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장애인의 노동권, 미래를 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회적 장애인론을 정립한 것으로 많이 알려진 마이클 올리버는 “게임이 경쟁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내에서 소유권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면, 게임의 룰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장애인은 불가피하게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올리버의 이론적 스승이라고도 할 만한 빅터 핀클스타인은 사회가 장애 인구 중 일부를 노동력으로 흡수할 의지를 가질 수 있으나, 이는 나머지에 대한 배제를 유지 또는 심지어 강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장애인 노동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폴 애버리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모든 새로운 개념화에서 생산이 중심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장애인을 노동의 세계로 통합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하는 사회에서도 누군가는 장애 때문에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타 러셀은 사회 정의의 목표가 모든 사람 각각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노동은 자아 존중과 동일하다’ 혹은 ‘인류 구성원이 될 조건이다’라는 광범위한 자본주의적 사고는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데 복무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가? 장애인의 무능력을 인정하며, 노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길 대신 가능성도 없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현재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지는 것과 동시에 노동 그 자체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라는 진실을 되새겨야 한다.
자본부의 사회는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며, 자본은 이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근본적 특징인 노동력의 상품화에 따라 ‘노동’이라는 활동을 특정한 형태로 한정하게 된다. 즉 ‘얼마나 산출했는가(생산성)를 기준으로, 자본을 위한 이윤을 창출하거나 이에 도움을 주는 행위’만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으로서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들은 집에서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짓는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라고 불리지 않는다. 반면 똑같은 일을 기업의 식당에 고용되어 일을 하게 되면 노동자라고 불리게 된다. 연예기획사나 음반사를 위해 이윤을 창출해 주는 대중 가수의 노래 부르기에는 커다란 사회적 대가가 수반되지만, 노래방에서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 부르기는 하나의 소비행위일 뿐이다. 또한 대학에서 수십 권의 책을 찾아가며 밤새 작성한 학생의 리포트 쓰기는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며 오히려 수업료를 지불해가며 해야 하는 행위이지만, 기업 연구소에 고용된 연구원의 리포트 쓰기는 하나의 가치 있는 노동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과 제약을 뛰어넘어 ‘인간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풍요로움에 기여를 하는 모든 행위’가 노동으로서 정의되고 또한 인정받는 사회를 지향하고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즉 이윤의 창출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기여가 노동의 준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대가의 제공은 결과를 얼마나 만들어내는가 보다는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선차적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정의와 기준 속에서 인간의 행위는 개인이 지닌 능력과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 시간은 사회적 대가를 지불하는데에 여전히 하나의 준거가 되겠지만, 개인이 지닌 차이와 여건에 따라 폭넓은 유연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적 생산능력 속에서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이미 1950년대에 모든 사람이 하루에 4시간씩만 일을 한다면 모두가 기본적인 물질적․문화적 삶을 누릴 수 있을 만큼의 생산력을 축적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현실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몇몇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그 경제력이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가 한국 사회보다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동-분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이들 나라에서의 장애인 관련 제도를 고찰해 보는 것은 장애인 정책과 관련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헝가리에서 수학한 한국외대의 김지영 교수에 따르면 헝가리의 특수교육은 이웃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장애아동들과 부모들이 방학이면 찾아와 이를 체험하고 갈 정도로 발전되어 있으며, 장애인의 경우에도 생산성과 상관없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기존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 안에서, 혹은 그 규칙의 일부를 바꾸어 살아남고자 하기 보다는 게임 자체(노동의 정의와 가치)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상상력과 전망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우리의 가치 기준을 의심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구호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향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공유된 사회 속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노동의 의무와 연결시키는 노동연계복지라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너무도 쉽게 자기 정당성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부메랑이 되어 노동자 대중의 목줄을 죄고 있다. 무엇으로부터 시작할 것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

-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김도현 지음> 중에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