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선물, 화폐, 노동, 사랑

마르셀 모스에 관한 동영상 강의를 발견하고 슬라이드 자료나 훑어볼까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다.

대안화폐 논의는 물론 빈집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글들이 꽤 밀도가 있어서 나도 다 못 봤지만, 시간날 때 읽어보시길. 

1번 동영상 강의들은, 십대 라인을 비롯해서 다 같이 쭉 봐도 좋을 듯.
특히 3번 글은 초강추. 꼭 읽어볼 것.


1. 김성례, <마샬 모스를 다시읽기 - 선물경제>

연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주최하는 수요콜로키움 경제인류학은 "사회경제를 위하여"란 타이틀로 진행되며, 2009년 봄학기 강좌이다. 서울시대안교육센터와 동시에 비디오컨퍼런스를 통해 중계된다

조한혜정, 우석훈, 최재천, 김성례, 박찬웅 씨가 세계경제, 통섭, 마샬 모스, 칼 폴라니 등에 대해서 강의하는데 볼 만할 것 같다. 공짜다.

아래는 김성례씨 강의 중에 나오는 슬라이드 중 한 장.

데리다의 free gift론 : 위조화폐

* 선물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증여
* 주는 자가 보상을 기대하거나 받는 자가 채무의식을 느끼는 순간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일 수 없다.
* 선물의 본질 : 비호혜성(받기 없는 주기, 보상 없는 소비, 부채 없는 받기, 채무 없는 수혜), 비경제적, 비사회적.
* 선물의 외재성과 초월성 : 교환의 순환질서 밖에 있는 외재성 자체가 교환의 순환과 경제를 움직임.
* 선물은 결코 현전할 수 없는 것, 출현하면서 사라지는 흔적-위조화폐-으로만 알수 있는 허명(虛名).
* Godelier의 sacred object 신성한 사물 : 복사, 대체 불가능한 가치재, 사회적 결속의 기초


2. 최문규, <불협화음의 문학과 보들레르>

위 강의에서 나오는 데리다의 <위조화폐>에 관한 얘기가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발견한 글.
원래는 보들레르의 글이라고 한다.
보들레르는 잘 모르지만, 일단 이 부분의 얘기는 재밌다.
김성례씨의 설명이나 강조점은 또 다른데, 같이 보면 좋을듯.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의 또다른 텍스트 「위조화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화자는 자신의 친구가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동에 내심 흐뭇해하면서 “상대에게 놀람을 야기시키는 데서 얻는 쾌감보다 더 큰 쾌감은 없는 법이요”라는 말을 던진다. 그러나 그 친구는 놀랍게도 거지에게 “위조화폐”를 주었다는 말을 내던지며, 이러한 친구의 언술에 대해 화자는 곧 나름대로 그 위조화폐로 인한 개연성 있는 사건(위조화폐가 발견되지 않아 거지가 부자가 될 수 있거나 혹은 위조화폐가 발각되어 거지가 감옥에 갈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놓고 여러 가지 가능한 ‘연역’과 ‘가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화자는 친구가 거지에게 놀라움 자체를 주려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자비심과 좋은 거래를 꾀하려 했다”는 것, 즉 “자비로운 인간이라는 면허장을 거저 얻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는 분개하고 만다.

우선 거지에게 위조화폐를 주었다는 친구의 언술 행위는 마찬가지로 보들레르 특유의 수법, 즉 일상의 기대를 부수는 문학적 언술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그것은 가짜 화폐였어”라는 친구의 너스레는 또 한 번의 뒤집기 가능성을 그 자체에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친구가 거지에게 위조화폐를 주었다는 것은 이미 실행된 뒤집기 행위이지만, 이러한 뒤집기 행위는 다시 한번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친구의 말은 진짜 화폐를 주고서 천연덕스럽게 내던져진 제스처일 수 있는데, 그러한 ‘추측’이 가능한 까닭은 위조화폐를 주었다면 수치심으로 인해 은폐하기 마련인 일반 사람의 태도와는 달리 그 친구는 노골적으로, 태연스럽게 그 말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즉 만일 친구가 진짜 화폐를 주었음에도 가짜 화폐를 주었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될 경우) 도덕적이고도 보편적인 차원에서 친구의 행위에 대해 그 정당성을 묻는 화자의 행위가 오히려 매우 표피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결국 위조화폐를 둘러싼 화자의 반응을 담고 있는 텍스트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문학에 대한 독자의 일반적인 반응을 미리 선취하여 그 일반적인 반응과 아이러니컬한 유희를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가지 가능성, 즉 위조화폐와 진짜 화폐의 가능성은 텍스트 내에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3. 한보희, <코뮨을 코뮤니케이팅 하는 뫼비우스의 띠>

역시 '데리다'와 '위조화폐'로 검색하다가 발견한 글인데... 보석 같은 글이다.
사랑과 노동의 관계를 풀어가는 솜씨가 놀랍다.
사실 이 포스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이 글이다.
꼭 전문을 다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 삶의 시간은 노동과 사랑으로 점철돼 있고 지배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는 그걸 망치는 것으로 점철돼있다. 이를테면 이렇다. 경제생활을 소득과 지출로 나눌 때,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임금노동자들은 노동에서 소득을 얻고 (자기애와 가족애가 포함된) 사랑 쪽에서 지출을 한다. 반면, 자본가와 기업은 사랑(을 미끼로 한 상품)을 팔아 소득을 얻고 노동을 열악하게 만듦으로써 지출을 줄인다. ...... 자본이 더 많은 잉여를 뽑아내려고 기를 쓰는 곳에서 사랑은 독버섯처럼 화려해지고 노동은 곰팡이처럼 음침해지기 마련이다.

라캉은 사랑이 ‘두 개의 결핍이 만나는 것’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주는가? 데리다는 모스의 <증여론>에 대한 비판서인 <주어진 시간 : 위조화폐>에서 “시간을 준다”는 마담 맹트농의 편지 구절을 오래 붙들고 늘어지는데, 이때 자신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의 시간)을 바친다는 뜻이다. 삶의 시간은 준다고 줄어들지 않고 주지 않는다고 소유하거나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바로 이 ‘삶의 시간’의 증여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증여라기보다 전달의 ‘몸짓’이며 교통의 ‘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며 몸을 붓으로, 시간을 물감으로 삼아 타자의 세계에 그리는 생의 무늬(紋畵)이다. 우리는 오직 그 타자의 캔버스에만 자신의 생을 남길 수 있으며, 우리 생은 타자의 사랑이 남긴 무늬를 모두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백지와 같다. ‘사랑을 준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향한 사랑의 몸짓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살아감을 통해서만 사랑을 ‘돌려받는다.’ 사랑의 수행자(agent)는 증여가 곧 수수인 사랑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뿐 사랑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도 이와 마찬가지다. 노동은 (임금의 형태든 뭐든) 계량화되어 되돌려 받는 것으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노동을 살 수 없으며 그것을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도 없다. 노동은 오직 노동과만 교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품앗이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 속에서 사랑의 계기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내어준 생의 시간의 총량, 즉 삶 자체이기 때문에 그 대가로 세계 전체를 향유하고 세계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길 기대하며, 세계 전체가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향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이 그리움 속에서 타자를 향해 가는 생의 증여/수수라면 노동은 그 사랑의 능동적 표현이자 실현이고 우리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생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화폐를 ‘보조’ 수단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비로소 코뮨을 코뮤니케이팅하는 생의 주체로 스스로를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김상환, <교환의 영점-해체론의 선물>

데리다의 '선물' 개념에 대한 논문.
좀 참고 읽으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어렵다. ㅠㅠ

선물은 대가 없는 증여이다. 받기 없는 주기, 보상 없는 소비, 부채 없는 받기, 채무 없는 수용 등이 선물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선물을 주거나 받을 때, 주는 자는 그 어떤 것도 되돌려 받지 않아야 한다. 선물은 회귀하거나 복귀하지 말아야 한다. 회귀나 복귀를 모른다는 점에서 선물은 모든 종류의 경제적 교환과 구별된다.

선물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주는 자든 받는 자든 선물을 선물로서 의식하거나 자각한다면,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다. 선물은 현상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선물은 선물이기 위해서 결코 어떤 의도나 지향성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선물이 선물이기 위해서는 주는 자에게든 받는 자에게든 선물로 현상하지 말아야 한다. 선물은 존재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선물은 선물이라 할 수 있으면 이미 선물이 아니다. 선물은 있다고 하자마자 없는 셈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