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것, 그 이야기들에 삶의 한편을 담아내는 것, 표현들 모두 놀랍다. 숨막히게 읽었다.

 

 

내가 만난 사람이 남파공작원인지 안기부 직원인지,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보았던 야바위꾼은 애초 그곳에 없던 게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고문을 받으며 호접지몽을 떠올렸다면, 일상이 호접지몽이 아니어야 할 필연은 없다. "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 외로운 사람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뻗고 있다. 보아줄 이를 만나기 위해 수십억 광년을 건너온 별빛처럼, 들어줄 이를 만나기 위해 산과 바다를 넘어온 라디오 전파처럼. 하지만 이 손들은 서로 맞닿지 않아 엉뚱한 곳에 가닿기도 한다. 우주는 손들이 빈틈없이 가득차 허허로운 공간이다. 손과 손이 엇갈려 스치기도 맞닿기도 하는 곳. 우리의 인연은 애초 그런 것일지 모른다. 방향을 잃은 내 빛과 너의 빛이 우연히 만난 것. 하지만 그 우연은 입체누드사진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애초 어느것이 우연이고 어느것이 필연일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순수한' 개인이란 이데올로그들의 강변에 불과하므로" 누군지 알 수 없는 나와, 우연인지 필연인지도 모를 관계들이 오히려 나에 대한 본질에 더 가깝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나를 나라고 정의해주던 모든 것들이 의미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 '마치 지금 막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들을 느끼듯이', '막 태어나 바다를 마주한 갓난아기처럼' 나의 감각만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느끼고, 새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세상은 오롯이 내 것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것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어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평생을 내달린다. "우리의 감각은 가끔씩 우리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 순간을 기약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우리. 아무리 내 정체가 의심스러워도, 보증해 줄 이 하나 있다면. 그 끈과 끈들이 얽히면 살아갈만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평생 540000번 웃고, 3000번 운다. 우리의 삶을 있는대로 그린다면, 180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빼먹어서는 안된다. 김하경씨의 '송어의 꿈'을 덧붙이자면.

 

노동현장 얘기만 나오면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표정이 굳어진다…… 나도 그랬다. 살림살이가 스산한 철거현장을 찾아가기 전에도 그랬고, 구사대에게 두들겨 맞은 조합원들을 방문하기 전에도,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도 그랬다.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참 묘하다. 막상 현장을 찾아가보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참담한 비극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붕대 감은 손으로 여전히 먹고 마신다. 다리를 절룩이며 웃고 떠들고 농담까지 나눈다. 슬픔, 분노, 절규만이 가득 차 있을 거라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다. 

 

 

다음으로 '밤은 노래한다'를 읽어야겠다. 김연수 작가, 훌륭해. ㅠ

2010/09/06 14:18 2010/09/06 14:18

박헌영 평전

지난 여행 때, 박헌영 평전을 읽었다.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는데, 박헌영에 대해 모르고서는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 읽어봐야겠다 맘을 먹었다.

 

박헌영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 모진 시기를 생존한 것 만으로도 경이로웠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버티게 했을까?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드나..

버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오류를 남겨선 안되었을테고, 자신이 믿고 있는 것 역시 오류여서는 안되었겠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만큼의 신념을 갖고 그것에 헌신하는지가 항상 궁금하다. 나에게 불신이 배어있다.

 

그 조그만 자리를 두고도 파벌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서글프다. 그런데 그 파벌싸움 또한 진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해보면 힘이 빠진다. 인간이란 서로 속을 완전히 내보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어긋날 수 밖에 없는걸까? 이렇게 근본적으로 이러저러하다는 답을 구하려 하면 지금 발딛고 있는 것 모두가 무가치해진다. 스탈린은 스탈린 나름의 진심이었을까? 김일성은? 아니었을거야. 그러니 선을 긋는 건 가치없는 게 아니야. 정말? 모르겠다..

 

숙청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단어다. 나름 명망가들도 숙청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사람들, 어느 길거리에서 변명한 번 못해보고 죽었을 사람들, 이름조차 남아있지 못한 사람들.. 한 사람의 생명이 개미만큼 가벼워진다. 그런 작아짐은 또 한 번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대의를 위해서 라든지, 그런 거 아니라는 거 다 알잖아..

 

해방 이후 오히려 더욱 운신할 폭이 좁아지고,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절멸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었을까? 남로당.. 이현상.. 빨치산..  올해 지리산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빨치산이다.

한국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떠나, 그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해방을 위한 전쟁으로 생각했으리라는 것, 최소한 빨치산들은 자신들이 구조되기를 바랬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르는 정도에서만 찾고, 침략 자체가 비윤리적인 일이었다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여왔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어느 쪽이 먼저 침공했느냐는 무자르듯 판단할 수 없고, 핵심적인 문제도 아니다. 당시 정세에서는 조건에 따라선 정말 계급투쟁으로서 내전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필요한 질문은 이런 계급투쟁으로서의 전쟁은 올바른가? 저 사람들이 죽어야만 혁명을 할 수 있다면 그 혁명을 해야하는 건가? 저곳을 거치지 않는 길은 없는 걸까? 누구 말마따나 계급투쟁은 장난이 아닌데, 그곳에서 평화를 이념으로 가진다고 대항폭력이 아닌 다른 정치가 가능할까?

 

북에서도 버림받은 채 지리산에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한사람, 한사람 삶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을까. 하지만 또, 이런 이야기들이야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많을 것인가.

 

박헌영 평전을 읽고나서, 우연히 책을 들추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얼핏 읽게 되었는데 이현상이란 이름이 나온다. 그 내용들이 예사로 읽히지 않았다. 알고 읽어야 그만큼 보인다.

 

여운형에 대해서도, 조봉암에 대해서도 읽어봐야겠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는 논문 모음인데, 무턱대고 읽기엔 너무 난해하다. 논문 형식이라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죽 서술하지 않고 비교를 위해 다른 입장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애초 그 시기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뭐 어쩌라고'만 연신 튀어나온다.

우선 사람 중심으로 읽는 게 더 좋겠다.

2010/08/10 23:12 2010/08/10 23:12

유령작가

재밌게 봤다.

 

이완 맥그리거. 훈남.

 

전쟁의 책임을 권력자 혹은 권력집단에게 돌릴 수 있을까 싶은데, 영화가 그것 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허긴, 아담 랭은 자신이 테러와 전쟁을 치른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갖고 있으니. 아담 랭 나쁜 놈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닌 듯 싶다.

 

아무튼, 영화는 무엇이 대상조차 없는 영속하는 전쟁을 요구하는지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편이 어설프게 답을 던지는 것 보다는 나을 듯 싶다.

2010/08/08 13:07 2010/08/08 13:07

목적론/종말론

'목적론 대 종말론: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대화'

(- 에띠엔 발리바르) 후기

 

목적론종말론을 굳이 구분하려 생각해본적 없었고, 둘 다 형이상학의 한 형태일 뿐 역사의 시작과 끝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각해야할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다 이 글에서 데리다가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하고, 목적론에 대한 대안으로 종말론을 제시한다는 내용을 읽으며 종말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종말론을 후쿠야마류의 역사의 종언으로 생각해왔는데, 철학적 의미에서 종말론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겠구나 싶다. 우선 알튀세르에게 있어 목적론역사에서의 단일한 기원을 상정하고, 그것이 헤겔적인 전개를 거쳐 단계/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발리바르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이미 주어진 목적의 실현으로서 역사적이고 지적인 과정,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목적을 갖는 과정에 대한 교리)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와 같은 목적을 향해 역사가 진화해간다는 의식에 목적론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맞게 이해한 거라면, 데리다가 목적론과 구분짓는 종말론은 앞으로 올 (해체불가능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불가능성을 명령ㆍ소환하는 PT의 메시아성(마르크스의 유령적 요소)과 관련된다. 이 메시아에 의한 심판은 임박한 혁명과 혁명적 운동의 분열이 역설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이고 결과가 발본적으로 불확실하다.

 

나의 현실적인 고민으로 질문을 옮겨보면, 소위 Turning point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의 결정적 국면이 존재할 것인가, 역사의 어느 한 국면을 특권화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만약 특권화 시키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1917의 러시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등이다. 대중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순간, 그 임박한 파국의 순간, 심판의 순간을 상상치 않는 운동은 가능할 것인가? 사실 이런 류의 종말론이라면 나를 비롯한 주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고,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마르크스 또한 부단히 진동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이지도 않은 대안, 발본적으로 유물론적인 대안을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고 주장한다. 목적론과 종말론을 구분짓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역사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목적 뿐만 아니라 종언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고, 목적론/종말론이 아닌 변증법으로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 진정 '유물론'적이라는 것이 데리다-알튀세르 사이에 유예되었던 대화의 결론으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내용이다. 유물론적 태도에서 변증법은 변혁을 장기적인 이행으로 사고하고, 따라서 역사를 끊임없는 과정으로 사고(미래는 오래 지속된다)하며 그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것(철학에서 유물변증법, 경제에서 논리와 역사의 결합 등)을 끌어내려는 내재적 비판이 진정 마르크스적인 것이고,  역사의 목적/종언이라는 관념론과 단절하는 게 유물론이었음을 밝혀내는 건 마르크스를 복원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어느 순간에서나 혁명이 가능하다는 선험적인 주장혹 의지주의와 결별하는 것이고, 승리의 순간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성으로 비관하며, 설사 심판의 순간으로 여겨지는 국면에서도 고독할 이행의 여정을 생각하며 차가운 지성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건 오랫동안 혁명에 대해 품어왔던 낭만적 감성과 저 극단에 있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를 더욱 위축시키지만, 가장 원칙적이고 발본적인 부정으로서 혁명이라는 관점을 기각했을 때 취해야할 당연한 귀결이고, 현실적으로도 타당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삶의 고통 없기를 바라지 말것이고, 되려 이 순간의 해탈이야 말로 아편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부처의 가르침도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리라. 니체의 영원회귀 또한 다른 식으로 읽자면,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지 않을까.(물론, 니체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결코 이걸 얻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만 말이다.)

2010/06/21 00:27 2010/06/21 00:27

김연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우연과 우연이 만나면 필연이 되는걸까?

필연으로 보이는 것들은 실상 우연에 불과할 뿐.

어쩌면 우연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필연이었을지도.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자 했던 필연은 다른 우연으로 미끄러지고,

그 우연은 다시금 필연으로.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일 뿐,

내 마음도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서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그러나, 난

죽을만큼 노력하면 한덩이 진심은 전달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죽을만큼.

2010/05/08 00:16 2010/05/08 00:16

풀하우스 - 스티븐 제이 굴드

개체의 대표값을 정하기 위해 평균값을 선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최빈값, 중간값, 평균값을 구분해야 한다. 대칭적 분포에서는 세 값이 일치하지만 기울어진 곡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한 당연히 최대값은 개체를 대표할 수 없다.

 

개체의 분포에서 오른쪽 꼬리를 분리시켜 특정한 속성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 오른쪽 꼬리는 전체 분포 속에서 읽혀야 하고 그 속성은 전체에서 분리되어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전체 분포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에서 이 세계를 '풀하우스'라고 이름짓고 있다. 따라서 '진보'는 기존에 있던 개체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아니라 전체 개체의 분포가 함께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는 진보와 동의어가 아니다.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보를 향한 내재적인 경향 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개체의 평균 복잡성은 전체적으로 증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포가 왼쪽 벽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넓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왼쪽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빼먹으면 오른쪽으로의 분포 확장이 어떤 경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최소복잡성의 왼쪽 벽 바로 옆에서 박테리아 형태로 시작된 생명은 지금도 같은 위치에 남아있다. 무작위적인 운동의 결과인 오른쪽 꼬리는 전체 개체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동의 효과(굴드는 결과와 효과를 구분한다)이다.

그래서 굴드가 요약한 걸 옮기면,

1. 생명은 왼쪽 벽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2. 초기 박테리아 형태의 장기적인 안정성

3. 생명이 성공적으로 팽창해 감에 따라 분포 곡선은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갈 수 밖에 없다.

4. 분포 전체의 꼬리에 불과한 최대값으로 분포 전체의 성질을 규정하려는 것은 근시안적인 경향이다.

5. 원인은 벽과 변이의 확장이다.

6. 한 시스템에 진보를 슬그머니 끌어들이는 방법도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경험상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7. 오른쪽 꼬리에만 주목하는 편협한 시도를 결해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진보에 대한 절망을 제거했으면 하는 심리적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원하는 결론, 즉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 생물이 지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진화의 결과라는 결온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문화에서의 진화와 다윈적 진화는 서로 다르다.

- 문화는 어떤 방향성을 축적할 수 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문화에는 계통의 융합과 라마르크적 유전이 작용한다. 문화의 진화와 다윈의 진화를 서로 섞어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인식을 심는다.

 

변이와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하라.

 

정해진 중력의 법칠을 따라 이 행성이 끝없이 회전하는 동안, 아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경이로운 무한한 생물종들이 진화해 왔고, 진화하고 있고, 진화해 갈 것이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

옮긴이의 글에서

-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계(하이젠베르크의 '분과 전체')

- 단속평형론

- 도킨스와 굴드의 논쟁 : 삼각소간spandl은 원형 돔을 설계할 때 아치가 만나는 부분에 생긴 삼각형 공간을 말하는데 보통 장식적인 구조물로 꾸며 메워진다. 따라서 삼각소간은 건축상의 부차적 산물이다. 현재 장식적 용도로 훌륭하게 쓰이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생긴 것은 아니다. 굴드의 생각에 따르면 생물의 뇌도 삼각소간에 해당한다.

 

 

 

//

진화를 진보로 동일시하고, 인간을 진화의 목적지로 상정하는 태도는 사실 얼마나 같잖은가? 총개체수로 보나, 총량으로 보나, 역사로 보나, 영향으로 보나 인간은 박테리아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굴드는 이런 목적론에 대항해 싸우는 것을 관념론과 투쟁하는 유물론자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알튀세르가 떠오른다. ㅋ 이 책과 함께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이 쓴 다윈주의와 지적설계론 논쟁을 읽고 있는데, 포스터는 결정론에 굴복하기 보다는 신의 간섭을 택하겠다고 까지 말한다. ㅎㅎ 목적도 기원도 없는 역사.

 

다윈 200주년이라는데, 진화론에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

2010/03/24 14:31 2010/03/24 14:31

굿바이 솔로 & 호모에로스

며칠전 완전 의욕상실 상태로 뻗어서, TV에 지나가는 드라마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재밌네? 드라마 제목도 모르고 배우 이름도 몰라서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배우 한명과 온갖 조합을 다해 검색했더니 굿바이 솔로였다. 단막극 정도로 생각했더니, 16화나 되네..

어쨋든, 다 보았고, 재밌었다.

 

영숙: 사랑할땐 왜 그렇게 빈말들을 잘 하는지,

          순진한 애도 사기꾼처럼 말을 번지르르르.

수희: 적어도 그 순간엔 진실 아닌가?

영숙: 그럼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이런 대사들 참 좋다. ㅋ

 

내가 한 번쯤 내뱉었던 말들, 가졌던 마음들이 화면에 흐른다. 드라마 인물이야 당연히 현실이 아니겠지만,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판타지스럽지 않다. 곳곳에 내 모습이 투영된다. 대부분의 다른 드라마 속 사랑이야기들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감정이 아예 동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공감이 아니라, 과잉된 감정들에 취하는 것일 뿐이다.

보기에 아름답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야기들은, 되려 뱃속을 허기지게 만들고, 모든 인간을 외롭게 만들 뿐인데, 이 드라마는 그렇지 않았다. 노희경 작가와 박경리씨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너무 뜬금없나.(생각해보니, 다른 작가와 겹치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요즘 박경리씨 생각을 많이 해서 그렇게 느끼나 보다.. ㅎㅎ) 누구나 아픔 하나씩은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누구도 비범하지 않다는 것.

 

지금까지 내 연애는 수희나 건달 사이의 어디쯤이었을 것 같다. 민호, 미리와는 좀 다른 것 같아. 때론 모든 것 다 걸지만, 싫은 거 좋다고 하지는 못한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며칠전에 서점에 서서 대충 훑었던 고미숙씨의 '호모에로스'가 떠올랐다. 영원이란 말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기- 이런 책 내용은 나도, 항상 고민하는 주제이고, 그 말처럼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의 지향이다. 

 

누구를 만나든, 그 만남은 유일한 것이고, 특별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삶을 나누는 동안 만큼이라는 걸 안다. 그 만남의 길이를 연장하기 위해, 결혼을 택하고, 거기에 '운명'이란 수사를 붙이기도 하나본데, 난 그렇게 서로의 삶을 얽어 관계를 유지해야할만큼, 마음이 절실하지 않다. 누군들 절실할까? 그것도 결국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판타지가 소환한 허깨비. 그 순간순간이 운명일뿐, 난 당장 10년 뒤 내 모습을 기약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삶 전체를 기약하나. 혹여 서로의 삶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그저 '너만 있으면 돼'는 우습다. 내 삶의 방향이 세워지고, 너의 삶의 방향이 비슷한 즈음이면, 연인이자 동지의 관계로 살아가겠지-그래도, 또 누군가에게 찌릿해지는 걸 피할 수 있을까? 많은 예술가, 혁명가들의 연애가 그러했듯.

날내나는 내가 이렇게 주절거린 것들을 체화하는데 까지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처음 연애를 할 때에도,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마음이 변하는 걸 직접 겪어보니,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는 것과 체화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아득하다.

 

'호모에로스'의 글들은 드라마 속 영숙에게 입혀져있다. 대사처럼의 연애라면 참 편할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 속 대사처럼,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 순간에는 영원하길 바라며 사는 건 건전하다. 삶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호모에로스'의 글쓴이가 말하는연애도 애초 불가능한 형태에 불과할지 모르는데, 혹은 여러 다양한 관계중 하나일지 모르는데, 좋은 연애/나쁜 연애를 가르는 것 같아 책을 읽으며 좀 불편했다. 드라마에서는 현실의 연애를 보여주지만, 책은 어떤 것이 좋은 연애라고 가르친다. 안타까움 보다는 깔봄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드라마 영숙이 내 동경이지만, 어쨋든 영숙도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건달은 극중에서 끊임없이 주전부리를 하고 있다. 민호도 외로워졌을 때 주전부리를 한다. '호모에로스'에 외로우면 야식이나 야동에 빠진다는 내용이 있는게 떠오른다. 마치 노희경 작가가 그 책 읽고 대본 썼을 것 같단 느낌이 들정도로 책에 있는 내용이 드라마에 보인다. 그런데 드라마가 책보다 2년은 빠르다.; 비슷하게 경험하고 살았나?)

 

 

 

그리고 드라마가 좋았던 건, 누군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줘서다. '사랑'을 남녀간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만 그리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끊임없이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상처를 서로 내보이며 치유하고 치유받는다. 특히 그 역할을 도맡는 게 영미할머니인데, 눈이 촉촉하지 않은 장면이 별로 없다.ㅋ 평생 그런 장면을 몇번이나 겪을까마는, 그 순간의 감정들이 생생해져 가슴이 따뜻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 참 싫어하는데, 드라마 속 그 인물은 미워지지 않았다. 이해해달라고 칭얼거리는 통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도 아프겠구나 싶었다. 미워지지 않게 인물을 만들어 놓은 것도 놀라워. 하지만, 할 말은 정확히 한다.

 

왜 세상 사람 모두가 널 이해해야 되는데? 세상 너만 힘든거 아냐.
너는 왜 언제나 너만 아퍼, 혼자 외로운 척하지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그렇다고 아직은, 내가 잘 안아주는 것도, 다른 이에게 보듬어 달라고 열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력하고 있다. 동정받는 게 두렵고, 또 나의 위로는 동정이 될까봐 망설인다. 그 두려움에, 나를 내보이지 못하면, 나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보듬을 수 없다. 진심을 다해 말하면, 위로가 위로로 전달된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기 위해 때론 죽을 힘을 다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배우고 있다.(위로가 이럴진대, 사과는 어떠한가.)

 

나, 매일매일 기도해,

이 세상 모든 상처받고 힘든 사람들에게,
등 뒤에서 안아줄 사람, 단 한사람이라도 있기를

 

그 단 한사람을 만나는 게 참 어렵다. ㅎㅎ, 단 한사람이라도 있기를. 내가 누군가에게 그 한사람이 될 수 있기를.

 

대사 옮겨 적고 보니, 극 초반부와 마지막회 밖에 없네. 가운데에도 주옥같은 말들이 많았는데, 어떤 내용이이었는지도 잘 생각이 안난다. 옮겨온 대사도 어떤 내용이었는지만 간신히 기억했뒀다, 게시판을 뒤져 찾아 옮겨온 것. 이런 것들을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해내는 사람들 참 부럽고 신기하다. ㅠ

 

그런데 이 드라마도 초반, 중반 까지 참 맘에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가니 내용이 좀 억지스러워진다. 뭐 그래도 좋았다.

 

 

 

 

노희경 작가의 아래 글을 읽은 적 있는데, 이 드라마에 그대로 녹여놓은 것 같다.

 

내 순정에 다쳤을 첫사랑 그대에게.

 

  이제야 그대에 대한 무수한 원망을 내려놓고 비로소 참 많이 미안했었다. 참회할 용기가 난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난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자만이 뿌리깊었나, 아니다 자기연민이 독했다. 나이가 들면서 늘어가는 건 주름만이 아니다. 살면서 홍역처럼 반드시 거쳐야 할 경험과 남과 별다르지 않게 감당했어야 할 상처들이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대와 주고받았던 모든 것들이 마냥 별스러워 엄살인 줄도 모르고 악을 쓰듯 독하게 킁킁거렸다. 그때 그대는 참으로 냉정했었다. 원망스러웠던 그 순간이 이제야 맞춤맞은 순리였음을 알겠다.

 

  나를 버려주어 고맙다, 그대.

 

  순간 이 글을 쓰면서 겁이 난다. 나만큼 설레지 않고 나만큼 애타하지 않고 나만큼 절절하지 않은 그대에게 나는 늘 이런식으로 상처를 주었다. 잘났나봐, 무시하나봐, 그런 직설을 내려놓고, '고맙네, 정말' 웃으며 칼 주는. 꼬여진 실타래처럼 정말 난감하게 엉켜서 그대를 몰아붙였던 한때를 그대여 지금은 떠올리지 마라. 그리하여 이 글을 읽지 않고 서둘러 덮지 마라. 세월이 변하듯 사람도 변했다. 그대, 이제 엉킬 기운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들어라, 고맙다, 정말 버려주어.

 

  그대와 헤어져 20년이 흘렀다.

 

  그 20년의 세월 안에서 나는 정말 뚜렷이 알아차린 것이 있다. 진실이나 사실이란 말은 함부로 써선 안 된다는 것, 모든 기억은 내 편의대로 조작될 수 있다는 것. 하여, 이제 내가 말하려는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는 어쩌면 또다시 나만의 기억일 뿐 그대와는 무관한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혹여 내 서술이 그대의 마음과 아랑곳없더라도 웃으며 봐달라. 이 사람은 이리 생각했었구나 하고.

 

  그대가 나를 일방적으로 버린 스무 살 겨울,

  나는 그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었다.

 

  매일 전화하고 하루걸러 한 번씩 만나고 서로의 속살도 아닌 드러난 살이 스칠 때에도 머리끝까지 삐죽하던 그때, 그대는 돌연 모든 걸 멈추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편지해도 답이 없고, 만나도 확연히 시들해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내 드라마 주인공은 참으로 상대에게 용기 내어 잘도 묻는데 나는 그대에게 묻지 못했다. 내 잘못을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어리석다. 사랑한 대상을 미워할 대상으로 바꿀 오기는 있으면서.

 

  모든 겨울처럼 밤이 깊은 겨울이었다. 며칠째 몇 주째 연락이 안 되던 그대를 찾아 나섰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얇은 추리닝 바람이었다. 20년간 나는 그때의 내 행색을 다급함이라고 애절함이라고 포장했지만, 이제야 인정한다.

 

  상처주고 싶었다.

 

  니는 이렇게 너보다 순정이 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버렸다.

그렇다면 무참히 무너져주겠다. 내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할 네가 기어이 날 그냥 스쳐만 지나가겠다고, 네가 상처준 어린 이사람을 똑똑히 기억하렴. 나는 눈 오는 그대의 집 앞에서 밤을새워 오들거렸다. 그대는 이층 창문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 커튼을 쳤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대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대학을 갔어.

  말해주고 싶었어.

  뚝.

 

  그대 목소리는 나데 대한 죄책감으로 작고 의기소침했다. 반면 내 목소리는 얼마나 당찼던가.

 

  잘됐군.

 

  웃음이 난다. 좀 더 나중까지 사랑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유세라고. 이후의 내 행동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그대랑 헤어지고 나는 이내 A, B를 만나놓고, 7,8년 뒤 다시 그대를 만서서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나"라고 말했던 거 같다. 그때 그대는 참으로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책했었다.

 

  왜 너는 그렇게 순정적인데,

  나는 이 모양이냐고,

  지금 사랑하는 누군가와도 나는 또 시들해진다고.

 

  나는 기뻤다.

 

  그대가 나랑 헤어져 계속 휘청대서, 그리고 내가 순정적으로 보여서, 그리고 다시 5,6년 뒤, 그대를 보았다. 그대는 여전히 휘청대고 여전히 나에게 미안해하고 여전히 또 누군가와 시들한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제는 우린 친구야 하며 내가 그대를 극복하고 우정으로 승화시킨 단계를 서술하며 넌 왜 그렇게 살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없어 하며 훈계하고 의기양양했던 거 같은데 기억하는지. 그리고 다시 5,6년이 흘러 지금이다.

 

  미안하다, 그대여.

 

  이제야 고백건대, 나는 그대에게 바쳤던 순정을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접었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냐고? 나는 마음이 변하는 게 큰 죄라 생각했다. 그 어리석은 생각은 참으로 오래갔다. 그래서 그대를 괴롭히고 그대보다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대와 헤어지고 누군가를 다시 만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그대에게 바쳤던 순정만을 내세우며 유치한 대사를 남발했다.

 

  나에겐 네 자리가 없어

 

  젠장이다.

  그러면서 왜 그들과 여행은 가고, 설레는 눈빛을 주고받고, 짜릿하기까지 했었는지.

  그대 나는 그런 아이였다.

 

  그대여.

 

  이제 부디 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 사랑에 배신은 없다. 사랑이 거래가 아닌 이상, 둘 중 한 사람이 변하면 자연 그 관계는 깨어져야 옳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게 후회로 남으면 다음 사랑에선 조금 마음을 다잡아볼 일이 있을 뿐, 죄의식은 버려라. 이미 설레지도 아리지도 않은 애인을 어찌 옆에 두겠느냐. 마흔에도 힘든 일을 비리디 비린 스무 살에, 가당치 않은 일이다. 가당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오십보백보다. 더 사랑했다 한들 한 계절 두 계절이고, 일찍 변했다 한들 평생에 견주면 찰나일 뿐이다. 모두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다 괜찮다.

 

  이제 나는 다시 그대와 조우할 날을 기다린다. 그때는 그대와 웃으며 순정을 포장한 가혹한 내 행동들을 맘 아프게가 아닌 웃으며 나눌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만약 볼 수 없다면, 잘 살아라, 그대.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나는 행복하다.

 

( 노희경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2010/02/14 02:16 2010/02/14 02:16

김약국의 딸들

읽으려고 맘먹고 일은 건 아니고, 시험공부 하기 싫어서 딴 짓하다 텍스트 파일로 있는 걸 핸드폰에 받아서 읽었다. 하필이면 자기전에 농땡이 피울 궁리를 하다 붙잡고 읽은 거여서 새벽 4시가 넘어 잤더니 다음날까지 엉망진창이었다. -_-

 

특별한 갈등구도도 없고, 문체가 구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주제나 사건의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한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증을 만들어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의 이야기여서 그런 것 같다.

 

'토지'에서처럼 '김약국의 딸들'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의 폭이 매우 넓다. 하지만 숫자로 바꿔놓고 보면 100년이 채 안되는 시간이고 수백 수천년 쯤은 쉽사리 넘나드는 현대 소설에 비해 시간의 폭이 넓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폭이 넓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속 시간대 안에 갸늠할 수 있는 3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에 500년, 1000년이었다면 내가 동감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손에 잡히는 규모의 시간대를 한 이야기 안에 엮어놓는 데에서 그 시간대가 위압감 있게 다가온다. 역사 앞에 섰을 때 겸손해지는 것도 그 역사가 갸늠이 가능할 때이다. 그 역사 안에 살았을 사람들의 삶이 두리뭉실하나마 만져질 수 있을 것 같을 때.

 

이땅에는 예전에도,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네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아내면 그 사람수만큼 소설들이 나올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하고 살다가,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으면 이전에 살았을 불가사의한 숫자의 생명들이 머리속에 펼쳐진다. 이럴 때 느끼는 어떤 감정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삶을 담담하게 대할 수 있게도 해준다.

 

박경리의 '토지'는 정작 토지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이 중심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정말 '토지'에 대해 쓰려했다면 시점이 달랐어야 했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그 땐 '토지'를 그저 재밌게 읽기만 했던 터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고, 대학교 와서는 '토지'를 다시 펼쳐볼 염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은 기억만 해두던 터였다. 그런데 '김약국의 딸들'을 읽다 보니 좀 느껴지는 게 있다. '평범'이라고 상정되어진 모델에 맞게 살아간다 해도 그것이 결코 평범한 삶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덜중요할 건 없지만, 박경리의 촛점은 그렇게 무난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무난해 보이는 이들의 삶이 결코 무난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중립적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평균적인 아픔들. '모든 사람이 저 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요'라는 말 앞에서 아픔의 불균등함은 외발로 서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형태.

2009/11/28 21:49 2009/11/28 2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