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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하느님 앞에서 - 권정생

골고타 십자가의 예수는 위 아래 어느 쪽도 말상대가 없는 외톨박이였다. 인간들과 신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의 끔직한 장면에서 예수는 철저히 버림받는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어야만 했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사박타니!”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30세를 넘긴 청년 사나이로서 이런 절규가 나올 만큼 고통스런 예수 앞에 하느님은 끝내 침묵으로 보고만 있었다.

옷은 벗겨져 알몸뚱이가 되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형틀에 매달린 바로 밑에서는 벗긴 옷을 서로 가지려고 제비뽑는 망나니들이 있었고, 창을 든 병사들이 있었고, 어머니가 있었고, 사랑하던 제자가 있었고, 여인들이 있었고, 수많은 구경꾼들이 둘러 있었기에 오히려 더 외로워야 했던 예수......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 우리집 건너편 개울가엔 벙어리 아주머니 한 분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남편에게 얻어맞고 쫓겨나 갈 곳이 없어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벌써 며칠째 이 집 저 집 처마 밑에 잠을 자면서 지내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집이 있고 남편이 있으니 보살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고 그래서 하느님은 그 연극의 연출자로 생사존망(生死存亡)을 주관한다면 인간 개인의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배역에 따라서 그 시대 그 장소에 배치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선악을 판단해야 할까?

벙어리 아주머니는 벙어리 역할을 하고 그의 남편은 아내를 내쫓는 남편 역할을 하고, 주변 사람들은 구경꾼으로 지켜보면서 작자의 또 다른 배역대로 살고 있을 뿐이지 않는가?

밤늦게 밖을 내다보면 불 꺼진 마을풍경은 참으로 쓸쓸하다. 적막하다 못해 왈칵 두려워지는 그 어둠속에, 멀리 한 두 점의 불빛이 깜빡거리는 것이 보인다. 불 꺼진 집들의 적막함보다 작은 불빛이 한층 외로워 보인다. 저 집은 왜 밤늦도록 불을 켜놓았는가? 조상님 제사라도 지내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어서 병구완을 하느라 밤늦도록 불을 켜놓은 것일까? 낮에 못 다한 일거리를 마저 하느라 밤을 지새우는 걸까? 남이 다 자는 밤에도 불을 켜놓고 있어야 하는 집은 또 다른 외로운 집일 수도 있다.

며칠 전, 중학교 3학년인 건넛집 은영이가 심신인지 신심인지 하는 남자 가수의 사진을 껴안고 달려오면서 사뭇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한 장에 2백 원씩 한다는 사륙판 책 크기의 사진에는 늘씬하게 생긴 멋쟁이 남자가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바꾸어 찍은 것이 모두 다섯 장이나 되었다. 은영이는 그 사진을 보물처럼 껴안고 자랑하면서 그지없이 행복해 하더니 일주일이 지나서는 그만 시들해지고 또다시 외로워져버렸다.

중학교 2학년인 태석이는 코밑에 솜털 같은 털이 나고 그리고 장다리까지 걷어 보이면서 자랑인지 걱정인지 신기해하고 있다. 이 애들도 이젠 어린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외롭고 고달프게 제 몫의 인생을 살기 위해 애써야 하나 생각하니 어쩐지 가엾어진다.

이따금 시내에 갔다가 버스를 기다리느라 정류소 대합실 구석의자에 앉아있으면 갖가지 사람들이 몰려가고 몰려온다. 할머니, 할아버지, 중년 부부와 갓 결혼한 신혼보부, 삭발을 한 스님도 있고, 수녀님도 있고, 가끔씩은 노랑머리의 서양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들의 차림새가 거동을 구경하고 있으면 어떤 호기심 때문인지 재미가 있다.

이렇게 인간세상을 구경만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란 남의 것을 구경하면서 동시에 내 인생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구경하고 구경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함께 부딪치며 밀치며 뒤얽혀서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는 의식도 없이 우리는 어쨌든 슬프거나 즐겁거나 쉴 새 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만 여덟 명을 낳아 키우는 집이 있는가 하면 딸만 열두 명을 낳아 키운 집도 있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고 한 명의 자식도 낳아보지 못한 부부도 있다. 열두 살에 재취 장가를 갔었다는 노인도 있고 불구자여서 평생 독식으로 살아온 노인도 있다. 일생을 부유하게, 혹은 거지처럼 살기도 하고, 혹은 지체 높게 혹은 밑바닥에서 그들의 본분을 지키면서 산다.

며칠째 떠돌며 한데서 잠을 자는 벙어리 아주머니는 오늘쯤 남편과 화해를 해서 집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하느님은 그 벙어리 아주머니를 더 슬프게 외롭게 버려두실까?

이 세상에서 누구는 선한 배역을 맡고 누구는 악역을 하면서 남의 미움을 받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면, 우리가 진정 동정하거나 우러러봐야 할 인간은 누구여야 할까? 예수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서기 33년도의 사제들과 민중들, 예수를 은 삼십 전에 팔았던 가리옷의 유다는 어떻게 심판해야 할까?

가을이 한창 무르익고 있다. 우리집 둘레엔 여름내 자라온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다. 지난번 태풍으로 미루나무는 한 중간이 부러지고 복숭아나무는 단풍도 들기 전에 잎이 모두 떨어졌다.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그들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가끔 가다가 아이들이 묻는다.

“집사님, 밤에 혼자서 무섭지 않나요?”

그러면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한다.

“무섭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엔 하느님이 눕고 왼쪽엔 예수님이 누워서 꼭 붙어서 잔단다.”

아이들은 눈이 땡그랗게 되어 다시 묻는다.

“진짜예요?”

“그럼 진짜지.”

“그럼 자고 나서 하느님하고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하느님은 콩 팔러 가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들로 다녀오신단다.”

이쯤 되면 아이들은 갈피를 못 잡고 더 이상 질문도 못한다. 외롭다고 쩨쩨하게 밖으로 푯대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혼자서 꾹꾹 숨겨놓고 태연스레 살 뿐이다. 하느님이 계속 침묵하시듯 우리도 입 다물고 견디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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