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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참여환경연대 고유기 이야기

신자유주의적 개발정책은 제주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그에 맞선 활동도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시민운동 영역에서 치열하게 맞서 투쟁하고 있는 제주참여환경연대 고유기 동지를 만나서 활동 속의 고민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69년 제주 남원에서 태어난 고유기는 부모님이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정착한 이유로 고향에서 다소 소외되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88년 제주대에 입학 한 후 시대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을 접하게 된다.

 

“그때 분위기가 워낙 그랬으니까... 저는 그때 별로 고민을 안 했어요. 휩쓸려 다닌 거죠. 그 과정에서 제 스스로가 변화된 것을 느껴요. 원래 내성적인데 적극적인 쪽으로 가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또래 학생 운동권에 비해서는 소극적인 편이었죠. 여전히 사회적인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내면에 대한 고민들이 많았고...

그런데 그런 시기가 지나고, 민주정권으로 가고, 사회가 많이 열렸잖아요. 그러면서 예전에 운동했던 선배나 이런 사람들은 다 자기 생활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됐어요. 그런 거 보면 옛날에 쎄게 싸웠던 사람들은 다 가고, 나 같이 흐물흐물 했던 사람만 남은 거 같고...

그런데 제 스스로 위안하는 거는, 운동을 정말 내면화해서 고민했다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최루탄이 막 터지고 할 때 난 두려웠거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앞장서서 싸우는 친구들 보면, 부럽긴 한데 ‘저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이런 거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애요. 굳이 제가 위안을 삼자면, 그런 삶의 태도가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붙잡고 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가게 된 후 대학생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군대라는 환경 자체가 그렇지만 아주 기계적인 삶이잖습니까? 그 속에서 길들여져서 ‘나가면 절대 운동 같은 거 안 한다’고 마음먹고 나왔죠. 학교 와서 복학 하고는 6개월 동안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처음 6개월 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때부터 다시 고민이 되는 게... ‘이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이냐?’... 내가 원하지 안 해도 영어학원 가고, 도서관 가고... 그러면서 대학가의 분위기라는 것이 진짜 공부하려는 것도 아닌 거고... 그런 것들이 되게 염증이 나더라고요. 뭔가 자유롭고 싶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면서 자유라는 화두에 대해서 고민했던 거 같애요. ‘그게 결국에는 어떤 구조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들 많이 하고... 내가 일어나서 학교 가고, 어디 가고, 하는 거 자체가 누군가의 보인지 않는 손에 의해서 각본에 짜여 져서 사는 것 같은 기분... 이런 거에 대해서 저의 내면에서 최초의 저항의식 같은 게 생겨났던 거 같애요. 그때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됐죠.”

 

93년 총학생회 산하로 만들어진 지역조사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지역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하게 됐다.

 

“지역문제, 예를 들어서 제주도 지하수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집착이 컸어요. 그 당시만 해도 개발논쟁이 한창 일어서... 제주일보만 해도 그 당시에는 개발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반대 목소리를 내는 신문이었거든요. 거기 사설 같은 거 맨날 수집하고, 지하수에 대해서 공부하고, 골프장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런 걸 했죠. 그게 나중에 사회 나와서 활동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94년에 제주도종합개발계획안을 갖고 공청회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공청회가 오후 2시에 시작해서 새벽 2시까지 갔어요. 총학생회는 가서 어떻게 파토 놓고 데모할거냐 논의하는데, 우리는 ‘내용적으로 붙자’하면서 여학생회나 다른 동아리 있는 애들 데려다가 다 스터디 시키고, 공청회 할 때 질문들 다 역할분담 시키고, 그런 일들을 한 거죠. 그런 식으로 싸움을 조직하는 쪽으로 많이 했고...

95년에도 감귤 수입 개방 문제가 제주도에 엄청난 문제였거든요. 그때 공설운동장에 제주도민들 몇 천 명 모여서 데모하고 그럴 때 총학생회는 통일투쟁 준비하고 있었다고요. 그때 우리가 하도 답답해서 비상총회 소집 서명 작업을 했죠. 학생 2천명인가 서명 받으면 소집할 수 있도록 돼 있었어요. 연일 서명을 받아서 학생 비상총회가 소집이 됐어요. 그때 제주대학교에서 학생 2천명이 모이는 집회가 있었죠.”

 

95년 졸업을 한 고유기는 선배와 함께 감귤식초 제작 사업을 하게 된다. 초기에는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사업은 정부지원을 받아내는 걸로 변질됐고, 결국 고유기는 2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저는 졸업을 하면서 ‘반드시 사회운동가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상근 활동을 할 것이다. 상근 활동은 결혼을 해서 할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졸업하는 선배들 보니까 1~2년 하다가 다 가더라고요. 물론 조직 내부의 여러 사정도 있었지만, ‘안정되지 못한 생활에서 당위적으로 했기 때문에 저런 문제들이 생기는 거다’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마음을 먹고 있었던 거고...”

 

동거와 함께 결혼으로 이어진 개인 삶에서도 어려움은 있었지만, 신념과 열정이 있었던 고유기는 많은 고민 없이 사회운동 활동을 시작한다.

 

“생계문제나 그런 거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건데... 완전히 주먹구구식이었던 거죠. 집사람 자취하는 데 몰래 들어가서 눌러 앉아 살아버리고, 그러다가 애 낳고,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결혼하고 살아야죠.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가정을 잘 꾸려 갈 거냐’ 하는 걸 설계하고 그런 게 전혀 없었던 거죠. 저희 집안이 워낙 터전이 없는 집안이었고, 집사람쪽도 마찬가지고. 우리 둘은 정말 돈 한 푼 없이 어렵게 시작했어요. 심지어 결혼도 돈 꿔서 했거든요. 그 빚이 아직도 남는 거예요. 그게 내내 발목을 잡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제일 어려운 거죠.

제가 너무 개념이 없었던 거 같애요.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정만 있었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면 그런 인정욕구가 굉장히 많다고 봐요. 여성운동단체에서 그런 분석을 하더라고요. 이런 인정욕구가 많아서 어려운 운동현실을 버티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가정이나 이런 데로 돌아가면 가부장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저도 그런 유형 중의 하나이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안이 나오면서 제주지역은 매우 격렬한 반대투쟁이 일어난다. 그 투쟁을 공동으로 벌이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제주도개발특별법제정반대 범도민회’였다. 범도민회는 특별법이 통과된 후 ‘제주도개발특별법 철폐 및 민주화실천 범도민회’로 바뀌고, 이어 ‘도민정치실현을 위한 범도민회’로 이어진 뒤 97년 ‘참여자치와 환경보전을 위한 제주범도민회’로 바뀌면서 대중적 시민운동단체를 표방하게 된다. 이런 범도민회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같이하고 있던 고유기는 97년 4월 범도민회 상근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나라 시민운동에서도 경실련이 주도하던 흐름이 이어지다가 94년 이후 진보적 시민운동을 자임한 참여연대가 떴다고요. 거기서 주로 했던 게 작은권리 찾기운동, 아파트 시민학교 이런 거였거든요. 그래서 범도민회 와서 작은권리 찾기운동을 열심히 했죠.

그동안 우리 단체가 지역 개발과 관련한 것을 중심으로 해왔다면 작은권리 찾기운동 같은 경우는 지역의 특수성과 무관하게 시민의 보편적 권리라는 차원에서 만든 사업이어서 호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이를테면, 제민일보하고 같이 했었는데, 어떤 사람이 행정에서 부당한 피해를 받았다는 사례들이 접수가 되면 권리를 구제하고 사회에 알리는 것들을 했죠.

98년에는 제주 동쪽에 오름(한라산 주변에 산재해 있는 봉오리)들이 많은 동네인데, 거기에 송전탑 건설한다고 그래서 송전탑 반대운동을 했어요. ‘이거는 오름의 왕국에 철탑을 꼽는 행위다’ 해가지고 반대운동을 산악인들 중심으로 했던 기억이 있고... 지금은 오름동호회가 수 백 개가 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오름동호회가 많지 않았어요. 반대운동을 하면서 오름에 대한 가치가 알려지기도 했죠.

우리가 환경단체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환경은 좀 다른 거죠. 국가와 자본에 의한 개발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거에 대한 안티로서 등장한 것이 환경이죠. 환경이라는 것은 단순히 자연과 자원의 보존이 아니라 지역의 공동체, 전통적인 생활양식, 자연환경을 지키자는 총체적인 의미에서 환경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환경운동을 해오다보니까 주로 정책감시운동이었죠. 제주환경운동연합은 생태나 습지와 같은 현장중심이고... 환경정책분야의 의제들도, 해결이 됐다기보다는, 상당히 정리가 됐죠. 예를 들어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문제도 30년 된 논쟁이라고 그러지만, 2000년 말에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돼서 2002년 말에 매듭이 지어졌거든요. 이런 것들은 중요한 성과로 생각해요.”

 

개발에 대한 환경보존문제에 많이 개입하면서도 고유기는 환경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기도 했다.

 

“그 기간에 ‘환경운동은 중산층 운동이다. 이게 내가 해야 될 운동인가?’하는 고민을 잠깐 했었죠. 제주도의 경관을 보존하자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가만히 맥락을 살펴보면, 과거 60~70년대 진행돼온 제주도 개발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의식이 축적돼온 거였어요. 주민들이 소외됐다는 거예요. 그로부터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싸움을 했던 범도민회 활동이 발전해 왔고...

그런데 환경이라고 하는 순간 제주도의 경관이나 이런 쪽으로 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주민들하고 일정하게 유리되고, 심지어는 주민들이 직접 골프장을 유치하겠다고 나서면서 우리가 굉장히 딜레마를 겪었어요. 그런 관점에서 저는 환경운동에 대한 나름대로의 회의감을 갖고 있었죠.

오름에 송전탑을 건설하는 문제는 제주도 입장에서는 경관문제이고 중요한 문제인데... 이 싸움이 어떻게 발전해 가야 하느냐하면 결국 한전과의 싸움이거든요. 한전이라고 하는 거대 공룡기업이란 말이에요. 한전은 전력사업을 독점하면서 공기업이면서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하는 건데... 그런 싸움으로 옮겨가지 못한 한계가 있죠. 제주도 같은 경우에 주민들이 경관문제나 이런 데는 관심이 있는데, 한전이라는 거대 독점기업에 맞서는 투쟁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는 이런 것들이 늘 있는 거죠.

지역의 골프장 문제도 우리가 하나도 못 막아낸 거죠. 그리고 맨날 싸우는 방식이 환경평가서 분석하고 그런 건데, 그건 이제 합법적으로 다 해버려요. 문제는 그 뒤에 있는 커넥션들인데, 거기까지 치고 나가지 못하는 거죠. 이런 한계들이 있는데, 이는 환경이라는 의제의 한계도 있지만, 운동 역량이 미성숙했다고 봐요. 왜냐하면 그런 커넥션까지 파헤치는 정도의 활동까지 해나가야 되는데 거기까지 못 가는 거죠.”

 

98년 화북주공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벌이게 된 활동은 다른 차원에서 주민의 직접참여운동의 경험으로 다가왔다.

 

“98년에 제주도에서 최초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생긴 게 화북주공아파트단지였거든요. 98년 2월초 정도에 입주를 했어요. 저도 거기에 입주를 했거든요. 입주하는 날 10여 년 만의 폭설이라고 할 정도로 눈이 많이 왔는데, 이 주공아파트가 신구간(제주지역 특유의 이사철로 대한과 입춘 사이 기간)에 맞춰서 입주를 하다보니까 전기가 안 들어온 거예요. 입주를 했는데 그날 밤 사람들이 추위에 덜덜 떤 거예요.

그래서 그때 한 게 입주민 피해보상운동을 전개했죠. 그러면서 주공하고 싸워서 피해보상도 받아내고, 그 과정에서 아파트자치회를 구성하는 초동주체를 만들어냈죠. 저도 아파트자치회 총무까지 맡았어요. 그 이후에 아파트 시민학교도 하고, 공동주택법 개정운동도 하고... 법률적으로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자치권이 보장이 안 돼 있어요. 그 싸움을 전국단위와 연대해서 했고, 일부 성과를 봤죠. 임대아파트에도 자치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적 근거를 확보했죠.

그 운동이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런데 그 싸움이 이후에 화북주공아파트는 우리의 해방구다 할 정도로 호응과 지지가 있었거든요. 저는 거기 3년 살면서 조기축구회 이런데도 열심히 했고...

그런데 그런 성과들을 이어가지 못했죠.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데... 역시 동네운동이어서 그 동네에 천착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죠. 저는 아파트자치회 총무를 하면서도 낮에는 단체에 와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거기 가서 또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런 한계가 있고... 또 조직 역량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거기 사업을 못했던 거예요. 그 당시에 거기 했던 주민들과의 네트워크는 지금도 개별적인 형태로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죠.”

 

몇 년 간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범도민회는 조직운영 방식에 대한 문제 등으로 조직 내에서 강력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그에 따른 논쟁의 결과 2001년 단체 이름을 ‘참여환경연대’로 바꾸면서 대중적 조직으로 발전해나가려는 노력을 한다.

 

“범도민회 활동은 창립 때부터 이를 주도한 분이 갖고 있던 개인적 네트워크가 물화된 과정이었죠. 그런데 2001년에 참여환경연대로 개칭되는 거는 1인 주도의 명망성 중심의 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튼 거죠.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죠. ‘몇 명에 의해서 주도되는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리더십으로 단체가 거듭나야 된다’하면서 단체 명칭도 바꾸고 그렇게 했던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범도민회라는 이름을 바꾸는 거에 대해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역에서 고유명사처럼 돼 있어서... 그런데 다수가 대체로 동의해서 갔던 건데... 약간의 논쟁이 있었죠.

시민운동의 특수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시민단체가 성장과정에서 단 한 명, 또는 몇몇이 사실상 단체활동의 주를 형성하게 됩니다. 많은 정보가 단 한명, 몇몇을 중심으로 모이고 따라서 조직 내 의사결정의 상당한 부분을 주도하고, 그것이 조직을 키우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는데, 한편에서는 비판적인 요소가 되는 거죠. 지역 사회에서 다른 단체와의 연대에 있어서도 늘 견제대상으로 되요. 우리가 의제를 늘 선점하고 있으니까...

저는 그 그늘에서 계속 성장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일을 더 빨리 배울 수 있었기는 한데, 그걸로 인한 고민도 굉장히 많았죠. 나는 다른 사람하고 일을 안 해봤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사무처장을 하면서 조직의 중심에서 일을 하는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죠.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리더십이 요구되는 것 같은데, 이를테면 의제세팅이나 독자적인 활동력보다는 연대나 지역 시민사회와 함께하려는 일종의 네트워크 리더십이 중요해진 것 같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연대할 수밖에 없는 굵직한 현안들이 많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실제로 다른 단체들의 눈에도 우리 단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 있다는 걸 느껴요.”

 

참여환경연대로 전환한 후 회원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매우 강조하게 된다.

 

“모든 사업의 가장 우선으로 회원 사업을 했죠. 회원 확대운동, 회원 서비스 강화 이런 것들을 대단히 중요한 사업으로 하면서 그때 회원이 많이 늘었어요. 거의 천 명 가까이... 그 시기에 단체가 확 확장을 했죠.

그때가 시민운동이 잘나가던 때였어요. 중앙일보 이런 데서도 맨날 NGO 기획하고 이랬거든요. 사회적으로 굉장히 잘 먹어주던 시기여서 회원 확대나 이런 것들이 탄력을 받을 수 있었죠. 관에서도 맨날 시민단체 찾아오고 이럴 때였으니까. 그때는 저도 신나게 일 했죠.

지금 대표하시는 한 분이 그때 조직위원장 맡고 하면서 회원모임 이런데 다 들어가요. 조직적으로 그런 노력을 많이 했고... 이사회 하면 교수나 이런 사람들 데리고 와서 앉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부분도 바꾸자고 해서 회원 활동 열심히 하시는 분이 이사로 참여하는 쪽으로 만들어나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변화는 한 순간에 이뤄지지는 않아요. 아주 서서히 일어나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모슬포에 사시는 회원이 여성농민회 활동도 하시면서 이사이기도 하고, 신부님도 계시고, 자원 활동 열심히 했던 회원도 이사로 참여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시스템을 성공했다곤 할 수 없지만 그 지향을 어느 정도 일궈가는 정도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모든 회원이 참여하거나 이러지는 못하지만, 회비 납부율이 70% 정도 되거든요.”

 

여러 연대활동을 하는 가운데 노동운동과의 연대활동은 어느 정도 긴장관계를 갖고 진행되기도 했다.

 

“2002년 한라병원 투쟁을 상당히 소중한 기억으로 생각하는데... 그때 노조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시민대책위가 구성이 됐어요. 제가 그때 집행위원장을 맡았거든요. 그때 운동하면서 많은 걸 생각하게 했던 건데... 노조가 병원에서 농성을 했으니까... 나는 제일 먼저 매일 거기로 출근했어요.

나중에 정점이 되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노조 지부장부터 해서 간부들에게 경찰이 소환장을 보내요. 그래서 노조 지부장이 잠적했죠. 조직적으로 어쨌든 피해 다닌 거죠. 그런데 경찰쪽에서 걸어온 게 ‘자진출두 하면 선처하겠다’는 식이었어요. 이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다가 나는 ‘자진출두 해야 된다’고 했어요.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했냐 하면... 우리가 운동의 대의를 앞세우다보니까 개인은 늘 희생 되더라. 그리고 그 희생된 개인에 대해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더라. 어쨌든 노조 지도부하고 민주노총 설득해서 자진출두하기로 했어요. 노조원들이 울음바다가 되 가운데 기자회견 하고 출두했는데 3일 만에 풀려났어요. 그때 그런 결정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먼저 전화를 해서 ‘참 잘됐다. 올바른 결정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대개 회의나 이런데 나오면 굉장히 쎄게 얘기를 하거든요. ‘무조건 싸워야 된다’부터 시작해서... 그러다보면 당사자들은... 노조 위원장이라고 자기 삶을 고민하지 않겠냐고요? 그런 거에 대한 배려나 깊은 이해가 얼마나 소통이 될까? 만약 ‘무조건 투쟁해야지 자진출두 없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사법처리 되는 상황으로 갔을 때 그 개인의 삶은 누가 책임질 거냐? 난 그런 거에 대한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때 보건의료노조 중앙에서도 부위원장 하시는 분이 파견이 나와 있었어요. 그 분은 굉장히 온건하고 합리적인 분이었거든요. 그분 하고는 얘기가 됐어요. 그런데 같이 따라온 정책실장인가 하는 사람은 아주 그거더라고... 이 갈등이 엄청났었어요. 그 가운데서 이런 부분을 중재니 조정역할 하고, 또 경찰과의 관계에서 중재역할... 그러니까 이제는 싸움판 벌어지면 경찰들이 맨날 나만 찾는 거야.

한 번은 한라병원 투쟁하는 와중에 한진면세점 투쟁이 있었어요. 그때 가족들하고 밥 먹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갔는데... 도청 마당에서 농성 중인데, 경찰들이 강제 진압을 하겠다고 하는데, 저는 중재단 자격으로 간 거거든요. 그래서 중재한 게 뭐냐 하면 ‘도청 울타리 밖으로 가서하면 강제 진압 안 하겠다’ 그래서 설득해서 밖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경찰들이 쓸어 버렸어요. 나는 완전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잡아가라’고 그래서 일부러 잡혀갔거든요.

시민운동 영역에 있으면서 노동운동쪽 현안이나 싸움의 중심에 가끔 설 때가 있었는데, 그것들이 저한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대단히 눈에 보이는 싸움이니까 이런 일들을 해야 된다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조직하고 끌어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지도부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를 못하는 것들이 서로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소중한 기억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지역의제를 중심으로 한 활동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직접적 이해가 걸린 문제들에 대해서도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같은 경우에 주민현안이 어떻게 들어 오냐 하면... 동네의 채석장 들어선다, 쓰레기매립장 들어선다 하면 온다고요. 그럴 때 오면 뿌리치질 못해요. 그러다보면 같이 손잡고 싸우긴 하는데... 문제는 끝나고 나면 없어요.

2000년 김녕 묘산봉 같은 경우도 주민들이 군유지 매각해서 개발하는 거에 결사반대했거든요. 군유지 매각 동의안 처리하는 군의회 와서 농성하고 별거 다 했거든요. 그런데 2006년에 그때 앞장서서 반대했던 사람이 이장이 돼서 개발유치를 하는 거예요. 우리하고 적이 돼 버린 거지. 해군기지 싸움은 주민들 입에서 ‘이거는 제2의 4·3이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2006년 인가, 4·3위령제 하는데 해군기지 반대 플랭카드 들고 가서 서 있다가 유족들한테 매 맞고 쫓겨났다니까요.

이런 것들이 비애감을 갖게 만드는 거죠. 우리가 대변하고 손잡고 싸워야 될 주민 또는 민중의 실체가 어떤 거냐? 그런 거는 노동운동이든 뭐든 비슷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를테면 그런 거죠. 골프장을 유치하고자 하는 주민들이 ‘공동목장으로 쓰던 걸 땅을 놀리느니 골프장이라도 해서 살아보자’ 이런 건데... 그게 왜 그 사람들의 잘못이겠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거죠. 깝깝해지는 거죠. 그런 것들이 가장 큰 고민이죠.”

 

2002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해군기지 건설문제는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2005년에 다시 떠올라 제주지역에 뜨거운 이슈가 됐다.

 

“작년에 해군지지 싸움을 하면서 제가 굉장히 고민했던 게 뭐냐 하면... 군사기기 싸움은 굉장히 험한 싸움이거든요. 그런데 군사기지를 반대하는 우리의 명분은 평화거든요. 우리 스스로가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해야 된다는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게 잘 소통은 안 되죠. 예를 들어서 민주노총이나 민중운동진영은 거리투쟁에 굉장히 익숙해 있는 상황에서 이 분들과 할 수 있는 평화적인 방식의 활동이란 게 어떤 게 있을까? 진짜 밤새면서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2007년에 뭘 했냐하면 평화 100배를 했어요. 100번 절하는 거... 생명평화순례하는 도법스님네가 시작한 운동이죠. 그거를 하자고 그랬더니 의외로 단체들이 동의를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100일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했죠. 처음 시작할 때는 신부님들도 오고, 목사님들도 오고, 그 다음부터는 단체별로 돌아가면서 계속 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들려오는 얘기들은 ‘어떤 활동가들은 와서 눈물 흘렸다’고 그러고... 그 중에는 ‘박 터지게 싸워야 하는데 이런 거 하냐?’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대놓고 얘기하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어요. 어떤 활동가들은 자기 당번이 아닌데도 와서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운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나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길거리 지나가는 시민들 앞에서 100번을 절 한다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자각하게 되는 과정들이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 운동이 대상과 맞서 싸우거니 설득하고 그런 걸 해왔는데, 결국 그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스스로도 행복한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회원이 확대되는 과정은 회원들의 참여가 높아지면서 이러저러한 긴장이 생기기도 한다. 소위 386세대라고 칭해지는 이들의 참여가 많은 참여환경연대에서는 회원들이 40대로 접어들고 전문직 비중이 높아지면서 단체활동에도 영향을 주곤 한다.

 

“단체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회원이 형성되는 층이 다르고, 연령이나 성비가 다른 게 아니겠냐... 우리 같은 경우는 주로 40대 남성 전문직이 많죠. 그러니까 민중운동의 방식처럼 과격하게 가서 싸우고 그런 거는 회원들이 거의 싫어해요. 왜냐하면 지역사회에서 권력이 작동되어지는 메커니즘을 거의 알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걸 구체적으로 개입해서 치고나가야 된다는 의식들이 많은 사람들이죠. 그러다보니까 그런 활동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거고... 예를 들어서 ‘모 의원이 제주시 영리사업에 어떻게 개입했더라’ 이런 걸 우리가 끄집어내서 폭로하고, 그런 걸 제도로 못하게 하고 이런 것들을 하는 거죠. 대중의 관점에서 보면 상층단위 운동일 수 있는 거죠.

이것은 제주사회의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여요. 제주사회가 타 지역에 비해서 계층 간의 폭이 적다는 거죠. 경제적 수준이나 이런 게... 그런 특성도 좀 있는 거 같고... 그 다음에 제주라고 하는 특성이 뭐냐 하면... 육지 사람들은 배타적이라고 하는데, 지역 특수성에 대한 입장이 굉장히 강하잖아요. ‘육지놈’이러는 거처럼... ‘대한민국이 어떻게 돌아가든 제주도다’ 이런 거...

그것도 운동하면서 굉장히 고민이었죠. 지역운동이 이념적 스펙트럼이 없는 거예요. 사안 자체가 진보 보수도 아닌 거예요. 특히 환경은 더 그런 거고... 오로지 ‘제주도’만을 얘기하는 참여환경연대 운동이 생명력이 있는가?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몇 년 전에 APEC 유치 가지고 부산하고 경쟁을 했는데... 보편적인 운동 관점으로 보면 APEC은 앞에 가서 데모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데모했다간 돌 맞는 거죠. 그때 우리 단체가 무슨 성명을 냈냐 하면 ‘APEC 후보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제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일부 회원들한테서 문제제기가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딜레마인데... 이거는 대중적 관심이 큰 사안이기 때문에 이런데 목소리를 내면 지지층이 팍 모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단체가 지향하는 것은 지역사회에 민주적인 권력을 세우는 건데... 이런 식의 경로를 통해서도 지지층을 확대하는 것도 유연하게 해야한다는 암묵적인 게 컸죠.”

 

여러 가지 활발한 활동 속에 조직이 커지면서 서서히 조직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단체가 규모가 커지다보니까 내부 문제들이 서서히 나오는 거죠. 사업을 벌려놓게 되는 것도 있고, 이런 저런 제안도 많이 들어오니까 ‘어떤 기준에서 받을 거냐?’ 하는 여러 가지 문제도 생기고, 회원과 상근자와의 갈등도 생기고... 그 진통이 3년 전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2007년 말에 정점을 형성했던 거 같아요. 이거는 저희들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들이 겪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활동가그룹 내에서도 단체가 이런 식으로 계속 커져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기 시작하는 거죠. ‘회원을 계속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회원의 질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거고, 한쪽에서는 여전히 ‘뭔 소리냐? 시민사회라는 것이 여전히 허약하고 소수다. 회원 확대나 이런 거를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해요. 이 논란이 논쟁이 되기 시작하고... 처음에 2001년부터 2~3년간 회원확대 활동 열심히 했는데, 이 논쟁 때문에 회원 확대가 정체됐죠. 그러다보니까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에 더 열심히 할 거냐 하는 논의보다는 우리 내부 문제에 더 많은 논의를 하게 되는 거죠. 소위 얘기하는 내부과잉이죠. 그러다보니까 또 한편에서 회원들이 ‘할 일은 안 하고 뭐 하냐?’ 그러면서 탈퇴하고...

그런 과정이 2008년 초까지 왔었어요. 그래서 요즘 모든 시스템을 정비해서 다시 해 보려고 하는 거죠. 일단은 조직을 개편했죠. 사업별로 환경담당 뭐 담당 이러는 게 아니라 정책국과 조직국으로 이분화 했죠. 일도 타이트하게 하고...”

 

10년간 시민운동을 해왔던 고유기는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허울을 뛰어넘은 시민운동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2001년부터 시민운동이 잘 나가던 시기에 중앙일보나 이런 데서 달려들면서 시민운동의 발을 묶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시민운동의 순수성이라는 논리가 곧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식으로 바꿔가는 거죠. 시민운동 스스로도 자기 포지션을 그렇게 할려고 그러는 거고... 그런데 적어도 지금은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데 흔쾌히 동의하는 데는 거의 없어요. 우리 단체도 옛날에 ‘도민정치 실현 범도민회’였거든요. 스스로 정치조직임을 자임했던 건데,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정치성을 탈각시켜왔던 거죠. 그랬기 때문에 시민운동의 토양이 더 넓어졌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뭐가 어떻게 됐는데?’ 하고 보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저도 지역에서 10년 넘게 시민운동을 했는데, 뒤 돌아서보면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10년 전에 했던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문제가 또 나오고, 10년 전에 했던 카지노 문제가 또 나오고... 결국에는 권력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이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이거는 논리가 아니가 경험적으로 느껴지는 거거든요.

저와 같은 이런 생각이 우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면 다 있더라고요. 우리 정도 역할을 하는 시민단체들이 지역별로 다 있어서 네트워크가 돼 있어요.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라고 그래서 10년 전에 만들어진 건데... 한 달에 한 번 보여요. 거기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정치적 힘을 갖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 바꾼다’예요.

시민운동 스스로가 정치적 입장을 갖는 거죠. 이를테면 선거 시기에 ‘우리 단체는 어느 당, 또는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라는 공개적인 선언을 하는 거죠. 참여환경연대가 어느 순간 정당 또는 정치조직으로 전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여기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들이나 회원들이 개별적 네트워크로서 참여를 하거나 이런 구조는 필요하다는 거죠.”

 

99년부터 사무처장을 맡기 시작한 고유기는 최근 들어오는 젊은 상근자들의 활동방식에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지금 들어오는 활동가들 보면 우리 세대처럼 운동의 경험을 가져본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민운동에 대해서 대충알기는 하고, 자기 권리에는 되게 익숙하기는 한데...

요즘 시민운동 사람들 모이면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자기 전망과 조직의 전망을 어떻게 결합시킬 거냐를 주요하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잘못 이해되면 자기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사무처장 입장에서 지금 싸워야 될 일도 많고 그런데, 자기 해보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 얘기는 거꾸로 하면, 자기가 잘할 수 있고 해보고 싶은 걸 하면서 운동을 해야 자기도 행복한 거죠. 이런 게 맞는 건데, 현실적으로 그걸 받쳐주질 못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걸 가지고 얘기를 하면 고민이 되는 거지... 여전히 고민이에요. 그게 제일 어려워요.

그런데 나는 그거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옛날에는 그야말로 헌신과 희생이었거든요. 물론 그 가운데서 보람과 기쁨과 행복은 있겠죠. 아무리 그래도 재미없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자기도 이롭고, 자기가 이로움으로 인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게 운동이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좀 더 나가면 풀뿌리운동 논리가 나오기 시작해요. 생활운동이에요. 생협이나, 작은 동네에 도서관 만들기... 시민사회의 토양을 되게 건전하게 만드는 대단히 중요한 거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중요한 거는 이럼으로써 소위 얘기하는 전선이 흐트러져버려요. 나는 필리핀에 갔다가 그걸 대표적으로 느꼈는데... 필리핀은 아시아 시민운동의 모범이다고 할 정도로 시민운동이 활발한 데로 알려져 왔거든요. 거기는 부문운동이 굉장히 발달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로요와 같은 독재정권 하나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이질 못해요.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동네도 들어가서 동네운동을 하든, 골목길운동을 하든, 도서관 만드는 운동을 하든, 좋다는 거예요. 길게 보면 그렇게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명박이가 들어섰다고 그걸 탄압하겠냐고요? 조선일보가 그걸 나쁘다고 하겠냐고요? 여기서 문제의식이 생긴다는 거예요. 여전히 개혁해야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이 많은데, 모두다 동네로 이런 경향성이 우려돼요. 그런 흐름의 운동도 필요하고, 현실문제를 매개로 맞서고 조직하는 운동도 필요한데, 조화롭게 갈 수 없을까하는 게 고민입니다”

 

활동가의 재생산과 운동능력을 높이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다른 단체들도 이야기 들어 보면, 상근자들이 하루 종일 앉아서 책상에서 일을 해요. 그러다가 시간나면 인터넷서핑하고... 서핑을 하게 되면 자기 코드에 맞는 거만 찾아다니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요.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교육이에요.

그래서 1주일에 한 번 아침 8시에 강좌를 했어요. 우리가 초청하는 사람은 우리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 심지어 시민단체를 비난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듣자. 그러다가 그 얘기를 다른 단체 사람들한테 했더니 같이하자고 그래요. 그래서 5개 단체가 1주일에 한 번씩 아침 8시에 모여서 ‘아침마당’이라고 해서 해요. 거기는 들어온 지 3개월 된 간사부터 시작해서 20년 된 대표까지 20명 정도 모여서 해요. 분위기는 좋아요. 돌아가면서 다 얘기하고... 얘기하다보니까 관심 있는 주제들이 모여지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생각한 거는... 서울에 재가연대라고 불교단체가 있는데, 거기서 동안거(겨울 동안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서 도업을 수행하는 것) 개념으로 두 달 정도 단체 문 걸어 잠그고 오로지 교육만 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걸 해야 된다고 해서 총회를 2월에 하던 걸 1월로 조정했어요. 따지고 보니까 12월부터 1월까지 두 달은 총회 준비하느라고 다 가는 거예요. 그 진행을 앞당기고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는 한 달 동안 집중적인 교육을 하자. 가치교육부터 시작해서 전문적인 기능교육까지... 그것도 다른 단체도 같이 하겠다고 그러고...

대기업에서도 교육 사업을 엄청 진행하는데, 사회를 바꾸겠다고 하는 시민단체가 교육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주도권을 기업한테 주겠다는 거예요. 이걸 돌파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철저한 교육시스템을 도입해야 된다는 거예요.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고민하는 장기적인 고민은 지역에 재단 같은 걸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활동가들에 대한 재교육과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교육, 싱크탱크 연구기능, 재정지원기능을 갖는 지역재단 같은 것을 설립해서 지역 시민사회운동이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재생산의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해야 되고, 일개 단체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다고 봐요.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토양을 어떻게 가꿔나갈 거냐는 문제로 생각을 하죠.”

 

쉼 없는 활동 속에 나이 마흔에 접어든 고유기에게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들과 고민들이 닥쳐오고 있다.

 

“2006년에 평화기행이라는 사업을 해봤어요. 청년 10명 정도를 모집해서 한반도 평화순례 해가지고, 소록도에서부터 강화도까지... 가면서 광주, 새만금, 대추리, 전쟁기념관 하면서 쭉 간 거예요. 15일 동안 갔다 왔는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운동 시작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적이 없는 거예요. 그 과정이 저한테 엄청난 걸로 다가오더라고요. 굉장히 느낌이 컸어요. 그때 비로소 내면의 자아를 대면하게 되는 거예요.

그 이후 1년 동안은 사춘기도 이런 사춘기가 없어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사는 게 뭐지?’ ‘내가 원하는 운동이 뭔가?’ 그러면서... 정말 죽겠더라고요. 사무처장 그만하겠다는 얘기까지 했었는데... 그렇게 오다가 지금은 ‘내가 나이 사십이 되도록 그동안 뭘 했냐?’를 고민해요. 아주 현실적인 데에서부터 시작해요. ‘애들 중학교 들어가면 교육비 어떻게 해야 되나?’ 답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되겠지... 고민한다고 달라지나...’ 그런 거고...

여러 가지가 있죠. 이제는 밑천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공부를 안 하니까... 그런데 공부를 하자니까 시간이 너무 늦은 거 같고... 진짜 해보고 싶은 게 이제 막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걸 모두 다 전면적으로 고민하면 내가 못하는 거예요. 그런 게 있어서 최근에 연령이 비슷한 또래들 몇 명 모여서 고민을 나누는 이런 자리도 해요. 그런 게 참 좋더라고요. 해결이 안 되더라도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잖아요.

또 하나는 집사람과의 관곈데... 어쨌든 우리 집사람도 내가 하는 거를 지지한다고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표현을 잘 안하지. 특히 제주도 여자들이 대화가 잘 안 돼요. 얘기하면 ‘개난 뭐?(그래서 뭐?)’ ‘해불라게(해라)’이런 식이니까. 그런데 미안한 거는 내가 이 운동을 하는 거는 내 삶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거거든요. 우리 집사람은 돈 벌러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이 다르잖아요. 나는 그래도 좋은 사람들 만나고 다니는 거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그런 미안함이 있죠. 나중에는 애들 나가면 우리 둘만 남을텐데 무슨 얘기하면서 살까? 얘기가 통할까? 이게 심각하게 고민되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고민이라면 고민인데... 당장 고민 치열하게 했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고... 여유를 갖자는 생각을 많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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