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비정규교수노조 김영곤 이야기

25년 넘는 세월을 노동운동을 하면서 보낸 후 변질하는 노동운동의 문제를 고민하며 새로운 질의 운동을 고민하는 이가 있다. 나이 예순에 교원 신분 없는 저임금 대학강사의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영곤 동지를 만나 오랜 기간 걸어온 삶과 최근 고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49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김영곤은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위해 서울생활을 하게 된다. 68년 고려대에 입학한 후 동기들과 독서모임을 하면서 민족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62년도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돼서 상당히 실행되고 있었고, 농촌에서 많이 올라오면서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문제가 생기는 것이 있었고, 65년부터 베트남전쟁의 영향... 그런 것들이 있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동학혁명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독서모임은 1년이 지날 때쯤에는 인원이 40~5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활동력이 왕성했다. 독서모임은 이후 좀 더 범위를 넓혀 공개 써클로 발전하게 된다.

 

“2학년 때는 3학년과 4학년 합쳐서 한맥이라는 모임을 맨든 거야. 공부도 하고 데모도 하고 그랬는데... 고대 안에 노동문제연구소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문제를 가깝게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꼴의 운동형태가 새로 생긴 거예요. 4.19 이후에 보면 민족주의적 경향과 박정희가 좌익출신이기 때문에 그거를 약간 수긍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거와 다르게 대학교 초년생들을 중심으로 반박정희, 진보적 민족주의, 친노동, 농민에 대한 연민 이런 정서가 생긴 거예요. 그것을 71년까지 계속한 거예요.”

 

2학년이 된 69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맞선 반대투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70년 전태일의 분신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71년 대학가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해 대학에 무장병력을 상주시키고 휴업령을 내리게 된다.

 

“71년 10월 15일 위수령 때 재적당해서 72년 1월부터 구로동에 있는 대한광학에 취직했어요. 72년 10월 17일날 유신이 일어나고, 73년 봄에 한맥 후배들이 유신반대 하는 민우지를 학교에 뿌렸어요. 그러면서 그걸 탄압할려고,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 교수님이 이전에 북한에도 갔다와 이미 형을 살았는데, 이것을 재탕해 학생을 묶어 김낙중 민우지사건이 생긴 거예요. 나는 공장도 다니고 야학도 하고 그랬는데, 74년에 구속된 거예요.”

 

70년대 초반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인원이 많지 않았지만 전태일의 영향 속에서 현장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많았다.

 

“80년대에는 만 명 정도가 현장으로 갔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현장으로 간 사람이 몇 십 명 됐죠. 그 당시에는 많은 거죠. 노동으로 많이 가고, 농촌으로도 가고, 그 다음에 빈민... 전태일을 따라서...”

 

75년 석방 된 후 학교에 복학을 해 졸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77년부터 공장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78년에는 인천에 있는 대우중공업에 들어가게 된다.

 

“조합원이 5000명 정도 되는 사업장이었는데 81년도에 노조가 민주화됐죠. 들어가서 4년 동안 사람들을 조직해서 민주파를 탄생시키고 입사동기모임, 고향모임 등 다 모아서 김광수 위원장을 당선시켰는데... 나는 사무국장이었는데... 전두환 정권 때는 그전에 실형 받은 게 있으면 노조 간부를 할 수 없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결국 사무국장을 사퇴하고 강제 사표를 썼죠.”

 

대우중공업을 그만둔 후 다시 안산으로 내려가 지역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안산을 출발로 해서 경기남부지역에서 조직활동을 벌이게 되면서 87년에는 수원노동상담소 활동을 하기도 한다. 경기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하던 중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고 이 흐름 속에서 노동조합은 지역을 중심으로 모여 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로 이어지고, 노동단체들은 지역과 전국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활발하게 만들어지면서 88년 전국노운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를 결성하게 된다.

 

“88년 되면서 두 갈래로 갈라져요. 한 갈래는 민주노조가 지노협(지역노조협의회)도 만들고, 또 한 갈래는 노동단체가 경수노련(경기수원지역노동자연합) 같은 걸 만들고... 나중에는 그런 노동단체들이 모여서 전국노운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을 만들었지.”

 

89년 수원에서 삼성전자 노조 건설 준비와 경수노련(경기수원지역노동자연합) 건으로 다시 수배를 받으면서 94년까지 장기 수배생활을 하게 된 김영곤은 서울, 구리, 포천 등 서울과 경기북부지역에서 조직사업을 벌이고 전국노운협 의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94년 초 경수노련 사건으로 구속되고 출소한 후 95년 전국노운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조직사건으로 다시 구속된다.

 

“94년 되니까 운동권 내부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는데... 고르바쵸프가 나와서 연성혁명 하자고 그러니까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나 노해동(노동자해방투쟁동맹) 같은 급진파들이 돌면서 민중당을 추진을 하죠. 그때 나온 얘기가 의회를 지향하는 조직과 합법적인 노동자대중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이라는 양날개론을 들고 나온다고요. 그러면서 ILO공대위(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 때 국제판으로 넓어지니까 ILO에서도 노동조합을 합법화하라고 권고도 하고 그러니까 양날개론이 부각을 하면서 노동운동단체의 역할이 약해진 거지.”

 

이후 급속히 변질해가는 노동운동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되면서 97년 노운협 활동을 그만두게 된다.

 

“노운협 그만두니까 살 집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때 고 김관회 후배가 인천에 자기네 빈 집이 있으니까 와서 살라고 그래요. 가서 봤더니 정말로 빈촌이예요. 거기서 헌책 모아서 도서실 공부방 열고, 아버지가 아프시면서 고향에 들려 농사도 짖고, 그러면서 도시 변두리 사람이 농민이 어떤 애로가 있는가도 알게 되고... 학생운동 노동운동 하면서 똑똑하다는 사람들 틈에 살면서 이웃이 어떻게 사는 지 잘 몰랐던 거예요... 그리고 내가 급성간염에 걸렸었는데, 생협(소비자생활협동조합) 물건을 먹으면서 고쳤어요. 그러면서 친환경 이런 것도 눈을 뜨면서 산업사회가 제기했던 반환경적인 그런 것도 보고, 친환경농업 자체가 갖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성격도 알게 되고, 공부도 하고...”

 

25년 넘게 있었던 노동운동 일선에서 잠시 물러난 김영곤은 노동운동의 변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책을 쓰게 된다.

 

“94년 이후에 노동운동이 분명히 필요한데 현실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야. 양날개론 때문에... 분명히 잘못된 건데... 운동지형이 바뀐 거거든요. 그동안 나름대로 힘을 들였었는데 안 되니까 기운도 빠지고,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지고... 그래서 ‘이 원인이 뭔가?’하는 고민을 하게 된 거죠. 노동운동사를 써보자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래서 3년 정도 예상을 했던 거예요.

임진왜란 때부터 농촌에서 임노동이 발생을 해서 도시로 나와서 임노동자가 되고, 도시빈민이 되고, 그리고 나중에 이주노동자가 되고... 이게 일제시대 때부터, 짧게는 60년대부터 산업화가 되면서 이농이 되고... 90년대 말 되면 이농이 끝나거든요. 그 다음에 IMF사태가 오고... IMF사태 이후에는 노동이 정규와 비정규, 그리고 실업자가 혼재하는 이런 사회가 돼 버린 다고요. 이런 것들을 쓰다보니까 원래는 3년 계획이었는데 9년 동안 쓰게 됐어요.”

 

“처음에는 노동운동사 쓸려고 그랬는데 노동사를 쓴 거예요. 노동조합운동이라는 것은 대기업 제조업 중심으로 가면서 생산의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전체를 볼 수 있는 틀은 아니라는 걸 확인한 거죠. 그래서 생각이 바뀐 거죠.”

 

조선시대 후반기부터 시작한 임노동의 탄생과 형성과정을 추적해본 결과 포괄적 의미의 노동자가 한 뿌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에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상품 화폐 시장이 발달하고, 영농기술도 발달해요. 이앙법을 도입하면서 농촌노동력 중에 3/4이 필요 없게 되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도시로 나와서 용산강가에는 구름 같이 모여 있었다는 거야. 가렴주구가 심해서 피하기도 하고... 정약용 같은 경우는 부역동원 체계가 깨져 관부의 공사 일이 안 되니까 수원성을 쌓을 때는 임금을 주겠다고도 해요. 임노동자를 고용해 10년이 걸릴 걸 2년 만에 쌓았다... 그러면서 노동의 지형이 바뀌어 버린 거예요. 갑오농민전쟁 때도 집강소를 차리면 땅 있는 사람들은 봄 되면 돌아가는데 땅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서 기간요원이 됐다는 거야.

도시로 가서는 임노동자가 돼서 살아가는 거야. 일부는 노점상이나 일용노동자하면서 도시빈민이 되고... 이 자손들이 다시 노동자가 되고, 노동자들이 늙거나 다치면 도시빈민이 되고, 일부는 유민으로 이민도 가고 강제적으로 징용을 가서 이주노동자가 되고...

이렇게 하면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400년 동안을 쭉 이동을 했는데, 농업노동자 임금노동자 도시빈민 이주노동자는 뿌리가 같은 하나의 노동이더라고요. 그래서 이거를 하나로 볼 때만 노동 내부의 일체감 형성과 연대가 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예요.”

 

이렇게 노동의 근원과 발전과정을 추적하며 결론에 해당하는 노동의 미래 부분을 정리하면서 고민하던 중 2003년 일본과 2004년 인도 태국을 각 한달 동안 방문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게 된다.

 

“일본에서는 여러 부문과 지역으로는 최북단에서 남쪽까지 한 달 동안 한 바퀴 돌았어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히 많이 봤어요.

일본은 생활부분에서 상당히 발달했더라고요. 베트남전쟁 반대활동을 할 때 나리다에서 B1폭격기가 베트남 전장으로 발진을 하는데 나리다공항 확장을 하는 걸 반대하는 산리스카 안보투쟁이라는 유명한 활동을 하거든요. 이 사람들이 일본 신사회운동의 발원지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것이 쭉 퍼지면서 환경운동, 반전, 평화, 반핵, 혁신지자체, 대리인운동으로 가요. 대리인운동은 지자체에 대표를 뽑아놨더니 권력자로 바뀌는 것을 부정하고 ‘의회에 나간 사람은 대리인이다’라고 해서 임기를 2번으로 제한한다든가 하는 게 있거든요.

일본은 노동운동이 자기 역할을 못하면서 대중이 분리된 것도 있지만 내부의식에서는 이런 것들이 많이 깔려 있더라고요. 어떤 사회학자는 ‘일본은 사는 데는 상당히 고른 사회다’라는 표현도 해요. 일본 경우도 배울게 많더라고요. 그 반면에 오야봉문화라든가 세력이 봉건식으로 분화돼 있는 거는 문제점이더라고요. 그리고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점이 있고...”

 

“인도 세계사회포럼을 갔더니 그쪽에서 하는 얘기는 ‘반세계화운동의 핵심은 공동체고, 커뮤니티고, 그것의 완결점은 큰 다섯 나라(인도, 남아공, 러시아, 중국, 브라질)가 자기네 농산물을 소비하는 거다. 그걸 완성하면 세계화를 민중의 편으로 갈 수 있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인도는 한국이나 일본처럼 조직적인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많이 못 배웠어요. 어려운 것들만 보고...

협동조합 같은 경우는 굉장히 발달했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보지는 못했어요. 한 주가 만 명인데 거기서 나오는 계란 우유 과일 이런 것들을 협동조합을 통해서 도시로 다 보낸다고 그러더라고요. 도시에서는 우수한 씨앗을 다시 농촌으로 보내주고... 그런 것들을 체계적으로는 못 봤지만 중간중간 얘기도 듣고... 그러면서 ‘인도가 가난하지만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이 이런데 있구나’하는 걸 생각했죠.”

 

이런 8년의 노력 끝에 2005년 ‘한국노동사와 미래’(전3권, 선인)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고, 노동조직 형태로 자영업, 기업, 정부 공공부분에 더해 ‘공동체자기고용’이라는 대안적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한국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공동체자기고용이라는 게 이런 꼴로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걸 파악했던 거예요. 그렇다고 협동조합이 완결적이라고 보는 건 아니고... 거대한 자본과도 싸워야 되지만, 사람들이 한계에 봉착해 있으니까 탈출구로서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사회주의 가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이고, 그런 활로를 발견한 거죠.”

 

“노동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자연물의 가공’이라고 했고, 임노동 관계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한다’ 그래서 노사관계에서는 더 많은 임금을 따내는 것을 바래잖아요. 그런데 가면 갈수록 격차는 커지고 노동의 권리는 약화되는 거죠. 그래서 노동을 공동체자기고용이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나나 가족이나 이웃이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해서 나눠 갖는 과정이다’는 거죠.

그러면 이거는 넓은 의미의 노동(농업노동자 임금노동자 도시빈민 이주노동자)과 연관시킬 수 있거든요. 세계적인 자원과 연관시킬 수도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의식주 건강 교육 등을 도시와 농촌과 세계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공동체상으로 만들어본 거죠. 노동의 사회경제적 조직 능력이 향상하고 인터넷이나 정보의 발달이 있기 때문에 옛날 사회주의가 안됐던 것보다 좀 더 계량 가능하게 접근할 수가 있고... 또 하나 시장이라는 요소도 부인할 수 없거든요. 일부는 공동체적인 입장에 따라서 서로를 봐주지만, 그런 한계를 넘어서 시장관계에서도 경쟁관계를 갖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예요.”

 

책이 출간 된 후 고려대 강수돌 교수가 강의를 제안해서 2005년 가을 학기부터 고려대에서 ‘노동의 역사', '노동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요즘 대학생들이 경험 자체가 자기, 가족, 친한 친구 명 몇, 그리고 이성 친구 말고는 좁아요. 그리고 현실은 CEO로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부분이 학생들한테 비어있는 거예요. 학생들하고 주로 토론식으로 하니까 학생들의 정서나 이런 게 상당부분 나한테 되돌아오죠.

강의 첫날 ‘노동자가 노동을 해서 나온 것이 죽은 노동이고, 죽은 노동이 집적해서 자본이 됐다. 또 자본을 통해서 공장을 지었다. 그래서 노동자가 공장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어때?’라고 하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수업에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다시 물어봤어요.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데 정서적으로는 납득이 간대요. 그렇게 발전하는 거죠.

여기서는 노사 어느 한 쪽을 편들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노동자가 진짜 주인이 돼야 된다는 거니까. 요즘 젊은 애들은 창업을 바라잖아요. 그런데 창업하면 망하니까 집단적인 것을 모색해보자는 생각을 해요. 굉장히 똑똑해요.

한 학생은 소설을 쓰고 싶은데 돈 문제나 이런 거 때문에 부모의 뜻을 따라 경영학과에서 회계사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이 수업을 들으면서 ‘결국은 자기 취미나 특기나 이런 것을 직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는 것을 배우고서 ‘출판사를 해보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학교 안에 고전읽기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에는 목적의식적인 것은 있어도 이런 자연스런 게 게 부족했거든요. 이런 애들이 사회에 나가면 뭔가 만들겠죠. 새로운 전형을 만드는 거죠.”

 

50대 후반의 나이에 시작한 시간강사 생활 속에 김영곤은 대학강사의 열악한 처지와 한국대학의 불합리한 문제를 확인하게 된다.

 

“비정규교수로 와 있는데 거기에는 4개월 계약제인 시간강사와 1년 2년 3년을 단위로 계약하는 연구교수, 강의전담교수, 겸임교수 등이 있는데 이런 부분을 다 포괄해서 비정규교수라고 그래요. 그 사람들은 교원들이 아니에요.

원래 헌법에 교원지위 법정주의라고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데는 내용과 형식을 갖고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거든요. 49년에 재정된 고등교육법에서도 강사가 교원이었는데, 유신 때 지식인들 탄압하면서 유신에 반대하는 지식인들 쫓아내고, 학생들은 군대로 보내고, 강사를 거리로 표류시켜버린 거예요. 그래서 강사의 교원지위가 박탈되고 30여 년 동안 방치가 된 거예요. 지금은 숫자가 7만 명 정도 되고, 강의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데... 법대나 의대 같은 경우는 좀 약하고, 예술계 같은 경우는 80~90%가 강사고...

그 부분은 어떤 문제가 나오냐 하면요. 교원지위가 없으니까 학교에서 말빨이 안서는 거예요. 계약도 없고, 교원도 아니고, 4대 보험도 없고, 연구실도 없고, 연구비도 없고, 의사결정에 반영도 못하고... 연구실이 없다는 얘기는 학생들이 상담할 공간이 없다는 거예요. 연구비가 없다는 것은 생활이 안 되니까 인문계통을 자기 재주껏 견디고, 이과계통은 실험을 못하니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다 퇴화해버리죠. 학문적으로 신선한 어떤 의견이 있더라고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없는 거예요.

1999년 이후 대학강사가 6명이 자살하고 서울대에서 3명이 자살했어요. 한경선 박사는 한국에서는 죽어도 눈 하나 꿈쩍 않으니 아예 미국 모교로 가서 유서 쓰고 자살했어요. 지식사회의 전태일이예요.

나 같은 경우는 작년에 연봉이 450만원이고, 올해는 500만원 이예요. 지방은 대학원이 깨져서 사람들이 대학원에 안 들어오니까 40대 이상 강사들이 부담이 커요. 광주나 대구나 부산이나 이런 데는 대학원을 안 가요. 지역학문이 깨진 거죠. 심지어는 억지로 데려온 대학원 논문도 교수가 대신 써주는 경우도 있대요.

강의하다 보니 학생들이 노트 필기를 안 하는 거야. 칠판에 쓰고 밑줄 쳐 달래요. 그거 가지고 노트 검사하고, 그거 가지고 시험보고, 그렇게 학점 딴 애들을 사회에서 뽑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고가 돌아가는 애들이 사회에 못 나가는 거예요. 광우병 파동이 나도 여중생이 촛불을 뒤늦게 눈치 보며 들잖아요.

연세대학교의 경우는 전임이 연 1억4천만원을 받아요. 강사의 경우는 연 768만원 받아요. 1/20이잖아요. 그러면 '가르치는 자'에게 주는 돈의 95%가 부동산 건물 매입 같은 데로 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학생들이 수준 높은 교육을 못 받아요.”

 

이런 문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2007년 9월 7일부터 ‘고등교육법상 대학강사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면서 국회 앞 농성을 벌이고 있고, 11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고려대분회를 만들고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간다. 그리고 청와대, 국회 교육위 소속 국회의원 지구당 사무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등에서 1인 시위도 벌이고, 매주 수요일에는 국회 앞 농성장에서 ‘국회신문고’라는 형식으로 촛불문화제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쉽지는 않다.

 

“지금 싸우는 데는 김동애 특위장(교원 법적 지윈 쟁취 특별위원회), 영남대, 고려대, 부산대가 주로 싸우고, 나머지 6군데 분회가 있는 데 거기는 잘 안 싸워요. 전국적으로 9군데에 조합원이 일천 5백여 명 있는데 몸으로 싸우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 거예요. 지식인 사회가 그래요.”

 

나이 예순에 힘겨운 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영곤은 ‘비정규교수의 교원지위 회복, 대학생의 수업권 확보, 석박사생의 미래 보장, 학부모의 노후권 보장, 대학교육 정상화, 지식한국 사회를 살리기 위한 국민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년 동안 비정규교수 정규교수가 노력했지만 이들의 역량으로 이 문제를 못 풀었어요. 거기에 대학생과 대학원생과 학부모가 일부 붙어 새로운 동력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대학은 국회의원들한테 로비를 하고, 교육부는 모르쇠를 하고, 교육부 관료는 나이 먹으면 그만두고 대학의 학장이나 총장으로 가는 거예요. 이런 수십 년 묵은 대학교육 붕괴의 트라이앵글이 있거든요. 이 구조를 쉽게 넘을 수 없는 문제가 있어요. 싸움의 전망이 당위적으로는 보이는데, 현실에서는 잘 안 보이는 거예요.

학생이나 학부모가 이 문제를 자기 문제로 봐야 되요. 그래서 시위 농성을 와서 같이 해주고... 지혜도 주시고... 그런 사람들이 100명 정도는 늘어나야 힘을 받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