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21조를 돌려받자

참세상 기획시리즈 [집시법연속기획 : 헌법 21조를 지켜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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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21조를 돌려받자  
    
 
 “우리 아들 때리지 마세요!”


얼핏 보면 학교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구호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호는 ‘전의경부모모임’이라는 단체에서 “불법집회 · 폭력시위”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내건 구호다. 그런데 이 구호를 볼 때마다 갖게 되는 의문은 자식들을 그렇게 걱정하는 부모님들께서 왜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라”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징집된 자식들이 국토방위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경찰제도 또는 시위진압병력으로 거의 90%를 보직발령하는 의경제도로 인해 시위현장에 투입되는데 어째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들이 없으실까?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명쾌한 대답은 이거다. “전의경이 없으면 누가 그 불법폭력시위를 막나?” 이 간단명료한 질문은 ‘전의경부모모임’의 부모님들이 자식을 걱정하면서도 전의경제도를 없애라는 원초적인 주장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한국사회의 도덕률이다. 이 도덕률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어느 나라고 군인으로 징집된 사람들을 경찰로 가장하여 집회시위현장에 투입하는 나라가 없다는 사실은 이 위력적인 도덕률 앞에서 간간히 무시된다. 전의경이 복장만 경찰일 뿐 실제로는 군인이라는 사실은 외면된다. 그들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것은 국방부가 아니라 경찰청이기 때문이다.


연초에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발생한 집회시위로 인해 연간 12조 3천억원에 따른 국가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한다. GDP의 1.53%에 달하는 이 막대한 비용손실의 내역은 대부분 집회시위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추상적 가치들이다. 국가신인도 하락 같은 매우 추상적인 가치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정말 궁금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은 얼마일까 하는 것이다. KDI 보고서에 의하면 광화문 · 시청 주변 8차선 점거시 1회 손실비용이 776억원이라고 한다. 87년 6월 중 광화문 · 시청 주변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에서만 도처에서 도로점거 시위가 줄기차게 이어졌는데, 그렇게 따지면 불과 그 한 달 동안 집회시위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비용손실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불어날 것이다. 기억하다시피 87년 한 해 동안 남한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집회시위가 수도 없이 벌어졌다. KDI 보고서가 취한 방식대로 했다면 이 사회는 이미 87년에 망하던지 IMF를 맞았던지 결단이 났어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어찌되었는가?


그 엄청난 ‘사회적 비용손실’의 결과는 군사정권의 종식이었다. 노동자의 권익 향상이었고 사회적 민주화의 일보 전진이었다. 나라가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국가 신인도를 높일 수 있었고, 경제규모는 급속도로 커졌으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까지 배출했다. KDI 보고서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은 여기서 노출된다. 왜 그들은 ‘비용손실’만을 계산했을까? 민중들에 의한 정치적 의사표현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판과 견제와 참여의 결과로 만들어진 사회적 ‘이익’은 왜 계산에서 빼버렸을까?


2006년 9월에 경찰이 발표한 불법폭력 집회시위 근절대책을 훑어보면 매우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교통불편을 이유로 대도시 도심지역에서의 집회를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법률적 근거가 있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2조 제1항은 집회신고를 접수하는 관할경찰서장으로 하여금 “주요도시의 주요도로에서” 진행되는 집회시위에 대해 “교통소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를 금지하거나 교통질서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8조 제1항은 집회시위제한이 될 수 있는 각 도로를 별표로 정해놓았다. 그런데 이 별표에 정해진 주요도로를 살펴보면 경찰은 언제든지 서울 전역에서 집회시위를 금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예컨대, 이택순 경찰청장이 2006년 11월 23일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에 대해 금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는 지시에 따라 경찰이 “교통소통을 위하여 필요”하다면서 이를 금지시킬 때, 서울 시내 전역에서 집회시위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회시위를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하라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돌아다니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심심산골이나 어디 무인도에 들어가 니들끼리 모여 무슨 소리든 지껄이다 와라, 이게 현행 집시법의 방침이다.


이런 집시법의 방침을 그대로 지향했다가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막는다는 이유로 경찰이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경찰은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집회를 ‘허가’해 준다. 그러나 결코 그냥 ‘허가’해주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허가’를 내주더라도 심심산골에 시위대를 보낸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경차를 동원해 집회현장을 외부와 밀봉시켜버리는 ‘차벽설치’다. 차벽설치의 실상은 대중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물리력을 동원해 봉쇄해버리는 것인데도 한국의 ‘민주경찰’은 이 차벽설치를 선진 집회시위 대처법 내지는 선진형 폴리스라인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그 결과 한국 경찰이 인식하는 ‘민주’의 개념은 시민의 발언을 악마의 유혹으로 곧잘 매도해버리던 르네상스 이전의 암흑시대에서 방황하게 된다.


2006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포항 건설노조의 파업은 검찰의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지휘 아래 완전 무력화되었다. 파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이를 ‘불법파업’으로 간주하고 처음부터 노조와해작전에 돌입한 검찰은 역대 노조파괴공작에서 달성하지 못했던 혁혁한 전과를 만들어냈고, 이 성과를 자신들의 것만으로 간직하기 아까운 나머지 백서까지 만들어서 배포했다. 그 백서를 들여다보면 포스코 본사를 점거하고 있던 파업노동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강경진압에 소극적이었던 경찰을 독려하여 “건물 주변에 안전망 등 투신자살 기도에 대비한 조치를 취한 후, 헬기를 이용하여 경찰력을 옥상에 투입하고 동시에 대형 크레인을 이용하여 창문을 통하여 경찰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실현에 옮기려 했다.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검찰의 이 작전은 노동자의 파업대오를 분산시키려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대테러진압작전의 본색 그것이다. 건설일용직노동자들, 흔한 표현으로 일당치기 ‘노가다’들을 한국의 ‘인권검찰’은 테러범 내지는 국가전란을 획책하는 무장 게릴라 수준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계획이 실현에 옮겨지기 직전 건설노조의 자진해산이 이루어지게 되어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대로 이 ‘대테러진압작전’이 수행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지 알 수 없다. 아닌 말로 몇 명이 될지 모르는 ‘하중근’을 만들어냈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게 자랑스런 대한민국 ‘인권검찰’이 가지고 있는 ‘인권’의 수준이다. 검찰의 ‘인권’에 대한 인식은 아직까지도 제3공화국 내지는 제5공화국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집회와 시위가 왜 필요한 것인지를 논하는 것은 새삼스럽기도 하려니와 오히려 진부하기까지 하다. 5편까지 이어진 이 기획시리즈의 전편들을 쭉 살펴보기만 해도 이에 관한 일관된 논의들이 이어진다. 앞서의 필자들이 다 했던 말을 또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진부한 이야기를 왜 아직까지도 이 사회에서는 이다지 힘들게 주장해야만 하는 것인가? 왜 아직도 한국의 경찰과 검찰은 ‘민주’와 ‘인권’을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이나 타임머신에 태워 과거로 되돌려 보내고 있나?


현행 집시법의 한 규정에는 중요 시설물에 대해서는 100m 반경 안에서 집회시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법 제11조). 이 규정에 의한 접근제한시설물은 국회의사당, 각급법원, 헌법재판소, 대통령관저, 국회의장공관, 대법원장공관, 헌법재판소장공관, 국무총리공관, 국내주재 외국의 외교기관이나 외교사절의 숙소 등이다.


국회의사당 정문에서부터 국회의사당 본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 청와대 정문에서부터 청와대 본관까지 거리는? 둘 다 족히 100m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시위가 허용되는 거리는 바로 이 정문에서부터 100m 바깥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집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최단거리는 본관과 적어도 200m가 넘는 곳에서나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종로에 위치한 미국대사관 앞에서는 원천적으로 집회시위가 불가능하다. 집시법에 따르면 대사관이 휴무하는 공휴일에는 집회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정도면 거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장난을 하는 수준이다. 대사관 직원들 다 노는 날 누가 뭐하러 그 앞에서 집회시위를 하겠나?


이들은 민중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민중들이 모여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고 성토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찰을 동원하여 집회시위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고, 기왕에 발생한 단체행동에 대해선 테러범에 준하는 수준에서 진압을 해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언론을 동원하여 집회시위의 이유에 대해서는 왜곡을 일삼고 집회시위 중에 발생한 일부 폭력적인 상황을 마치 전체 집회시위의 양상인 것처럼 호도한다. 이 과정에서 평소에 으르렁 거리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청와대와 조선일보는 둘도 없는 혈맹이 되어 행보를 같이 한다.


집회시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이렇듯 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87년 항쟁을 통해 일구어낸 민주화 덕분에 청문회 스타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가 다시 탄핵이라는 초유의 위기를 대중들의 촛불 덕분에 넘길 수 있었던 노무현은 초지일관 불법집회 엄벌을 외치고 있다. 국회는 이 위헌 투성이의 집시법을 개폐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법적인 조항을 끼워 넣기 위해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법원은 집회시위가담자들에게 과도한 형벌을 때리고 있고, 검찰은 테러진압작전을 방불케 하는 강경진압을 요구하고 있으며, 경찰은 기동대를 동원하고 차벽을 동원해서 집회시위를 무력화시킨다. 언론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폭력시위를 엄단하라고 떠든다. 자식을 ‘사지’로 보낸 부모들은 전의경을 해체하라고 하기 보다는 시위대를 폭력집단으로 매도한다. 여기에 KDI 같은 연구집단은 아전인수격의 현실판단을 통해 이들의 논리에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주장한다. “폭력집회를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바야흐로 지난 세기 한국사회의 민주화 격동기에 떠들썩했던 ‘무탄무석 무석무탄’ 논쟁은 이렇게 21세기에 그 형태를 달리하며 부활한다.


이것이 ‘참여정부’라는 정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민주주의 사회가 집회시위를 광범위하게 보장하고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기에 이 촘촘한 전 사회적 카르텔은 너무나 견고하다. 이 무시무시한 장벽 앞에서 ‘헌법 제21조를 지켜라’라는 구호는 왜소해진다. 이미 저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이 헌법의 규정을 지키고 있다. 헌법이 위임한 집시법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헌법 제21조’를 되찾아 오는 것이다. 우리의 구호는 ‘헌법 제21조를 돌려받자’로 바뀌어야 한다. 집회시위는 우리의 권리다. 권리일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당연히 수행해야할 의무이기도 하다. 지금은 남의 것이지만 원래 우리의 것인 집회 시위의 자유, 그리고 이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21조’를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 올 때, 그 때야 비로소 이 21세기판 ‘무탄무석 무석무탄’ 논쟁은 종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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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6 16:17 2007/02/2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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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7/02/28 14:36

    행인님의 [헌법 제21조를 돌려받자] 에 관련된 글. 행인이 존경하는 분께서 행인과 비슷한 취지의 글을 당 기관지 '진보정치'에 실으셨다. 진보정당판 조선일보 '진보정치'에 이 분의 글이 올라

  1. 역시 행인님 최고 참세상 기획물 다 봐야겠어요~~

  2. 에밀리오/ 아~~ 에밀리오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넘 정신이 없어서 불질도 잘 못했더니 여러분들 근황조차 잘 모르겠더라구요. 개강인데다가 맡은 일도 있으시니 힘드시겠어요. 열심히 뛰시리라 믿습니다. 또 뵐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