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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투쟁의 공간, 지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운동은 민중운동이 전통적으로 강조해왔던 것이다. 실제 주요한 연대투쟁을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일상 활동에서도 지역에서의 교류가 현실적이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삶의 곳곳을 파고들면서 사회를 극심하게 파괴하는 요즘 지역에 대한 강조가 더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다.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미군기지투쟁, 새만금 반대투쟁, 해계기장 반대투쟁 등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경험했던 김종섭은 지역의 중요성을 몸으로 익혀왔다.

 

“지역은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시·공간의 의미가 있다. 단순히 중앙의 사업을 지역에서 집행하는 집행기관이 아니다. 계급투쟁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갖고 모든 정치운동이나 운동들이 지역이라는 곳에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변혁운동가들의 기본적인 고민이어야 되지 않느냐... 지역이 엄청나게 신자유주의 기반이 되고 있어요. 신자유주의라는 게 지역에서는 개발이데올로기로 나타나고 있거든요. 이것을 착목을 하고, 대중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이 지역에서 시작 돼야 해요.”

- 전북 새날을 여는 정치연대 김종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대투쟁의 모범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 평택 에바다학교 투쟁, 대전 호텔리베라 투쟁, 구미 금강화섬 투쟁, 오산 수정동 철거민 투쟁에서 나타났던 모습들을 살펴본다.

 

“내부주체들은 가서 상황설명하고 호소하고, 지역의 연대틀을 실제로 꾸려나가는 것은 민주노총 지구협이 중심이 되가지고 계속 이끌어냈고, 중앙단체 연결하는데도 지구협이 많은 역할을 했어요.

민주노총 지구협 사무차장을 맡고 있는 김은천 동지 같은 경우는 지구협 내에서도 ‘에바다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전화 한 통 더 받아라’ 그런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너무 에바다에 집중하는 거에 대한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런 부분은 잠시였어요. 김은천 동지 같은 경우는 해아래집에서 1년을 상주했어요. 해아래집에 생활하면서 지구협 출퇴근하고... 우리 에바다 입장에서는 그게 굉장히 중요한 계기였어요. 그렇게 되니까 지역에 우리 에바다 상황을 알리고 하는 일이 우리가 막 따라다니면서 하지 않아도 김은천 동지가 계속 투쟁을 이끌어가고...

‘지역이 에바다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에바다가 지역을 도와줬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어떤 사안이든지 지역에서 운동하는 단체들이 각자 자기생각 가지고 할 수 있는데, 에바다라는 틀을 가지고는 단체들이 다 똑같은 생각이에요. 어떤 성향을 가졌든지 간에 에바다가 투쟁하는 동안에는 다들 똘똘 뭉쳤거든요. 이견이 거의 없었고... 이런 경우가 거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고요. 지역운동에서 에바다가 결과적으로 미쳤던 영향들은... 지역에서 연대하는데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자주 하더라고요.

이 투쟁에 어떤 이념이나 노선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어린 학생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고통을 받으면서 들고 일어난 것에 대해서 ‘이런 일은 해결해야 된다’ ‘평택지역에서 이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지역에서 우리가 운동한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 이런 순수한 마음들이 작용을 했었던 것 같아요.”

- 에바다학교 권오일

 

“그때가 열사정국 때였어요. 우리가 강고하게 조합원 대오들이 흔들림 없이 투쟁을 하니까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무실을 여기로 옮겨 버렸어요. 호텔 앞쪽에 천막을 세 동인가 네 동을 쳐서 사무실을 옮겨 버렸어요. 굉장히 의지를 가진 거죠. 우리도 굉장히 탄력을 받은 거죠. 100일을 투쟁하는데 90% 참가하는 조합원 중에 99일째 딱 2명 이탈하고 한 명도 이탈을 안 했거든요.

우리 로비에 대전과 충북지역까지 금속대오가 700대오가 올 정도로... 그리고 유성 시가지를 약 800대오가 시가행진을 하면서 ‘호텔리베라 정상화’를 얘기할 정도로 지역도 우리 투쟁에 올인 했어요. 그때 지역의 연대는 대단했어요. 군량미(쌀)가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로... 우리가 초기에 한 번 쌀을 사다 먹고 그 다음에 한 번도 쌀을 사다 먹지 않았어요.

......

가장 우리에게 컸던 것은 지역 동지들인 CMS결의를 했던 거예요. 그게 1년 정도 됐던 시점이었을 거예요. 지역동지들이 CMS결의를 하고 조직하고... 초기에는 한 달에 180만원 정도 들어오고, 나중에는 월평균 500만원 까지 들어왔어요. 만원, 3만원, 5천원, 3천원 그렇게 해서... 대단했죠.”

- 호텔리베라 박홍규

 

“코오롱은 그 당시 해고된 상황에서 정투위 동지들이 거의 같이 결합하고. 우리도 코오롱 정투위 집회에 같이 참여하고, 조합원들끼리 토론회도 만들고... 초반 한두 달가량은 연대투쟁이 왕성했죠. 프로그램도 굉장히 많았고... 영화도 보고, 체육대회도 하고, 지킬 땐 지키고... 연대기금도 굉장히 많이 들어오고... 한국합섬 같은 경우는 전체 조합원이 매달 2천원씩 결의해서 투쟁기금을 갖다 주고, 나머지 단사들은 간부들이 한 달에 5만 원씩 모금해서 주고, 투쟁기금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죠. 전국의 동지들이 우리 투쟁하는 거 보고 많이 찾아왔어요. 실제 자본을 압박하는 것이 되었고...”

- 금강화섬 차헌호

 

“오산에서 와서 가장 큰 투쟁은 2005년 수청동 철거민 싸움이에요. 서울에서 내려온 개발논리가 여기 오산까지 온 거예요. 이런 것에 맞선 하나의 대표적인 싸움이 된 게 수청동 철거민 싸움이 됐고, 그게 전국적으로 상당히 큰 사건이었죠.

......

그런 흐름이 이어져서 수청동 철거민들이 탄압을 받으니까 민주단체연석회의나 지역모임에 참여를 해서 자기들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고 이후 투쟁도 지역모임에서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철탑을 쌓는 과정에서 첫날 싸움이 붙었는데 철거용역깡패가 죽으니까... 그 바람에 두 달 동안 경찰들이 포위하고, 그걸 지역이 엄호하면서 같이 한 거죠. 경기도 지역뿐 아니라 서울에서 단체들이 같이 결합해서 했어요. 결국 테러집단 잡듯이 잡아가지고 다 감옥살이 하고... 내부적으로는 그동안 잘 모이던 단체 중에서 그 싸움에 참여했던 단체와 떨어진 단체도 있어서 다시 잘 추슬러서 하려고 하는 과정에 있어요.

그런 주변부 같은 싸움에 노동자들도 같이 해야 되고... 민주노총 경기본부나 지역노동자들도 같이 했으니까... 대대적인 싸움이 안됐다 해도 그것이 지역연대의 상징적인 모범이 되고, 센터가 그동안 연대하면서 가졌던 틀이 지역연대의 토대가 된 거죠.”

- 오산노동문화센터 장창원

 

이런 여러 가지 모범적 사례들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산별노조 시대를 맞이한 민주노조진영에서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민주노총 평택․안성)지구협의회 시절에는 지구협을 중심으로 지역연대사업이 굉장히 잘 됐어요. 지역에서는 미군지지문제나 에바다 투쟁 같은 큰 투쟁만이 아니라 소규모 사업장들이 많기 때문에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나 신규노조 지원투쟁 등의 사안이 계속 생겨요. 그래서 그런 연대투쟁에 최대한 결합했죠. 우리는 그런 지역연대투쟁 자체가 우리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두원정공 노조 내에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주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도 우리 사업이기 때문에 최대한 결합해서 거의 다 같이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현장에서는 너무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문제제기를 하죠. 간부들도 많이 지쳐하고 해요. 그래도 많이 설득하고 하면서 같이 하려고 노력하죠. 노동조합이 그거 하지 않으면 뭐 할게 있겠어요?

그런데 금속노조로 와서는 잘 안돼요. 금속노조 중심의 사업이 너무 많아서 금속노조 밖으로 다닐 여유가 없어졌어요. 또 금속노조 체계 자체가 지역사업을 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어요. 재정도 중앙으로 집중되고, 시간도 많이 차지하고 그래서 금속노조 사업이 아니면 지역사업은 거의 불가능해지죠.”

- 두원정공 이기만

 

지역 중심의 활동은 진보진영만이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상층활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교육단체들과 달리 최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뉴라이트계열의 부수적 교육단체들은 지역 활동을 매우 열성적으로 벌이고 있다.

 

“학교에서는 전교조하고 교총하고 대립되는 구도가 돼 있거나 그러진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교총은 현장 활동이 없으니까... 교총은 조직은 있지만, 학교 단위에서 모임을 해서 뭘 한다 이런 건 없어요. 그런데 전교조는 분회가 있으니까... 주로 갈등이 생긴다면 교장과의 갈등이지... 학교 근무조건 개선과 관련해서는 전교조 교총 구분 없이 교장을 상대로 해서 하는데, 주로 부장까지는 교장 편이고, 나머지 평교사들은 같이 교장하고 싸움을 하고... 싸움을 하면 전교조만 하는 게 아니라 전체 선생님들 하고 같이 하니까... 교총과의 대립이 현장에서 나타나는 건 아니에요.

학부모들 하고의 관계는... 참교육 학부모회 활동이 부천지역에서는 별로 없어요. 부천에는 학부모연대라고 참학(참교육 학부모회)하고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조직이 있기는 한데... 뉴라이트 계열은 전교조가 뭘 하면 난리를 쳐요. 전교조에서 뭔 일을 하면 얘네들 나타나서 막고 그러니까... 직접 학교로 찾아와요. 부천 상동고등학교에 이용석 선생이라고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 거부를 해서 징계를 받았는데... 그때 주동적 역할을 했던 게 학사모(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였어요. 그런 식으로 전교조가 학교에서 교장을 상대로 싸움을 한다고 그러면, 학부모라고 하는 요구를 가지고 와서 역할을 하는 거죠. 그리고 의도적으로 교장이 부르기도 하고... 요즘은 뭔 일이 있으면 학부모 먼저 동원을 하니까...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그거예요. 학부모를 동원했을 때 학부모를 상대로 싸우는 게...”

- 전교조 부천지부 최덕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 활동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 활동과 고민들에 대해 제주, 대구, 구로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제주, 지역 공동체의 이중성

 

제주지역은 공동체성이 매우 강한 고립된 섬, 저항의 역사와 보수성이 공존하는 곳, 신자유주의 공세가 가장 선도적으로 이뤄지는 곳,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토대 자체가 극도로 빈약한 곳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조건에서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지역과 다른 고민을 갖게 한다.

 

“이것은 제주사회의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여요. 제주사회가 타 지역에 비해서 계층 간의 폭이 적다는 거죠. 경제적 수준이나 이런 게... 그런 특성도 좀 있는 거 같고... 그 다음에 제주라고 하는 특성이 뭐냐 하면... 육지 사람들은 배타적이라고 하는데, 지역 특수성에 대한 입장이 굉장히 강하잖아요. ‘육지놈’이러는 거처럼... ‘대한민국이 어떻게 돌아가든 제주도다’ 이런 거...

그것도 운동하면서 굉장히 고민이었죠. 지역운동이 이념적 스펙트럼이 없는 거예요. 사안 자체가 진보 보수도 아닌 거예요. 특히 환경은 더 그런 거고... 오로지 ‘제주도’만을 얘기하는 참여환경연대 운동이 생명력이 있는가?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몇 년 전에 APEC 유치 가지고 부산하고 경쟁을 했는데... 보편적인 운동 관점으로 보면 APEC은 앞에 가서 데모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데모했다간 돌 맞는 거죠. 그때 우리 단체가 무슨 성명을 냈냐 하면 ‘APEC 후보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제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일부 회원들한테서 문제제기가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딜레마인데... 이거는 대중적 관심이 큰 사안이기 때문에 이런데 목소리를 내면 지지층이 팍 모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단체가 지향하는 것은 지역사회에 민주적인 권력을 세우는 건데... 이런 식의 경로를 통해서도 지지층을 확대하는 것도 유연하게 해야한다는 암묵적인 게 컸죠.”

- 자제참여환경연대 고유기

 

이렇게 강한 지역 공동체성은 반대로 노동자간의 단결을 강화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라병원투쟁이 민주노총 만들어진 이후에 제주지역에서 가장 크게 벌어졌던 투쟁입니다.

처음에 조합원이 70명 정도였는데 전부 정규직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이 들어왔지만 별로 그렇게 개념을 잡지 않은... 고용에 대한 심각성도 없었고... 병원이라는 곳이기 때문에 정규직 비정규직 임금차이가 많이 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단협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파업을 하게 된 주원인은 계약직의 고용안정 문제였습니다. ‘계약직이 점점 늘어나버리면 노동조합 조직력이 약해진다’는 원론적인 이런 것도 있었지만... 같은 학교 나온 선후배 관계들인데 ‘선배들이 계속 이렇게 있을 거냐. 싸워야 될 거 아니냐’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문제를 위해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선 경우죠.”

- 제주지역일반노조 고승남

 

이런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는 대도시와 다른 기풍이 있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은 하나 있어요. 음흉함이 없어진다는 거, 이른바 자기검열이 된다는 거죠. 항상 맹심(조심)해야 되니까. 룸싸롱을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에 다 드러날텐데... 또 하나는 그것이 비타협적인 투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로 존재합니다. 장단점이 있어요.”

- 제주지역일반노조 고승남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 경남 창원에서 지역활동을 고민하고 있는 박훈에게 이런 문제는 다른 시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이쪽 지역적 특색을 보면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요. 자기 작은 울타리 안에 아성은 있는데 터놓고 이야기 할만한 개인과 집단이 굉장히 드문 게 지역운동의 특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나 자기 사업장 내를 떠나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들이 크더라고요.

서울과 지역적 운동의 장단점들은 보이기 시작하는데... 서울의 단점을 치자면 부평초고, 장점을 치자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고... 여기는 뿌리박고 있는 소나무이기는 한데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작은 생각을 갖고 자기 아성은 있는... 그게 사업장 기반을 갖고 있냐하는 큰 차이에서 오는 거예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은 그 기반이 없다보니까 의식이 여러 가지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기반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 보니까... 그것이 내가 여기서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예요. 사업장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세상의 중심이 자기네들 속인 거고, 부평초처럼 떠돌아 오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지하냐 아니냐 하고 편 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건 부정적인 것보다는 나는 사람들이 자기 인식을 확대해나갈 수 있는 존재기반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역운동에 뿌리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사업장이 됐든, 아무런 사업장 기반이 없는 마을 주민들 속에 들어가 있든, 나처럼 법률적으로 어디 들어가 있든, 의사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지역주민과 만나는 의료센터를 만들든, 생태운동이든, 다양한 형태의 지역운동 속에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서울에서 할 때보다는 훨씬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 노동변호사 박훈

 

대구, 낮은 곳에서 저항 주체를 조직하다

 

대구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은 완고한 보수성을 갖고 있는 대도시이다. 대도시인 만큼 다양한 활동 역량들이 녹아 있지만, 그들은 지역의 보수성을 뚫고 나올만한 역량이 아직도 모자라다.

 

대구지역에서 노동운동에 집중했던 현장연대는 2002년 이후 활동 전망에 대한 내부 논쟁을 벌이면 새로운 형태를 모색한다.

 

“현장연대가 ‘노동자에 연대하고 노동자의 미래를 열어간다’는 단체였는데... 신자유주의 국면 속에서 노동단체로서의 자기위상일 따름이지 신자유주의 반대전선을 하는데 있어서 전면적이지 못한 점이 논란됐어요. 노동자운동의 한 축으로서는 기능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양태가 총체적 사회문제로 드러나는데 있어서 자기 역할이라는 것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들... 총연맹이 산업별로 재편되면서 노동단체로서 가지는 자기 위상이 애매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도 좌파라고 하면서 건강하다고 하지만, 스스로 줄 세우기식에 길들여져 있는 관성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 많았다는 거죠. 그러면서 현장연대가 현장연대 회원이나 현장연대 상근자만의 사업이 아니고 지역 내에서 여성, 환경, 인권, 비정규직노동 이런 다양한 영역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서 자기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논쟁을 내부적으로 1년 반 이상 하게 됐죠.

......

2003년 현장연대를 정리하고 민중행동으로 가는 과정에서 현장연대 상근자 8명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된 거죠. 민중행동의 상근자로 한 명 가기도 하고, 성서공단 노동조합으로 세 명이 가고, ‘노동자의 눈’에 두 분이 활동을 하고, 저는 비정규직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건설노조에 들어가고, 한 명은 서울 활동으로 옮겨가고... 그와 별도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해서 교육과 영상활동을 하는 ‘노동자의 눈’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성서FM방송국이 된 거죠.”

- 대구 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조직된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덩치만을 키워가는 운동에 문제의식을 가졌던 이들은 조직된 노동조합이 신경을 쓰지 않는 노동자의 밑바닥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들은 성서공단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전노협 시절이나 민주노총 와서도 성서공단에 노동조합이 별로 없었습니다. 성서공단은 조그만 회사들 밖에 없고... 주름잡는 회사가 없는 거죠.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는 데는 없고, 나름 등치가 있는 회사들은 다 한국노총이에요. 민주노총 사업장이라는 데는 50명~100명씩 되는 데서 만들었다가 다 깨지고... 오래 가면 4~5년 짧게 가면 2~3년 이예요. 그 투쟁마다 사장을 응징한다던지 하는 성과는 있었지만, 노조는 남아있질 않는 거예요. 사업장 단위로 노조가 생겼을 때에 일정 규모 이상이 돼야 노조가 유지가 된다는 거죠. 그 일정 규모라는 게 제가 경험적으로 느끼기에는 100단위 이상 이예요. 100은 넘어가야 전임 한 명이라도 요구할 수 있어요. 그 이하는 자본이 못 버텨요. 그러니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꿈꿀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산별노조는 미조직노동자를 조직하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정작 하는 꼬라지는 조직돼 있는 데끼리 통합해서 덩치 키우겠다는 것이고... 그렇게 덩치를 키워서는 관료로 있는 사람들의 교섭력은 커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미조직노동자들한테는 눈꼽만큼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때부터 이 성서공단의 노조들이 생존해 나가려면 지역노조가 맞지 않나 생각을 했어요.”

- 대구 성서공당노조 박찬희

 

열악한 조건에서 대중의 밑바닥을 조직하고 있는 이들은 서로의 힘을 보태면서 공동의 지역사업을 벌여내고 있다.

 

“지역사업은 혼자 하기가 너무 버겁기 때문에 금속노조도 끌어 들이고, 이 지역에 있는 전교조도 끌어 들이고, 공무원노조도 끌어 들이고, ‘좋은 친구들’이라는 문화패도 끌어 들이고... 일상사업 하려면 문화적인 측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좋은 친구들’이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좋은 친구들’이 이런 취지에 동감하기 때문에 이 사업할 때 거의 올인 해 주거든요. 이렇게 해서 ‘성서지역 노동자 주민 기본권 보장을 위한 공대위’라는 조직이 하나 만들어져 있어요. 거기에서 ‘올해는 신문도 한 번 만들어보자’ 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노동자가 24시간 중에 공장에서 12시간을 보낸다면 나머지 12시간은 지역에서 보내는데, 지금까지 노동조합은 공장에 있는 12시간은 착목했는지 모르지만, 그 나머지 재생산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12시간에 대해서는 착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걸 해보자는 취지도 있었죠.

그래서 하는 사업 중의 하나가 월 1회 공단을 대상으로 한 선전사업이 있고... ‘좋은 친구들’ 하고 몇 년째 하는 사업이 있는데... 여기는 영세사업장들이다 보니까 공장 안에 식당이 없고 조금 큰 공장에 식당이 있으면 인근 공장들이 그 식당을 같이 이용해요. 그런 특성이 있다 보니까 점심시간에 그런 식당이 있는 길에 가가지고 전 피고, 노래 부르고, 선전물 돌리고... 그걸 ‘밥 한 술 뜨고 노래 한 자락 듣고’라는 거리공연이라고 우리가 해요. 로고송도 만들었어요. 매주 수요일 1시간씩 하는데 그것도 빡 쎄요. 1년에 석 달, 길 때는 넉 달 정도는 매주 수요일 날 거리공연 하고... 그러면은 분위기는 좋아요.

여름 되면 아파트 단지 안에 공원에서 저녁에 공연을 해요. 저녁 7시부터 9시 사이에, 길면 두 시간 갈 때도 있지만, 1시간 반 정도 해서 공연을 하는데... 노래 공연을 할 때도 있고, 돈이 되면 연극을 하기도 하는데... 지역의 문화역량들 다 끌어 모아가... 그게 2001년부터 했어요. 여기에서 노동조합 하기 전부터 그 공연을 했죠. 노동자 관점의 이야기를 주민의 공간에서 펼쳐내는 그런 수요공연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요. 올해는 노래자랑을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 대구 성서공단노조 박찬희

 

이런 지역의 기풍은 또 다른 사회 밑바닥인 장애인들의 자기조직화로 이어졌고, 이렇게 조직된 장애인들도 자기 문제만이 아니라 연대활동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내부 결속력을 완결성 있게 조직되고 있고, 이 힘을 가지고 부산이나 다른 지역투쟁에 같이 결합하고... 각 지역에 지원투쟁을 많이 했죠. 대구하면 전장연 내에서는 조직력이 알려졌죠.

또 2007년에 주요했던 거는... 전장연의 기초가 사회적 모순의 문제를 같이 대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역의 투쟁 사안들..노숙인 쉼터 비리사건 등을 같이 대응했어요. 그것도 적극적으로 지역 장차연 조직들이 같이 결합했고... 노숙인 투쟁은 되게 열악한 거잖아요. 그래서 구청투쟁 할 때 저희가 다 결합해서 투쟁 박아주고 이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장차연 조직이 없으면 시민사회 관련한 투쟁을 못 한다’ 할 정도로 결합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지역 내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어요.”

-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금호

 

구로, 무수한 이들이 떠나간 그곳

 

구로공단은 대표적인 공단지역이었던 만큼 70년대부터 무수한 활동가들이 다양한 활동을 벌였던 곳이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몰아닥친 사상적 혼란과 이후의 산업구조 재편 속에 그 많던 활동가들이 떠나가 버렸다.

 

김소연은 92년 갑을전자에 입사했다. 그 당시 노민추 세력만 50명에 이를 정도로 현장활동을 활발했지만, 활동가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한다.

 

“그때만 해도 사람을 뽑는 데가 워낙 많아서 가리봉에 내리면 서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내리면 공고 같은 거 엄청 붙어있고... 그런 거 보고 했는데도 연결이 잘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가리봉에 내렸는데 ‘좋은 일자리 있다’고 가자는 거예요. 봉고차에 실려서 갔는데 거기가 갑을전자였어요.

젊은 친구들 많고,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천 명 정도 됐으니까 꽤 컸죠. 그리고 집행부가 어용이라서 이미 노민추가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구로공단은 활동가들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

(94년) 쭉 싸움이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노민추 활동가들이 많이 떠나요. 그 전부터 두 번 정도 선거에서 실패를 하면서 전망 고민을 한 거죠. 그리고 나이가 20대 중·후반이 되니까 조금 더 안정적인 거를 찾기도 하고... 자기 전망 갖고 나간 사람도 있고...”

- 갑을전자 전 위원장 김소연

 

92년부터 구로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구로지역 활동을 해온 송경동 역시 활동가들의 이탈과 변화과정을 지켜봐왔다.

 

“구로 지역도 처음에는 노동현장 중심의 운동들로 다 짜여졌었죠. 제일 큰 축은 현장에 들어가서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는 외곽에서 지원하는 운동들이었죠. 야학운동이니, 민중교회운동이니, 다양한 문화단체들도 있었고, 청년회 조직들도 있었고, 노동상담센터나 노동자회 조직들이 주변에 있었고, 건강의료 관련한 지원하는 곳들이 있었고... 다양한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소진되었어요.

저희 지역 같은 경우는 96년경에 크게 분화를 했죠. 한 축들이 시민운동류의 지역운동으로 빠지게 되죠. 일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장울타리 안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조 설립 투쟁 외에 지역 내에 코뮌적인 성격의 공간들을 열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대부분 지역운동으로 가는 축들은 ‘계급’을 해체해 나가는 경향이 강했죠. 거기에 ‘시민’이나 ‘대중’이나 ‘주민’을 넣죠. 아예 대체를 해버리려는 욕망에 휘둘려요. 나중엔 ‘국민’이나, 결은 다르지만 ‘환경생태’나 ‘다중’까지 다종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죠.

그 모든 게 과거 운동 논리로 부차화 돼야 되는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잘못된 운동이 갖고 있는 폭력일 테니까요. 하지만 역으로 새로운 영역의 개척에 나서며 계급문제를 부차화 시켜 버리는 흐름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가장 보편적인 문제를 계급의 해방에 두고 지역과 환경생태와 문화와 성의 문제 등 다양한 삶의 공간을 재전유해 나가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는 거죠.

- 시인 송경동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간 그곳에서 송경동과 김소연이 본 것은 대중이었다.

 

“지역운동은 고민이 많죠. 주민운동까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운동 관련해서는 보이는 일들은 많은데... 여긴 미조직 사업장들이 대다수니까요. 구로공단은 얼마 전에 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도 바뀌었어요. 새롭게 들어선 IT나 기존의 굴뚝 공장, 그리고 주변에 산재한 비정규사업장들과 이주노동자들까지 합치면 공단 중심 노동자가 7만 명 정도로 불어나 있죠. 그런데 민주노총으로 조직돼 있는 사람들은 다 합쳐봐야 500명 이쪽저쪽이에요. 공단 내에서 새로 인원을 뽑는 경우 96%가 비정규직이에요. 저임금이고, 대다수가 불법파견이죠.

이런 곳들을 조직하고 싸움들을 해나가야 되는데 워낙 자원이 충분치 않다 보니까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죠. 3만 명에 이르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조사 사업을 한두 번 해본 거 외에는 이주노동자 사업을 대중운동 차원에서 하지를 못해요. 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뀐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그 공장형 빌딩 속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나 현황조차도 파악을 못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 고민이 되죠. 80년대 한때 구로동을 노동운동의 메카라고도 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운동 중심이 인천이나 울산 같은 대공장 운동과 공공운동으로 쭉 가는 흐름이 생기면서 여기 조그만 공장 와서 조직 활동 해보려는 사람들도 없어졌죠.

하지만 이제 다시 새롭게 미조직 비정규직노동운동을 축으로 민주노조운동을 세워가야 할 때, 구로지역 운동도 스스로 자기 점검을 해보고, 어떤 정리와 계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해요.”

- 시인 송경동

 

“취업을 하려고 보니까 정규직 뽑는 데가 없더라고요. 2002년 6월에 기륭에 들어왔는데, 그때가 기륭이 파견을 선도적으로 도입하는 회사였어요. 벼룩시장을 보는데 일반회사는 거의 없어요. 휴먼닷컴이 제일 큰 회사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그게 파견회사였던 거예요. 몇 군데 회사를 얘기하고, ‘기륭을 가면 6개월 후에 정규직 된다’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가겠다’ 그랬죠.

기륭은 IMF 이후에 생산직을 중심으로 정리를 쭉 해나간 거예요. 신입 사원 안 뽑다가 인원이 줄면 빈자리를 처음에는 계약직으로 뽑았어요. 그러다가 2002년부터 파견직을 뽑은 거예요. 이 공단이 파견노동자를 시작한 게 2002년부터예요. 6월에 생산직이 50명 정도 규모였는데, 11월에 가니까 100명 정도로 팍 늘어요. 그러다가 12월말에 가니까 또 50명으로 줄어요. 파견이라는 게 그 정도로 탄력성이 있는 거죠. 정규직은 상여금이 700% 되는데, 파견은 한 푼도 없어요. 1년이 되든 2년이 되든 임금은 똑같고... 그러니까 버틸 수가 없죠.

그리고 이 지역은 돌고 돌아요. 거주지가 대부분 이 쪽이기 때문에... 회사가 이전해버리면 쫓아갈 수가 없잖아요. 남성은 쫓아가는데 여성은 그러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돌고 돌고 돌고...

초기에 내가 입사했을 때만해도 이 사람들이 파견직 경험이 없어요. 정규직으로 있다가 애 키우고 나와 보니까 파견직이라서... 처음에는 파견이 뭔지도 모르고 온 거예요. 와 보니까 이상한 거거든... 임금 차이도 크고, 사람 취급도 안 해주고, 그러니까 불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초기에는 그래서 이직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회사가 이직률이 너무 높으니까 일을 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계약직 전환을 시켜주는 거예요. 계약직이 되면 상여금 400%가 생겨요. 호봉제도 있고, 근속수당도 주고... 그만둘 거 같으면 ‘조금만 기다려라. 계약직으로 전환해준다’ 그러는 거죠.

그러고 나서 공단에 점차 실업자가 늘어났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회사도 배짱이죠. 들어올 사람 많고, 사람들이 갈 데가 없으니까 있어야 되고... 그리고 2003~4년 거치면서 파견이라는 것이 정착돼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분노가 높아서 그만두고 딴 데 갔는데, 가니까 또 파견이거든요. 그래서 ‘어디가도 똑같다’ 그러면서 정착을 하게 되요.”

- 기륭전자 김소연

 

그렇게 대중은 보면서 구로를 지켰던 김소연은 기륭전자 분회장으로, 송경동은 기륭지원대책위 집행위원장으로 처절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륭전자 투쟁을 비정규직 투쟁의 모범이라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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