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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햄 이은아 이야기

10여 년 이상을 한국노총 사업장에서 노민추 활동을 하며 버티고 있는 동지들은 생각 외로 많다. 특히, 경남 양산과 같이 민주노총 사업장의 기반이 취약한 지역에서 한국노총 사업장 노민추 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진주햄 이은아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6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은아는 이후 가족이 부산으로 옮기면서 부산에서 성장을 하게 된다.

88년 부산수산대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접하게 된다. 선배들과의 관계 속에서 학과 동아리 활동을 시작으로 과학생회(91년), 총학생회(92년), 총여학생회(93년) 등 학생대중조직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벌인다. 개인적으로는 집안 문제로 인해 대학 입학과 함께 가출을 하고 학교에서 살게 되면서 더욱 학생운동을 열정적으로 하게 되기도 했다.

 

“그때 경제학습이나 이런 걸 하면서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고, 세상도 달리 보게 됐지만, 그게 나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아주 투철하게 자리 잡혀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그 분위기에 쏠린 게 많았다 생각해요. 그래서 쭉쭉 나간거지...

비로소 내 머리로 내 문제를 고민했던 게... 대중조직 간부 할 때는 바빠서 몰랐는데... 막판에 사회진출 앞두고 학생회 활동 접고 그러고 나니까 ‘내가 그동안 했던 게 뭐였나?’ ‘내가 이런 간부라는 직위를 안 갖고 있었다면 과연 지금까지 운동을 하고 있었을까?’ ‘실제로 내가 뭘 추구해왔던가? 그냥 그 자리에서의 역할만 충실히 해왔던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심각하게 들었어요. 그렇다고 특별히 해답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래서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그냥 접어갔지...”

 

중간에 1년 휴학을 하기도 하고, 졸업을 위해 모자란 학점을 따려고 학교를 몇 년 더 다기도 하면서 7년만인 95년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졸업과 함께 사회진출에 대해 고민하면서 노동운동을 할 생각은 없었고, 당시 얘기되던 ‘애국적 사회진출’에 대한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상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서 스스로 취업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했던 것이 보육교사시험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마지막 한 달 동안 어린이집에서 실습을 하게 된다.

 

“내 세계가 강하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애들한테 한다곤 하는데 애들은 만족이 안 되고... 애들은 더 자기를 안아주길 바라고 막 치대는데 나는 그게 미치겠는 거라...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때 생각을 했던 거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긴데... 그때 보통 18개월 이런 애들이 많았거든요. 어리잖아요? 이제 막 걸어 다니고 그러는데... ‘이렇게 어린 것들을 맡기고 일하러 가는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 부모들 심정은 어떤 건지, 그런 거라도 알아야 내가 애들을 책임감 있게 거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공장생활 하러 들어갔어요.

삼양라면 만드는 삼양식품에 들어가서 6개월 정도 다녔는데... 그 당시에는 학출(학생운동출신)들이 현장에 별로 가지도 않았고... ‘그런 데 가는 사람들은 결의가 엄청나게 높고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 복무하려는 그런 사람들이나 가지. 나는 아닌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감히 엄두를 못 냈어요. 사실, 힘들 것 같아서 안 할려고 했었지... 그랬었는데, 6개월을 그 회사를 다니면서 살아보니 별거 아니데요(웃음). 다 똑같이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그렇게 현장에 있으니까 제 스스로가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운동에 대한 욕구가 생기면서 ‘어디 가서 노동운동에 대한 지도를 받았으면 좋겠다’ ‘누가 나를 이끌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이 참 많았어요.”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산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선배를 만나 현장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고 양산지역에 있는 진주햄에 입사하게 된다.

 

“이전에도 진주햄에 들어와서 해보려고 했던 학출들이 그때는 다 나가서 없었어요. 진주햄에 들어가니 마침 공무과에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아저씨가 계셨어요. 저랑 같이 들어갔던 동지들이 둘 있었는데 공무과 아저씨들과 계모임하고 현장에 있는 아가씨들과 계모임도 하면서 야심차게 현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96년에 노조 위원장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 그 아저씨가 출마를 하셨거든요. 아저씨가 워낙 현장에 오래 계셨고 민주노조에 대한 생각도 깊으셔서 우리도 함께 해보자고 해서 했는데 결과는 낙선이었지. 우리가 사람들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겁 없이 덤빈 게 있었지. 우리가 들어가서 막 바로 선거가 있어서 ‘우리가 이거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고, 아저씨도 그렇게 안하면 우리하고 안 볼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고 했었고, 우리가 주도한다기보다는 아저씨를 보조하는... 아저씨의 의견을 많이 따라서 했죠. 그랬는데 결과는 아주 안 좋았습니다. 조합원들도 안 좋아하더라고요. 공무과가 외각 부서이기도 하고, 아저씨가 닦아 놓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그때는 너무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조합원들에 대해 너무나 모르는 상황에서 진행을 하려고 했었던 거 같애요.”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조위원장 선거를 진행하고 나서 바로 다음해인 97년에는 대의원선거에 나서게 된다.

 

“그 전에는 맨날 반장하던 놈이 나와 가지고 무투표 당선되고 그랬었는데, 제가 나가니까 경선이 된 거예요. 결과는 제가 압도적으로 이겼거든요. 조합원들은 그 사람이 식상한 거죠. 하는 것도 없는데 그 직위 때문에 그냥 한 거고... 제가 1년 동안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이야기도 잘 하고 그러니까 그런 걸 보고... 저를 믿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걔가 워낙 못해서 제가 된 거 같고... 그렇게 대의원이 되고 나서 대의원으로 특별히 역할을 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어요. 명찰 달고 있는 거 말고는... 대의원대회 하면 가서 손들고 몇 번 얘기한 거 말고는... 사람들 하고 많이 알고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었고...

97년 IMF 들어와 가지고 회사가 굉장히 어렵다고 말을 했어요. 우리가 상여금 600%예요. 두 달에 한 번씩 나오죠. 그리고 임금은 항상 최저임금 수준이거든요. 엄청 약하죠. 그러니까 보너스 두 달에 한 번씩 나오는 걸로 연명을 하는데... 보너스가 6월까지는 거의 안 나왔었고, 월급도 매월 5일날 나와야 되는데 이것도 자꾸 밀리는 거예요. 상여금 안 나와서 엄청 타격이 큰데다가, 월급도 제때 안 나오니까 조합원들이 적금 들던 걸 깨서 생활비로 쓰고 그랬어요. 그때 상황이 진짜 절박했거든요.

상여금은 그렇다 치더라고 월급이라도 제대에 나와야 되는데, ‘회사가 이래이래서 언제까지 주겠다. 미안하다’ 이래야 되는데, 이거는 공고하나 안 붙어요. 너무 황당하데요. 사람들도 그런 거에 대해서 불만은 엄청 많은데, 노조는 입 꼭 다물고 있고, 찾아가면 ‘기다려보자’라는 식으로 아무런 해결책이 없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해서 조합원들의 분위기도 모으고, 회사에도 압박을 줄 수 있도록 조합원 서명을 받기로 했어요. 그렇게 해서 조합원 서명을 받았는데 순식간에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아줌마들이 신선해 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 뭐가 될까?’하는 기대심리도 있었고, ‘그래, 니가 이렇게 나서줘서 고맙다. 열심히 해봐라’ 이렇게 격려까지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고... 그때는 완전히 업 됐죠.”

 

그러나 현장의 조직 기반이나 대중적 영향력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서명운동은 대의원 자격 박탈, 해고, 조합원 제명이라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은아와 이수분은 2007년 1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복직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때는 해고투쟁을 되게 소극적으로 했지. 아침에 출근투쟁 하는 거 말고는... 그 과정에서 제가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게, 조합원들이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그 서명이 잘못됐다는 각서를 ‘이렇게 이렇게 나는 뭣인지도 모르고 서명을 했고, 그냥 이은아 이수분이가 시켜서 했다.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해서 누구 누구 해서 싸인 하고... 어떤 사람은 ‘나는 내가 서명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적은 거다’ 해서 싸인 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300 여명의 각서를 다 받아서 제출을 하고... 해고 되고도 조합원 제명되기 전까지 잠깐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노조사무실에 출입할 수 있잖아요. 들어가 있으면 공고문에다가 ‘불순 세력이 침투해서 회사를 문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선동하고’ 이런 원색적 비난을 하고... 노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다가 더더욱 힘들었던 게, 조합원들이 손가락질 하고 욕을 하는 거야. 회사가 그렇게 붙여 놓은 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거 아니에요? 그 조합원들이 그때는 너무 너무 싫데요. 막 미치겠데... ‘어떻게 사람들이 저럴 수가 있노’... 그리고 한창 할 때가 12월에서 1월 넘어가는 시기라서 조합원들에게 신년카드를 다 보냈어요. ‘복직과 조합원들의 고용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해가지고... 그걸 받았다고 받은 사람들을 회사에서 다 불러가지고 면담하고... 그걸 받은 걸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그때는 아줌마들도 많았지만, 아가씨들도 많았거든요. 아가씨들하고 친해서 연락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그때 연락하던 애들도 ‘그런 거 보내지 마라. 그런 거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은 못하고, ‘어떻게 니가 그렇게 말할 수 있노? 내가 이렇게 조합원들을 위해서 하다가 짤려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런 카드를 보낸 게 뭐 그렇게 잘못이라고 그걸 갖고 그렇게 힘들어하냐?’ 이런 심정이 억수로 앞섰어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복직 판정이 났는데도 기쁘지가 않는 거예요. 진주햄에 다시 안 들어가고 싶었어요. 운동을 하겠다고 들어갔는데, 운동은 내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내 심정만 너무 앞서 있었던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안 들어가고 싶은데, 지노위에서 복직판정이 났으니 당위성에 다시 들어갔어요(웃음).

그렇게 들어가서 처음에는 되게 어색했죠. 내가 일단 마음의 벽이 있고, 사람들 또한 그런 오해가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으니... 터놓고 이야기도 안 해올뿐더러 내가 먼저 다가가야 되는 건데 처음에는 못 다가갔어요. 그거도 시간이 지나니까 해결이 되데요. 시간이 지나니까 조합원들도 조금씩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벽도 허물어지고 그런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서명한 것 때문에 얼마나 관리자들에게 시달리고, 불안했었던가 하는 상황이 이해되고, 저희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했던 행동들이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나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운동을 하기 위해서 내가 뭘 반성하고 바뀌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노동자 계급의 본심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죠.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런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직 후에는 서서히 조합원들과 삶과 함께 하면서 마음의 벽을 허물어가는 과정이었다. ‘조합원과 같이 울고 웃으면서 한 사람의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99년 결혼을 하고 2000년 출산을 하면서 현장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첫째를 출산하고 두 달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시어머니에게 애를 맡긴 채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또 다른 형태의 힘겨움을 동반했다.

 

“첫째 때는 어머니가 우리랑 같이 살았어요. 어머니가 애 두 돌까지는 키워주겠다 해서 같이 살았는데... 첫째 때는 같이 살았고, 둘째 때는 내가 ‘절대 같이 못 산다’ 그래서 결국은 어머니 집에 보냈었거든요. 1주일에 한 번씩 가서 보고...

우리 어머니가 애들에 대해서는 되게 각별해요. 정성껏 잘 키워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게 어찌 보면 고마운데, 한편으로는 며느리에 대해서 불만이 많지... 아침에 출투 할라면 7시 10분에 나가야 되는데 ‘그 꼭두새벽에 애들 밥도 안 먹이고, 남의 집에서 밥 얻어 맥이면서 키운다’고... ‘사회활동 바쁘다고 저녁때도 밥도 제대로 안 해 먹인다’고... 그런 거에 대해서 불만이 많으신 거죠.

첫째 때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셨을 때 어머니랑 억수로 많이 싸웠거든요. 나는 어른들 하고는 맞대거리를 안 해봤는데...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요. 왜냐하면 활동을 안 하고 회사하고 집만 왔다 갔다 하면 만점짜리 며느리가 될 건데, 뭐 깝쭉거리고 돌아다닌다고... 어머니는 안 그래요? 애 하루 종일 보고 힘든데, 아들 며느리 올 시간만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들이 저그들끼리 싸돌아다닌다고 안 들어와 봐요 얼마나 열 받겠어요. 딴 게 문제가 아니고 그게 제일 컸어요. 그러니까 ‘그런 거 좀 안 하나면 안 되나’... 어머니도 내가 운동 비슷한 걸 한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니가 난 애를 제대로 못 돌보면서 그런 일을 하고 돌아다니냐?’ ‘애들은 챙기며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불만들이 많았고... 난 또 어머니가 집에 계시니까 최소한 한다고 해요. 나름대로 자제하고 그렇게 하는데도 어머니가 힘드셔서 그렇게 하는 거야. 현장 조합원들 한 사람 더 만날 거도 마음 놓고 못 만나고... 그러니까 서로 이래저래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친정 엄마한테 싫은 소리 들으면 ‘아이, 좀 그러지 마라’하는데, 시어머니한테 들으면 억수로 부담이 되는 거예요. 나중에는 그게 눌리고 눌리다 폭발을 해가지고...”

 

현장에서 힘겹게 버티기를 하던 2003년 진주햄은 생각지도 못한 파업투쟁을 경험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양산지역을 보면 대부분 사업장이 87년 이후에 계속 위원장을 해 왔었거든요. 그러면서 10년씩 넘게 다들 위원장을 하니까 약싹 빨라진 것도 있고... 그리고 87년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그 당시 분위기가 그러니까 그나마 제스처라도 하면서... 아줌마들 이야기를 빌어서 들어보면 ‘그때 회사의 생산된 물건 못 나가게 밤새 막고 그렇게 투쟁해서 노동조합 만들었다’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 일정한 역사들은 있어요. 이 위원장들이 보면 조합원들의 이익도 일정하게 챙기고, 회사에도 적당히 때 쓸건 때 쓰고, 들어줄 건 적당히 들어주면서 타협하고... 이렇게 하는 위원장들이 좀 많았는데, 그 위원장들이 2000년대 들어가면서 다 물갈이가 되는 거예요. 완전 어용으로 물갈이 되는 거죠. 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의 정체성조차 갖지 못하는...

진주햄 사장도 그렇게 할려고 했던 거 같애요. 진주햄 사장이 조합원들 다 모아놓고 ‘내가 작년에 임·단협 할 때 위원장한테 돈을 500만원 주는 조건으로 임금을 동결시켰다’ 이렇게 말을 한 거예요. 그러면서 그 수표번호까지 다 가르쳐준 거지. 그때 조합원들 내에서 왈가왈부가 많았어요. ‘이 죽일 놈의 새끼가 우리 임금을 올릴 걸 안 올리고 지 혼자 돈 받아 쳐 먹은 거 아니냐?’,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놈은 차도 얻어 타고 한 살림 장만한다는데 꼴랑 500만원이 뭐꼬? 사장이 노조에 물 먹일라고 그러는 거 아이가?’ 이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맞죠. 지금의 노동조합을 더 어용화시키고 더 무능하게 만들려는 음모가 있는데...

그런데 저랑 수분이는 입장이 ‘이 죄는 나중에 묻자’는 거였어요. 그때 한국노총에서 630총파업 지침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진주햄에서 이런 사정이 있다보니까 상급단체들이 집중을 많이 했어요. 그 사람들이 ‘위원장이 잘 한 건 아니지만, 지금 사장이 그렇게 하는 거는 노동조합을 깰려고 하는 회사측의 의도가 있는 것이고, 그거를 위원장의 잘잘못을 물어가지고는 다른 대안이 있냐? 그러니까 일단 파업해서 우리가 승리하고, 위원장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책임을 묻자’ 그렇게 했고, 노조에서도 불신임이 걸리지 않았고, 배임수재로 고소고발은 됐지만, 위원장으로서 직무를 계속 해나가면서 파업 결의하고 6월 30일 오후에 파업을 하기로 선언을 했어요.

조합원들은 계속 정리가 안 되는 거지. 이거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사측의 탄압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집행부 내에서도 분란이 많았죠. 일단 회의에서 결정은 했지만 따로 노는 집행부도 많았고...

6월 30일날 파업 들어가서 식당으로 다 모이자 했는데 그때 조합원 250여 명 중에 43명이 참여한 거예요. 분위기들이 그래도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과반수는 넘었는데 관리자들이 식당가는 길목을 다 막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못 간 거지. 그러면서 43명이 파업을 한 달 반을 했거든요.”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고 있었지만 조합원 자격이 없었던 이은아와 이수분은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제가 파업에 참여를 못했어요. 비조합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럴 때 가고, 근무 마치고 나면 가고... 그런데 근무 마치고 나면 그 사람들도 다 집에 가니까 어쩌다 저녁에 일정이 있으면 가고... 이렇게 하다가 그 파업대오 내에서 ‘은아 하고 수분이 조합원 복권 시켜야 된다’ 그런 요구들이 나와서 우여곡절 끝에 복권이 됐거든요.

그게 너무너무 힘들게 됐어요. 운영위에서 조합원 제명과 복권문제를 다룰 수 있는데, 처음에는 운영위가 안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운영위원 중에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 집 앞에 가서 운영위 회의하는 날은 회사를 아예 못 가게하고... 이렇게 운영위 자체를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안 되니까 ‘요구안을 합의해 줄테니까 복권은 시키지 마라’ 이런 것도 있었고... 그리고 부결시키기 위해서 표를 조직하는 것도 있었고... 그렇게 몇 차례 유회되다가 결국은 복권이 되었죠.

그때가 7월 말이었어요. 한 달 동안 파업이 진행되다가 힘들게 힘들게 복권이 되가... 그때는 정말 감격적이었습니다. 복권됐다는 소리 듣자마자 딱 일 놓고 파업하는데 바로 갔다 아입니꺼. 그때 파업하고 계시던 조합원들이 식당가는 길목에 쫙 서가지고 박수치면서 맞이해주더라고요. 그때는 너무 너무 감격적이어서 한 마디 하라는데 눈물이 먼저 나는 거예요. 그때 그렇게 감격적인 게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 버티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6월 30일 시작된 파업투쟁은 한 달을 넘겨 8월 11일 타결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막판 마무리 과정에서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역공이 강화되면서 노조는 심각하게 흔들렸다.

 

“대충 합의는 됐어요. 임금 인상 얼마하고, 단협도 조금 고치고, 사내복지기금도 받고... 그런데 당시 파업한 조합원들이 한 달 넘게 일을 못했기 때문에 임금이 지급되지 않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쟁의기금으로 비축해 놨던 돈으로 파업했던 조합원들한테 생계비 지급을 했었어요. 하루에 2만 원 정도 해서 받아간 돈은 50만 원 정도인데... 그거를 참여하지 않았던 놈들 중에 음해하려는 세력들이 꼬투리를 잡아서 위원장 목을 쪼은 거예요. ‘우리가 다 조합비 낸 건데 느그 마음대로 쓴 거 아니냐’ 그러면서... 이전에 노동조합 확대간부회의에서 적립금을 쟁의기금으로 쓴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절차상 하자는 없었어요. 하지만 ‘그거 느그 맘대로 결정한 거 아니냐? 찜질방 가고, 술 쳐 먹고, 그렇게 놀다가 생계비까지 받아 가냐?’ 심하게 이런 정도까지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파업에 참여한 아줌마들이 고개를 못 들고 다녔어요. ‘내가 파업에 참여해가지고 이렇게 죄 지은 사람처럼... 내가 뭔 죄를 졌는데? 우리는 노동조합 전체를 위해서 한 달 반 동안 마음 고생해가면서 그렇게 투쟁을 했는데 저것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노?’ 그런 분노는 있지만, 그 분노를 표출하기에는 너무나 세가 열악했어요.

나는 그때 ‘인간이 정말 이럴 수가 있나?’ 하는 걸 또 한 번 느낀 거예요. 그거는 97년에 느낀 거랑 다른데...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거예요. 완전히 회사의 개가 돼서 파업했던 사람들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을라는 거 있잖아요. 위원장 사지를 붙잡고 끌고 나와 식당 앞에 세워놓고 사람들 앞에서 몰아붙이고... 결국 위원장은 8월말에 사직서 쓰고 나갔어요. 도저히 못 견뎌서... 저를 제명했던 위원장이잖아요. 막판에는 손잡고 화해했지. 위원장이 그렇게 나가고 나니까 나한테 타깃이 돌아오는 거예요. 그때 제가 사무국장 직무대행으로 노동조합에서 상근을 하고 있었거든요. 사측에서는 저 보고는 끝임 없이 ‘니는 상근자가 아니다. 인정 못한다. 현장으로 돌아가서 일을 해라. 안 그러면 업무이탈로 조치하겠다’ 하면서 계속 공문을 보내는 거예요.

위원장이 퇴사하고 공석이 되자 파업할 때 코빼기도 안보이던 부위원장이 직대가 됐어요. 부위원장이 그때 그 놈 밖에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즈그끼리 회의하고, 내가 들어가면 ‘니는 들어오지 마라’ 이렇게 하고... 그리고 현장에서 몇 명이 점심시간 마다 와서 내 책상을 끌어내는 거야. 폭력적으로 행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 끌려 나갈라고 책상 끌어안고 있다가 자빠져가지고 119 실려 가고... 한 달 동안 점심밥을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때는 진짜 살이 바짝바짝 빠지데요.”

 

힘 있는 파업투쟁을 벌였던 조합원들도 복귀 이후 상황이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장에 들어갔는데 원래 자기 했던 일자리도 안 주지, 외각으로 뺑뺑이 돌리지, 지원 보내지, 잔업 안 시키지... 심지어는 그해 12월달에 눈이 조금 왔는데 정말 아주 조금(5분 정도 지나면 녹아버릴 정도의 양) 쌓였어요. 그런데 그 눈을 쓸라고 파업에 참여했던 언니 두 사람을 마당에 내보낸 거예요. 그래서 그 중 한 언니가 펑펑 울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둔 일도 있었죠. 그렇게 그만둔 사람이 위원장부터 시작해서 10여 명 정도 되었어요.”

 

계속 강화되는 사측의 탄압을 극복하기 위한 고민을 하던 중 조합원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2003년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근골격계 투쟁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와 함께 2004년 초부터 근골격계 투쟁을 벌이게 된다.

 

“요양 승인을 받기 위해서 싸우는 과정에서 어느날 아침 출근을 하니까 생산부장이 조합원들을 식당에 다 모이라고 해가지고 한다는 말이 ‘현장에 있는 불순세력이 외부하고 연계를 해서 근골격계 질환으로 산재를 할려고 한다. 노동안전보건연구소라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까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해주려 하는 게 아니고 자기들의 투쟁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행사하는데 진주햄의 두 분이 오셔가지고 술을 마시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아픈 사람들이 어디 가서 술을 먹냐? 아프면 언제든지 와서 이야기해라. 회사에서 다 알아서 잘 해준다’ 이렇게 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자유가 없었어요. 전체 조회나 부서별 조회 등을 통해 계속적으로 산재하는 걸 아주 나쁜 짓인 것처럼 매도를 하고 그러니까...

당시에 아줌마 한 명이 다리를 절고 다니실 정도로 아주 아픈 분이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어깨가 아팠는데 이게 자꾸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이 휴직을 내가지고 치료를 받아서 복직을 했는데, 3개월 휴직해서 병이 제대로 낫습니까? 안 낫잖아요. 그런 상태로 더 이상 휴직을 연장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복직해 일을 하는데 상태는 더 심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안 되가지고 그만두고 나가시데요. 뒤에 들리는 얘기로 길에서 회사사람이 이 아줌마를 봤는데 병원 앞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더랍니다. 우리가 몇 번을 얘기했거든요. ‘아줌마, 그라시면 안 됩니다. 산재는 나쁜 게 아닙니다. 아줌마 몸을 보이소’ 그래도 산재를 못 하는 거예요. 그거 보고 인간이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가 싶데요.

이전에는 내가 사람들을 못 믿었던 거를 극복하면서 ‘이런 저런 애환이 있고 우리 노동자들이 말로 표현 못했을 뿐이지 가슴 속에 다 분노가 있구나. 그리고 이것이 폭발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다 주체로 떨쳐 일어날 수 있다’ 생각을 했는데... 근골격계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산재요양신청을 내서 요양을 받으신 언니들을 보면 어렵게 싸움을 잘 했냈다는 그런 거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변에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던 그 노동자들, 그리고 비굴하게 자기 몸이 그렇게 아작이 나도 끽 소리 못하고 결국은 회사를 나가서 병신이 되어버리는 그런 노동자들 보니까 자본 앞에 너무 나약한 이런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니까 ‘회생가능성이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믿음이 없다’ 이런 건 아닌데... 지금의 현실은 자본의 힘이 너무나 위대해 보이고 그 앞에서 한 없이 굴복해서 살려고 하잖아요. ‘이런데서 우리가 말하는 혁명이 가능한지... 노동자계급이 폭발적으로 진출해서 이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데요.”

 

2004년부터 2005년까지 근골격계 질환자 3명, 노조활동 탄압에 따른 정신질환자 2명이 산재승인을 받게 된다. 그러나 현장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근골격계 투쟁 당시 산재신청을 했던 언니들은 정말 열심히 싸우면서 노동자로서 자각도 엄청 높아졌어요. 그리고 산재승인도 다 받으셨죠. 그 분들하고 산재요양자 계모임을 꾸리고, 파업했을 때 제일 열심히 하셨던 아저씨하고 같이 결합해서 하고 그랬는데... 현장에서 뚜렷한 돌파구나 대안이 없으니까 이 모임이 잘 안 되더라고요. 산재를 했던 분들은 같이 결합이 되는데 나머지 파업을 했던 분들은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갔어요. 그분들도 마음고생 되게 많았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깊이 터놓고 이야기 하지는 못했지만 한 번씩 전화통화하거나 그러면 목소리가 너무 힘이 빠져 있어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거 같지가 않다’ 이렇게 말씀 하시는데 짧은 한마디지만 그 말속에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썩고 있는지 느껴집니다. 분명 이렇게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시는 분인데도 그냥 그렇게 적응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여기서 얼마나 마음이 많이 데겠노’ 싶데요. 그렇다고 특별히 내가 대안이 되 드릴 수도 없고...”

 

현장투쟁이 다시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는 과정에서 다시 보육에 따르는 힘겨움이 닥쳐왔다.

 

“애 뱃속에 있었을 때는 좀 힘들긴 해도 일을 다 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문제는 애를 놓고 나서죠. 그때는 현장에서 요구는 크게 없었어요. 그거는 크게 요구가 있거나 이런 시기가 아니기도 했고, 그런 시기를 조정을 한 것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집에 계속 틀어박혀서 애만 봐야 하니까... 사정없이 무너지는 일도 있었어요. 애 앞에서 내 의지나 마음이 나약해지는 것도 있었고, 그렇게 약해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너무 신경질이 나는 거예요. 남편이 조금만 늦게 오면 ‘그래, 니는 잘 나가제? 나는 집구석에서 아나 보고 썩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그때는 정말 많이 들었어요.

첫째 때는 제가 두 달 있다가 바로 회사를 갔거든요. 그래서 시기가 짧아서 별로 못 느꼈어요. 둘째를 놓고는 6개월을 쉬었거든요.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근데 그거는 복직하니까 괜찮아 지던데요.”

 

이즈음 10년 동안 현장 활동을 같이 해왔던 이수분 동지가 현장을 떠나게 된다.

 

“이수분 동지가 2006년 5월달에 사직서를 내고 퇴사했어요. 참 많은 세월 동안 같이 했었는데... 그때 제가 둘째를 놓고 잠깐 육아휴직을 할 때였어요. 혼자 현장에 있으면서 고민이 있어도 같이 나누지 못하고, 혼자 많이 힘들어 하다가 그만 두게 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잘못했단 생각이 많았어요. 의지해서 같이 잘 왔는데... 그 친구는 애가 하나 있었는데 애가 어릴 때 참 많이 아팠거든요. 그런데도 그 어린 것을 남의 손에 맡겨놓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애도 거의 크고 힘든 시기도 지났는데 본인이 그렇게 마음을 굳히더라고요. (한숨) 마음이 많이 아프데요. 같이 산 넘고 물 건너서 이까지 왔는데, 내가 힘이 돼주지 못해서 참 미안하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원망스럽기도 하고...”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은아는 반품실로 전환배치를 강요받게 되고, 얼마 후 정리해고가 이어진다.

 

“2006년 9월달이 되니까 내보고 반품실로 가래요. 반품실이 어떤 곳이냐 하면 유통기한 지나거나 불량제품 같은 거 들어오는 곳이거든요. 느닷없이 반품실로 가라니 분위기 파악이 안 되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반품실이 어떤 곳인지 물었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거기 여자가 일 할 수가 없는 덴데...’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관리자하고 면담을 하면서 ‘왜 나를 여자가 일 할 수 없다고 그러는 데를 보내려고 하냐? 못 가겠다’ 그러니까 ‘안 갈려면 가지마라. 니가 그러면 우리는 발령 난걸 거부하는 데에 대해서 조치를 하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라. 일단 지노위에 부당전환배치 구제신청 넣고, 노동부 양산지청에도 진정서를 접수하고 출근을 그쪽으로 했죠.

반품실 가보니 진짜 기도 안찹디다. 천정에는 나무가 얼기설기 엮여있는데 그 나무위로 쥐들이 행진을 해 다니고... 제품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유통기간 지나서 반품된 제품들이라 거기가 막 썩어 있어요. 구더기는 말도 못하고... 여름에는 반품실 바닥을 싹 쓸어 담으면 식용유 깡통에 구더기가 쌓일 정도로 버글버글하죠. 내가 거기에 가서 벌레에 대한 내성이 많이 생겼습니다(웃음). 그 전에는 꿈틀거리는 거는 되게 징그러워했거든요. 구더기가 이상하게 생긴 것들이 되게 많아요. 몇 번이나 내가 제품 박스를 따다가 기겁을 하고... 이런 곳에 여자를 보내다니 진짜 반여성적이다는 말이 절로 나오데요.

거기 가서 한 달 일하고 허리를 다쳤어요. 계속 박스를 드니까 허리에 무리가 갔는지 일을 하다가 뜨끔 했는데 꼼짝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병원에 실려가가지고 일주일 정도 입원해 있다가 산재처리해서 요양하고 11월에 복귀했어요. 반품실로 전배(전환배치)될 때 관리자가 ‘가서 일해 봐라. 문제가 있으면 그때 가서 보자’고 했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 했지. ‘처음에는 그렇게 해놓고 이렇게 허리까지 다쳤는데 왜 현장으로 안 보내주냐?’ 이렇게 했는데 씨도 안 먹혀요. 부당 전환배치 구제신청도 기각되고... 노동부에서도 한 번 나와 봤는데 형식적으로 보는 거지... 그래가지고는 ‘여성이 아주 못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열 받데... 거기에 12월까지 있다가 해고된 거죠.

물류가 도급화되면서 반품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반품도 물류 도급회사에서 다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즈그들은 끝까지 ‘반품실이 유지될 것인지 아닌지 아직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결국은 반품실이 없어지면서 같이 일하던 아저씨도 희망퇴직 쓰고 나가고...

처음에서 회사에서 ‘30명을 구조조정 하자’ 이렇게 제기됐는데, 노조에서 ‘2007년에 정년퇴직 할 분이 열 분 정도 있으니까 그 사람들 빼고 16명 정도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인원 수를 우리가 대폭 줄였다’ 하면서 생색내고, 위로금도 처음에는 회사가 ‘한 푼도 없다. 희망퇴직 할 사람 내라’ 그러니까 아무도 안 내잖아요. 그러니까 노조에서 힘을 써서 ‘희망퇴직 하면 통상임금 3개월 치 주겠다’ 이렇게 해서 마치 따낸 것처럼 하고... 아주 사람들을 기만을 한 거지. 사람들은 노조도 의지할 곳이 못 되고 비빌 언덕이 없으니까 희망퇴직을 다 쓰신 거예요. 그래가지고 최종 3명이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는데 그 중에 제가 있었던 거예요. 아줌마 두 사람은 자기가 정리해고 통보를 받으니까 희망퇴직으로 전환해달라고 해서 희망퇴직으로 처리했다더군요. 결국 15명이 희망퇴직으로 나가고 나 혼자만 정리해고가 된 거죠.

그때 정말 열 많이 받았어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이 잘못된 거... 그 과정에 보면 너무 잘못된 게 많아요. 숫자 조작한 거에부터 시작해서 대상자 선정하는 거나, 반품실에 보내가지고 그렇게 한 거나... 다 해서 해볼라고 했는데, 결국은 조합원들의 사실 확인서를 받아야 되고 하다보니까 쉽게 안 되데요.

그렇게 하면서 1년 반 정도를 지나오니까 그때의 감정이나 이런 거는 식은 거 같고... 복직에 대한 염원은 식은 게 아닌데... 그래서 이야기가 평이하게 되는 거 같애요.”

 

7년의 학생운동과 10년이 넘는 현장 활동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이은아는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후회 없음을 얘기했다.

 

“99년에 결혼을 하고, 2000년에 애를 하나 놓고, 2005년에 하나를 낳았어요. 그러면서 현장만 왔다 갔다 했거든요. 그때 진짜 힘들었었어요. 진보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 살아도 이렇게 살기가 힘들구나 느낄 정도로 임신, 출산, 육아, 가사, 내 의지에 대한 실망 등등... 정말 힘들게 살아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예전에 실현하려고 했던 가치들에 대해 ‘내가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그것까지 해야 되나?’ 아니 ‘내가 할 수나 있을까?’ 이런 식의 생각이 한 때 머리 속에 스며든 적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버티고 하다보니까...

항상 바쁘고 열심히는 살았는데 그 안에서 정말 내가 가져와야 될 거는 못 가져온 거 아닌가... 그리고 돌아보면 학생 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옆에 하나도 안 남아 있거든요. 지금은 사회 나와서 현장에서 만났던 동료들이나 양산지역의 동지들이나... 이런 사람들 밖에 없어요. 한 번씩 힘들 때는 내 주위에 정말 맘을 털어놓을 사람이 남아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힘이 빠지기도 했어요....

오히려 현장 들어가서는 학출이라는 게 나한테 걸림돌만 되는 거 같고... 그렇지만 그때 학창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노동자로서 살아가려는 내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자기 기득권만 강화하려고 하고, 기득권을 보장 받으려 하는 소시민으로 전락될 수 있었는데... 그 나마 학창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전락하지 않고 살 수 있었고, 이후에 더 열심히 살면 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해고 후 1년 6개월의 시간을 보내면서 주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저는 해고되고 나서 오히려 좀 살맛이 나거든요.

현장 조합원들 하고 더 함께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는 것은 많이 힘들어요. 이거는 노력부족이 아니고 해고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런 거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이고, 어떻게든 소통을 하기 위해서 다달이 소식지 만들어서 우편으로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거 말고는 현장과 소통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런 게 많이 고민되기는 하지만...

한일제관 투쟁할 때 울해협(울산지역해고자협의회) 동지들 하고 같이 하면서 울산지역의 투쟁하는 동지들 많이 보고, 부양해복투(부산양산지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하면서 부산지역의 많은 동지들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렇게 투쟁하는 동지들 보면서 저는 배우는 게 많아요. 그렇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계속 달려가야겠다고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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