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당 비판

대표집필자 최성원 2002 8

 

서론

 

≪청년진보당은 2001년 사회당으로 당명을 개정하면서 ≪반조선로동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것은 ≪반자본주의≫와 함께 사회당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두 가지 선언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6.25 전쟁 이후 조선반도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사회주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좌파정당을 결성하였던 사회당 지도부의 ≪엄숙한≫ 선언이다. 과장된 언사를 즐겨 쓰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회당은 ≪다른 정치세력과 사상적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사회주의≫를 묵직하게 내걸었≫으며, ≪한국 어느 정치세력도 내걸기 꺼려하는 것을 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한국사회 전체에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식민지의 좌파정당이 내놓은 ≪반조선로동당, 반자본주의 선언≫(?!).

망론인지 헛소리인지 얼핏 봐서는 잘 분간할 수 없는 괴상한 선언이 나온 뒤로 그 동안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그 선언과 관련하여 약간의 찬반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필자는 그 선언을 내놓은 사회당 지도부의 사상관점을 분석하면서 깊이 있는 반론을 제시한 글을 아직 보지 못했다. 왜 그러할까? 필자는 본격적인 반론이 나오지 않은 이유를 대략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사회당 지도부의 그 선언을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궤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운동진영의 거의 모든 활동가들은 그 선언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회당 지도부가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음으로써 친조선로동당이냐 반조선로동당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함정을 파놓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반조선로동당 선언≫에 대해 논박하면, 그 논박은 조선로동당을 옹호·찬동하는 변론이 될 것이다. 부정에 대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논리구도가 불가피하게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당 지도부가 파놓은 교묘한 논리적 함정이다. 운동진영의 많은 활동가들은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사회주의적 정치구호를 내걸은 사회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역시 사회주의자의 시각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선언≫에 관한 논쟁이 의미 있는 것으로 되려면 사회당 지도부가 진짜 사회주의자들인가 아니면 가짜 사회주의자들인가를 판별하는 논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한 본격논쟁은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이다. 그렇지만 파시스트 악법인 ≪국가보안법≫으로 인하여 사상문제가 극도로 억압당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사회주의자로서 공개적인 토론에 나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필자는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반자본주의 선언≫이 운동진영 전반에 혹시 사상적 해독을 끼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수많은 동지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심정으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반자본주의 선언≫을 논박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공개적으로는 토론하기 힘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들≫까지도 전반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는 것은 사회당 지도부가 혐오·배격하는 김일성주의의 핵심내용들에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사회당 지도부의 표현을 빌리면, ≪조선로동당의 유일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조선로동당이라는 정치세력의 수미일관한 발전에 따라 수립된, 조선로동당 운동의 역사적 완결형태≫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문제다.

김일성주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문제는 우리 민족민주운동진영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논문은 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론이다.

 

1. ≪반자본주의 선언≫은 기회주의자들의 위장선언이다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자들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파시스트적 억압체제 안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구호를 당의 기치로 내걸고 무대에 등장한 일군의 용맹스러운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당명도 거창한 사회당(Socialist Party)이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반자본주의≫라는 선언은 미 제국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반제선언이 아니다. 사회당 지도부의 ≪반자본주의 선언≫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이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아니다. 그 선언은,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보편적 반대≫를 집약한 선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회당 지도부는 왜 미국 자본주의와 세계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말하면서도, 미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미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는 ≪민족해방이라는 2차 대전 이전의 틀≫로서, ≪반미지상주의자들≫이나 저지르는 시대착오적 오류이기 때문이다.

사회당 지도부의 견해에 의하면,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모순, 그리고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식민지 민중의 반제민족해방혁명은 50년 전의 케케묵은 담론이라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제국주의 체제가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오직 ≪반미지상주의자≫들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제국주의 체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식민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반제민족해방혁명을 운운하는 세력들은 허구적 관념과의 투쟁에 몰입해 있는 시대착오적 집단이라는 비판논리가 성립된다.

사회당 지도부가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나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비롯한 전 세계의 자본주의 체제를 모두 반대한다는 의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는 수많은 나라의 자본주의 체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므로, 수많은 나라의 자본주의 체제들 가운데 유독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한다고 꼭 집어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특정한 반대는 ≪반미지상주의자≫들의 시대착오와 동일한 것으로 혼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분≫으로서의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사회당 지도부의 ≪반자본주의 선언≫이 사회주의를 배신한 현대 수정주의자들이 자기들의 배신자적 정체를 은폐하기 위하여 내걸은 위장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서술하려 한다.

 

1)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변별력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개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독점자본이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노동계급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착취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라는 의미이며, 그 체제가 일국의 범위를 초월하여 세계적 범위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체제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는, 일찍이 레닌이 ≪자본주의의 특수한 역사적 단계≫라고 표현했던 제국주의 체제다.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 안에서 독점자본은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고 있으며, 독점자본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주의가 덜 발전된 나라(이른바 저개발국가)를 자기의 예속국 또는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예속국과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독점자본과 식민지 예속자본으로부터 이중적으로 착취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독점자본이 자기 나라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체제를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라고 부르며,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그것의 외연을 제국주의 체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이며, 제국주의 체제다.

독점자본은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것보다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더 집중적으로, 더 악독하게 착취하고 있다.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서 착취한 막대한 이윤 가운데 일부를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자국의 격화되는 계급적 모순을 일정하게 이완시키고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계급적 처지가 동일한 노동계급과 민중이라고 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가해지는 착취와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가해지는 착취는 격차를 보이고 있다.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이른바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으며 상대적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반면,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식민지 예속자본의 착취가 가중된 이중적 착취를 당하면서 말 그대로 절대빈곤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는 주체는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아니라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다. 그러므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혁명운동은 제국주의 체제를 타도하려는 식민지 노동계급과 민중이 참가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 세력과 식민지 노동계급 및 민중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기본동력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부 ≪좌파≫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제국주의 체제와 식민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고 하는 협잡군의 횡설수설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라는 개념을 외면하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모호한 용어만을 선별적으로 사용하면서, 마치 제국주의 체제와 식민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주장한다든지, 또는 제국주의 체제와 식민지를 논하는 것을 ≪반미지상주의≫와 ≪민족절대주의≫로 몰아세우려는 작태는 그야말로 가소로운 짓이다.

어떤 사람들은 냉전 이후의 시기에 제국주의를 운운하는 것을 시대착오라고 주장하는 데 그것도 역시 무식한 소리다. 냉전이라는 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세계 사회주의 진영과 미 제국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세계 자본주의 진영 사이의 대결구도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와해되면서 냉전구도가 해체되었으므로, 냉전 이후에도 제국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 자본주의 진영의 대결구도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세력과 식민지 노동계급 및 민중의 대결구도도 있었다. 제국주의 세력과 식민지 노동계급 및 민중의 대결구도는 냉전구도의 붕괴와는 상관없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냉전구도가 존재했던 지난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투쟁은 세계 사회주의 진영과 식민지 노동계급 및 민중이 상호연대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지만, 오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투쟁은 전적으로 식민지 노동계급과 민중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 제국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모든 형태의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중심이 되었다.

 

2)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재편된 체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독점자본과 그 국가권력들은 그 체제의 내부모순 때문에 자기들끼리 치열한 갈등과 분쟁을 거듭하였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는 세계를 마구 분할하여 각자 자기의 식민지, 반식민지를 설치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충돌을 일삼았다. 그 시기에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수많은 식민지 쟁탈전쟁들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그러한 충돌의 폭력적 형태였다.

그런데 각축전을 벌이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정점으로 재편되었다.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정점으로 재편된 새로운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현대 제국주의 체제라고 부른다. 양차 대전 기간에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팽창하게 되자,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지휘·통제하는 압도적인 장악력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현대 제국주의 체제의 괴수로 역사의 무대에 출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이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변모하였다는 말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정점으로 재편되었다는 의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50년 이상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모순이 폭발하지 않고 봉합되면서 ≪상호협력관계≫를 표출하고 있는 원인은, 그 체제가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압도적인 장악력에 의하여 지휘·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장악력이 약화되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상호협력관계≫는 결렬되고 국가독점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과 분쟁이 재발될 것이다. 이른바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 구성되는 ≪삼극 체제≫, 또는 중국과 러시아의 시장지향적 사회주의 체제까지 포괄하는 ≪다극 체제≫로의 재편을 운운하는 따위의 정세인식은 그러한 예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본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나 유럽연합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자기들의 예속국 또는 식민지를 구축하고 있는 제국주의 체제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체제들은 미 제국주의 체제에 속해 있으면서 상대적 자율성밖에 지니지 못하는 하위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3)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실체는 미 제국주의 체제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세계적 범위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실체라면, ≪한국≫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 제국주의 체제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세계적 범위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 제국주의 체제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유럽연합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도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착취는 미 제국주의 체제의 착취와 질을 달리한다. 단지 양적인 차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에 대한 미 제국주의 체제의 착취는 정치와 군사, 사상과 문화를 비롯한 식민지 체제 전반에 대한 지배구조와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지배구조에 의해서 자행되고 확대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전면적인 착취다.

그러나 일본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유럽연합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는 조선반도 식민지 체제의 전반에 대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사실이 식민지에서 미 제국주의 체제의 착취와 다른 나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착취가 질을 달리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일부 ≪좌파≫는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다. 그들이 타도대상으로 설정한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미 제국주의 체제가 중심이 되어, 미 제국주의 체제에 의해서 형성된 착취체제가 아닌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반제민족해방혁명의 다양한 대중운동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며, 5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반미자주화운동의 특정 계기에 강조되는 투쟁구호이다.

그런데도 ≪좌파≫들은 마치 미 제국주의 체제는 존재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체제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미 제국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반미자주화투쟁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이것은 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반제민족해방혁명으로 진출하려는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의 목적·의식적 지향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미국을 반대하여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주범이 미 제국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당 지도부는 미 제국주의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반미자주화투쟁을 어처구니없게도 ≪반미지상주의≫, ≪민족절대주의≫라고 비난·모략하고 있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미 제국주의 체제의 착취와 지배를 반대하는 반미자주화투쟁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 오로지 반미자주화투쟁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사회당 지도부는 반미자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노동계급과 민중이 마치 반미자주화투쟁에만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그들이 떠들고 있는 이른바 ≪반미지상주의≫라는 궤변은 미국이라는 특정대상을 반대하는 증오심에 병적으로 사로잡힌 일종의 편집증 정신병리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미지상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주장은 궤변이라고 하기 이전에 반미자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에 대한 모독이다.

편집증 정신병리현상을 보이고 있는 중환자들은 반미자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노동계급과 민중이 아니라, ≪미국에 반대하는 것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반미지상주의≫를 반대한다는 궤변을 토해내고 있는 사회당 지도부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식민지의 자본으로부터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자본은 미 제국주의 체제에 구조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예속자본이므로,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미 제국주의 체제와 식민지 예속자본으로부터 이중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중시해야 할 것은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식민지 예속자본보다 미 제국주의 체제에 의하여 더 집중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 제국주의 체제는 식민지 예속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근원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4) 식민지 노동계급과 민중의 반미구호에 내포된 두 가지 의미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의 반미구호는 미국을 반대한다는 전투적 의미를 전달하는 투쟁구호다. 그런데 미국을 반대한다는 말은 너무 포괄적이다. 반미구호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나올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미국이라는 외세를 반대한다는 견해다. 둘째는, 조선반도의 식민지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미 제국주의 체제를 반대한다는 견해다. 전자는 민족주의운동의 견해고, 후자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견해다.

반미구호가 전달해주고 있는 포괄적인 의미만을 훑어보고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과 민족주의운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자도 반미투쟁을 전개하며, 사회주의자도 반미투쟁을 전개한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반미투쟁과 민족주의운동의 반미투쟁은 유사한 외양으로 보이지만,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양자 사이에는 세계관의 차이, 노선과 전략의 차이, 전술과 투쟁방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과 민족주의운동을 혼동하는 것은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니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민족주의운동이라고 규정해버리는 의도적인 왜곡선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운동은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지만, 그것을 자기의 전략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미 제국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것을 전략목표로 삼고 있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전개하고 있는 반미자주화투쟁은 민족주의운동의 일환이 아니라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중심내용이며,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는 세계혁명의 일환이다. 물론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에는 민족주의세력의 진보적 구성부분도 참가하게 되지만, 그들이 그 혁명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영도권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세력에게 있다.

 

5)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세계사적 보편성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여야 할 역사적 임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의적 규정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에 의하여 진행되는 사회·역사발전의 합법칙적 경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세계적인 범위에서 진행되었던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봉건체제를 타파하는 반봉건혁명이라는 점에서 부르조아혁명의 혁명대상과 동일한 혁명대상을 반대하여 투쟁한 혁명이었다. 유럽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식민지체제의 사회성격은 아직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못하고 반봉건적 성격이 지배적인 식민지반봉건사회이었으므로, 그 지역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이 반봉건의 과업을 수행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따라서 그 시기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었다.

봉건체제를 타파하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과 부르조아혁명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지난 시기의 부르조아혁명과는 다른 혁명발전경로를 밟아갔다.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자본주의 체제가 일정한 수준에서 성숙되었던 나라들에서 수행되었던 가장 발전된 단계로서의 부르조아혁명인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과 동일한 역사적 지위를 지니는 것이었다.

둘째,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자본주의가 발달된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과 달리 제국주의의 식민지체제를 타파하는 반제민족해방혁명과 결합되었다. 부르조아민주주의혁명은 반제민족해방혁명과 무관하게 진행되었지만, 반제민족해방혁명과 분리된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진전될 수 없었다.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수행되었다.

나치 독일의 지배체제를 타파하여야 했던 유럽지역의 경우에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 반파시스트혁명과 결합되었다. 그러므로 유럽지역에서는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었고, 식민지체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었다.

셋째, 인민민주주의혁명, 즉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이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모두 노동계급의 전위당을 중심으로 구축된 통일전선의 기반 위에서 수행되었다. 지난 시기 서유럽 지역의 부르조아혁명의 진행과정에서도 부르조아계급을 중심으로 일종의 계급연합전선이 구축되었지만, 부르조아계급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대중 전체를 영도할 수 없었다. 부르조아계급은 부르조아혁명이 승리한 뒤에 노동계급을 배반하고 정권을 독점함으로써 근로인민 전체를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부르조아 계급독재를 실시하였다.

이에 반하여,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노동계급이 영도한 민주주의혁명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계급과 계층이 참가한 통일전선의 기반 위에서 수행된 전인민적 혁명이었다.

인민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한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의 전위당은 그 혁명에 참가한 모든 근로인민의 정치적 대표체인 민주정권을 세우고 그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당시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밖에 없었다.

인민공화국은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한 새로운 형의 민주주의 국가로서, 그 정권의 성격은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사회주의 공화국이 사회주의 국가인데 비하여, 인민공화국은 인민민주주의 국가이다.

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적 경리, 소상품 경리, 자본주의적 경리가 병존하는 국가다. 이러한 상태를 사회계급적 측면에서 보자면, 민족자본가와 부농이 잔존한다는 의미고, 경제구조적 측면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잔존한다는 의미다.

인민공화국의 민주정권에 의하여 불완전하게 실현되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는 노동계급의 전위당의 영도에 따라 발전되어 완전하게 되었다. 또한 인민공화국에 한때 잔존하였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는 노동계급의 전위당의 영도에 따라 개조되어 사회주의화의 과정을 밟아갔고, 종국적으로 사회계급으로서의 민족자본가와 부농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일부 무식한 ≪좌파≫들은 인민민주주의혁명이 1945년 해방 이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수행되었던 ≪특수한 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포괄하는 전 세계적 범위에서 수행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혁명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가진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수행되었던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과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었다. 전자는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를 포괄하는 유럽의 동남부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예외적으로 서유럽의 아일랜드에서는 민족주의세력이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반제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끌어, 1949년에 승리하였으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차단되었다.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발달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는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못한 낙후한 농업국에서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였다. 유럽의 동남부지역의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은 노동계급의 전위당, 또는 전위조직이 주도하였으므로 혁명이 승리한 뒤에 사회주의의 길로 발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달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을 수행했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의거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데 결국 실패하였고, 전복된 반혁명세력이 제국주의자들과 공모·결탁하여 반사회주의 암해책동을 전개하였으며 나중에 가서는 폭동을 선동하였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과 달리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되지 못하고 봉건체제에 머물고 있었던 데다가 식민지, 반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던 조선, 중국, 몽골,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에서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 반제반봉건의 과업과 결합되면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수행되었다. 중남미의 낙후한 농업국이었던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영도한 반파시스트 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하여 사회주의의 길로 나갔다.

노동계급의 전위당 또는 전위조직이 혁명무력을 동원하여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였던 조선, 중국, 몽골, 베트남에서는 반제민족해방혁명이 승리한 뒤에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였고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지만, 나머지 다른 나라들에서는 노동계급의 전위당이 역량부족으로 인하여 반제민족해방혁명의 영도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그 대신 우파 민족주의세력이 혁명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반제민족해방혁명이 승리한 이후에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기는커녕 인민민주주의혁명의 발전경로가 차단되었다.

인도는 영국의 제국주의 체제에서 벗어나 1950년에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반제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세력이 압도적이었고, 파키스탄과의 분쟁에 휘말려 있었으므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은 불가능하였다. 라오스는 1953년에 반제민족해방혁명에서 승리하였고, 캄보디아는 1955년에 승리하였으나 우파 민족주의세력과의 장기적 내전과 미 제국주의 세력의 무력침공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라오스에서는 오랜 내전 끝에 1975년에 군주제가 폐지되었으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이 불철저하게 수행되었으며, 캄보디아에서는 오랜 내전 속에서도 군주제가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제민족해방혁명이 승리한 뒤에 인민민주주의혁명의 발전경로가 차단되었던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인도네시아의 혁명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공산당은 1920년에 창건되었고, 민족주의세력의 정치조직인 인도네시아민족당은 1927년에 창건되었다. 민족주의세력들 가운데서도 반제민족해방혁명에 적극적이었던 급진적 민족주의세력은 수카르노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인도네시아의 반제민족해방혁명을 주도하였다. 1949년에 반제민족해방혁명이 승리하였으나 급진적 민족주의세력은 정권을 장악한 뒤에 급속히 반동화되어 1965년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한편 미얀마에서는 급진적 민족주의자 아웅산이 영도하였던 민족해방전선이 반제민족해방혁명을 수행하였고 1948년에 승리하였으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의 발전경로는 차단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도 대동소이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을 형성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달성하였던 나라들은 수단(1956년), 가나(1957년), 기니(1958년), 말리(1960년), 알제리(1962년), 예맨(1967년), 기니 비싸우(1974년), 앙골라(1975년), 모잠비크(1975년) 이디오피아(1975년) 등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 민족주의세력이 주도한 군부쿠데타에 의해서 군주제가 폐지되고 반제반봉건의 과업이 수행된 나라들은 이집트(1954년), 리비아(1969년), 소말리아(1969년) 등이다.

전민항쟁에 의하여 반제민족해방혁명이 승리한 나라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1960년)와 중동의 이란(1979년)이다. 이 나라들에서 수행된 반제민족해방혁명은 노동계급의 전위당의 영도를 받지 못하고 급진적 민족주의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에 인민민주주의혁명의 발전경로가 차단되었다. 예외적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었다.

21세기로 들어선 오늘에도 지구 위에는 미 제국주의 체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거나 그 체제에 예속되어 있는 예속국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러한 나라들에서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위한 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필리핀,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에서는 노동계급의 전위당 또는 전위조직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무장투쟁을 지금 이 시각에도 전개하고 있다.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돌, 수리남에서도 한때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과테말라의 무장투쟁은 1970년대 이후 미 제국주의 세력과 반동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에 의해서 좌절되었으며, 1979년에 니카라과의 전위당(FSLN)은 무장투쟁으로 정권장악에 성공하여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미 제국주의 세력의 암해책동 때문에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결국 1990년의 선거에서 반혁명세력에게 패하였다. 엘살바돌의 전위당(FMLN)은 1979년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92년에 반동정권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무장투쟁노선을 포기하였으며, 2000년에는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였다. 수리남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무장투쟁이 전개되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패하였다.

그레나다의 사회주의 세력은 1979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였으나, 1983년에 이르러 국내 반혁명세력의 테러와 미 제국주의 세력의 무력침략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칠레의 사회주의세력은 1970년에 선거를 통하여 집권한 뒤에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였으나, 미 제국주의 세력의 암해책동과 반동군부세력의 반란에 의해서 1973년에 혁명이 좌절되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혁명은 어떠한가? 조선반도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체제가 붕괴된 이후 인류역사상 가장 모범적으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 세력과 국내 반혁명세력의 악질적인 분할책동, 전쟁책동, 식민지화책동으로 인하여 조선반도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북부지역에서만 승리하였고, 남부지역에서는 좌절되었다.

조선반도의 분단상태가 50년 이상 장기화되는 동안에 북부지역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고 고도로 발달된 주체의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한 혁명기지로 되었던 반면에, 남부지역은 미제의 식민지적 지배와 착취에 의하여 봉건세력이 몰락하고 식민지 예속자본이 팽창(예속자본의 축적과 집중)하면서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그 사회성격이 전화되었다. 이것은 미 제국주의 세력이 식민지 체제 안에서 식민지 예속자본을 육성시킴으로써 자기들의 착취체제를 더욱 확장한 것이다. 낙후하고 빈약한 생산력을 가졌던 봉건체제를 발달된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 체제로 교체해야 미 제국주의 체제의 더 많은 착취가 가능하기 때문에 식민지 예속자본을 육성한 것이었다.

≪반(半)자본주의 사회≫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체제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었다는 양적 수준을 판별하는 의미가 아니라, 식민지 체제에서 미제의 요구와 이익에 따라 육성된 ≪한국≫의 자본이 미제에게 예속되어 막대한 이윤을 수탈 당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기형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부 무식한 논자들은 식민지 예속자본의 육성에 따른 기형적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을 탈식민지화 현상으로 오인하면서 ≪한국≫이 미 제국주의 체제에 대해서 이른바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식민지적 기형성이라는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물리적 팽창이라는 현상만 들여다보고 착각하는 것이다. 조선반도의 식민지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팽창한다는 것은 기형화, 불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형적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은 미 제국주의 체제에 의한 착취가 더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착취를 확대재생산하는 정치·군사적 지배도 또한 더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는 미제에 의하여 지배·착취당하고 있는 예속국들이 수없이 많은데, ≪한국≫은 그 수준을 넘어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미제의 식민지로 존재하고 있다. 조선반도의 식민지가 처해 있는 운명은 미국의 ≪보호령≫이라는 간판 아래 완전한 식민지로 묶여있는 중남미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푸에토리코나 남미대륙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비극적 운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므로 ≪한국≫이라는 국가는 민족사의 국가적 정통성의 견지에서 볼 때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현대 제국주의 체제를 인식하는 사회과학적 견지에서 볼 때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은 없다. 미제의 지배 아래 능욕 당하고 있는 식민지 영토, 그리고 미제의 착취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식민지 인민만이 존재할 뿐이다.

조선반도의 식민지에서 미 제국주의 체제의 식민지 예속자본 육성책동에 따라 1980년대 중반 이후 기형적 자본주의 체제가 급속히 팽창하게 되자, 조선반도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라는 전략개념으로 전화되었다. 반제민족해방혁명의 기본성격이 변화되지 않은 가운데, 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은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전화된 것이다.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반제민족해방혁명과 인민민주주의혁명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에서 수행하는 혁명이다. 민족해방혁명의 단계가 따로 있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의 단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반도에서 1950년대에 미제의 반혁명책동에 의하여 좌절되었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그 미완의 과업을 2000년대로 넘겨줌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진행되고 있다.

조선반도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미제의 방대한 침략무력과 직접적으로, 첨예하게, 장기적으로 대치한 준전시상태에서, 그리고 하나의 영토가 미제에 의해서 분할·점령된 조건에서 수행되는,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간고·복잡한 혁명이다.

그렇지만 조선반도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계급의 전위당인 조선로동당과 그 전위당의 영도를 받는 전국적 통일전선운동은 반제민족해방혁명과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연이어 완수하고 조선반도의 통일을 달성할 것이며, 주체혁명의 길로 전진할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약 30년 동안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전 세계적 범위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주의에 의하여 그 전략개념이 새롭게 정립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승리하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으로 추진되고 있다.

조선반도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김일성주의로 무장한 세계 최강의 전위당인 조선로동당이 영도하고 있으므로, 조선반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세계사적 보편성이 구현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조선반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 승리하는 것은 그 혁명의 세계사적 보편성이 구현되는 세계혁명의 승리의 길을 결정적으로 열어놓는 것으로 된다. 조선반도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은 인류의 자주화위업을 전진시키는 세계혁명의 거대한 축이다.

 

5)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구호는 누가 들어야 하는가?

사회당 지도부가 반대한다고 말한 ≪미국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미국이라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와 국가를 의미한다.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초보적 상식에 속한다.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 미국의 국가기구는 미국의 독점자본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으며, 미국의 독점자본을 위하여 존재한다.

미국의 독점자본은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국가기구와 그 국가기구가 조직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 전반을 장악·지배하고 부르조아 계급독재와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위해서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독점자본은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착취하고 있는 대상은 미국의 노동계급이다. 다른 나라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착취하는 것은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미 제국주의 체제라고 해야 한다. 실체는 동일하나, 그 실체에 대한 관계는 구분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한다는 것은 미국의 노동계급이 들어야 할 구호가 되며, 그 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책임적 주체는 미국의 진보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이 된다.

그러므로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이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책임적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은 미 제국주의 체제를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고 있는 미국의 노동계급과 민중을 지원하는 연대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사회당 지도부가 ≪미국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당적 구호로 내걸은 것은 오류다. 그 구호는 사회당의 국제연대사업부문에서 채택할 수 있는 구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6) 반혁명세력은 위장선언을 묵인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모두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은 사회주의 배신자들이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처럼 떠들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반대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당 지도부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그들이 내걸은 반자본주의 선언은 사회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 시장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현실에 존재하는 노동자 민중 투쟁의 총체이자,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운동 그 자체이다. 따라서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국제적이고, 생태주의이며, 여성주의이기도 하다. 아울러 사회주의는 반독재 민주주의이고, 자치주의-참여민주주의이며, 인권과 기본권을 옹호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사상이다.≫

위의 주장은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계급적 관점을 거세하고 ≪다양성≫과 ≪개방성≫의 미명 아래 잡다한 사상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노동계급의 혁명사상을 인민대중의 도덕적 휴머니즘으로 대체하고,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의 본질을 왜곡하며, 그 계급투쟁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술책이다.

사회당이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에서 이탈하여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조금 더 건전하게≫ 강화하려는 사회개량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실천에서 입증된다. ≪진지한 좌파 정치세력≫으로 자처하는 사회당의 실천투쟁은 다음과 같이 잡다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이주노동자와의 적극적 연대투쟁, 북한산 관광도로 반대, 청계천 복원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환경캠페인, 호주제 철폐투쟁, 공교육 촉구운동,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 정치관계법 개정촉구운동, 만18세 이상 참정권 보장운동, 국가보안법 철폐운동,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운동, 장애인 이동권 쟁취운동, 장애인 노동권 보장운동 등등.≫

사회당 지도부가 아주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는 이른바 ≪사회개량운동의 다양성≫은 사회주의에서 이탈한 기회주의자들의 좌충우돌을 의미한다. 기회주의자들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부정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반자본주의≫라는 위장선언을 그럴듯하게 내건다.

세계혁명운동사에 출몰했던 기회주의자들의 뒤를 따라서 사회당 지도부가 내놓은 ≪반자본주의 선언≫은 기회주의자의 정체를 가리기 위한 위장선언이다. 위장선언은 언제나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며, 명료하지 않고 모호하다. 위장선언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가하고 있는 착취·억압의 실체에 대한 반대와 투쟁을 회피하면서 간접적이며, 모호한 언사로 자신의 정체를 교묘하게 위장한다.

사회당 지도부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반자본주의 선언≫을 내놓았는데도, 반혁명세력들이 전혀 문제로 삼지 않고 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서 노출된다. 사회당이 미 제국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반미자주화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 그들이 미국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떠들건 세계 자본주의를 반대한다고 떠들건, 반혁명세력들은 그들의 위장선언은 못 본체 묵인해도 되는 것이다.

 

2. ≪반조선로동당 선언≫은 독설과 궤변의 디마고지다

 

1)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회당 지도부의 사실인식

사회당 지도부는 당당하게 말한다.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통하여 사회당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사회당이 지향하는 사회가 지난 20세기의 ≪국가사회주의≫일 수 없다는 원론적인 수준이 아니다.≫

원론적 수준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들은 ≪반조선로동당 선언의 내용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 두 가지 내용을 그들의 표현대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민족민주운동진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립되어 있는 ≪수령절대체제≫를 지향해서는 안 되며, 사회당은 그런 체제를 지향하는 운동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의 일부로 간주하고, ≪한국≫ 진보세력에 대하여 지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조선로동당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조선로동당을 반대하는 첫 번째 이유는 위의 주장에 나타나있듯이 명백하다. 그들에 의하면, 조선로동당이 ≪수령-당-인민의 일체의 수령절대체제≫를 만들어냈고, 발전시켜왔으며 오늘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사용하는 ≪수령절대체제≫라는 용어는 그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인데, 그들은 그 신조어가 지시하고 있는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체제인 수령절대체제는 조선로동당의 유일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조선로동당이라는 정치세력의 수미일관한 발전에 따라 수립된, 조선로동당 운동의 역사적 완결형태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위의 인용구는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실인식으로서는 제법 정확하게 표현된 문장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수령, 당, 인민이 일체가 된 수령절대체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라고 해야 한다. 조선로동당의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를 말할 때, 대중, 인민, 민중, 인민대중, 근로인민, 근로대중이라는 매우 유사한 용어들, 일상적으로 대충 혼용되고 있는 용어들 가운데 오직 대중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용어는 쓰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당 지도부는 조선로동당의 핵심개념에 관련한 용어를 인용하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핵심개념에 관련한 용어를 인용할 때, 정확하게 인용하여야 인식의 혼동을 막을 수 있다.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체제의 핵심개념을 논하면서 이처럼 용어를 부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은,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그들의 사실인식이 그리 정확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다.

용어사용이 그리 정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회당 지도부는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해서 수령절대체제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조어를 사용하여 사실인식에 접근하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사실인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인식대상에 대한 가치판단까지 내리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가치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이 사실인식을 완전히 압도한다.

 

2)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회당 지도부의 가치판단

사회당 지도부의 신조어인 수령절대체제는 어떠한 가치판단을 담고 있는 개념인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최악의 가치판단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수령절대체제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최악의 사회정치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 체제는 ≪수령지배체제≫, ≪국가사회주의의 당 독재체제≫다.

수령절대체제가 수령지배체제, 국가사회주의의 당 독재체제라는 사회당 지도부의 주장은 과연 과학적인 사실인식에 기초한 가치판단일까? 필자의 답변은 부정적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가치판단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악의에 가득 찬 독설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이다.

필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독설과 궤변을 논박하는 것 자체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지를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독설과 궤변을 접한 뒤에 심정적 불쾌감을 느끼고 있을 건전한 상식인들의 정신위생을 위하여 논박하기로 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설과 궤변을 토하면서 열을 올리다보면 두뇌기능에 혼란이 발생하여 논리전개가 뒤엉키기 십상인데, 사회당 지도부의 행위도 예외는 아니다. 궤변가와 독설가들에 대한 ≪지나친 친절≫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필자는 논박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궤변과 독설을 정리해주고 싶다. 필자가 보기에,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선언≫이 담고 있는 궤변과 독설은 두 가지 내용으로 정리된다.

첫째,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그들의 궤변과 독설은 그 체제는 수령지배체제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둘째, 조선로동당에 대한 그들의 궤변과 독설은 ≪국가사회주의 당 독재≫와 ≪조선로동당의 반민중적 지배≫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회당 지도부는 위의 두 내용을 어떤 대목에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보인다. 어쨌든 그것은 악의에 찬 독설,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에 지나지 않으므로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있다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 그러하듯이, 사회당 지도부도 역시 인식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에서 동의어 반복이라는 수법으로 건전한 상식인의 정신위생을 오염시키려 한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처럼 사회당 지도부도, 수령절대체제가 어째서 최악의 정치체제인가 라는 근본물음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고, 그 체제가 지배체제, 독재체제이므로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하는 단순·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수령절대체제가 최악의 정치체제라는 사회당 지도부의 ≪가치판단≫이 성립되려면, 그들은 자기들의 ≪가치판단≫을 논증해야 한다. 그러한 논증이 없이 수령절대체제는 지배체제, 독재체제이므로 무조건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떠드는 것은 어떤 절대악을 관념 속에 상정하고 동의어를 주문처럼 반복하여 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떤 인식대상이 어째서 나쁜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논증하지 않으면서 그 인식대상은 나쁘니까 나쁘다라는 부정적 가치판단을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의어 반복의 순환논법은 논증을 배제한 궤변의 악순환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체제에 관하여 언급한 문건 그 어디에도 수령절대체제가 어째서 최악의 정치체제인가를 논증하는 내용은 없다. 수령절대체제를 최악의 정치체제라고 이미 전제해놓고 그 체제를 반대하는 독설과 궤변을 끝없이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원래 독설과 궤변을 늘어놓는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가 어째서 악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논증하지 못 하면서, 사회주의를 악이라고 전제한 적개심을 앞세우고 나서 사회주의는 악이니까 악이다라는 식의 동의어 반복으로 대중심리를 선동한다. 자본가계급의 충실한 앞잡이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선동하는 반공캠페인은 대충 그런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당 지도부의 독설과 궤변에서 드러난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동의어 반복의 대중선동은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자행하는 반공캠페인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조선로동당의 수령절대체제는 악이다라는 사회당 지도부의 대중선동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의 말을 조작했던 박정희 극우파시스트정권의 반공캠페인이 무엇이 다른가! 사회당 지도부는 이미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 박혀 버린 파시스트의 오물인 반공캠페인을 다시 꺼내어 대중심리를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령절대체제가 최악의 정치체제라는 주장은 가치판단은 고사하고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사실인식마저도 파괴하는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광기 어린 독설과 궤변이다.

 

3)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는 노동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와 계급적 관점에서 인식해야 한다

모든 사실인식과 가치판단의 기초에는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가 놓여있다. 객관세계에 대한 인식은 철학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성립되고 진행된다. 인식은 헤아릴 수 없이 다종다양한 내용으로 성립되며, 무한히 많은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인식의 근원을 파헤쳐 들어가면 결국 철학적 세계관으로 귀착된다. 현상적으로 보면, 인식의 내용과 형식에는 이러저러한 변형태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근원은 단 하나, 곧 철학적 세계관밖에 없다.

모든 인식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철학적 세계관은 두 개의 상호대립적이며 모순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귀착된다. 즉 노동계급의 세계관이냐 아니면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이냐 하는 근원적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그러한 세계관 인식의 계급적 근원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은폐하기 위하여 농민, 소자산계급, 여성, 지식인, 청년 등 다양한 사회계급·계층의 ≪중립적 세계관≫, 또는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제3의 세계관≫ 따위를 떠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계급이나 계층의 관점은 세계관적 근원이 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의 세계관 또는 자본가계급의 세계관 두 가지 중에 하나의 세계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사실인식과 가치판단도 이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은 어떤 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에서 성립되는가?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되겠지만, 당연히 노동계급의 세계관적 기초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이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에서 성립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이상자일 것이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노동계급의 세계관적 기초에서 성립되어야 하며, 또한 노동계급의 계급적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적 기초 위에서, 그리고 자본가계급의 관점에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대한 인식을 진행하는 경우, 그의 인식은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광기 어린 독설과 궤변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다.

 

4) 노동계급의 철학적 세계관과 사회정치적 생명체

김일성주의에 의하면,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는 수령을 중심으로 당과 인민대중이 단결된 사회·정치체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논제로 되는 것은 ≪단결되었다≫는 말의 의미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가 내포하고 있는 단결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집단적 단결이나 사회·정치적 조직화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통일체를 구성하고 있는 3자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세계관적 의미를 내포한다.

만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김일성주의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라는 철학개념을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김일성주의의 혁명적 수령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김일성주의는 주체의 철학적 세계관, 주체의 사회역사관, 주체의 혁명관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사상적 관점을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 체계로 쌓아올린 뒤에, 그 최고의 정점에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철학개념을 정립하였다. 김일성주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새로운 철학개념을 인류사상사에서 최초로 창시하고 완벽하게 해명한 철학적 세계관, 최고로 발전된 혁명이론, 영생불멸의 혁명방도를 자기의 전일적 체계 안에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면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명≫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어떤 신비한 실체가 아니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던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생명을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는 신비주의적 오류를 극복하지 못했었다. 생명 신비주의가 생명을 신적 근원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세계관의 부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생명 신비주의는 근대에 들어와서도 소멸하기는커녕 이른바 생명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였다. 독일의 쉘링, 쇼펜하우어, 니체, 딜타이, 슈펭글러, 트뢸치, 덴마크의 키에르케골, 프랑스의 베르그송, 스페인의 오르테가 이 가쎄트 등이 퍼뜨렸던 생명철학의 전통은, 인류의 사상을 부르조아 관념론의 탁류로 오염시키려고 하였고, 특히 독일에서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성립을 위하여 복무하였다.

생명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처음으로 성립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견해에 의하면, ≪생명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의 지속적인 물질대사를 그 본질적 계기로 하는 단백질의 존재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은 유기체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무기물과 유기체로 구별된다. 무기물은 생명이 없는 물질이고, 유기체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물질이다. 유기체는 물질의 생물학적 운동형태의 조직방식으로서, 고도로 복잡하게 조직화된 단백질과 핵산, 즉 디옥시리보핵산(DNA)과 리보핵산(RNA)을 구성요소로 하는 생명체다. 생명체는 물질적 실체이지만, 생명 그 자체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생명체의 운동형태다. 생명체의 운동은 물질대사, 성장, 번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생명을 통속적으로는 ≪생활력≫ 또는 ≪생명력≫이라고도 부른다.

유기체라는 물질이 존재하므로 생명이 발생한다. 무한하고 영원한 물질세계에 유기체가 출현하기 이전 장구한 기간 동안에는 오로지 무기물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45억-50억 년 전에 생겨난 태양계에 속해 있는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유기체가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 생물학에서 과학적으로 해명되었다.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개념은 유기체적 생명이라는 개념과의 대비 속에서 고찰된다. 사람은 유기체에 속하는 생명체지만, 다른 유기체와 질적으로 다른 매우 특수한 생명체다. 사람이라는 특수한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유기체적 생명과 더불어 사회·정치적 생명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에게만이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최고로 발전된 유기체가 되는 것이며, 다른 유기체들과 달리 물질세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무한하고 영원한 물질세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물과 유기체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오직 사람만이 주체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물질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양의 언어체계에서는 주체라는 개념과 주관이라는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고 subject라는 개념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주관이라는 개념은 인식능력의 담지자라는 의미이고, 주체라는 개념은 물질세계에 목적·의식적인 작용을 가하여 물질세계를 자기의 의사와 요구대로 개조·변혁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뜻이다.

유기체적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사람의 본질과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은, 이른바 ≪사회유기체설≫과 같은 조야한 생물학주의의 파탄을 의미한다. 생물학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세계관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기계적 관념론의 한 유파이다. 생물학주의는 어리석게도 생물학적 개념들을 가지고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려 하면서, 사회구조와 인간유기체 구조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사회·역사가 생물학적 법칙에 의하여 변화·발전한다고 떠드는 궤변이다.

그런데도 사회·정치적 생명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기초하여 성립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에 관한 철학이론을 생물학주의의 ≪유기체설≫이라고 우겨대는 궤변가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수령을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라고 표현한 비유를 두고, 마치 그 비유가 ≪유기체설≫의 논거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그들의 궤변은 유기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개념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이 빚어낸 우스꽝스러운 촌극이다.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의 물질세계에는 주체가 없었다. 무기물과 유기체만이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발생 이후에 비로소 물질세계는 주체에 의해서 변화·발전되는 질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전진할 수 있었다. 이것이 김일성주의가 주체라는 철학개념으로 해명한 노동계급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의 진리다.

그렇다면 물질세계에서 주체는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출현하였는가? 이것은 인류사상사 최고의 철학문제다. 이 철학문제는 김일성주의에 의해서 해명되었다. 다시 말해서, 의식성의 발생과 그에 의거한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생에 관한 노동계급의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에 의하여 인류사상사에서 최초로 완벽하게 해명되었던 것이다.

이 최고의 철학문제에 대한 김일성주의의 해명을 이해하려면, 먼저 의식과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언어체계에 자주성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성이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용어도 없다. 그래서 서양의 언어체계에서는 의식성과 의식을 동일하게 consciousness라는 용어로 표기한다.

일찍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그 전위당의 영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해명하면서 의식성(Bewusstheit)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경우에 의식성은 자연발생성(spontaneity)라는 개념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연발생성에 의하여 발전하는가 아니면 노동계급의 전위당의 지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의식성에 의하여 발전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연발생성을 지니고 있지만 의식성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의식성은 노동계급의 전위당에 의하여 영도된다는 레닌의 이론에 의하여 해명되었다.

이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의식성이라는 개념과 김일성주의의 의식성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해명하고 있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김일성주의에서 사용하는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고, 의식이라는 개념만을 사용하였다. 그에 비하여 김일성주의에서는 두뇌기능으로서의 의식이라는 개념과 사람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의식이라는 개념을 구분하고, 후자를 의식성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의식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 철학이 사람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논점이다.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 의식은 그 자체가 물질이 아니며, 레닌이 지적한대로, ≪인간의 뇌라고 하는 매우 복잡한 물질의 기능≫이다. 의식은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이 인류사상사에서 처음으로 해명한 진리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이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진리는 생물학의 진리이지 철학적 세계관의 진리가 아니다. 의식이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진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의식을 물질과 대립시켰던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타파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던 특정한 시대에 한정되어 사상사적 의의를 지녔던 것이었다. 그러나 관념론과 형이상학이 타파되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확립된 이후의 시대에 오면, 의식이 인간두뇌의 기능이라는 진리는 더 이상 철학적 의의를 지니지 못하게 되며 개별과학의 진리로 남게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새로운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는, 의식기능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의식이라는 기능은 장구한 자연사적 진화과정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해명하였다. 의식은 진화의 산물이며, 고도로 발달된 물질인 인간두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그러한 해명이 오류이었음을 논증한 것은 김일성주의였다. 김일성주의에 의하면, 의식기능을 수행하는 고도로 발달된 신체기관인 두뇌는 진화의 산물이지만, 의식기능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두뇌라는 신체기관이 장구한 진화과정을 통하여 고도로 발달되지 못했다면 의식기능이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 명백하지만, 두뇌라는 신체기관을 원인으로 하여 의식기능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식기능은 두뇌라는 신체기관을 통하여 발생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의식기능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였는가? 의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성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였다는 김일성주의의 명제에 의하여 인류역사상 최초로 해명되었다. 의식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기능이 두뇌라는 고도로 발달된 신체기관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의식은 인간두뇌의 특성이 아니라 의식성의 산물이다.

의식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사람의 본질적 속성이다. 의식성은 ≪사람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회력사적 과정에 형성되고 발전되는 사회적 속성≫이다. 의식성은 자연적,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속성이다. 이 의식성을 기반으로 하여 자주성과 창조성이 형성되고 발전된다.

그러므로 의식성은 사회적 관계를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며, 두뇌는 바로 그 의식성에 의하여 의식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없다면, 아무리 발달된 두뇌를 가지고 있더라도 의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의식기능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자연사적 진화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두뇌를 가진 포유류 고등동물들과 고도로 발달된 두뇌를 가진 현존인류 사이의 차이는 두뇌의 구성요소와 결합구조가 어느 정도로 발달하였는가 하는 생리기능적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 다시 말해서 사회적 관계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것은 진화과정에서 생겨나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자연과 사회·역사 사이를 갈라놓는 질적인 차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람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서 이러한 질적 차이를 간과하였다.

그렇게 되었던 까닭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자연, 사회·역사, 사유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운동법칙을 해명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자연의 운동과 사회·역사의 운동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질적인 차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 양자를 동일한 운동법칙으로 인식하는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연사적 과정은 합법칙적인 발전과정, 곧 진화과정이다. 자연은 객관적인 운동법칙에 의하여 변화·발전한다. 사회·역사적 과정도 역시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이다. 그렇지만 사회·역사적 과정은 자연사적 과정이 아니라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을 중심으로 하여 변화·발전한다. 물론 사회·역사에도 자연의 객관적인 운동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나, 사회·역사적 운동은 어디까지나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의는 ≪사회·역사적 운동은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자체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가진다≫는 명제를 성립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알지 못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자는 물질세계 일반의 보편적 법칙에 의하여 동일하게 해명된다. 레닌의 표현을 빌리면, ≪유물론 철학은 역사의 영역, 사회의 영역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물질세계 일반에 관한 철학적 원리를 사회·역사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세계 일반의 철학적 원리를 사회·역사의 영역으로 확장해서는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질세계 일반의 합법칙성이 사회·역사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사회·역사적 운동은 물질세계 일반의 합법칙성에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회·역사적 운동법칙과 물질세계 일반의 운동법칙을 동일한 것으로 보게 되면, 자연사의 진화과정과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이 동일하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 사회·역사적 운동의 고유한 합법칙성을 알지 못하고 물질세계 일반의 운동법칙과 혼동하였던 오류는, 1961년부터 수년 동안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철학논쟁에서 노정되었다. 이 철학논쟁은 자연사의 진화과정과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의 관계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결국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해명시도는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관계라고 규정한 ≪결론 아닌 결론≫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에서 그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중반에 일부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은 ≪실천≫이라는 철학개념을 도입하여 그 오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물질이라는 철학개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철학개념을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하는 중심범주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도 역시 실패하였다. 물질-의식의 관계문제에 대한 유물론적 해명을 객관적 실재(자연과 사회·역사)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운동법칙, 발전법칙으로 정식화하였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에 ≪실천≫이라는 철학개념을 도입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이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하였던 것은, ≪의식≫을 물질에 대립하는 실체인 것처럼, 또는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궁극적인 실체인 것처럼 떠들어왔던 낡아빠진 궤변인 관념론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사상투쟁에 의하여 물질-의식의 관계문제가 유물론적으로 해명됨으로써 관념론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그러나 실천이라는 개념은 물질에 대한 관계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성립될 수 있는 철학개념이 아니다. ≪실천≫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작용이다. ≪실천≫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물질세계에 가하는 목적·의식적인 작용이므로,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를 물질-실천의 관계문제로 대체하고 그로부터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이 사회·역사적 운동의 법칙을 해명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던가?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의 원리와 변증법적 발전의 원리를 가지고 정립하였던 철학을 넘어서야 했었다. 그와 함께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를 따로 설정하고 새로운 철학적 원리를 가지고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해야 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질-의식의 관계문제는 유물론 대 관념론의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관념론을 타파하기 위한 사상사적 의의를 가진 문제였으며, 그 자체가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하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아니었다. 물질-의식의 관계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명은 관념론을 타파하였지만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인류사상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철학적 세계관의 문제는, ≪주체≫라는 새로운 철학개념을 제기하고 주체의 철학적 원리를 가지고 철학적 세계관을 해명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 문제는 세계-사람의 관계문제를 ≪철학의 새로운 근본문제≫로 설정한 뒤에, 주체를 중심으로 물질세계를 인식하고 세계와 사람의 관계문제를 해명하는 주체의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해결되었다.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의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완벽하게 해명되었다. 이로써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은 인류사상사에서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철학적 세계관으로 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자들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가리켜 철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김일성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철학적 세계관이 아니며, 단지 철학적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한 철학적 전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세계관과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이 병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전제로 삼고 있는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만이 존재한다. 김일성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원리를 계승하고 그 미완의 한계를 발전시킨 사상이 아니다. 김일성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전제로 삼고 있는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사상이다.

김일성주의의 새롭고 독창적인 철학적 세계관은 ≪사람을 위주로 하여 철학의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에 대한 견해, 세계에 대한 관점과 립장을 밝힌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다.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는 물질세계의 유일한 주체인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변화·발전한다. 주체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다. 오직 사회적 존재인 사람만이 육체적 생명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진다. 사람은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세계의 유일한 개조자≫로 되는 것이다.

자연의 유기체적 생명이 자연계의 현실 속에서 발생하고 생장·소멸하는 것처럼, 주체의 사회·정치적 생명도 어떤 초현실적인 신비한 현상이 아니며,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 발생하고 생장·소멸한다.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 개체는 생장·소멸하지만,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 개체가 속한 종(種)은 생장·소멸하지 않으며 진화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 물론 자연환경에 대한 순응에 실패한 종은 결국 멸종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닌 개체(개인)는 생장·소멸하지만, 그 개체가 속한 사회·정치적 집단은 사회·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영생한다. 물론 사회·역사의 변화·발전에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회·정치적 집단이 자연계의 멸종현상처럼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사회·정치적 집단의 생명이 자주성이라고 하는 철학명제가 성립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은 개체(개인)를 포함하는 사회적 집단이 지니고 있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으로 존재한다.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되고 발전해 가는 근본원리인 집단주의는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원리에 기초한 이념체계다.

 

5)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역사의 주체로 출현한 노동계급

사람이 물질세계의 주체로 출현하고 사회·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장구한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이 진행된 이후에도 매우 오랫동안 사회·역사의 주체는 아직 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혁명운동의 주체로 등장한 최초의 사회적 집단은 노동계급이었다. 노동계급은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자주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지니게 되었고, 처음으로 사회를 개조·변혁하는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노동계급은 자신만이 아니라 여타의 사회계급·계층(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사회·역사를 변혁하는 혁명으로 이끌었다.

그 이전에 출현했던 그 어떤 계급도 이러한 지위와 역할을 가지지 못했다. 노동계급이 혁명의 영도계급이라고 하는 명제와 인민대중이 사회·역사의 주체라는 명제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가계급은 봉건체제를 타도하는 부르조아혁명을 일으키고 사회·역사를 변혁하였지만, 부르조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지배·착취계급으로 변질되어 사회·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반혁명세력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혁명의 영도계급이 될 수 없었으며 자주적 주체도 될 수 없었다.

노동계급의 출현 이후의 사회·역사는 그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자주적 주체의 시대로 되었다. 노동계급의 영도에 따라 인민대중이 사회·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등장한 시대, 곧 자주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주의가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명한 사회·역사관의 요체다.

인류가 물질세계의 장구한 진화과정에 출현한 수많은 유기체 집단들 가운데 유일무이하게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집단이라면, 노동계급은 수 천년 사회·역사에 출현했던 집단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서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집단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가장 선진적이며 가장 힘있는 사회·정치적 집단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노동계급을 자주적 주체로 되게 한 근본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문제다. 종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이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였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사회·역사를 발전시키는 가장 강한, 그리고 가장 주요한 추진력으로 되고,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사회·역사의 모든 운동력을 규정한다는 답변 아닌 답변을 내놓았다.

노동계급이 자주적 주체로 된 근본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집단주의적 생명관과 그에 기초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형성에 관한 김일성주의 철학이론에 의해서 해명되었다.

물질세계 일반에서 유기체가 자연계의 진화작용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는데 비하여 사회·역사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작용에 의하여 발생한다. 주체의 목적·의식적 작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집단이 사상·의식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단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역사에서 사상·의식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단결된 최초의 사회적 집단으로 출현한 것은 노동계급이다.

 

6) 노동계급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어떻게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되는가?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어떻게 사상·의식적으로 각성되고 조직적으로 단결되는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에 의하여 생산의 사회화가 진행되고 생산활동의 집단화와 조직화가 강화·발전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이 자연적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자본과 노동간의 모순이 첨예화되면서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이 전개되고, 노동계급은 그 투쟁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발생적 계급의식은 맹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계급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노동계급이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역사적 임무를 자기의 임무로 자각하는 것,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혁명사상을 획득하는 것, 다시 말해서 혁명적 계급의식은 목적·의식적 작용에 의하여 형성되고 노동계급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계급의식과 부르조아 혁명운동은 자본주의 경제제도(uklad)가 상당히 존재하고 있는 조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던 것에 비하여, 노동계급의 계급의식과 혁명운동은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사회주의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조건이므로 당연히 목적·의식적 작용에 전적으로 의거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을 각성시키고 그에 의거하여 혁명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철두철미 주체의 목적·의식적인 작용이다.

목적·의식적 작용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사상으로 각성되고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된 혁명의 주체다. 그 주체를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라고 부른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는가? 노동계급에게 사회·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각성시키고, 노동계급과 동맹관계를 맺은 다양한 비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 조직화하며, 노동계급과 전체 근로인민에게 계급투쟁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과학적 인식을 제공하고, 사회주의 혁명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정치적으로 조직·지도한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그러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사회정치적 생명체, 곧 사회·역사의 주체를 생성시킨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을 수령을 중심으로 결집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없이는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될 수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을 사상·의식적으로 각성시키고 조직적으로 단결시키는 문제를 올바르게 해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철학적 세계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 세계관으로부터 혁명적 당 건설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세계관과 사회·역사관 전체를 수미일관하게 주체라는 최고의 철학적 개념으로 통찰하면서, 마침내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혁명적 철학사상을 발전시킨 김일성주의는 혁명적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를 완벽하게 해명하였다. 그래서 김일성주의를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7)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의 최고 결정체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지막 질문, 최고의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그 질문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목적·의식적인 주체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자명한 이치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형성하는 목적·의식적인 활동은 노동계급의 수령에 의하여, 그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 수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중심으로서, 그 당을 창건하고 끊임없이 강화·발전시키는 혁명적 임무를 수행한다. 노동계급의 수령이 없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존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수령의 영도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닌 혁명의 자주적 주체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은 수령의 당이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수령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을 통하여 노동계급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시킨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는 이렇게 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혁명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 즉 혁명의 자주적 주체에 의하여 수행된다.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주의의 혁명적 수령관의 중심내용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이러한 혁명적 수령관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 곧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사상은 혁명적 수령관을 핵심으로 하여 성립된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혁명사상이다. 혁명적 수령관은 인류역사에 출현하였던 모든 철학사상과 혁명이론의 이러저러한 시대적 제한성과 이론적 오류를 극복·청산한 최고의 결정체며, 고도로 발전된 혁명사상의 진수다. 혁명적 수령관은 노동계급의 수령관이며, 혁명적 세계관의 진수다.

그러므로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하면, 김일성주의의 철학적 세계관으로부터 시작되어 혁명적 수령관에서 정점에 이르는 혁명사상과 혁명이론의 모든 구성체계와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거꾸로 표현하면,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도 된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혁명사상인 김일성주의를 이해하고 교양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혁명적 수령관을 가장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적 수령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에 관한 철학적 세계관의 기초이론, 집단주의적 생명관에 관한 철학적 해명,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 건설에 관한 이론 등을 종합·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일 수령은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라는 명제를 비유의 통속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혁명적 수령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생물학주의의 논리적 장벽을 뛰어넘기 힘들다. 혁명적 수령관은 ≪혁명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특징짓는 기본척도이며 참다운 혁명가와 우연분자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혁명의 자주적 주체가 형성되지 못한 조건에서 수행되었던 수많은 혁명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험은, 오직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만이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파렴치하게도 혁명적 수령관을 단순한 통치 이데올로기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따위의 악선전은 논박할 가치조차 없는 잡음이다.

 

8) 통치기능과 사회정치적 생명체

수령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수령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과 마찬가지로 통치기능을 수행하지만, 통치기능만 수행하지 않는다. 수령은 인민대중을 당의 주위에 튼튼하게 결합시킴으로써 인민대중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하고,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를 형성한다. 이것은 단순히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이 할 수 없는 수령의 고유한 임무, 혁명의 최고 임무다. 김일성주의의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지도자론이 질을 달리하여 갈라서는 사상적 분기점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다.

만일 수령을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 수령의 통치기능이 왜곡되면서 지배기능과 독재라는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논리적 오류가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통치기능적 측면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다. 수령과 대중의 관계는, 수령은 대중에 대해서 통치기능을 수행하고 대중은 수령의 통치를 받기만 하는 그런 기능적 관계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은, 순전히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중을 통치하는 통치기능의 수행자로 설명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계급적 모순관계에 의하여 규정된 착취체제이므로 이론상의 통치기능은 실제로는 수행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모순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적대적 모순에 의해서 그들의 통치기능은 계급적 모순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기능으로 변질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지배기능과 계급독재로 전화된다.

계급적 모순관계에 대한 인식을 떠나서 자본주의 정치체제의 통치문제를 논하려는 것은 오류다.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모순관계는 통치자를 지배기능을 수행하는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수행자로 만든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계급적 모순관계가 폐절된 사회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전혀 다른 정치가 실현된다. 수령은 대중에게 통치기능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수령의 통치기능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본질에 속해있는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 수령의 존재근거는 통치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과 대중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상호결합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김일성주의의 표현을 빌리면, 수령과 대중의 결합관계는 일심단결, 혼연일체의 관계다. 이처럼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수령의 통치기능이 독재기능으로 변질·타락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9) 모든 형태의 독재와 민주주의는 두 개의 계급적 기반으로 나뉜다

사회당 지도부는 수령절대주의를 ≪수령지배주의≫라고 왜곡하면서, 수령이 사회주의 체제의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성원들을 지배하는 ≪수령의 독재≫라고 악선전하고 있다. 수령절대주의에 퍼붓는 사회당 지도부의 격렬한 비난공격은 결국 그들이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수령의 독재≫라는 허구적 관념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령절대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악선전에는 수령이라는 개인이 인민대중에 대해서 독재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수령을 개인으로 보는 것도 무지의 소산인데, 거기에다 한 술 더 떠서 계급이 아닌 개인이 인민대중에게 독재를 실시한다고 하는 악선전은,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초보적 지식도 없는 무식자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래도 명색이 당의 지도부인데 그처럼 무식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모르고 있는 것(혹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은, 독재와 민주주의가 계급적 기반을 가지는 정치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정치권력이 어느 계급에 의하여 장악·행사되는가에 따라서 독재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제의 본질이 결정된다. 독재와 민주주의를 가르는 정치체제의 문제는 계급적 관점을 떠나서는 인식될 수 없다. 그 문제는 자본가계급의 계급독재와 ≪자유민주주의≫냐 아니면 노동계급의 계급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냐 하는 문제로 갈라서 보아야 한다. 오늘 인류사회에는 오직 두 가지 독재, 자본가계급의 독재와 노동계급의 독재만이 존재하며, 오직 두 가지 민주주의,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만이 존재한다.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에 속하는 유형들이다. 노동계급의 계급독재는 노동계급 자신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대중(협동농민, 근로인텔리)의 계급동맹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독재다.

파시스트 독재라든지 노농독재와 같이 변형된 계급독재가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형식적 차이의 문제이지 본질적 차이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독재는 자본가계급의 독재와 노동계급의 독재 두 유형에 속한다. 따라서 개인의 독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등장하였다가 비참하게 종말을 고했던 파시스트 독재체제들, 이를테면 히틀러, 프랑코, 마르코스, 피노체트, 쏘모사 그리고 이 땅에서 출몰하였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따위의 파시스트 두목들이 이끌었던 파시스트 독재체제들은 파시스트 독재자 개인이 인민대중에 대해 독재를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가계급 독재의 가장 반동적인 형태인 파시스트 독재를 수행했던 두목이었다.

그런데 파시스트 독재를 파시스트 독재자 개인의 독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중학생의 지능수준을 가진 자들의 강변이 아니면, 사회과학의 기초지식마저 부정하려는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궤변, 둘 중에 하나다.

파시스트 두목이 실시하는 파시스트 독재의 계급적, 정치적 기반은 자본가계급이다. 파시스트 독재는 엄연히 자본가계급의 독재에 속하는 한 유형이다. 노농독재가 노동계급의 독재에 속하는 한 유형이듯이...

수령을 개인으로 보면서, 개인의 독재가 실시되고 있다고 떠드는 사회당 지도부의 궤변은 개인의 독재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계급의 독재만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무너진다.

그렇다면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자본가계급이 존재하고 있는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면 그렇다고 답변할 사람은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자본가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본가계급의 독재가 없으며 오직 노동계급의 독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실시하는 가장 악질적인 괴수라면, 수령은 노동계급의 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최고 영도자이다.

수령이 노동계급과 그 동맹자인 농민, 그리고 통일전선에 망라된 인민대중을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으로 영도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적인 자본가계급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독재를 실시하는 주체혁명의 길이 개척된다.

사회주의혁명을 영도하는 수령은 노동계급과 그 동맹자인 협동농민과 근로인텔리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길로 이끌어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형성하고, 이미 전복된 반혁명세력과 제국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독재를 실시하는 주체혁명위업을 완수해나간다.

그런데 일부 무식자들은 조선로동당이 ≪일당독재≫를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주장도 역시 궤변에 불과하다. 일당제냐 다당제냐 하는 것은 독재와 민주주의를 가르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에 정당이 복수로 존재하면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이고, 정당이 유일적으로 존재하면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라고 떠드는 것은 정당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하려는 선동이다. 자본주의 정치체제의 부르조아 정당들은 자본가계급에 의하여, 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이익과 권리를 위하여 생겨난 것들이다. 자기들끼리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추잡한 정쟁을 일삼는 꼴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강변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은폐하려는 서투른 기만극이다.

정당의 본질은 복수냐 단수냐 하는 피상적인 문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이 어느 계급의 이익과 권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문제에 의해서 결정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자본가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조선로동당이 노동계급과 그 동맹자인 협동농민, 근로인텔리의 이익과 권리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을 자기의 존재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조선로동당은 전복된 계급사회를 복구해보려고 날뛰고 있는 반혁명세력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해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독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의 독재≫라고 말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노동계급을 지배·착취하는 자본가계급 정당의 독재가 실시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정치적 현실을 판단할 때, 항상 노동계급적 관점에 의거하여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이탈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이다.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주의를 운운하면서 ≪반조선로동당≫ 구호를 내건 것은 수령절대주의의 계급적 본질을 외면하는 결정적 오류이다. ≪반조선로동당≫ 구호는 그 오류가 낳아놓은 궤변이다.

 

10)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본 수령과 대중의 관계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수령에 대한 대중의 관계는 충성과 숭배의 관계이며, 대중에 대한 수령의 관계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에 대한 대중의 관계가 신뢰와 존경의 관계라는 사실과 대비되며, 대중에 대한 정치지도자나 국가수반의 관계가 신뢰와 권위의 관계라는 사실과 대비된다.

그런데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충성과 숭배, 신뢰와 사랑의 관계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심리적인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충성≫이라는 개념이 봉건군주에 대한 충성을 연상시키고, ≪숭배≫라는 개념은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생겨나는 심리적 조건반사일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충성≫과 ≪숭배≫라는 말에 대해서 알레르기성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 말의 과학적 의미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주는 언어감각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리적 알레르기 반응의 원인이 언어감각 때문이라면 그것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반응은 과학적 인식으로 극복할 수 있으며, 또 극복해야 한다.

≪충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는 뜻이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좋은 말을 봉건지배계급들이 사용했었다는 데 있다. 봉건주의 체제는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봉건지배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의 적대적 모순관계에 의하여 성립된 체제였으므로, 그러한 봉건주의 체제의 적대적 모순관계에서 봉건군주에 대한 ≪충성≫이 존재할 리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충성이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충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봉건지배계급이 인민대중에 대한 지배·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민대중을 기만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물론 봉건지배계급이 자기들의 지배·착취를 은폐·위장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말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봉건지배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오늘에 와서 그 말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컨대, 자본가계급이 자기들의 지배·착취체제를 은폐·위장하려고 ≪평화≫와 ≪인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노동계급이 ≪평화≫와 ≪인권≫이라는 말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의 핵심은 언어감각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표출이 아니라, 언어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어느 계급의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데 있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와 관련해서 ≪충성≫이라는 말과 더불어 ≪효성≫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효성이라는 말은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이다. 이 역시 참 좋은 말이다. 서구의 개인주의 시각에서 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낡은 봉건주의 도덕의 잔재쯤으로 치부될 것이다. 물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도덕률이 군주에게 충성하라는 도덕률과 함께 봉건주의 체제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에게 효성은 배척되어야 할 낡은 덕목으로 보일 것이다. 계약관계는 계약을 체결한 쌍방이 계약을 준수하는 한에만 성립되며, 만일 계약조건이 없어지면 그 관계 자체가 깨지는 그런 관계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이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조건에 한정해서 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유기체적 생명으로 결합된 혈연적 연계로 성립되며,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관계는 효성의 관계다. 유기체적 생명의 관계로 결합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계약이 아니라 효성이 존재한다면, 유기체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회·정치적 생명의 관계로 결합된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서 효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자들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인들의 계약관계라는 기초 위에 성립한다고 떠들었고, 반면에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계약이 아니라 계급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해명하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사회적 관계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배·착취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물론이지만, 계급적 모순이 철폐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사회적 관계는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에 기초하여 성립된다. 사회주의 체제의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에 경험담을 소개한다. 사회주의 조국을 배반하고 미제의 식민지로 넘어와 적들에게 투항했던 배신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약간 어색할 수 있겠으나, 주체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회적 관계를 체험하지 못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데 참고로 삼을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을 유지하는 힘 가운데 하나가 동지적 유대관계입니다. 직장이나 당이나 군을 가릴 것 없이 조직원간의 유대관계를 중시하고, 그것을 체제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사회가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한 분위기 아래서는 동료에 대한 비판은 관심과 격려로 받아들여집니다. 애정이 있으니까 비판하는 것이고, 비판받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를 이렇게까지 배려해준다는 생각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아비판을 하거든요. ≪귀순≫초기에 이런 얘기를 몇 차례 했더니 다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사회·정치적 생명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발현된다.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는 계급적 모순이나 계급적 차이에 의해서 형성된 관계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지도자, 국가수반과 대중의 관계는 사회계급에 기초하여 형성된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령과 대중의 관계는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로 결합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다. 그러므로 수령에 대한 대중의 관계에 존재하는 혁명적 동지애와 혁명적 의리를 ≪충성≫, ≪효성≫과 같은 의리관계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충성과 효성은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결합된 의리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만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점에서 이탈하여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 ≪충성≫, ≪효성≫과 같은 의리관계의 개념은 봉건주의적 개념으로 오해될 수 있다.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 가운데는 ≪숭배≫라는 말도 있다. ≪숭배≫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높이어 우러러 공경한다는 뜻이다. 참 좋은 말이다. ≪숭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도 역시 그 말을 주로 신적 존재를 우러러 모시는 종교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종교집단의 숭배대상인 신적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이므로, 사람이 허구적 관념을 숭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집단이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 자체를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수령숭배를 종교집단에서의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로 바꾸어놓고 이른바 ≪개인숭배≫라고 왜곡·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숭배라는 말이 주는 언어감각에 대해서 저들이 자행하고 있는 두 종류의 교활한 책동이다.

첫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수령이라는 사회·정치적 개념을 개인이라는 비사회·비정치적 개념으로 대체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수령은 개인이 아니다. 수령은 사적 관계 속에 성립되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인민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회·정치적 존재다. ≪개인≫이라는 개념은 인민대중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성립되지만, 수령이라는 개념은 오직 인민대중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된다. 만일 인민대중이 없으면 수령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대도 진리이다.

수령이라는 말을 영어권에서는 흔히 leader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는 데, 그 말은 어떤 집단의 지도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며, 인민대중과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로 결합된 수령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수령이라는 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라 한자문화권에서 옛날부터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영수라는 말도 사용한다. 수령이나 영수라는 말은 원래 최고의 정치지도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주의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진리가 밝혀진 이후에 수령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둘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높이어 우러러 공경한다는 뜻의 숭배(admiration)라는 말을 광신적인 소수집단이 신적 존재에 대해 열광한다는 뜻의 숭배(cult)라는 말로 대체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교회, 사찰, 사원 등에서 진행되는 종교행위에 대해서는 숭배(cult)라는 말을 쓰지 않고 흔히 예배(worship)라는 말을 쓴다. cult라는 말에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소수집단의 종교행위, 이성을 잃은 광신적 종교행위, 정통성을 갖지 못한 이단적 종교행위라는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숭배는 원래의 말뜻 그대로 수령을 높이어 우러르고 공경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회주의 체제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충성≫, ≪숭배≫라는 말은 봉건주의 체제에서 사용했던, 그리고 종교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런 왜곡된 의미와 기능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사회주의 체제의 인민대중이 자기의 수령에 대하여 충성심과 숭배심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충성과 숭배는 인민대중이 수행하는 어떤 사회적 기능이 아니다. 인민대중이 수령에 대해서 충성과 숭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충성과 숭배는 수령에 대한 인민대중의 관계, 다시 말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관계의 한 측면을 표현한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사용되는 ≪충성≫, ≪숭배≫라는 말이 인민대중에 대한 수령의 신뢰, 사랑이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사회·정치적 관계와 그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계급사회의 특정한 사회·역사적 경험 속에서 길들여진 언어감각의 문제다.

계급사회의 사회·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신뢰나 사랑이라는 말은 사적 관계와 그 현실을 표현하는 도덕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수령과 대중의 관계의 한 측면을 표현하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개념은 그러한 통념과 전혀 다르다.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왜 사적 관계와 그 현실만을 표현하고, 사회·정치적 관계와 그 현실은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사적 관계는 도덕적일 수 있어도, 사회·정치적 관계는 철저하게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사회체제의 성격은 언어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요소다. 사회체제의 기본성격이 계급적 적대성으로 규정되어 있다면, 그러한 사회체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도 계급적 적대성에 의하여 규정을 받게 된다.

계급사회의 적대적 모순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는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한 적대적 모순관계를 극복·청산한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신뢰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고, 또 성립되어야 마땅하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관계를 도덕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신뢰와 사랑이 실현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관계에 신뢰와 사랑이 없다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되어 왔던 계급사회의 적대적 모순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단지 사적 관계와 그 현실만을 표현하는 데 한정되었던 신뢰와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주체의 사회주의가 실현됨으로써 사회·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지도자, 국가수반과 대중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계급독재의 관계로 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가 계급적 모순을 청산·극복한 체제라는 데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는 계급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계급독재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수령과 대중의 관계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되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생명체 안에서 모순과 대립성이 발생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까닭에 수령과 대중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계급독재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진리를 부정하는 궤변이며 사회주의 체제가 계급적 모순을 지닌 체제라고 주장하는 궤변이다.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왜곡선전 가운데는 이른바 ≪수령 무오류설 비판≫이라는 것도 있다. 그들의 왜곡선전에 의하면, 수령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수령에게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수령 무오류설≫은 오류라는 것이다.

수령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어디까지나 수령과 대중의 관계에 관한 사회·역사적 문제인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수령 무오류설 비판≫은 수령에 대한 인식을 사람이냐 신적 존재냐 하는 신학적 비판의 문제로 끌어들임으로써 자가당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수령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사회적 관계를 떠난 개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이므로, 수령이 사람이냐 신적 존재냐 하는 문제의식은 성립될 수 없다. 수령은 대중과의 사회적 관계를 떠나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다.

이처럼 수령에 대한 인식문제를 이미 파탄된 관념론의 극치인 신학문제로 설정하였으므로, ≪수령 무오류설≫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궤변이다. ≪수령 무오류설≫은 실제로 신학학설의 변종이다. 그것은 근대 개인주의에 기초한 개신교 신학이 봉건적 전체주의에 기초한 천주교 신학을 비판하면서 제기하였던 현대판 ≪교황 무오류성 비판≫인 것이다.

수령이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인가 아니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대중이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인가 아니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해괴망측한 질문을 제기하는 관념론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사회정치적 생명체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허무맹랑한 물음을 제기하는 관념론에 빠져있는 궤변가들이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수령 무오류설 비판≫은, 수령의 위대성을 신적인 전지전능성의 문제로 슬쩍 바꿔놓으면서 대중과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관계에서 수령이 지니고 있는 지위와 역할을 왜곡하려는 조잡한 술책이며 파탄된 관념론의 잔해다.

인민대중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힘, 곧 자기의 자주역량으로 사회·역사를 창조하고 변혁하는 위대한 존재이며, 수령은 인민대중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시킴으로써 그들을 사회·역사를 주체의 요구대로 개조·변혁하는 창조자, 변혁자로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존재다. 수령이 위대하므로 그와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합된 인민대중도 위대한 존재로 된다.

물질세계를 초월한 어떤 신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떠드는 궤변에 매달려있는 관념론자들은 신적 존재의 전지전능을 설교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지만, 무한하고 영원한 물질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 가장 힘있는 존재로 등장하여 물질세계의 참다운 주인으로 된 것은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다.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가 발휘하는 위대한 생활력은 산도 떠옮기고 바다도 메울 수 있다. 물질세계는 그 통일체의 요구대로 개변되고 있다. 그 통일체의 위대성은 인류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영도하는 영생불멸의 위대성이다.

11) ≪수령자본주의≫라는 신조어는 독설과 궤변의 극치다

사회당 지도부가 사회주의 체제에 계급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궤변을 ≪논증≫하기 위해 등장시킨 것은 ≪수령자본주의≫라는 신조어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라고 모략하였던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악질적 선동을 슬쩍 차용하여, 마치 사회주의 체제에 계급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령자본주의≫라는 해괴한 신조어를 조작하였다. 그들의 선동적 신조어인 ≪수령자본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당 지도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모든 부문, 단위, 개인의 활동들은 수령의 사상과 의도를 실현함으로써 가치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것은 수령절대체제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사실인식이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점은 사회당 지도부가 ≪수령절대체제≫를 ≪수령지배체제≫와 ≪수령자본주의≫라고 왜곡하는 독설과 궤변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이 화폐로 표현되어야만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듯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개인의 활동은 수령을 빛내는 한에서만 활동으로 취급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악질적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령절대체제에 대해서 무슨 ≪지배체제≫니 ≪독재체제≫니 하는 식의 독설과 궤변을 늘어놓은 적은 있었어도, ≪수령자본주의≫라고 하는 해괴한 독설과 궤변을 토해낸 것은 사회당 지도부가 처음이다. 그들은 독설을 토해낼 때도 일개 당의 지도부답게 선정적 신조어를 등장시킨 ≪창의적인 독설≫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들의 독설과 궤변에 의하면, ≪수령자본주의≫는 ≪부패한 수령자본주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전세계 노동자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령자본주의적 사회체제≫이며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사회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수령이라는 화폐도, ≪우리 사상 제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우리 군대 제일주의≫라는 강권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수령제일주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사회주의의 최악의 변형태를 수령자본주의라는 국가자본주의의 최악의 변형태로 이행시키기 위한 지렛대가 된다. ≪우리 제도 제일주의≫는 그리하여 ≪수령자본주의 제일주의≫가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당 지도부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과 화폐의 관계를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수령과 대중의 관계라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과 화폐의 관계문제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노동이 화폐로 표현되어야만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과 자본이 적대적 모순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확립됨으로써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관계가 폐절된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이 화폐로 표현되지 않아도 노동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당 지도부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문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계급적 관점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12) 사회주의 체제에는 자본의 지배와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모순이 극복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어떻게 하여 노동의 가치를 부여받는가? 단순하고 무지한 사회당 지도부의 독설에 대한 해독작용으로 부연설명을 덧붙이겠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생산활동의 주체인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사회화, 집단화되지만,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왜곡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의 개별적 생계수단으로 전락하며, 또한 노동은 자본가계급에게 판매되어 착취당하는 노동력으로 전화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은 착취로부터 해방된 노동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로자(노동자, 농민, 지식인)는 착취계급을 위해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노동하지만, 사회주의적 생산활동의 주체인 근로자는 자신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노동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근로자의 노동은 두 가지 가치를 창출한다. 하나는 근로자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노동함으로써 생겨나는 개별적 가치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노동함으로써 생겨나는 사회적 가치다.

사회주의 체제의 근로자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말은 그의 노동이 사회적 창조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사회주의적 노동은 사회적 창조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창조라는 말에서 ≪사회적≫이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적 생산활동의 주체인 근로자가 노동의 가치를 자신의 개별적 생계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창조≫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적 생산활동이 시장에서 화폐로 표현되는 노동력으로 전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은 매매불가능한 ≪노력≫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매매가능한 ≪노동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력의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에게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로 받는 임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계급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다.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다는 것은 과학적 인식이 결핍되어 있는 통속적인 표현이다. 그 표현을 과학적인 인식으로 다시 해설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과 국가기구의 관계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국가기구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활동을 벌이고 그 생산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사회적 가치를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그런 국가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자기의 생산활동을 통하여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노동계급이 전 사회적으로 분배할 수 없으므로, 국가기구를 통하여 분배하는 사회주의적 분배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기구는 노동계급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그 노동계급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전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기능을 대리적으로 수행한다.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계급은 왜 자신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스스로 전 사회적으로 분배하지 못하고 국가기구를 통하여 대리적으로 분배할 수밖에 없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사회주의 사회가 아직 노동계급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는 노동계급 이외에도 협동농민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협동농민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노동계급화하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의 최종 목적인데, 현실 속의 사회주의 사회는 그 목적을 아직 실현하지 못한 과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과도적 성격 때문에 노동계급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 그리고 협동농민과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창조한 사회적 가치를 상호교환하고 분배하는 것은 국가기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기구의 지휘기능에 의하여 집단화, 조직화되기 때문이다. 장차 사회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전하여 협동농민이 농업노동자로 전환되고 비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노동계급화되는 높은 수준에 이르더라도, 사회적 가치의 교환과 분배는 국가기구의 지휘기능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현재의 형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교환과 분배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기구가 사회적 가치의 교환과 분배를 수행하는 원칙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노동강도, 노동조건, 노동의 사회적 기여도 등에 의하여 결정된다. 근로자의 노동은 양과 질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 그 원칙은 많이 일한 근로자, 유해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근로자에게는 더 많이 분배한다는 원칙이다.

그 분배원칙에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이 받는 생활비는 양적 차이를 보인다. 일종의 소득격차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생겨나는 이른바 ≪소득격차≫(실제로는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착취의 결과)와 비교한다면 미미한 차이에 불과하다.

사회주의 체제의 집권당과 국가기구에서 일하는 관료들과 사회주의 체제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적용되는 분배원칙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당과 국가의 관료라고 해서 노동자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분배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 혹시 사회주의 체제의 당과 국가의 일부 관료들이 반인민적 관료주의에 빠져서 그 분배원칙을 어기는 범죄의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집권당과 국가의 관료들 속에 천문학적 금액의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는 것에 비교한다면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기구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배를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착취와 동일한 것으로 왜곡하면서 이른바 ≪국가자본주의≫라고 비난·모략한다.

원래 국가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국유화)하는 자본주의적 소유의 한 형태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생산수단의 국가자본주의적 소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 승리한 이후에 국가권력을 장악한 민족부르조아지들이 식민지 낙후성을 극복하고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막아내는 자립경제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개별적 자본가 대신에 국가기구가 총자본가로 등장하여 노동계급과 인민에게 계급적 착취를 가하는 유형이 있다.

둘째, 독점자본에게 장악된 국가기구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유형이 있다. 이것은 독점자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적 기업을 국유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임금을 지불하지만, 사회주의 국가기구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기구와 노동계급의 관계는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가 아니다.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매매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에서 발생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계급을 고용하고, 그들의 생산활동에서 창출된 이윤을 구조적으로 빼앗는 착취체제인데, 사회주의 국가기구가 자본가계급을 대신하여 노동계급을 착취한다는 궤변 중의 궤변은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악선전이다.

 

13)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국가기구의 역할

사회주의 혁명에 의하여 수립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의 계급적 본질은 질적으로 변화된다. 적대적 계급모순에 의하여 성립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부르조아 계급독재의 도구로 되지만, 적대적 모순이 해소된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로 근본적인 성격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기구의 계급적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근거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지향과 요구는 완전히 부합된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국가관과 일치한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노동자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다.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파악하는 종래의 이론에서는 사회주의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인민적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여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차츰 사라질 것으로 예견하였다. 이 때 국가는 철폐되는 것이 아니라 조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 체제에서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고 전 인민이 노동계급화되어 가는 과정은 곧 국가가 조락하는 과정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국가조락론이다.

그런데 국가조락론에서는 세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 보인다.

첫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가의 조락을 사회주의 체제가 최고도로 발전한 결과로 보았다.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된 사회·경제적 관계가 최고도로 발전하면 국가는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차츰 조락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최고도로 발전한다는 의미는 생산양식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회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을 생산력으로 파악하였음을 말해준다. 국가조락론은 사회주의적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이론이다.

그러나 생산력을 사회주의 체제 발전의 결정적 요인으로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김일성주의는 사회주의 체제 발전의 결정적 요인을 생산력이 아니라 사상으로 보았다. 사회주의 체제는 그 체제의 구성원들의 사상을 노동계급화하고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여야 발전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의는 사회주의 체제가 자체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기술혁명과 함께 사상혁명과 문화혁명을 포괄하는 3대 혁명을 수행함으로써 통전적으로 발전될 것이라고 해명하였으며, 3대 혁명 가운데서도 사상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상혁명을 선차적 임무로 규정하였다.

둘째, 국가조락론은 국가와 계급의 관계만을 중시한 나머지 국가와 민족의 관계를 간과하였다. 특정한 계급은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생성·발전·소멸하지만, 민족은 특정계급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가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되고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여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고 사회성원 전체가 노동계급으로 단일화되더라도 민족은 존속할 것이며, 민족적 차이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계급사회의 국가는 계급지배의 도구이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국가는 민족적 발전의 도구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민족적 발전의 도구로서의 국가기능은 존속될 것이다.

셋째, 국가의 조락이라는 것은 엥겔스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관계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조락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조락은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제의 조락이라는 뜻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가가 조락한 이후에는 공산주의적 자치가 실현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처럼 국가조락론은 국가기구와 시민사회를 일단 불화의 관계로 파악한다. 사회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사회에 간섭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강제하고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국가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만일 사회주의 국가가 조락한다면, 사회주의 집권당도 국가와 함께 조락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 물음에 대한 명백한 답변은 찾을 수 없지만,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사회주의 국가와 함께 조락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이 사회주의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지도하는 것은, 그 국가가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다.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인 국가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협동농민과 근로인텔리를 비롯한 비프롤레타리아 근로대중을 사회주의 건설로 이끌어 간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간섭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영도에 따라서 사회성원들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길로 이끌어가며,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의 전취물과 사회성원들을 옹호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서 간섭자, 강제자의 역할이 아니라 안내자, 옹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 임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경제적 임무는 무엇인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계급에게 그들의 생활에 요구되는 물질을 공급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국가기구다. 사회주의 국가기구의 공급체계에는 무상공급과 저가공급의 두 형태가 있다. 노동계급은 국가기구로부터 화폐형태로 분배받은 생활비를 가지고 저가로 공급되는 물질을 구매하고 자기의 생활에 이용한다. 이를테면 식량과 기초식품, 생활필수품, 전기, 수도를 무상공급 또는 저가공급의 형태로 구매하고, 주택, 교육, 의료, 휴양시설, 문화시설, 도로 등을 무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에는 시장경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자본주의적 상품도 존재할 수 없다. 시장과 상품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매우 소박한 것은 당연하다. 시장과 상품으로 와글거리며 핑핑 돌아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감각으로 그 사회를 볼 때, 그 쪽은 사회 분위기가 왜 그렇게 조용할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낙후성과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지적하는 한심한 사람도 있다. 실제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평양 거리의 모습은 매우 소박하고 한적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는 시장과 상품으로 들끓으며 복잡해야 정상이고, 사회주의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는 소박해야 정상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목표는 현재 과도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시장과 상품마저도 종국적으로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과 상품을 얼마나 없앴는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척도가 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발전척도는 시장과 상품이 얼마나 지배적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경제적 발전척도는 시장과 상품을 얼마나 소멸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특정사회는 그 자체의 발전척도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국가기구가 노동자에게 공급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인민소비품이다. 인민소비품과 상품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 물건의 가격이 시장에 의하여 결정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데 있다. 똑같은 생산물이라도 그 가격이 시장에 의하여 결정되면 상품으로 되며,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경제시책에 의하여 그 가격이 결정되면 인민소비품으로 된다.

사회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시장, 상품, 화폐는 과도적으로 잔존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는 물질·경제적 생산력이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한 과도체제이므로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이 자기의 생활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은 자기의 생활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질을 국가기구를 통하여 충분하게 분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국가기구가 분배하지 못하는 물질을 국영상점, 조합상점, 농민시장에서 화폐로 구입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과 상품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화폐의 기능도 또한 현저히 축소된다.

 

14) ≪국가사회주의≫에 관한 사회당 지도부의 왜곡선전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과 왜곡선전에 종종 등장하는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과 동의어다. ≪국가사회주의≫는 국가기구가 사회경제발전을 지배하면서 정당한 분배, 노동조건 개선,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다. ≪국가사회주의≫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다. 근대 독일의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듯이, ≪국가사회주의≫는 민족사회주의로 변모하였고 결국 히틀러의 극악한 파시즘으로 전화되었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파렴치하게도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왜곡하였다. 그들의 비난과 왜곡선전에 따라오는 것은 이른바 ≪당의 독재≫와 ≪국가기구의 행정명령체제≫라는 따위의 용어들이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당관료들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당의 독재≫라고 왜곡하였고, 국가관료들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국가기구의 행정명령체제≫라고 왜곡하였다. ≪전체주의 국가≫ 또는 ≪병영국가≫라는 왜곡선전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관료적으로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악선전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따위의 왜곡선전들은 흔히 ≪반스탈린주의≫라는 구호로 통칭된다.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집요하게 자행하고 있는 왜곡선전, 즉 ≪반스탈린주의≫로 통칭되는 왜곡선전에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고유한 본성인 집단주의를 전체주의로 왜곡하였다는 사실이다. 개인주의가 전체를 허구적 관념으로 보고 개체만을 실체로 인정하는 궤변인 것처럼, 개체를 허구적 관념으로 보고 전체만을 실체로 인정하는 전체주의도 역시 궤변이다.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체주의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집단주의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사회적 의식에 대비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총체에서 규정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라는 진리에서 도출되는 사회관에 기초하는 이념으로서,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양극적 궤변을 모두 반대한다. 집단주의는 인간이 개별적으로 분리·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집단으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내포하는 이념이다.

둘째,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집권당과 국가기구의 관료들에게 나타나는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물고 늘어지면서 ≪반스탈린주의≫로 통칭되는 왜곡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가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는 그러한 통제와 형식주의가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에서 아직 청산되지 못한 비사회주의적 요인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일종의 시행착오라는 점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인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과 지시만을 내리고 인민의 요구와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 그리고 당과 국가의 관료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 범죄행위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관료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는 그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행정에서 발생하는 비사회주의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행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조아계급의 지배와 착취는 그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만일 사회주의 체제에서 당과 국가의 관료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던 관료주의 통제와 형식주의가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지배와 착취처럼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으로서 가혹하고 폭력적이었다면,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가 존속했던 기간동안 그 체제 안에서 반사회주의 폭동이 수없이 전개되어야 했었고,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는 전인민적 항쟁에 의해서 타도되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본다면, 1956년에 헝가리에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사회주의 폭동이 일어난 것과, 1980년대 폴란드에서 반사회주의 노동자파업투쟁이 일어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기인 1989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난 바 있었다. 헝가리, 폴란드, 알바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이 선거에서 패함으로써 ≪평화적으로≫ 퇴진하였다.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는 반사회주의 인민폭동에 의하여 타도된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해결하지 못하고 인민과 유리됨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가다가 결국 와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관료주의적 통제와 형식주의를 발생시킨 것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서식하였던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집요한 암해책동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부패·타락한 관료와 인민대중의 관계는 분명히 모순관계다. 그렇지만 그 관계에서 발생된 모순은 사회주의 체제를 해체하지 않고, 사회주의 체제의 내부혁신에 의해서 얼마든지 해소·극복될 수 있었고 또한 해소·극복되어야 했던 그런 모순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적, 근원적으로 해체하지 않고서 개량 또는 개혁에 의해서 해소·극복될 수 있는 모순이 아니다. 그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발생되는 근원적인 것이다.

그런데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에 존재하였던 부패·타락한 관료와 인민대중 사이의 모순과 자본주의 체제에 존재하고 있는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면서 내놓은 것은 관료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민주주의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혁신해야 한다는 궤변이었다. 저들이 그러한 궤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을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구호≫는 신통하게도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악선전을 그대로 닮았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한편,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수령자본주의≫라는 용어로 슬쩍 바꿔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따위의 어설픈 모방이 무슨 굉장한 것인 양 떠들었다.

≪국가사회주의≫에 관련한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악선전은 이미 오래 전에 서구의 강단과 언론에서 나돌아다니다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기에 이르러 맹위를 떨친 바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주위의 관심조차 별로 모으지 못하는 케케묵은 궤변이다. 그런데 사회당 지도부가 유행이 지난 낡은 수입품을 이제서야 들고 나오면서 약간의 소동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아마 오래 전에 이 땅에 수입된 부르조아 디마고그들의 반사회주의 선전물을 최근에 뒤늦게 탐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말하는데, 사회당 지도부가 반사회주의 선동을 하려면 때를 가려보고 해야 하지 않을까?

 

결론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적 입장, 민주적 사회주의의 다양한 조류, 신자유주의적 왜곡 이전의 전통적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신좌파적 조류, 급진적 조합주의자, 여러 형태의 노동자주의, 환경생태주의의 여러 경험들, 근본적 평화운동, 여성주의의 여러 경향, 소수자 운동, 급진적인 인권운동, 심지어 급진적 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경험을 포괄하고, 의사소통과 민주주의적 경쟁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색적인 사조들을 모두 포괄하겠다는 사회당 지도부의 야심적인 주장이다. 이 주장이야말로 그들이 ≪사회주의≫라는 차명으로 출몰한 기회주의 집단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원래 기회주의의 이론적 기초는 해당 사회에 풍미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색적인 사조들을 잡탕으로 뒤섞어놓은 절충주의다. 절충주의는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사회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자칭≫...는 세력들이 제각기 사회주의 세력임을 자처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반도 식민지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적 스펙트럼의 요란스러운 분광에 넋을 빼앗기고 있어서는 안 되며, 눈길을 사상의 광원으로 돌림으로써 그 광원에서 분출되고 있는 무한한 사상·정신적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상의 광원은 김일성주의다. 조선반도 식민지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의 광원인 김일성주의에 의하여 전개되는 김일성주의 운동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일성주의 운동은 20세기에 등장하였던 온갖 사회주의 운동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 미 제국주의 세력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광분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시련기에도 주체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혁명활동을 더욱 위력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김일성주의의 세계관적 진리와 사상적 위대성과 혁명적 생활력을 실천으로 입증하였다. 자주시대의 사회주의는 다름 아닌 김일성주의이며, 21세기의 진보적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은 곧 김일성주의 혁명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민족민주운동진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과 ≪근본적 평화운동세력(사회당)≫의 대각이 존재하고 이 사이에 ≪반조선로동당 입장 표명을 주저하는 평화적 통일운동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광범위한 집단이 있다.≫

그들의 자의적인 분석에 따르면, 민족민주운동진영은 대략 삼등분된다. ≪조선로동당 추종세력≫, ≪조선로동당 반대세력≫,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중간세력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민족민주운동진영을 이처럼 조선로동당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중심으로 하여 적아로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당 지도부가 조선로동당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중심으로 하여 운동진영을 구분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 의도는 명백하다. 그들은 조선반도 식민지에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여러 종류의 진보적 사회·정치운동들 가운데서 이른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배제되어야 할 세력은 조선로동당 추종세력, 그리고 구태의연한 반미지상주의, 민족제일주의, 통일지상주의 세력≫이라고 서슴없이 떠들고 있다. 이 지점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회당 지도부의 의도는 노골적이다. 그들은 조선로동당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중간세력,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평화적 통일운동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른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을 고립·배제하고 자기들이 운동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해보려는 것이다.

그들은 ≪반조선로동당 선언은, 일차적인 청자를 조선로동당이 아니라 한국에서 조선로동당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하여 행해진 발언≫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말이다. 그들은 ≪조선로동당을 추종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조선로동당의 지도사상, 역사, 한반도 정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사회체제에 관한 포괄적 논쟁을 통하여 계몽하고 낡은 미신을 타파해야≫한다고 떠들어댄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사회당 지도부의 ≪반조선로동당 선언≫은 그들이 품고 있는 종파주의적 적대감의 투영이다. 민족민주운동진영을 자기들 편이 아니면 적으로 분할하면서, 이른바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을 고립·배제해보겠다는 의도는 종파주의적 범죄심리의 발로다.

어느 나라의 운동사에서건 종파주의자들은 언제나 운동진영의 주변부를 뱅뱅 맴돌면서 운동진영의 중심부를 중상·모략한다. 종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진리라고 믿는 궤변에 대한 맹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현실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저하되어 있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사회당 지도부가 내놓은 ≪반조선로동당, 반자본주의 선언≫은 종파주의자들의 그러한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당 지도부는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고 운동진영의 광범위한 중간세력들에게 사회당이냐 아니면 ≪조선로동당 추종세력≫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반북≫이냐 ≪종북≫이냐를 선택하라는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강요다.

사회당 지도부의 어법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어법은 놀랍게도 일치한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반테러 선언≫을 내놓고 전 세계를 향해서 ≪테러반대≫냐 아니면 ≪테러지지≫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당 지도부는 ≪반조선로동당 선언≫을 내놓고 조선로동당에 대한 반대냐 지지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한 줌도 안 되는 극소수 기회주의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운동진영을 양분하려는 것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행위를 흉내내려는 범죄적 모방심리가 빚어낸 가소로운 짓이다.

세계혁명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을 배신한 현대 수정주의자들이며 너절한 기회주의자들이 어떻게 변질·타락하였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카우츠키, 베른스타인, 쉬미트, 애들러로 이어지는 추악한 수정주의 종파들은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을 배신한 뒤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부르조아지들과 야합하여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공격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출몰하면서 노골적으로 반공노선을 들고 나왔다. 1947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그것이다.

수정주의자들과 사회개량주의자들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부정하면서 기회주의적인 계급화해론을 설교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것이므로 자본주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타파할 것이 아니라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더욱 확장하고 부르조아 의회에 진출하여 정치세력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수정주의는 언제나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그 운동을 갉아먹는 악성 박테리아였으며, 사회개량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운동 외부에 존재하면서 그 운동을 망쳐놓는 파괴자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집권당에 침습했던 현대 수정주의의 종파적 탁류는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서거한 뒤에 열렸던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1956년 2월)에서 본격적으로 방류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관료주의적으로 왜곡되었으므로 이를 혁신해야 한다는 이른바 ≪사회주의 혁신론≫을 들고 나왔다. 그로써 그들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 비판≫을 떠들면서 이른바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화해론≫을 제국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사이의 ≪체제화해론≫으로 전환시켜놓고서, 이른바 ≪제국주의자들과의 평화공존≫,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세계전쟁 불가피론에 대한 수정≫,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등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는 고도로 발달된 미래의 새로운 산업사회로 수렴될 것이라는 궤변도 서슴없이 늘어놓았다.

현대 수정주의의 괴수 흐루시초프가 장악한 소련공산당은 1957년에 ≪산업의 분산화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체계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흐루시초프 자신이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열었으며, 1962년에는 미 제국주의 세력의 정치·군사적 압박에 굴복하고 쿠바에 배치했던 미사일을 철수하는 투항정책으로 나오면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유린하였다.

그렇다면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기치를 들었던 소련공산당이 어찌하여 그처럼 어이없게 현대 수정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장악되었을까? 그 원인을 소급하여 추적해 올라가면, 1936년에 채택된 새로운 헌법에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이른바 ≪전인민적 국가≫로 이행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전인민적 국가로 이행하였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사라지고 이른바 ≪전인민적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공산당의 착각이었다. 당시 스탈린이 이끌었던 소련공산당은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고도의 발전단계에 이르러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조락하면서 ≪전인민적 국가≫로 이행하였다고 착각하였던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혁명과 건설을 위하여 투쟁하는 장구한 행정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성급하게 폐기하는 것은 명백한 우경적 편향이었다. 그 우경적 편향은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세계혁명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되었으며, 다시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소련공산당을 현대 수정주의가 침습·장악하게 만든 사상적 원인으로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한 오류 때문에 소련공산당은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세계혁명의 수행과정에서도 역시 소극적이고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제국주의 세력과의 절충과 타협을 능사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중대한 시기에 소련공산당은 조선, 독일, 오스트리아를 분할·점령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의 책동을 단호하게 격파하지 못하고 절충·타협했으며, 전후 만주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장개석 반동정권과 밀약을 맺음으로써 제국주의 세력에게 유리하게 양보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스탈린 시기의 소련공산당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하는 우경적 편향이 발생하였던 근본원인은 또 무엇일까? 그 근본원인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오류에 있다. 자연사의 진화과정과 사회·역사의 발전과정을 동일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적 원리로 해명하였던 오류를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오류는 사회주의 자동발전론, 제국주의 자동소멸론으로 재생산되었다. 자연이 진화과정을 자동적으로 밟아가듯이, 사회주의 체제도 자동적으로 발전되고 제국주의 체제도 역시 자동적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제국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회피하는 ≪혁명전쟁 회피론≫을 불러오게 되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려는 혁명노선을 폐기하고 그 체제와 평화적으로 공존·경쟁하는 현대 수정주의 노선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른바 ≪사회주의 자동발전론≫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사회·역사의 발전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의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과업으로 국한시키는 ≪생산력주의≫의 편향을 불러왔다.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동인을 혁명과 건설의 주체에서 찾지 못하고,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찾으려 했던 소련공산당을 묶어놓았던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오류였다.

소련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한 우경적 편향에 기울어졌던 때로부터 30년이 지난 1986년 2월에 열렸던 소련공산당 제27차 대회에서는 현대 수정주의의 종파적 탁류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들은 ≪현실주의 노선≫이라는 구실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기업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자영업을 촉진함으로써 개인의 권리, 자유, 복지를 향상시키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개방과 경제협력을 추진하였으며, 제국주의자들과의 군축협상을 시작하였다.

1956년의 20차 당대회에 등장했던 후르시초프에서 시작하여 1986년의 27차 당대회에 등장했던 고르바초프로 이어진 일군의 사회주의 배신자들은 30여 년 동안의 집요한 반사회주의 암해책동 끝에 ≪개혁≫과 ≪개방≫이라는 투항의 백기를 들고 미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았으며(1989년 12월의 몰타회담),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를 와해시키고 말았다.

그 충격적 파장에 휘말린 독일민주공화국, 폴란드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사회주의공화국, 헝가리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 알바니아인민공화국, 불가리아인민공화국, 루마니아사회주의공화국 등 8개 나라에서도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은 사회주의 혁명의 패배가 아니라 현대 수정주의, 기회주의의 파산을 의미한다.

중국공산당은 1982년에 이른바 ≪유(唯)생산력론≫이라는 간판을 내건 뒤로 지난 20년 동안 차츰 ≪시장사회주의≫로 변질되었다. 2000년 2월 25일에 장쩌민은 이른바 ≪3개 대표론≫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 발전요구를 대표하고, 중국의 선진문화 창달을 대표하며, 중국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현대화 과업≫의 수행이라는 미명 아래 자본가의 입당을 허용하였다. 베트남공산당은 1986년의 6차 당대회에서 이른바 ≪쇄신정책≫의 간판을 내건 뒤로 차츰 ≪시장사회주의≫로 변질되었다. 중국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노선을 폐기하고 생산력 중심의 사회주의 발전노선을 들고 나오면서 소련공산당의 우경적 편향과 그에 따른 정치적 실패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

현대 수정주의의 종파적 탁류가 소비에트형 사회주의 체제를 몰락시켰던 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 바로 그 탁류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출몰하였다. 오랜 사상적 혼란기를 벗어나 날로 장성·발전하고 있는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저해하기 위해서...

세계혁명사의 역사적 경험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을 배신한 추악한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세력은 언제나 혁명운동 안에서 출몰한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철학적 세계관의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진리를 제거하고 부르조아 반동이론으로 대체하려고 날뛴다. 그들은 정세변화에 따라 적아 사이에서 끝없이 동요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반혁명세력과 손을 잡고 미 제국주의 세력에게 투항하게 될 것이다.

현대 수정주의, 기회주의 종파세력은 현란한 혁명적 언사로 치장한 궤변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잠시 기만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코 민중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독설과 궤변을 토해내고 있는 그들은 민중으로부터 고립되고 배척을 받아 결국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지난 20세기 후반에 혁명적 언사를 남발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주의 원칙을 제거하고 노동계급을 배반했던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비참한 말로가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