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즐거움에 따라 텍스트를 평가하기로 한다면, 이 책은 좋고 저 책은 나쁘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수상자 목록도 <비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평은 항상 전략적인 목적, 사회적인 효용성, 또 대개는 상상적인 포장만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가 이것은 지나치고 저것은 충분치 않다는 식의, 그런 규범적인 술어의 유희에 가담할 만큼 완벽해질 수 있다고는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텍스트(이것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는 내게 있어 전혀 형용사적인 것이 아닌 바로 이거야! 혹은 내게는 바로 이거야! 라는 판단만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게는>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것도 실존적인 것도 아닌 니체적인 것이다(...[결국 그것은 항상 똑같은 질문이다. 이 내게는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
텍스트의 활기는(그것 없이는 요컨대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을), 그 즐김에의 의지일 것이다.
텍스트가 요구를 초과하고, 옹알이를 극복하며, 이데올로기와 상상계가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언어의 문들인 형용사들의 사슬을 쳐부수고 넘쳐흐르는 바로 거기에서.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활기' 중(볼딕은 저자)
누구나 뭔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그렇게 말한다. 내게는 이라고.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S.D에게 헌정하며,
.... 나는 여하튼 잃고 있지 않은 내 자신의 핵 - 언어로 다루어질 수 없고, 꿈과 교환될 수 없고,
그리고 시간과, 환희와, 불행에 범접당하지 않은 가슴 깊은 곳 - 을 그녀에게 바친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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