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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노조에 맞서는 세계의 계급투쟁
(1) 터키
터키에서는 총파업을 하거나 다른 노동자와 연대파업을 하는 것이 불법이다. 지난 연대파업 중 가장 최근의 것은 1991년 광부 파업에 대한 지지 파업이었다. 2010년 2월 4일, 사유화된 테켈(Tekel) 담배회사의 노동자와 연대하는 노동조합의 하루 총파업이 있었다. 테켈 노동자들은 2009년 중순부터 앙카라에서 항의해 왔다.
노조 지도자들은 ‘파업’을 말하지 않고 ‘총행동’을 말하며, ‘일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고 전국적인 시위가 있었다.
2009년 12월 14일, 테켈의 수천 노동자들이 터키 십여 곳의 도시로부터 앙카라로 가기 위해 그들의 집과 가족을 떠났다. 노동자들의 행진은 자본주의 질서가 강제한 끔찍한 조건에 맞서는 투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들의 투쟁은 터키 정부의 4-C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이 정책은 사유화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데 따른 조치다. 이 정책을 통하여 국가는 임금 삭감 이외에도 공공부문 노동자를 다른 부문으로 이전시킬 수 있는 등, 노동자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갖게 되었다(노동시간과 임금에 대한 자의적 결정 등).
2009년 12월 5일, 터키 수상이 참석한 개회식에 테켈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 참여하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정부를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4-C 정책을 강변하는 수상의 연설에 분노했다. 이들이 속해 있는 노조(주류, 담배 노조)는 앙카라로 모일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심각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수도 앙카라로 모이기 위해 도로를 점거했다. 폭동진압경찰은 테켈 공장이 집중되어 있는 쿠르드 지역 도시로부터 나오는 노동자들을 막았다. 그러나 서부, 지중해, 흑해 지역의 노동자들은 통과시켜서 계급운동을 인종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도록 했다. 그러나 쿠르드 지역 밖의 노동자들은 경찰의 이러한 조치와 싸우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수도 앙카라로 모이도록 하는 데 단결력을 보였다.
12월 15일, 테켈 노동자들은 앙카라의 ‘정의발전당’ 중앙당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경찰의 가장 무자비한 공격은 12월 17일에 있었다. 경찰 진압에 흩어진 노동자들은 노조 관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조직하여 ‘터키노총’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비공인 파업-Wildcat 투쟁). 테켈 노동자와 노조 사이의 투쟁은 2010년 1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앙카라의 노동계급과 노동자 배경을 지닌 학생들은 테켈 노동자들이 머물 곳을 찾는 등,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동자 투사들은 ‘주류, 담배 노조’와 ‘터키노총’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았고, 그들의 요구를 노조에 전달할 목적으로 파업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의 요구 중에는 노동자들이 ‘터키노총’ 앞에 파업 텐트를 치고, 집단적으로 새해를 축하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또한 테켈 노동자들은 똑같은 4-C 조건에 놓인 설탕공장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을 설명하기 위해 인근과 대학에 초청받았다. ‘터키노총’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테켈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투쟁을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비밀투표에서 99%가 투쟁을 택했다. 그동안 노조가 제시한 행동계획을 토론했는데, 1월 15일 이후 3일간 농성, 3일간 단식 파업, 3일간 죽음의 단식이라는 세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단식 파업이 좋은 생각이라고 보았다.
농성과 시위가 진행되고 수만의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었는데, 터키노총은 테켈 노동자들을 연단으로부터 멀리 배치하고, 연단 앞에는 금속노동자들을 배치시켰다. 테켈 노동자들은 터키노총 위원장의 연설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연단으로 밀치고 나가 연단을 점거하고, 그들의 요구를 외쳤다. 노조 지도부에서 확성기를 껐지만, 테켈 노동자들은 시위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요구를 전달했다. 노조는 노동자들끼리, 그리고 학생들과 서로 싸우도록 자극했지만 150여 명이 터키노총 앞의 관료적 봉쇄를 뚫고 건물을 점거했다.
여러 도시에서 온 노동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총회는 열리지 못했지만, 비공식적인 대중 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쿠르드 노동자와 터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정권의 온갖 책동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인종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항하는 단결을 보여주었다. 테켈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들을 지원한 소방대원들에게도 크게 기여했다.
(2) 그리스
1년 전, 청년 아나키스트를 경찰이 살해하자 그리스 시가에서 3주간의 대중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거리와 학교에서의 투쟁은 작업장에서의 투쟁과 연결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오직 초등학교 교사들의 하루 파업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 노동자들의 행동은 저항운동을 넘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노동부 장관은 유로권에서 그리스를 축출하겠다고 위협하며 국가 부채위기를 해결하려는 조치가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는 시위, 집회, 파업의 자유를 보호하는 헌법 조항을 유예할 수 있는 국가비상통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을 통합시키려 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2012년까지 예산을 12.7%에서 2.8%로 삭감하려는(노동계급에 대한 공격) ‘개혁’이 발표되기 전에도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있었다. 부두 노동자, 통신 노동자, 쓰레기 수거자, 의사, 간호사,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사, 택시 기사, 철강 노동자,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겉으로는 다른 이유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노동자가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강제하는 국가와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것이었다. (EU가 승인한) 내핍 프로그램이 실행되기 전, 그리스 수상은 그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0년 1월 29일 구체적 세칙이 발표되기 전, 아테네의 소방대원과 다른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성난 시위가 있었다.
정부의 3개년 계획에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과 10% 수당 삭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5%~15%의 임금 삭감과 맞먹는다. 퇴직하는 공무원은 대체되지 않고, 퇴직연령도 연금비용을 줄이기 위해 연장하는 계획도 있다.
그리스 노조는 투쟁을 분리시키고 있다. 2월 4일~5일 항구와 국경을 폐쇄하는 세관원과 세무원의 48시간 공식 파업이 있었는데, 농민은 폐쇄 조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파업의 ‘기대되는 반발’은 공공부문 파업 계획과 의회국의 행진을 포함하고 있었다. 2월 10일 Adedy 노조와 연금 공격에 대한 항의, 2월 11일 스탈린주의 노조의 파업, 2월 24일 2백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가장 큰 노조 GSEE의 민간부문 파업 같은 것이다.
노동계급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분리되면, 그리스 정부를 항복시키지 못한다. 실제로 노조는 스탈린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노동계급의 분노가 커지자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쇼를 알아보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노조는 노동자들이 희생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들의 반발도 고려해야만 한다.
노동자투쟁 발전의 미래를 볼 때, 노동자들은 노조뿐만 아니라 ‘잘못된 친구들’을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계급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지닌 ‘그리스 공산당’은 1년 전 시위자를 ‘어두운 외부 세력’의 비밀요원으로 부른 바 있다. 파시스트와 우익에 대항하고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라고 노동자를 모으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다. 노조와 그 동맹 세력은 그리스 주변 국가인 터키에서의 파업이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자신들의 과제를 그리스 노동자만의 문제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리스 상황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공공건물을 폭파하는 다양한 무장그룹의 확산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국가의 억압만 부추길 뿐이지 주류 투쟁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불꽃 세포의 음모’, ‘테러주의자의 게릴라 그룹’, ‘허무주의 분파’ 같은 이름의 그룹들은 노동계급에게 무엇도 줄 수 없다. 노동자들은 집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급진주의자가 설치한 폭탄을 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 속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조직을 발전시키면서 계급의 단결, 의식, 그리고 자신감을 쌓아간다.
(3) 알제리
1월 동안 알제리에서는 수많은 파업과 거리시위가 있었다. 동알제리 아바나의 실업 노동자, 모든 지역의 빈민 시위, 도시 외곽 산업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은 관제보도를 통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언제나 노동운동의 요구인 임금, 연금, 강제 휴직에 대한 것들이다. 2009년 말 정부는 노동자들이 조기 퇴직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서 만 명 이상이 파업했고, 이는 불꽃처럼 번졌다. 노동자들은 도심에서 폭동진압경찰과 충돌했으나 노조는 이를 방조했다. 새로운 노사정 합의가 법제화된 이후 알제리노총 위원장은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4) 스페인
비고에서는 6만의 실업자가 생겼는데, 2009년에 엔지니어링 부문에서만 8천의 실업 노동자가 생겼다. 발사에서는 약 7백만 명의 휴직 노동자가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의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투쟁했는데,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실업 노동자가 외국 노동자의 고용에 반대한다”며 악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로 노동계급을 분리시키는 책동에 맞서 싸우며, 실업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 사이의 연대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2010년 3월 2일).
(5) 인도
2009년 10월 18일, 리코자동차 노동자들이 10월 3일부터 시작한 파업을 폭력으로 중단시키려는 파업 파괴자들에 맞서 투쟁했다. 파업 파괴자들과의 충돌로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를 계기로 구르가온과 마네사 지역 공업벨트의 3만 노동자가 분노하여 투쟁이 확대되었고, 10월 20일에는 두 도시를 폐쇄하면서 10만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했다. 노조는 이 투쟁을 노조권리의 방어 투쟁으로 왜곡하려 했다.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번역 left communist group (http://cafe.daum.net/leftcommu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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