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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이영호 이야기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정부의 구조조정 공세와 제도적 제약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면서도 언론의 집중적인 공세 속에 더욱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중에서도 시민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 지하철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부산지하철에 1기로 입사해 투쟁과 해고 속에 살아온 이영호 동지를 만나서 20년 세월의 얘기를 들었다.

 

58년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영호는 77년 고등학교를 졸업 한 뒤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했지만 실패하고 생계를 위해 화학공장에 다녔다. 80년 군 입대를 하고 83년 제대 후 잠시 염색공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힘들어서 금방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84년 봄 공무원시험을 쳤으나 떨어지고 그 해 7월쯤 부산지하철 공채모집에 응하게 된다.

 

“부산지하철이 85년도에 생겼거든. 84년에 공채 1기 시험이 있었어. 온데(오만데) 시험 있는 데는 다 치다보니까 지하철도 시험 치게 된 거지. 지하철 시험공부를 1개월 정도 했나? 그 당시에 지하철 시험은 다른 공무원 시험보다 수준이 낮았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합격됐고... 그래갖고 85년 3월달에 지하철에 입사하게 됐지.

그 당시에 운수직으로 들어갔지. 운수직이라는 게 일반 공무원으로 치면 행정직 비슷한 거야. 기계, 전기 이런 거 별도로 뽑고... 운전직은 그 당시에 별도로 안 뽑았어. 운전직 기관사 같은 경우는 주로 국철에서 넘어온 경력직들... 초창기에는 그런 사람들 위주로 있었고... 우리 입사할 때만 해도 절반 정도는 국철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어. 일반직은 부산시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있었고... 크게 세 부류였지.”

 

입사 초기 월 10여 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기 시작한 이영호는 힘들다는 생각 없이 묵묵히 사회생활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역에서 표 팔고 이런 거지. 전반적인 역무일이지. 그 당시만 해도 역에 사람들이 많았지. 그때는 24시간 맞교대 할 때니까 2개조였거든. 한 조에 보통 12명 정도 있었으니까.

시험 치고 공채들 처음 들어왔을 때가 주로 내 나이 또래들이었지. 58년, 59년, 60년 주로 이 사이였지. 그런 사람들은 사회생활 처음 하는 사람들이고, 국철에서 온 사람들은 나이도 많아서, 주로 40~50대여서, 초창기에는 그 사람들 시키면 ‘예, 예’하는 거야.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걸로 안거지. 그런데 몇 달 안가 분위기 파악하기 시작했지. 공채가 젊고 하니까 일도 훨씬 더 잘하잖아. 그러다보니까 점점 공채출신하고 국철출신하고 갈등이 좀 있었지.”

 

직장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기 시작하던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난다. 이영호는 일을 마치고 부산시내에 나가서 시위대열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부산지하철 현장은 그때가지만 해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해 연말 부산지하철의 소속이 바뀌게 되면서 위기의식이 생겼고, 그 위기의식은 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고, 그 당시에 서울지하철에 노조가 생겼잖아요. 부산지하철은 그때 안 생기고 있다가 88년 2월 16일날 생겼어.

부산지하철은 그 당시 공무원이었으니까 노조 만드는데 약간 어려움이 있었고... 그런데 87년 말에 부산지하철이 공무원에서 신분 변경이 일어나. 부산지하철이 부산시 산하였는데 부채가 많아서 문제가 많이 됐지. 그래서 부산지하철을 부산시 산하에서 국가 공단으로 분리하는 특별법을 만들었어. ‘부산교통공단법’이라고 해서 한시법을 만든 거지. 그러면서 공무원 신분이 없어지게 되는 거지.

공무원 신분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바뀌니까 신분에 대한 우려도 있었고, 사회적 분위기도 있으니까 87년 말부터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물 밑에서 있었고... 그게 두 군데에서 일어나요. 국철 출신에서 움직임이 있었고, 공채 1기 출신으로 움직임이 있었는데, 공채 중심으로 했던 거는 잘 안됐고, 국철 출신들이 했던 게 2월 16일날 노동조합 설립으로 가지. 그 사람들은 철도에서 노조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 당시에는 노조 설립하게 되면 한국노총 소속으로 하게 돼있으니까 형식적으로 있었고, 실제 활동은 부산노련(부산지역노동조합연합)이라고 새로 만들어진 곳에서 했지. 초창기에는 지하철 본사 건물에 부산노련 사무실을 두기도 했어. 그런데 하다가 노동조합 성격이 조금씩 바뀌게 되면서 부산노련하고 거리를 두게 되고... 그래서 3대까지는 노사협조주의 성향으로 보고 있는 거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89년 노조는 24시간 맞교대 근무형태를 3조2교대로 바꿔내고, 일반직과 기능직으로 나눠져 있던 직제도 통합해 단일화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그 때 임금도 많이 올랐다. 공무원 신분일 때는 시간외 근무와 야간 근무에 따른 각종 법정수당을 제대로 못 받다가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으면서 법정수당이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어느 정도 조합원의 실익을 챙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실익도 서울지하철 등 선도적인 투쟁의 영향이 컸고, 노동조합은 제대로 된 투쟁 없이 협상을 통해 성과를 만드는 데만 몰두했다. 초기 3년 임기였던 1대 임원의 임기가 끝난 91년 2대 임원선거는 경선으로 치러진다.

 

“밑에서 이야기 들어보면, 1대 위원장 할 때도 공채 1기 출신하고 약간의 갈등이 있었어. 노선적인 건 아니고, 출신 상에 따르는 문제로... 아무튼 1대 이용성집행부가 3년 임기를 마치고 2대 선거를 하게 되는데 역무 출신의 조시제와 차량 출신의 박태신이 맞붙게 된 거야. 당시 박태신 같은 경우는 소위 말하는 민주성향을 띠고 있었어. 선거 결과는 조직 면에서 우세했던 조시제가 당선됐지. 조시제가 공약으로 ‘중간평가 받겠다’고 해서 1년 쯤 하고 나서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투표를 했는데 불신임을 받아버렸어. 그렇게 못한 것도 아닌데... 임금도 9%가 올리고 그랬는데...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는지 불신임을 받아버렸어. 아마 직렬별 갈등이 있었던 거 같애.

그래서 내려가고 다시 3대 위원장 선거를 했는데 4명이 나왔어. 선거를 했는데, 기존 세력쪽에서 출마한 사람이 됐는데 이게 생어용이야. 1대 2대는 노사협조주의이기는 해도 어용은 아니었는데, 3대 집행부는 얄궂은 짓을 많이 했어. 그래서 조합원들 불신을 많이 받고...

나는 그 당시에 위원장 후보로 나왔던 김철웅을 지지했지. 김철웅의 성향은 2대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던 박태신의 맥을 이었다고 보면 돼. 같이 공채 1기 출신인데 별로 친하진 않았어... 승무 차장으로 근무할 때 같이 있었는데 날 유심히 본 모양이야. 위원장 선거 후 얼마 안가 대의원선거가 있었는데, 나보고 나가라고 해서 어찌어찌 하다가 대의원 선거에 나가게 됐지. 대의원 활동하면서 노민추(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비슷한 게 만들어지지. 그 전에 김철웅이 하고 몇몇이 학습모임 비슷한 걸 했던 거 같애. 선거 할 때 부양노련(부산양산지역노동조합연합) 가서 도움도 받고... 그러면서 노조민주화 활동을 하게 되는데, 주로 대의원들 중심으로 하지.

소비조합이 있었는데 비리가 많았어. 그리고 그 당시에 한국노총 소속이었지만 맹비(연맹 분당금)도 안내고 그랬는데 철도연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어. 철도연맹이 뭐냐 하면, 철도노조 하고 서울지하철 하고 부산지하철을 묶어서 철도연맹을 만든다는 거야. 철도 출신 한국노총 관료들의 자리 만들기 차원이었지. 서울지하철도 어용 때라... 그에 대한 반대활동 하면서 대의원들 조직하고, 조합원 상대로 유인물 뿌리고... 그런 과정에서 소비조합 비리까지 불거지면서 3대 집행부가 조기에 사퇴하게 되고... 그때가 93년도 하반기지.

그 당시에 민주라는 이야기를 많이 안 썼지만, 확 바꿔야한다는 분위기였어. 집행부 사퇴로 선거가 치러지는데 2대 때 수석부위원장했던 김동욱과 반대쪽에서 강한규가 나온 거야. 결국 변화의 바람을 타고 강한규가 당선됐지. 당시 우리 모임쪽에서는 후보를 안 내고, 대신 지부장으로 나갔지. 내가 역무지부장으로 나오고... 결국은 물갈이가 완전히 됐지. 그때는 각 직렬별로 지부가 다 있어서 지부가 굉장히 많았는데, 지부들도 물갈이가 싹 되고...”

 

93년 새로운 성향의 4대 집행부가 들어서고 현장에서도 새로운 기운이 올라오면서 부산지하철 분위기는 급속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4대 집행부가 들어서자 사측은 관행적으로 인정해오던 몇몇 전임자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왔고, 노조는 막 바로 본사 농성에 들어가면서 초반 신경전이 벌어졌다. 초반 싸움에서 기를 잡은 노조는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때 서울지하철은 이미 민주쪽으로 집행부가 잡고 있었어. 그러면서 교류하게 되고... 서울지하철하고, 부산지하철하고, 철도 기관차협의회하고 94년 3월 16일 전지협(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을 만들어. 그러면서 서울하고 부산하고 왔다갔다 그러고... 나하고 몇 명은 92년부터 서울지하철노조 민주화 투쟁을 하던 비대위쪽과 비공식적으로 교류가 있었어. 노대회(전국노동자대회)에 가면 만나고 그랬으니까. 사전에 교류가 있었는데 집행부 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깝게 된 거지.

전지협 만들고 처음에는 ‘시기 맞춰서 같이 파업 한 번 한다’였어. d-day를 6월 27일날 잡아놨었는데 전기협(전국기관사협의회)이 먼저 침탈을 당해버렸지. 그래서 전기협이 먼저 파업 들어가게 되면서 6월 24일날 서울지하철이 들어가고, 부산지하철도 하루 늦게 6월 25일날 파업 들어가게 되고...

부산지하철 파업 같은 경우도 거의 조합원들한테 떠밀리다시피 해서 들어갔지. 집행부 성격도 그랬고, 분위기가 파업 안 갈 수 없는 거였지. 철도가 침탈당하고 다음날 서울지하철이 파업 들어가는데 ‘부산은 왜 안 들어가냐?’고 항의가 올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25일 밤 거점으로 잡았던 부산대로 이동해서 파업선언은 했는데 그 이후 프로그램이 없는 거야. 집행부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거야. 그 정도로 준비가 부실했지.

부산대에서 파업 출정식하고 하루 밤 자고 산개를 해버렸어. 침탈 움직임이 있어서 산개를 해서 동아대로 모이기로 했었는데, 사전에 발각돼서 동아대가 봉쇄돼 버린 기라. 그래노니 산개상태로 계속 있다가 조합원은 지도부 하고 떨어져 있으니까 연락도 제대로 안 되고, 지도부는 그때 잡혀갈까봐 겁이 나서 숨는데 정신 다 팔려 있고... 그러다보니까 3일 정도 지나자 조합원들은 복귀하고... 그 때 동사무소 직원까지 동원해서 조합원들 집에 회유와 협박을 했거든. 집행부에서 한 일은 파업 선언한 거 말고는 하나도 없지. 그 당시에 집행부가 제대로 준비하고 그랬으면 좀 더 빡쎄게 싸울 수 있었는데... 그냥 놔뒀는데도 3일을 간 게 용하지(웃음). 3일도 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승무가 먼저 조직적으로 들어가 버린 거라. 언론타고 그러면서 완전히 깨진 거지.”

 

파업 이후 10명의 노조 간부가 구속되고, 이어 13명이 해고된다. 역무지부장이었던 이영호 역시 첫 구속과 해고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현장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현장은 비대위가 들어섰지. 처음에 당시 회계감사 맡았던 사람을 비대위원장으로 세웠는데, 아프다는 핑계로 들어가 버리고... 결국은 대의원을 맡고 있던 안삼렬을 비대위원장으로 세웠지. 비대위원장 했다가 5대 위원장까지 하는데... 현장이 아작 난 상태에서 진짜 고생했지. 구속자와 해고자 뒷바라지까지 다 했으니까.

현장은 완전 깨져서 그 후유증이 몇 년간 계속 가는 거지. 90년대 말까지는 노동조합이 계속 어려움을 겪지. 비대위가 그대로 있었던 게 아니라 투쟁을 계속 했어. 농성도 하고... 조합원들이 안 따라줘서 간부들 중심이었지만, 계속 싸웠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어.”

 

94년은 부산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해고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던 시절이라 해고자들의 조직이 만들어져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부산지하철 해고자들은 부양해복투(부산양산지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전해투(전국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에 결합해서 지역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연대투쟁을 벌여나갔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일반사업장과 달리 공공부문 해고자들의 복직이 쉽지 않았던 탓도 있어서 해고자들의 활동은 더욱 열정적이었다. 그러던 95년 전해투 집중투쟁이 서울에서 있었는데 마지막 날 과천 정부청사 노동부항의면담투쟁 과정에서 이영호는 두 번째 구속을 경험하게 된다.

 

93년 한국노총에서 제명된 부산지하철 노동조합은 95년 민주노총 창립과 함께 민주노총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96년 공공5사 공동투쟁 속에서 일부 해고자가 복직되면서 첫 복직사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해 겨울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며 벌어졌던 전국적 총파업투쟁에 함께 하고자했던 부산지하철노동조합도 12월 29일 승무와 차량지부를 중심으로 하루 동안 파업투쟁을 했다. 노조는 97년 1월 15일 다시 파업 선언을 하게 되지만 일부 지부의 파업지침 거부로 파업은 사실상 이뤄지지 못한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5대 집행부가 사퇴하고 6대 김태진 집행부가 들어선다.

 

96년부터 현장에서 구조조정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뒤숭숭한 가운데 97년에 들어선 6대 집행부는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에 집중하게 된다. 97년에 9월 노사협의회에서 ‘직제 및 조직전반에 대해 전문기관에 연구용역 의뢰하기로 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직제개편키로 한다’고 노사간 합의를 하고, 98년 3월에 노·사·시민중재단 3자 합의서가 체결되기에 이른다.

 

“97년은 2호선 개통을 앞두고 구조조정 얘기가 한창 나오고 있을 때였지. 노사합의에 따라 부산대학교에 의뢰한 용역결과는 승객의 안전 문제를 고려할 때 1인승무는 어렵다는 걸로 정리되고 있었어. 그러자 98년 새해 들어서자마자 회사쪽에서 연구용역 결과를 무시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됐지. 결국 노조가 파업을 예고한 가운데 3월 12일 밤 노사하고 시민단체하고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기존 1호선은 2인승무체제로 가고 신설노선인 2호선은 별도 연구용역을 의뢰해 기계공학적으로 1인승무가 가능한지 알아본다’는 내용으로 합의를 하게 돼. 그래서 대충 마무리 될 것 같았는데 건교부 승인과정에서 캔슬이 돼. ‘1호선까지 1인 승무해야 된다’고... 그래서 결국 7월 3일날 파업에 들어가게 되지.

승무지부는 1인승무가 자기 직접적인 문제니까 그때 조직력이 대단했어. 승무 빼고는 조직력이 그리 안 좋았어. 분위기도 그렇고... 승무중심으로 쫙 이어왔고, 집행부에서 다른 지부도 조직해보려고 안만 노력해도 잘 안됐어. 94년 이후 그 분위기가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결국 합의 파기 되고 1인 승무하겠다고 치고 들어오니까 어쨌든 간에 파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지. 그때 집행부도 승무 말고는 자신이 없었고, 준비도 별로 안 돼 있었지.

교섭은 하고 있었고, 대오는 동래역으로 전부 이동했어. 승강장에서 밤을 새고... 교섭은 결렬되고, 경찰이 치고 올라오자 누군가에 의해 (이것저것으로 바리케이트를 친 곳에) 신나가 뿌려지고 불났고... 새벽 5시 정도 됐을 기라. 전차선까지 불길이 올라 놀래서 우리가 끄고... 불 낸 쪽에서는 ‘이리 하믄 무슨 반응이 안 있겠나?’ 싶었겠지. 파업을 오래할 자신도 없고... 그때 조합원 600명 정도 모였었는데 508명이 연행됐지.

그 이후 조합원들이 이틀간 경찰서에 있었으니까 자동적으로 파업이 돼 버린 거지. 이틀 있다가 나오면서 승무 빼고는 전부다 복귀한 상태야. 그때 집행부가 부산카톨릭회관에 거점을 마련해서 승무는 전부 연락해서 그쪽으로 다 모이고... 거기서 다 모아갔고 승무 대오 전부를 서울지하철로 다 빼버려. 서울지하철에서 농성하게 된 거지.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파업을 하게 돼. 다른 대오는 다 들어가서 간부들 중심으로 파업을 하고 있는 거고...

승무 대오가 서울에서 1주일 정도 버티지. 공기업들은 무단결근 7일 지나면 자동 면직되는데 그걸 못 넘어. 그것 때문에 흔들리고 해서 결국 내려오게 돼. 아무 것도 얻은 거 없이... 그래서 복귀하고...”

 

97년 연말 해고자들은 94년 파업 당시 위원장이었던 강한규를 포한한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복직하게 된다. 3년 여 만에 복직한 이영호는 복직 후 1년이 안돼서 다시 해고된다. 당시 사측은 32명에 이르는 대규모 해고를 자행한다. 파업 이후 조합원들의 형사상의 문제와 여러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과정에서 집행부가 사측의 안을 거의 대부분 받아들이게 되면서 현장에서는 또 다시 반발이 일어난다. 이에 6대 집행부도 중도 사퇴하고 99년 7대 이민헌 집행부가 새로 들어선다.

이즈음 민주노총 소속 공공부문 노동조합 상급조직들이 통합해서 공공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이영호는 2년 동안 공공연맹 선전국장으로 파견을 가게 된다.

 

“93년도 지부장 맡으면서 소식지를 내야 되니까... 대충 만들다가 해고되고, 그 뒤에 선전학교 몇 번 갔다가... 그러면서 어쩌다보니 계속 선전만 하게 됐지.”

 

“계파간의 노선 갈등이나 이런 거 제대로 몰랐었는데, 연맹 가서 그런 걸 많이 보게 되지. 서울이 살 데가 못 되는 구나 생각 들더라고(웃음).”

 

사측의 구조조정 공세는 계속 이어졌지만 노동조합 차원의 대응투쟁은 힘 있게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해고자 복직과 구조조정 내용을 맞바꾸기 하는 합의내용이 나오면서 현장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2000년도 구조조정 압박이 엄청 심했어. 공기업 개혁이라고 하면서 정부지침을 막 내리꽂을 때. 그때 학자금 보조, 퇴직금 누진제 이런 게 싹 없어지는데... 버텨 오다가 2001년 초에 결국 합의하게 돼. 해고자 복직하고 결국은 바꿔먹기 하게 되는데... 그때 해고자들 거의 다 복직 되거든... 그때 나하고, 양춘복이 하고, 전직 위원장 강한규와 김태진 빼고는 다 복직하게 돼. 그 사이에 활동가 내부의 갈등이 있었지. ‘바꿔 먹기 해야 되냐?’ 하면서... 그거에 책임지고 위원장 다시 사퇴하고...”

 

7대 집행부가 사퇴한 후 치러진 2001년 8대 임원선거는 각 지부 직렬별로 후보가 나올 정도로 혼탁했다. 2차 까지 가는 접전 끝에 기술지부 출신의 김광희가 당선된다. 김광희 집행부는 4대 이후 이어왔던 흐름과는 다른 성향(NL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 전에도 노사협조주의 성향이 일부 있긴 했지만 미미했는데, 김광희 집행부 이후 부산지하철에 노선 분화가 본격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8대 김광희 집행부는 역 민간위탁투쟁을 회피하면서 현장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2002년 8대 집행부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9대 오영환 집행부가 들어선다.

 

“2003년 초에 일어난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 전국의 지하철노조들이 대구에서 모여 갖고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해서 1인 승무 문제로 궤도3사가 공동파업을 하기로 한 거야. 서울도시철도노조도 같이 하기로 했는데 파업 찬반투표 부결로 중도하차했지. 결국은 인천하고 대구하고 부산지하철이 파업을 하게 되지. 그러나 부산지하철하고 대구지하철은 선언만 하고 하루 만에 끝냈고, 인천지하철이 며칠 가지.

파업에 들어갔는데 승무지부장이 승무 대오를 파업 대오에서 빼게 되고... 그러면서 파업은 선언했지만 힘을 못 받고, 당일 저녁에 파업은 접게 되고... 그러면서 승무지부장 제명 되고...”

 

2003년 파업이 불발된 후 집행부는 농성투쟁을 벌이다가 구속되면서 다시 임원선거가 치러진다. 역시 경선으로 치러진 10대 임원선거에서는 또 다시 9대 집행부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윤택근 후보가 당선된다.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선 후 2004년 주5일제 시행을 위한 파업투쟁이 시작됐어. 당시 서울지하철 도시철도도 함께였지. 소위 궤도공투였어. 부산은 지방노동위원회의 조건부 직권중재 회부에 따라 합법파업 공간이 열렸고, 서울쪽은 처음부터 불법(?)이었어. 그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서울과 달리 부산은 현장 조합원 분위기가 대단했어. 집회 참여 열기는 물론 파업투쟁에도 80% 넘는 조합원이 결합했을 정도니까.

파업 4일만에 노사합의가 나왔지. 하지만 주5일제와 함께 핵심 쟁점의 하나였던 구조조정 문제를 전혀 해결 못한 거야. 밀실협상 논란과 합의 내용의 문제 등과 함께 타결 이후에도 논란이 계속되는 원인이 된 거지. 그런 가운데 3호선 개통을 앞두고 회사의 구조조정 공세가 각 직렬별로 파상적으로 들어왔지만 집행부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서 현장의 불만들이 더욱 높아갔지. 현장의 불만이 사그라지지 않자, 윤택근 집행부는 2005년 신임투표를 실시하는데 50%를 넘기지 못한 거야.”

 

윤택근 집행부는 불신임으로 내려가고 전대 위원장이었던 오영환 집행부가 들어서게 된다.

해고자들은 그동안의 투쟁과정에서 조금씩 복직을 해오고 있었다. 2005년까지 남아있던 해고자는 94년 파업 당시 위원장이었던 강한규, 98년 파업 당시 위원장이었던 김태진, 유일하게 94년 파업과 98년 파업으로 두 번 해고된 이영호와 양춘복이었다. 그중 이영호와 양춘복이 95년 단체교섭 과정에서 복직이 합의되면서 다시 7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2006년 민간위탁 돼 있던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단해고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규직인 부산지하철 노동조합이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정작 협상과정에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 적잖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7년에도 2호선 양산 연장구간 개통에 따른 인력충원 등의 문제로 3일간 파업투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구조조정에 따른 투쟁은 쉼 없이 이어졌지만, 합법적인 틀 안에서 진행돼 왔다. 그런 과정 속에서 11대 오영환 집행부는 1대 집행부 이후 처음으로 임기를 다 채우고 내려가는 집행부가 된다.

 

이어 2007년 10월 12대 임원선거에서는 오랜 기간 해고자 활동을 했던 양춘복 후보가 당선되지만, 독선적 집행 등의 문제로 쟁의행위 찬반투표가 부결되자 조기에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2008년 5월에 치러진 임원선거에서 다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후보가 당선된다.

 

“서울지하철하고 부산지하철을 비교해봤을 때 정파로 많이 안 나눠져 있다는 거. 서울지하철은 사람 중심으로 많이 나눠져 있고, 부산지하철은 그나마 좀 순수하고... 어떻게 보면 초창기에 학생운동권에서 별로 침투하지 않았다는 거, 그런 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고... 94년 이후 90년대 말까지 집행부를 중심으로 94년 체제가 계속 이어져왔다는 거. 부산지하철은 94년 파업 갖고 지금까지 먹고 산다고 하니까... 부산사람들 기질이 단순한 게 있고...

정파문제 나오기 전에는 직렬별로 갈등이 있었는데... 승무 나오면 다른 데 안 나오고, 이런 식으로 갈등이 있었는데... 맨날 ‘직렬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이런 이야기만 했었는데... 그런 문제를 약간씩 벗어나니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정파문제가 드러났지. 지금은 그게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더 많이 작용하는 거 같애.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니까. 정파 입장을 몰랐을 때는 집행부도 같이 하고 그랬는데, 일단 나눠지게 되니까 같이 활동을 안 하게 되고, 서로 대립관계가 너무 심하게 되는 문제가 있지. 그러니까 집행부가 사무국도 제대로 못 꾸리는 상황이고... 워낙 활동가층이 얕은데다가 정파문제까지 들어오니까...”

 

20년 가까이 노동조합 활동을 열성적으로 해왔던 이영호는 조합원들을 대하는 활동가들의 자세에 대해서 대중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조합원과 활동가 사이에 제일 중요한 거는 믿음이라고 보는데, 믿음이 없어졌을 때는 조합원들은 지 생각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지. 회사에 붙어서 살 수밖에 없고, 노동조합에서 뭐 하자 그래도 안 하고... 그나마 노동조합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을 때 노동조합 중심으로 단결하고 파업을 했고... 그런 경우가 94년이고, 2004년이고, 2007년이라고.

보통 보면 활동가나 조합 간부 했던 사람들이 맨날 ‘조합원들이 안 따라준다’라고 하지만 실제 활동가 몫이 더 크다고. 조합원들이 믿지 못하게 했으니까 안 따라오는 건 당연한 거지.

부산지하철 같은 경우는 제대로 못 싸웠는데도 현재 이 정도 유지하고 있는 거는 부산지하철만의 특성이라고. 계속 확장되는 사업장이다 보니까 구조조정 한다고 했지만 해고는 안 되니까. 노동조합이 싸우다가 밀려서 일정 정도에서 그만두더라도 그리 크게는 안 흔들려요. 그게 컸지 싶고...”

 

오랜 기간 해고자 활동을 해왔던 이영호는 해고자 활동에서의 변화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얘기했다.

 

“90년대 해고자 생활하고 2000년대 해고자 생활은 약간 차이가 있는데... 90년대는 대공장 해고자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싸움을 하더라고 크게 싸웠지. 전해투 활동을 하더라도 정부를 상대로 많이 싸웠고... 2000년대 들어서는 조그만 회사에서 해고자 한두 명 발생해서 투쟁하니까 성격이 약간 달라지지. 소규모 사업장이나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 해고자들 싸우는 거 보면 안타깝지. 대공장은 노동조합 차원에서 어떻게 해결하든 해결해 나가는데... 해고자 한 명 발생해서 혼자 억수로 하는데도 답도 없고 전망도 안 보이고 하니까... 싸우긴 싸워야 하겠는데...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볼 때마다 안타깝고... 그런 거 보면서 ‘내 자신은 진짜 배부른 해고자다’라는 생각을 하지.

부양해복투 활동도 대공장에서 해고자가 발생했을 때는 잘 되는데, 요즘처럼 조그만데서 한 두 명씩 나와서 하는데 그 사람들이 조직이 잘 안 돼. 민주노총 지역본부나 이런 데서는 나 몰라라 하고... 결국은 그 사람들 몇 명이 모여서 활동할 수밖에 없고...”

 

2008년 초 역무지부장으로 당선돼서 현장활동을 다시 벌이던 이영호는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역무지부장을 사퇴하고 병가에 들어가 수술을 받아 상태는 많이 호전돼 있다.

87년 서른 살에 결혼 한 이영호는 노동조합 활동으로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자평한다.

 

“내가 제일 못한 부분이 가정생활이라. 실제로 가정을 내팽개쳐 놨으니까. 애들한테는 지금도 아버지로서 인정 못 받고(웃음)... ‘아빠, 한 게 뭐가 있는데?’ 하면 할 말도 없고... 죽어지내는 편이고... 6살 7살 민감할 때 내 잡혀가는 모습도 보고... 가정생활에서는 빵점이지.”

 

나이 쉰에 접어들어 정년이 10년 정도 남은 이영호는 ‘그저 노동자로서 살아가겠다’고 얘기한다.

 

“당장 돈 벌어놓은 게 없으니까 이후에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 살까 하는 게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그거야 뭐 그때 되면 되고...

활동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고민하거나 그런 거 없지. 내가 고민한다고 될 거도 아니고(웃음)... 꾸준히 그냥... 노동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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