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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언어, 그리고 듣는다는 것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임재성 지음 / 그린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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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2P'라는 이름의 미사일이 리비아 트리폴리로 날아가고 있다.
‘국민보호의 의무(Responsibility to protect)’라는 이 신개념의 전쟁명분은 “자국 국민을 집단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륜적 범죄로부터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해 국제사회가 집단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럼 미사일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폭격은 리비아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일방적인 군사적 우세 속에 진압당하고 있는 리비아 시민군과 리비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평화를 평화롭게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있나?
평화는 까다롭고 복잡하고 예민한, 참 어려운 문제다. 

2.
평화라는 단어를 언제 처음 듣고 입 밖으로 내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으면 여덟, 아홉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갔던 어느 교회 부흥회였으리라. 박수를 치며 불렀던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우리에게’가 아니라 ‘내게’인가, 그리고 과연 강은 평화로운가?
사람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평화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상태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그 내면의 어떤 상태인 듯하다. 그런 평화는 종교적 구원이나 명상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어떤 경지다. 물론 내면의 갈등이 평화의 경지로까지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삼각관계에서, 성장배경이 다르고 입장과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의 평화일 것이다.
평화는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우며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고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굽이굽이를 돌아가는 길인지 모른다, 강물처럼. 

3.
병역거부자들은 전쟁에 (그리고 전쟁연습과 훈련에) 참여하는 대신 평화를 이야기한다. 검사와 판사와 기자들,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들에게 “왜 군대에 가지 않느냐?” “다 거부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 “네 집에 강도가 들어와도 평화롭게 당할 거냐?”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 병역거부자들의 답변들은 이런 질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는 (산업기능요원, 소방청, 교도대 등 이미 수많은 종류의 대체복무가 실시되고 있음에도)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이 약속되었다가 이 정부 들어서 물거품이 되었다. 오히려 해병대 지원자가 늘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뉴스 앵커가 주말마다 병영체험을 하는 영상이 TV에 방영된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속에서 ‘국가를 위해 죽어간 숭고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넘실댔던 한국사회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했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4.
이 책의 필자는 ‘평화학’이라는 생소한 학문(혹은 연구방법)으로 병역거부자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했던 운동가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분석한다. 그들이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인지, 차마 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으며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은 무엇인지에 주목한다.
그 가운데 필자는 “대체복무제의 정당성이나 ‘부작용’ 없는 외국 대체복무 운용 사례가 아니라, 양심의 자유가 포괄하는 범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국제 인권규범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젊은이들이 어떤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거부하며 부모 속을 찢어 놓으면서까지 감옥에 갔는지 (...) 이들은 손가락질당해야 할 파렴치한도, 불쌍한 피해자도, 강철 같은 신념의 소유자도 아닌 우리 시대의 평범한, 하지만 폭력에 민감했던 사람들이었음”을 드러내며 공감을 시도해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5.
평화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 또는 존재와 욕망에 공감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왠지 아쉽다. 이는 요즘 특히 유행하는 ‘공감’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너나없이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들 하지만 권력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말길이 트이길 기대할 수 없듯이 공감이 한 개인의 성찰과 깨달음을 넘어 어떤 사회적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는 그저 막막할 따름 아닌가. 우리의 공감대를 넓히고 그 깊이를 더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6.
“병역거부자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평화의 언어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침묵은 복종을 뜻할 때도 있지만 때론 저항의 언어가 될 때도 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사파티스타의 말처럼 언어에는 분명 평화를 이끌어올 힘이 있지만 반대로 평화를 깨는 도구가 될 때도 많다. 그렇다면 평화학은 “잘 듣기”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참 많고 달변이 되는 법, 글 잘 쓰는 법을 다룬 책은 넘쳐난다. 그러나 어떻게 들을 것인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세상이다. 매장된 350여만 마리의 가축들과 일본 쓰나미 피해자들, 아랍 혁명에 나선 민중들의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 빈곤하고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가.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들 너머의 진심을 듣는 일, 행간을 읽고 공감하고 더 나은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일이 평화학이라면 이 책은 좋은 출발점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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