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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과의 관계에서 한번도 오르가즘을 맛본 적 없어!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한번도 오르가즘을 맛본 적 없어!

코르넬리아, 53세, 매춘업, 이혼, 장성한 아들 하나

코르넬리아에게 전화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계의 느낌이 역력했다. 도대체 자기 이름을 어디서 알았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다. 정말이에요. 내가 잘 아는 남자 하나가 옛날 당신의 고객이었다고 일러줬어요. 미심쩍어 하는 그녀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그러면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제안하였다. 그녀는 오후 4시에 퇴근하고 우리 집으로 왔는데, 밤 11에는 다시 일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 역시 누군가 하고 이런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눈치임에 틀림없었다.
코르넬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는 한, 고되게 살아온 표시가 나는 지친 얼굴과 거친 손마디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베를린의 포츠담슈트라쎄, 그 자리에서 벌써 25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한 번도 남자와의 관계에서 오르가즘을 맛본 경험은 없다고 했다.
“여기서 만나는 남자들하고 어떻게 그런 느낌이 생길 수 있겠어. 너무 힘드니까. 오르가즘은 그냥 혼자서 해결을 하지.”
그녀에게 매춘은 여느 업종과 다름없는 자신의 직업일 따름이다.
“저녁 일곱 시 좀 넘으면 집에서 나와 이리 출근을 하지. 그 전에 물론 키우는 개들을 대리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고. 일 마쳐도 아침이 돼야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든. 이제는 뭐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굴뚝같지. 마음으로야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싶고 말고. 연금이라도 꼬박꼬박 나오는 영감 하나만 꿰차면 말야...”
남자들에 대해 그녀는 퍽 좋게 얘기를 시작하였다.
“난 아직도 단골이 많아. 벌써 20년 단골도 있는 걸. 아주 좋은 남자들이야.”
그러나 잠시 후 못 참겠다는 듯한 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그냥 짐승이랑 똑같아. 뭐, 우리한테 와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놈들은 집에 가서 마누라들한테도 똑같이 한대. 80프로는 완전히 골빈 놈들이야. 오직 생각하는 게 지 놈들 다리 사이에 있는 거. 크든 작든, 굵든 가늘든, 오로지 그게 이 세상에서 제일 중한 줄 아는 놈들이라니까. 하느님이 창조한 물건 중에서 그게 최곤 줄 알고 사는 놈들이야. 그거 없으면 인간도 아닌 줄 안다니까!”
코르넬리아도 어렸을 때는 착한 남자한테 시집가서 예쁜 아이 낳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꿈만 꾸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서도 남자랑 키스만 하면 임신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네 살 되던 해 낙태수술을 받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말이 좋아 예술가여서 언제나 방랑을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할머니는 손녀딸을 자유롭게 기른 편으로 사내아이들 사이에만 끼어 놀아도 뭐라 야단치지 않으셨다. 여자애들은 너무 까탈스럽고 지루한 놀이만 해서 그녀는 거기에 끼지 않았다.
열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유언장에는 어린 딸아이가 ‘아주 골치 아픈 아이’여서 양육권을 국가에 위임한다고 밝혀 두었다. 열네 살에 그녀는 농촌으로 보내졌다.
“부퍼탈 청소년국은 양육권을 그런 식으로 남용했어. 거기서 우리는 새벽 여섯 시부터 밤늦게까지 온종일 일을 했거든. 4주에 딱 하루 쉬는데, 추수기에는 그나마 없는 거야. 서른 살 먹은 노예만큼 어른 몫의 일을 했는데, 그에 대한 권리나 대가는 전혀 없었다구.‘
코르넬리아는 지난 30년 동안 두 차례 결혼을 했고, 그 밖에도 네 명의 남자와 제법 오랜 기간 동거 했는데, 이들 모두 그녀한테는 기둥서방인 셈이었다. 바로 몇 주 전가지만 해도 스무 살 연하의 남자와 함께 살았다. 그녀의 집은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후미진 곳에 두 칸짜리 방이 딸린 연립주택으로, 코르넬리아는 마당과 공동화장실을 맡아 청소하면서 매달 월세로 80마르크만 내고 산다. 여기서 함께 살던 남자는 지난 2년 내내, 빨리 결혼해서 함께 사업을 벌이자고 큰소리를 치곤하였다.
“공연한 소리였지. 그놈 뱃속에는, 내가 애써 장만한 스페인에 있는 오두막, 그것 좀 어떻게 해먹을까 하는 궁리밖에 없었던 거야.”
그 남자는 코르넬리아 말고도 동시에 여러 여자에게 같은 약속을 했지만. 결혼하려고 진짜 벼르던 상대는 이제 열다섯 살짜리로 어떻게 해서든 그 애를 사창가로 보낼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코르넬리아는 그 남자를 고발해 버렸다.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을 거야. 그 빌어먹을 놈들은, 나처럼 늙은 작부가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 젊은 서방을 고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하거든.”
코르넬리아와 사는 동안 그는 매일 큰소리치며 그녀를 버리겠다고 집을 나가곤 했다. 코르넬리아의 목소리에는 기막힌 현실에 대한 자기비하가 섞여 있었지만, 천성적인 정열과 활달한 기질이 느껴지곤 했다.
“나는 열여덟 살에 처음 남자하고 사랑을 나눴어. 아직도 기억이 너무 생생해. 사랑에 빠져 무턱대고 황홀했거든. 마을 축제에서 만났지. 제일 미남이었어. 다음다음날, 나는 그가 일 끝나고 지나가는 자리에 가 기다렸어. 그런데 나를 보고도 전혀 아는 체를 안 하는 거야. 그게 말하자면, 나한테는 첫사랑이었다 이 말이야!”
그녀는 멋쩍은 듯 크게 웃었다. 마음에 상처가 되지는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니야. 정신적인 상처라면, 그래 이 얘기를 먼저 해줄게. 20년쯤 전 일인데, 의사한테 가서 검사를 받은 적이 있거든, 남자들이 내 몸에 손을 대려면 왜 그렇게 거부반응이 생기는지, 나를 검사한 정산과 의사는 원인을 찾느라고 몇 가지 질문을 했어. 아마도 내가 어떤 고약한 일 대문에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것 같다고 말야. 정신적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 같다면서, 뭐 그런 얘기를 해보라는데 별로 생각나는 게 없더란 말이지. 한참 생각을 하다 보니까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어. 내가 네 살 때 일이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나를 덤불 속으로 데려 가더니 몸 아래에다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그러는 거야. 소리를 지르면 옆에 있는 도랑에다 처박아 버린다고 말야. 나중에 결국 그놈이 잡혔는데, 우리 엄마가 그놈을 경찰서로 끌고 가서 반쯤 죽여 놨다고 그랬거든.
그 얘기를 해줬더니 의사 말이, 그럴 줄 알았다는 거야. 앞으로 인생이 잘 풀린다 해도 그때 입은 충격은 극복하지 못할 거래. 정신과 의사라 그런지 똑똑한 것 같더라구.“
남자들이 손만 대려면 발작을 일으켰던 증세를 설명하기에 이 사건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리고 이후의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리지도 않았을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면 다음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부퍼탈 시내에는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화염에 싸인 집을 피해 달아난 코르넬리아는 대피소에 머물던 중 거기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약혼을 했다.
“첫눈에 반했거든. 나는 로버트 테일러를 거기서 만날 줄 알았어.”
그녀는 임신을 하고 말았다.
“1944년 여름에 몸을 풀었지.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왔는데, 그 동안에 이 인간이 다른 여자랑 일을 벌이고 있는 거야. 악을 쓰고 난리가 났지, 시어미니가 그러면 안 된다고 사정을 하는 거야. 결혼 준비가 다 끝났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거야. 피로연이며 예식장이며 다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내 그랬지. 나는 빼고, 실컷들 잡수시라고. 나의 순수한 사랑을 이런 식으로 배반하지 말아라. 실망이 너무도 커서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했지.”
당시 코르넬리아는 사랑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나한테 잘 해주는 남자. 마음이 서로 통하는 남자. 진실하고 성실한 남자. 그래, 젊었을 때는 그렇게 한심한 생각만 골라서 하는 거야. 하나라도 어긋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남자들도 다 그런 줄만 알았지... 하긴 뭐 세월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그런 줄만 알고 살았어. 그저 가끔. 그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에 처량해지기도 했지. 여러 번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 점점 사람을 믿지 못하고 공연한 의심만 늘고 그러기는 하지.”
그런데도 여자들은 왜 번번이 똑같은 관계에 빠져들까?
“그거야 여자들마다 다른 것 아냐? 사내랑 자고 싶어 그런 년들도 있을 거고, 혼자는 외로워서 그런 년들도 있을 거라구, 그런데 나는 주제파악도 못하고 번번이 영이 통하는 인간을 찾고 있으니... 살만 맞닿아서는 그게 안되더라구.”
코르넬리아는 아기를 대리고 부퍼탈로 돌아가 대피소에서 잠시 머물다가 얼마 후 막사 단지가 있는 부근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차례씩 밤이 되면 여자친구 하나와 이웃 마을로 원정을 갔다. 거기는 전쟁포로가 된 유고인들과 미군들이 주둔하던 지역이었다. 아침이면 한 보따리씩 생필품을 품에 안고 돌아왔는데, 처음에는 고정된 남자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닥치는 대로 상대가 바뀌었고 어떤 때는 하룻밤에 여럿을 상대하기도 했다.
그녀가 밤에 집을 비우는 적이 많았으므로 아기에 대한 친권을 박탈당했으나, 그녀는 얼마 후 아기가 머물고 있는 보육원에 찾아가 몰래 아기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현재는 동독 지역이 된 어느 마을로 도망을 쳤다. 코르넬리아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이런 식으로 아기를 납치 혹은 구출하였다. 한번은 시부모들이 손주를 데려가 돌려보내지 않자 그렇게 했고, 다른 한번은 서베를린 어느 고아원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매를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결국 아이는 자기 엄마와 마찬가지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다.
그녀는 우선 결혼부터 했다. 무엇보다 아이 때문에 그렇게 했다. 동독 지역에서 한번은 유괴된 아이를 찾아낸다고 경찰에 비상이 걸려서 모든 서류를 정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독신으로 되어 있는 코르넬리아는 아이의 신변 때문에 결혼을 하기도 결심하였다.
“그 남자가 정이 많아 보였거든.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아이는 고아원에 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단 말야.”
서류상으로 혼인사실이 확인되어야만 아이의 친모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결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혼인의 의무라는 것이 견디기 힘든 것이어서 그녀는 서베를린으로 이사를 했다. 때는 1950년이라 왕래는 자유로웠지만, 베를린은 아직 전쟁으로 폐허가 된 채 잿더미 상태 그대로였고 식량이 모자라 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코르넬리아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고 “배고픔에도 신물이 난 상태였다." 그녀는 서른 살 되는 생일날 세무서에 가서 매춘업에 등록을 하고 허가서를 받아왔다.
“처음 일 나가서 만난 남자는 테이블 위에다 돈부터 올려놓았는데, 나는 부끄러워 도저히 못하겠더라구.”
코르넬리아는 다시 크게 웃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내내 포츠담슈트라쎄 같은 자리에서 몸을 팔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화대도 점점 급이 내려가고 있다. 요즘은, 젊은 여자들 받는 갑의 삼분의 일도 못 받는 셈이다. 그에 비해 부대비용은 자꾸 더 들어간다. “몇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나잇값도 못하는 늙은 작부”는 방값으로 2마르크를 내야 한다. 제대로 세금을 내는 여관에 가면 방 하나 빌리는 값으로 12에서 15마르크 정도 내는데, 24시간 동안 보통 서른에서 쉰 차례 손님을 받는다고 한다.
“옛날 같으면 늙은 작부들은 시도 때도 없이 경찰한테 몸을 대줘야 했어. 성상납이라 그러잖아. 요새는 그런 놈들은 없어졌네.”
매춘으로 돈을 버는 건 남자들이다. 여관 주인, 술집 주인, 기둥서방, 세무 공무원, 정작 일하는 건 여자들인데, 결국 남자들의 주머니만 채우고 만다. 요금이 비싸다면서 왜 정해진 여관에 꼭 가야 하는가?
“그나마 그게 나은 거야. 처음 보는 남자 따라서 아무 데나 가 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매춘업소 주인이랑 여관 주인들이 있으면 최소한 그런 일은 안 당하지.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일반 여관에 다라 갔다가 창녀한테 주머니 다 털려 봐, 누구한테 사정을 하냔 말야.”
코르넬리아에 따르면, 돈을 좀 비싸게 물더라도 정해진 규정이 있는 사창가에서 하는 영업이 한결 낫다고 한다.
그러면 기둥서방은 왜 필요한가? 마찬가지 이유라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여성은 마음 붙일 남자가 하나는 있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뒤에서 돌봐주는 남자가 있어야 남들이 못 건드린다고 한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기둥서방들은, 소문과는 달리 “손버릇 고약한 손님들로부터 자기의 ‘애마’를 지켜주는 일은 없다”고 한다. 매춘여성들이 손님을 받고 있는 동안 그녀들의 서방님은 오락을 하거나 술을 나눠 마시면서 그녀들이 벌어들이는 돈을 축내는 게 예사라는 것이다. 기둥서방이 그녀들을 지켜주는 게 아니며, 매춘여성들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도록 지켜 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매춘여성을 기둥서방들에게 묶어 놓는 일종의 관행이 있는데. 이들 관계는 조직폭력과 비슷해서 여기서 일하는 여성은 조직 전체의 압력을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1951년 나도 처음 기둥서방을 맞았지. 마음도 착하고 정 많은 남자려니 했어.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었어. 함께 독립해서 나가려고 말야. 그런데 한쪽에서 계속 써버리니까 돈이 모이지를 않아. 여자는 무슨 황소처럼 일하다가 고꾸라질 지경이라 일하다가 그냥 눈꺼풀이 내려 앉아 버려. 여자들은 그런다니까. 고단하게 일해서 돈 많이 벌어다주면 줄수록 남자가 더 잘해 줄 거라고 믿는 거야.
나는 뭐 밤새 일하고 새벽이면 또 일어나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길에 나가서 서 있어. 그런데 이 놈은 그렇게 해서 번 돈을 밤새 노름하고 술 마시며 탕진을 하는 거야. 안 되겠다 싶어 갈라지자고 했지. 그랬더니 안 된다면서 지랄을 하기 시작하네. 사내놈들은 다 그래. 자기 애마가 주인을 버리고 떠나려 하면 무작정 두들겨 패는 거야.
이 동네는 또 그런 규율이 있어. 손아귀에서 계집이 빠져나가게 그냥 놔두면 안 된다는 거야. 개 패듯 단도리를 해서라도 계집은 잡아놔야지, 만약에 이게 달아나서 고발을 하면 그건 정말 끝이야. 그런 일 있으면 그년은 아주 죽일 년이 되는 거야. 그렇지만 사내들은 언제고 여자를 바꿀 수가 있어. 더 나은 계집을 꿰찰 수 있으면 그건 그렇게 하는 거야. 울고불고 사정해도 소용없는 거라. 제 꼴만 사나워지는 거지. 아무도 여자 편은 안 들어 줘.
그런데 내가 배반을 했지. 한 번만 또 그러면 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작심을 했었거든. 그런데 또 개 패듯 패며 아주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는 거야. 그래서 경찰에 가 고발을 했지. 그랬더니 그걸 취소하라고 갖은 협박을 다 해. 그때 그 자식은 무슨 조직의 맴버였거든... 여기 서베를린에는 그런 지하조직이 두 개 있었어. 도시를 둘로 나누어서 서로 무슨 파다, 무슨 파다 하면서 자기네 구역에는 서로 손을 못 대게 뭐 그런 게 있었어.
이놈들이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거든. 우리는 저희들 황금마차를 끌고 다니는 나귀란 말야. 그놈이랑 다시 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더라구. 두렵기도 하구, 뒷일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는 거야... 한번은 매에 못 이겨 결혼까지 했는걸.
그때가 1964년이었지. 술고래에다 전과가 엄청나게 많은 놈이었어. 물론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 빵에서 나오더니 이제 정말 개과천선하겠다고 온갖 수작을 다 떠는 거야. 깜빡 넘어갔지. 뭐, 지 버릇 개주나. 변하긴 뭘 변해. 일하러 나갈 생각을 하나, 툭 하면 주먹질하고 사고나 치면서, 사방에다 나랑 결혼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다니네. 그리고는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나더러 거길 가야 한대. 시청의 혼인신고 담당자한테 가야 한다고, 지 엄마 하고 누이를 증인석에 앉혀 놓고 나랑 함께 가야 한다는 거야. 싫다 그랬더니 벌건 대낮에 나를 한길로 끌어내서는 냅다 갈기는 거야. 그렇게 이틀을 맞고 나니까 아무 생각도 없고 그냥 끔찍해서 시청으로 따라갔어. 여기저기 얻어터지고 멍든 얼굴을 하고 말야.
결혼이랍시고 하고서 생지옥을 살아야 했어. 몸에서 시퍼런 멍이 가신 날이 드물었지. 늑골이 부러져서 몇 달을 누워 있기도 했다니까. 도저히 더 이상은 못 참겠는 거야. 그래서 이혼 얘기를 꺼냈더니, 나를 아예 목을 졸라 죽이려 그래. 마음을 굳게 먹고 다음날 경찰에 갔지. 그런데 아직 목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는데도 이놈들이 뭐라는 줄 알아? 어저께 바로 쫓아왔어야 한대. 너무 늦게 와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거야.
천만다행으로 그놈은 다른 일로 붙들려 갔어. 그리고 몇 년 동안 빵에 살았지. 그래서 1967년 이혼이 된 거야. 그런데 1972년 그놈이 또 나타나, 아침 여덟 시 우리 집에 나타나 문을 부수고 들어왔어. 나는 겁이 나서 잠옷 바람으로 달아났거든. 마당으로 뛰쳐나왔는데, 뒤에서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리고는 신발을 신은 채 그냥 내 아랫도리를 밟아대는 거야. 그리고는 자기가 빵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안 넣어줬다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협박을 해 나를 죽여 버린다는 거야.“
코르넬리아는 당시 만났던 경찰이 아직 카이트슈트라쎄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으니 가서 물어 보면 자기 말이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그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지난 25년 동안 함께 살았던 남자들한테, 나는 결국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사고 치면 변호사 비용에 재판 비용까지 다 댔던 거야. 그러다가 갈라설 생각만 하면 똑같은 장면이 벌어져. 욕은 욕대로 먹고, 매는 매대로 맞고 말야. 그런 걸 알면서도 그놈들한테 그렇게 해준 나를 생각하면, 내가 미친년이고 원통 복통이지.”
이런 남자들하고 함께 사는 동안, 살림은 어떻게 꾸려갔는지 물어보았다.
“직장 일을 잘 하는 여자도 있고, 집안일을 잘 하는 여자도 있고, 결혼생활을 잘 하는 여자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다 한계가 있는 거 아냐? 우리 일도 마찬가지야. 장보러 가야하고, 음식 장만해야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밤이면 또 돈벌러 가야 하잖아. 그러고 집에 오면 또 서방한테 그 짓을 해줘야 하지... 그러니까 나더라 열을 안내는 여자라고, 도대체 성욕이 없는 것 같다고 하는 사내들이 있는데 말야, 아니 어디 그런 정열을 발휘할 시간이 있어.
나도 여자란 말야. 남자랑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라도 하고 서로 쓰다듬기라도 하고, 눈이라도 마주쳐야 무슨 정열이 나든 정염이 일든 그럴 거 아냐. 속된 말로 이건 무슨 소뼈다귀 보고 달려드는 개새끼 모양 덮치는 놈들한테 뭔 성욕이 일겠어. 그냥 구역질밖에 안 난단말야. 나도 인간이란 말야.
사내놈들은 대개가 둔하잖아. 나는 또 엄청 예민하거든. 그러니까 누구랑 잠자리만 하면 빨리 이게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어... 옆에 남자만 하나 있어 봐. 빨랫감 늘지, 밥해 먹여야지, 또 돈벌러 나가야지. 그래, 내가 미친년이야.
나 찾아오는 놈들한테 그런 소리 많이 한다구, 지들 고민이랍시고 털어놓는 게 어찌나 쪼잔한지 말야. 집에 있는 마누라가 싫다 그런대. 지들이랑 안 자려 한다구 툴툴대는 거야. 그럼 내 그러지, 내가 니들 마누라여도 이런 식으로 달려들면 싫다 그러겠다. 아프기만 하지 이게 뭐냐구 말야. 나 같아두 내 몸에 손도 못 대게 할거라구, 여기서야 내가 돈 받고 하는 거니까 그냥 참지, 마누라가 그걸 왜 하겠냐구.
그런데 이 밥통들은 집에서 마누라가 하는 말이 그렇게 이상한 모양이라, 허리가 아파 못 하겠다 그러구, 오늘은 이 핑계 내일은 저 핑계대는 게 그렇게도 이상한 모양이야...
여자들은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몸을 대줘야 하는 줄만 알잖아. 돈을 치르면 함께 얘기라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들 하지. 날씨 얘기든 선거 얘기든, 들어 줘야 하잖아. 그렇지만 서둘러서 일부터 벌이자면 그건 딱 잘라 싫다 그래야 돼. 이건 정말 중요해. 어떻게 맨날 그러고만 살아? 우리 쪽에서 주장을 해아 한다니까. 언제라도 하자는 대로 몸을 대주면, 이거 정말 안 되는 거야. 항상 그래 왔으니까 언제나 이 꼴인 거야. 그러니까 결국 술에 절어 일하러 가구. 그렇게 인생이 망가지잖아.
가정주부들도 아마 별로 다른 신세가 아닐 거라구. 그래 봤댔자 남편한테 헛된 환상만 키워주는 걸 모른단 말야. 착한 여자 시늉만 계속 해봐. 남자들 버릇 못 고친단 말야. 사실 우리보다 더 하겠지. 혼인신고까지 하고 사는 사람이니, 더 잘하려고 할 거 아냐?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로 돌아와도 돈벌어 오는 남편이니까 어떡하겠어. 양말 벗겨 빨아야지. 해장국 끓여 대령해야지. 그렇게 해서 내보내면 또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와서 술 취한 황소마냥 힘 자랑 하며 달려들잖아. 우리랑 똑같은 거야. 우리 같은 년들이야 수틀리면 싫다고나 할 수 있지. 니 돈 갖고 꺼져라 임마! 이렇게 악 쓰고 내쫓으면 그만이지만 지들 남편한테는 그러기가 더 힘들잖아.
그리고 이거 참 더러운 얘긴데, 왜 그렇게 돈 몇 푼 갖고 유세들을 떠는지 말야. 그거 몇 푼 아껴보겠다고 치사하게 구는 놈들은 그냥! 그럼 내 그러지, 마누라한테두 월급 한 푼 안 주고 부려먹냐구. 월말이 지나도 땡전 한 푼 안 내놓고 술만 처먹고 들어가서 마누라한테 같이 자자고 하면 뭐라 그러더냐구. 돈부터 내놓으라는 소리 안 하더냐구. 무료봉사 하려구 시집 온 줄 아냐는 소리 안 하더냐구. 내가 막 그러지. 그렇게는 안 될 거라구. 어떤 야자가 그렇게 아무 대가도 없이 봉사만 하겠냐구.
그래! 여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기서 영업하면서 무료로 봉사한다면 그게 어디 우리가 창녀냐. 우리가 너희들 돈 몇 푼 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창녀 소리 들어가면서 사는 거 아니냐. 집에서는 뭐 다른 거 있냐? 니들 집에다 재때에 돈 안 갖다주면 어디 니들 맘대루 마누라는 만질 수 있냐?
결혼이 다 그런 거지 뭐 별거냐 말이지! 며칠 전에는 공무원인데 아주 좋은 남자야. 내 단골인데 오랜만에 들렀더라구. 그러더니 자기 집에 함께 가자고 그래. 자기 마누라가 다른 여자 좀 집에 데려오라 그런다나. 내가 뭐 하는 여자라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고 그냥 같은 회사 식당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된대. 그래서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지. 그런데 이 남자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 마누라가 내 귀에 대고 잽싸게 속삭이는 거야. 다 알고 있으니 어색해 하지 말래. 자기는 정말 괜찮다는 거야. 남자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지 않냐면서, 이렇게 나를 여기 데려오고 싶어하더라는 거야...“
코레넬리아는 이제 만으로 쉰셋이지만, 일정한 수입이 있는 남자랑 살았던 적이 없으므로 노후연금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 동안 마련한 게 있다면 스페인에 있는 오두막인데, 아직도 할부금을 얼마 더 부어야 한다. 기회가 닿는 대로 그곳에 가서 솜씨를 발휘하면서 그녀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진흙이랑 나무뿌리 같은 걸로 집안에 장식을 만들기도 하고, 구닥다리 모아서 가루도 만들고, 그래도 심심하면 글쓰는 연습도 하지, 말 그대로 워낙 조그만 오두막이니까 남의 손 빌릴 필요도 없어. 마당도 내가 가꿔놓았고, 벽에 회칠하고 도배하는 것도 나 혼자 다 했어. 젊었을 때는 댄서가 되고 싶었는데 말야. 정말이라구, 무대 위에 올라가서 백댄서로 일해 본 적도 몇 번 있다니까...”
최근에 함께 살았던 남자로 인한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아문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을 다져먹느라 애쓰는 모습이지만, 그녀는 역시 살아갈 날들에 대해 무척이나 암담하고 불안한 심정을 떨쳐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견뎌야 할 가난과 고독에 대한 불안, 그녀의 얼굴에 드러워진 수심의 그림자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서 복권을 사는 거라구. 당첨만 되면 내 오두막 옆의 농가를 사 버릴 거야. 갈 대 없는 개와 고양이, 그리고 고아들을 불러 모아 함께 살 거야. 담장을 두르고 입간판을 하나 크게 세워야지. ‘인간 출입금지’라고 말야!”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삶은 우리가 보통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의 삶과 별로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더욱 기가 막힌 점은, 매춘으로 생활을 하며 남자들로부터 혹독한 착취를 겪고 난 이후 피할 수 없는 최종 단계가 그녀에게는 결혼이었다는 사실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란 결국 제 몸을 팔아 생활하는 매춘을 피할 수 없고, 이를 거역하는 여성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이 가해진다. 그런데 코르넬리아의 경우 그 폭력은 실제 매춘을 벌이는 현장이 아니라 소위 가정이라는 현장에서 더욱 지독해진다. 어떤 ‘손님’도 그녀를 남편이나 남자친구만큼 악랄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매춘여성이라는 사회적인 약점 때문에 그녀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더 속수무책으로 착취당하고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규범에 더욱 순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남자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청소를 하며, 성적 감흥이 없어도 함께 잠자리를 한 후 그들을 위해 또 돈벌러 나간다.
그에 비해 남자의 손길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을 찾으려는 정신과 의사의 해석은 참으로 감탄스럽다. 코르넬리아가 겪어온 혹독한 삶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종합하기보다는 우연히 벌어진 불행한 사건 하나로 사건의 전말을 오역하는 그의 관점은 정말 피상적이고 어처구니가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 여자들이 모두 그 사건 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면, 세상 여자는 모두 창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매춘여성의 상당한 비율이 고아원 출신인 점을 감안한다면, 코르넬리아의 인생은 그녀가 성장한 배경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매춘은 일부일처제라는 사회제도의 다른 면이지만, 여성을 성적인 상품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식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들은 돈으로 여자의 몸을 사고 팔 수 있다는 비뚤어진 발상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이 불상한 영혼들은 돈을 내고 저희들 살을 비벼대면서, 그게 곧 성관계를 맺는 일로 생각할 만큼 망가진 존재들이다... 이렇게 암혹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든 여성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의 무능과 무력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 ‘아주 작은 차이’ 중에서, 알리스 슈바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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