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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년 이던가, 이화여대에서 열린 인권영화제를 본적이 있었다. 지금은 인권영화제도 대중화 되었고 시내 극장등을 임대해서 열리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 몇해전까지 영화제를 중단시키거나 방해하려는 정권의 압박이 심했던 시기라서, 상영장소가 대학의 캠퍼스로 한정될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영화를 보러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절대적인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개막 및 폐회식에서 상영되었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볼리비아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의 마지막 투쟁무대였던 볼리비아 에서의 행적을 보여준다.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볼리비아로 건너가서 그곳에서의 체 게바라의 행적을 뒤쫓는다. 쿠바의 관직에서 물러난뒤 몇명의 동지들과 함께 볼리비아로 건너온 그는 현지 주민들을 게릴라로 조직해 투쟁을 시작하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무장을 갖춘 미군과 그 지원하의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곧 쫓기게 되고, 결국은 CIA 요원에게 체포되어 사살당한다. 볼리비아 다이어리는 '20 세기 가장 위대한 혁명가' 가, 굶주림과 질병등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강철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담담히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다.
그로부터 4 년뒤, 이번에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가, 무슨 무슨 영화제의 이름이 아닌 일반극장에서 당당히 상영되었고, 적은 개봉관 수에도 불구하고 롱런하면서 선전하고 있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게바라의 마지막을 기록한 영화라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게바라가 혁명의식을 가지게 된 여행의 시작을 보여주는 영화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를 본 관객들이 이루어지지 못한 혁명을 아쉬워하며 일종의 비장감을 느꼈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를 본 관객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혁명을 기대하며 희망감을 가진다.
4 년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우선 1999 년의 시애틀 투쟁은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담을 무산시키며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음을 선언했다. 2001년 7월 제노바 G8[주요 8개국] 정상회담 반대 시위는 이탈리아 정권의 매우 폭력적인 탄압이 30만 명의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체 게바라가 살해당했던 볼리비아는 2000년 물사유화 저지 투쟁을 시작으로 대중들의 투쟁이 거세게 타올라 3 년 만에 봉기를 성공시키고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투쟁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따른 반전시위와 합류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2003 년 2월 15일에는 전세계적으로 1천5백만 명이 반전행동에 나섰다. 보수 신문 '뉴욕 타임스' 는 이를 두고 '(부시에 맞서는) 또 다른 슈퍼파워' 라고 불렀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앞세운 자본주의가 전세계 민중을 상대로 '4차 세계대전' (8회 노동영화제 상영작 - 볼리바리안 혁명) 을 일으켰다면, 그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도 존재한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다. 영화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법이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피지 못한 혁명을 아쉬워 하며 게바라의 조문 정도에 머무르는것이 영화 제작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말해준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는 다시금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과 그에 따른 활력적인 사회분위기를 반영한다. '볼리비아 다이어리' 가 마지막을 이야기 했다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는 시작을 이야기 한다.
영화가 시작할때 자막에 나오는 말처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는 영웅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게바라의 영웅적 모습을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사람이라면 너무나 평범한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의 모습에 실망할수도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에서 페루까지의 그 기나긴 여행, 여행에서 마주치는 민중들의 가난하고 불합리한 모순적 삶은 에르네스토에게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는 의지를 심어준 갚진 여행이었다. 영화 마지막에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한센병 환자들과의 작별파티를 위해 천식을 무릎쓰고 강을 헤엄쳐 건너는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그 여행은 게바라에게 성공이 보장되는 의사생활 대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의식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바라와 함께 여행했던 알베르토는 아직 생존해서 쿠바에 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이제는 완전히 늙어버린 알베르토 본인이 직접 등장해서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 비행기는 페루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알베르토가 돌아가는 게바라를 전송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 나이든 알베르토가 바라보는 그 비행기에는 게바라 대신 누가 타고 있을까? 나는 우리 모두가 그 비행기에 타고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p.s : 12 월 15 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그 이후 체 게바라' 를 주제로 마포사회포럼이 있습니다.
마포사회포럼은 반전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 '다함께'가 주최합니다. 이 포럼은 사회 연대와 공익을 위한 캠페인과 주장을 소개하고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세상, 체 게바라에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일시 : 12월 15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신촌 책사랑방 ( 지하철 신촌역 6번 출구앞 )
연락처 : 017-375-5847
블로그 : blog.empas.com/wp2020
* 책사랑방은 1인당 이용료가 3천원 입니다. 참가비를 준비해 주세요 ^^;
얘기꺼리
- 체 게바라는 누구인가?
- 쿠바혁명의 성격
- 게릴라 투쟁으로 혁명을 앞당기는 것이 가능한가
- 오늘날 왜 '체 게바라'는 부상하는가
- 영화 얘기
- 기타
미디어몹 ( http://www.mediamob.co.kr/ ) 헤딩라인 무비입니다.
파업전야 : 1990 년, 한국, 장산곶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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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시절, 한편의 작은 영화가 뉴스에 오르락 거리던 때가 있었다. 뉴스화면에는 헬리콥터가 하늘을 돌며 상영을 중지하고 해산할것을 명령하고 있었고, 자욱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전경들은 곤봉을 휘두르며 '영화관객' 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한때 그 영화는 보는것도 불법이었고, 심지어 가지고 있기만해도 경찰의 수사대상이 되는 물건이었다.
대학이란곳에 들어가고난뒤, 최루탄 대신 담배연기 자욱한 동아리방에서 이 놈을 보면서 어떤 선배들은 그 말도 안되던 시절들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작은 공장에 노조를 만들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탄압하는 자들, 현실적 여건때문에 노동조합에 참여할수 없는 사람들과 자본가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배신할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독한 신파이고, 최루성 가득한 영화다. 공장 한구석을 점거하고 농성하던 노동자들이 구사대라는 이름의 용역 폭력배들에게 짓 밟히고 끌려나가는 장면까지, 그것을 어정쩡하게 지켜보던 다른 노동자들이 마침내 저마다 손에 스패너니 쇠파이프 따위를 들고 동료들을 구하러 달려나가는 장면까지, 지독하게 상투적이고 감정적이다. 영상미라고는 눈 씻고 쳐다봐도 찾을수 없고, 음향은 또 왜 그렇게 퍽퍽 튀며, 편집은 왜 그리 자주 끊기나? 영화적인 의미로만 따져보자면 결코 잘 만들었다고는 할수 없는 영화가 바로 파업전야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었다. 영상미고 나발이고 그따위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것을 보고 감정이입해서 우는 그런짓은 바보짓이다' 라는 내 관념은 작품성 부족한 독립영화 한편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것은 보고난뒤 내 가슴속에는 주인공이 치겨든 스패너같은 뭔가 묵직한것이 걸려버렸다는것이다.
장산곶매 출신의 감독들은 나중에 충무로로 진출해서 영화를 한편씩 찍었지만, 개중에 봐줄만한건 단 한편도 없다. 그나마 성공한 케이스가 장윤현인데, 여기저기서 아이디어나 훔쳐다 자기것인양 갖다바르는 그의 영화들은 '어둠의경로' 를 통해 다운로드나 받으면 모를까 돈 주고 보기는 심히 아깝다.
랜드 앤 프리덤 : 1995 년, 영국, 켄 로치.
'키노' 의 열렬 애독자였고 정성일의 극렬 지지자 임을 자처하는 나지만, 사실 그렇게 성실한 독자는 못되었다. 키노 창간호가 나오고나서 몇달뒤 입대를 해야했던 거다. 다만 복무 기간중에라도 키노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기구독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가끔씩 외박이나 휴가를 나갈때마다 집에는 아무도 보지않는 키노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입대후 1 년이 지나 정기휴가를 나왔을때, 밀려있던 키노들이 외쳤다. '랜드 앤 프리덤을 한국에서도 극장에서 상영한다!' 고 ^^;
내가 휴가를 나왔을때는 이미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없었다. 시기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이 수입했으면 동숭 시네마텍 같은곳에서나 상영했을 것이지, 대구같은 지방 도시에서 상영을 했었을지는 심각한 의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마침 비디오로는 출시가 되었던 상태고, 다행히(?) 인기 없는 품목이라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서 대여기간의 압박없이 보고 또 보고 할수 있었다.
조그맣고 어두침침한 다락방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할아버지의 유품들을 읽어내려가던 소년처럼, 나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영화속에 빠져들었다. 그 기록은 파시스트의 공격에 맞서 보통 사람들의 삶을 지켜내기위한 투쟁의 기록이며,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실현했던것에 대한 기록이다. 또한 동시에 원칙에 위배되는 입장들, 그런 입장을 주장하는자들 과의 타협이 어떻게 혁명을 망쳤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몇번을 반복해서 봤지만, 볼때마다 드는 느낌은 '무언가 남겨진 이야기가 더 있다' 라는 것이다. 그 공백은 다락방에서 할아버지의 기록을 보던 소년이 채워넣을 몫이다. 그와 같이 할아버지의 기록을 봤던 우리들과 함께.
랜드 앤 프리덤은 처음으로 인터내셔널가 를 접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나지막하게 부르다가 마지막에 거대한 합창이 되는 영화속의 인터내셔널가와 같은, 우리의 운동은 그런것이 될것이다.
메이트 원 : 1987 년, 미국, 존 세일즈.
'혼자' 영화 본적이 있는가? 비디오나 테레비젼이나 컴퓨터가 아니라, 단지 상영관에 혼자 갔을뿐 아니라 넓은 상영관에 단 혼자 앉아서 영화본적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딱 한번 그런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이 메이트 원 이다.
당시 난 대구에 살았는데, 서울과 달리 지방도시들은 시네마텍 같은곳을 찾기가 만만찮게 어려운 작업이다. 그나마 열린공간 Q 라는 200여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간간히 영화제 라는 이름을 붙여 호러물이나 이런 종류의 영화들을 상영해주곤 했었다. 사실 말이 영화제지, 포스터도 변변히 붙여져있지 않은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 영화만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메이트원을 상영하는날, 하필 그 시간에 그걸 보러 온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아저씨는 영화제 참가비 3000 원을 받아쥐고는 아무말 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영화를 틀어주었다. ^^;
메이트원은 같은 이름을 가진 20년대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은 파업이 일어난 광산에 대체인력으로 고용되는데, 사실 그의 정체는 노동운동가로서 메이트원에 민주적인 노조를 건설하려고 한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 매수된 다른 노동자들과의 갈등까지 폭 넓게 다루면서 노동자들이 건설해야할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에 사장이 고용한 갱들에 의해 조합원과 마을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에서는 '파업전야' 와 비슷한 '묵직한것' 도 걸린다.
생각해보면, 파업전야에서도 랜드 앤 프리덤 에서도 메이트원 에서도 진정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역시 그것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관객이 해내어야할 몫인가 보다.
빵과 장미 : 2000 년, 영국, 켄 로치.
마지막으로 부산 영화제 갔던것이 언제더라?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더라도 항상 빠듯한 알바일정^^ 과 적은 예산 때문에 영화를 많이 볼수 있는것도 아니었지만, 미쳐 예약을 하지않아 뜨거운 햇볕속에 한시간씩 줄서 있는것은 정말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몇년째 영화제를 제끼고 있다보니 역시 갈수 있었던쪽이 좋은 것이었다는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2000 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회 아니면 5회 영화제에서, 몇몇 단편들을 본뒤 천리안 영화동호회에서 알게된 사람들을 만나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서 다음날 아침에 흐리멍텅한 머리로 봤던 영화가 빵과 장미다. 동호회 사람들은 뭔가 따분한 ( 내 주관에서 ^^ ) 영화를 본다고 우르르 몰려가는 바람에 또 나만 남겨져서 이놈을 보게 되었다. 선택은 현명했다. 이 놈을 본뒤 숙취가 확 깨버렸으니까.
빵과 장미는 얼핏 '메이트원' 을 생각나게 한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이 담겨져있으며, 노동자들 사이의 대립이나 불신에 대한 장면들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메이트원을 좀더 밝고 경쾌한 이미지로 만든다면 빵과 장미 가 될것같다. 그래서 나는 메이트원 을 생각하면 빵과 장미가 생각나고, 빵과 장미가 생각나면 메이트원이 떠오른다. 두 영화간에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여주인공 이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국경을 넘어온 이주노동자 이며, 여성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로 그려진다. '열악한 노동' 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그녀는 가장 소외받는 노동자이며, 그 때문에 노동운동가인 남자주인공과 트러블을 빚기도 한다. 그러나 마침내,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파업투쟁에 돌입하는데 성공한다.
'빵과 장미' 역시 실제로 있었던 세탁용역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들은 행진할때 구호는 '빵 뿐만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 였다고 한다. (원문은 까먹었다) 인간다운 삶이 어떻게 빵만 가지고 이루어질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으면 얻어낼수 없는것이 이 사회다.
* 이 글은 진보네님의 [트랙 팩 03 : 노동영화제] 에 관련된 글입니다.
이번 노동영화제의 폐막작인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the take) 는 이번 노동영화제의 모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맞서서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경기악화로 인해 자본가들이 임금을 체불한채 폐쇄하고 떠나버린 버려진 공장을 노동자들이 '점거' 하고 경영진없이 노동자들의 합의와 원칙에 따라 생산을 시작하는 모습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다.
'노 로고' 의 저자이며 반세계화 운동 진영의 주요 이론가이기도 한 나오미 클라인은 신자유주의적 생산양식을 대체할 대안을 찾기위해서 캐나다의 미디어 운동가인 아비 루이스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향한다. 아르헨티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망쳐버린 대표적 국가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버려진 공장을 점거하고 생산하는 공장점거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는 원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한 나라가 오늘날의 피폐한 경제위기를 맞이한것을 두고 주류 언론에서는 '지나친 노동자투쟁과 포퓰리즘의 결과' 라며 왜곡 선전해왔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않다. 1940년대말까지 아르헨티나 경제는 육류·식료품 수출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의 농업이 되살아나고 미국의 농산품이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주된 타격을 받았다. 더불어 산업의 성장도 지지부진했다. 친노동정당 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페론주의 정당(정의당)은 경제 위기에 직면하자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하고 외국 투자자들에게 시장을 개방했지만 그 성과는 일시적이었다. 페론은 노동자들을 공격하면서 저항에 부딪혔고, 권위주의적 정책으로 대중의 미움을 받았다. 결국 위기 관리 능력 부재로 지배 계급의 불신과 불만을 받아 가다가 1955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영화속에서 전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독재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역시 페론주의자 출신으로, 89년 집권당시 국영기업들을 대부분 사기업화했을 뿐 아니라 일자리를 대폭 줄였고, 파업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IMF가 권고한 정책들인 규제 완화·민영화·노동 유연화를 적극 도입했고, 그래서 세계 지배자들로부터 '아르헨티나가 IMF의 모범생' 이라는 찬사를 받도록 만들었다.
모범생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1년 아르헨티나는 페소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페그제를 실시해 아르헨티나 경제를 국제 금융시장의 리듬에 더 종속시켰다. 파국은 1997년 동아시아 위기 때 찾아왔다. 동아시아에서 금융 공황이 발생하자 아르헨티나에 들어온 해외 자본들이 서둘러 빠져나갔다.
당시 대통령 데 라 루아는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모든 은행계좌를 동결함으로써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예금을 사실상 몰수했지만, 그런 와중에 국제투기자본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하룻밤에 몇억달러씩을 빼내갔다. 페소화가 달러화와 연동돼 있어서 아르헨티나가 입은 타격은 남미 경제에서 더욱 심각했다. 소위 경제 기적을 일구었다는 바로 그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제 기적을 하룻밤 사이에 신기루로 만들고 아르헨티나 경제를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불황에 빠뜨렸다. 여기에 물 사유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고통속으로 밀어넣었다.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다.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의 하층 중간계급 사람들이 도심으로 몰려나와 실직한 육체 노동자들과 함께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이틀 동안 경찰과 유혈낭자한 충돌이 벌어져 약 30명이 사망한끝에 결국 데 라 루아는 헬기를 타고 도망쳤다. 아르헨티나는 그 뒤로도 4주 동안 대통령이 네번이나 바뀌는 혼란끝에 두알데가 겨우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3년 2월 1일 두알데 정권이 예금 인출 제한 조치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자 아르헨티나 주요 도시들에서는 다시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생필품을 살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예금 인출 제한 조치가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결정을 반겼지만, 정부는 대법원의 결정을 무시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다 꺼져버려라', '우리 돈을 돌려 달라' 고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 절망만 있는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는 신자유주의 파산의 결정판이면서 또한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보여 주는 뚜렷한 사례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 아르헨티나 정부가 전면적인 사기업화를 추진하자 실업자들이 폭증했는데, 그러면서도 사회보장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실업 노동자들은 대량해고에 맞서 전투적 대중운동인 피케테로스 운동을 건설했다. 경제 위기 때문에 지금 실업자 수는 네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의 수준이다. 영화속에 등장한 공장점거운동 역시 실업자운동중 하나이다.
공장점거운동은 폐쇄된 공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자체적으로 생산에 돌입하는 운동이다. 브룩만 양복공장에서 일하던 몇십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시도한 이 운동은 자논 세라믹등 몇몇 모범적인 사례들을 선보이면서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민들은 '전 경영진보다 더 근면해지고 높은 품질에 가격도 낮아졌다' 며 공장점거운동에 돌입한 노동자들에 대해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점거한 공장에 대해 경찰의 공격이 임박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러 오기도 한다. 공장점거운동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맞서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공장점거운동은 한계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상황개선을 우선시하는 운동이다보니 권력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때문에 법원으로 국회로, 자신들이 공장을 운영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 하러 다녀야 한다. 당연히 법관이나 국회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그런 요구를 묵살하며, 오히려 사유재산을 침해하지 말고 공장에서 퇴거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자본가의 편이지 노동자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점거된 공장은 해당 노동자들이 합의한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데, 대부분 전 경영진을 배격하고 동일임금을 적용하지만 어떤곳은 전 경영진과 협력하며 동일하지 못한 임금을 배분하면서 운영되는곳도 있다. 이러한 한계점들은 전체사회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는 운동방식들 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 아닌가 한다.
영화의 주요한축 가운데 또다른 하나는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과 그 어머니로 대변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선거를 바라보는 민중들의 입장이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아르헨티나에 끌어들인 전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의 재출마와 페론주의당 대통령 후보인 키르츠네르, 양자에 대해서 마티 라는 이름의 노동운동가 여성은 둘다 똑같은 놈들이고 그 어떤 '구세주' 도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 많은 민중들은 그녀의 어머니처럼 페론주의에 대해서 완전히 기대를 접고 있지는 않은것처럼 보인다. 메넴은 거리를 경찰로 채워 치안과 질서를 회복하고 사유재산을 보호하겠다고 큰 소리치며 결선투표까지 진출하지만, 결국 경제상황의 악화를 견디지 못한 대중들의 분노의 목소리에 밀려 기권하게 된다.
지금 키르츠네르는 아르헨티나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 IMF와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해야 하고, 노조 관료들에게 잘 보여야 하며, 좌파들에게 어떤 상징적 제스처를 취해야 하고, 실업자들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들어주어야 한다는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한 일이라고는 '고용 창출 계획' 을 통해 실업수당을 제공하고, 이를 페론주의 조직과 피케테로 조직들이 분배하게 하는 정도의 것이 전부다. 그런 태도 덕분에 그는 지난해 선거 이후 잠시나마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좀 유약한 일부 좌파들한테서 약간의 지지를 끌어낼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개혁도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키르츠네르나 페론주의당 따위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겨서는 제대로 된 어떤 대안도 나올수 없다. 나오미 클라인은 마치 '대안찾기' 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저항하는 모습들을 의도적으로 배재하고 점거 생산 이라는 양식에 촛점을 맞춘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고 무슨 대안이 나온단 말인가? '점거하라-저항하라-생산하라' 가 아니라, '저항하라-점거하라-생산하라' 가 되어야 할것이다. 법관이나 국회에 애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노동자들 자신의 조직된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체사회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저항하고 점거하고 생산하는' 운동이 될때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대안이 될것이다.
제8회 서울 국제 노동 영화제
2004.11.16 - 2004.11.21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다른 세상이 시작되고 있다
The 8th Seoul International Labor Film Festival
Occupy ! Resist ! Produce !
Another world is started
Nov. 16. 2004. - Nov. 21. 2004.
( http://www.lnp89.org/8th/ )
주최 : 노동자뉴스제작단
후원 : 영화진흥위원회,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민주노총
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제8회 서울국제노동영화제가 11월 16일에서 2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된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 주최하고 영화진흥위원회, 민주노총,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등이 후원하는 올해 영화제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삶과 투쟁을 담아낸 26편의 국내외 영화들이 선보인다. 6일간에 걸친 영화제에서는 매일 아침 11시부터 밤 10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작품들이 각각 2회에 걸쳐 상영될 예정이며, 마지막날인 21일 늦은 6시에는 국내외 영상운동가들이 참여하는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다.
올해 영화제의 슬로건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다른 세상이 시작되고 있다>는 폐막작의 슬로건을 차용한 것으로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모든 운동이 이미 그 자체로 다른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올해 영화제의 개막작과 폐막작에서 확인되듯 다른 세상이 구체적인 현실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세상에 대한 구체적 지향을 내포하는 이 슬로건하에 올해 상영되는 최종 작품들은 영국,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아르헨티나, 베네주엘라, 미국, 캐나다, 한국 등 10개국 26편이다.
개막작으로는, 이미 작년 노동영화제에서 상영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를 통해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베네주엘라의 사회변혁을 담아낸 <볼리바리안 혁명 : 베네주엘라 민중의 삶과 투쟁>이 선정되었다. 국제 미디어 활동가의 연대체 칼 리 미디어의 일원인 마르셀로 안드라데가 연출한 이 작품은 현재 진행중인 전지구적 변혁의 과정을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제4차 세계대전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투쟁의 주요한 축인 베네주엘라 민중의 투쟁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민중 스스로의 발언을 통해서 담아낸다.
한편, 페막작은 <노 로고>의 저자이며 반세계화 운동 진영의 주요 이론가이기도 한 나오미 클라인이 아비 루이스와 함께 제작한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이다. IMF에 의해 강요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떠나버린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생산은 다른 세상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설득력있는 예고편과도 같다.
이 두 작품을 포함해서, 해외 프로그램은 다섯가지 섹션으로 구분된다. 먼저, [혁명은 진행중 : 라틴 아메리카]에는 위의 두 작품와 함께 이중의 착취에 의해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여성 노동자의 자기 주장과 투쟁을 담은 <여성전사들>, 그리고 베네주엘라 민중의 의식과 실천을 생생하게 담아낸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 베네주엘라> 가 함께 한다.
[사유화의 종말]은 자본의 세계화가 얼마나 세상을 파탄에 빠뜨리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섹션이다. <갈증 : 물은 누구의 것인가 ?>는 초국적 자본의 물 사유화와 그에 대항하는 전지구적 투쟁을 담아낸 역작이며, <식량의 미래>는 유전자 조작 식품, 생명특허, 소농 몰락 등을 초래하는 초국적 자본의 농업장악 등 세계화 시대 먹거리의 문제를 마치 백과사전처럼 담아낸 작품이다. 이번 영화제의 유일한 해외 단편물인 <미트릭스>는 기업농이 초래한 생태계의 파괴 상황을 패로디라는 형식으로 담아낸 애니메이션 작품이며, <출혈 -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료제도>는 미국과 쿠바의 의료제도를 흑인여성감독의 개인적 독백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비극적이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는 작품이다.
노동영화제의 고정 섹션인 [전세계 노동자의 투쟁과 삶]에서는 마치 <이중의 적>과 <인간의 시간>을 합쳐놓은 듯한, 해고된 스페인 정보통신기업 노동자의 거리 농성 투쟁을 다룬 <이과쥬 효과>,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출연했던 여성 활동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청소용역 노동자의 삶과 투쟁 그리고 켄 로치의 철학과 제작현장을 기록한 <켄과 로자>, 독특한 스타일로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다각도로 조망한 벨기에의 <적자생존> 등이 준비되어 있다. 아울러, 착취당하는 중국 노동자의 현실을 최초로 생생하게 기록한 <메이드 인 차이나>는 이른바 동북아 경제권의 미래에 대한 진보적 재해석을 고민하게 할 것이다.
노동영화제에서는 작년 비디오 액티비즘 섹션에 이어서 올해 [미디어, 지배의 내면화 혹은 변혁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주류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대안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두편의 작품을 준비했다. 우선 < KPFA - 주파수는 민중의 것이다 >는 현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안적 라디오 운동의 사례인 미국 KPFA의 역사를 복원해낸 작품으로 현재 공동체 라디오의 시험방송 사업이 진행중인 한국에서 주목할만한 사례이며, 대표적인 미디어 관련 정보 사이트인 미디어채널의 운영자인 대니 셰터가 연출한 < WMD : 대량사기무기 >는 이라크 침략전쟁동안 진행된 주류 미디어의 현실 왜곡을 꼼꼼하고 설득력있게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지나간 과거의 노동영화를 발굴하는 섹션인 [노동영화의 회고]에서는 50년전 베트남전에 반대해 파업한 항만노동자들을 소재로 삼은 <부두에서의 조우>를 소개한다. 30여년간 프랑스 당국에 의해 상영이 금지되었던 이 비판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극영화는 비록 거칠고 투박하지만 소박한 매력을 지닌, 노동영화의 소중한 자산이다.
국내작의 경우, 먼저 국내 신작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시대 노동자 투쟁의 전망을 고민하게 하는 작품들이 준비되어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은 <현대자동차 노동자와 세가지 문제>, <일자리에 관한 이야기> 등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신자유주의하의 고용 불안, 비정규직 확대, 근골격계 질병의 문제 등을 탐구하며, 짧은 플래시 광고인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을 통해서 단편 캠페인 비디오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이진필 감독은 <알고싶지 않은...>에서 최저임금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며, 주현숙 감독은 <계속 된다 - 미등록이주노동자 기록되다>를 통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울산노동미디어센터가 제작한 <절망의 공장 - 현대중공업 그리고 비정규직>은 박일수 열사의 분신에 뒤이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추적한 기록물이며, ‘스튜디오 아이,스크림’의 <노동자 교향곡 제9번 : 합창>은 노동자 정치 세력화에 대한 서사적 접근이다. 그리고 대구 지역의 교육단체 ‘노동자의 눈’이 보건의료노조와 함께 제작한 <기계가 아니다. 아프다고 외쳐라>는 근골격계로 고통받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한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 역시 ‘카메라를 든 노동자 워크숍’을 통해서 만들어진 옴니버스 작품 <카메라를 든 노동자>가 준비중이며, 주요한 민중 투쟁을 소개하는 의미에서, 정부의 반환경적 반생태적이고 일방적인 정책에 대해 투쟁한 부안 민중의 직접민주주의를 기록한 <2월14일 부안군민 주인되는 날>, 그리고 부안 지역 민중의 독립적인 대안영상운동을 담은 <노란 카메라>가 소개된다.
영화제 마지막날 폐막작 상영에 앞서 2시간 동안 진행될 토론회의 주제는 <변혁운동에서 영상활동가의 역할>이다. 올해의 토론회는, 개막작 연출자인 베네주엘라의 활동가 마르셀로 안드라데를 초청해서 노동자 영상패, 전문 노동영상운동 집단, 인터넷 방송 활동가, 지역 공동체 활동가 등이 함께 하며, 각각의 실천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변혁운동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과정에서 자리매김될 수 있으며 어떤 한계와 공백에 부딪쳐있고 어떤 과제와 전망을 부여하는가를 논의할 계획이다.
이렇게, 올해 영화제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변혁적 영상운동의 성과를 한데 모아 다른 세상을 향한 전략을 논의하고 논쟁하기 위한 장으로서 준비되었다. 비록 여전히 가난하고 영화제라는 형식에 내용을 채워나가기란 힘겹기만 하지만, 무장한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파괴의 속도를 늦추는 것을 넘어서 건설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한" 노동영화제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모든 분들을 초대한다.
추신 : 장소가 서울아트시네마로 결정되면서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됨에 따라 무료 관람 정책을 고수하긴 쉽지 않지만 예년과 마찬가지로 모든 영화의 관람은 무료이며, 다만 영화제의 재정적 독립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관객 여러분의 자발적인 후원을 기대하고있다.
* 해외 프로그램
1, 혁명은 진행중 : 라틴 아메리카
볼리바리안 혁명 : 베네주엘라 민중의 삶과 투쟁 (2004, 베네주엘라, 76분, 마르셀로 안드라데)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 베네주엘라 (2004, 이태리, 90분, 엘리자베스 안드레올리, 가브리엘 무지오, 막스 퓨)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2004, 캐나다, 87분, 아비 루이스 / 나오미 클라인)
여성전사들 (2004, 아르헨티나, 33분, 노동자의 눈)
2, 사유화의 종말
갈증 : 물은 누구의 것인가 ? (2004, 미국, 62분, 알란 스니토우 / 바바라 카우프만)
출혈 :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의료제도 (2004, 미국, 67분, 로나 그린)
미트릭스 (2003, 미국, 4분, 루이스 폭스)
식량의 미래 (2004, 미국, 90분, 데보라 쿤스 가르시아)
3, 전세계 노동자의 삶과 투쟁
이과쥬 효과 (2002, 스페인, 89분, 뻬레 호안 벤투라)
켄과 로자 (2000, 영국, 49분, 안리케 골드만)
적자생존 (2003, 벨기에, 86분, 빠뜨릭 쟝)
메이드 인 차이나 (2004, 미국, 61분, 데이비드 레드몬)
4, 미디어, 지배의 내면화 혹은 변혁의 무기
KPFA - 주파수는 민중의 것이다 (2002, 미국, 56분, 베로니카 셀버)
WMD : 대량사기무기 (2004, 미국, 100분, 대니 셰터)
5, 노동영화의 회고
부두에서의 조우 (1950-53, 프랑스, 75분, 폴 카피타)
* 국내 프로그램
1, 국내 신작
현대자동차 노동자와 세가지 문제 (2004, 한국, 51분, 노동자뉴스제작단)
일자리에 관한 이야기 (2004, 한국, 41분, 노동자뉴스제작단)
한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산다는 것은 (2004, 한국, 4분, 노동자뉴스제작단)
알고싶지 않은... (2004, 한국, 25분, 이진필)
계속 된다 - 미등록이주노동자 기록되다 (2004, 한국, 74분, 주현숙)
절망의 공장 - 현대중공업 그리고 비정규직 (2004, 한국, 40분, 울산노동미디어센터)
노동자 교향곡 제9번 : 합창 (2004, 한국, 29분, 스튜디오 아이,스크림)
기계가 아니다. 아프다고 외쳐라 (2004, 한국, 35분,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 교육·영상기획 노동자의눈)
2, 카메라를 든 노동자
카메라를 든 노동자 (2004, 한국, 60분, 카메라를 든 노동자 워크숍 수강생)
3, 부안 민중의 투쟁
노란 카메라 (2004, 한국, 35분, 한범승)
2월14일 부안군민 주인되는 날 (2004, 한국, 40분, 노란영상집단 214)
주의 : 이거보고 영화 보시면 재미 무쟈게 없습니다. 만약 '난 핵심결론을 알아도 영화를 볼수 있다' 거나, '짐승이 하는 영화감상 따위는 구라라는것을 입증해주마' 라는 사명감(^^) 이 없으시다면 안 보시는게 좋을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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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나는 유난히 잘 울고, 떼를 많이 부리던 아이였던거 같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얼르기위해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망태 할아범' 이라는 가공의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유년기의 나를 공포로 몰아갔던 그 '망태 할아범' 이란것은, 말안듣는 아이를 잡아서 등에 지고있는 망태기에 담아 데려가서는 잡아먹는다는 설정이었다. 물론 그런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꽤나 설득력있게 들렸던 이야기였다.
인간의 무의식중에 가장 오래 남아있는 감정은 공포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서 한 인간, 혹은 하나의 집단을 통제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 공포를 이용한 수단이 될수 있음을 말해줄수 있는것이다. 말 안듣는 아이를 어르는데 효과적인것이 어찌 망태 할아범 뿐이겠는가. 사실 그런식의 협박은 아주 오래전 '호랑이가 잡아간다' 에서 비롯된 것이며, 작게는 가정에서 부터 크게는 국가의 통치수단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온것이다.
개중에는 선의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들면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싼다' 는 격언역시 아이들로 하여금 일종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경구로 사용되는데, 사실 불장난과 이불에 소변을 지리는것과는 아무련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실수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고자 하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수있다. '식스센스' 로 유명한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신작 '빌리지' 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포를 이용한 금기사항 역시 어떻게보면 선의로 인한 거짓말이라고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들간에 큰 증오도 없고 자잘한 이해관계 때문에 다투는 일도 없는, 말 그대로 '평화로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비록 작지만 그 구성원들은 슬픈일이나 기쁜일이나 모두 함께 나누며 조화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근심거리가 있다면 단 하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에서 괴물들이 공격해오지 않을까, 하는것일 뿐이다. 이들은 그 괴물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마을 외곽에 망루를 세우고 집집마다 지하 피난처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괴물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영역, 즉 숲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마을을 공격해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살고있는 마을과 괴물들이 살고있는 숲, 그 경계선만 어기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도 없는것이다.
문제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숲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마을 사람들의 '숲속 괴물들' 에 대한 공포는 절대적이다. 마을구성원들은 누구나 숲속에 살고 있는 괴물을 무서워하며, 따라서 아무도 숲으로 들어가보려는, 그러니까 마을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실 굳이 마을을 벗어나야 할 필요도 없었다. 급하게 옆 마을에서 의약품을 구해와야할 필요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괴물들' 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생물들임이 밝혀진다. 마을을 다스리는 원로회의의 구성원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벗어날까봐 만들어둔, '공포' 를 이용한 금기사항 이었던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면, 즉 마을을 벗어나면 괴물들이 쫓아와서 죽인다는 이야기는 사실 그 마을의 원로들이 가지고있는 최대의 비밀이며 그들 권력의 핵심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를 이용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의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현재도 지배자들은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을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테러리스트들이 더 많은 민간인들을 죽일것' 이라고 협박하거나, '이라크 침략전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곤두박질 칠것이며 한반도 안보에도 악영향이 있을것' 이라고 협박하거나, '귀족 노동자들의 파업때문에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 고 하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공포감을 심어준다. 그러한 공포를 이용한 통제수단의 확립은 '빌리지' 의 그것과 전혀 다를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빌리지의 지도자들이 행하는 그 거짓말이, '선의로 인한 거짓말' 로 보일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단지 방송국의 이익을 위해 한 인간의 인생을 철저하게 짓밟았던 '트루먼 쇼' 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기존의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빌리지' 는 그들만의 이상적인 공동체였고 그러한 삶을 지키기 위해 마을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원로들의 거짓말은 선의로 인한 것이었다고 강변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마을주민들에게는 공포심을 이용한 기만적인 술책이었음은 부정할수 없다.
문제는 원로들이 택한 그 방식이,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기만은 시일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깨어지기 마련이고, 비록 영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깨어지는날 공동체의 가치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도자들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도피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로인해 자신들만의 조그마한 이상적인 마을은 만들수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그 마을에서 결코 벗어날수 없는 고립을 스스로 자초해 버린것이다. 그들이 '도피와 고립' 의 전술을 택한순간, 이미 그 공동체안의 권력과 기만적인 정책이 싹트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자들의 의도가 어떠했든, 그러한 전술은 올바른것이 될수없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과 모순에 대항해서 맞서 싸우고, 모든 인간사회에 그러한 문제점들이 해결될수 있도록 하는것만이 그들이 택할수 있었던, 또 택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분명히 말해둘 필요성을 느낀다. '빌리지' 에서 나왔던 공동체주의적 사고방식과 구별되는 그런 부분들이 바로 우리가 추구할 '사회주의' 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비록 샤말란 감독이 그 차이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고는 믿기 힘들지만 어차피 영화는 때로는 작가가 하려던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져다 주기도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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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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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락에 전적으로 동감..그것만 할 수 있어도 정말 잘하는 거겠죠.부가 정보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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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영화는 선전영화 혹은 교육영화에 속하는거죠.그런영화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영화는 스스로 존재해야 하는거 아닐까요.부가 정보
hyenac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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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 / 던져준 제목이 '세상을바꾸' 는 것이다 보니 ...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