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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 쿠바의 사례가 시사하는 것들

문화사회, 쿠바의 사례가 시사하는 것들

고길섶

1.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문화다

어는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단 한 명의 열외자도 없이 모두가 즐거울 수는 없다. 만일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전체주의의 가장무도회일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소외받고 억압받는 민중 혹은 가난한 소수자들의 정당한 권리이다. 저 말은 19세기 후반 쿠바의 시인이고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호세 마르티가 남긴 말이다. 오늘날 마르티는 쿠바에서 가장 존경받는 민족 영웅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체 게바라는 그 다음이다. 아바나의 혁명광장에는 호세 마르티 기념관이 우뚝 솟아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집권을 하면서 현명하게도 자신을 우상화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쿠바에는 마르티가 존재한다. “이 땅 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산 속의 냇물이 바다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군요”라고 말했듯 가난한 민중의 해방세상을 위해 혁명적 활동을 하면서 그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문화다”라고 거침없이 짚어냈다. 어쩌면 그는 민중의 혁명적 사상을 실천하면서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존재를 갈망하였고, 그 자유로운 인간은 문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내다본 듯하다.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문화사회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쿠바를 화두로 꺼내는 것은, 2006년 가을 나의 쿠바 여행에 기초해 판단해볼 때, 쿠바야말로 문화사회적 경향이 있는 사회가 아닌가해서이다. 물론 쿠바를 문화사회의 전형적인 모델로 보자는 것은 아니며, 하나의 사례일 가능성으로서 또 다른 차이를 생성하는 접근방법이 요구될 것이다. 문화사회라 함은 특정한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구조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문화영역의 파편성만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문화주의적인 시각으로 문화사회의 정체성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고, 사회구성 및 주체구성 전반에 걸친 탈주의 경향성으로 운동해나갈 때 문화사회적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사사회란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돌파해나가는 탈근대적 과정이자 틈새이다. 탈근대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가치증식의 노예가 되는 노동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 노동자/다중의 자기 가치를 창출하는 시간 및 공간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쿠바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구조에서 이러한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 1959년 혁명 이후 미국의 향락 쓰레기장 역할을 했던 카지노, 매춘가, 슬럼가를 일소하고 인종차별 및 남녀차별의 철폐, 교육 및 의료의 무상제공 등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통해 문화사회적 기반을 창출한다. 게다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문화다”라는 마르티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이어받기라도 하듯 혁명 직후 전국적으로 문화의 집을 구축하여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을 활성화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유행을 타고 있는 ‘찾아가는 문화예술 활동’류는 이미 쿠바에서는 오래된 일이다. 쿠바 사람들이 춤과 음악에 열정적이고 일상적이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부지런하면서도 잘 논다. 캄캄한 새벽 5,6시에 사람들은 어디론가 일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며, 아바나 말레콘에서는 밤늦게나 새벽까지도 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젊은 사람들만이 그러는 게 아니다. 말레콘은 연인, 친구, 동네 사람들, 가족 단위의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길이 8km에 달하는 해안 방파제 광장이다. 어느 가족은 부모와 다 큰 자식들과 함께 밤새도록 도미노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쿠바에서의 가족적 연대는 강하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적어도 그들은 한국처럼 이기주의적이고 폐쇄적인 가족주의는 아니다. 개방적이며 타자들과 함께 하는 가족주의이다. 사람들은 개방적이어서 낯선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인위적이지 않는 웃음을 화통하게 터트리며 따뜻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나는 쿠바 사람들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문화사회스런 기호체제들은 사회체제의 내재적이고도 특이한 선분들이 통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2. ‘혁명은 계속된다’의 제도적•문화적 실천들

쿠바의 1959년 혁명은 애초부터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도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지는 않았으며, 쿠바의 공산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총체적으로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려는 사회정의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쿠바로 하여금 사회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혁명 후 카스트로는 미국의 경체 침략에 맞서 대기업들을 국유화하고 1960년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미국과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이길 바랬다. 그러나 미국은 경제봉쇄정책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련이 원조를 제공하며 후원국으로 등장하였다. 1961년에 미국이 피그만 침공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그에 반격하여 카스트로는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천명했다. 그렇게 해서 쿠바는 혁명 이후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1990년대의 특별시기 때, 개방조치를 취하긴 했어도 오늘의 쿠바는 여전히 미국이 붕괴를 음모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물론 자유로운 문화적 풍토를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문화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나 표현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이 매우 자유스러웠다. 아바나, 비날레스, 마탄자스, 산티에고 데 쿠바, 트리니다드, 바라코아, 산타 클라라, 시엔푸에고스, 피나르 델 리오, 관타나모, 카요 산타 마리아 등 쿠바의 전역에서 마주치는 쿠바 사람들을 볼 때 적어도 나의 시선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아바나 거리 미술시장의 그림들 혹은 레스토랑, 빠, 클럽의 음악들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적 삶’을 일상생활문화로 강제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 모순, 간극은 사이비 사회주의가 아니라, 평등-자유의 실천이라는 점에서는 제대로 가는 사회주의의 모습을 시사해준다고 본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체제와 사람들의 일상생활문화 양자는 서로 다른 고집을 부리며 평행선을 마냥 달리는 걸까. 이 모순의 문제를 어떻게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도대체 무엇이 쿠바의 사회체제를 지탱하도록 해왔을까. 나의 쿠바 여행은 늘 이런 질문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많은 대화와 관찰과 고민의 결과,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거시공간(계획-통제 영역)과 사람들의 일상생활문화라는 미시공간들(개방-자유 영역)이 이질적으로 존재하고, 이 두 공간 사이를 이접하는 매개공간들(소통-평등 영역)이 존재함으로써, 1990년대의 매우 어려운 위기 상황을 거치면서도 쿠바라는 사회가 지속되어 왔고 특유의 문화적 역동성을 잃지 않았나 한다. 나의 제한된 경험으로 분석해볼 때 쿠바사회에서의 중요한 매개공간은 1) 교육•의료•탁아 등 사회보장제도, 2) 사회보장제도와 연계된 사회봉사인구정책, 3) CDR이라는 풀뿌리 주민조직공간 및 지역화된 ‘문화의 집’(까사 데 꿀뚜라)의 문화공간, 4) 주민참여 커뮤니티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1) 사회보장제도

쿠바는 1959년 혁명을 통해 부정부패한 나라를 바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나라로 만들어왔다.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1960년에 제정된 도시개혁법에 따라 집세는 급료의 10퍼센트 이하로 고정되었고, 보육원에서 대학까지의 무료 교육제도와 충치치료에서 심장이시가지 돈 한 푼 들지 않는 의료복지제도가 들어섰다. 쌀, 콩, 빵, 커피, 과일 등은 생활필수 식료품 배급을 통해 거의 무료로 제공되었다. “국민 모두 평등하게 복지를 누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한다”는 카스트로의 국정 아래 쿠바는 급속한 근대화와 성장을 거듭하면서 식생활•의료•교육•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라틴아메리카 최고 수준의 삶이 가능해졌다. 1989년에 유엔개발계획이 제출한 ‘생활수준지표’에서도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1위, 세계에서 11위를 기록했다. 당시 미국은 15위였다. 쿠바는 인종차별이 사라짐과 아울러 치안과 복지가 잘 갖춰져 있고 사회안전망이 잘 정비되어 있어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왔다.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주의 혁명의 정당성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국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적절히 매개하는 공간으로 가능해왔다. 쿠바정부는 1990년대의 특별시기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존의 배급제를 기본으로 하여 식료품을 평등하게 분배하면서 어린이•노인•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지킬 수 있었다. 궁핍한 경제사정에서도 1989년 9억 페소였던 건강의료비를 1994년에는 11억 페소로 증액했고, 이를 위해 1989년 13억 페소였던 국방예산을 1995년에는 6억 페소로 삭감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카스트로는 2000년 6월 주간지 <그란마 인터내셔날>에 게재된, 전임 유네스코 사무총장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센터, 학교 또는 유아원, 대학, 스포츠센터 어느 하나 문을 닫지 않았지요. 가진 것은 정말 변변찮았지만 가능한 최대로 공정하게 배분했습니다.” 이를 오시다 타로는 “사회주의적 장점은 안전망으로 남겨두고, 구조 개혁을 인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정부의 성실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전체 사회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물자 부재의 충격은, 가령 예전에 구축해놓은 수준 높은 의료복지체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안전망으로서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음에도 아직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개방정책의 후유증 탓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는지 노숙자도 간혹 보이며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호객행위자들(빠, 택시, 인력거 등)이나 삐끼들(나이트클럽, 지방 관광도시의 민박 등)도 많았다. 어린이나 애나 돈을 요구하는 앵벌이도 더러 있고, 아바나의 말레콘에는 직업적이지는 않지만 몸을 팔려고 유혹하는 여성들도 간혹 있었다. 한국사회처럼 공포스러운 사회범죄를 상상하기 어려우나 좀도둑은 많은 듯 가정집들은 철저히 이중삼중의 자물쇠 장치를 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철창 등의 장치도 설치하고 있었다(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알려지고 있다). 잠금장치와 철망경계는, 매우 개방적인 나라인 쿠바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풍경들이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재활용품을 찾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어느 한 청년은 길거리에서 몇 권의 헌책을 팔고 있었는데, 나에게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파는 것이니 사달라고 간청하여 다친 부위를 살펴보니 다리 복숭아뼈가 거의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밤늦게 너댓살 먹은 여자이이와 그 언니가 나에게 접근하여 앵벌이를 하였다. 그들은 이미 앵벌이를 위한 영어 표현에 익숙해졌으며, 그러나 그들은 배고파 앵벌이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복해 말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음에도 일탈자들의 존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회보장제도라는 매개공간은 개방정책을 거치면서 이제는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또 다른 욕망의 틈새에 위치하고 있어 보인다.

2) 사회봉사인구정책

내가 여기서 표현하다 '사회봉사인구정책‘이란 사회봉사원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쿠바의 무료 교육의 의미를 국가차원에서 사회적 시스템으로서 교육시킨다는 의미도 있다. 다시 말해 사회공공적 차원에서 사회적 자산으로 학교 교육을 시키는 것이고, 따라서 그 혜택을 받는 모든 졸업자들은 일정기간 사회에 공공봉사를 함으로써 사회적 환원 시스템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 같은 데에서는 워낙이 사교육비가 많이 지출되는 풍토이다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을 것인 바, 그러나 교육을 사회공공의 차원에서 제도화하고 학교 교육을 통해 배출된 졸업자들에게 자신을 교육시킨 사회에 대해 일정기간 봉사하도록 하는 인구정책은 주목할 만한 시스템이다. 공교육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공교육이란 사교육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공교육을 통해 배출된 인력들이 사회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도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쿠바는 ‘뜨라바하르 소시알’ 제도와 ‘세르비시오 소시알’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런데 고등학교만 졸업할 경우 그는 뜨라바하르 소시알 제도를 거쳐야 한다. 국가에서 필요한 곳에 고등학교 때의 성적에 근거하여 배치하면 그는 그곳에서 1년 동안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료봉사는 아니다. 월급이 잘 나온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병행할 수 있다. 뜨라바하르 소시알 하면서 대학 졸업하면 대학 졸업자에게 부여되는 세르비시오 소시알 제도는 면제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했으면 그는 대학 졸업 후 세르비시오 소시알 제도를 통해 사회봉사 활동을 하게 된다. 이 사회봉사자들이 하는 일은 노인 간병, 야학, 주유소 감시활동, 가정상담 등 매우 다양한 곳에서 다양하다. 특히 세르비시오 소시알 봉사자의 경우는 고등학교 졸업자가 대학에 진학을 하지 않으면 왜 대학을 거지 않는지, 가정폭력이 있는지 등을 상담한다. 어떤 봉사자는 자기가 사는 동네의 웹페이지를 만들어주고 또 운영도 하고 있었다.

3) CDR 및 까사 데 꿀뚜라

(1) CDR(혁명방어위원회)과 풀뿌리 매개공간

9월 28일 밤, 쿠바 전역의 동네사람들은 무슨 축제같은 행사를 밤늦도록 했다. 사람들이 동네별로 모여서 길거리에서 춤과 노래와 음식을 공유하는 행사였다. 쿠바 전역에 동네마다 조직된 CDR(Comite de Defensa de Devolucion)이라는 혁명방어위원회의 축제행사였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하자 미국은 혁명세력을 와해시키려는 반혁명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행위가 1961년 4월 17일 1천5백 명의 미군이 피그만 해안에 침투한 일이다. 카스트로는 이들을 물리치고 체 게바라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제국주의의 첫 번째 실패”라고 규정지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쿠바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풀뿌리 주민조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CDR이다. 9월 28일은 CDR의 창설일이다. CDR은 미국의 반혁명 기도에 대응하는 주민조직이면서도 국가통제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출발했음에 틀림없다. CDR은 국내의 저항, 사보타주, 무장저항집단 증가 등에 대한 대응이면서도 정부의 결정들을 확실히 집행하기 위한 하향식 주민기구였다. 한국식으로 보자면 반상회 같은 관변조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CDR은 형식적 조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주민들의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9월 28일 이후 얼마간은 쿠바의 이곳저곳에서 그 축제의 흔적들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거리를 잇는 쿠바 국기들의 휘날림이나 대문마다 뭔가 표현해놓은 상징들이 그 흔적들이었다. 그러나 그 상징들은 대개 혁명적으로 의식화된 집단적 표현이라기보다 혁명성과는 거리가 있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것들을 표현하였고, 상당히 투박하였으나 주민들의 참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축제행사에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참여한다. CDR은 지금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끊임없이 혁명성을 강화하고 반복하는 이데올로기 행사의 주관자로서보다, 구성원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공유나 상담, 지역참여 등의 활동을 하는 대화의 장이자 기초 커뮤니티이다. 어느 누군가 나쁜 짓을 한다거나 타락한 길을 갈 경우 이를 선도해주는 역할도 한다. 동네 단위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참여의 장의 역할을 하면서 풀뿌리 주민 커뮤니티로서 그 위상을 갖는 듯하다. 대표를 주민들이 선출하는 CDR은 각 동네마다 설치되어 있으며, 항상 어느 소재 CDR인지를 알리는 표현물이 붙여져 있거나 벽에 페인트로 표현되어 있다. 그 표현물들은 어느 하나의 이미지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각각이 제멋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관변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2) 까사 데 꿀뚜라와 지역문화예술공간

쿠바 문화여행에서 의외로 발견한 것이 바로 ‘까사 데 꿀뚜라’(Casa de Cultura)라는, 직역 그대로 ‘문화의 집’이다. 쿠바 여행을 계획할 때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인데, 쿠바에 와서 ‘까사 데 꿀뚜라’라는 것이 존재함을 알게 되어 이곳을 찾게 되었다. 까사 데 꿀뚜라는 외형적으로는 한국의 ‘문화의 집’과 유사하나 실질적인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상이하다. 까사 데 꿀뚜라는 1960년대 초 산크티 스피리티어스 주에 사는 극장연출가인 올가 알올소라는 사람이 문화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쨌든 혁명정부는 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혁명 직후 까사 데 꿀뚜라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였다. 혁명정부는 지역마다 산골에서도 까사 데 꿀뚜라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산골까지도 찾아다니며 공연행사를 한다. 현재는 전국 각 주에 주 센터와 지역 까사 데 꿀뚜라가 조직되어 있으며, 매우 긴밀한 네트워크망을 형성하면서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까사 데 꿀뚜라라는 문학, 댄스, 연극, 영화, 음악, 미술, 축제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관장하며 지역 내의 전문가들과 정기적인 미팅을 통해 서로 협력하여 다양한 문화사업들을 계획, 실행하며, 지역주민들의 문화적 요구는 물론이고 문화예술적 참여의 폭을 넓히며 소통하는 지역 문화예술 활동(교습, 공연, 교육 등)의 중심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문화예술축제들도 까사 데 꿀뚜라가 주관하여 조직한다고 한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준다. 국가에서는 예산지원을 해주고 필요한 것들을 계획하여 사전에 요청한다. 매해 매달 계획을 세워 수행하는데, 국가에서는 준비관정을 지켜보면서 지원해준다.
까사 데 꿀뚜라는 특히 공장, 병원, 감옥 등 지역사회 단위의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한 찾아가는 문화공연을 정례화하면서 예술적 치유나 어려운 환경에 처한 당사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쿠바에서 운영이 가장 잘 되는 산타클라라 시의 연극공연 담당자는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공연을 하고 목요일마다 심장병원에서도 공연을 한다. 에이즈환자, 청각장애자, 신체장애자 등도 주목하여 찾아다닌다. 특히 XP병(햇빛 보면 안 되는 병) 환자가 구역에 5명이 있는데 이들을 위해 저녁과 새벽에 공연을 한다. 환자들은 공연을 보며 너무 즐거워하고 특히 어떤 환자의 경우 두 달을 지나고 나니 함께 공연을 한다고 한다. 공산당 지도원이면서 미술 부문의 한 전문가는 발 없는 어떤 여자의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5살부터 14살까지 9년을 연속해서 한 사람의 교사가 일관된 교육을 담당하면서 학생들의 미술적 잠재성을 발견하고 그 역량을 키워준다. 그러다보니 지속관찰을 통해 아이들마다의 교유한 색깔표현 방식을 알게 되고 심리적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아이의 경우 불안정한 그림을 그려 상황을 파악해보니 부모가 이혼한 환경에 처해졌음을 알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왔다는 사례도 있다. 음악전문가는 가령 어떤 사람이 거리에서 자기 노래를 부르는데 주변사람들이 지적하면 이를 수정하는 데 도와준다. 사람들은 자기 재질에 따라 선택하여 커뮤니티 문화예술 활동을 한다. 까사 데 꿀뚜라 활동가들은 아이들이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못하면 다른 재능이 있는지를 관찰하여 소질이 있는 분야를 발견하여 양성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까사 데 꿀뚜라의 지역소통망에의 참여방식이다. 나는 까사 데 꿀뚜라가 그 자체의 지역문화공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그 공간의 성격은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거시공간과 시민들의 문화생활이라는 미시공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연결하는 매개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까사 데 꿀뚜라는 마르티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그래서 까사 데 꿀뚜라의 활동과 관련하여 ‘호세 마르티 활동조직’이 조직되어 있다. 마르티가 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문화다”를 달리 해석하면, 혁명을 계속 하도록 하는 것은 문화이며, 실제로 쿠바에서 혁명은 계속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본래적 의미의 혁명성의 지속을 의미한다기보다 문화적 혁명의 지속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매개공간들을 통해 혁명은 계속되는 것이고, 그것은 사회주의적으로 목적의식화된 혁명성이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의 일상적 혁명이며, 따라서 사람들과의 일상적 욕망과 관계를 개선하는 혁명은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까사 데 꿀뚜라의 위상을 짚어볼 수 있는 것이고, 비로소 지역공간으로서의 성격도 좀 더 분명해지는 듯하다. 쿠바의 까사 데 꿀뚜라는 실질적인 지역문화예술 총본부로서 전문가집단과 지역주민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세밀하게 하고 있으며 지역사회의 커뮤니티로서 조직되고 있는 매개공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 주민참여 커뮤니티

쿠바에 있어서 커뮤니티를 이해한다는 것은 쿠바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CDR을 기초로 하는 다양한 형태들의 커뮤니티는 쿠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매개공간으로서의 커뮤니티를 의미화 할 때 쿠바의 문화적 흐름들을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물론 커뮤니티는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형태라서 거기에 개입하기란 쉽지 않다. 쿠바사람들에게 설명을 요구해도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거나 동문서답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살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쿠바의 커뮤니티 일반과 홈볼트 공원의 주민참여 커뮤니티를 들여다보자.

(1) 커뮤니티: 사회적 자산

커뮤니티는 물론 쿠바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형태들로 다양한 사회에 존재한다. 사회구성원 간 상호신뢰와 커뮤니티에 내재하는 사회규범이 작동할 때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다. 사회적 자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의 유형이다. 즉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성 그 자체가 사회적 자산이며 사회를 이글어가고 지켜내는 힘이다. 쿠바의 특별시기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카스트로의 통치술과 함께 커뮤니티에 의한 힘이었을 것이다. ‘임박한 파국’을 결국 전면적인 시장원리로 문제해결 할 수도 있었겠으나, 시장원리가 지배하게 되는 사회가 도래하게 되면 문제해결이라기보다 위기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카스트로는 1986년 개인의 도덕성을 중시하면서 지방분권화를 추진하고 주민참여 커뮤니티를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즉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거시공간 자체를 통해 통치하는 게 아니라 커뮤니티라는 매개공간의 활성화를 통해 주민참여를 활성화시킨 것이다. 이것이 턱없이 부족한 자원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 통제경제와 맞물려 특별시기의 쿠바가 굶어죽는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은 근거였던 것이다. 사회를 좀 더 유연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 1994년부터 개시된 농산물 판매 자유화와 달러 해금, 독립채산제에 의한 민영화 등 경제개혁, 관 조직의 재편과 NPO 육성 등을 통해 평등과 사회적 공정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속시키면서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한편 커뮤니티를 근거로 주민참여를 촉구시키고 있다.
쿠바의 커뮤니티 사례를 보건의료와 관련하여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바나 시 플라자 지구의 한 진료소에 근무하는 의사는 자신의 커뮤니티 활동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120세대 496명을 담당한다. 오전에 10~12명 정도의 환자를 진찰하고 오후에는 10곳 정도의 가정으로 왕진을 간다. 진료기록 카드를 작성하여 활용하는데, 직업과 경제 상황을 비롯하여 상하수도•쓰레기 처리•바퀴벌레•모기•먼지•일조량 등 주변환경은 어떤지, 애환동물이 있는지, 가족이 건강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과음을 하지 않는지, 가족과 이웃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조사한 다음 무엇을 개선해야 건강에 도움이 될지 판단하여 처방전을 써준다. 환자의 생활습관을 매년 비교하면 병의 원인을 쉽게 추적할 수 있다.” 지역주민들은 가족주치의에 의해 세심하게 대화하고 관리되며, 가족주치의는 주민이 참여하는 위생활동이나 학습회 등을 통해 함께 커뮤니티에 참여한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 토론회를 통해 일정한 주민합의를 보면서 보고서를 작성한다. 쿠바에서 가족주치의 제도는 1984년부터 시행되었다. 그 이전에는 각자가 자신이 관심 가는 전문의를 선택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형태의 의료제도였으나 주민들의 여론을 반영하여 1970년대 중반에 ‘커뮤니티 의료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전문의를 지역 주재소에 주재하도록 했고, 1984년이 되어 좀 더 충실한 지역의료 활동을 위해 ‘종합의료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이처럼 쿠바는 주민참여 커뮤니티가 지역의료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쿠바는 의대에서 의대생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학습능력만이 아니라 지역의 커뮤니티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하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2) 홈볼트 국립공원 보존개발과 주민참여 커뮤니티

홈볼트 국립공원은 쿠바 동부지역 관타나모 주에 위치한 바라코아의 토아강 일대에 위치한다. 홈볼트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근대 지오그라피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인 알렉산더 폰 홈볼트(1769~1859)가 이 지역에 와서 생태조사를 하여 그 귀중한 가치를 발견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혁명 전에는 이곳의 나무들은 벌목되어 미국으로 반출되었으며 그 장사꾼은 혁명이 되자 미국으로 도주했다. 홈볼트 공원은 벌레를 잡아먹는 식물을 비롯하여 다양한 식물류와 조류 등 희귀한 것들이 많고,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새들도 18종이나 되어 국가로부터 철저히 보호되는 지역이다. 본격적으로 보존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 때는 1996년 이후이다. 토아강 해안에서부터 넓게 분포된 홈볼트 국립공원은 4개 구역으로 나누어 4개년 계획으로 보존개발 되고 있다. 이 지역은 지역주민을 제외하고 내국인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국가가 철저히 관리한다. 석탄이 묻혀져 있으나 채굴이 금지되어 있다.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인근지역에 니켈 생산지가 있으나 오염문제는 없다고 한다. 홈볼트 국립공원 보존개발 프로젝트는 주민들을 배제시키거나 소외시키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일도 없다. 주민들로 하여금 보존개발의 중요성을 자각하여 참여하도록 한다. 이는 우선적으로 오지에 사는 주민들의 주거 환경이나 삶의 질을 높여주면서 출발한다. 보존개발 프로젝트에서는 지붕 개량, 상수도 설치, 수력전기 보급, 각종 물품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주민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주민들과 함께 하도록 한다. 이전에는 마구 채취했던 조개나 나무들도 보호해야 함을 알게 된다. 이는 생태보존 전문가들이 교육하는 것도 있지만 일방적으로 훈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역주민들이 생태계를 더 잘 안다. 그래서 때로는 전문가들은 지역 주민들의 경험담에 귀기울인다. 주민들이 경험담을 교육하면 전문가들은 경청한다. 보존개발 프로젝트에서 교육은 매우 중시된다. ‘플랜 오페라띠보’라는 교육 프로그램은 4개 구역 각각이 구성한다. 각 구역들의 생태조건이나 환경•서식생물들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들을 고려한다. 홈볼트 국립공원에는 30여 명의 전문가들이 있다. 지역주민들도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우리를 작은 배에 태워 노를 저어 안내했던 한 청년은 개구리 전문가였다. 아이들도 학교교육을 통해 참여하도록 한다. 구역마다 학교가 있고 아이들은 1주일에 4시간씩 교육을 받는다. 아이들로 하여금 지역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특이상항은 홈볼트 국립공원 보존개발이 주민들의 농업활동과 연계된다는 것이다. 국립공원 보존개발을 위해 주민들의 농업활동을 금지시키거나 방해하지 않고 조화될 수 있도록 계획한다.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전문가나 환경기관과 논의한다. ‘식물과 동물을 재배•양육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운영된다. 다른 지역에도 다 존재하지만 ‘코오빼라티바 데 프록덕시온 아그로페까리아’(CPA)라는 공동농장이 있고, ‘코오빼라티바 데 크레디또 세르비시오’(CCS)라는 개인농장이 있으며, 이들은 매달 회동한다. 이처럼 생태보존개발 프로젝트와 주민농업활동이 결합되어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커뮤니티 활동은 잘 되고 있다. 이것은 생태보존과 인간의 삶이 유리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삶 속에서 생태보존이 이루어지고 그 반대로 생태보존 속에서 인간의 삶도 이루어지는 생활양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매개공간으로서의 지역주민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있다.
교과서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들은 국가와 당이 요구하는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을 재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쿠바 사람들은 적어도 생활문화를 차지하는 미시공간을 체험해볼 때 도대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인터넷 사용의 통제 등 어느 나라든 국가체제에서 공식•비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가시적•비가시적 통제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들은 매우 자유로웠고 그 자유로움이 허용되는 공간에서 열정과 활력, 수다와 웃음들을 끊이지 않게 발산해댔다. 이것이 사회주의 체제의 효과인지 어떤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사회주의적 집단의식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발로는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나는 애초 쿠바 문화를 여행할 때 전제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거시공간의 직접적 인과성을 애써 무시하자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것이 의식적으로 전제되면 문화적 양상들이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것도 그에 종속되고 상상력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이러하다라는 고정된 틀로 바라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즉, 문화적 생활양식을 자율화된 공간으로 전제하면서 접근해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전제하게 된 근거는 쿠바 특유의 춤과 음악과 열정 등 문화적 양상들이 상당히 활력있다고 봤고,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적 생활양식이 자율화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판단에 있었다. 바로 이 특이점이 나로 하여금 쿠바로 향하게 만들었는데, 나의 이 전제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율화된 공간으로서 문화일 수는 없다는 것, 문화적 자율성을 인정하되 사회주의 국가차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요소들도 있다는 것, 이러한 것들은 쿠바 여행을 통해 좀 더 분명해졌다.

3. 돈-욕망과 문화사회

쿠바에서 문화사회적 경향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제도화하고 보장하는 다층적이며 유연한 매개공간들의 역할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문화사회적 경향이 위협받을 수 있는 현실적 힘은 일상생활문화에서의 돈에의 욕망이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일상문화가 거의 없듯이 아바나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문화가 없다. 밤에는 대체로 어둑하다. 낮에는 매우 밝은 햇빛면과 눈부심이 가려진 그늘면의 이중분할 된 공간구성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 도시공간의 중심지에는 소비 욕망을 유혹하는 상품기호들이 즐비하지는 않지만 하나둘씩 들어서 있다. 맥주나 음료수 혹은 간이음식 판매점들이 아바나 중심가에 흔하게 있고 옷가게, 공예품점, 피자집, 슈퍼, 그리고 일반 생활용품 및 전자제품 등을 판매하는 몇 안되는 대형마트의 상품 기호들이 상품기호로서 소비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인구 1,200만 중에 핸드폰이 10만여 대 보급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잇고, 오래되고 낡은 자동차들이 수두룩하면서도 최신 자동차들도 눈에 자주 뛴다.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국가가 이런 소비의 욕망마저 통제하거나 책임질 수는 없을 터, 개개인들은 소비자주체로서 홀로서야 할 것이고, 그에 대한 지불 역시 그들의 몫이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비하려면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 만인의 상식이고, 쿠바에서도 마찬가지다. 쿠바는 대학교육까지 무료이지만 사교육은 개인 부담이다. 사회주의 국가이자 무상교육이 잘 되어 있는 쿠바에도 엄연히 과외가 존재한다. 정부의 허락을 받고 과외교사에게 돈을 지불하며, 상당히 비싼 수준이란다. 개인적으로 더 많은 교육기회를 얻으려면 그만큼의 돈이 있어야 한다.
사물의 존재는 곧 소비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돈을 소유해야 한다. 상당 부분에 있어서, 돈이 곧 삶이고, 돈이 없어 못살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 삶이 곧 돈이다. 그렇다고 돈의 노예인 것은 아닌 듯 보였지만 사람들은 왕성하게 돈을 좇아간다.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징후일까? 아니면 이미 자본주의가 부활한 것일까? 돈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미루어 돈에 대한 의지가 왕성하다 해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회귀라고 쉬 판단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연결되는 돈에 대한 욕망의 흐름이라면 자본주의적 전망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쿠바 사람들의 돈의 욕망은 사회주의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자본부의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또 다른 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돈에의 욕망이 자본주의로의 복귀, 나아가 자본주의 논리의 극대화 및 소비사회의 길을 여는 문턱이라면, 쿠바에 있어서 문화사회적 경향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구축해놓은 매개공간들이 급속도로 파괴될 것이며, 그에 따라 문화적 역동성은 평등-자유의 욕망을 해체하며 자본의 욕망에 따른 사회적 배치를 감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쿠바는 사회주의적 통제가 개입함에도 그 다중의 바다에서는 돈에의 욕망이 어디로 튈지 모르게 조용히 요동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문화사회의 연구와 실천에 있어서 돈-욕망이란 게 반드시 자본주의적 욕망인지를 둘러싼 돈-욕망의 향방에 대해 질문해보아야 한다. 돈-욕망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욕망이며,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한국사회의 문화사회론은 철저하게 돈-욕망이 과잉된 시스템 위에서 그려지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일자리를 사수해야 하고 일자리를 찾아 방황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먹히기 어려운 이슈이며, 문화사회를 위한 행동 프로그램들 역시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돈의 노예가 되자는 것이나 돈-흐름에서 자유롭자는 것은 아니다. 돈-흐름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문화사회론의 핵심전략의 하나이기도하다. 철저하게 돈-욕망이 과잉되고 자동화된 시스템 현실에서 매개공간들의 공공화와 맞물리는 미시공간들의 자유의 시공간적 증대는 돈-흐름 혹은 돈-욕망에 개입해야 하는 문화정치가 필수적이다. 그것의 연장으로서, 나는 여전히 모두가 백수 되고 그 백수들의 사회적 연대가 문화사회임을 믿는다. 어쨌거나 돈-욕망의 사회적 순환과 관련하여 문화사회운동적 전망이 사회체제 및 주체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고 탈근대 및 탈자본주의를 지향한다면, 하나의 사례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신자유주의 제국인 미국에 대항해 거시공간의 국가체제(계획-통제 영역)가 고독하게 싸우며 매개공간들(소통-평등 영역) 및 미시공간들(개방-자유 영역)을 문화사회적 경향으로 열어놓고 있는 쿠바를 연구해봄직하다. 오랫동안 성장이 지체된 거리의 노후한 풍경들과 그럼에도 활력에 찬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문화/과학」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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