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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서

 

 

‘오세암’이라는 애니메이션 한 편이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누나와 엄마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동생이 엄마를 찾아다닌다. 엄마는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지만 누나는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 동생은 “엄마를 만나도 누나는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엄마를 알아보지” 하는 고민을 하며 엄마를 간절하게 찾는다.

어느 스님을 만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러 가지만, 스님이 사고를 당해 겨울 산사에 동생이 혼자 남는다. 눈 내리는 날 동생은 먼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다해 불렀는데, 엄마가 오지 않아”라고 하며 눈물을 흘린다.

진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

 

2003년 금강화섬에 ‘현장이 인정하는 집행부를 만들겠다’며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열정만 앞섰던 그들에게 사측은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가 집행부 들어가자마자 1주일 만에 파업선언을 했어요. 공식적으로 10월 6일 출범이고, 총파업을 10월 11일 때렸어요. 50여 명의 동지들이 대기상태로 교육을 받고 있어서 이 동지들의 요구가 엄청나고, 우리는 4조3교대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노사가 합의해 놓은 것을 사측이 백지화한 거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공장이 총파업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낮에 잠깐 나와서 집회만 하고 들어가는 생산에 지장 없는 주근조 파업은 해봤는데, 우리 집행부는 겁 없이 총파업을 때렸던 거지. 회사도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섰으니까 테스트를 한 번 해보는 거였고. 당시 우리 위원장이 연설을 할 때 진정성이 있었어요. 조합원들이 믿음을 가졌지요. 저도 진정성이 있는 위원장의 연설에 감동 받고 그랬는데...

한편으로는 총파업이 들어가기 전에 사측이 양보해서 우리는 합의될 줄 알았지. 그런 기대도 사실 있었지. 그런데 회사는 들어가 보라고 그러고... 그래서 날자 되니까 아침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던 거지. 그래서 파업하고 조합원 전체 모여서 교육도 하고, 우리끼리 프로그램을 가졌던 거죠.

그런데 둘째 날에 사장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교섭 테이블에서 ‘현재 공장은 경영상태가 위기에 와있다. 지금 공장은 사람으로 말하면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조합이 파업 들어가는 순간 산소 호흡기를 강제로 때어 낸 것이다. 이제 공장은 끝났다’ 이렇게 얘기를 했던 거지. 우리는 ‘98% 회사가 공장을 말아 먹고, 2%로 인해서 노동조합의 책임으로 넘기지 마라. 그리고 파업은 회사가 합의를 어겨서 발생한 문제인데 어떻게 우리 책임이냐? 우리가 요구하는 거는 정당한 거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 전에 교섭을 하면 교섭을 하고 있는 가운데 언성이 오가면서 노동조합이 항상 먼저 자리에서 박차고 나왔는데, 그날은 사장하고 관리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나가는 거예요.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그러면서 나가버리는 거지. 그래서 충격 받았어요.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노동조합으로 회사 관리자들이 전부 사표를 써가지고 갖고 온 거예요. ‘노동조합이 회사를 운영하든지 문을 닫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면서 차 타고 화사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쟁대위끼리 모여서 ‘좆됐다’ 했죠.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흔들리기 시작한 쟁대위에서 결론이 뭔가 하면 ‘파업을 계속 가야할 건지 말아야 할 건지를 조합원들한테 찬반투표로 물어보자’ 라는 거였지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조합원들한테 던져 버린 거지. 집행부가 책임을 회피한 거지. 우리의 수준이 거기까지 밖에 안 되는 것도 있고, 경험도 없었지요. 사측이 예상한 것이 딱 맞았던 거죠.

식당에 모여서 300명 되는 조합원들한테 상황을 설명했지. ‘상황이 이렇다. 동지들이 파업을 계속 하자고 하면 책임지고 계속 하겠다. 대신 파업을 접고 현장에 들어가서 싸우자고 하면 다시 싸워나가겠다’ 이렇게 얘기를 했었어요.

그러면서 난 눈물이 막 나오려고 했지요. 열심히 한번 해보겠다며 4대 집행부를 완성했는데 들어선지 1주일 돼서 집행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전달상황을 다 마치고 식당을 벗어나는데 눈물이 왈칵 나는 거지. 그러고 나서 조직부장도 막 울고, 나도 텐트에 와서 울고... 결국 바로 그날 저녁에 파업을 이어갈 것인지 끝낼 것인지를 조합원 찬반투표로 결정하는 것으로 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쟁의부장이 찬반투표 하기 전에 조직부장이 엄청 우는 모습을 보고 마이크를 잡고 ‘간부들 지금 울고 있다. 나는 싸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회사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 한번 해보자!’ 그랬어요. 그렇게 호소했던 게 조합원들이 받아들인 거예요. 그렇게 투표를 해서 90% 넘는 사람들이 계속 가는 걸로 나왔어요.

그리고 나서 공장장이 노동조합으로 바로 전화가 왔어요. ‘노동조합 요구안 가지고 만납시다’라며... 그게 1시간도 안 지났어요. 밖에 사장하고 다 모여 있었던 거였어요. 우리끼리 모여서 쑈 했던 거지. 지나고 나서 보면 참 우스운 건데, 그 당시에는 1분 1초가 참 그랬던 거지. 소중한 성과는 이 파업으로 간부들이 조합원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거죠.”

- 금강화섬 차헌호

 

시설비리에 맞선 에바다학교 투쟁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7년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그 오랜 기간을 장애인, 노동자, 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했다. 당사자인 학생, 교사, 학부모들도 미묘할 수 있는 입장차이로 인한 갈등 없이 그 모진 세월을 함께 버텨냈다.

 

“저나 우리 선생님들이 투쟁하는 과정에서 누구를 상대하든지간에 최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대했어요. 누구든지 ‘이 사람들이 잔머리 굴리고 있다’ 이런 생각 들게 하면 안 되니까... 정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성심껏 대하고 순수하게 대하려고 애를 쓴 부분들도 있어요.”

- 에바다학교 권오일

 

부산과 울산 사이에 위치한 양산은 크지 않은 규모의 사업장들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으면서 한국노총 사업장들이 집중돼 있다. 그곳에서 10년이 넘게 한국노총 노조민주화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다. 쉽게 전망이 보이지 않는 그 활동을 계속 이어오면서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면서 버틴다.

 

“저희는 힘들긴 힘들었는데, 현장에서 버텨내는 사람들이 있었고, 거점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각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끈끈한 정과 다들 박봉이지만 계속 재정을 충당해낸 거죠. 서로의 존재가 버틸 수 있는 힘이었어요. 돈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의논해서 해올 수 있었던 거죠. 그런 게 없으면 상담소가 있을 이유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이나 인력이든, 현장에서 버텨내는 과정이든, 현장을 복원해내는 과정이든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세월하고의 싸움뿐만 아니고 자기와의 싸움들이 상당했죠.”

- 양산지역 활동가

 

간부가 진실 된 마음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면 대중은 그 마음을 알아본다. 2000년 사해하청노동자의 투쟁에 함께 하던 중 집단린치사건을 겪었던 김정곤이 노동조합 임원선거에 나서자 대중들은 그에게 마음을 전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전 야드에 현장순회를 했지. 그러면서 우리는 직영 하청 구분 없이 일일이 다 만났어. 현장에 가면 ‘나는 조합원 아닌데요’ 이래. ‘같은 노동잔데 어떠시냐’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 사람들 의안해 해. 이상한 거잖아. 손을 잡는데 얼마나 잡는지 손아귀가 아파. 퉁퉁 부었어. 그리고 악수를 하는데 놀랬어. 종이가 손에 들어오는 거야. 땀에 저린 2만원 3만원 꼭꼭 접어서... 탈의실에서 작업복 갈아입을 때 돈 안 갖고 가는데, 오면 줄 거라고 악수하면서 관리자들 못 보게 주는 거야. 와~ 그게 한두 건이 아니고 계속 나와. 미치겠더라고....”

- 대우조선 전 위원장 김정곤

 

투쟁을 하다보면 앞에 나서서 힘겨움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고생으로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고생과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진정성은 사라진다. 2003년 서울대병원 간병인들은 무료소개소를 없애려는 서울대병원측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 이후 일부 간부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만을 놓고 투쟁하는 게 아니거든요. 미래를 놓고 살아가는 정신을 알아야 되는데... 자칫 잘못해서 현재 내 일터만을 놓고 싸우게 되면 문제가 돼버려요. 그게 기득권이 돼 버린다고요. 그 기득권을 벋어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투쟁했던 분들 중에 그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간부로서 조합원들하고 융화가 안 돼요. 몇 명이 지도하고 이런 식이 돼 버리면 이거는 노동조합이 아니죠. 나도 그렇게 될 수가 있었겠지만, 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바르게 갈수가 있었다고 봐요. 나는 노동조합 자체가 내 신앙적인 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뭐 때문에 생명 걸고 싸웠는데? 일 할라고 싸웠는데...’ 이런 소리가 바로 나오죠. 그리고 ‘느그들은 나 때문에 여기 와서 일해! 느그들은 나한테 잘 해야 돼’ 이런 식의... 투쟁하고 나면 누구나 다 어깨에 힘이 생겨...”

- 서울대병원 간병인분회 정금자

 

투쟁이 어떤 정치적 계산이나 이해관계에 의해 활용되는 순간 그곳에는 진정성은 자취를 감추고 추악한 종파주의가 싹튼다.

 

“어떤 정파가 뭐가 어떻다 하는 거는 구시대적 논쟁이라는 거죠. 민노당이건 뭐건 문제 있는 건 저희도 무지하게 뭐라고 해요. 하지만 저 정파가 저렇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조직하자는 식으로는 절대 얘기하지 않죠. 우리 담론 중심으로 조직하는 거고, 운동을 만들어 나가는 거지...

다른 지역가면 그런 게 많아요.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을 못해요. 정파끼리 모여서 얘기를 하면 ‘좆도 없는데 뭔 놈의 모가지에 저렇게 힘을 주고 얘기를 할까. 십시일반 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굉장히 이상한 운동풍토고... 그런 방식을 후세대 운동가들에게 남겨줘야 하는지... 그러니까 운동적 관료주의라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고... 현재의 우리가 어떤 생각과 어떤 문화와 어떤 태도를 갖고 운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 현실에서 대안사회운동을 하는 건데... 그런 사람들이 해봤자 대안사회는 관료주의 사회가 된다는 거예요.”

- 전북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 김종섭

 

사람이 살다보면 본의든 아니든 크고 작은 실수를 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실수가 매우 치명적인 경우도 있다. 정말로 내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 실수에 대해 더 솔직한 반성과 사과가 나올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료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져 힘들게 운영돼선 대전의료생협은 2005년 몇 가지 편법으로 진행되던 진료행위가 정부에 적발됐다.

 

“그렇게 하면서 3개월 정도를 숨 죽여서 보냈어요. 의료생협이 어떤 것을 하겠다고 조합원들에게 돈을 받고,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한 우리들이 법적으로 큰 문제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그런 노릇이었는데...

그 당시에 우리들한테 굉장히 크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이사장을 하시고 계시는 김조년 교수님이 있었어요. 시민사회단체도 그렇겠지만, 대표는 상징적인 분이시고 실무적으로는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실무자들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냐’하고 질타를 하려는 분위기에서 오셔가지고 행정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시는 분이 ‘이거는 제 잘못입니다’라고 얘기를 했던 것이 ‘너는 뭘 잘못했고...’ 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더 큰 반성을 하게했던 계기였던 거 같아요.

그러한 것을 통해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정말 원했던 것이 뭘까?’ ‘우리가 돈을 좀 벌어서 더 좋은 일을 하려고 거짓말을 친 건데, 이것이 우리 스스로와 조합원과 지역주민을 위한 일이었을까?’ 이런 거를 진지하게 고민을 한 거죠. ‘그게 우리한테는 정말 아팠지만, 고마운 계기가 됐다’는 게 실무자뿐만이 아니라 조합원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에 굉장히 놀랐던 것 중의 하나도 조합원들에게 다 편지도 보내고, 대전시에 있는 시민사회단체에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단체가 아니어도 다 사과문을 보냈어요. 오히려 그런 욕도 먹고 그런 것을 보낸 것이 우리를 더 튼튼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 대전의료생협 조병민

 

전반적으로 침체에 들어서는 구로지역운동을 다시 살리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잡지를 만들어보자고 논의하게 되고, 98년 ‘삶이 보이는 창’이 창간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매우 소중한 원칙을 세운다.

 

“‘삶이 보이는 창’을 만들면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죠.

첫째가 선긋기나 편 가르기 하지 않는다. 그것도 보니까 운동의 폐해 중 하나인 거 같다. 주적이 있는 어떤 전선을 향해서 가는 운동과 활동들을 개발하는 게 우리의 주가 돼야 하는데, 닫힌 공간에 모여 앉아 권력투쟁이나 노선투쟁이나 무슨 100% 순도 경쟁하듯이 동지 비판에나 열 올리는 건 아닌 것 같았죠. 오히려 연대의 중요성을 느껴가는 운동이 되었으면 했어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떠나가게 하는 운동문화를 넘어서고 싶었죠.

두 번째로는 사업을 통해서 생기는 모든 유·무형의 성과는 민중운동 발전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된다. 이렇게 못 박았어요. 이런 사업을 하다보면, 과거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다 개인 사유화 돼 버리듯, 욕심들이 생겨나거나 왜곡된 방향으로 흐를 수가 있잖아요. ‘과정이 좋았다 나빴다’를 떠나서 사람들의 삶이란 간교한 것이라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약속하자 했죠. 누굴 떠나서 제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어요.

세 번째로는 실무적으로 일을 하는 일꾼들은 어떤 사리사욕도 갖지 않는다였죠. 상층의 몇 사람들 때문에 운동이 망가지는 경우 많잖아요. 나중에는 자기 정체성 발현이나 자기 욕망을 위해서 운동의 성과를 사유화하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 훼손해 버리죠. 특히 일했던 사람들이... 그래서 일반인들도 운동을 잘 안 믿게 되었잖아요. 제들 또 나중엔 제 욕심들 챙길 인간들이라고... 김문수 등등... 구로동에도 그런 자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서 운동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죠. 우리는 최소한 그러지는 말자는 의미였어요.”

- 시인 송경동

 

투쟁하는 사람들은 모두 절박하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순수해질 수 있다. 그러나 투쟁이 끝나고 나서 그 절박함과 순수함은 연기처럼 사라지곤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곳에서 투쟁하는 이들을 조금씩 잊게 된다. 파견업체에 고용돼 SK에서 불법파견으로 일을 하다가 해고와 복직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정규직으로 복직한 김인선은 그 마음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저는 왜 이렇게 열심히 하게 되냐 하면... 옛날에 스스로 생각하면서 ‘내가 돈이나 시간이 생기면 더 하는 게 맞는 거 갔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그때 내 이름도 모르면서 인사이트라는 이름으로 도와준 사람도 많았을 거예요. 나는 잘 모르지만... 그때 민주노총 큰 행사하면 모금통도 들어왔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때 복직해서 잘 몰랐어요.

사람이 과거에 힘든 거를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제 지론은 그거거든요. 철폐연대(불안정노동철폐연대)나 이런데 행사하면 내 배고플 때 생각하고... 옛날에 해고 돼서 선물 못 들고 갈 때, 추석이라고 다 그런 거 들어와서 들고 가는데, 속이 썩어져 나갔어요. 해고 된 게 억울한 게 아니라 ‘나는 선물세트도 못 받고...’. 왜냐하면 내가 우리 식구들 선물세트 다 갖다 주고 그랬어요. 내가 그때 생각해서 장기투쟁사업장 있으면 이름 없이 그냥 선물세트 보내고 그래요. 그때 생각에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애 있는 사람들은 분유 값에 울 거고, 몸 아픈 사람은 약 값이 없어서 울 거고...

그리고 복직해도 내 생활이 달라진 게 없어요. 나는 노무사 비용을 못 줬어요. 1년 동안 울산에서 차비고 뭐고, 밥값이고 뭐고 다 쓰다보니까... 없는 사람들은 목돈이 들어와도 크게 들어와야 빚도 정리되고 그러는데, 나는 총 받은 게 2천만 원도 안 되는데, 다 이자만 내고 지금도 신용불량자예요. 신용회복위원회에 못 갚아가지고 작년에 신랑까지 신용불량자 만들었어요.

여름에 청바지 두 개로 버틴 적도 있어요. 옛날에는 좋은 회사 다니면서 정장만 입고 그랬는데, 투쟁하면서 애 낳고, 이제는 나보다 못한 동지들 도와주다 보니까 그런 돈이 너무 아까운 거야. 차라리 그 돈으로 이랜드 투쟁이나 장투사업장 식대 대주는 게 더 났고, 어디 차비 대주는 게 났지... 지금 그렇게 됐어요. 나도 좋은 거 사고 싶은 게 많지... 내 새끼도, 내가 못했으니까, 최고로 해주고 싶고...”

- SK 김인선

 

‘마음을 다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졌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때(80년대 말) 분위기가 워낙 그랬으니까... 저는 그때 별로 고민을 안 했어요. 휩쓸려 다닌 거죠. 그 과정에서 제 스스로가 변화된 것을 느껴요. 원래 내성적인데 적극적인 쪽으로 가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또래 학생 운동권에 비해서는 소극적인 편이었죠. 여전히 사회적인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내면에 대한 고민들이 많았고...

그런데 그런 시기가 지나고, 민주정권으로 가고, 사회가 많이 열렸잖아요. 그러면서 예전에 운동했던 선배나 이런 사람들은 다 자기 생활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됐어요. 그런 거 보면 옛날에 쎄게 싸웠던 사람들은 다 가고, 나 같이 흐물흐물 했던 사람만 남은 거 같고...

그런데 제 스스로 위안하는 거는, 운동을 정말 내면화해서 고민했다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최루탄이 막 터지고 할 때 난 두려웠거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앞장서서 싸우는 친구들 보면, 부럽긴 한데 ‘저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이런 거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애요. 굳이 제가 위안을 삼자면, 그런 삶의 태도가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붙잡고 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 제주참여환경연대 고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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