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념

아침부터 내내 뭐에 쫓긴 듯 일을 하다가 결국 삼시세끼를 꼬박 걸르고 밤 9시 40분이 되어서 회의를 끝내고야 겨우 밥을 챙겨 먹었다. 폭주하는 업무를 어떻게 정리할 방법이 없다. 이제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겁이 덜컥 난다. 전화 한 통화 할 때마다 일이 하나씩 둘씩 늘어난다.

 

일이 생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힘들게 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이 들어오는 방식과 일을 주는 사람들의 자세다. 도대체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 어떤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일은 여기 저기서 마구 쏟아진다. 지역위, 중앙당, 의원실, 단체, 학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게다가 상당수의 사람들이 일을 주는 방식은 가끔은 기분이 나쁠 정도다. 이 사람들, 마치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일 줄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안 급한 사람이 없다. 오밤중에 전화를 해서 아침에 쓸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은 예사다. 일의 성격 상 해주지 않을 도리도 없는 그런 일들이다. 오죽하면 그 시간에 전화해서 뭘 해달라고 하겠는가.

 

제일 속이 상할 때는 며칠 밤 새서 자료 만들어 주면, 그게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알 도리가 없다. 의견까지 주고 방향까지 이야기를 해줘도 내처 꿩궈먹은 소식이다가 불현듯 그 때 그 거 좀 달라는 식이다. 한가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나마 낫겠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는 때에 그런 업무요청이 생기면 화가 날 때도 있다. 물론 혼자 삭여야 하지만.

 

그러다보니 정 반대로 분명 급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뒤로 밀리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노조업무. 사실, 내 주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으로서 지금 맡고 있는 노조 업무는 내 역할이 아니다. 소위 사무국장이라는 거, 이거 진짜 철두철미하고 꼼꼼하고 일 돌아가는 것이 머리속에 계산기나 시계처럼 박혀 있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다. 그런 일을 천지난봉꾼 노릇하던 행인이 하고 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업무가 밀리고 일에 치여 사는 꼴을 보고 있는 다른 동지들이 노조업무가 뭉기적 거리고 있는데도 되려 내 눈치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이게 사람을 무척이나 미안하게 만든다. 노조결성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설레발이치던 것이 바로 나 자신인데, 어렵사리 만들어 놓고 부득불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긴 했으나 일단 어떤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동지들에게 매우 미안한 일이다.

 

일이 힘들고 고달파도 이런 동료들 덕분에 버텨 나간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자꾸 이런 식으로 역할을 못하게 된다면, 결국 동지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게 될 뿐이다. 뭔가 조정을 해야하는데, 업무성격상 불가능할 것 같다. 이래 저래 살면서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치는 듯 싶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슨 세상을 바꾸자고 허덕거리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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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 23:53 2007/02/2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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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하루이틀된 문제도 아니고, 자꾸 반복되는거고, 행인님만 겪는 것도 아니구. 뭔가 과감한 시도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배째기? 면전에서 칼꽂기? 얼굴에 철판깔고 귓구멍은 땜질해막아버리기? ㅎㅎ)

  2. 푸후유~ 한숨만 나오는구만요... 배째! - 랄수도 없고... 그냥 뭐 알아서 하실밖에 없을 거 같은디... 오늘 어서 들었드라...? 아무튼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치라던디요?? 도망가삼!!

  3. 확 찔려오는 비올...그거 확 내가 쓸까요? 후회하고 철회하기 전에 넘겨주세요. ^ ^

  4. re/ 항상 적절한 이미지 감사~! 그나저나 이런 이미지 저도 올릴 줄 알았음 싶은데요, 지난번 쥬느가 알려줬는데, 도통 이해가 안 되니... ㅎㅎ

    리우스/ ㅎㅎ 넵. 일단 도망을 =3=3=3=3=3=3=3

    비올/ 헉... 그게 아닌데... 쓰기로 한 건 제가 그동안 못했던 것들 빚갚는 의미도 있는 거였거든요. 찔리시다뉘... ㅠㅠ
    에궁... 아무 때나 푸념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행인이었습니다. ^^;;;

  5. ㅎㅎㅎ 아무때나 푸념 늘어놓으셔도 됩니다. 빚갚는 의미라니 철회하겠습니다. 에궁 자기 검열하실까 두렵습니다. 이런 글이 있어야 행인글이 더 잼난거니까. 꼭 마구 질러서 써 주세요. 에궁에궁.

  6. 글을 읽으면서 자꾸 안습... 우째 성실한 사람만 더 힘들어지는 구조가.. 한번도 못뵌 행인님이시지만 자꾸 오버랩이 되는군요 ㅠㅠ 기운내세용.. 저희 팬들이 있잖아용 ㅋㅋ

  7. "힘들게 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이 들어오는 방식과 일을 주는 사람들의 자세다"라...흠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반성하게 만드는 글귀네여.

  8. 배째셔! 모질게...

  9. pilory/ 헙... 고백하자면 행인은 그렇게 성실한 편은 못됩니다, 네... 실망을 드려서 죄송... -.-;;; 암튼 응원해주신 덕분에 기운 엄청나게 솟아오릅니다. 감사합니다. ^^

    세르주/ 헉... 이거 점점 제가 뭔가 잘 못 글을 올린듯 해집니다. 사실 그 글귀에는 저도 반성해야할 점이 많거든요... 에효...

    말걸기/ 그게 지금 그럴 수가 없어서리... ㅠㅠ

  10. 사무국장 맡았삼? 그럼 열심히 해야지..ㅋㅋ

  11. 뭘 하나쯤 맡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사무국장이시군요. 할 일 되게 많은 직책이잖아요. 고생하세요.
    지난번 지역 분회 모임때 상근자 노조 얘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8명이 대략 반반으로 찬반이 갈라지더군요. 우리 지역위 상근자는 자신이 활동가이지 노동자는 아니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했고, 어떤분은 노조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당게에서처럼 우리도 전혀 합의점이 없이 논쟁이 끝났습니다. 분회 모임하면 서로 비슷한듯 하면서도 굉장히 달라서 재밌기도하고 곤혹스럽기도 하고 그렇답니다.^^

  12. azrael/ ㅠㅠ 행인은 정말 그거 안 되나봐요...

    무위/ 할 일 많은 직책인데 할 줄 모르는 행인이 하고 있으니 이게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군요... 무위님께서 지역위에서 많은 애를 쓰셨군요. 이런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능력의 한계를 계속 느낍니다. 흟흟...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