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from 우울 2003/10/23 18:56
겨울이다.
개토는 여느 계절와는 다른 잠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겨울을 맞이한다.
겨울이 온 것이다.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야하는데, 개토는 겨울잠을 자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겨울에는 늘 반쯤 잠든 상태로 해야할 일들을 해야한다.

잠과 생활이 공존하는 개토, 너무나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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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3 18:56 2003/10/23 18:56

우리나라 만세

from 2003/10/10 13:43
한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리고 작고 힘없고 그래도 어른처럼 대접받고 싶어하는 평범한 아이다.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게다가 가족이 함께 사는 집도 있다.
그리고 옆집도 있다.
아이는 또래 친구인 옆집 아이와 친하고 싶었다.
집도 가깝고, 얼굴만 봐도 괜스레 친근감도 느껴지고 그랬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는 옆집 이야기만 꺼내도 아이를 마구 패대기 친다.
따귀도 때리고 밟고 심할때는 목도 졸라서 아이는 몇번을 까무라쳤다.
옆집 아저씨는 '개새끼'고 아줌마는 '미친년'이란다.
옆집 아저씨는 옆집 아이를 맨날 굶긴단다.
옆집 아이는 그런 부모밑에서 자라서 미친개같은 새끼란다.
곁에 가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고 모른척 하란다. 아예 죽도록 미워하란다.

지난 가을에는 아이네 집 뜰에 있는 감나무가 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더랬다.
담밖으로 튀어나간 감을 누군가 따려다가 감나무 가지를 크게 꺾어놓은 것을 본
아이의 아버지는 옆집 아이가 얼마나 악마적인 성격의 소유자인지
아이와 아이의 집안에 얼마나 적대적인 존재이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얼마나 극악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의 귀가 멍해지도록 며칠 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아이가 무서웠던 것은,
아버지가, 옆집 아이의 그 악날한 소행과 자신을 연루시키는 것이었다.
툭하면 때리고 소리지르는 아버지가 지겨워서 어쩌다 대들라치면
아버지는 아이가 옆집 아이와 만나서 나쁜 것만 배운 것이 틀림없다고
옆집 아이가 무슨 짓을 시켰냐고 다그치고 괴롭히고
결국은 매질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가끔 옆집 아저씨를 만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술도 얻어먹고 오고 그런 날은 옆집 아이에게 과자도 한개씩 사주는 것 같았다.

동네에는 아이보다 훨씬 크고 힘도 센 아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힘센 아이의 아버지가 돈도 많고 교육도 많이 받았으니
힘센 아이하고만 놀라고 했다.

아이는 힘센 아이가 잘난 척 하는 것도 보기 싫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것도 싫었다.

아이도 어른이 된다.
어른에게 아이가 생기고 동네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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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0 13:43 2003/10/10 13:43

집으로

from 영화에 대해 2003/08/26 03:50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에게 바칩니다'

마지막 문구를 읽으면서 '딸꾹 딸꾹'거려가면서, 그 후로도 한참을 꺽꺽 울었다.

참 오래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벼르던 영화였는데,
꽤 오래 비디오로 출시가 안되었더랬다.
최근에 기회가 되어 보는 내내 내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워낙에 내가 영화를 볼때만 잘 울기는 하지만,
최근 본 영화가운데 가장 눈물나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녀의 이전 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은 상당히 못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집으로'는 어느 정도 잘 만든 영화였다.
그녀는 시골 깡촌에 사시는 할머니와 서울 아이가 만나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담담하면서도 매우 긴장감있게 펼쳐낸다.
별 대단한 이야기도 없건만 영화가 지루하지 않다.
구구절절 설명은 모조리 빼버리고
자잘한 사건들(사건이라기 보다는 이미지에 가까운)만 얼기설기 엮어놓았는데
그게 참 탄탄하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간다.
할머니의 연기는 내가 본 그 어떤 배우의 연기보다 훌륭했다.
할머니는 연기를 하고 있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실컷 울기는 했는데, 감독이 말하려는게 뭔가 싶다.
생각해 보면 사실 별거 없다.
그런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나는 왜 그렇게 울었나 되물어본다.
첫째는 할머니가 사무치도록 고독해보여서 였다.
할머니는 정말 그렇게 고독했을까? 사실은 잘 모르겠다.
상우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마을 분들과의 단조로운 관계들 속에서
잘 지내셨겠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상우가 폭풍처럼 왔다 감으로써 할머니 맘에 흔적이 남아
삶의 의미가 늘었을 지도 모른다 싶기도 하다.

둘째는 짜장면 때문이었다.
먹을 걸로 차별하는게 세상에서 젤 슬픈 거 아마 아는 사람은 다 알거다 싶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동생만 맛난 거 주면 진짜 맘속에서 서러움이 북받쳤다.
상우가 짜장면을 먹는데, 할머니가 안 드신다.
돈이 없으셔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있었어도 안 드셨을게다.
있으면 그 돈으로 딴 거 사주셨을 게다.
그게 참 눈물났다. 왜 눈물이 났을까?
할머니 자신보다 상우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해서였을까?
그러는 할머니가 안스러워서였을까?
가난하니 마음 짠 한 일이 있다. 그게 아름다운가?
그걸 모르겠다.

셋째는 할머니가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상우가 쓴 엽서들은
할머니가 잊혀질 것임을 더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로써 훌륭하게 작동했다.
상우의 할머니에 대한 맘이 간절해서,
그 간절한 마음이 하찮은 편리에 의해 사라질 거라는 게,
할머니를 돌볼 이는 없을 거고
상우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할머니를 막연하게 그리워 하며 눈물을 지을 거라는 게
눈물을 쏟게 했다.

시골마을은 그렇게 아름다운가?
외할머니들은 모두 그렇게 헌신적인가?

참 현실적인 영화같지만 참 동화같은 영화다.
참 예쁜 것만 보았구나 싶기도 하다.

이정향 감독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잊혀진 외할머니를 그리워 하는 거 말고
어떤 손녀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외할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녀는 이 영화에 그런 대답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게 하려 애썼을 것이다.
나름대로 리얼리즘 영화인 것이다.
그대로 보여주기 리얼리즘 영화인 것이다.

굳이 명확한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작품에는 저자의 시선이 엿보이게 마련이다.
사라져가는 외할머니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석연치가 않다...
이 영화를 보고 이제 저런 헌신적 외할머니 상은 사라져야 해 라고 용기있게 외칠 자가 있을까나

마지막으로, 그녀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한없이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왜 그에 대한 감사의 말 한 마디 없는 것일까 싶었다.
우연이었는지 모르나 그다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는 길의 카메라 구도라던가 '집으로'라는 제목이라던가
메시지를 직접 던지기 보다 짧은 이미지들의 연속을 통해 보여준다던가
소재도 배우도 진짜 삶속에서 찾아낸다던가, 동네 아마추어 배우들을 쓴다던가
모든 것이 키아로스타미에게 진 빚이 아닌가?
리얼리즘에서 비판을 제외시켰기에 자신은 키아로스타미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도시 중산층 지식인이란 대체 믿기가 힘든 존재들이다.....
아무것도 모르고....무사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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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6 03:50 2003/08/26 03:50

해변의 카프카

from 책에 대해 2003/08/25 13:24
하루키는 참 남자다.
읽다보면, 정말 무사태평하구나 싶다.
나는, 경험의 뿌리 깊은 단절면에 부딪히면서 그를 보게 된다.

저 너머의 세계에서,
'고속버스 안에서 15살 소년이 20대 여인을 만난다.
그녀를 누나라고 생각한다. 갈 곳 없는 그는 그녀의 집에 가서 잔다.
그녀가 손으로 사정하게 해 준다. 마음 편히 잔다.'

고속버스를 탄 15살 소녀라면 어떨까?
속편하게 오빠라고 생각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집에 가서 잔다거나
그의 손마사지를 받고 오르가즘에 도달한다거나 그 후에 맘 편히 자는 것은
가능성 0%의 영역이다.

하루키 소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성적인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소설 속의 여성들에 대해서
이제 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의 1인칭 시점 서술 방식은 세계에 대해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굳이 상대 역의 여성이 어떤 삶을 사는가는 볼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그의 주된 관심사,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성적 매력을 가졌는가를
부각시켜줄 환상적인 그녀의 외모와 아주 간단한 이력 정도면 충분하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하루키는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일반적인 외디푸스 컴플렉스 이론을 보강하기 위해 '누나'라는 대상을 추가했지만,
엄마로부터 시작해서 어쨌든 모든 여성은 성적인 대상이며
아버지는 극복해야할 대상인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여성주의에 가장 반동적인 사상이다 싶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성적서비스를 받으면서 성장해서 아버지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 새 세계를 창조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가 자신의 극악한 면을 총정리한 대작이다.
사실, 안스럽게도 하루키는 이 대작에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세계 평화를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할 모든 고통에 대해 무지하다.
무사태평이다.

그가 주인공을 30대 중반의 중산층 남성으로 다룰 때는, 그러려니 하고
그의 환상적 이야기를 즐기기도 했지만,

15세 소년을 30대 중반 중산층 남자와 똑같이 다루면서
마치 세대를 넘나드는 대작을 쓴 듯 자만심에 빠진 하루키는 보기 싫다.
100%의 사랑과 그를 못 잊어 병약한 여자도 이제는 지겹다.

그는 주인공 카프카가 자기자신이고 '여러분' 모두란다.
그가 자신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해변의 카프카'는 그의 지난 작품 총정리 였고, 총정리 해 놓은 것을 보니 실망이다.
그의 단편들은 재미있는 것도 많았는데. 그는 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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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5 13:24 2003/08/25 13:24

돌아오다

from 우울 2003/08/14 00:00
집에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것이 말이 되나?
늘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도 같다.

아주 기~인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걸까?
조금 답답하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마치 개미같아.
끝도 없이, 저 벽 안의 어딘가에 바글바글 가득 차 있다가
한 마리씩 한 마리씩, 가끔은 떼지어서 나타나

레이드를 붙여봐도, 보이는 족족 눌러 죽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 긴 행렬이어서 가끔은 사라진 듯도 하지만
결국 끝나지 않는 거야
내가 사라지지 않는 한

타인이 아니어봐서, 그들이 어떻게 숨쉬는지,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숨쉬기가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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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4 00:00 2003/08/14 00:00

낯선 내 방

from 우울 2003/07/12 15:52
2주만에 들어와 보니, 낯선 내 방이다.
조금 딱딱한 느낌, 정돈된 느낌, 아, 어색해...

오랫만에 왔는데, 잠깐 밖에 있을 수 없다.
익숙해 지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구나...

나의 새 방,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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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12 15:52 2003/07/12 15:52

정체를 밝혀라

from 사진 2003/06/27 14:23


갈월동 숙대입구 근처에 있는 가게를 발견하였다.
굳게 닫힌 철문 위로
['비상탈출구' - 장사하실 분 상담 환영]이라는 문구와
문의전화번호까지 있는 큰 간판이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허름해 보이지만,
저 철문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 것일까?

'비상탈출구'라는 문구가 매우 심상치않다.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비교적 작은 글씨로 쓰였지만
사실은, 저 문구에 이 가게의 진실이 숨겨 있는 것은 아닐까?

가설 1.

지구 탐험의 임무를 띄고 온 외계인들이 있다.
이들 중 다수가 취업을 하지 못해 먹고 살기 힘들다.
먹어야 임무도 완수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외계인이기 때문에 취업이 더더욱 어렵다.
너무 논리적인 그들은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에 불만을 갖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일부 외계인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주식에 손을 댄다.
그리고 쫄닥 망해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어떻게 할까?
걱정하지 말고 '비상탈출구'에 와서 상담하시라.
합법적인 귀환은 아니나 '장사'할 수 있다.
여기서 '장사'란, '長死', '오랜 죽음'을 뜻한다.
사회적으로 잠시 죽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잠시라고는 해도 죽은 존재가 되어 있는 시간은
굉장히 길게 느껴지게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시적 표현이다.

슬프다...흑 주르륵...ㅠ_ㅠ
명복을 빈다.

가설 2.

철문을 여는 순간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벽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비단벽지가 발라진
5평짜리 텅 빈 방이 나타난다.
방바닥의 정 중앙에 발을 디디면
정 중앙 바로 앞에 사람 몸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에는 땅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연결되어 있다.
총 4백4십4개의 계단이 나선형으로 좁게 이어져 있다.
게단을 다 내려가면
긴 복도가 있고 그 끝에 여권심사대 비슷한 것이 있다.
긴 복도에는 다양한 행색의 두더지들이 줄을 서있다.
아스팔트로 덮여버려 대체 뚫고 나올 곳을 찾기 힘든 서울을 떠나는 것이다.
주로 당장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과 중국, 소련 등으로 간다.
돈이 많은 두더지들, 무모한 두더지들은 적당한 곳으로 아예 이주한다.
소심하거나 돈이 부족한 두더지들은 잠시라도 쉴 곳을 찾아 떠난다.

역시 불법이다.
두더지 사회에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법을 따라보자면 검역을 마치지 않은 동물이 마음대로 한국을 떠나서는 안된다.
게다가 북한으로 갈 경우 국가보안법에 딱 걸리는 것이다.
걸리면 죽음이다.
따라서 '비상탈출구'이다.
비상탈출구를 통해 '장(長)기간 이사(徙)하실 분' 상담 환영인 것이다.

역시 슬프다...ㅠ_ㅠ

그만 할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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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7 14:23 2003/06/27 14:23

지하철

from 우울 2003/06/25 16:09
비가 오고 있었다

마치 빛이 아무런 색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는 소리가 없었지만
비를 맞는 것들은 제각기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벽돌은 가로등 불빛에
붉은 색에서 주황색으로 그라데이션되어 보이고
양철 물받이는 덜그럭덜그럭 지껄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자리의 젊은 아주머니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짧은 하품을 보이고
내게 진한 고등어 냄새를 남겼더랬다.


꺽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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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5 16:09 2003/06/25 16:09

기형도

from 우울 2003/06/25 15:49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고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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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5 15:49 2003/06/25 1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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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허하구나
넌 내 이야기가 흘러다니는 공기를
더럽혀서 내보내고
내 감정을 T.V 바라보듯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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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5 15:43 2003/06/25 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