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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살자

 

 

세상살이는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의 생각은 점점 복잡해진다. 하지만 머리 굴릴 제주도 없고, 머리 굴려봐야 뾰족한 방법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단순무식하게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단순무식해져야 한다.

 

전북 부안의 섬마을 계화도에서 자란 고은식과 경기도 평택의 농촌마을 대추리에서 자란 신종원은 그냥 고향이 편해서 그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개는 다 떠나요. 제 초등학교 동창이 50명 정도 되는데, 여기서 사는 사람이 3명... 나는 떠나기가 싫더라고요. 한 번은 떠나봐야지 하고 서울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갔는데 3개월만에 돌아와 버렸어요. 나는 못 살겠더라고요.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그래야 되는데 부딪히는 것이 자신이 없었어요.”

- 부안 계화도 주민 고은식

 

“시골이 어리거나 뭐하거나 일손 바쁠 땐 다 도와주고 그러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주저앉게 됐어요. ‘부모님들 농사지으니까 농사지어야 된다’ 이런 거보다도 생활이 그러다보니까 그냥 친근감이 있고 그래서...”

- 평택 대추리 이장 신종원

 

부산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놀이패 일터’에서 열정적인 20대를 보냈던 우창수는 내부 논쟁과 사람들에 치이면서 ‘놀이패 일터’ 활동을 정리한다.

 

“일터를 나오고 2년이 힘들었어요. 나이도 서른쯤 이었고, 단체도 나와서 혼자로 남겨지고... 그래서 하루에도 열 번씩 노래를 때려치울 생각을 했어요. 취직도 해볼까 생각도 해보고... 내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서른 고비에서 이러다가 서른세 살 되서 ‘그냥 이렇게 살자’고 정리를 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 노동가수 우창수

 

영상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던 이지영은 우연찮게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무작정 영상을 찍으러 내려간 곳이 울산의 현대자동차였다. 노동자투쟁이 단순하고 단호하던 시절 이지영은 그 속에서 넘치는 힘을 느꼈다.

 

“92년 1월에 들어갔어요. 처음에 들어갔더니 제작비 10만원을 내고 해야 된다고 해서 10만원을 내고,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때 마침 현대자동차에 성과배분투쟁이 일어났어요. 나는 제작이나 그런 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처음으로 거길 갔어요. 1주일 동안 카메라맨이랑 가는데 카메라맨이 가면서 ‘넌 가서 인터뷰를 해야 된다’ 그래요. ‘무슨 인터뷰를 하라는 거냐? 나는 여기 무슨 투쟁이 일어났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그냥 가서 니가 대충 파악해서 하면 된다’고 그래요.

내려가서 1주일 동안 있는데 기자적인 순발력이나 이런 거는 있었던 거 같아요. 굉장히 인터뷰를 잘 했어요. 경찰대장한테도 인터뷰하고, 공장장 이런 애들, 길거리 지나가다가 현중 사람들 담 넘어 고개 내밀고 있으면 ‘지금 여기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 보지 말고 나올 의향은 없느냐’ 이런 식으로 인터뷰를 하는 거예요. 공장 출입이 막히면 단협 때 처음 본 공장장 보고 ‘공장장님 경찰들이랑 막혀서 못 들어가게 해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러기도 하고...

나는 참 재미있더라고요.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힘을 느끼고... 그때 김밥이나 라면 먹으면서 춥고 배고프게 했거든요. 그렇지만 사람들의 눈빛이나 살아있는 현장의 느낌들이 되게 좋았거든요.”

- 노동자뉴스제작단 이지영

 

춥고 배고픔에 시달린 에바다학교 농아원생 26명이 96년 11월 27일 새벽 5시에 농아원에서 기습농성을 벌이게 되고 곧이어 총으로 위협하는 경찰에 의해 모두 연행된다. 이날 출근한 에바다학교 교사들은 매우 중요하고 힘겨운 결정을 하게 된다. 그 결정으로 그들은 7년을 싸워야 했다.

 

“그 얘기 듣고 11명의 선생님들이 2시간 정도를 격론을 벌였거든요.

우리가 여기에 개입을 하면 파면 해임이 문제가 아니다. 이 정도의 비리내용이라면 단순히 돈 때먹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경찰 검찰 시청 할 것 없이 연결돼 있는데, 우리가 싸우면 사법기관 행정기관들이 자기들 모가지 지키기 위해서 우리를 집어넣을 거다. 우리가 그런 정도까지 각오를 해야 이 싸움에 개입을 할 수 있는 거지, 괜히 어설프게 나섰다가 중간에 겁나다고 그래서 발을 빼버리면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설 거냐.

그렇게 했는데 결론에 가서는... 우리가 여기에 모른 척하면 우리의 목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평생 양심의 가책을 갖고 살아갈 거다. 제2 제3의 에바다 농성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인데, 여기서 우리가 발을 빼버리면 우리 목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지만,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졌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목 지키기 위해서 제자들이 용기를 내서 고통스럽게 농성하는데 외면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살아갈 거다. 그럴 바에는 구속이 되더라도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애들을 위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를 위한 거다.

그래서 11명이 만장일치로 개입하자 결정하고 막 바로 성명서를 냈어요.”

- 에바다학교 권오일

 

90년대 초반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활동가들에게 엄청난 사상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혼란 속에서 많은 이들이 활동을 정리하고 떠나갔다. 하지만 사회 밑바닥에서 뒹굴던 송경동은 완강한 고수파로 남았다.

 

“나쁜 건 아니었지만 운동을 위한 운동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나는 내 삶의 해방을 위한 운동인데.... 사람들은 담론 속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까 ‘세계 사회주의가 패망을 해서 이제는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 이런 고민을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도 여기저기 공사장에서 가방 하나 들고 다니면서 그렇게 살고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해방되지 않은 정서와 삶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눈앞에 보이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모습들 속에서 연대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니 좀 다른 거 같더라고요. 사람들은 자신이 책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관적 지향이 이 사회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게 꿈인 거죠. 그런데 그러다보면 인간이 빠져 있을 수 있어요. 모든 게 대상화 되죠... ‘그게 안 될 거 같다’ 아니면 ‘너무 후에 올 것 같다’ 그러면 다른 판단들을 하게 되죠.

와서 보니까 구로노동자문학회도 그런 혼란에 들어가 있었어요. 구로노동자문학회는 1988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때까지 지키고 있었던 초창기 멤버들이 대부분 정리하고 나가요. 인간적 관계는 조금씩 남겨 놓지만 활동의 중심을 옮기죠. 나중엔 우리한테 ‘여기 끝난 거 아니냐? 비전이 없지 않냐?’ 오히려 그래요.

맨 처음에 무너졌던 건 학습이었어요. 과거에 믿었던 경전들이 안 맞는 거 같잖아요. 소용없어 보이고... 그러니 정확한 방향이 없어진 거죠. 관성적인 활동들만 반복이 되요. 신명도 안 나고, 술들도 많이 먹게 되고, ‘얻은 건 이데올로기요, 잃은 건 문학이다’라는 유명한 훼절의 말처럼 운동보다는 문학이 우위에 서게 되는데 그게 충족 안 되면 또 떠나가고.... 하지만 저는 단체는 무너져도 그 지향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레 고수파가 되었죠. 그 후 90년대 내내 깃발 안 내린다고 갖은 얘기를 다 들었던 것 같아요.”

- 시인 송경동

 

91년 동양나이론에 위장취업 한 후 곧바로 조직사건으로 구속됐던 유미희는 노동현장 활동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그런 그가 해고자들의 전국조직이었던 전해투와 함께 하면서 단순하고 단호한 투쟁을 배우게 된다.

 

“93~94년도에 전해투 투쟁을 되게 열심히 하고 다녔어요. 전국 해고자들하고 같이 농성도 하고 하면서 전국을 휘젓고 다녔죠. 그때 내가 배운 게 참 많았어요. 해고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 각 현장의 사정들도 많이 알고... 내가 구체적인 싸움하고 하는 것을 잘 못하고 못 견뎌 해요. 욕도 못하고... 전해투 가서 아 배렸잖아(웃음). 웬만하면 ‘에이 씨발’하면서 싸움을 걸고 그런 게 되게 많았어요. 그게 필요할 때가 많다는 걸 깨달았죠. 머리 굴리는 것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정서에 대한 것을 그 투쟁에서 굉장히 많이 배웠고...”

- 문화활동가 유미희

 

기존의 관성화 된 노동조합 활동을 바꿔내기 위해 출마해서 당선된 금강화섬 백문기 집행부는 상근 간부를 선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상근자가 4명이나 되는데 선거 때 공약처럼 대중이 인정하는 사람으로 구성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은 서로 할라고 와서 얘기를 해서, 위원장이나 나나 괴로웠어요. 거부한다고 해서 ‘니가 그리 잘났나?’ 이런 전화도 받았어요.

각 조에 괜찮은 사람들을 한 명씩 착출하는데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이 모두 정말 노동조합 활동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예요. 그 동지들에게 집행부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하니까 ‘나는 한 번도 조합원들 앞에 나가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앞에 나가서 얘기 잘 못한다’ ‘대의원도 한 번 안 해봤는데 집행간부를 어떻게 하냐?’ 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다 안 하겠다고 하는 거지. 그래서 한 명 설득시키는데 3~4일은 따라다닌 거 같애요. ‘니가 안 하면 우리도 안 한다’ 이렇게 얘기를 했던 거죠. 그렇게 해서 한 명 한 명 씩 우리가 찍었던 사람들은 다 했어요. 노동조합을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동지들이 모여서 지도집행부를 꾸렸는데 결과는 의외로 훨씬 투쟁을 원칙적으로 해나가는 과정을 만들게 되었던 거지요. 그래서 보면 분명한 것은 노동조합 간부를 해봤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이지요.”

- 금강화섬 차헌호

 

노동안전보건운동은 2000년대 초·중반 활발한 대중투쟁을 벌인다. 그 기간을 쉼 없이 달려와 30대 중반이 된 공유정옥은 그저 묵묵히 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옛날을 자꾸 곱씹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현재형으로 변한 거 같애요. 앞날은 구체적으로 고민을 안 해요. 상근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은데, 그 전에는 옛날 일들은 혼자서 되게 많이 생각을 해요. 그게 왜냐하면 앞날에 대해서 막연하니까 ‘그때 내가 이랬는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거죠. 1년에 한 두 번씩은 95년~96년 일기장을 보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그 고민이 아직도 있기도 하고, ‘이게 해소가 됐네’ 이렇게 확인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딱 ‘나는 거기로 가야지’하면 강박적으로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으로 뭐 하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거지?’ 이런 생각을 안 하는 이유가 딱 가서 언덕배기에 올라서야 다음 능선이 보이는 것도 있는 거 같애요. 반대 방향으로 끌리고 있는 거 같애요. 예전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면 골목골목 다 챙기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거 같고요. ‘그런 거 없어도 돼’ ‘잘 갈 수 있을 거 같애’ 그러면서 그냥 가면 될 거 같다는 자신감도 있어요. 이러다가 다음 능선이 10년 후에 보일지 1달 후에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이면 다음 능선을 향해서 가면 될 거 같애요.”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나름대로 치열하게 달려온 공무원노조 울산본부는 조직이 둘로 나뉘고, 조직력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매우 힘겨운 상황에 있다. 그곳에서 머리 굴리지 않고 묵묵하게 활동해왔던 여승선은 40대 중반을 넘어 쉰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여승선은 미래를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한 때 ‘남들은 나를 활동가라 하는데 내가 활동간가?’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거든요. 지금은 활동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고민 끝내고 나니까 달라지더구만요. 내가 해야 될 일이 뭔지 알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나는 사실 한쪽 발은 빼고 있었던 것 같애... ‘활동가가 얼마나 어려운데’ 하면서...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면서보니까 ‘지역의 문화행사나 가고, 연대나 열심히 가고 하는 것’에서 넘어서지를 못하더라고요.

한때는 지도에 대해서 상당히 목말라 했어요. ‘뭔가 좋은 거 없나?’해서 강의 들으러 가고 그랬었는데, 그것도 ‘나는 활동가다’라고 작정을 하니까 큰 문제없어요. 그때는 ‘누가 없을까? 누가 나를 안 가르쳐주나?’ ‘이런 고민들 확 트이는 얘기 누가 안 해주나?’ 이랬었거든. 그런데 그걸 넘어서고 나니까 자유로워져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도통한 거 같아서 이상한데 (웃음)... 마음이 편해지면서 ‘조합원은 간부의 거울이다. 열심히 하자’ 이런 마음이에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어요. 지금 열심히 하는 만큼이 미래라고 생각하니까.”

- 공무원노조 울산본부 여승선

 

20년의 노조활동 속에 이영호는 나이 쉰을 넘어 정년이 10년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노동자로 살아가겠다’고 얘기할 뿐이다.

 

“당장 돈 벌어놓은 게 없으니까 이후에 그만두고 나면 어떻게 살까 하는 게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그거야 뭐 그때 되면 되고...

활동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고민하거나 그런 거 없지. 내가 고민한다고 될 거도 아니고(웃음)... 꾸준히 그냥... 노동자니까.”

- 부산지하철 이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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