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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대대로 가난하다. 몸서리쳐지도록 지긋지긋한 가난을 쉽게 벋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 그렇게 가난에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는 이들 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생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멀고 살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조돈희는 20대 중반의 나이인 81년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현대중공업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삶에 쪼들리기 시작한다.
“둘이서 쥐뿔도 가진 거 없이 살기 시작하니까 쪼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애 가지니까 입덧 시작하지... 월세 줘가면서 살아가지... 내가 벌어오는 건 많이 없지... 애 엄마가 헤프게 쓰는 것도 아니거든. 자기 옷 자기가 한 번 사 입어 본 사람이 아닌 거야. 버는 것도 많이 없지만, 쓰는 것도 많이 없는데 쪼들리더라고...
그래서 빚을 지기 시작하는데... 큰 빚을 지는 게 아니야. 10만원, 5만원이 없어서, 텔레비를 전당포에 맞기고... 직장 동료들한테 돈을 빌렸어도 꼭 이자를 받는 놈이 있어요. 5만원을 빌리면 한 달에 2부 3부 이자를 받고 그랬어. 그 이자 주는 것도 장난이 아니더라고...
살면서 그런 게 되게 고통스러웠던 거 같아. 그러다보니까 나는 잔소리 많이 하는 보수적인 남편이 된 거지... 벌어주는 것은 없으면서 다른 여자들 비교하면서 ‘왜 저축도 못하고 그렇게 사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우울증에 걸리고, 관계가 악화되고, 이혼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87년이 터진 거야.”
- 현대중공업 조돈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밑바닥 생활을 하던 송경동은 제대로 살고 싶어서 건설현장 배관공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은 한 번의 교통사고 합의금으로 다 날아간다. 그가 20대 중반이던 90년대 초반이었다.
“그 당시에는 돈을 벌어보고 싶어서 죽어라고 일했거든요. 보통 한 달에 철야를 1주일 넘게 했어요. 어떤 땐 철야를 연달아 3일씩 하기도 했죠. 철야하면 3대가리하고 해서 2일치 임금을 더 주었죠. 새벽녘에 한 1시간쯤씩 잠깐 베니어합판 위에서 골판지나 석면 덮고 자다 일어나서 일했죠. 암 유발 물질이라고 했지만, 석면이라도 있으면 따뜻해서 좋았어요. 젊으니까... 잔업은 예사였고요. 그 젊은 땐데도 예사로 코피가 터져요. 자고 일어나면 손아귀가 굳어 한참을 주물러야 손이 펴졌죠. 겨울엔 한기가 들어 내복을 세 벌씩 껴입은 위에 솜바지 입고 일했고요.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도 용접불똥 때문에 완전무장하고 일해야 했죠. 용접불똥이 자주 또르르 굴러 목이 긴 안전화 속으로 들어올 때가 제일 열 받죠. 살을 김밥처럼 말아 가는데 신발 벗을 틈이 없어요. 미친놈처럼 날뛰죠. 정말 무섭게 일을 했어요.
그렇게 몇 년을 해서 쫓았던 게 돈이라는 건데... 나중에 보니까 하루아침에 날라 가는데, 그렇게 날라 가면서 나한테 아무 것도 안 남겨주더라고요. 나는 저를 쫓아서 열심히 살았는데 매정하더군요. 그러다보니까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그 새벽부터 날밤을 새면서 무엇을 했지?’ ‘그 삶은 뭐지?’ 이런 회의감이 들더군요. 당시 아직 어린 마음이었지만, 다시는 돈을 쫓아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돈이라는 건 쫓아서 살 필요가 없는 거구나. 돈은 아무 것도 나에게 남겨주질 않는 허상 같은 거구나.’ ‘다른 삶을 찾자’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서 부렸던 위악처럼, 돈도 내 본모습을 찾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때 버렸어요. 자본에 대한 꿈은...”
- 시인 송경동
‘억압과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많은 학생운동출신 활동가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그 삶을 몇 배는 더 힘들게 견뎌내야 했다. 91년 동양나이론에 위장취업으로 들어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조직 활동을 했던 유미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월 30~40만원을 받아서 조직에 내고 활동비를 받아 사는데, 다들 어려울 때라 차비가 없어서 걸어 다닌 적이 많아요. 조직선으로부터 연락을 받으려면 다방에 가서 삐삐를 치고 기다려야 되는데, 커피 값이 없어서 조금 있다가 사람 오면 시키겠다고선 물만 마시고 연락받고 돌아서 나올 때가 많았어요. 참... 부끄럽고 서러웠죠.”
- 문화활동가 유미희
가난에 찌든 사람들은 그런 현실에 주눅 들어 있다. 그들은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도 경계한다. 92년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택시노조 간사로 활동을 시작한 박찬희가 극복하기 어려웠던 지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현장에서 어떤 나이 많은 아저씨하고 싸운 적도 있어요. 그분들이 보기에는 내가 나이도 어린 여자애지만 노동조합에 와서 활동을 하니까 함부로 하지 못하잖아요.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운동을 한다는 것 때문이거든요.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동을 하는 사람이니까 뭔가는 자기들하고는 다르다는 거야. 나를 안 섞어주는 거죠. ‘너는 운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을 안 벌어도 그런 거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우리는 당장 돈 한 푼 안 벌면 힘들다. 집에 가서 책임을 져야 하는 가장이다.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우리보고 투쟁하자고 쉽게 얘기할 수 있다’ 이게 논점이었어요. 개차반이인 거는 극복을 하겠는데, 이거에 대해서는 아직도 100%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때부터 이런 거 때문에 되게 많이 싸웠었거든요.”
- 대구성서공단노조 박찬희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겨운 사람들에게 ‘개발과 환경의 논쟁’은 먹고 사는 문제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먹고 살수만 있다면 환경을 보존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삶의 태도에서 활동가들은 고민스럽다.
“우리 같은 경우에 주민현안이 어떻게 들어 오냐 하면... 동네의 채석장 들어선다, 쓰레기매립장 들어선다 하면 온다고요. 그럴 때 오면 뿌리치질 못해요. 그러다보면 같이 손잡고 싸우긴 하는데... 문제는 끝나고 나면 없어요.
2000년 김녕 묘산봉 같은 경우도 주민들이 군유지 매각해서 개발하는 거에 결사반대했거든요. 군유지 매각 동의안 처리하는 군의회 와서 농성하고 별거 다 했거든요. 그런데 2006년에 그때 앞장서서 반대했던 사람이 이장이 돼서 개발유치를 하는 거예요. 우리하고 적이 돼 버린 거지.
이런 것들이 비애감을 갖게 만드는 거죠. 우리가 대변하고 손잡고 싸워야 될 주민 또는 민중의 실체가 어떤 거냐? 그런 거는 노동운동이든 뭐든 비슷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를테면 그런 거죠. 골프장을 유치하고자 하는 주민들이 ‘공동목장으로 쓰던 걸 땅을 놀리느니 골프장이라도 해서 살아보자’ 이런 건데... 그게 왜 그 사람들의 잘못이겠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거죠. 깝깝해지는 거죠. 그런 것들이 가장 큰 고민이죠.”
- 제주참여환경연대 고유기
가난에 찌들려 돈에 약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심리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은 항상 가진 자들이다. 2005년 정부는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평택 대추리 주민들에게 돈을 미끼로 던지면서 철저하게 공동체와 인간을 파괴시켰다.
“보상을 하기 위해서 지작물 검사를 해요. 땅 위에 있는 집, 창고, 우사, 가축, 그리고 거기에 무엇이 재배되고 있는 지 이런 거를 조사하는데 그거를 막아내는 싸움을 한 거예요. 마을 입구에 천막치고 못 들어오게 막아내는 싸움을 하는데, 한 달 가량 했을 거예요.
이게 사람 피 말리게 하는 거예요. 옆에서 사람들이 ‘같이 싸우자’ 했는데 ‘나는 보상 받고 나갈래요’ 그러잖아. 그러면 그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얘들이 이런 일들을 끊임없이 해낸 거예요. 이렇게 ‘같이 하자’ 해놓고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을을 떠난 거지. 우리 마을 같은 경우가 140가구 됐었는데, 지작물 조사를 1차적으로 20가구가 신청해서 받고, 또 몇 십 가구, 또 몇 가구 이렇게 계속 빠져나간 거예요.
이런 것이 진행되면서 평택특별법이 만들어졌어요. 그 주 내용이 이것에 관련된 사람에 대해서 보상대안을 마련해 놓은 거지. 그 내용 중의 하나가 상가분양권이 있었어요. 상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상가분양권이에요. 8평 분양권을 준다고 했어요. 이거를 되팔면 몇 천 만원을 번다는 거예요. 그리고 상가를 목 좋은데 받아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등 이런 얘기를 끊임없이 한 거예요.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수입 농산물 들어오면 농사 힘들다는데 포기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제 나이도 먹고...’ 이런 생각들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거를 정부에서 어떻게 얘기했냐하면, ‘상가를 8평 줄 테니까 그거로 먹고 살면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거다’ 이렇게 사기를 친 거여. 지작물 조사를 받는데 ‘3월말까지 받으면 8평을 주고, 조사를 안 받으면 5평을 받을 거다’이러는 거여. 그런데 이 차이가 이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거여. 얘들이 끝까지 이걸 가지고 물고 늘어진 거예요. 사람들이 이거에 현혹이 된 거여.
그래서 끊임없이 얘기를 했다고요. ‘상가분양권이고, 이거는 여러분들이 분양을 받음과 동시에 당신 돈으로 이거를 사고, 땅을 사든 건물을 사든 내 돈으로 하는 거다. 상가를 지어서 여러분들한테 주는 게 아니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땅값이 얼마겠느냐? 이게 가능하겠냐? 보상받는 금액으로 이 상가를 사서 장사를 할 수 있는 그런 게 되겠느냐?’고 그랬는데, 주민들이 ‘1차적으로 상가 주고, 이거를 되팔아도 몇 천 만원을 받는다는데... 거기다가 말 안 들으면 5평을 주고, 평당 천만 원씩 차액이 생긴다면 3평이면 2~3천만 원씩 차액이 생기는데, 니들이 이거를 책임져 줄 수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미치는 거지.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슬슬 떠난 거예요.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몰래 받았어요. 이 사람들이 그냥 나가면 그만인데, 자기네만 나가기 뭐하니까 옆 사람 작업하고 그래서 조금 조금씩 늘어나요.
돈에 관련되니까 어느 정도 한계가 생기는 거예요. 옆집에 형제들이 있는데 얘기도 안 하고 몰래 받아서 형제들끼리 싸우고... 사람이 사는 데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우리 마을에서 1~2년 사이에 다 일어났다고요. 이거는 안 풀려요. 지금도 그래요.
우리 마을이 140가구라 시골마을에서는 굉장히 큰 편이예요. 그래서 평택시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하면 팽성읍 대표로 해서 나가고... 사람들이 대추리는 땅이 크니까 ‘부자마을’ ‘살기 좋은 마을’로 이 지역에서는 알아줬던 마을인데... 이렇게 사람 존엄성을 다 깨가면서 이런 짓거리를 해댄 거예요. 그 기간에는 마을이 지옥 같았어요. 서로 응집을 하고 아픔을 서로 달래줘야 되는데, 이런 시기가 되니까 서로 의심을 해요. 이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이 다 피폐화 되가지고, 내게 도움이 안 되면 주민들 간에도 무조건 싸움을 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계속 있는데 무법천지지.
주민들만 단속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공무원새끼들, 경찰새끼들, 정부관계자새끼들, 국방부니, 토지공사니, 국정원까지 별놈의 새끼들이 다 와서 쑤셔대고 이러니까... 마을을 막고서 못 들어오게 하드래도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들어오고... 길을 막아서 못 들어오게 하니까 2~3백m 되는 안성천을 밤에 몰래 배타고 들어와서 별짓거리를 다 했다니까요.”
- 평택 대추리 이장 신종원
그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 20년을 활동해왔지만 아직도 대중은 가난하고, 활동가들 역시 배고픔에 진저리친다. 대구성서공단 노조 부위원장인 박찬희는 사십의 나이에 아직도 50만원의 상근비를 겨우 받고 있다.
“무지하게 재생산이 고민이에요. 활동비를 많이 지급하는 것도 아니고... 단적으로 얘기하면, 활동가들의 자기희생에 기반 해서 유지 운영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만 해가지고 5년 6년 버티고 있는 것도 장하긴 한데, 그 장하다는 것만으로 운동을 잘 한다고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고... 후원해주시는 사람들한테도 묻지마 후원을 요구하고... ‘요구와 조건이 있으면 안 받는다’고 돈 받는 주제에 꼬장꼬장하고...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커 나오는 활동가한테 ‘야, 여기 와서 활동해. 생활은 책임져 줄게’ 이렇게 할 수 있는 수준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시에서 주겠다는 지원금을 받을 수도 없고... 사실, 이주노동자 사업하고 이러니까 사회사업적인 성격이 있으니까 시에서는 돈을 줄라고 그래요. 돈 주는 이유는 우리가 활동하는 성과를 지네 그걸로 포장하고 싶겠죠. 그리고 우리가 조그만 서류 작성하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니 무슨 재단이니 이런데서 돈 받을 수도 있어요. 시에서 돈 받는 거는 이 새끼들 의도가 그렇잖아요? 재단이나 이런데서 돈 받는 것도 아산재단이나 이런 덴데 어떻게 우리가 아산재단에서 돈을 받겠어요? 차라리 굶어죽지...
그런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활동가의 재생산이나 이런 거는 무지하게 있는데, 그렇다고 해가(해서) 그런 데에 어떤 왕도가 있질 않아요. 그렇다고 해가(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원칙이 너무 경직돼 있고, 너무 꼬장꼬장 한 거 아이가? 그런 거는 조금 유연해도 된다 아이가?’ 그래서 ‘유연’하는 순간에 망가질 것 같으면 아예 안 하는 게 났고... 망가지지 않겠다고 자신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강제해 들어오는 유·무형의 내면화되는 거... 그것뿐만 아니라 지난번에 FTA반대투쟁 씨게 하니까 ‘시민단체들 돈 끊는다’는 소리부터 먼저 하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너무 경직돼 있나?’ 하고 자문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은 해요. 자문하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거는 필요한데...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바꿔야 될 걸로 생각되지는 않아요.”
- 대구성서공단 노조 박찬희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때로는 우회로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우회로는 대부분 ‘영혼을 팔고 현실에 굴복하라’고 요구한다. 2000년부터 새로운 노동자문화운동을 벌이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는 이 문제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실업극복국민재단하고 같이 하는 사업인데 장기적인 거점이 필요하고, 평범한 삶들 속으로 들어가는 문화예술운동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했죠. 거기에 늘 생계가 어려운 노동문화활동가들의 생계 문제를 고민해 나간다는 게 결부되었고요. 내용은 ‘문화예술인 사회적 일자리 만들기 운동’ 형식이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삼성증권 후원을 걸어 줘야 되는 거예요.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삼성증권한테 후원을 받아 왔으니까.
그래서 저희 안에서 부딪혔죠. ‘사업내용 자체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고, 어차피 우리 힘이나 조건이 그러니까 실업극복국민재단하고 같이 하는 거는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사업을 하면서 모든 홍보물에서 삼성증권을 박아주는 식으로 기업이데올로기에 활용당하는 것은 반대다’ 그랬어요. 굉장히 부딪힘이 많이 생겼죠.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끼리 감정까지 상하게 되거든요.
참 딜레마죠. 사실은 실업극복사업이라는 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사업이잖아요. 수많은 비정규직을 배출해 내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고, 그런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켜 놓고,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먹는 기업들이 뒤로는 ‘우리가 힘들여서 번 돈을 사회로 환원한다’ 이런 사업인데... 그게 자본의 이데올로기고,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문화 이데올로긴데... ‘그런 거에 문제의식을 갖고 싸우자고 하는 사람들이 그걸 받아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정당한 문제의식이었다고 봐요. 그런데 한쪽에서는 ‘활용하자’고 하고... 돈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노문센터 내부에서도 격렬하게 부딪쳤죠. 이래저래 사업은 잘 안되고 이런 일로 내홍만 겪다가 그 일 이후 얼마 안가 노문센터는 문 닫고 말았죠.”
- 시인 송경동
가진 것 없는 사람들끼리 있으면서 가진 자의 돈을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위장폐업에 맞선 619일의 투쟁을 벌였던 호텔리베라노조는 조합원들 서로의 믿음으로 이겨냈다.
“8월 1일부로 폐업을 했는데,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최소 3개월 최대 7개월까지 있었어요. 개인별로 다 파악을 해서 ‘3개월 끝나는 사람들은 끝나면서 생계투쟁을 할 수 있다. 이것도 투쟁이다.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투쟁이 길어질 것을 예상해서 우리 스스로 생계투쟁이라고 지칭을 했어요. 투쟁기금을 매월 7만원에서 10만원을 내라. 그리고 주 1회 집회에 결합하고, 9일에 한 번 철농 결합해라. 그것을 만약에 안했을 시 3만원 벌금. 이렇게 굉장히 빡세게 짜논 거예요. 그거를 지도부가 짠 게 아니라 조별토론에서 의견들을 모아서 전체가 만든 거예요. 조합원 스스로가 만들었기 때문에 이거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조합원들이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어요.”
- 호텔리베라 박홍규
산업선교회를 통해 국내·외에서 노동자투쟁을 함께해온 장창원은 외부 지원에 의존하는 활동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을 보면 답이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노동자연대(APWSL) 흐름도 조금 위기가 있어요. 2002년까지는 유럽의 노동운동 쪽에서 아시아를 위한 기금으로 운영이 됐어요. 그게 2002년에 끊어 졌어요. 돈이 없으니까 활동을 중지해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걸 교회 쪽에서도 많이 봤어요. 교회 쪽에서도 94년 한국이 OECD국가 되니까 한국은 지원대상국에서 지원해야 되는 국가로 바뀌었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 쪽의 조직들도 돈이 오다 안 오니까 다 없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노동도 마찬가지예요. 돈이 오다가 안 오니까 해체해야 하는 위기가 온 거죠.
그런 것을 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돈이 없더라도 할 수 있는 조직이 돼야 된다’ 그런 주장을 한 것이 APWSL 공동대표를 맡게 된 계기가 되고... 돈 없어도 재건을 해야 되니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모을 줄을 모른다는 거죠. 우리가 80만 조합원이고 1500만 노동자들인데 조금씩만 내면 되는데...”
- 노동목사 장창원
고승남은 민주노총 제주본부에서 상근간부로 10년을 활동했다. 활동의 힘겨움은 둘째 치고 생계의 힘겨움을 이겨내면서 달려왔던 10년의 세월이었다. 그런 그가 민주노총 간부 활동을 정리하고 제주지역일반노조로 옮겼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더 열악한 조건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지금은 내 스스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워낙 강렬해서 생계문제와 같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감수해버리지 뭐’하는 생각이 있어요. 어려움은 있겠죠. 그 어려움보다는 내가 변해야 된다는 게 더 커요.”
- 제주지역일반노조 고승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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