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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에 대하여

내가 요새 가장 열심히 읽는 텍스트는 정기훈이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현장의 찍사다. 그가 꼭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가 찍은 사진에 코멘트를 단다.

 

난 사실 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도 못했고 (사실 날것의 감수성이 그 체제에 갇혀버릴까봐 하지 않았고) 사진미학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지만 그의 사진과 코멘트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사실 사진이란 매체는 좀 징그럽다. 눈깜짝할 시간에 정지된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 순간을 무한재생할 수 있으며 피사체를 배려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카메라 렌즈를 총부리에 비교하기도 할까. 근데 정기훈은 그가 발딛고 있었던 그 현장에서 가져온 그 순간을 뜨거운 육성으로 재현해준다. 그의 사진을 보고 읽는 시간, 가슴이 떨리고 숨이 가빠진다.  임재범이 다시 유행시킨 '여러분'이란 노래와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졸음이 뒤섞여 깊은 감동을 주었던 그 컷은 최고였다. 그는 어떻게 그 순간을 버티고 카메라를 드는 것일까. 활동이 업이고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변태스런 노동자인 나는 그의 렌즈를 통한 노동에서 깊은 위로를 받는다.

 

카메라를 드는 그의 팔뚝에 힘이 붙도록 고기 한 판 사야 겠다. 정기훈 기자님아~보고있나? 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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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비정규식량배분자

최근 몇년간 삶은 내게 실험같은 것이었다.
선배들의 삶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면서 내 길을 더듬었고
간단없이 내면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나와 맞딱뜨렸고
내 삶을 추진시키는 힘을 점검했다.
타인들과 관계맺는 방식도 이렇게 저렇게 시험해 보았다.
그러면서 인간의 속성과 세상의 구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때
한 동안 냉소적인 감정에 지배당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에는 '왜 일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연구의 과제라고 한 범죄학자의 말이나,
우리가 해명해야 할 것은 인간이 왜 늘 악행을 저지르는가가 아니라
왜 간혹 미덕을 실천하는가이다라고 한 동물학자의 말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선과 정의에 대한 환상이 유포되고 있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김형경 <사람풍경> 중
 
 
비정규 식량배분자를 보면서 얼마전 읽은 위의 구절이 머리에 떠나질 않았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언제 식량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죽음의 공포와 맞딱뜨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의 본능을 있는 그대로 그 비참함과 치졸함, 그리고 광기까지 잘 보여주고 있는 연극이었다.
광기가 버무려진 극한 상황이 해소되고 다시 이성적인 호모싸피엔스싸피엔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연출의도가 너무 착하게 느껴져서 좀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이야기 진행은 누구 말마따나 리얼리티 쇼 그 자체다. 아마 언젠가 전쟁이 일어나
지하 벙커 같은 데서 몇 명이 어울려 지낸다면 그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모두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어디 가나 꼭 있는 해병대 출신, 기독교신자, 그리고 이혼한 사람까지...거기도 있다.
무대 정교하고 효과음 현실감있고 배우연기 말할 필요도 없이 좋고 구성도 탄탄하게 느껴진 극이었다.
 
참, 성대 쪽으로 가게 된다면 종로 8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서 서울 성곽을 함 산책해보시길
권유드린다. 서울에서 살아서 기분좋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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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중랑천 이야기

내 의도와는 다르게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부모를 잃게 되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지게 된다면
그 이유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을때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큰 상처를 받는 인간이 조건없이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조건 없는 용서란 대개 더 큰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거나 아니면 아주 가증스러운 사람(사실은 용서하지 못한)만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가장 담백한 용서는 성경이나 함무라비 법전, 고조선의 8조법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이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복수를 한 결과는 어떠한가.
선량한 얼굴을 하고 용서의 아름다움을 읊어대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복수를 통해서 자신의 한을 씻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용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마음의 평화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통해 찾아오며 복수를 꿈꾸는 동안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치밀하고 피비린내나는 복수를 꿈꾸고 직접 실행했던 중랑천의 그 소녀는 과연 마음의 평안을 제대로 얻은 것인지 말이다.
 
재미있고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복수이야기. 그 긴장감을 충분히 가져가지엔 배우들이 너무 어리고 귀여웠고 극 후반의 끔찍한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다소 급하게 처리되어 아쉽다. 근친상간에 존손살인..이런 주제들은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데 무게감있게 복수와 화해의 문제에 좀더 집중했더라면 그 소름끼치는 복수판에 더욱 공감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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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간은 인간에게 늑대

연극 포스터부터 심상치 않았다. 붉은 색 글씨와 핏방울을 연상하게 하는 무늬 그리고 자극적인 부제목.
어설프게 실험정신만 강한 그런 연극아닐까 라는 우려도 잠깐 들었다.
 
그러나 우려는 기우였다. 공간분할과 반복되는 리듬의 음악, 아무 대화없는 엑스트라마저도 연출자의 의도에 밀도 있게 부합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었다.
스포일러가 되기는 싫으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극에 몰입하시길.

다만 이야기하고 싶은 거 하나는 이 극의 독특한 화장실 배치이다. 객석 바로앞에 너무나 투명하게 지어놓은 화장실은
배우들이 들어와 슬픔과 고통을 토로하거나 은밀한 비밀을 감추려할 때 사용되는데,
배우들이 변기 위에서 엉덩이를 깔 때마다
그 한없이 투명한 공간을 꿰뚫어보며 침을 꼴깍 삼키곤 했다. 관음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관객들의 죄의식을 부추켜
늑대들의 소굴로 나마저도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음..무서운 연출자..
 
역사의 장면들에서 정작 두려운 것은 광기가 아니라, 어떤 일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받아들이고야 마는 사람들의 적응력과 그것들이 켜켜이 쌍인 일상성이다. 라는 윤한솔 연출자의 말은
세상을 예쁘고 아름답다고 받아들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현실 그대로를 들이밀며
너는 뭐 늑대 아냐 라고 묻는 듯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진에 증거로 나타난 내 얼굴을 손톱을 치켜세워 박박 지우고
몰래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을듯...섬뜩하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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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

술자리...

억지로 끌려가는 경우도 있고 내가 동뜨는 경우도 있고 즐겁게 어울려 그냥 마실 때도 있지만

술김에도 아..내가 주접을 떨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땜에 사람 땜에 늘 마시는 술이지만

술먹고 이루어지는 실수들을 쉽게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술먹고 다음날 지각하기, 옛날 애인을 비롯 사람들에게 전화하기는 정말 싫다.

 

아마 술먹고 집에 가려고 했나보다.

물론 나도 가끔 술자리에서 도망가는 사람을 필사적으로 붙들기는 하지만 이번엔 도망가려는 사람이 나다. 근데 도망가려는 넘이나 붙잡은 넘이나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넘이나 모두 술취해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몸이 솔찬히 축나 술을 줄이려 하지만 도저히 안 된다.

아직도 술없이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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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늘 보았을 강일텐데 왜 그리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는지....호도협 어디쯤에서 만난 사람

 

 

 

 

 

 

 

아침 일찍 비질을 하며 사원을 청소하던 라오스의 꼬마 몽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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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재발견

티벳 자치구의 돼지는 인상쓰고 너 뭐야..라고 묻기도 하고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을 어슬렁거리며 똥질을 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며

 

 

카메라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도 한다.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국도를 혼자 산책하는 돼지도 있었다.

누가 이들을 부위별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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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에이폰 사진을 뒤져보니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히는 사진들

주로 맨 정신에 찍었던 건 없는 듯

이번주까지 출근하기로 한 이곳에서

잠깐 사진들 돌아본다

 

 

 

첫번째 사진 이것도 술먹도 들어가 찍은 듯

찍은 기억이 안난다.

돌싱이 되어 부모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방에 커튼이 없어 눈부셔 아침에 일찍 깬다고 투덜댔더니

아부지가 방에 커튼을 달아놓으셨다. 잠깐 코끝이 찡하다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

우측 책상 책꽂이에 있는 게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있는 말지다

저거 엄마가 버린다고 난린데

혹 누구 가져갈 사람 없나


 

 

여기로 술집이다. 내가 젤 좋아하는 생맥주가 있는 독도골뱅이ㅋㅋ

 

축구하다 다리 다치고 병원에서 반기부스하고 바로 와서 기념 촬영

 

사실은 축구한 게 아니라 남들 하는 거 구경만 하다가 다친 거다.

 

 

 

참 사건도 많았구만 병원에 입원해서 몸뚱아리로서 인간에게 휴머니티란 큰 의미가 없음을

 

깨우쳤던 매우 똥줄탔던 시간들

 

 

 

사람이 마흔이 넘으면 저절로 성숙해지는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저 사람은 자기 무게감만큼 살 뿐이다. 머리가 허옇게 되서도

 

노는 건 청춘과 큰 다를 바 없기도 하다. 저렇게 놀기도 한다.

 

 

난 마른안주가 싫다.

 

특히 저 푸른색 과자가 싫다. 저 과자는 송충이를 떠올리고 송충이는 과거 충격적인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열살이나 됐을까 왜 그때 초등학교 나무에는 그리 송충이가 많았는지...

 

나무 밑을 지나면 머리에 송충이가 떨어질까바 항상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하교길에 나무에서 잡힌 100마리쯤은 되는 송충이가 한 무더기 쌓여 있는 걸 봤다.

 

거기에 수위아저씨가 불을 붙였다. 송충이들이 활활 타올랐고 시신은 재가 되어 하늘로 흩어졌다.

 

글을 쓰면서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말레이시아에서 정말 맛있는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도 화려하고 사진도 화려한 거시기머시기 음식을 시켰다.

 

그랬더니 웬간한 학교 급식만도 못한 거이 나왔다. 특히 저 국은 똠냥꿍 맛이 나는 바람에 하나도 못먹었다.

 

 

 

 

독일의 68세대라는 클라우스 메쉬카트 교수 간담회에 갔던 사진이다.

 

로맨틱한 68혁명의 추억담을 듣고 싶었으나 교수는 내내 68정신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현재 젊은

 

시대에 대해 아쉬워했다. 젊은이는 노인의 잔소리가 귀찮고 노인은 젊은이에게 섭섭한 게 많나 보다.

 

그러고 보니 울 아버지와 나도 그런 거 같다.

 

 

 

비오는 모란공원에서 비맞고 있는 이 얼굴을 보고 을매나 울었는지 모른다.

 

 몸서리쳐지는 세상...역겨운 인간들...

 

 

 

 

과로에 스트레스에 결국 눈의 망막이 고장났단다.

 

각막도 아니고 망막이 다치기도 하나보다..오른쪽 눈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수술을 앞두고

 

아픈척 해보라 했더니 낄낄대다 바로 표정잡는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활동가의 헌신과 과거

 

운동의 방식을 고집할 경우 생기는 문제를 깨우치게 한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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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가기

20여 년 전 내가 받았던 최초의 성교육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명동성당 안에 있던 계성여고에 다녔는데 2학년 땐가

성교육 한다고 강당에 애덜 모아놓고

수녀님이 이상한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낙태를 시도하는 초음파 사진 같은 거였는데

뱃 속 아기가 죽기 싫다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모습...

휴...수녀가 하는 성교육이라니...게다 28청춘들한테 들이대는 낙태비디오라니...

 

하여간 그래서 나는 임신은 여자 혼자 하는 짓이요. 낙태는 죽을 짓이요. 여자의 몸은 남편 빼고는 건드려서도 안 되는 순백한 것임을 주입받고 자란 불쌍한 청소년이었다. 이런 생각을 깨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음은 물론 나의 넘치는 실험정신 땜에 맘에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그런데 작년 건강검진 하복부 초음파 결과 혹같은 게 자궁에 있다고 추척검사를 요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떄는  아..나한테두 자궁이란 게 있구나 신선하다는 생각 잠깐 하구 잊어버렸다.

 

그러다  출국하고 외국에 오래 있을 생각을 하니 어캐 된건지 알아야 겠다 싶어서 갔다. 산부인과. 가기 전날은 무지 떨려서 잠도 안 오두만 직접 가보니 담담했다. 뭐 다들 괴물도 아니고 거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의사한테 왈왈왈 설명하고 나니 초음파로 본다..내 속을...근데 의사가 자궁도 건강하고 난소도 깨끗해서 임신하는 데 아무문제 없다고. 혹은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는데 임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위치에 있어 관찰만 하면 된다고 했다.

 

ㅋㅋ 자꾸 웃음이 나온다. 아. 나두 임신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기분이 이상했다. 불혹의 나이에 이런 얘기를 듣고 혼자 웃고 있는 꼴이라니...

 

존재조차 잊고 살았는데 여성성을 포기하고 술담배로 그리 괴롭혔는데 건강하게 버텨주었다니..참 고맙다. 아...써먹을 일이 있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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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나 자신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이 인생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한가지 요인으로 귀결됩니다.

 

여러분의 자존감(self-esteem)이 그것이죠.

 

그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떠한 역경도 여러분이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래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며, 부자가 될 거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물론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원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삶에서 성공할 것입니다. 죽음이 목전에 왔을 때,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며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러나 여러분의 자존감에 결함이 있다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여러분이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데, 여러분이 그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여러분이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데, 여러분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진정한 풍요로움의 향유를 막는데, 여러분이 스스로 그러한 좋은 것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여러분의 행복을 억누르는데, 자신감이 없는 일들을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죠.

 

자존감(self-esteem)의 정의

 

자존감이란 무엇일까요? 자존감을 충분히 갖지 못해왔다면 잘 모를 것입니다.

실제로, 거기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자존감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성되는 믿음입니다.

나는 존재 가치가 있다. 이것이 밑바닥의 핵심 토대입니다.

나는 유능하다. 다음 단계로, 삶과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다루는 여러분의 일반적인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는 풍요로움을 누릴 자격이 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자존감은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서 주변 세상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줄 거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훌륭한 배우자를 둘 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벽한 직장을 가질만합니다. 여러분은 큰 집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이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만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주변 세상으로부터 도움과 행운이 필요하지요 — 그리고 여러분 또한 여러분이 필요한 때에 그러한 도움의 손길이 올 것이라고 신뢰해야 합니다.

“ 믿음”이란 단어 덕분에 자존감이 의식적인 사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 깊게 내려갑니다. 자존감은 우리가 태어날 때 기본으로 주어지는, 타고난 존재 상태입니다. 맨 처음, 우리는 “충만한” 자존감을 가지고 삶을 시작합니다.

자 궁 속의 아기를 생각해보세요. 위의 세 가지 조건 모두를 만족시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엄마의 몸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유일한 일은 자라는 것이죠 — 단순히 세포 수의 증가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가 다양한 물리적 능력을 시험하고 실험하면서, 자궁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 겁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며, 엄마로부터 신호를 받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존재 가치가 있음을 압니다 —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말입니다. 그들의 세상 전체라 할 수 있는 자궁 내의 어떤 것도 그에 반하는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모든 시스템이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유지하도록 짜여져 동작하는 것이죠. 그들의 세포는 영양을 공급받고 생명 에너지로 진동합니다. 우리는 충만한 자존감으로 태어납니다.

자존감은 웰빙의 느낌이며, 그러한 느낌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의식적 생각으로부터 우리 몸이 계속 작동하게끔 하는 영혼의 근간인 깊은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의식으로 침투합니다.

우연히도, 위키피디아에 자존감의 정의와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가 있습니다.

 

유아기: 자존감이 길러지거나 위협받을 수 있는 시기

그 래서 우리는, 존재하고, 삶을 다루고, 발전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신뢰인, 자존감이 충만한 상태로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몸과 마음에 대한 의식적인 제어 능력 없이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사람에게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상태로 시작합니다. 마음과 몸 모두, 외부 세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급속히 자라나지만, 자족할 수 있는 상황이 되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자연스레, 이 단계에서 우리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비에 맡겨 있는 것이죠 — 이 시점에서 세상은 대개 부모나 기타 아이를 돌보는 주요 인물들로 이루어집니다.

우 리의 세상은 자궁으로 시작합니다. 거기서는 당신의 필요에 부응하고 당신을 보호하도록 모든 시스템이 맞춰져 동작하지만, 당신의 엄마가 겪는 혹은 끌어들이는 악영향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 잘 아는 것처럼, 임신 중에 흡연하는 것이 아기의 웰빙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기의 육체적 성장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정신의 근간에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완전한 양육 체계에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독소가 생긴 것이죠. 그것이 체계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제가 경험한 한 가지 예는 저의 작은동생입니다. 저는 두 명의 동생이 있는데요, 작은동생이 뱃속에 있을 때, 다른 동생이 엄마의 눈앞에서 차 사고를 겪었습니다. 다행히 동생은 무사했지만, 작은동생이 태어났을 때, 그 녀석은 자동차에 대한 예민한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차를 보거나 차 소리를 듣기만 해도 도망쳤습니다. 종국에 자라면서 그는 두려움을 극복했지만, 자동차가 위험한 물건이라는 생각은 그의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단계 1과 2의 자존감을 위협할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 번째 단계는 분명히 영향을 받았죠.

자존감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이러한 위험들에 대한 취약성은 아기나 태어나 넓은 세상에 던져지면서 급격하게 증가합니다. 보호막과 자동 영양공급이 사라졌습니다. 엄마와 느끼던 일체감, 엄마의 지속적인 심장박동 소리도 사라졌죠. 모든 종류의 외부 요인들이 아이의 정신에 더 직접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아기는 아직 어떠한 자극을 그의 능력 혹은 세상/신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주는 메시지로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모든 메시지는 근본적인, 무의식의 근저에 바로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당 신이 100퍼센트의 자존감으로 태어났다고 칩시다. 태어난 후에, 삶은 그 자존감을 좀먹기 시작하는데, 세상에는 실제로 당신이 알아야 하는 위험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순진한, 세상은 좋고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을 온전히 지켜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필요가 충족되지 못할 시에 그 영향은 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높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지만, 지속적인 무시(아기가 울 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거나)나 극적인 사건(부모가 죽거나 부모와 떨어지게 되는)은 그들의 자존감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리고 아이에게는 부모가 기본적으로 세상 전부입니다. 그들의 전 존재가 부모에 의지합니다. 처음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좀 더 물리적이고 원초적인 입력에 반응합니다 — 포옹 대 분리, 결속 대 방치 같은 것들에 말이죠. 방치를 경험한 아이는 그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가령, 저의 아버지는 다섯 아이 중 막내였는데, 가장 가까운 형제보다도 9살이나 어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엄마가 마흔 살이었을 때 태어났는데, 그 당시에는 엄마가 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습니다.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패배를 맛보는 중이었고, 저의 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지만, 매우 불안한 시기임에는 틀림없었죠. 저의 할머니가 나이가 더 많았고 손이 모자랐으므로, 제 아버지는 그의 가장 윗 형제(그보다 18살 더 많았던)의 손에 길러졌습니다. 명백히 계획되지 않았던 아기였기에, 제 아버지는 항상 그의 탄생이 실수가 아니었나 궁금해하였습니다.

슬 프게도, 이와 같은 이야기는 매우 흔합니다. 퍼센트 비유로 돌아가 보면, 당신이 100으로 시작했다고 할 때, 아주 잘해야 90퍼센트 정도로 유아기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방치되거나 무시되거나 학대받지 않았을지라도, 삶에서 고통스러운 일은 일어날 수 있으며, 우리는 낙천성 일부를 잃게 됩니다. 우리는 걱정하기 시작하고, 자존감은 떨어집니다. 3단계 자존감을 온전히 유지하기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 됩니다.

한편, 1이나 2단계 자존감에 큰 타격 없어 여러분의 유아기를 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은 80 정도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사람은 세상이 무섭고 위험한 곳일 수 있지만, 그는 온전히 존재할 가치가 충분하며 인생의 미로를 헤쳐나갈 능력이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우연히, 많은 문화와 종교 및 기타 신뢰 체계에, 어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는 내장된 행위 규범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그의 정확한 의도이기도 하죠 —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 대개는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들를 키우는게 더 쉬운데, 그래야 그들을 겁주어 순종하게 하고 종족의 규범을 지키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동기와 성숙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시험하고 구축하는 시기

유 아기를 벗어나 자기를 인식하고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는 시기가 되면, 외부 환경은 단계 2와 3의 자존감에 더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시작 단계부터 적절히 길러져 믿음이 굳건해지고 나면, 존재 가치에 대한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재앙에 가까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신호를 받게 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상위 두 단계에 많은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부상에서 실망, 배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삶의 풍파를 겪습니다. 어떠한 부정적이고 해로운 사건에서라도 회복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여전히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그러한 악영향이 내재화되지 않도록 건전한 대처 방법을 스스로 계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정말로 위험한 곳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배우죠. 이러한 경험들로 인생을 헤쳐나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자신감을 잃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법을 배웁니다.

특히, 사춘기에는 우리의 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임의적인 외부 판단에 노출됩니다. 친구들, 선생님, 시험, 성적 등이 그것이죠.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의 2와 3 자존감 모두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해하려 하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못 갖췄다고 생각해서 2, 3단계의 자존감이 모두 상실된 경우라면, 지금까지도 상당히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하였으면 단계 1의 자존감만으로 버텨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단계 2와 3의 자존감을 시험하고 상실하고 다시 구축하는 그러한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좀 더 큰 세상(친구들, 학교)의 문맥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평가하고, 갑자기 이전의 자신감이 흔들리거나 그를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와 선생님, 인생의 스승들이, 어린 친구들이 어려운 시기를 돌파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길에서 성공과 성장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습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주위에 우리가 믿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회복됩니다. 아무도 진공 속에서 자라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모두 받지만, 우리보다 앞서 간 이들로부터의 도움을 통해, 자신감을 강화하고 나쁜 일에 깊은 상처를 입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인이 되고 나면 그의 진정한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기 어렵습니다. 좋은 습관과 긍정의 기억, 자신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존감은 안으로 굳건해지고 외부 영향을 점점 덜 받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이 피해 의식에 빠진 사람들과 달리 안정되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완전히 내재화한 자존감은 외부 요인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건이건 삶 속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건 간에 말이죠. 당신 스스로 자신이 우울하고 비관적이며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흔들린다고 생각되면, 당신의 자존감은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존감은 인생의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 기서 어떻게 낮은 자존감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주는지 세세히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당신은 더욱 두려워하게 됩니다. 더 두려워할수록, 모험하기를 더욱 꺼리게 됩니다. 모험에 뛰어드는 일이 없어지면 개인의 성장은 정체되고, 자존감은 더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방면에 침투합니다: 학습(모든 성장은 리스크를 동반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의 성취, 가족과 친구, 배우자와의 관계 모두에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불신과 두려움이 얼마나 깊게 당신 정신의 기저에 깔려 흐르는가 입니다.

당신이 궁색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당신은 항상 궁색한 일을 해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3 단계 자존감은 좀 떨어졌으나, 1과 2단계는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이 유능하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부모 또한 궁색한 직업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직업이란 원래 즐길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이죠. 당신은 퇴근 후와 주말, 퇴직 후를 위해 직장을 견뎌냅니다. 그것이 인생이죠.

자 존감에 변화를 주기란 어느 경우든 쉽지 않습니다만, 이 단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큽니다. 당신은 당신이 좋은 직업 혹은 직장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믿음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밖으로 나가 자신의 일을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 그 느낌이 어떤지 물어보십시오. 당신의 뇌에 그러한 현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력하세요. 사고의 재구성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표면에서 멀지 않으므로 접근해서 고치는 것이 가능합니다. 웹을 뒤져보세요 — 이러한 단계의 재구성을 하는 방법에 관한 풍부한 충고들이 있습니다. 당신과 공명하는 것을 찾아 자신에게 적용하세요.

만약 2단계 자존감이 해를 입었다면, 당신은 당신이 좋은 직장을 가지기에 충분히 유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살, 당신은 어떠한 일에도 자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정말 싫어하는 일이지만 뼈 빠지게 일할 것입니다. 그들이 판단하고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자신이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차리게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말이죠. 감사하는 마음 대신, 당신은 두려움에서 당신의 형편없는 일에 매달립니다.

이는 더 깊은 수준의 재조건화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재능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각자는 시간을 들여 그를 찾고 계발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법을 학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비록 그것이 겁나는 과정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한 성장은 최소한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러한 모험에 뛰어들 자신감이 없습니다. 당신의 삶은 표준 미달로 가득 차 있습니다(대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설정된 외부의 임의적인 기준들이죠). 자신이 실패라고 여기는 것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과거를 가지고서, 당신이 유능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치유의 과정은 부모나 교사 혹은 스승, 성숙하고 안정적이며 그러한 교육에 능숙한 누군가와 함께할 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유능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이러한 작업을 해줍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모험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을 피하지 않도록 하여, 그들 내부에 놓여 있는 자연스러운 자존감을 유지하도록 해줍니다. 당신의 치유 과정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홀로 해야 한다면, 당신이 자신 내부의 아이를 돌본다고 생각하세요 (우연히도, 몇몇 부모들은 자식을 기르면서 실제 이러한 치유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필요로 했던 일을 하는 것이죠).

이 제, 1단계의 자존감이 손상된 경우라면, 직업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존재 가치 자체에 확신이 없으며, 이러한 의심은 인생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칩니다. 당신은 아마도 어떤 곳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본인의 능력이나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하는 것이 가능은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외부 환경을 조작하려는 시도를 이어질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에 가중치를 너무 높게 두어 완벽주의자나 일 중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체계를 속이고 범죄 활동에 가담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제대로 처우하지 않으므로, 당신은 그를 갚아주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만성적인 정신적 혹은 육체적 질병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의사들과 약이 때때로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해주기도 하지만, 항상 같은 방식으로든 다른 식으로든 재발합니다. 아마도 불안정과 혼란의 시기를 많이 겪어왔을 것입니다. 당신은 심지어 자신이 문제를 끌어들인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 떠한 경우든, 존재 가치에 대한 신뢰 회복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 어떤 다른 고차원적 욕구를 해결하기에 앞서,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말이죠. 이것은 당신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 그러나 당신의 의식 깊숙한 곳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제가 보고 겪은 몇몇 방법들에는 존재를 긍정하는 문장 만들기, 유아기 다시 살기(다시 말하지만,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동시에 이러한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와 대화하고 그들로부터 긍정을 얻기(엄마: “나는 네가 태어나서 정말 기뻤단다.”) 등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의 손상이 가지는 문제점은 당신이 자신의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따라서 고칠 방법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설사 당신이 혼란과 불안정한 관계, 만성적인 육체적/정신적 건강 문제를 겪어왔을지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존감이 빠져 있으며 그것이 문제의 근원임을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고 깊게 당신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종종 의식 깊숙이 놓인 이러한 결핍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를 궁금해하며 지내지는 않습니다. 단지 존재의 훨씬 높은 층에서 나타나는 증상들만을 보고, 그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뿐이죠. 이러한 시도는 단기적으로 먹힐 때도 있지만, 장기적인, 진정한 해법이 되지는 못합니다.

 

제 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는 매우 철저한 자기 분석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더 잘 인식할수록,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 문제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하게 좌뇌 편향적인 사람들(특히, 남성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이것은 직관적인 방법이고 당신의 느낌을 많이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들은 보통 그들의 깊은 내면 감정을 잘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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