들의 자기통치원리로서의 국가권력이 아니라 당관료들과 합리적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합리적으로 장악되고 통제되며 지배되는’ 국가 권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제, 정치학적 문제 설정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두 가지 문제의 지점을 보여준다. 첫째, 스탈린주의에서의 국가=당독재라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형성은 ‘계획’이라는 근대적인 이성의 권력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근대적 이성이 추구하는 합리주의와 계몽적 사고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근대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반민주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이다. 둘째, 이행의 본질적 문제는 계획의 산술적 합리성이 아니라 이미 정치화된 경제의 정치적 성격에 근거한 국가권력을 수립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스탈린적 정당은 이와 같은 경제의 정치적 성격을 엘리트적인 이성들의 합리적 계획으로 바꾸어 놓았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지식-권력의 연계효과와 지식의 독점에 근거한 전체주의적 권력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맑스주의의 위기’는 포스트 모던적 담론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고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스트’적 담론들은 이 문제를 근대적 이성 또는 전체주의에 대한 극복의 문제로만 본다. 이 문제는 맑스주의의 틀 안에서 보다 잘 이야기될 수 있다. 문제는 담론들의 층위나 구조 또는 지식-권력의 연계효과, 거시 담론체계, 욕망의 탈주에 대한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국가 장치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부터 논의되어야 한다. 현실사회주의의 이행 전략 실패가 현실화시킨 맑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 또한 국가에 대한 도구론적 관점, 또는 경제주의, 계급환원적 관점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 자체에 대한 논점을 새롭게 해야 한다. 여기에 맑스-레닌은 적어도 일관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장악’이 아니라 ‘기존 국가 장치의 파괴’와 ‘대체’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맑스주의에서 국가 장치의 문제는 ‘망각’되어 왔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국가 권력도 성장하였다. 현대사회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한 사회를 통치하는 국가권력은 그에 부합하는 국가장치를 발전시킨다. 국가장치는 국가권력의 물질화이자 지배이데올로기의 물질화이다. 따라서 국가장치는 그 자체로 물질성을 가진다. 그런데 정통 맑스주의에서 이와 같은 국가장치는 국가의 도구론적 관점을 따라 순전히 ‘수행 주체’의 문제로만 처리되어 왔다. 마치 망치로 못을 박으면 좋은 것이고 남의 머리를 치면 흉기가 되듯이 국가장치도 사용하는 자의 문제라는 식으로 처리되어 왔던 것이다. 근대적 휴머니즘이 지닌 오류의 반복! 따라서 국가장치를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당이 장악하면 그것은 좋은 계급투쟁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장치의 물질성 안에 체현되어 있는 부르주아적 이해와 관점, 이데올로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장치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미 부르주아의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사적 이해관계 속에서 물질화된다. 부르주아 국가장치는 자본의 최대이윤을 생산하는 ‘합리성’과 ‘개인들의 사적 이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물질화된다. 일인일표는 자본주의의 상품적 개별성과 독자성을 표현하며 다수결의 원리는 이런 상품적 개체들의 합의 체계를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삼권분립의 원칙과 의회주의의 원리는 개인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를 표현한다. 따라서 국가장치는 어떤 계급이 사용하는가에 따라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부르주아적 계급의 장치이며 부르주아의 무기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는 프롤레타리아의 국가장치와 동질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적대적이다.
스탈린주의는 정확히 이 부르주아적 국가장치의 덫에 말려들었다.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는 사적 이해들의 충돌을 경쟁과 협상, 타협이라는 시장원리를 따라 구축되었다. 의회-행정-사법이 서로 경쟁하며 조율된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경쟁 하에서 국가장치는 전 사회를 ‘효율적인 생산기지’로 바꾸어 놓는다. 관료들은 이런 국가장치의 전문적 행정가들을 형성하며 이들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따라 행정공학과 사회공학을 발전시켰다. 근대 사회학과 행정학의 발전이 이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 이후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장악한 프롤레타리아의 당은 그 국가장치가 지닌 성향을 따라 근대적 이성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다시 부활시켰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핵심은 생산력 발전이다. 따라서 전 사회를 더 나은 생산의 기지로 바꾸어라! 점차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기 통치원리는 사라지고 대신에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전문적 행정가들과 입법가들, 테크노크라트들이 자리잡아갔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곧 이들 관료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이념일 뿐이다. ‘이성의 화신으로서 당’→‘변증법적 유물론의 과학성’
그러므로 맑스주의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실화된다. 그것은 곧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화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덫이 기다리고 있는 곳, 부르주아 국가장치라는 문제이다.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혀 다른 질의 국가장치를 세우는 것, 바로 여기서 맑스주의의 위기를 너머 나아가는 21세기 사회주의는 시작되어야 한다. 더 이상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의 노선은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낳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 적어도 혁명 이후 국가권력이 부르주아 국가장치라는 물질성에 근거한 국가권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실질적인 인민적 권력, 또는 생산자들의 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이미 혁명 당시에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대체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치,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이데올로기가 각인되어 있는 장치들이 사회 곳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존의 낡은 부르주아적 국가장치를 완전히 대체하고 새로운 권력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곧 사회화된 생산자들의 직접 통치 형태로 물질화된 국가장치의 맹아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나누고 정치혁명 이후 사회혁명을 추진하는 정통 맑스주의의 변혁론적 관점은 기각되어야 한다.
두 개의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혁명 과정 자체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혁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생산자들의 물질화된 권력이 되어야 한다. ‘코뮌’은 바로 이와 같은 물질화된 권력을 표현한다. 그것이 거시적인 권력을 향해 움직이든, 아니면 미시적인 권력의 형태를 가지고 있든 간에 ‘코뮌’은 새로운 권력 장치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사회의 국가 권력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혁명이든 정치혁명이든, 제도적 개혁이든, 반제도적 혁명이든 간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해가야 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코뮌’이라는 생산자들의 자기 통치 조직의 건설이며 구축이다. 생산자들은 자기 스스로 사회 전체의 생산-유통-분배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기의 생산 근거지와 생활 근거지를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코뮌을 구축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국가 권력은 사회적 권력으로 전화할 수 있으며 생산자 자신에 의한 물질적 토대의 장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곧 생산자들이 경제를 정치로 전화시키며 그들 자신이 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생산단위들을 자율적인 코뮌적 단위들로 재편하고 전국적인 수준에서 이들의 생산-유통-분배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정치가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권력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각각의 코뮌들은 경제를 정치화하는 생산단위이자 생활단위이며 국가는 이런 코뮌들의 자치적 통치 권력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사회주의는 더 이상 일회적인 ‘봉기’를 꿈꾸는 준비론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기표에 의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독단의 정치학 안에서 생성될 수 없다. 그것은 ‘구성’되어야 하며 실질적인 인민적 권력을 물질적으로 생성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맑스는 이미 파리코뮌을 분석하면서 코뮌 권력이 ‘행정과 의회의 통일체’이며 ‘직접 민주적 통치권력’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따라서 위임 또는 대리적인 통치의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생산자들이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통제하는 정치권력이자 생산량과 소비량을 조절하는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수행하는 경제권력이다. 계획과 시장이라는 낡은 이분법적 구도를 버려야 한다. 이런 이분법은 계획-이성적 통제-국가권력 또는 당, 시장-무정부성-생산자들의 이기적 경쟁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낳는다. 기존의 소위 ‘정통’ 맑스주의는 계획이 우위에 서서 시장을 통제하고 잠식해 가는 과정으로 설정해 왔다. 게다가 시장은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소부르주아들의 부르주아 생산 장소로 설정되어 왔다. 따라서 정통 맑스주의에서 계획은 언제나 도덕적,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사고되어 왔다. 물론 사회화된 생산 메카니즘에서 계획은 필연적이며 이것이 사회주의에서의 ‘정치’가 지니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계획과 시장 이전에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사회주의=계획=통제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는 생산자들의 자율적인 자치권력이자 생산체제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에서의 계획은 이성과 과학을 확보한 지식인 또는 전문가 집단의 독점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에서의 계획은 생산자들 자신의 자치적 권력이자 그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레닌이 소비에트의 ‘전국적 회계와 통제’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행의 물질적 힘은 정치권력의 폭압적 강제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제는 물질적 힘뿐만 아니라 지적, 윤리적 가치들의 우위를 수반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하에서의 국가권력의 강제력, 물리력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강제력을 경찰과 군대와 같은 무장된 권력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계급투쟁, 또는 프롤레타리아독재=사회주의로의 과도기라는 관념은 이와 같은 사고를 확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서의 ‘권력’과 동일한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권력을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권력은 ‘자본’이라는 물질적 힘과 사법기관, 경찰, 군대의 물리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서의 권력은 인민들 자신에 의해서 주어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하에서 가장 중요한 물리력은 인민들이 그 스스로 사회화된 생산력에 기초한 권력을 향유하는 진정한 인민 권력, 생산자들의 권력으로 전화시키는 데에서 발생한다.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지켜야 할 자신의 가치로 여기는 곳에서 물리력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기초 단위들을 형성하는 코뮌 그 자체가 권력이어야 한다.
사회주의 하에서의 가치 계산은 노동시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론을 노동가치론으로 퇴행시키는 것이다. 가치는 단순히 투하된 노동시간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만 결정된다. 특히 노동이 고도로 사회화된 단계에서 특정한 노동이 산출하는 가치는 단순한 산술적 경제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화된 생산 메카니즘의 자율적 조절과 통제, 상호 소통에 의해서만 결정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물질적 가치나 시간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다. 사회화된 생산 메카니즘에서 전체 생산량과 소비량을 조절하고 집행하는 계획은 단순한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민들의 살아온 사회, 문화적 환경과 역사적 형성에 따라 가지게 되는 특수한 가치들을 가지며 상호 소통된다. 따라서 계획은 경제학적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산자들의 삶의 가치를 반영하는 그들 자신의 집단적 이성, 상호 의사소통에 의해 협의되고 조절되는 과정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특정한 노동의 질과 가치들을 평가할 수 있으며 생활적으로 필요한 물품들과 소비량을 측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 간의 이런 이해 갈등과 가치 평가의 상호 대립을 조절하고 자기 통치권력으로 전화시키는 메카니즘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행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문제이자 그것을 체득하는 주체 형성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행의 정치학적 패러다임은 ① 이행의 핵심 문제를 ‘생산자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권력의 사회화’를 이룩하는 데 있다. 그것은 계획을 어떻게 하고 노동의 몫을 어떻게 계산하고 어떤 방식으로 계획과 시장의 관계를 형성할 것인가에 놓여 있지 않다. 이 이전에 먼저 전제되어야 할 출발점은 사회화된 생산의 물질적 기제들을 전유하는 국가권력의 메카니즘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있다. 정치혁명은 이미 사회혁명이며 부르주아 국가 장치는 새롭게 구성된 프롤레타리아 국가 장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②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 장치를 장악, 탈취함으로써, 또는 접수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이행은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을 가지는 새로운 국가 장치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런 국가 장치는 생산자들과 인민들의 자율적인 생산-생활 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이행은 ‘혁명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변혁 전체의 중심적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코뮌’이라는사회주의의 물질적 토대이자 사회주의 권력의 물리적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③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후 ‘전 인민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 인민권력’으로의 전화, 또는 ‘사회적 권력’으로의 전화를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코뮌’과 코뮌의 직접 민주주의적 국가 장치의 형성은 생산자와 인민들의 실질적 민주주의로서 그 자신의 권력으로 전화는 핵심적인 교두보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두보는 혁명 이후에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이전에 이미 조직된 권력으로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혁명과 사회변혁은 두 개의 단계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변혁 과정은 이런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④ 사회주의에서의 물리력이나 생산력은 ‘경제학적 관점’에 의해 조직되거나 형성되지 않는다. 생산자와 인민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 실현으로 전화되지 않은 생산 방식은 노동하는 자의 내적 동력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외적 강제를 필요로 한다. ‘공산주의적 도덕’이나 ‘조직-행정공학’, 그리고 ‘시장’은 이와 같은 외적 강제이다. 따라서 내적 힘을 사회적인 생산의 힘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전화는 물질적 이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자들과 인민들의 내적 생명력을 ‘공동체적인 삶’의 활력으로 바꾸어 내는 총체적인 관계성의 형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경제적인 물질적 이득에 의한 유인 동기의 부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을 포함하는 공동체적 삶으로 녹아들어가는 ‘코뮌’적 삶의 가치 실현 그 자체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⑤ 주체 형성은 전위와 대중의 이분법이 아니라 대중의 역능성이 자기 삶의 실현으로 확장될 수 있는, 그리하여 생산자와 인민들이 자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 공동체적 삶의 실현 주체가 되는 정치-사회-문화적 주체 형성 과정이 되어야 한다. 당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주체 아니라 대중들의 직접 통치와 대중적인 자치 권력을 형성하는 길을 안내하고 대중 속으로 사라지는 정치조직일 뿐이다.
⑥ 행정공학 또는 이성중심적, 또는 과학지상주의적 견해는 폐기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이행에서 ‘민주주의’가 핵심적인 문제 중에 하나인 것은 ‘생산의 사회화’를 이룩하고 사회 전체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핵심이 산술적이거나 기계적인 회계가 아니라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의견조율, 그리고 상호 이해에 기초한 민주적 합의의 도출이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은 ‘정치’이며 ‘행정공학’과 ‘과학’은 이것에 복무하는 자료 또는 수단에 불과하다.
⑦ 산술적인 가치의 단순화는 모든 인간을 평균적인 인간으로 규격화하는 것으로, 결국 강제적인 폭압적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치의 다양성과 상호 차이의 이해가 공유되어야 하며 이를 기초로 한 코뮌적 삶의 공동체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4. 21세기 사회주의와 운동의 다원화

21세기 사회주의는 두 가지 지형 위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하나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형 위에서,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공세에 대한 반전의 계기를 창출하는 지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가 노정했던 이행의 아포리아로부터 현실화되었던 맑스주의의 위기는 한국 좌파운동에서의 좌표 상실과 정체성의 와해를 불러왔다. 게다가 이와 같은 좌표 상실과 정체성의 와해는 위로부터 강제적으로 수행되어 왔던 민주주의에 의해 맑스적 사회주의의 해체와 고립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위로부터의 수동혁명은 민주주의를 자본의 지배 헤게모니 구축으로 귀착시켰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수동혁명은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자유주의 블록을 탄생시켰다. 기존의 운동은 급속히 시민운동으로 흡수되었으며 시민운동은 쁘띠 부르주아들을 자유주의적 지배 헤게모니로 결집시켜 들어갔다. 80년대 중반 이후 시민운동은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노동운동 내의 사회적 합의주의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포진해 있다.
반면 좌파는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 투쟁에서 공동 전선을 창출하는데 실패해 왔다. 좌파의 무능력은 바로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공세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한국의 좌파는 80년대 중반 이후 당 건설을 추구해 왔지만 87년 민주변혁을 사회주의적 전망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현실사회주의권’의 와해와 더불어 몰락의 길을 걸었다. 소수 현장에서 살아남은 세력들이 있었으나 80-90%는 제도권 정치운동이나 신사회운동, 또는 생활인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정통적인 좌파들조차 자유주의 지배 헤게모니의 압박 속에서 더욱더 고립화되고 소수화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80년대를 회고했으며 변화된 지형에 대응하는 자기 전략을 정립하지 못했다. 고립이 심화되고 패배가 반복될수록 운동은 자기 조직의 정체성과 재생산에 치중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전국적인 좌파정치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벽이 되어 돌아왔다. 현시기 노동운동 내의 여러 가지 위기의 징후들은 바로 이와 같은 좌파운동의 정치적 무능력과 전망 부재가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현장운동의 쇠퇴’와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은 자꾸만 혁명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노동운동 내의 분열과 노동자계급 내부의 대립과 반목, 계급적 분열은 가속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나침반은 작동하고 있지 않다. 사상적 정체성의 해체는 자본 그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 제도적 좌파와 반제도적 좌파 제도적 좌파와 반제도적 좌파로 구분한 것은 현재의 체제 내적인 합법적 영역 속에서 구조 개혁에 중점을 두는 세력과 현재 주어진 모든 제도적인 틀과 합법적 가치들을 부정하거나 이를 극복하려는 좌파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로 분화되고 있으며 양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좌파의 정치적 좌표는 마련되지 않고 있다. 제도적 좌파는 의회-선거운동과 제도적 정당운동으로, 국가와 시장을 매개로 한 합리적인 시민사회운동으로, 구조개혁과 생활민주주의로 자꾸만 함몰되어가고 있다. 반제도적 좌파는 니체-스피노자-프로이드와의 접목을 통한 탈맑스 또는 맑스주의의 전화(네그리안과 들뢰즈안, 발리바르안)라는 관점에서 반권력적, 반국가적이라는 무정부 성향을 지닌 코뮌적 네트워크로 나아가고 있다. 맑스적 사회주의 맑스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의 여러 조류 중에서 맑스주의 전통 내에 있는 조류들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조류들은 노동자계급중심성-노동자계급헤게모니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조류들이다.
는 평의회와 노동자 통제, 그리고 트로츠키주의와 정통 맑스-레닌주의적 조류들로 분리 정립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흔히 정통적인 좌파들이 그러하듯이 이런 분화,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변절이거나 계급성의 상실이라고 비난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은 분화는 현재의 지형이 객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운동의 분화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과거와 같은 단순한 권력의 지형 위에 서 있지 않다. 근대적 권력은 적대의 선이 분명한 권력적 지형을 가지고 있다면 탈근대적 권력은 푸코가 보았듯이 다양하게 분절화된 미시적 권력들이 우리의 몸에 내재적으로 배치되는 생체권력이다. 부르주아적 지배권력이 국가로 단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권력의 장에서 우리의 생활을 조직하고 우리의 몸을 ‘주체’로 조직한다. 국가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사회권력이다. 부르주아 권력의 유연성과 강고함은 이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운동의 분화와 다양화는 필연적이다. 부르주아 권력은 이런 운동들을 다양화하면서도 체제내화한다.
탈주 또는 도주가 가지고 있는 합리적 핵심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 권력의 유연성과 그 유연성이 만들어내는 강고함 앞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사회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의 대립은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부르주아적 권력의 배치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좌파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도적 좌파는 이와 같은 부르주아적 권력의 역동성에 투항하여 이제 더 이상 의회-제도적 측면에서의 구조 개혁밖에 없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반제도적 좌파 중에서 ‘맑스주의의 전화’, 또는 탈맑스적 조류들, 즉 포스트 모던적 좌파들은 생체적인 미시권력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영원회귀적 탈주의 전략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미시권력이 아니라 거시권력이다.
그러나 정통적인 맑스주의를 비롯한 맑스적 사회주의가 이와 같은 거시권력에 대항하는 운동의 지형을 창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위기 안에서 과거를 부여잡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계급환원주의, 계급적 본질주의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노/자간의 기본모순으로 모든 적대의 선들을 환원하고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다른 모든 사회운동적 투쟁들을 폄하한다. 그들은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부르주아 집행위원회’ 정도로 생각하는 국가에 대한 도구론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장 투쟁은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자본의 공세 앞에서 고립되고 각개 분산되면서 패배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뿐이다.
문제는 운동의 다양화나 관심의 다양화가 아니다. 정통적 맑스주의자들은 마치 현재의 운동이 별 시답지 않은 현학적 인텔리들의 포스트 모던적 논의들과 시민사회운동에 있는 것처럼 비난만을 퍼부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현재의 운동과 지형을 단일한 적대의 선으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로 구축해 내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력과 단일한 반자본 전선을 구축하지 못하는 좌파 내부의 분열상에 있을 뿐이다. 환경과 (여)성, 인권과 같은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의회-선거와 같은 정치운동과 노동자-민중의 투쟁의 근거하는 대중운동, 생활 공동체적 운동과 시민사회적 권력 통제 운동, 그리고 반자본적 대체권력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은 서로 간의 반목을 만들며 소통을 단절시키고 가로막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할 뿐, 공통의 전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운동의 다양성은 부르주아 지배권력의 헤게모니로 흡수되어가고 있다. 운동의 토양은 다양해졌지만 그 속에서 시민사회운동은 자본의 헤게모니로 흡수되고 좌파의 고립은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87년 이후 한국에서 진행되어 온 반혁명적인 위로부터의 수동혁명은 민주화라는 지배코드를 따른 자유주의 지배블록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20세기의 사회주의 운동에 비해 공간적으로나 사안적으로나 보다 폭넓고 다양한 운동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이것은 양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측면에서 그것은 부르주아 권력의 유연성과 치밀함, 강고함을 보여준다면, 그리하여 부르주아 권력의 헤게모니가 지닌 생명력을 보여준다면 다른 한 측면에서 자본의 이윤 증식 욕구가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전 지구적이고 전 사회적이며 전 인민적인 적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통적인 맑스주의는 이 적대의 가능성을 계급환원론의 관점에서 적대시하였다. 물론 시민운동이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쌍생아이며 시민운동의 성장이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맥락을 같이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운동의 분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회운동=시민운동=쁘띠부르주아 운동=자본의 지배 블록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사회운동은 자본의 공세가 불러일으키는 전 인류적이고 전 지구적 위기 앞에서 ‘반자본’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인류 공동체, 국가 공동체 전체의 파국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본의 한계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 즉 자본과 자본의 자기 증식이 생산의 출발점과 종점, 동기와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의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가 있다. [생산자 대중의 수탈과 빈곤화에 입각하는] 자본가치의 유지와 증식이 그 안에서만 운동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한계는 자본이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생산방식-생산의 무제한 증가, 생산을 위한 생산,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로 향하여 돌진하는 생산방법-과 끊임없이 모순되게 된다. 수단-사회적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이 제한된 목적[기존자본의 가치증식]과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것이다.”(K. Marx, Das Kapital, 김수행 역, 『자본』Ⅲ 상, 297-298쪽
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한계를 인류가 아닌 자본 그 자체의 파국으로 밀어붙이는 좌파의 단일한 전략과 힘의 결집이다. 운동의 분화와 다양성은 이런 자본의 한계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생산되는 적대의 분화이며 부르주아 권력과 노동자·민중 권력 간의 계급투쟁의 산물일 뿐이다. 포스트 모던적 좌파들은 이런 운동의 다양성을 근거로 적대의 선에 있어서 노/자 간의 중심성을 부정하며 맑스적 좌파들은 노/자 간의 계급투쟁 중심성을 근거로 미시적이고 생체적인 권력, 사회권력의 다양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적대의 선은 노/자 간의 기본모순을 중심으로 하여 원심적으로 퍼져나가면서도 노/자 간의 기본모순을 중심으로 하는 구심력 안에서 배치되어진다. 코뮌은 바로 이와 같은 운동의 분화와 구심력 속에서 생성되는 대체 권력의 맹아들이자 장차 대체권력이 될 수 있는 사회권력들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사회주의는 20세기 사회주의의 공간과 질 안에서 지속될 수 없다. 오히려 21세기 사회주의는 20세기 사회주의가 역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자기 한계를 돌파하는 작업, 즉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한계를 돌파하는 지점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지배의 책략과 권력의 배치, 그리고 20세기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노/자적 단일성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정통적인 맑스적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 극복이라는 과제 안에서 주어질 것이다. 더 이상, 단일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복수의 사회주의에 대해 말해야 하며 그들 사이에 소통과 개방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좌표가 없다는 엄혹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향한 극복의 몸짓과 실천이 실행되어야 한다.

5. 한국 좌파 운동의 상태와 대립의 지점들

1) 전체적 동향
1996-7년 총파업투쟁 이후 한국에서의 좌파 지형은 크게 보면 민주노동당-(희망)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적 세력과 반의회적 세력으로 분화되어 왔다. 이 중에서 의회적 세력은 지난 2004년 4. 15 총선에서 드러나듯이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의 주도성 확보와 (희망)사회당의 고립으로 끝났으며 반의회적 세력은 노동자의 힘(이하, 노힘)과 ‘비합그룹들’, 그리고 신좌파적 그룹들로 분화되어왔다. 이중에서 현재의 지형 상 가장 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민노당이다. 그러나 민노당은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따른 공식적인 노동운동의 대표성을 자임하고 있으면서도 ‘탈계급적 국민정당’으로의 탈바꿈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 민족주의세력의 당권 장악이며 둘째, ‘국민파’와 민족주의의 대중노선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주의-의회주의’가 현재의 주도세력이라는 점이며 셋째 지난 4. 15총선 이후 당 내의 당원들 비중에서 탈현장적인 ‘시민적 계층들’(화이트칼라, 여성, 학생, 지식인 등)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4년 하반기를 거치면서 민노당 내에서는 여러 가지 모색이 진행 중이다. 민노당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2002-2003년을 거치면서 한국 내의 민족주의 세력(전국연합, 한총련, 전농 등)의 입당 전술과 더불어 2004년-2005년을 거쳐 당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민파가 ‘시민운동’을 축으로 이에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민노당의 의회-시민화된 탈계급적 국민정당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최근 주대환의 영국노동당 모델식의 발전 방향은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8월 22일, 주대환 민주노동당 전 정책위원회 의장이 울산에서 강의한 내용을 <레디앙>에 실은 이후, 민주노동당의 성격과 이념을 둘러 싼 논쟁이 전개되었다. 여기서 주대환은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은 영국노동당, 뉴질랜드노동당과 같은 계보의 중도좌파 정당이요,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이다, “민주노동당은 사회당이 아니라 노동당이다. 족보상 독일사민당 계열이 아니라 영국노동당 계열이다. 즉 이념적 순수함보다는 대중성을 먼저 확보하고자 하는 발전 전략을 영국노동당으로부터 물러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민노당 내의 좌파, 즉 중앙파인 ‘전진’과 좌파인 ‘해방연대’의 탈고립화-세력 확대의 모색이 본격화하고 있다. ‘전진’은 더욱 시민화된 우경적 노선을 모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반이 현장이며 민노당 내의 당권 투쟁에서 좌파를 필요로 한다는 측면에서 민노당 내의 분파는 민족주의-국민파 대 전진-해방연대로 분화되고 있다.
민노당의 현재 당권파인 민족주의 세력은 민노당의 ‘민족민주정당화’와 2012년 ‘민족민주정부’ 건설을 목표로 한 당명개정과 강령 개정(정치노선: 민족비지 포함하는 민족해방통일전선 수립과 이를 통한 민족민주정부수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민노당 내의 좌파 세력은 독자적인 조직 결정을 통한 분파활동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 활동 강화론’과 이에 따른 독자적인 활동 조직 건설 논의를 작년부터 시작하였다. ‘화요모임’과 민주노총 내의 중앙파는 ‘전진그룹’을 결성하였고 ‘평등연대’는 ‘사회주의 활동강화’와 현장 내의 ‘직장분회활동’ 편재, 그리고 과도적 강령을 중심으로 한 ‘해방연대’를 출범시켰다. 이것은 곧 이전의 민노당 내의 활동보다 민노당 밖을 통해서 자신의 분파 세력을 확장하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사회당은 의회-선거-대중정당의 장에서의 ‘패배’로 이완된 조직을 다시 정비한 이후 올해 희망사회당을 재창당하면서 내년 대선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사회당은 ‘사회적 공화주의’ 사회당이 제시한 사회적 공화주의는 “공화정이라는 시민적 정치 공동체의 조건을 문제삼고, 그것의 실현을 국가적, 사회적으로 다시 말해 공동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권리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을 접근한다. “사회적 공화주의의 의제적 개입이라는 원칙은 탈배제 강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대략 경제 사회에서의 탈배제 강령(산업 재편, 노동시장 재편, 사회복지), 정치적, 시민적 교육의 강화를 통한 탈배제 강령, 평등한 접근권과 참여의 기회 보장을 통한 탈배제 강령, 차이의 인정을 통한 탈배제 강령 등으로 나눌 수 있다.”따라서 이것은 공화주의의 급진화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사회당은 “한국 사회의 미래 전망에 대한 대안 프로젝트를 내놓고 경쟁하는 정책 세력으로서의 정당,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정당,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정상국가화를 선도적으로 제기하는 정당”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희망사회당 미래전략기획단 보고서」) 사회당 대표 신석준도 “사회적 조건이 충족된 공화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정치는 사회주의 정치가 아닙니다. 공화주의 정치입니다. 공화주의적 정치는 사회 공공선의 정치입니다.”(「동지에게 2: 시대의 기운이 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를 내세우며 보다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정치활동을 선언하고 있다. 사회적 공화주의는 일반민주주의적 요구들, 보다 보편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공화주의는 기존 사회당이 기반하고 있었던 ‘탈산업’적 요소와 ‘탈노동’적 요소가 보다 일반적인 원칙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공화주의는 사회주의적인 정체적 정체성보다는 대중성에 방점이 놓여 있으며 이것은 좌파의 통합을 핵심 목적으로 삼았던 ‘통일좌파’ 노선이 실패했다는 정세적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대중정당론’을 폐기한다는 것은 ‘통일좌파’에 입각한 당 확장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좌파를 통합하여 운동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대중정당으로 나아간다는 노선의 폐기를 뜻합니다.(「동지에게 4: 동지들의 삶은 언제나 저를 비장하게 합니다」)

반면 반의회주의 세력은 노힘, 기존 비합그룹, 신좌파적 세력으로의 분화가 지속되면서도 이런 총체적인 변화의 과정에서의 새로운 전진을 위한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노힘과 기존 비합그룹들에게 이와 같은 변화는 현단계에서 일종의 ‘생존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형성해 왔던 현장에서의 지지기반이 와해되거나 아니면 지속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의 각개격파와 고립화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힘은 기존의 금속과 공공 등에서 간헐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 좌파의 고립화는 상급 노조 선거에서의 새흐름-중앙파-노힘의 연합전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합법적인 공식 노조 집행라인을 통한 사업 작풍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고립화에 대한 자기 모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좌파의 고립화는 노힘의 현장 지지세의 약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반면 ‘비합그룹’들은 공식적인 노조 라인을 거부하고 아래로부터의 수공업적 조직방식을 통한 단사나 공장 내의 소소한 분파들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간 진행되어 온 의회주의/반의회주의의 대립은 전반적으로 의회주의의 승리와 좌파의 고립화라는 방향을 향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회주의의 성공은 사회전체적으로 ‘탈계급적 국민정당화’를 보다 본격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민노당의 당권파-민족적이고 시민화된 대중노선과 희망사회당의 사회적 공화주의는 본격적인 의회적 대중화, 대중들의 표심을 끌어당기려는 ‘탈계급적 국민정당화’의 방향을 보여준다. 반면 좌파는 여전히 완강하게 현장을 고집하고 있지만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 투쟁을 역전시킬 수 있는 힘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현장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고립화와 패배는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요구하는 전국적이고 전계급적 투쟁-조직질서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의 ‘이기주의’와 투쟁 회피, 실리주의는 ‘반자본’의 도도한 힘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좌파 자신의 무능력에 기인한다. 따라서 계급적 좌파 진영에서 볼 때, 현재의 ‘고립화’는 다른 한편으로 대중적이고 공개적이면서 정파의 틀을 벗어난 투쟁의 질서 창출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은 현상적으로 이 틀을 더욱 강하게 세우는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은 수세적으로 몰리는 상황에 따른 즉자적 반응의 결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상황을 탈피하고자 하는 모색 속에서 다른 가능성 또한 내적으로는 생겨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변화는 비합그룹들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재작년 중순 이후 ‘비합그룹’이 ‘비합’ 생활로부터 벗어나 공개적인 정치‘신문’을 통한 본격적인 공개대중정치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노동자 해방 당 건설 투쟁단’을 중심으로 전략적 지도조직의 건설에 관한 논의들을 시작하고 있다는 점 비합그룹에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글은 『남한에서의 노동자 투쟁과 현 단계 노동계급운동의 과제』와 『현 시기 노동자 단결전선과 혁사진영』 등이 있다. 이 글들은 모두 다 ‘노동자 해방 당 투쟁단’에서 나온 글들이다. 여기에 가장 완고하게 좌파연대, 특히 노힘이나 중앙파와의 연대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세력은 미래연대와 사노신이다.
이다. 비록 노힘은 2005년 ‘현차’와 ‘전노투’에서의 문제들로 인해 배제되고 있지만 ‘노동자 해방 당 건설 투쟁단’을 중심으로 한 현장 좌파들의 공동 모색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계급적 좌파 전체의 ‘고립화’를 탈피하고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현장 내의 ‘합의주의’에 대항하는 공동 투쟁과 공동 모색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보자면 반의회주의 세력 또는 통칭 계급적 좌파 진영으로 불리울 수 있는 이들 세력 내에서의 정파간의 갈등과 노선의 분화, 사상·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여전히 강고하다. 특히 이 중에서도 노힘/비합그룹/신좌파들의 경향적 분화는 매우 큰 폭에서의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노힘은 노조 현장에서의 세력기반(통칭 ‘좌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층 현장보다는 민노총과 상급 노조 중심의 활동에 방점이 놓여 있으며 애초 선언한 ‘정치조직’의 질로부터 후퇴하고 있다. 반면 비합그룹은 민주노총-관료화, 개량화에 근거하여 반노조적 소조운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사나 공장과 현장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노동운동은 단사나 공장 중심의 지역적 현안에 매몰되는 투쟁의 작풍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신좌파는 이들과 아예 결을 달리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현장-공장 중심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나 자본의 ‘배재적 집단’에 근거한 투쟁, 사회운동적 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의 재편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황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국민파’ 등의 ‘합의주의’ 세력을 제외한 좌파는 크게 3가지의 흐름으로 분리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민노당 내의 좌파들로 해방연대(전진)이며 둘째, 노힘과 기존 비합그룹(이하, 계급적 현장운동진영)이며 셋째, 포스트적 경향을 지닌 신좌파로서 사회진보연대와 ‘이윤보다 인간을’ 등이다. 아울러 이전까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분화되어 왔던 핵심 쟁점이 대중적으로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의 축은 정파별로 단일하지 않다. 여기서 핵심 쟁점은 ① 의회주의 또는 의회를 통한 집권노선이며 여기서 대립하는 축은 민노당-사회당 대 타좌파세력이다. ② 민주노조운동과 이에 대한 평가로서 여기서 대립하는 축은 민노당 내 좌파-노힘 대 그 이외의 좌파들이다. ③ 신자유주의 지구화 이후의 변혁, 주체형성전략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쟁점들로서 여기서의 핵심 축은 ‘세계화’의 보편적 가치-포스트적 경향을 지닌 좌파-사회당 대 이외의 좌파들이다.

2) 각 조직과 분파별 쟁점

① 민주노동당과 민족주의
민노당 내의 당권파(민족주의) 세력은 현재의 민노당을 민족민주정당으로 바꾸고 민족민주정부를 수립하여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간다는 전략전술을 세워놓고 있다. 이들은 현재를 투쟁의 하향기로 보기보다는 ‘준정치투쟁의 절정기’(05년)에서 준정치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비약’(06년)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특히 이들은 06년을 ‘2차 남북수뇌회담 이후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구현되는 해’이자 ‘민주노총의 정치총파업’이 이루어지는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반미투쟁과 통일투쟁을 핵심으로 놓고 보기 때문이다. ‘지역민중연대 건설 및 민중연대와 통일연대의 통합, 그리고 자주민주통일의 통전 수립’을 제시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아울러 ‘분파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진보적 집권을 앞당기기 위해서 ‘현장조직의 해체’와 민노당 노동위로의 결집도 제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제시하는 핵심적인 현시기의 전술적 방향은 첫째, 반미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중연대의 재편과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전선의 구축이며 둘째,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역할의 민노당 노동위로의 이전과 노동위원회 강화를 통해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 그리고 양대노총의 통합이다.

② 민주노동당 내의 좌파적 분파들
민노당 내의 좌파 그룹인 ‘전진’과 ‘해방연대’는 민노당의 현상태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민노당이 10석의 의석수를 차지하는 성장(외형적 성장)을 이룬 대신에 내용적 성장은 오히려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첫째, 당의 정체성(민족주의자의 강령은 탈사회주의적인 것으로 평가-2단계 혁명론에서 민주주의에 치우쳐 있음)이 모호해지고 있으며 둘째, 운동정치와 제도정치 사이에서 제도정치로의 변질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선거정당으로의 전락) 그리고 셋째, 노동운동에 대한 정치적 개입의 부재와 당의 탈노동계급화에 대한 우려도 동시에 표명하고 있다. 해방연대가 제시하는 민노당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대중운동과 대중정치투쟁의 방기, 2) 민족주의적이고 몰계급적인 노사타협적 경향성의 확대, 3) 의회주의와 제도주의 등 개량주의적 경향의 확산, 4) 당내 기풍과 당내 민주주의의 심각한 약화, 5)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은 양적 성장 위주의 사고방식 만연 등”(해방연대,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조직 해방연대 이해-20문 20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현재의 민노당의 강령이 좌파적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보고 이를 중심으로 확대 강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반의회주의 세력에서 흔히 비판하는 선거의회전술을 통한 변혁이라는 국가 장악 노선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민노당이 권력 장악을 위한 당이라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다.

②-1. 전진그룹
‘전진그룹’은 민노당의 현 강령을 한국의 현 상태에 가장 적절한 강령으로 평가하고 이를 더욱 강화하는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을 주장하고 있다.(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민주의 한계 극복) 아울러 북한은 스탈린주의이며 민족주의의 혁명론은 2단계혁명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최대강령과 최소강령, 개량과 혁명, 대중운동과 제도정치의 결합(총파업 전술 기획)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신자유주의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는 ‘분배와 전쟁위협’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의 강화(산별건설과 계급적 연대 강화, 직장분회의 지역적 편재와 지역운동의 강화)를 주장하면서 사회복지의 확장을 통한 공공부문의 확대, 반제반전평화운동의 구축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핵심은 산별건설과 지역운동의 확장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 모든 운동, 의회전술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운동이 ‘민중권력의 맹아 창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현시기에서의 핵심은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의 강화’-산별건설과 직장분회 건설과 지역운동의 강화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2004년 나온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준) - ‘전진’」을 보라.


②-2. 해방연대
‘해방연대’는 민노당 자체 내의 혁신은 현재로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서 별도의 정치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직은 민노당과 다른 별도의 정치조직이 아니며 민노당을 중심으로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분파조직’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민노당과의 분리 가능성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될 수도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다만, 지금 단계에서 사회주의 정치조직의 맹아를 창출하는 데 민노당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당분간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전진’과 달리 민노당을 전략적 수준에서 사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민노당을 현시기에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현 시기 민주노동당을 토대로 하지 않고, 민주노동당과 별도의 변혁정당(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해방연대, 앞의 글)
이런 측면에서 이들은 현시기 민노당 내의 사회주의 활동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대중정치투쟁과 제도정치투쟁의 결합’ 제도정치투쟁보다 대중정치투쟁이 당 활동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왜 대중정치투쟁이 의회활동 등 제도정치투쟁보다도 우위에 놓여야 하는가? 대중정치투쟁을 통해서만이 진정으로 당이 강력해질 수 있고, 변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글)
(중앙당에 대중정치투쟁을 지도할 참모부를 설치)을 이야기하면서 민노당 내의 사회주의 활동 강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 공장(현장)분회, 노동자지역분회-광역시도의 각 직장(지역)별 당노동자협의회-중앙당의 노동위원회 산하로 편재’를 주장하면서 ‘중앙당-시도당-지구당-(지역, 현장)분회-당원’이라는 현재의 당체계를 ‘시도당-직장(현장)당-직장(현장)분회의 계선조직’으로 편재한다는 조직 체계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정치조직은 당의 노동자중심성을 강화키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당 조직사업에서는 노동위원회를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노동자 공장(현장)분회, 노동자지역분회 결성을 기초로 해서 광역시도 산하에 각 직장(지역)별 당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하고, 이러한 제반 노동자조직을 중앙당의 노동위원회 산하로 편재해 내야 할 것이다.(같은 글)
아울러 현단계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노동운동 상층의 개량화’와 ‘노사정협조주의’, ‘총체적 전망과 전술의 결여’로 파악하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정치화’가 불가피하며 ‘정치화’ 없이 현재의 상황을 돌파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은 ‘과도적 강령’ 과도적 강령은 사회주의 변혁의 전략적 지점을 향해 가는 ‘가교’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해방연대에서 밝힌 과도적 강령은 다음과 같다. “과도적 강령이 ‘가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그 자체로서는 불충분할지 모르지만 현질서와 충돌하고 있는 대중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중들의 요구가 그 자체로서는 개량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이들 요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과도적 강령이 대중들의 의식과 의지를 근본적 과제를 실현하려는 의식과 의지로 이끌 수 있는 전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공기업 민영화반대투쟁의 경우, 단지 공기업의 사기업화와 민영화에 대한 반대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반대하여 개발독재적 경제시스템을 옹호하는 투쟁을 벗어날 수 없다. 사기업화 반대 투쟁은 ‘사회화’투쟁이 되어야 하며 개발독재시기의 공기업을 노동자·민중이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공기업으로 만드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과도적 강령이 이러한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와 권력의 장악이라는 과제와 밀접히 결합되어야 한다. 과도적 강령이 이 과제와 분리될 경우 공허한 것이 되거나 과도적 강령의 실현이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 없이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낼 것이다.(해방연대, 「과도적 요구 과도적 강령을 적극적으로 제기해가자!」)
을 중심으로 하여 대중에 직접 다가가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②-3. 양 분파의 차이와 평가
양 분파는 첫째, 민노당의 현상태를 의회주의, 개량주의로 평가하는데 있어서 동일하다. 둘째, 민노당 내의 좌파로서 민노당의 정체성 약화에 동의하고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동의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해방연대는 전진이 김혜경 민노당 대표를 지지했던 것을 비판하면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연대는 중앙파를 범좌파에 넣고 있으며 이들 간의 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민주노총내의 세 가지 노동운동노선 중에서 우파인 국민파를 제외하고서, 중앙파와 현장파를 통상 좌파라고 부른다. 이들 좌파는 현 시기 대체로 사상노선에서 사회주의실현을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을 범좌파로 묶어내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민주노총의 현장파와 중앙파, 민주노동당내의 사회주의지향의 좌파를 묶어서 강령과 규율을 명확히 한 정치조직을 형성할 수도 있다.”(해방연대,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조직 해방연대 이해-20문 20답』)
첫째, ‘정당조직운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진’이 전략적 단위의 건설을 사고하지 않는 반면 ‘해방연대’는 전략적 단위 건설을 장기적인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대중노선에서 ‘해방연대’는 과도적 강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활동의 본격화를 주장하는 반면 ‘전진’은 시민운동화된 복지적 운동으로서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을 주장 전진은 해방연대에 비해 훨씬 우경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노동조합운동이 노동계급의 균열과 해체 경향에 맞서서 평등과 연대의 정신을 고취하도록 계급적 단결의 내용을 확보(사회운동적 요구)하고 그 폭을 확장(산별 건설)해야 한다.”(전진, 앞의 글) 따라서 전진은 사회운동=복지와 산별 건설을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셋째, ‘노동자계급 중심성’ 강화에 대한 방향이 서로 다르다. ‘전진’이 산별과 지역운동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성 강화를 주장하는 반면 ‘해방연대’는 ‘직장(공장)분회’와 지구당 중심이 아닌 ‘직장(공장)’ 중심의 당 조직체계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전진이 민주노총 내의 중앙파-조합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 ‘해방연대’는 과도적 강령 중심의 사회주의 정치활동과 사회주의적 변혁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분파는 ‘의회주의의 덫’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경향은 ‘전진’에게는 명확히 나타난다. 전진과 해방연대는 다소 다른데, 전진은 혁신의 목표가 민노당의 혁신이다. “민주노동당이 단순히 의회정당·선거정당에 머물지 않고 노동계급의 성장에 복무하는 운동정당으로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같은 글)
여전히 양 분파는 민노당의 의회주의, 개량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의회주의=의회선거전술을 통한 국가권력장악과 이를 통한 이행전략’이 지닌 문제를 어떻게 돌파해 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대중운동’(전진)이나 ‘대중정치투쟁’(해방연대)과 제도정치(운동)의 결합뿐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진일보한 생각이다. 제도 정치운동과 비제도 정치운동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운동은 우경화와 좌경화의 좌우편향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제도적 정치운동과 사회변혁전략은 근본적으로 ‘의회선거를 통한 국가권력장악에 근거한 이행전략’의 폐기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핵심적인 이행의 수단은 여전히 국가권력(대체 없는 국가장치의 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권정당이라는 민노당의 근본적인 질적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활동은 의회주의로 포섭되거나 아니면 고립되는 형국을 띌 수밖에 없다. 의회적 길을 통한 수권은 결국은 득표이며 이런 득표는 개별화된 개인들의 욕망을 조직하는 이벤트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권정당 안에서의 ‘대중운동’, ‘대중정치투쟁’은 궁극적으로 제도적 방식(의회선거의 득표전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③ 계급적 현장운동진영
04년을 거치면서 계급적 현장운동진영(기존 비합그룹들)의 변화 또한 일어나고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들이 정치신문을 통한 대중운동으로의 침투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해방 당 건설 투쟁단은 현장노동자 신문(이하, 당건투)을, 전국노동자정치협회는 노동자정치신문(이하, 노정신),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이하 사노신), 노동해방연대(구 미래연대, 이하 미래연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치신문을 통한 조직의 공개활동은 단순한 조직 활동 형태의 변화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과 다른 활동방식뿐만 아니라 그에 부합하는 조직위상과 조직체계의 변화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신문을 통해서 공개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에 있어서 이에 부합하는 정치조직의 위상 변화와 더불어 공개적인 정치적 입장의 제출과 검증, 당 건설을 포함하는 전략적 방향 등을 내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여전히 기존 비합그룹들 사이에서의 분화 또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계급적 현장운동진영 내에서의 정치사상-노선 등에서의 합의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된 상황에 근거한 대립과 통일의 분화 작용은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④ 신좌파적 경향을 지니는 좌파들
‘이윤보다 인간을’과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을 강조하고 새로운 국가권력의 수립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신좌파적 경향을 지닌 대표적인 조직들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단체로 스스로를 표방하고 있으며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 여성운동과 함께 가는 노동자운동 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비정규, 중소영세, 여성, 이주노동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변혁 주체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관점은 ‘보편적 가치’이다. 자본에 의해 분절화되어 주변화되고 보편적 가치들이 박탈되는 투쟁 주체의 조직화를 가장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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